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미동맹 흔들릴 때가 기회… “北, 계엄사태 틈타 韓 사회 혼란 부추겼을 것”
⊙ 미국의 ‘동맹 현대화’는 “피 덜 흘리고 돈은 덜 쓰겠다”
⊙ NSS에서 사라진 ‘한반도 비핵화’… 美 대북 우선순위 하락, 한국 부담 증대
⊙ “북중러는 가변적인 삼각 밀착… ‘약한 고리’ 중국을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 미국의 ‘동맹 현대화’는 “피 덜 흘리고 돈은 덜 쓰겠다”
⊙ NSS에서 사라진 ‘한반도 비핵화’… 美 대북 우선순위 하락, 한국 부담 증대
⊙ “북중러는 가변적인 삼각 밀착… ‘약한 고리’ 중국을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5년 10월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열린 APEC 공식 환영식에서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철통같다던 한미 관계에도 균열이 감지됐다. 당시 미 바이든 행정부 고위 인사들은 12·3 계엄 선포 이후 줄곧 비판적 입장을 드러냈다. 커트 캠벨 국무부 부장관은 2024년 12월 4일 아스펜 전략포럼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심한 오판(badly misjudged)을 했다”고 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2025년 1월 10일 언론 간담회에서 “한국의 계엄은 잘못됐다”고 공개 비판했다.
소통 라인에서도 이상 신호가 포착됐다. 필립 골드버그 당시 주한 미국 대사는 계엄 선포 과정에서 미국이 상황 공유를 받지 못했다는 점에 강한 유감을 표했다. 후임 조셉 윤 대사대리 역시 탄핵 정국에서 양국 간 신속한 소통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이 같은 불신은 2025년 3월 한미 간 신뢰 논란으로 표면화됐다. 미국이 한국을 ‘민감국가 및 기타지정국가(Sensitive Countries and Other Designated Countries)’ 명단에 올린 사실이 뒤늦게 확인되면서다. ‘워싱턴 선언’ 등으로 한미 관계 격상을 이끌어 온 바이든 행정부의 결정이었지만, 한국 정부는 관련 동향을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다. 지정 배경을 떠나 외교가는 “한미 관계 역사상 초유의 일”이라며 동요했다.
대한민국호(號)가 휘청이는 사이 국제 정세는 더 큰 격랑(激浪)으로 치달았다. 미중 패권 경쟁은 경제·기술·자원 전(全) 분야로 확산됐고, 미국발 관세 압박은 글로벌 무역 질서를 흔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집권 직후 ‘마가(MAGA)’ 노선을 앞세워 상호관세와 보호무역을 강화하며 국제규범과 유엔 체제의 권위를 흔들었다. 한국 역시 한미 관세협상에서 수개월간 압박을 받았다.
‘한미동맹 현대화’
80년 넘게 이어져 온 전후(戰後)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곳곳에서 균열을 드러냈다. 여기에 북한의 핵능력 고도화와 북러 군사협력 확대가 겹치며 한반도 안보 환경은 한층 더 위험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푸틴·시진핑·김정은 등 이른바 ‘스트롱맨(Strong Man)’들은 힘을 앞세운 외교를 노골화하며 국제질서 재편을 가속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국제정치 대전환 기조에서 한미동맹의 작동 방식도 변했다. ‘가치 기반 동맹’에서 ‘가격 기반 동맹’으로 그 축이 옮겨 갔다. 미국은 동맹국을 신뢰와 연대가 아닌 ‘비용과 기여도’로 환산하기 시작했다. 정치·외교·안보·경제 전 분야를 통합한 ‘패키지 딜’을 기본 틀로 제시했다.
미국은 이를 ‘동맹 현대화’로 명명했다. 변화한 안보 환경에 맞춰 동맹의 역할과 능력을 재설계한다는 명분이지만, 실은 (미국이) ‘피를 덜 흘리고 돈을 덜 쓰겠다’는 거래적 동맹관(觀)의 반영이다. 기본적으로 한국의 군사적 역할 확대와 비용 부담 증대를 전제로 한다.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은 “미국이 요구하는 동맹 현대화는 크게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柔軟性) ▲한국의 동맹조약 제3조 이행 ▲한국의 안보 비용 부담 확대라는 세 가지 중심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다”면서 “이 안에는 동맹조약 적용 지역의 확대, 반중(反中) 집단안보 구상, 동북아 단일전구(戰區)화, 대만 유사시 한국의 역할, 한반도에서 한국군의 주도적 역할 등 미국이 ‘뉴 노멀’로 만들려는 의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고 했다.
‘한반도 비핵화’ 문구 빠져
이 같은 흐름 속에서 2025년 12월 5일 발표된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서(NSS)’는 한국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바이든 행정부와 트럼프 1기 행정부의 NSS에 포함됐던 ‘한반도 비핵화(非核化)’ 문구가 이번 문서에서는 빠졌기 때문이다. 미국의 외교·안보 전략 로드맵에서 북한 관련 표현이 삭제된 것은 정책 우선순위 변화의 신호로 읽힌다.
반길주 국립외교원 교수는 〈미 국가안보전략서(2025) 분석〉에서 “대북 문제가 미국의 핵심 국익이 아니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대목”이라며 “미국의 전략적 관심이 대만과 중국, 서반구로 이동하고 있음을 선언하는 동시에, 대북 정책의 무게중심이 한국 쪽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진단했다.
최수용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대표는 “미 국방수권법(NDAA) 등 관련 문서에서도 남북을 분리하지 않고 ‘한반도’ 단위로 묶어 서술하는 대목이 나타난다”며 “미국의 작전 초점이 이미 중국을 최종 타깃으로 설정하는 방향으로 이동했고, 한반도를 더 이상 대북 억제에 국한된 공간이 아니라 인도·태평양 전략의 일부로 재편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했다.
현재까지 한미가 안보·국방·방위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합의한 사안은 제한적이다. 방위비 분담과 미국산 무기 구매,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핵잠) 건조 지원이 핵심이다. 2025년 11월 14일 공개된 한미 조인트 팩트시트(JFS·합동설명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3.5% 수준으로 확대하고 ▲미국산 무기 250억 달러(약 34조원)어치를 구매하며 ▲주한미군에 향후 10년간 330억 달러(약 45조원) 규모의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한편 미국은 한국의 핵잠 건조를 지지하고 연료 조달에 협력하기로 했으며, 한미 원자력협정 범위 내에서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권한 확대도 지지하기로 했다.
이재명 정부의 성과
지난 2024년 12월 11일 국회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위헌적 비상계엄 선포 내란행위 관련 긴급 현안 질문에서 조태열 당시 외교부 장관이 질의에 답하고 있다. 사진=뉴시스정성장 세종연구소 부소장은 “트럼프가 핵잠을 승인한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이익”이라며 “한국이 미국 조선업 현대화와 선박 건조 확대에 기여하겠다고 약속한 데 대한 보상 성격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그는 “한국의 핵잠 보유는 미 해군의 전개 부담을 줄이고, 북중 잠수함 전력 확대에 대응하는 측면에서도 미국의 전략적 이익과 맞아 떨어진다”고 했다.
이는 우리 입장에서도 의미 있는 진전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김태우 전 원장은 핵잠과 농축·재처리 문제를 “70년 동맹 역사에서 처음으로 ‘지지·승인’이라는 표현이 공식 문서에 담긴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면서 “거래적 동맹 압박 속에서도 이를 놓치지 않고 확보한 것은 현 정부의 성과”라고 말했다. 다만 “실제 농축과 재처리, 핵잠 건조까지 이뤄져야 비로소 성과가 완성되며, 현재는 문을 연 초기 단계”라고 했다. 또 “향후 미국과의 외교적 조율을 통해 ‘평화적 핵 주권’ 능력을 단계적으로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농축 우라늄 재처리와 핵잠은 역대 어느 보수 정부에서도 이루지 못한 성과다. 김 전 원장은 “한국 보수 정부들은 30년 넘게 핵 주권 이슈를 외면하거나 두려워했고, 외교적 지렛대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면서 “일본이 1988년 농축·재처리를 전면 허용받은 배경에는 멀리 내다보는 지도자, 미국이 필요로 했던 전략적 지렛대, 국익을 위해 싸운 외교관이라는 세 요소가 있었지만, 한국 보수에는 이 세 가지가 모두 없었다”고 했다.
문제는 핵잠 이슈에 가려진 안보 구조의 변화다. 이번 팩트시트에는 주한미군 태세 조정과 전시작전권(전작권) 전환이 함께 담겼는데, 두 사안이 동시에 진행될 경우 중국 견제 강화 국면 속에서 대북 억제력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주한미군 조정은 예정된 수순”
지난 2025년 8월 10일 국방부 기자 간담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 사진=뉴시스가장 큰 변수는 주한미군 태세 변화의 불확실성이다. 팩트시트에는 전작권 전환 협력과 한국 주도의 대북 재래식 방위가 언급된 뒤, 2006년의 ‘전략적 유연성 합의’가 재확인됐다. 이어 한반도 및 지역 사안 공조 항목에는 항행·상공비행의 자유, 합법적 해양 이용 수호, 국제해양법 합치, 대만해협의 평화·안정, 양안(兩岸) 문제의 평화적 해결, 일방적 현상 변경 반대 등이 명시됐다. 주한미군의 역할 범위가 한반도를 넘어 역내로 확장될 여지를 남긴 셈이다.
앞서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부 장관은 2025년 3월 발표한 ‘임시 국방전략 지침’에서 미국이 중국 견제에 집중하고, 북한·러시아 억제 역할은 동맹국이 분담하는 구도를 명확히 했다. 현직 사령관의 발언도 이를 뒷받침했다.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 사령관은 2025년 5월 15일 미 육군협회 심포지엄에서 “주한미군은 북한 격퇴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으며, 더 큰 인도·태평양 전략의 일부”라며 한국을 일본과 중국 본토 사이에 위치한 ‘고정된 항공모함(fixed aircraft carrier)’에 비유했다. 주한미군의 임무가 대북 억제를 넘어 중국 견제와 대만해협까지 확장될 경우,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한국이 더 직접적으로 감당하는 구조가 된다.
김태우 전 원장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확대는 이미 예정된 수순”이라면서 “한미동맹은 대체 가능한 안보 축이 아니기 때문에 상당 부분은 ‘뉴 노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국이 70년간 유지해 온 안보의 근간은 미국이라는 ‘원거리 동맹(원교)’이 가능해진 지정학적 구조에 있으며,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설명이다.
다만 ‘무조건적 수용’은 경계해야 한다. 김 전 원장은 “줄 건 주되, 받을 건 확실히 받아 내야 한다”며 “특히 확장 억제는 더 강하고 구체적인 형태로 보장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가령 대만에 사태 발생시 주한미군 일부 이동을 원천적으로 막기 어려울 수 있는 만큼, 한국은 ‘중국과의 관계로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 않되, 미국 작전을 물질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주한미군의 한반도 잔류를 최대한 확보하는 협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슬그머니 끼어든 ‘전작권 전환’
이재명 대통령이 2025년 11월 1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한미 간 관세·안보 합의를 문서화한 ‘조인트 팩트시트(JFS·합동설명자료)’ 관련 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여기에 전작권 조기 전환이 맞물릴 경우 우려는 배가될 수 있다. 전작권 전환은 당초 미국 측의 ‘동맹 현대화’ 구상에 포함된 의제가 아니라, 한국이 협상 카드로 결합한 사안이다. 이번 팩트시트에는 전작권 전환을 위한 동맹 차원 협력을 지속한다는 문구가 담겨 있다. 미국산 무기 250억 달러 구매와 국방비 확대가 전작권 전환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묶여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군 관계자는 “미국이 요구하는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기 때문에 국내 자주파(自主派) 등이 20년 전부터 추진해 온 전작권 전환을 협상 명분으로 결합한 것”이라며 “무기 구매를 미국의 요구가 아니라 한국의 군사 역량 강화를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포장하려는 구도”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전작권 전환 문제에 ‘군사 주권’이라는 감정적 표현이 사용되지만, 실제로는 군사적으로 무척 복잡한 사안”이라면서 “당장 천문학적 비용 문제 또한 걸림돌”이라고 했다. 임철균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전문연구위원은 2025년 7월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전작권 전환시 미래 한국군이 연합작전을 주도하기 위해 소요될 예산이 34조 999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2025년 한국 국방 예산의 약 60%에 이르는 금액이다.
정부는 2026년 2단계 검증을 거쳐 이재명 대통령 임기 내 전작권 전환을 완료하겠다는 목표를 밝힌 상태다. 전환의 전제 조건은 세 가지다. ▲연합방위를 주도할 수 있는 한국군의 핵심 군사 능력 ▲북한의 핵·대량살상무기(WMD) 위협에 대한 한국군의 초기 대응 능력 ▲전작권 전환에 부합하는 한반도의 역내 안보 환경이다. 평가와 검증은 전작권 전환 이후 한국군 대장이 사령관을 맡게 되는 미래연합군사령부를 대상으로 IOC(최초 작전운용 능력), FOC(완전 운용 능력), FMC(완전 임무수행 능력)의 3단계를 거친다. IOC는 이미 완료됐고, 한미는 2026년 FOC 검증을 추진하기로 했다.
한 군 관계자는 “전작권 전환은 ‘조건에 기초한 전환계획(COTP)’에 따라 조건 충족시 단계적으로 이행하는 것이 원칙”이라면서 “그러나 전환 조건의 구체적 기준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평가·검증에 속도만 내고 있다”고 했다.
“北, 계엄사태를 기회로 여겼을 것”
김태우 전 원장은 전작권 전환의 옳고 그름을 떠나 협상에 앞서 반드시 짚어야 할 쟁점을 지적했다. 그는 “2018년 한미가 합의한 전작권 전환 이후 연합방위지침(Alliance Guiding Principles)의 한글본과 영문본 의미가 정확히 일치하는지 확인해야 한다”며 “당시 한국 언론은 한·미군의 통합된 지휘 체계를 한국군이 통제하는 것으로 보도했지만, 영문본은 한국군과 미군의 통제를 분리하는 구조를 의미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전시 상황에서 미군이 한국군 지휘하에 들어가는 것이 확실한지, 아니면 연합사가 유지된 채 사령관만 한국군으로 바뀌는 것인지에 대해 미국의 명확한 의도를 확인한 뒤 국민적 판단을 거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확장 억제의 실효성이 상대적으로 희미해진 사이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은 고도화하고 있다. 12·3계엄이 북한에 또 하나의 ‘기회’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른바 ‘디커플링(탈동조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관리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북한은 과거부터 한국의 정치 변수로 한미동맹의 결속력이 흔들릴 때 이를 기회로 활용해 왔기 때문이다.
마키노 요시히로 일본 히로시마대 객원교수는 2024년 계엄사태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 입장에서는 한국의 정치적 혼란이 오히려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면서 “최근 자주포 일부를 러시아로 이동시키며 대남(對南) 군사 부담을 안고 있던 북한으로서는 한국이 강경 대응에 나서기 어려워진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그는 이어 “북한은 당분간 계엄사태에 침묵을 유지하겠지만, 윤석열 대통령을 비난하거나 사퇴를 요구하는 정치적 공세와 함께 허위 정보 유포, 여론 교란 등 비군사적 수단을 활용한 하이브리드 전략으로 한국 사회의 혼란을 키우려 할 수 있다”고 내다본 바 있다. 실제로 이후 윤석열 대통령은 파면됐고, 기존의 대북 강경 기조는 전환 국면에 들어섰다.
‘비핵화’ 의제는 내려놔야
확장 억제의 실효성이 상대적으로 희미해진 사이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은 고도화하고 있다. 사진은 2025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노동당 창건 80주년 경축 열병식에서 공개된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20형’ 모습. 사진=조선중앙TV 캡처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대화’와 ‘협력’을 기조로 한 대북 정책을 내세웠다. 그러나 김정은이 2022년 말 남북을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한 이후 대남 차단 및 봉쇄에 주력해 온 만큼, 남북 관계 개선에 나설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실은 2026년을 북한과의 대화 재개 원년으로 삼고 ‘한반도 공존 프로세스’를 본격화하겠다고 밝혔다. 2025년 미국·일본·중국과의 관계를 어느 정도 정비한 만큼, 그 에너지를 남북 관계에 투사하겠다는 구상이다. 정부는 출범 후 대북 확성기 철거, 대북 심리전 방송 중단, 9·19 남북 군사합의 단계적 복원 추진을 비롯해 비무장지대(DMZ) 내 군사분계선(MDL) 기준 설정을 위한 남북 군사당국회담 제안 등 긴장 완화 조치를 이어 왔다.
그러나 북한은 이 같은 제의에 호응하지 않고 있다. 정보기관 한 관계자는 “지금 북한은 한국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황”이라며 “코로나19 이후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통제 체제를 유지했고, 러시아와의 밀착으로 전략적 선택지가 넓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화 테이블로 북한을 끌어낼 뚜렷한 의제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한국이 요구하는 비핵화는 북한이 일관되게 ‘미국과의 문제’로 선을 그어 온 사안이다.
이 때문에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현실적인 경로는 미국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타이밍을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남북 간 대화보다 미북 간 대화가 앞설 수도 있다”며 “어느 쪽이든 먼저 움직임이 있다면 선순환의 계기로 만들겠다”고 했다. 다만 싱가포르와 하노이 경험이 김정은에게 깊은 불신을 남긴 데다, 북한이 헌법에 핵 보유국 지위를 명시한 상황에서 어떤 의제가 유효할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는 “과거처럼 성급하게 ‘비핵화’라는 말부터 꺼낼 것이 아니라 단계적 이행이 필요하다”며 “비핵화를 최종 목표로 분명히 하되, 출발 단계에서는 ‘전쟁과 핵 위협이 없는 한반도’라는 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담론을 전환할 것”을 제안했다. 비핵화를 전제한 채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것보다는, 핵 동결 등 현실적 단계부터 신뢰를 쌓아 협상의 공간을 넓혀야 한다는 설명이다.
양 교수는 이어 대북 정책의 주요 도전 요인으로 ▲미중 갈등 속 북중러 밀착이 심화되는 신(新)냉전 구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인한 북한의 대화 무대 복귀 지연과 남북 군비 경쟁 가속화 ▲북한의 ‘두 국가론’ 제도화 가능성을 꼽으며 “러-우 전쟁 종식 이후 북미·남북 대화 재개 가능성, 미중 관계 완화 국면에서의 외교적 공간 확대, 국제 스포츠 행사를 계기로 한 긴장 완화 가능성은 기회 요인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전략적으로 중국 활용해야”
북중러 밀착은 또 다른 위협이지만, 비교적 ‘약한 고리’인 중국을 활용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사진은 2025년 9월 3일 TV에 중계된 푸틴, 시진핑, 김정은(왼쪽부터)의 중국 전승절 열병식 참석 모습. 사진=뉴시스한미동맹의 재편, 대북 억제 구조의 불확실성, 그리고 묘안 없는 대북 정책까지. 이 모든 변화가 교차하는 지점에 중국 변수가 놓여 있다. 미중 전략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중국과의 관계는 이제 한국 외교·안보 전반의 향방을 정하는 핵심 축으로 부상했다.
중국은 오는 2027년 시진핑 4기 정부 출범과 인민해방군 창군 100주년이라는 굵직한 정치·군사 이벤트를 앞뒀다. 2026년은 그 준비 국면이다. 외교·안보가에서는 “창군 100주년을 계기로 군사 현대화와 첨단 무기 개발이 가속화되며 미중 긴장 구도도 더 심화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 과정에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강화가 중국의 반발을 촉발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우리로서는 더욱 정교한 ‘줄타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가시화한 북중러 밀착은 부담을 더욱 키운다. 2025년 9월 3일 시진핑과 김정은·푸틴이 천안문 성루 열병식장에 함께 등장한 장면은 상징적이다. 북한·중국·러시아(구소련 포함) 지도자가 한자리에 모인 건 66년 만에 처음이었다.
오수대 국가안보통일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이 상황에서 중국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북중러는 정례 협의체나 조약·협정, 양해각서(MOU)가 없는 ‘삼자 밀착’으로, 결속력이 약한 가변적 협력 관계”라면서 “그러나 대만해협 위기나 러-우 전쟁 전면 확전 같은 ‘트리거’가 발생하면 느슨한 삼자 구도가 단기간에 군사·안보 밀착으로 비약할 수 있다는 점이 핵심 리스크”라고 했다. 오 연구위원은 이어 “다만 북러와 같은 양자 축은 훨씬 공고해질 수 있어 위험도도 커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중국은 국경과 소수민족 관리 등 내부 안정 문제, 국제 이미지, 세계 시장경제에 대한 의존, ‘불결맹(不結盟)’ 원칙 등으로 인해 북러와의 과도한 밀착에는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약한 고리”라며 “이를 한국 외교가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구체적으로는 삼자 구조가 한 덩어리로 굳어지지 않도록 ‘이격·견제·관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했다. 중국 내 임시정부 청사와 윤봉길 의거지, 한류 등 역사·문화 자산을 활용한 ‘인문 외교’로 한중 관계를 완충하고, 북한의 나선특구와 러시아의 연해주 같은 접점은 감시적·조건부 관여를 통해 영향력을 넓힐 수 있는 전략적 공간으로 제시했다.
韓日, 과거사와 안보·경협 구분해야
소에야 요시히데 게이오대 명예교수는 2025년 9월 18일 국제한반도포럼에서 “미중러가 각자 분절된 전략을 추구하는 불안정한 국제 환경에서, 한국과 일본이 협력해야 지역 안정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중러 공조의 상호 불신·가변성 특성으로 강대국 질서는 더욱 예측 불가능해지고 있지만, 한국과 일본은 동일한 지정학적 조건에 놓여 있다”면서 “특히 북핵·미사일 대응에서 한일 협력과 한미일 3자 협력은 필수적이며, 한중일 대화 역시 역내 신뢰를 보완하는 장치로 기능할 수 있다”고 했다. 한미일·한중일 두 틀을 경쟁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으로 운영해야 하며, 그 조정의 열쇠는 한국과 일본이 쥐고 있다는 얘기다.
다만 2025년 10월 일본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취임은 한일 관계에 또 다른 변수를 던졌다. 일본 정치는 소수 여당 체제에 들어섰고, 정권 기반 역시 과거보다 불안정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강경 보수 성향이 부각될 경우 2025년 12월 9일의 ‘독도 발언’과 같은 역사 문제나 영토 갈등 등 민감한 현안이 전면 부상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수용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대표는 “일본은 국제 환경을 활용해 안보·외교적 입지를 넓히는 데 능한 나라”라며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기보다, 안보와 전략 영역에서는 냉정하게 참고하고 활용할 부분을 분리해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과거사 문제와 안보·경제 협력을 구분해 관리하고, 미중 압박 국면에서 한일이 전략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지점을 꾸준히 넓혀 갈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한편 진창수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일본 다카이치 정권과 한일 관계의 방향〉에서 “정권 안정의 우선 과제가 경제와 대미 관계인만큼, 한일 갈등을 의도적으로 키울 가능성은 제한적”이라고 분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