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愼鏞碩의 지구촌 이야기] 노르망디 상륙 해변을 기념공원화한 프랑스인들

콜빌마을 주민들이 美軍 위해 세운 ‘우정의 광고판’ 보고 ‘착잡’

  • 글 : 신용석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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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대 높은 프랑스 사람들, 미국과 견해를 달리할 때도 있지만 노르망디 일대를 보호하고, 관련 박물관만도 29개나 만들어 놓고 역사의 현장으로 보전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을 관광상품화하겠다는 인천시에 이 같은 광고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8월 프랑스 여행의 주목적은 노르망디(Normandie) 상륙작전의 현장을 찾는 것이었다. 1970년대 <조선일보>(朝鮮日報) 파리특파원으로 근무할 때 몇 차례 노르망디 현지를 취재했었고, 그 후에도 간혹 현장을 찾아보았다. 특히 2004년 노르망디 상륙 60주년 기념식은 프랑스 정부가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을 초청해 대규모로 치렀기 때문에 텔레비전과 각종 미디어를 통해 행사의 의미와 감동을 접할 수 있었다.
 
  이번에 새삼스레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현장을 찾아가기로 결심한 것은, 우리나라도 인천(仁川) 상륙작전 60주년을 맞이해 인천광역시(市)와 국방부 등에서 대규모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언론보도를 접한 후, 노르망디처럼 역사의 현장을 보전하는 장기계획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9월 15일에는 월미도(月尾島) 일대에서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미국과 프랑스 등 각국 함정이 인천상륙작전을 실제 상황처럼 재연(再演)하기 위해 함포지원과 상륙돌격 등 당시 상황을 순서대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인천시는 이 같은 행사를 마친 후, 상륙작전을 인천의 대표적 관광상품으로 특화(特化)시킬 것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상륙작전 현장에는 관련 푯말 하나 찾아볼 수 없고, 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집행한 맥아더 장군 동상까지도 철거해야 한다는 시위대가 불과 몇 년 전 자유공원에 몰려들었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륙작전을 재연하고 이후 이를 관광상품화하겠다는 보도가 필자로 하여금 노르망디로 다시 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노르망디의 대표도시 ‘컹’에 자리한 상륙기념관
 
노르망디의 중심도시 컹(Caen)에 위치한 상륙작전기념관 입구에서.
  파리에서 서쪽으로 240㎞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노르망디의 대표적 도시 컹(Caen)은 2차대전 당시 철저하게 파괴된 대표적인 도시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전후해 아름답던 중세도시 컹은 융단 폭격과 치열했던 시가전(市街戰) 등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곳에 프랑스 정부는 노르망디 상륙기념관을 세운 것이다.
 
  참전국가의 국기(國旗)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대규모 기념관 정면 광장은 ‘아이젠하워장군 광장’으로 명명되고 있었다. 프랑스 각지에서 온 관람객들과 함께 전시장을 둘러보면서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가까운 오늘날에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 사람들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중년층은 진지한 모습으로, 학생들은 선생님들의 설명을 들으면서 열심히 메모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만나 본 그 어떤 집단보다도 노르망디기념관을 찾아온 사람들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역사적 의미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들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많은 관람객이 미국의 성조기에 머리를 숙이고 전사자(戰死者)들의 사진 앞에서는 묵념을 올리고 있었다.
 
  전시장 내부도 충실하게 꾸며져 있었다. 당시 실전에 배치됐던 항공기나 전차 등은 실물로 전시돼 있었고, 수많은 자료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최신 전시(展示) 기법으로 보기 쉽게 전시되어 있었다. 기념관 관계자는 “매년 60만명 이상이 기념관을 찾는다”면서 “그중에는 외국인들이 30% 정도는 될 것”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기념관을 관람하면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수십 명 단위의 학생 단체관람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선생님들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메모하고 있었다. 프랑스 학생들에게 컹에 있는 상륙작전 기념관은 현대역사 학습의 현장이었다.
 
  기념관 관람을 마치고 찾아나선 곳은 오마하 해변에 있는 미군묘지와 기념관이었다. 상륙작전 당시 연합군은 노르망디 해안 일대를 ‘유타’, ‘오마하’, ‘골드’, ‘주노’, ‘스워드’라는 작전명칭을 부여하고 유타와 오마하는 미군이, 골드와 스워드는 영국군, 그리고 주노는 캐나다군이 맡아서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오늘날 미군묘지는 콜빌(Colleville) 마을이 있는 오마하 해변에 자리잡고 있다.
 
 
  프랑스인들의 ‘우정의 광고판’ 보고 ‘착잡’
 
내부에 전시된 상륙작전 당시의 전투기 기념관.
  콜빌마을에 거의 도착한 지점에서 대형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수십 명의 미군 해병 모습이 그려진 광고판에는 프랑스어와 영어로 “우리를 해방시켜 주어 고맙습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콜빌마을의 주민들이 6000만 프랑스 국민을 대표해 상륙작전에 참전한 군인들에게 감사함을 표시하는 우정의 광고판이었던 것이다.
 
  철거해야 된다는 사람들이 몰려들던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장군 동상 부근에서 3대째 살고 있는 필자는 프랑스인들이 세워 놓은 대형광고판을 보고 감동과 함께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인천상륙작전을 관광상품화하겠다는 인천시에 막상 이 같은 감사의 뜻을 전달하는 광고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콧대 높은 프랑스 사람들은 때에 따라서는 미국과 견해를 달리할 때도 있지만, 노르망디 일대를 상륙작전 당시의 모습으로 보호하고, 관련 박물관만도 29개나 만들어 놓고 역사의 현장으로 보전하고 있는 것부터 배워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 휴가철이기 때문인지 미군 묘지는 주차장에서부터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벌써 네 번째 찾는 곳이지만 이번처럼 많은 관람객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묘지 입구에 있는 기념관에도 많은 사람이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념관 앞에는 상륙작전 당시 실종돼 시신(屍身)을 찾지 못한 1557명의 실종자 이름과 함께 묘석(墓石)이 가지런히 배치돼 있었다.
 
오마하 해변 가는 길에 세워져 있는 미군에 대한 감사를 표시한 광고판.
  앞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던 일행이 영어를 쓰는 미국인 가족 같기에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았다. 미국 위스콘신주에 사는 중년 부부였다. 남자의 큰아버님이 상륙작전 때 전사했고, 매년 가족들이 협의해 전사한 큰아버님 묘소를 차례로 찾아온다고 했다.
 
  한국인이라는 데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기에 필자는 “한국 역시 6·25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戰勢)를 바꾸어 놓았다”고 설명하면서 고맙다는 뜻을 담아 그의 손을 잡으며 악수를 청했다.
 
  기념관 내부에는 대리석벽에 큰 글씨로 “미국 청년들의 정신이 파도 위에서 떠오른다”라는 문장이 조각돼 있었다. 험한 파도를 마다하고 상륙작전에서 용감하게 작전과 전투에 임했던 젊은 군인들의 정신을 상징한 글귀였다.
 
  기념관 내부를 관람하는 사람들 태도 역시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퇴역 군인들은 성조기 앞에서 거수경례를 하는가 하면, 이곳저곳에서 묵념을 하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안내센터에 근무하는 직원은 “근년에는 유럽을 여행하는 미국인이 많이 찾고 있지만, 역시 프랑스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정확하게 9387개의 대리석 십자가(그중 149개는 유대교의 다비드별)가 세워져 있는 묘소는 장관이며 인상적이었다.
 
 
  終戰 66년이 지나도 戰死者 추모행렬 이어져
 
오마하 비치 상륙지점에 세워진 기념 조형물.
  약 20만 평에 달하는 묘소의 대지(垈地)는 프랑스가 미국 정부에 증여해 오늘날에는 미(美)합중국의 영토로 분류되고 있다. 이곳에 미국 정부는 노르망디해변 여러 곳에 산재(散在)해 있던 묘소를 한데 모아 1956년 7월 18일 ‘노르망디 미국 묘소 및 기념관’을 건립했고, 미국 정부 산하의 미국전쟁기념위원회(ABMC)에서 관리하고 있다.
 
  십자가로 된 묘비 하나하나에는 전사자의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사망일자 등이 정연하게 기록되어 있었고, 군데군데 생화(生花)가 놓여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미국에서 가족들이 계속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0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는 묘소에는 구역마다 1000여 개의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66년이 되는 오늘날에도 매일 수백 명의 미국인들과 유럽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와 헌화하고 경의를 표하는 것을 보면서 ‘자유’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 대한 예우와 관심이 지속되고 있는 데 큰 감동을 받았다.
 
  노르망디 해변에는 미군 묘소 이외에도 영국, 캐나다를 비롯한 영연방 군인들의 묘지와 민간인들뿐 아니라 독일군의 묘소까지 자리 잡고 있었다.
 
  상륙작전이 있었던 해변에는 각종 기념조형물이 세워져 있고, 해변 마을마다 상륙작전 관련 기록들이 동판(銅板)으로 부착되어 있는가 하면, 대리석 조형물에 역사적 사실이 기록돼 있기도 했다.
 
  필자는 컹에 있는 기념관과 오마하 해변의 미군 묘소를 중점적으로 보는 데 만족해야 했다. 현지 프랑스인들은 “29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박물관들을 관람하고, 독일군 기지와 각종 기념비와 기념패들을 찾아보기 위해서는 최소한 3~4일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1970년대부터 여러 차례 찾았던 노르망디 해변이었지만, 이번 방문이 더욱 감동적이고 인상적이었던 것은 근년(近年)에 우리나라에서 겪었던 갖가지 현실과 사건 때문이 아니었나 한다. 더구나 인천상륙 60주년을 기념하는 것을 마다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우리가 역사의 현장을 어떻게 보전하고 관리해왔는지를 반성해 보면 앞뒤가 뒤바뀐 느낌을 받는다. 광활한 노르망디 해변을 기념공원화해 놓고 역사학습의 장(場)으로 활용하고 있는 현장을 보면서 역사와 함께 사는 프랑스인들의 지혜가 다시 한번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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