기자수첩

하기의 명륜관, 성균관의 명륜당

  •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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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와 면한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북쪽에 하기(萩)라는 도시가 있다. 인구 4만 명이 안 되는 작은 도시다.
 
  하기시 중앙에는 명륜관(明倫館·메이린칸)이라는 사적(史蹟)이 있다. 18세기 초 설립된, 사무라이의 자제들을 가르치는 조슈번(長州蕃)의 번교(藩校·번의 공립학교)다. 여기서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스승’이라고 하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병학(兵學)을 가르쳤고,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같은 유신의 주요 인물들이 공부했다. 구내에는 명륜관 시절 무도장(武道場)이었던 유비관(有備館)이라는 건물도 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의 그 유비다.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구내에는 ‘명륜당(明倫堂)’이 있다. 조선시대 성균관이 ‘국학(國學)’이던 시절에 지은 건물이다. 명륜관·명륜당의 ‘명륜’이라는 말은 《맹자(孟子)》 ‘등문공편(滕文公篇)’에 나오는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함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국인 입장에서 하기는 ‘침략의 원흉’들을 배출한 곳이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 사이에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백수십 년 전 우리는 무얼 잘못했고 일본인들은 무엇을 잘했기에 이후의 역사가 그렇게 달라졌는가’를 반추(反芻)해 보면서 대한민국의 앞날을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2025년 11월 말, 하기를 다시 찾았다. 명륜관 앞에서 속이 쓰렸다. ‘백수십 년 전 우리 명륜당에서는 망국(亡國)의 선비들을 길러 냈고, 이곳 명륜관에서는 나라를 일으킨 인재들을 길러 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난 70여 년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거대한 쓰나미가 밀려오고 있다. 지금 우리는 백수십 년 전 나라를 망하게 했던 못난 조상들보다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 우리는 제대로 ‘유비(有備)’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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