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6년, 미국 독립 선언과 《국부론》 출간은 ‘국가에 맞선 자유 선언’이라는 점에서 통해
⊙ 국가의 특정 산업 육성, 노동·부동산 규제, 확장적 재정·통화 정책 등 오늘날 한국 현실 경고
⊙ 자비심이 아니라 자기 이익(self-interest)에 호소
⊙ ‘타인의 자비와 시혜에 기대는 사회는 인간의 존엄이 사라진 사회’라고 경고
⊙ “나는 공공선을 위해 사업하는 척하는 사람이 이루어놓은 좋은 일을 많이 알지 못한다”
⊙ 중상주의 비판… 국부를 ‘금은의 축적’이 아닌 ‘한 사회의 연간 노동 생산물’로 정의
⊙ “공공부채는 ‘미래 세대의 소득을 현재로 끌어다 쓰는 것’”
權赫喆
1961년생. 성균관대 행정학과 졸업, 독일 쾰른대 대학원 경제학 석·박사 / 자유기업원 법경제실장, 자유경제원 전략실장,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자유민주연구학회장, 자유기업원 부원장 역임. 現 자유시장연구소장, 코리아리버티포럼 대표 / 저서 《경제학 제대로 이해하기》 《자유주의 사상가 12인의 위대한 선택》(공저), 《세계 경제를 바꾼 사건들 50》(공저), 《자본주의 오해와 진실》(공저), 《미시정치》(역서), 《대중을 위한 경제학》(역서)
⊙ 국가의 특정 산업 육성, 노동·부동산 규제, 확장적 재정·통화 정책 등 오늘날 한국 현실 경고
⊙ 자비심이 아니라 자기 이익(self-interest)에 호소
⊙ ‘타인의 자비와 시혜에 기대는 사회는 인간의 존엄이 사라진 사회’라고 경고
⊙ “나는 공공선을 위해 사업하는 척하는 사람이 이루어놓은 좋은 일을 많이 알지 못한다”
⊙ 중상주의 비판… 국부를 ‘금은의 축적’이 아닌 ‘한 사회의 연간 노동 생산물’로 정의
⊙ “공공부채는 ‘미래 세대의 소득을 현재로 끌어다 쓰는 것’”
權赫喆
1961년생. 성균관대 행정학과 졸업, 독일 쾰른대 대학원 경제학 석·박사 / 자유기업원 법경제실장, 자유경제원 전략실장,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자유민주연구학회장, 자유기업원 부원장 역임. 現 자유시장연구소장, 코리아리버티포럼 대표 / 저서 《경제학 제대로 이해하기》 《자유주의 사상가 12인의 위대한 선택》(공저), 《세계 경제를 바꾼 사건들 50》(공저), 《자본주의 오해와 진실》(공저), 《미시정치》(역서), 《대중을 위한 경제학》(역서)
두 개의 사건은 사상적으로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공통의 물음은 ‘인간의 자유를 위협하는 것은 무엇인가?’다. 이것은 다름 아닌 국가 또는 정치 권력이라는 것이 결론이다.
이에 따라 독립 선언은, 권력은 자연권(natural rights) 보호를 위해서만 정당화되며 이 목적에서 벗어난 자의적(恣意的)이고 과도한 권력 행사에 대한 저항과 혁명은 정당하다고 선언한다. 예컨대 국가는 필요악(必要惡)이며, 정치 권력은 항상 의심의 대상으로 끊임없이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부론》은 국가가 경제 질서를 ‘설계’할 능력도 자격도 없으며, 그럴 경우 경제는 왜곡과 비효율에 빠져 성장과 번영을 이룰 수 없다고 본다. 시장경제 질서는 권력 없이도 작동하며 자유로운 행위들의 결과 자생적(自生的)으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의도치 않게 자유와 번영을 안겨준다는 것이다.
이렇듯, 두 사건의 사상적 연결점에는 인간의 자유를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자유주의(liberalism)가 자리하고 있다. 미국 독립 선언은 자유주의를 정치적 원리로, 《국부론》은 자유주의를 경제 질서의 원리로 체계화했다. 결국 이 두 사건이 있었던 1776년은 자유주의가 정치와 경제의 전(全) 영역에서 자신을 하나의 문명 원리로 선언한 해라는 평가를 받는다.
탐욕과 이기심은 다르다
유명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한다. 심지어 경제학을 전공한 학자 중에서도 《국부론》을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경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국부론》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한 번쯤은 접해보았을 것이다. 동시에 이 구절은 그만큼 많은 오해를 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가 저녁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자기 이익에 대한 그들의 고려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자비심이 아니라 그들의 자기 이익에 호소하며,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득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즉 경제활동에서 인간의 행동을 추동(推動)하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利己心)이지 타인(他人)에 대한 자비나 동정심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문장에 대한 오해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스미스가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전제했고, 이기심을 미덕으로 찬양했다는 것이다.
흔히 이기심을 탐욕(greed)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탐욕과 이기심은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탐욕은 정당하게는 가질 수 없는 무언가를 많이 가지려는 것으로 타인의 피해를 개의치 않는 과도한 욕망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탐욕은 도둑질이나 강도, 사기, 협박 등을 통해 자신이 당초 얻을 수 없는 것을 얻고자 하거나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애덤 스미스가 예로 들고 있는 정육점 주인이나 빵집 주인은 강도나 사기, 도둑질 등을 통해서가 아니라 손님들에게 저녁거리를 마련해 주고, 그에 대한 합당한 대가로 자발적으로 건네주는 돈을 얻는 것이다.
자기 이익 추구에 대해 오해하는 또 다른 이유는 시장과 거래라는 제도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거래가 이루어지는 근본 동인(動因)은 거래 참여자의 상호 이익이다. 간단히 말해, 상대가 싫거나 거래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래하지 않으면 된다. 거래가 이루어지는 이유는 그것이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장에서 가격과 품질, 거래 여부 등의 선택권은 참여자 모두에게 있고, 시장에서의 속임수는 평판을 잃게 만들며, 시장에서의 경쟁은 가격을 제한한다. 즉 스미스가 말하는 자기 이익 추구는 탐욕의 해방이 아니라, 시장에서 자생적으로 생성되는 일정한 규칙 속에서만 작동하게 된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자선은 권력이 될 수 있다
자비심에 의존하는 사회에 대한 스미스의 경고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스미스는 타인의 자비에 기대게 되면 종속되게 되고, 시혜(施惠)는 시혜를 베푸는 사람이 언제든 거둘 수 있어 자선은 권력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스미스는 타인의 자비와 시혜에 기대는 사회의 모습은 인간의 존엄이 사라진 사회라며 이렇게 표현했다.
“애완용 개 스패니얼은 얻어먹고 싶을 때 온갖 아양을 떨면서 저녁 중인 주인의 주의를 끌려고 한다. 사람은 때때로 다른 사람에게 이와 같은 수법을 사용한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가 바라는 바대로 행하도록 할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을 때 사람은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아첨과 아양을 떨게 된다.”
이어 그는 “존엄한 사회란 타인의 선의(善意)가 아니라 권리와 교환에 의해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고 말한다. 결국, 자기 이익 추구에 기반한 사회는 타인의 자비와 시혜로부터 개인을 해방하고 당당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자유의 조건이다.
이처럼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타인의 자비나 시혜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이익 추구와 교환 및 거래에 기반한 질서를 중시한 것은 소규모 공동체에서 거대 상업 사회로 이행하는 문명사적 전환 속에서 ‘전혀 모르는 타인 간의 협력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분석한 결과였다.
가족, 친구, 친지, 씨족이나 부족 등 구성원에 관해 세세히 알 수 있는 대면(對面) 사회인 소규모 공동체에서는 우정과 애정이 인간관계를 지배하고 유대감과 이타심이 발휘될 가능성이 크다. 한데 사회의 규모가 커지면 그만큼 타인의 개별적 사정을 알지 못하게 되고 이에 따라 유대감과 이타심이 발휘될 가능성도 적어진다. 따라서 익명 사회인 거대 사회에서 협력을 유지하는 방식은 소규모 공동체에서의 협력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스미스가 ‘네가 원하는 것을 줄 테니,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는 교환의 언어를 사용한 것은 이렇게 해야만 거대 사회에서의 타인 간의 협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손’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도 거대 사회의 작동 원리에 대한 냉철한 관찰의 결과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개인들의 이기적인 행동이 시장에서 맞물리면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의도치 않게 사회적으로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빵집 주인과 정육점 주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물건을 제공하지만, 이것이 결국 소비자들의 저녁을 해결해 주고 그들의 후생(厚生)을 증진시킨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은 이런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에서의 자동적인 조정 메커니즘을 의미한다. 어떤 상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 가격이 오른다. 가격 상승은 생산자에게 더 많이 만들라는 신호로 작동하고, 자본과 노동은 자연스럽게 그 분야로 이동한다. 공급이 늘면 가격은 다시 내려간다. 반대로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상품은 팔리지 않고, 가격 하락과 손실을 통해 생산 축소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즉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으로 사람들이 가장 절실히 원하는 물건과 서비스가 제공되도록 하고, 귀중한 자원이 사회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곳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한다.
스미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단지 자신의 이득만을 추구할 뿐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도 그는 다른 많은 경우에서처럼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전혀 자신의 의도에 들어 있지 않은 목표를 추구하게 된다. 더욱이 그 목표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항상 사회에 더 많은 해가 되지는 않는다.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훨씬 더 효과적으로 사회의 이익을 증가시킨다.”
‘보이지 않는 손’에서 중요한 점은 이 과정 어디에도 전체를 설계하거나 조정하는 지휘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오직 가격이라는 신호와 이에 대응하는 개인들의 판단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처럼 수많은 선택이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그 능력을 드러낸다.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손은 국가의 명령이나 설계처럼 눈에 ‘보이는 손’이 아니다. 스미스는 국가나 정치인이 명령 등을 통해 의식적으로 사회 전체를 설계하고 조정하려는 시도가 쓸데없는 짓일 뿐 아니라 오히려 사회에 해악(害惡)을 끼친다고 보았다. 그는 “나는 공공선(公共善)을 위해 사업을 하는 척하는 사람이 이루어놓은 좋은 일을 결코 많이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사회의 복잡성과 인간 이성(理性)의 한계를 과소평가하고 오만을 부리는 것에 대한 조용하고도 냉정한 경고다.
애덤 스미스의 생애
프랑스의 중농주의 경제학자 프랑소아 케네.애덤 스미스는 1723년 스코틀랜드 동부의 항구 도시 커콜디(Kirkcaldy)에서 태어났다. 세관원이었던 아버지는 스미스 출생 직전 사망했고, 어머니 밑에서 성장, 어머니와의 유대는 평생 지속됐다. 커콜디는 런던이나 파리 같은 대도시는 아니었지만, 상업과 교역, 수공업이 성행한 도시였다. 스미스는 이곳에서 국부(國富)를 금고 속의 금덩이나 숫자가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내고 교환하는 생활의 흐름으로 체감하며 성장했다.
그는 14세에 글래스고대(University of Glasgow)에 입학하여 프랜시스 허치슨에게서 도덕철학을 배웠다. 당시 도덕철학은 인간의 도덕 감정, 법과 정의(正義), 정치 질서, 그리고 경제 문제까지 포괄하는 학문이었다. 스미스에게 경제는 처음부터 독립된 영역이 아니라,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회 질서는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일부였다.
스미스의 어머니는 스미스가 성공회 목사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성공회 성직자 양성을 목적으로 한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로 유학을 떠났으나, 그곳의 형편없는 교육 수준과 낡은 관행에 크게 실망하고 6년 후 에든버러로 돌아왔다. 옥스퍼드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권위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었고, 《국부론》에서 그가 보여주는 강력한 반독점·반특권 성향은 이 시기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어머니의 바람과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공회가 아닌 장로교의 열렬한 신자로 남았다.
1750년 스미스는 자신의 모교인 글래스고대에서 논리학 교수 직을 얻었고, 2년 후에는 마침내 사랑하는 스승인 허치슨의 도덕철학 교수 직을 승계하여 이후 12년 동안 강의를 이어갔다. 그가 한 강의는 매우 인기가 많았는데, 그의 강조점은 자연적 자유의 체계, 자연법 체계와 불간섭주의(laissez-faire)에 대한 것이었다. 이 시기의 강의가 훗날 그의 두 편의 걸작인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토대가 되었다. 실제로는, 강의 때 보여주었던 관점이 《국부론》에서 보여준 관점에 비해 훨씬 더 자유주의적이고 불간섭주의적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1759년 《도덕감정론》이 발간되면서 명성이 높아진 스미스는 1764년 젊은 부클루치 공작(Duke of Buccleuch)의 가정교사가 되어 그와 함께 프랑스에서 3년을 지낸다. 이때 그는 자유주의자인 튀르고(Turgot), 중농학파인 케네(Quesnay) 등과 폭넓게 교류하였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후 스미스는 1776년 드디어 《국부론》을 출간했다. 이후 말년에는 스코틀랜드 세관위원으로 관세 및 무역 실무를 담당하다가 1790년 사망했다.
노동 분업과 전문화
애덤 스미스는 핀 공장을 예로 들어 노동 분업의 중요성을 설명했다.스미스의 《국부론》에 대한 이야기는 노동 분업(分業)과 전문화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적절하다. 실제로 스미스 자신은 《국부론》의 시작을 노동 분업에서부터 했으며, 또한 분업이 《국부론》 전체를 관통하는 출발점이자 분석의 열쇠이기도 하다. 그는 한 사회의 부가 단순히 금은(金銀)의 축적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생산성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증대되는가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생산성 증대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 바로 노동 분업과 전문화라고 본 것이다.
스미스가 예로 들었던 핀 공장 사례는 유명하다. 그는 10명의 노동자 각각이 핀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 경우 하루에 한 개도 제대로 생산하기 어려울 것이고 분명히 20개 이상은 만들지 못할 것이지만, 공정을 세분화해 각 노동자가 특정 작업만 반복하도록 하면 동일한 인원으로 하루 4만8000개의 핀을 생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노동 분업이 각 노동자의 생산성을 크게 증가시키는 것이다. 나아가 스미스는 노동 분업이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이유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숙련의 축적이다. 동일한 작업을 반복함으로써 노동자는 더 빠르고 정확해진다.
둘째, 작업 전환 비용의 제거다. 여러 일을 오가며 하게 되면 시간이 소요되고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셋째, 기계와 도구의 발명 촉진이다. 단순화된 공정은 자동화와 기술 혁신을 유도한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맞물리며 노동의 생산성을 지속적으로 끌어올린다.
중요한 것은 스미스가 분업과 전문화를 국가 설계의 산물로 본 것이 아니라, 각자가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다만, 이 분업의 범위는 무한하지 않으며, “분업의 정도는 시장의 크기에 의해 제한된다”고 보았다. 즉 교환과 시장이 확대될수록 분업은 심화되고, 분업의 심화는 다시 생산성과 부의 증가로 이어진다.
스미스의 이러한 주장은 ‘자급자족(自給自足)’을 외치는 폐쇄경제와 ‘무역의 자유’를 외치는 개방경제의 성장과 번영의 격차를 통해 역사적·경험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한국과 미국을 위시한 싱가포르, 홍콩, 독일 등은 성장률이 높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3만5000~9만 달러에 달한다. 반면에 북한이나 수단 같은 국가들의 경우 성장률은 낮고 1인당 GDP는 600~1500달러 미만에 불과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반도의 야간 위성사진에서 드러나는 남북한의 극명한 밝기 차이가 이를 시각적으로 잘 보여준다. 같은 민족, 유사한 자연환경, 비슷한 출발선(사실은 북한이 더 앞선 출발선)을 공유했던 남북한인데, 남한은 전국이 촘촘한 빛의 네트워크로 연결돼 반짝이는 반면, 북한은 평양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완전한 암흑 상태에 가깝다.
남한은 대외무역과 국제 분업에 깊이 참여하며 시장을 확장했고, 이 결과 고도화된 분업과 생산성 향상을 이뤘다. 이 축적된 생산성이 밤하늘을 밝힌다. 반대로 북한은 ‘자력갱생’을 외치며 외부 시장과의 연결이 차단된 상태에서 분업의 범위가 극도로 제한되었고, 이는 낮은 생산성과 만성적 자원 부족으로 귀결되었다. 결과는 위성사진에서 확인되는 ‘어둠’이다.
《국부론》은 중상주의에 대한 비판
《국부론》은 자유시장을 옹호한 옹호서로 요약되기 쉽지만, 그 이론적 출발점은 시장에 대한 찬미가 아닌 중상주의(重商主義)에 대한 비판이었다. 어찌 보면, 스미스가 《국부론》을 저술했던 근본 동인이 국부를 금은의 양으로 측정하고 무역을 제로섬(zero-sum) 게임으로 보는 중상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이었고, 《국부론》에서의 노동의 분업과 전문화, 자유무역 등에 대한 그의 지루하고도 끈질긴 논의는 모두 이 중상주의적 오해를 바로잡기 위한 하나의 일관된 반론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중상주의 국가에서 국부란 금과 은의 축적이었다. 국가는 무역을 제로섬 게임으로 보았고, 수출은 승리, 수입은 패배로 간주했다. 따라서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줄이기 위해 국가는 관세, 수입 제한, 수출 보조금, 독점 특허 등을 적극 활용했다.
스미스는 먼저 중상주의에서의 국부 개념 자체에 의문을 던진다. “한 나라의 부는 금과 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토지, 주택, 각종 소비재 전체로 구성된다”고 선언한 것이다.
사실상 이 선언 하나로 중상주의의 토대를 완전히 무너뜨린 것이다. 중상주의는 한 나라의 부를 금고에 쌓아둔 금과 은의 양으로 환원(還元)했지만, 스미스는 부를 사람의 생활을 실제로 개선하는 상품의 흐름으로 재정의한다. 즉 그는 국부를 “한 사회의 연간 노동 생산물”로 정의했다.
이러한 국부 개념 전환의 의미는 결정적이다. 국부가 노동의 산물이라면, 국부 증대의 핵심은 생산성의 향상이다. 그리고 생산성의 증가는 명령이나 계획이 아니라 분업과 전문화, 기술 축적, 자유로운 교환을 통해 이루어진다. 스미스가 핀 공장 사례를 통해 보여주려 한 것은 국가의 지시가 아니라 자발적 분업이 만들어내는 질서가 생산성 향상 및 국부 증대의 열쇠라는 것이다.
무역·산업에 대한 통제 반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25년 4월 2일 백악관에서 주요 교역국들에 대한 관세 인상을 발표했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또한 중상주의 국가는 무역과 산업을 통제함으로써 국부를 늘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스미스는 그런 국부는 착시(錯視)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금과 은의 축적이 늘어날 수는 있지만, 실질적 생활 수준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국부의 증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국민이 생산하고 소유하며 소비하고 누릴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국부가 증가한다는 것으로, 이런 점에서 《국부론》은 경제 성장론이자 동시에 국민의 생활수준 향상에 관한 책이다.
중상주의는 ‘수출은 승리, 수입은 패배’로 간주하며,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억제하는 정책들을 추진했다. 이것은 무역을 ‘누구는 얻고 누구는 뺏기는 식’의 국가 간 제로섬 게임이나 전쟁으로 보는 관점이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전쟁’도 마찬가지다. 트럼프 역시 국가 간 교역을 ‘승리와 패배’의 관점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스미스의 관점은 전혀 다르다. 그는 이런 관점을 “터무니없다(absurd)”고 표현한다. 수입은 손실이 아니라 소비와 분업의 확장이며, 수출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입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중상주의를 비판한 논리는 단지 18세기 영국을 비롯한 유럽 제국(諸國)의 정책 오류를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의 비판은 국가가 경제를 관리하고 통제하고 설계할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근원적 비판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250년이 지난 지금, 한국 경제는 스미스의 이 비판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 오히려 여러 지점에서 중상주의적 사고와 정책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국가 통제에 대한 경고
2025년 6월 25일 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와 경제 6단체 부회장단과의 면담. ‘모두 함께 잘사는 대한민국’이라는 민주당의 슬로건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조선DB스미스가 중상주의에서 가장 위험하다고 본 것은 국가가 사회 전체의 부를 설계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국가가 특정 산업을 육성하고, 자본과 노동의 배치를 인위적이고 자의적으로 유도하며, 가격과 임금, 거래 조건에 개입함으로써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오만에 대해 스미스는 경고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나는 공공선을 위해 사업을 하는 척하는 사람이 이루어놓은 좋은 일을 결코 많이 알지 못한다”라는 그의 말은 인간이라면 필연적인 구조적인 지식과 판단의 한계를 경고하는 문장이다.
오늘의 한국 경제 정책을 보면, 이 경고가 전혀 낯설지 않다. 국가는 몇 가지 특정 산업을 지정해 육성하고, 노동 시장에서는 임금과 근로 시간, 해고 요건 등을 세밀하게 규정하며, 부동산 시장에는 수요와 공급, 가격, 보유와 거래 전반에 걸쳐 규제를 가한다. 여기에 광범위한 재분배 등 복지 정책까지 더해지면서, 경제 전반은 점점 더 정책 설계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또한 이를 재정적으로 떠받치기 위해 확장적인 재정 및 통화 정책이 일상화되어 가고 있는 것도 스미스적 기준에서는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스미스는 공공부채(公共負債)를 ‘미래 세대의 소득을 현재로 끌어다 쓰는 것’이라며 이런 관행은 국가를 점진적으로 약화시킨다고 경고한다.
《국부론》이 던지는 질문
스미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정책들은 중상주의의 현대적 변형이다. 오늘날 국가는 더 이상 금은의 축적을 말하지 않지만, 대신에 성장률, 국가 경쟁력, 미래 먹거리, 고용 안정, 주거 안정, 복지, 평등 등의 명분으로 경제를 관리하고 통제하려 한다. 그러나 스미스가 보기에 국부란 국가의 관리 통제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수많은 개별 선택이 상호작용한 결과물이다. 시장경제에서 가격은 정보고, 이윤과 손실은 신호며, 실패한 선택은 시장에서 퇴출되고, 성공한 선택은 장려를 받는 과정을 통해 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의 부가 증가한다. 이러한 자율적인 조정 메커니즘을 정책이 대신하려 할수록, 사회는 더 많은 왜곡과 의도치 않은 부작용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된다.
2026년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출간된 지 250년이 되는 해다. 그럼에도 이 책이 여전히 소환된다는 사실은, 단순히 고전(古典)이 갖는 무게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국부론》이 비판했던 사고(思考)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언어로 경제를 이야기하고 있고, 또 그런 사고방식에 근거한 정책들이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의 《국부론》이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국부란 무엇인가? 국가는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 국가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가? 그리고 시장은 어떤 조건에서 작동하는가?’
정책이 겸손함을 잊은 채 오만을 부리고, 국민이 권력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하는 순간, 우리는 스미스가 250년 전 강력하게 비판했던 중상주의와 다시 마주 서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