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설 초기 일본은 2002 한일 월드컵 때까지 완공 못할 것이라 장담
⊙ 현장관리를 위한 매니지먼트 도입, 술 마시고 고스톱 치는 분위기 몰아내 工期 단축
⊙ 침하 논쟁 거센 가운데 朴泰俊 총리 현장 방문, 암반층까지 10~15m는 걱정 없다고 격려
⊙ 개항 앞두고 공항 지하 차도 누수, ‘砂上樓閣’이라는 언론의 뭇매 맞고 힘들어
⊙ 2020년까지 항공수요 증가추세 고려해 단계적으로 개발, 비즈니스, 쇼핑, 레저, 엔터테인먼트,
물류 포괄하는 공항 복합 도시로 거듭날 것
⊙ 현장관리를 위한 매니지먼트 도입, 술 마시고 고스톱 치는 분위기 몰아내 工期 단축
⊙ 침하 논쟁 거센 가운데 朴泰俊 총리 현장 방문, 암반층까지 10~15m는 걱정 없다고 격려
⊙ 개항 앞두고 공항 지하 차도 누수, ‘砂上樓閣’이라는 언론의 뭇매 맞고 힘들어
⊙ 2020년까지 항공수요 증가추세 고려해 단계적으로 개발, 비즈니스, 쇼핑, 레저, 엔터테인먼트,
물류 포괄하는 공항 복합 도시로 거듭날 것

- 2001년 3월 29일 개항한 인천국제공항.
개항 보름 전 시스템 운영 체계를 점검한 DLiA 항공컨설팅컨소시엄은 23개 부문에 결함이 있어 전면 개항이 어렵다고 발표했다. BHS(수하물처리시스템)와 CTX(폭발물 점검 장비) 등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지적됐다. 언론과 일부 정치인들은 개항을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부는 예정대로 강행했다.
인천공항의 역사적인 첫 랜딩(landing)은 이날 새벽 4시. 일본 NHK 보도 팀은 새벽부터 중계방송 카메라를 세팅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개항 첫날이니 분명 시스템 오류로 인한 혼선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곧 세계적인 특종을 할 것처럼 한껏 상기된 표정이었다.
일본은 1996년, 2002 한일 월드컵 공동유치가 결정됐을 때 ‘한국은 공항이 작아 월드컵을 치르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이 2002년 개항을 목표로 신공항 건설에 속도를 내자 ‘한국의 재정 상태나 기술면에서 월드컵 때까지 완공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런데 월드컵을 1년 이상 남겨 놓은 시점에, 그것도 간사이공항보다 5배나 큰 공항을 완공하자 일본은 깜짝 놀랐다. 동시에 단축된 공기(工期)로 인해 뭔가 치명적인 오류가 있을 것이라 예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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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의 간석지를 매립해 조성한 인천공항의 부지는 5600만㎡(1700만평)로 여의도 면적의 18배 크기다. |
한국을 넘어 아시아의 관문이 된 인천공항이 2011년 개항 10주년을 맞는다. 공항 단일 규모로 세계 최대인 이 공항의 개항 이후 성적표는 화려하다. 우선 서비스 부문에서 5년 연속 세계 최고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국제공항협회가 세계 181개국 1700여 개 공항의 협의체와 매년 실시하는 세계공항서비스평가(ASQ)에서 5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또한 미국의 세계적인 비즈니스 여행 전문지 <글로벌 트래블러>의 독자들이 선정하는 세계 최고 공항상을 5년 연속 수상했다. 두 기관의 평가에서 5년 연속 1위 자리에 오른 것은 인천공항이 처음이다.
인천공항은 건설 초기 목표했던 동북아시아 허브공항의 입지도 탄탄히 구축해 가고 있다. 인천공항은 2009년 현재 여객수송 세계 12위(2854만여 명), 화물수송실적 세계 2위(230만여 톤), 환승률 연 18%(5200만여 명)를 기록하고 있다. 경쟁공항인 일본의 간사이, 홍콩의 첵랍콕, 싱가포르의 창이공항을 제친 지 오래다.
개항 이후 채 5년이 안되어 세계 최고의 공항으로 자리매김한 인천공항이지만 개항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건설 계획이 발표된 직후부터 ‘안전’과 ‘규모’ 문제로 잡음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 언론과 시민·환경 단체의 끈질긴 반대 속에 한국 토목 역사를 새로 쓴 인천공항 건설주역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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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공항은 매년 실시되는 세계공항서비스평가(ASQ)에서 5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사진은 지난해 5월 중국 화이난성에서 있었던 시상식 장면. |
1960년대부터 新공항 건설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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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설 초기인 1996년 상공에서 바라본 현장. |
1960년대 말 세계는 지구촌 곳곳이 일일생활권에 편입되면서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해졌다. 이 흐름을 타고 한국도 항공기 수요가 급증하자 장기적인 공항개발 계획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됐다. 이후 20년 동안 정부는 네 차례에 걸쳐 타당성조사를 실시했다.
1차(1969~1970)는 미국 공항전문 업체인 AEC(Airways Engineering Corporation)에 의뢰, 1년 동안 실시했다. 그 결과 당장 신공항을 건설하기보다는 기존 김포공항을 확장하기로 했다. 당시 AEC는 김포공항을 확장할 경우 향후 29년 동안 사용이 가능하다고 했다.
2차(1979~1980)는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실시했다. 반월공단 인근 해변인 군자 지역과 시화 지구, 이천 지역 등 3개 지역이 후보지로 떠올랐다. KIST는 이 중 군자 지역을 최적의 신공항 후보지로 건의했다.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30km)이고 해변에 활주로를 건설할 수 있어 소음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3차(1982~1983)는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가 실시했다. 그 결과 경기도 이천이 최종 후보지로 떠올랐으나 정치권에서 후보에도 없던 청주에 건설하자는 의견이 돌출했다. 행정수도 이전 계획과 연계된 정치적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항공 수요의 80%가 수도권에서 발생하고, 청주는 서울에서 너무 멀어(140km 거리) 흐지부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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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진중공업(남쪽)과 현대건설(북쪽)이 시공한 방조제 공사는 2년여 만인 1994년 10월 물막이 공사를 끝으로 완공됐다. |
신공항 건설은 10년 이상 소요된다는 점에서 정부로서는 후보지부터 선정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에 1989년 3월 교통부 안에 임시기구로 신공항 건설 실무추진위원회를 구성했고, 당시 강동석(姜東錫) 교통부 기획관리실장이 위원장에 추대됐다.
마지막 4차 타당성조사(1989~1990)는 유신코퍼레이션이 실시했다. 유신코퍼레이션은 AEC와 제휴해 김포국제공항 타당성조사를 했고, 여러 차례 국내 공항 확장 설계를 담당한 회사다. 6개월에 걸쳐 실시된 조사 결과 수도권 신공항 후보지 22개소 가운데 영종도와 시화 지구가 최종 후보지 결정을 놓고 경합을 벌였다. 두 후보지는 지형 조건이나 기상 장애물 제한 요건 등에서 공통점이 많았다.
하지만 영종도가 시화보다 수심이 2m 얕고, 서울과의 거리가 가깝다는 점에서 유리했다. 영종도는 3면이 바다여서 시화 지구에 비해 소음이 적다는 장점도 있었다. 결국 신공항건설 추진위원회는 1990년 6월 14일 가진 3차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영종도를 최종 후보지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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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립이 한창인 1996년 10월의 영종도. |
사전 준비 없이 기공식부터
영종도가 최종 후보지로 선정되고, 신공항 건설 계획이 발표됐다. 신공항은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의 바다를 매립, 5600만m2(1700만 평) 부지에 건설되며 세계 최대 공항인 시카고 오헤어공항의 2배, 유럽 최대인 런던 히드로공항의 5배, 아시아 최대인 간사이공항의 5배 규모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계획이 발표되자 언론과 시민단체들이 ‘규모’와 ‘환경’, ‘안전’ 문제를 거론하며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언론은 ‘기존 김포공항의 확장과 운용의 묘를 살리는 등 현재의 경제 여건에 맞도록 신공항의 사업 규모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00만 평 규모면 세계 최대 공항을 수용할 수 있는데 영종도 공항은 1700만 평이나 되어 좁은 국토를 크게 차지할 뿐 아니라 최대 수송인원을 1억명으로 산정한 것도 비현실적’이라고 우려했다.
환경 운동을 펼치는 시민단체는 ‘잘못된 입지 선정과 국토 불균형 가속화, 해일과 해무 등 자연재해로 인한 항공참사 가능성, 환경 파괴’ 등을 이유로 재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같은 반대 여론 속에 1992년 11월 12일 신공항 기공식을 인천 영종도에서 가졌다. 대통령 임기를 석 달여 남겨 놓은 시점이었다. 경부고속철도와 마찬가지로 현직 대통령 임기가 끝나기 전에 서둘러 기공식을 하다 보니 사전 준비가 안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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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주로와 여객터미널 공사가 진행 중인 1998년 모습. |
“우리나라는 국책사업의 태반이 사전 준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기공식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시행착오가 많아 완공이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지연되게 마련이죠. 경부고속철도가 대표적이지 않습니까. 인천공항은 그 같은 폐단을 줄이고자 기공식을 미뤄 왔는데, 차기 대통령 취임이 코앞으로 다가온 데다 기공식 장소가 섬이라 겨울이 오기 전에 급하게 기공식을 거행했지요.”
용지에 대한 보상도 안 끝난 상황이어서 기공식 장소도 주인에게 사용 허가만 받고 급하게 복토(覆土)한 논이었다고 한다. 사전 준비 없이 기공식부터 한 터라 일의 진전이 있을 리 없었다. 현장에는 공사 전용 도로 하나 없었다고 한다.
“대형 공사를 하려면 자재와 인력이 출입할 공사 전용 도로가 있어야 합니다. 영종도는 전용 선박도 도로도 없어서 초기에는 기존 민간선과 농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월미도에서 작은 민간선을 타고 영종도에 도착한 후 현장까지는 논 가운데로 난 2차선 도로를 타고 갔지요. 도로는 좁고 구불구불한데 15톤 덤프트럭이 자재를 싣고 오가니 속도도 늦고 사고가 많이 났어요. 서로 피해 가려다 논에 빠지거나 전복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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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골조 공사만으로도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여객터미널. |
1만여 인부 위한 캠프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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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출 콘크리트 기법으로 시공한 104m 높이의 관제탑. |
“이사장 취임 후 현장에 가보니 덤프트럭 몇 대만 오락가락하고 별 진척이 없더군요. 당시 영종도에는 3개 주요 시공사와 협력업체들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방조제 공사 북측을 맡은 현대건설, 남측을 맡은 한진건설, 1공구 부지 공사를 맡은 금호건설 등이었죠. 이들 업체는 현장을 관리할 소장을 한 명씩 파견했는데, 서울에서 영종도까지 출퇴근하는 데만 2시간씩 소요됐어요. 그러다 보니 현장 관리가 제대로 안되고 있었습니다.”
강 이사장은 우선 자재를 운송할 공사 전용 도로부터 만들었다. 그리고 1만5000~1만8000명에 이르는 인부들이 생활할 캠프를 건립했다. 수많은 인부를 매일 출퇴근시킬 수도 없는데다 공기 단축을 위해서는 야간작업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캠프 건립은 필수였다.
“캠프를 건립할 때는 중동의 사막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소장들을 모아 캠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회의를 했습니다. 당시 현장 상황이 사막과 비슷했거든요. 외부와 단절돼 있는 섬인데다 바람이 불면 준설토인 모래가 날려 서걱거렸습니다.”
중동 경험 소장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경찰 2개 중대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남자들만 모여 있는 현장에서는 술을 마시면 건설사 직원끼리 패싸움을 벌이는 일이 잦다는 것이었다. 경찰서에 협조 공문을 보낸 결과, 2개 중대까지는 아니지만 경찰관 5명이 상근하는 영종파출소 공항 건설 현장 분소가 생겼다.
이후 대부분의 인부는 출퇴근 없이 캠프에서 지냈다. 그러다 보니 밤이면 무료함을 달래려 고스톱을 치고 술을 마셨다. 노동 현장의 속성을 잘 아는 장사꾼들은 여자까지 데려와 인부들의 주머니를 털었다. 용유도에 비즈니스 클럽 등 룸살롱 비슷한 술집까지 생겼다.
현장에서 인부들에게 음식을 공급하는 현장 식당도 문제가 많았다. 현장 식당은 밥과 술은 물론 노름을 부추기는 고리대금업까지 하며 돈을 벌었다. 현장 인부들은 일당을 현금 대신 3개월이나 6개월짜리 어음(일명 딱지)으로 받는데, 현장 식당이 이 어음을 할인된 돈으로 바꿔줘 노름을 하고 있었다.
강 이사장은 “건설 현장 분위기가 이래서는 국책사업을 제대로 완수할 수 없겠다 싶어 현장부터 장악했다”고 말했다.
“우선 현장 소장들의 직급을 높이고, 그만큼의 책임감을 부여했어요. 그리고 캠프에서 도박은 금지시켰고, 현장 식당이든 전문 업소든 밤 10시 이후에는 술을 못 팔게 했습니다. 만약 캠프에서 도박을 하거나 밤 10시 이후 술을 마시면 당사자들은 물론 술을 판 업소와 현장 소장까지 퇴출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죠. 그러곤 예고 없이 수시로 현장을 방문했습니다. 그랬더니 술집은 하나 둘 문을 닫고 철수하고, 현장 식당들은 본연의 업무에만 충실하더군요.”
도박은 물론 10시 이후면 음주도 할 수 없게 되자 패싸움이 사라졌다. 상근 경찰 수가 적어 은근히 걱정했던 부분이 해결됐다. 뿐만 아니라 공기도 앞당겨졌다. 밤이면 술과 도박을 일삼던 인부들이 너도나도 야간근무를 자원한 덕분이다. 강 이사장의 말이다.
“야간 근무 수당은 주간보다 높았습니다. 그 때문에 인부들이 ‘기왕 고생하러 온 것 돈이나 벌어 가자’며 서로 야간근무를 하려 경쟁하는 바람에 공기가 많이 단축됐습니다.”
주민 위해 컨테이너 마을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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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공항 건설을 진두지휘했던 강동석 전 인천공항공사 사장. 현재는 2012여수세계박람회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다. |
“토지나 가옥(家屋) 소유자에게 ‘이건 국책사업이니까 공사를 먼저 하게 해달라. 보상은 나중에 감정가가 나오면 적절하게 해주겠다’는 식으로 협조를 구해 시공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어업권 보상이었어요. 토지·가옥은 유형의 자산이니까 감정하면 규모가 나오는데, 어업권은 무형의 것이어서 얼마가 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어업권 보상이라는 것이 ‘나는 개펄에서 바지락을 잡아 매년 얼마의 수익을 냈으니 앞으로 5년치를 보상하라’는 식이잖아요.”
영종도보다 앞서 보상 문제를 마무리한 시화 지구는 과히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다. 시화 지구는 보상을 노리고 전입한 주민들이 들끓었다. 이들은 낡은 배를 한 척 산 후 생업이 고기잡이였다고 속여 적지 않은 보상금을 타갔다. 폐기하는 배를 빼돌린 후 다른 곳에서 이중으로 보상을 받는 이도 상당수였다. 어업 보상은 동네 이장이 확인 도장만 찍어주면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꼼짝없이 당했다고 한다.
강 이사장은 이런 폐단을 줄이기 위해 주민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주민들과 한 식구처럼 친하게 지내기로 한 것이다. 그는 “주민들과 한 배를 탄 운명임을 보여주기 위해 본적을 영종도로 옮겼다”고 말했다.
“본적뿐만 아니라 살림도 영종도로 옮겼습니다. 컨테이너 집을 짓고 아내와 함께 생활했죠. 주민들 속에 섞여 살아보니 영종도는 가구 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조상 때부터 대대로 살아오신 분들이 많더군요. 이들에게 ‘보상금 줄 테니 나가라’고 하는 건 옳지 않은 방법 같아서 임시 거주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컨테이너로 7평짜리 집을 지어 신도시가 건립될 때까지 살 수 있도록 한 것이죠. 마을 안에 교회와 학교도 지어주었습니다.”
젊은 사람은 시공사 측에 부탁해 취업도 시켜주었다. 또한 노부부에게는 “앞으로 영종도는 공항 덕분에 잘사는 지역이 될 테니 받은 보상금을 도시에 나간 자식들에게 줄 생각 말고, 오히려 자식들을 불러들이라” 일러주었다. 그렇게 주민들과 지내는 사이 신뢰가 쌓여 보상 문제로 마찰을 일으키는 일이 소소했다고 한다.
방조제에 나무뿌리 넣었다 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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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김정웅 한진중공업 건설부문 부회장. 인천공항 건설 당시 한진건설 현장소장으로 근무했다. (오른쪽) 강성수 인천국제공항공사 시설본부장. |
“건설 초기에 고생을 많이 했어요. 접근로가 없어서 월미도에서 몇 시간씩 배를 기다려 타고 중장비와 자재를 운반했습니다. 배에서 내린 후 현장까지 갈 때는 중장비를 전부 분해해서 카고나 덤프트럭에 싣고 날랐지요. 중장비 운반용 트레일러에 실으면 분해하지 않고도 운송이 되는데, 길이 좁아 불가능했어요.”
한진은 남측 방조제 외에도 활주로와 여객 청사를 시공했다. 여객 청사의 경우 42%를 담당했다. 입찰 당시 건설업계 10위였던 한진이 현대와 삼성, 대우 등 상위 업체들을 제치고 가장 많이 낙찰을 받자 언론은 정경유착이라며 특혜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맹세컨대 정경유착이나 특혜는 없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진은 다른 분야라면 몰라도 공항 건설에 관한 한 노하우가 많습니다. 전국 대다수의 공항을 한진이 건설하지 않았습니까. 그 덕분에 가격 경쟁력에서 타사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지요. 방조제 시공도 일부러 길이가 짧은 남쪽을 맡았습니다. 조남호(趙南鎬) 회장(당시 한진건설 사장)께서 ‘여객 청사가 어느 쪽에 앉지?’ 하고 묻기에 ‘남쪽입니다’라고 했더니 ‘그럼, 남쪽을 합시다’라고 하더군요.”
사실 한진건설은 방파제 시공 경험은 있으나 방조제는 처음이었다. 이 때문에 특혜 의혹을 갖고 있던 언론은 현대건설이 맡은 북측보다 남측을 주시했다. 시행착오가 많을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물막이 공사가 20% 진행되었을 때 대형 사고가 터졌다. 누군가가 지역 언론사에 ‘남측 물막이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덤프트럭 기사 2명이 반나절 동안 나무뿌리를 넣었다’고 투서한 것이다.
다음날 지역 신문 1면에 대문짝만 하게 기사가 실렸다. 때마침 국정감사 기간이어서 이를 본 국회 교통분과위원 20명이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러곤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겠다”며 “파보자”고 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투서자의 말을 믿고 무작정 파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름 철저히 관리 감독을 했다고 믿은 그는 국회의원들을 막으며 “파서 안 나오면 누가 책임질 것이냐”고 따졌다. 그러자 야당 의원들이 “책임자라는 놈이 국회의원을 협박한다”며 소리를 질렀다. 결국 정치인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어 굴착기로 파내기 시작했다. “나무뿌리가 들어갈 리 없다고 확신하면서도 한 삽 한 삽 파낼 때마다 간이 콩알만 해졌다”고 그는 당시를 회고했다.
“만에 하나 제보한 대로 나무뿌리가 나오면 회사가 문을 닫아야 할 상황이었어요. 오전 내내 파냈지만 천만다행히도 나무뿌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가 8월이라 날은 덥고 짜증이 났던지 몇몇 여당 의원이 ‘이제 그만하자’고 제지했지만 야당 의원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어요. 흙 속에 섞인 가느다란 뿌리털이나 막대기 하나만 나와도 ‘저거다, 저거다’ 하면서 난리가 아니었지요. 그렇지만 투서자가 제보한 나무뿌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공사가 하루 중단되고, 이미 완료된 상당부분을 파헤쳐 놓은 것에 대한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았다. 고스란히 시공사가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김 부회장은 “지역 신문에 거짓 제보한 사람이 누구인지 나중에 밝혀졌지만 고소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덤프트럭 기사였는데, 자신을 고용한 협력업체에 불만을 품고 거짓 제보를 한 것 같더군요. 마을 사람인데다 시끄러워지는 것이 싫어서 그냥 넘어갔습니다.”
물막이 공사 위해 24시간 자연과 死鬪
착공 2년째 접어들자 어느 정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쪽 방조제의 최대 난공사는 끝막이(물막이) 공사였다. 남은 600m를 막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 520kg급 사석 1000트럭분을 50초 간격으로 양 방향에서 투입했다. 유속이 4m/초 이상인 곳은 철망태에 3톤 정도의 돌을 채워 하루 24시간 한순간도 쉬지 않고 바다에 투하했다. 잠시라도 철망태 투하가 중단되면 그동안의 작업이 무위로 돌아갈 상황이었다. 김 부회장은 “한 달 동안 자연과 사투(死鬪)를 벌인 기분이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현대 정주영 회장이 서산 간척지 물막이 공사 당시 물살을 막기 위해 폐선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그 심정이 이해되더군요. 바윗덩어리를 집어넣어도 날아가는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질 정도로 유속이 빨랐습니다. 2.5톤짜리 돌망태를 만들어 수없이 집어넣었지만 무용지물이었어요. 물살이 센 강물에 발을 디디면 발 밑의 모래와 흙이 순식간에 쓸려 내려가 파이는 것과 같은 원리였습니다. 기존 공법으로는 바위와 흙이 휩쓸리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어요.”
현대건설이 맡은 북쪽 방조제와 동시에 일을 끝내고 축하행사를 하기로 한 날은 10월 29일.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양 사는 누가 먼저 물막이 공사를 끝내는지 자존심을 건 시합을 한 상태였다. 한진 측은 고민 끝에 돌망태를 던져 넣었을 때 바닥이 파이지 않도록 커다란 부직포를 깔기로 했다. 썰물이 되자 5톤짜리 콘크리트를 매달아 바다에 던져 넣었고, 뒤이어 돌망태를 투하했다.
물막이 공사 완료 시기를 10월로 잡은 것은 연중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적기 때문. 방조제 시공이 처음인 한진은 이 기간을 넘기지 않기 위해 사활을 걸다시피 매달렸다.
“솔직히 방조제 시공에 관한 한 노하우나 경험 면에서 현대건설을 따라갈 만한 곳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저희는 애초에 시합에서 이기리라는 것보다는 너무 늦지 않게 완료하면 족하다는 생각이었어요. 정부에서도 저희 쪽에는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막이 완료 행사도 북쪽에서 하기로 예정돼 방송사와 언론사 기자들이 대기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북쪽 물막이 공사가 지연되는 바람에 행사장이 급하게 저희 쪽으로 바뀌었어요. 우리가 먼저 완료한 것이죠.”
물막이에 성공하는 순간 현장에 있던 조남호 회장이 만세를 불렀다. 김 부회장은 “그 순간 지난 2년여의 노고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 정도면 아무것도 아니네”
방조제 공사가 완료되자 매립 작업이 본격화됐다. 김 부회장은 “영종도가 공항을 건설하기에 천혜의 지형 조건을 갖춘 곳이라는 것을 매립 공사를 하며 알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저희가 방조제와 매립 공사를 하는 동안 금호건설은 화물 터미널, 화물 계류장, 주차장 등이 들어설 부지 조성 공사를 했어요. 금호가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부지 내 야산 가운데 항공기 운항에 지장을 주는 신불도와 산목도의 석산을 제거하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엄청난 암석과 흙이 매립에 사용됐어요. 덕분에 매립토를 외부에서 들여오느라 돈을 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준설토는 인천항만 바닥에서 채취해 선박으로 운반했다. 덕분에 인천항은 수심이 깊어져 뱃길이 좋아졌고, 인천공항은 준설토를 공짜로 얻어서 좋았다. 이거야말로 일거양득이었다. 그는 “인천공항은 이런 지형적 특성 덕분에 건설 당시 엄청난 비용이 세이브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같은 매립지에 세운 간사이공항은 170만 평에 15조원이 들어간 반면, 인천공항은 이보다 10배 넓은 1700만 평에 5조원이 투입됐다.
매립 공사 후 활주로 시공에 들어갔다. 인천공항에 배치된 활주로는 모두 4개. 이 중 2개의 장대형 활주로는 1단계 공사에서 건설했다. 한진중공업은 제2활주로 시공은 다른 두 건설사와 함께 공동 시공했다. 활주로 시공에 들어갈 무렵 조남호 회장은 김 부회장에게 “결국 우리 비행기가 뜨고 내릴 곳이니 안전하고 튼튼하게 공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다.
안전 운항을 위한 공항의 핵심은 활주로다. 영종도에 신공항 건설을 반대한 이들의 대다수는 개펄 매립지에 들어서는 만큼 침하 우려가 크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훗날 활주로에 손톱만큼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활주로에는 침하를 막을 갖가지 첨단 공법이 총동원됐어요. 유압식해머다짐 공법, 샌드드레인 공법, 페이퍼드레인 공법 등이었습니다. 샌드드레인과 페이퍼드레인 공법은 매립지에 강관을 박아 개펄 층에 있는 물기를 제거하는 작업이었죠. 암반층이 있는 곳까지 강관을 박은 후 모래를 집어넣으면 샌드드레인, 종이를 집어넣으면 페이퍼드레인 공법이 됩니다.”
개펄에 강관을 심어 물기를 제거하고 땅을 다지는 공법은 이미 광양제철소 건립 당시 시행해 성공을 거둔 바 있다. 그런데도 언론은 활주로의 침하 가능성을 끊임없이 제기했다. 그러자 하루는 과거 광양제철소 건설을 진두지휘한 박태준(朴泰俊) 총리가 현장을 방문했다. 박 총리는 그에게 “암반까지 닿는 강관 길이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그가 “10~16m 정도 된다”고 답하자 박 총리는 “그 정도면 아무것도 아니네”라며 “광양제철소는 50~70m짜리 강관을 심었을 정도로 뻘층이 깊었는데 지금까지 아무 문제없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박 총리의 격려가 많은 힘이 되었다고 했다.

공항 지하 차도 누수 사건
대형 토목 공사에는 수많은 시공사와 협력업체들이 참여하지만 그만큼의 업체들이 경쟁에서 밀려난다. 그러다 보니 온갖 시기와 음해성 발언이 난무한다. 언론사에는 그에 따른 제보가 잇따른다. 인천공항 지하 구조물 누수 사건도 이런 배경에서 터졌다.
사건은 방수 관련 업자가 인천공항 화물 터미널과 여객 터미널 계류장을 연결하는 지하 차도(1050m)에서 물이 샌다고 방송사에 제보하면서 시작됐다. MBC 시사 고발 프로인 <2580>팀은 제보를 받고 출동해 지하 4차선 차도에 물이 고여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장화까지 신은 채 현장 보도를 했다. 벽면에 균열이 생기고 방수 처리가 부실해 물이 샌다는 내용이었다.
균열 문제보다는 벤토나이트라는 천연 화산재를 방수재로 사용한 것이 화근이었다. 김 부회장은 “100년 이상 가야 하는 구조물이라 국내에서 흔히 사용하는 아스팔트 대신 벤토나이트라는 천연 화산재를 방수재로 사용했는데, 방수 효과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사건을 키웠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이다.
“국내 업자들이 취급하는 아스팔트 방수재는 생명이 길지 않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벤토나이트라는 화산재를 미국 업체로부터 구입해 시공하게 됐어요. 벤토나이트는 부산 지하철 공사에도 사용했는데, 물을 먹으면 팽창해 밀착되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담수와 염수에 따라 벤토나이트의 팽창 속도가 다르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에 있었다. 방송 보도 직후 ‘사상누각’(砂上樓閣)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할 정도로 부실 파문이 일자 시공사는 벤토나이트를 판매한 미국 업체 기술진을 불렀다. 현장에 도착한 이들은 고인 물의 염도부터 측정했고, 담수와 달리 염수는 벤토나이트 성질상 시공 후 최소 6개월이 지나야 팽창돼 밀착력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시간이 경과되면 해결될 문제였다.
설사 그렇더라도 “앞으로 보완하겠다”고 하면 끝날 일이었는데 고지식한 기술진은 이론적으로 자꾸 변명을 했다. 이 같은 사실을 보고받은 대통령은 “요즘 언론이 너무 한다”며 “자세히 알아보니 큰 문제가 없는데 부실 공사로 과장보도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화가 난 취재진이 2차 보도까지 하는 바람에 감사원장, 국정원 차장까지 현장에 출동했다. 이 일로 임기가 끝난 공단의 토목 본부장이 재선임을 받지 못해 퇴진했다. 김 부회장은 “개인적으로 이때가 가장 힘들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시공 전 벤토나이트 방수재의 염해 환경에 대한 특성을 분석하지 않은 게 결국 일을 키운 꼴이 되었습니다. 시공 6개월 후 이 지하차도는 누수 현상이 사라졌고, 현재까지 굳건합니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아스팔트 방수재 대신 벤토나이트를 사용한 건 잘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뼈아픈 경험이지만 이때의 사건은 방수재로 벤토나이트를 사용하는 데 좋은 선례가 됐다.
한국 토목 기술 발전 견인
인천공항 건설을 통해 한국 토목 기술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고 평가받는 부분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 대형 국책사업 현장에 매니지먼트 개념이 도입됐다는 점이다. 당시 시공에 참여한 업체들은 “강동석 이사장이 한국형 현장관리 개념과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했다”고 입을 모았다.
인천공항 건설 전에 매니지먼트 개념이 도입된 곳은 원자력 발전소였다. 건설 매니지먼트사인 벡텔과 파슨스 인터내셔널 용역으로 이뤄졌다. 그러다 보니 언어 소통 문제도 있고,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100% 소화에는 한계가 있었다.
두 번째는 노출 콘크리트 시공 기술이다. 인천공항은 표고 104m의 관제탑을 노출 콘크리트 기법으로 시공했다. 이를 위해 페인트칠을 하지 않고도 서해의 해풍과 염도에 견딜 수 있고, 곰보 자국이나 균열이 없는 콘크리트 배합 기술을 개발했다. 이후 수많은 교각과 건축에 이때의 노출 콘크리트 기술이 응용됐다.
셋째는 활주로 전체에 그루빙(grooving) 기술을 도입한 점이다. 그루빙은 노면에 빗금을 긋듯 골을 파는 것으로, 이렇게 하면 비가 와도 배수가 빨라 수막현상으로 인한 미끄럼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국내에서 아스팔트 활주로에 이 기술을 도입한 것은 인천공항이 최초이다. 이후 이 기술은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등 커브와 경사가 심한 곳에 활용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건설의 기본인 콘크리트 제조 시 생산 이력제를 실시했다는 점이다. 모래와 자갈 관리자, 배합 기술자, 운송자가 누구인지 철저히 기록해 부실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했다. 생산 이력제 실시는 현장 인부들이 책임감과 자부심을 동시에 갖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반대론자들 지금은
인천공항 건설은 유난히 반대 여론이 비등했던 국책사업이었다. 당시 여론을 주도했던 것은 언론과 환경·시민 단체였다. 강성수(姜聲洙) 인천국제공항공사 시설본부장은 “당시에는 반대를 위한 반대가 많았고, 이론에 근거하지 않은 황당한 주장도 상당수였다”고 말했다.
“건설 초기에 가장 많이 나왔던 말이 ‘대한민국에 과연 이런 대규모의 공항이 필요한가’였습니다. 1700만 평이라는 부지 때문에 규모가 너무 크다는 얘기였지요. 1700만 평의 부지 중 공항은 2700만㎡(820만 평) 정도입니다. 또 미래 공항은 단순히 하늘과 육지를 연결하는 기능에 국한되지 않고, 기술, 정보 등 무형의 자산교역이 이뤄지는 경제활동의 장(場)이라는 점에서 부지를 여유 있게 마련해 놓은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인천공항은 개항 이후 급증하는 항공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활주로 1본(제3활주로)과 탑승동 1동을 추가 건설했다. 또한 2015년경 완공할 목표로 제2터미널 신축 기본 설계를 추진 중이라고 한다. 공항 시설과 별도로 미래 항공 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국제업무단지에 의료시설을 유치하는 등 다양한 개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강 본부장은 “인천공항은 2020년까지 항공수요의 증가추세를 고려해 단계적으로 개발할 것이며, 비즈니스, 쇼핑, 레저, 엔터테인먼트, 물류를 포괄하는 새로운 공항 복합 도시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로 많이 등장한 문제 제기는 ‘영종도가 공항 입지로 안전한가’였다. 그 이유로 개펄에 건설돼 침하될 우려가 있고, 안개와 철새 때문에 항공 참사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이 같은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강 본부장의 설명이다.
“연약층 침하는 설계 당시 10년에 2.5cm(관리 기준치) 정도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8~10mm 정도밖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안개의 경우 안개일수가 김포공항의 절반도 안되는 것으로 확인됐고, 항공기와 충돌할 것으로 우려했던 철새는 영종도 개펄이 사라지면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갔지요.”
강 본부장은 “조류와 안개, 침하 문제 등을 제기하며 인천공항 건설을 반대했던 서울대 모 교수가 지금은 4대강 사업을 반대하고 있더라”며 씁쓸해했다.⊙
| ▣ 인천공항 건설 관련 진기록 인천국제공항 건설 사업은 그 규모에 걸맞게 각종 흥미진진한 진기록이 양산됐다. 우선 건설에 소요된 설계 도면만 약 45만 장에 이른다. 이를 쌓으면 빌딩 15층 높이의 분량이다. 건설 과정에 소요된 골재량은 974만4000㎡, 15톤 덤프트럭 기준으로 약 1036만2000대분으로 일렬로 세우면 서울과 부산을 110회나 왕복할 수 있다. 연약 지반 강화를 위해 소요된 강관 파일 수는 약 3만3000여 개로, 일렬로 세우면 1682km가 된다. 이는 서울과 부산을 2회 왕복할 수 있는 거리다. 공항 내 잔디를 심은 면적은 420만㎡(127만 평)로서 18홀 골프장 10개를 만들 수 있는 넓이다. 공항 조경에 사용된 수목은 183만1000주로, 조성 면적은 100만㎡(30만 평)이다. 이는 올림픽공원 수목 식재 수량(약 32만7000주)의 5.6배에 해당한다. 공항건설에 투입된 인력은 하루 평균 1만3000여 명으로, 공사 절정시에는 하루 평균 1만8000여 명에 달했다. 간석지를 매립해 조성한 부지만도 5600만㎡(1700만 평), 여의도 면적의 약 18배 크기다. 인천국제공항의 핵심 시설인 여객터미널은 연면적 약 50만㎡(15만 평), 길이 1066m, 폭 149m, 높이 33m로 단일 공항 건축물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연면적 기준으로 63빌딩의 3.1배, 국제 규격 축구장의 60배에 해당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