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유사》 쓴 일연이 32년간 머물던 곳
⊙ 조선시대에도 기도·참배객들로 인산인해
⊙ 비슬산 四王說 신화는 이루어질 것인가
⊙ 조선시대에도 기도·참배객들로 인산인해
⊙ 비슬산 四王說 신화는 이루어질 것인가

- 해발 1035m 봉우리에 지은 대견사 전경.
중창(重創) 1주년 법회가 예정돼 있었던 것이다. 스님은 중창 1주년 기념법회가 열리지 못했다고 했다. 눈이 많이 왔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이 법회에는 지역 기관장을 비롯해 외부에서 많은 인사가 참석할 예정이었다.
대견사(大見寺). 각운 스님이 주지로 있는 대견사는 그런 곳이었다. 눈이 오면 외부인들이 참석하는 법회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험로를 따라 올라가야 한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용리가 그 주소지다.
스님은 오전에 오면 눈이 녹지 않아 절까지 올라오는 게 힘들 것이라고 했다. 정말 그랬다. 서울에서 승용차로 4시간여를 달려 3월 2일 오후 1시30분쯤에 만난 대견사로 가는 길은 참으로 오르기 힘든 길이었다. 평탄한 길이 끝나고 대견사가 있는 산을 향한 오르막길이 시작하는 지점에서 기자 일행은 각운 스님을 기다렸다.
각운 스님이 직접 승용차를 몰고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그는 우리가 타고 간 승용차를 그 자리에 두고 자신의 승용차를 타라고 했다. 아직 눈이 녹지 않아 길이 익숙한 자신의 승용차로 가는 것이 안전하다는 이유였다.
승용차에 타기 전 스님은 아득히 보이는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그곳에 대견사가 있다고 했다. 대견사가 있는 봉우리 외에 몇 개의 봉우리가 더 있는 그 산의 이름은 비슬산(琵瑟山)이다. 최고로 높은 곳은 천왕봉(1084m). 대견사는 해발 1035m 대견봉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산 아래서 대견봉을 바라보면 바위가 줄지어 길게 흘러내리는 듯한 모양이 비파(琵琶)의 현(弦) 같다.
설악산 봉정암이 해발 1224m에 위치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절이지만 봉정암은 산 정상으로 가는 중간에 자리 잡고 있다. 산 정상에 터를 잡은 절 중에는 대견사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셈이다.
스님의 승용차는 좁고 경사진 도로를 곡예 하듯 올라가기 시작했다. 밑에서 바라볼 때 대견사 오른편으로는 레이더 기지 같은 것이 보이는데 비슬산 강우(降雨) 관측소다. 낙동강 유역의 홍수 예보를 위해 만든 레이더 강우 관측소다.
각운 스님은 그 강우 레이더 관측소를 가리키며 “요 며칠 전 관측소까지 올라왔던 승용차에서 불이 났다”는 말로 지금 가는 길이 얼마나 험한가를 설명했다. 험한 급경사 길을 무리하게 올라가다가 열을 견디지 못해 승용차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스님은 “이 길은 완급을 잘 조절하며 올라가야 한다”며 가파른 경사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길이었지만 능숙하게 운전했다. 승용차를 운전하며 스님은 대견사에 얽힌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당나라 문종 꿈에 나타난 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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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연꽃 함. |
중국 당나라 문종이 절을 지을 터를 찾고 있었다. 하루는 꿈에 세수를 하는데 세숫대야의 물속으로 아름다운 경치가 보였다. 문종은 바로 이곳이 절을 지을 터라고 생각했다. 신하들에게 자신이 꿈에 본 경치를 설명하고 그곳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중국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문종의 신하들은 결국 그 절터를 찾아 신라까지 오게 되었는데 그때 대견사가 현재 위치해 있는 곳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들은 당나라로 돌아가 문종이 꿈에 본 곳이 신라 비슬산에 있음을 보고했다. 크게 기뻐한 문종은 그곳에 절을 지으라고 했다. 문종은 절을 지을 하사금도 내렸다. 그래서 절의 이름을 문종이 꿈에서 본 곳이라고 하여 대견사로 지었다는 것이다.
중국 그 너른 땅에 비슬산만 한 경치를 가진 산이 없을 리 없겠지만 각운 스님에게 그 전설은 전설이 아닌 정설인 것 같았다. 그는 차를 잠시 세우고 대견사 밑으로 길게 무리를 지어 흘러내리는 형태의 바위들을 가리켰다. 천연기념물 제435호인 비슬산 암괴류(岩塊流)다. 80m 넓이로 2km에 걸쳐 물처럼 흐르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중생대 백악기에 생성된 화강암 거석들이라고 한다. 손가락을 거두지 않은 채 스님은 설명을 했다.
“항공사진으로 보면 저기(암괴류)가 비파 줄입니다. 산 정상과 연결해서 보면 마치 여신(女神)이 비파를 뜯는 형상 아닙니까. 절 벽화에 보면 비파를 든 여인이 하늘을 나는 비천상이라고 있어요. 저게 비파를 뜯는 여신의 형상이죠. 비파를 뜯는 여신이 산다고 해서 비슬산인 거예요.”
속인의 눈에는 그저 신비롭고 아름다울 뿐. 기자는 동의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다시 차에 올랐다. 높고 깊은 산의 거개가 그렇듯이 산 정상에 다다를 즈음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신비롭다. 특히 이날은 산 중턱 부근에 구름이라 불러도 될 법한 짙은 안개가 머물러 있었다.
대견사가 육안으로 명료하게 보이는 지점에 전기차가 멈춰 서 있었다. 23인승으로 ‘비슬산 반딧불이 전기차’로 명명돼 있었다. 달성군이 대견사 주변의 관광명소를 둘러볼 수 있도록 지난 2월 28일부터 운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날 오전에는 눈 내린 길이 위험해 잠시 운행을 멈췄다가 오후부터 운행을 재개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기차로 1000m가 넘는 대견사를 오르내리기에는 어쩐지 힘겨워 보였다. 기력을 회복하기 위함인 듯 전기차는 아주 오래 그곳에 머물러 있던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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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견사 좌측 뒤편 참꽃 군락지로 가는 길. 고개를 넘으면 30만 평에 달하는 참꽃 군락지가 나온다. |
지세(地勢)는 높은 산 특유의 그것이라고 치더라도 곳곳에 솟아 있는 바위들의 독특한 형태가 눈에 들어왔다. 눈에 보이는 바위 모두에 이름을 부여해도 될 만큼 저마다의 개성이 넘치는 바위들이 즐비했다. 각운 스님은 그곳에 일주문(一柱門)을 세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절 경내에는 법당과 요사채(스님들이 거처하는 공간) 등 건물 4채가 소박하게 들어앉아 있었다. 물론 절의 사방이 온통 바위였기 때문에 언뜻 보면 절 전체가 바위에 기대고 있는 형국이었다. 중창 1주년이 말해주듯 대견사에는 일주문뿐만 아니라 종각도 없었고 법당 건물에는 아직 탱화도 그려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 스님에게 물었다.
—3월 1일과 대견사가 어떤 인연이 있기에 3·1절에 맞춰 중창을 기념하고 있는 건지요.
“우리 대견사는 신라 헌덕왕 때인 810년에 창건됐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200년 전에 세워진 절이죠. 우리가 3월 1일을 중창 기념일로 정한 것은 일본과 우리 절의 좋지 않은 인연 때문입니다. 우리 절은 일본에 의해 두 차례나 수난을 당했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왜병들이 불을 질러서 없애버렸고 일제 시대 때인 1917년에는 조선총독의 명령에 의해 절이 폐사(廢寺)를 당합니다.”
커피 가는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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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운 스님은 기자 일행에게 원두커피를 갈아서 대접했다. |
“대견사 폐사 명령은 기록에도 남아 있습니다. 조계종 총무원 산하 수장고(收藏庫)에 있는데 일제 총독은 대견사에 들쥐가 많아 전염병 발생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대견사를 없애라는 명령을 내려요. 그런데 폐사를 시킨 속내는 다른 데 있었어요. 풍수지리로 보면 우리 대견사는 일본 대마도를 바라보는 형국인데 대견사의 기운이 대마도를 빨아들이는 형국이랍니다. 게다가 대견사의 위치가 일본의 기운을 다스리는 아주 중요한 혈 자리라는 거예요. 그런 이유로 대견사를 폐사시킨 후 광복이 될 때까지 복원을 못 하게 한 겁니다. 그래서 작년 3·1절에 맞춰 중창 기념식을 하게 된 겁니다.”
각운 스님이 기거하는 방 탁자 위에는 다양한 차(茶)들이 놓여 있었다.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마련한 차들인 것 같았다. 물을 끓이던 스님은 차 대신 탁자 밑에서 뭔가를 꺼냈다. 커피 원두를 가는 기계였다. 스님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커피를 갈았다. 높은 산 봉우리에 위치한 절과 커피. 심정적으로 부조화한 그 광경을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자 스님이 빙긋 웃었다.
“이상해요? 차 대신 커피를 끓이니까?”
—아, 네 좀….
“커피향이 좋잖아요. 하하. 사실은 아직 여기가 물이 좋지 않아요. 물이 좋아야 차도 제격인데 말이죠. 그래서 오시는 손님들 입맛에 맞게 커피를 대접하고 있어요.”
스님이 산중에서 커피를 가는 모습은 낯설었지만 맛은 일품이었다. 차를 우려내듯 정성을 담아 건네준 커피의 향을 음미하며 스님이 기거하는 방을 둘러봤다. 아직 걸릴 위치를 못 찾았는지 방 한 편에 세워져 있는 사진 액자가 있었다. 대견사의 전경을 정면에서 찍은 사진이었는데 마치 대견사의 지붕이 참꽃(진달래)으로 덮여 있는 듯한 사진이었다.
—봄에는 꽃으로 지붕을 삼는가 봅니다.
“그 사진 참 좋죠? 절 바로 뒤에 30만 평에 달하는 참꽃 군락지가 있어요. 생각해 보세요. 30만 평에 참꽃이 피어 있는 장면을….”
스님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해마다 참꽃 축제가 벌어집니다. 4월 말에서 5월에 10여 일간 열리는 비슬산 참꽃 축제가 그것이죠. 15만명 이상이 참꽃 축제를 보러 오죠. 가을에는 그곳이 억새군락지로 탈바꿈합니다. 우리 절은 봄에는 참꽃을 지붕 삼고 가을에는 억새를 지붕으로 삼습니다. 물론 겨울에는 눈으로 지붕을 삼죠. 천변만화가 따로 없습니다.”
우리는 절 마당으로 나가 그 장면을 상상해 보기로 했다. 절 마당에는 자신의 소원을 적어놓은 연등이 가득 걸려 있었다. 마당으로 나온 스님은 석탑을 가리키며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구유형문화재 42호로 지정돼 있는 대견사지 삼층석탑이었다.
원래는 9층 석탑으로 만들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절을 조선 인조 시절 재건하면서 3층 석탑으로 재탄생했다고 한다. 일제 총독부가 대견사를 폐사시켰을 때도 그 탑만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이곳에 대견사가 있었음을 증언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탑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왼쪽 아래편을 보면 신라 시대에 축조한 길이 30m 높이 6m의 축대가 남아 대견사의 오랜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각운 스님은 “저기를 한번 보라”며 기자의 눈길을 먼 데 있는 두 개의 산봉우리로 돌리며 말했다.
“저게 엄마 젖꼭지처럼 생겼다고 해서 유두봉(乳頭峰)입니다. 그래서 백두산이 우리 민족의 아버지 산이라면 여기가 어머니 산이 되는 겁니다. 지리적으로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치면 여기가 배꼽 밑에 태 자리에 해당합니다. 허리 부분. 전국적으로 유두봉이라고 불리는 곳이 많지만 보는 방향에 따라 유두봉처럼 안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여기는 360도 돌면서 봐도 똑같이 생겼어요. 전국에 여기 하나밖에 없습니다. 유두에 해당하는 부분도 흙으로 돼 있는 게 아니라 마치 무슨 건축물을 세워놓은 것처럼 바위로 돼 있어요.”
—과거에 출산기도 때문에 많이 왔겠네요.
“조선 시대 《동국여지승람》에도 나와 있어요. 전국에서 몰려드는 기도객이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말이죠. 요 옆으로 가면 남근(男根)바위도 있어요. 지금은 명칭을 ‘뽀뽀바위’라고 해놨는데 옛날부터 남근바위로 불렀어요. 음양이 딱 맞죠.”
우리는 대견봉 방향으로 향했다. 바위마다 형제바위, 소원바위, 스님바위, 감투바위, 코끼리 바위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름 없는 바위에도 이름 붙이는 게 가능할 정도로 바위의 모양은 다양했다.
비슬산 정기로 대통령 4명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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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당에는 불상 대신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
—이렇게 좋은 산인데도 대구 하면 팔공산이지 비슬산을 떠올리는 사람은 드문 것 같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몰라도 이 지역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대구 시내 초·중·고 교가의 50%는 팔공산이 들어가고 50%는 비슬산이 들어간다고 보면 됩니다. 예부터 이 지역에선 명산이었던 거죠. 오랫동안 폐사로 있던 대견사가 복원됐기 때문에 비슬산도 곧 전국적으로 유명한 산이 될 겁니다.”
—고려 말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이 머물렀던 곳이 비슬산 대견사죠?
“그렇죠. 일연 스님은 1227년에 승과인 선불장에 장원급제한 뒤 대견사 초대 주지로 부임해 22년간 이 절에서 지냈습니다. 이곳에서 《삼국유사》의 기초가 되는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집필에 들어갔던 거죠. 말년에도 10년을 여기에 머물렀기 때문에 32년여를 대견사에 계셨던 셈입니다.”
비슬산에는 사왕설(四王說)이 전설처럼 내려온다. 비슬(琵瑟)에 임금 왕(王)자가 각각 2개씩 4개가 들어 있어 비슬산 정기를 타고 태어난 4명의 왕이 나온다는 것이다. 혹자는 비슬산이 대구에 위치해 있는 점을 들어 박정희(朴正熙),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박근혜(朴槿惠) 등 4명의 대통령이 비슬산 정기로 배출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풍수도참(風水圖讖) 사상을 근거로 한 이야기들이다. 각운 스님 역시 우리 한반도에 풍수도참 사상을 가져온 인물로 알려진 신라 말의 도선국사 이야기를 자주 꺼냈다. 그는 도선(道詵)국사의 말을 빌려 비슬산이 영산이고 대견사가 명당이라고 말하곤 했다.
—비슬산 정기로 4명의 대통령이 나왔으니까 이제 더 이상의 왕은 못 나오겠네요.
“그렇지 않아요. 박정희 대통령은 구미고 전두환 대통령도 대구가 아니잖아요. 박근혜 대통령만 우리 비슬산이 있는 달성군에서 국회의원을 하셨죠. 박 대통령은 달성 국회의원을 하면서 참꽃 축제가 열리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참석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대견사의 기둥이 올라가던 날 박 대통령이 당선됐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많은 인재가 이곳 정기를 받아서 배출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대견사의 법당 이름은 대견보궁(大見寶宮)이다. 그곳에는 불상이 없다.
—법당에 불상을 모시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셔놨기 때문이죠. 우리 대견사에 봉안한 진신사리는 스리랑카 쿠루쿠데 사원에서 모시던 부처님 진신사리 1과를 기증받아 모신 겁니다. 이 진신사리는 103년부터 스리랑카 도와 사원에 모셔져 있다가 1881년부터 쿠루쿠데 사원에서 모시고 있는 사리 4과 중 하나입니다.”
—진신사리가 있으면 법당에 불상을 안 모시는 건가요?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을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고 하죠. 통도사나 상원사 같은 곳에 있죠. 법당 내에 부처의 불상을 모시는 대신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절 중창 계획은 누가 세웠습니까.
“사실 저는 대견사를 중창하는 데 역할을 한 게 없습니다. 김문오 군수님과 동화사 성문 스님이 애를 많이 쓰신 덕이죠. 특히 김 군수는 군수가 되기 전에 이 절터로 등산을 왔다가 절을 다시 중창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답니다. 그래서 군수가 된 후에 원래 태고종이 50억원을 들여서 절을 중창하려고 했는데 제가 이 소식을 성문 스님에게 전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우리 조계종이 중창에 나서게 된 겁니다.”
—태고종이 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런 거는 아니고 제가 기록을 찾아보니까 대견사가 조계종인 동화사의 말사로 있다가 폐사를 당한 거였습니다. 그러면 우리 조계종이 중창에 나서는 게 옳다고 본 거죠.”
因果應報 접한 후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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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견사 뒤편 바위에서 바라본 절 마당. 대구유형문화재 42호로 지정된 3층 석탑이 보인다. |
“문화재 문제 때문에 골치가 많이 아팠고 그 문제 때문에 중창에 14개월여를 허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문화재 위원들께서도 다 이해를 해주었고 중창을 하고 나니까 그분들도 좋아하더군요. 거듭 얘기하지만 그분들을 설득하는 데 김 군수와 성문 스님의 노력이 정말 컸습니다. 그런 덕인지 김 군수는 지난 지방선거에서 무투표로 재선에 성공했고 성문 스님은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이 되셨어요. 부처님의 가피(加被)라고나 할까요(웃음).”
—일주문하고 종각은 언제쯤 완공할 생각입니까.
“지금까지는 동화사에서 지원을 했지만 일주문과 종각 건립부터는 우리 대견사의 힘으로 해볼 생각입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내년이나 후년쯤이면 완공이 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폐사지 중에는 최초로 복원한 셈이죠?
“네. 황룡사지나 미륵사지 복원은 관에서 했는데 그것도 일부만 복원하는 데 그쳤죠. 단일 절터를 고증을 거쳐가며 복원한 것은 처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신도 수가 아직은 미미할 텐데 신도들의 시주만으로 복원 작업을 마치려면 쉽지 않겠네요.
각운 스님은 소리 내어 웃으며 작년에 대견사 사진을 배경으로 한 달력을 제작했던 이야기로 답을 대신했다.
“작년에 달력을 5000장 찍었어요. 우리 절에 다니는 신도의 몇 배에 해당하는 분량이었죠. 그런데 그 5000장이 다 배포됐어요.”
각운 스님은 경북고 2학년에 재학 중 입산했다.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을 접하면서 바로 출가를 결심하게 됐어요. 입산한 후 구름 따라 물 따라 걸망 하나 메고 전국 사찰의 선방을 돌며 면벽수도를 했죠. 3개월 동안 면벽 참선하는 걸 23번 했는데 과분하게 주지도 시켜주시고 하는군요.”
—속세와의 연을 끊을 때 힘들지 않았습니까.
“그냥 도망치듯 집을 나왔어요. 형수님이 내가 입산한 절로 찾아와서는 울면서 ‘어머니가 쓰러졌으니까 집에 가자’고 하소연하기도 했죠. 그래서 처음에 내가 찾아간 절이 직지사였는데 법주사로 도망갔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장례는 잘 치러드렸지만 속인의 입장으로 돌아가면 어머니 속을 엄청 썩인 셈이죠.”
—속세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은 느끼지 않습니까.
각운 스님은 “내가 절에 온 지 벌써 수십 년”이라는 말과 웃음으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취재가 끝난 후 스님은 다시 직접 승용차를 몰아 기자 일행을 처음 만났던 그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스님 혼자 다시 올라가시려면 적적하시겠어요.
“적적? 글쎄요. 내 평온함이 속인들의 눈에 적적함으로 보인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