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에 대한 4個國(美, 蘇, 英, 中)의 信託統治방침을 세워놓고 있는 美國務部는 9월 5일에 李承晩이 ‘駐美外交委員長’자격으로 出國할 것을 許可했다가 바로 취소했다. 다시 ‘個人’자격으로 出國을 許可하는 데에는 한달이나 더 걸렸다. 그러나 그의 歸國에 큰 期待를 하고 있던 하지 장군과 맥아더 장군의 배려에 따라 李承晩은 ‘國民的英雄’으로서 10월 16일에 歸國했다. 귀국도중에 도쿄(東京)에 들른 李承晩은 맥아더 장군과 하지 장군과 함께 韓國의 將來問題에 대하여 깊은 對話를 나누었다. 李承晩이 歸國第一聲으로 한 38度線 비판은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반면에 美국무부를 격앙시켰다.
1. 아널드軍政長官의 人民共和國否認聲明
미군정부의 거듭된 부인에도 불구하고 좌익인사들은 조선인민공화국이 미군 진주 이전에 정당한 절차로 수립된 ‘기정사실’이라고 고집함으로써 미군정부와 인민공화국의 길항(拮抗)관계는 계속되었다. 그러한 속에서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는 10월 3일에 제2차 인민대표대회를 1946년 3월 1일에 개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解放日報)』는 이 대회가 “이 공화국의 탄생 이래 최대 최고의 사업의 방향을 결정하는 한편 조선의 장래를 결정할 역사적 계기”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9월 6일 밤에 황급히 열렸던 제1차 인민대표대회가 “전인민의 광범한 민주주의적 선거로 선출되지 못하였으므로,” 그 대회에서 선출된 인민위원회는 “일종의 임시혁명정부의 존재임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따라서 그렇게 성립된 인민위원회의 최대의 임무는 바로 “이 제2차 인민대표대회를 소집하여 광범한 인민의 총의에서 선출된 인민정부수립을 조속한 기간내에 성립시키는 것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제2차 인민대표대회는 “그 소집과정이 진지한 투쟁과정을 통하여 성립되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1)이라고 『해방일보』는 강조했다. 이러한 주장은 인민공화국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음을 자인하면서도 미군정부의 권위와 권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다.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는 이어 10월 5일자로 『미국시민에게 보내는 메시지(A Message to USA Citizens)』라는 영문 팸플릿을 발행했다. 그것은 인민공화국 관계자들이 자기들 주장의 정당성을 미국민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었다. 팸플릿은 미군정 당국은 모든 행정기관과 경제시설을 조선인민공화국에 넘겨주어야 하며, 그러지 않을 경우에는 세기의 비극을 초래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2)
“朝鮮人民共和國은 흥행성도 없는 傀儡劇”
아널드(Archibald V. Arnold) 군정장관은 마침내 유례가 없이 신랄한 어조로 인민공화국을 부인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아널드는 10월 10일 아침에 기자들과 만나 “명령의 성질을 가진 요구”라면서 모든 신문이 이 성명서를 1면에 크게 게재할 것을 요구했다. 원고는 아널드 자신이 직접 작성했다고 한다.3)
성명서는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북위 38도 이남의 한국에는 오직 한 정부가 있을 뿐이다. 이 정부는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의 포고와 하지(John R. Hodge) 중장의 정령(政令)과 군정장관의 행정령에 의하여 정당히 수립된 것이다.”
성명서는 인민공화국이란 한갓 ‘괴뢰극(傀儡劇)’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비꼬는 말로 매도했다.
“자천자임(自薦自任)한 ‘관리’라든가 ‘경찰’이라든가 ‘국민전체를 대표하였노라’는 대소의 회합이라든가, 자칭 ‘조선인민공화국’이라든가, 자칭 ‘조선공화국 내각’은 권위와 세력과 실재가 전혀 없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고관대직을 참칭(僭稱)하는 자들이 흥행적 가치조차 의심할 만한 괴뢰극을 하는 배우라면, 그들은 즉시 그 극을 폐막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 만일 이러한 괴뢰극의 막후에 그 연극을 조종하는 사기한이 있어서 어리석게도 한국정부의 정당한 행정사무의 일부분일지라도 단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마땅히 맹연각성하여 현실을 파악하고 이러한 연출을 당연히 중지해야 할 것이다. …”4)
“反人民的政策의 집중적표현”
아널드의 성명서는 벌집을 쑤셔 놓은 듯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는 이튿날 “조선인민공화국의 탄생은 미군상륙 이전의 기정사실이며 제2차 전국인민대표대회가 1946년 3월 1일을 기하여 소집되는 것은 제1차 인민대표대회의 결의에 의한 것이다. 신국가가 건설되려 할 때에 인민의 총의를 모아야 하는 것은 국제헌장의 정신이며 규정이다.”는 담화를 발표했다.5) 그러나 9월 6일에 벼락치기로 열렸던 이른바 제1차 인민대표대회가 제2차 대회를 1946년 3월 1일에 소집하기로 결의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중앙인민위원회는 10월 14일에 다시 성명을 발표하고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속한 기한내의 군정 철폐를 요구하며 기대하나, 군정일반을 반대하며 이에 대립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또 그러할 필요도 없다”라고 일단 신중한 자세를 취하면서도, “그러나 그 반인민정책에는 절대로 반대한다.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아널드 군정장관의 우롱적, 모욕적 성명은 이 반인민적 정책의 집중적 표현이다. … 조선인민의 총의로 되고 국제헌장의 정신에 근거를 둔 조선인민공화국은 엄연한 존재이다. …”라고 강변했다.6)
누가 傀儡劇을 조종하는 사기한인가?
각계 인사들의 반응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가지가지였다. 여운형(呂運亨) 지지자들은 “확실히 간접으로 몽양(夢陽·呂運亨)에게 모욕적인 창피를 주려고 한” 것이라고 간주했다.7)
『매일신보(每日新報)』는 “아널드 장관에게 충고함”이라는 ‘H생’ 명의의 긴 반박문을 1면에 실었다. ‘H생’은 정경부장 홍종인(洪鍾仁)이었다.8)
“또 묻거니와 인민공화국의 책임자는 여운형씨이다. 일전에 군정청에서는 여운형씨를 군정장관의 고문으로 임명했음을 발표했다. 인민공화국의 ‘괴뢰극’은 어느 누구의 ‘연극’을 말하는 것이며 ‘그 연극을 조종하는 사기한’이라 함은 누구를 지칭함일까. 천하의 상식은 여운형씨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음에 틀림없다. 고문으로 위촉한지 불과 수일에 괴뢰극을 조종하는 사기한으로 지적한 발표문의 신문게재는 아널드 장관 명령하에 또다시 ‘조선민중을 기만하는 기사’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9)
실제로 인민공화국을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은 재건파 조선공산당의 박헌영그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운형 지지자들이 “막후에서 연극을 조종하는 사기한”이란 여운형을 지칭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적이 의아스러운 느낌을 준다.
박헌영은 아널드의 성명서가 발표되던 바로 그날 오후에 8·15 해방이후 처음으로, 아니 그가 공산주의운동을 해온지 27년만에 처음으로 공개석상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 내용은 보도한 신문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이날 박헌영은 인민공화국을 ‘기정사실’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박헌영은 미군정부에 대한 요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연합군의 귀중한 희생과 영웅적 행동에 경의를 표한다. 조선의 해방이 연합군의 힘에 의한 바 크다. 그러나 조선에 주둔한 연합군은 남북을 물론하고 속히 일본군 무장해제라는 임무를 끝마치며, 조선인에게 정권을 양도하고 물러가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문제의 아널드 군정장관의 성명서에 대해서는 담담하게 언급했다.
“그것은 예상하던 바이다. 미군정으로서는 의당 취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고 조선의 정치운동이 또다시 휴식할 리 만무다. 인민공화국은 해산하지는 않을 것이다.”10)
박헌영의 이러한 신중한 태도는 이때까지도 조선공산당의 기본 방침이 미국도 연합국의 하나이며 따라서 미군도 해방군이라는 인식에서 미군정에 협조적임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었다.
“1946년초에 信託統治협상 시작될 것”
그런데 이러한 아널드 장군의 성명은 이 무렵 미국 3부조정위원회(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 SWNCC)에서 검토중이던 미국정부의 대한정책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 내용은 마셜(George C. Marshall) 참모총장이 10월 1일에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에게 보낸 전문에 잘 나타나 있다.
“실행가능한 가장 빠른 시기에 한국에 국제신탁통치가 실시되어야 한다는 제안이 현재 3부조정위원회에 제출되어 있다. 위원회는 미-소 양군이 분할하고 있는 현재의 경계선은 매우 부자연스러우며 여러가지 이유에서 전한국을 위한 하나의 단일행정(a single administration)이 바람직하다는 것도 인정했다. 위원회에 제출된 제안은 … 미점령군 사령관이 … 미국과 소련 두 지역의 실제 행정상의 통일성을 가능한 최대한으로 실현시키도록 노력할 것을 생각하고 있다. 또한 남한의 행정구조는 소련과의 합의아래 전한국에 확대 적용될 수 있도록 조정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
참고사항으로, 신탁통치 협상이 1946년 초에는 시작되기 바라지만 군정으로부터 효과적인 4개국 신탁통치로 감독권이 이관되기까지는 적어도 1년은 걸릴 것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11)
4개국 신탁통치 아래서 전한국을 통괄할 하나의 단일행정구조를 상정하고 있는 미국정부의 대한정책 기본방침에 비추어 보더라도 인민공화국의 존재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전국의 判檢事를 韓國人으로 임명
미군정청은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지배체제를 개혁하고 행정 각 분야에 한국인을 임명하는 작업을 실행해 나갔다. 10월 9일에는 「법령 제11호」로 9월 22일에 발표한 「일반명령 제5호」를 개정하여 일본점령기 한국인을 탄압하던 일곱가지 악법, 곧 정치범처벌법, 예비구속법, 치안유지법, 출판법, 정치범보호관찰령, 진자(神社)법, 경찰의 사법권을 폐지하고 그밖의 법률이나 명령도 국적, 종교, 정치사상을 이유로 차별을 강제하는 것은 모두 폐지한다고 공표했다.12)
이어 10월 11일에는 각급 법원의 판검사와 신설된 특별범조사위원회의 위원을 임명하는 대대적인 법조인사를 단행했다. 대법원장에는 한민당 간부이며 군정장관 고문관인 김용무(金用茂)가 임명되었는데, 김용무는 곧 한민당을 탈당했다.13) 이때의 사법제도개혁 가운데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법무국에 특별범조사위원회를 신설한 것이었다. 이 위원회는 법무국장이 위탁하는 사건을 심문하기 위한 특별기구로서, 주로 8·15 해방에 따른 일본인들의 범죄를 수사하기 위한 기구였다.14) 위원장에는 대법원 판사로 임명된 변호사 이인(李仁)이 임명되었다. 각급 법원의 판검사 전원을 한국인들로 임명하면서 아널드는 “전부 한국인으로 하여금 재판을 하는 권리를 허가하였다는 것은 약 반세기 이래 처음 보는 일이며, 이것은 행정 각 부분에서 차차 한국인들로 하여금 한층 더 광범한 분야를 관리하도록 하여 그 수완에 자신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뚜렷이 명시되고 증명될 것이다”라고 크게 의미를 부여했다.15) 그리고 이튿날 군정청은 각급 법원의 일본인 판검사 전원을 파면했다.16)
人民共和國은 도전적인 행사계획 벌여
한편 인민공화국 인사들은 아널드의 인민공화국 부인성명서 발표에 맞서 도전적인 행사를 계획했다. 서울시인민위원회는 10월 18일 오후1시에 서울공설운동장에서 연합군환영과 조선자주독립촉성을 위한 대규모 시민대회와 시가행진을 하겠다고 발표했다.17) 10만명의 군중동원을 목표로 서둘러 준비하던 이 야심찬 시민대회는 그러나 미군헌병대의 허가 취소로 중지되었다.18)
서울시인민위원회는 또 10월 14일 “시정(市政)을 접수하는 대로 즉시 시행”할 19개항의 시책을 발표했다. 거기에는 ‘경성부(京城府)’의 호칭을 ‘서울시’로 개칭하는 것을 비롯하여, 전차 전기 수도 가스는 시영(市營)으로 하며, 몰수한 모든 가옥은 시에서 직영 관리하여 공공시설에 사용하는 이외에 근로자와 빈민에게 대여한다는 등의 시책도 포함되어 있었다.19)
같은 날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는 학자와 기업가 등 경제전문가 50명가량을 초청하여 10월 19일에 경제대책간담회를 개최하겠다면서 간담회의 의제와 초청자 46명의 명단을 발표했다.20)
하지司令官이 美軍정부의 성격 定義
이러한 와중에서 10월 13일부터 사흘동안 급히 도쿄(東京)에 다녀온 하지 사령관이 10월 16일에 미군정부의 법적 성격에 대한 정의(定義)를 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새삼스러운 느낌이 없지 않은 이 성명서는 말할 나위 없이 아널드의 성명서를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군정청이 이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한국국민의 사상적 혼란을 제거하기 위하여” 발표한다고 설명한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것은 매우 심각한 의미가 내포된 것이었다.
하지는 먼저 군정청을 “일본의 통치로부터 인민의,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민주주의 정부를 건설하기까지의 과도기간에 38도 이남의 한국지역을 통치, 지도, 지배하는 연합군최고사령관 지도하에 미국군으로 설립된 임시정부”라고 정의하고, “군정부는 남한에서 유일한 정부이다”라고 못 박았다. 그러고는 “군정부는 … 연합국의 모든 실력으로 지지되고 있다. 따라서 연합국의 명령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실력행사를 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하여, 군정부에 반대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무력 행사도 불사하겠다고 엄중히 경고했다. 그러면서 그는 인민공화국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비판했다.
“(미군정부에 의한) 정치를 비밀로나 공공연히 반대하는 단체가 있는 모양인데, 자기 나라를 걱정하는 선량한 한국인이라고 할 수 없다. 현재까지 판명된 이러한 단체는 이익적, 사욕적 지도자 밑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단체를 지지하거나 찬성하지 말 것이다. …”21)
인민공화국은 이익적, 사욕적 지도자 밑에 있는 ‘단체’라는 것이었다. 하지의 이러한 선언은 한국점령정책에 대한 그의 새로운 계획을 반영한 것이었다. 하지는, 앞에서 보았듯이, 서울에 진주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맥아더에게 중경(重慶)의 망명정부를 임시정부 자격으로 귀국시켜 점령기간 및 선거실시가 가능할 만큼 한국 국민들이 안정될 때까지 간판으로 활용할 것을 건의했었는데(『月刊朝鮮』 2010년 7월호, 「朝鮮人民共和國의 主席과 內務部長」 참조), 이번 도쿄방문에서 국무부의 재일본 정치고문대리 애치슨(George Atcheson Jr.)과 함께 이승만 및 임시정부의 김구와 김규식을 귀국시켜 이들을 중심으로 전한국 국민집행부(National Korean Peoples Executive) 같은 것을 구성하는 문제를 협의하고 왔다. 하지가 이날(10월 16일) 업무협의를 위해 본국으로 떠나는 베닝호프(H. Merrell Benninghoff) 정치고문에게 수교한 메모랜덤에서 국무부와 협의할 중요 사항의 하나로 “다만 명목상의 최고지도자를 가진 정부라도 좋으니까 임시적으로나마 한국정부를 조속히 수립하고, 가급적 빨리 총선거를 실행할 필요”(h항)를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22)
2. “親共·親日分子들이 귀국 방해”
이승만은 10월 16일 오후에 소리소문도 없이 미군용기 편으로 혼자서 김포비행장에 도착했다. 도망치다시피 고국을 떠난지 33년만에, 아니 프린스턴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1년2개월 동안 서울YMCA의 한국인 총무로 활동한 기간을 빼면 실로 41년만에 꿈에서도 잊지 못하던 고국에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이제 일흔한살이 되어 있었다.
이승만이 해방된 고국에 돌아오기까지 두달이나 걸린 데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 우여곡절이 얼마나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었는지는 미국을 떠나면서 재미동포에게 쓴 ‘고별사’의 서두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미주를 떠나는 나 이승만은 새벽등불 하에서 두어줄 글로 미포[美布: 미주와 하와이] 1만동포에게 고별합니다. 40년동안 혈전고투하던 우리로서 필경 왜적이 패망하고 우리가 살아서 고국산천에 발을 다시 들여놓게 되니 어찌 기쁜 감상을 느끼지 않으리요마는, 이때에 나의 심회는 도리어 억울 통분하여서 차라리 죽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싶습니다. …”23)
여기서 우리는 이승만을 그토록 “억울 통분하게” 한 귀국과정의 우여곡절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重慶에 가서 金九와 함께 귀국하려 했으나
미국무부 극동국장 발렌타인(Joseph W. Ballantine)은 8월 28일에 전략첩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OSS)의 부국장 굿펠로(Preston M. Goodfellow) 대령으로부터 이승만이 미국관리를 대동하고 중경을 방문할 수 있게 조치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月刊朝鮮』 2010년 5월호, 「聯合軍과 함께 國內進入바라」 참조), 그날로 국무차관보 던(James C. Dunn)에게 메모랜덤을 제출했다. 발렌타인은 중국정부가 이승만의 입국을 허가한다면 미국정부로서는 이승만의 여행을 반대할 이유가 없으나 이승만에게 미국관리를 동행시키는 것은 “미국정부가 이른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장래의 한국정부로 고려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면서 굿펠로의 제의에 반대했다.24) 번즈(James Byrnes) 국무장관은 발렌타인의 건의를 받아들였고, 번즈의 재가를 받은 발렌타인은 즉시 주미중국대사관에 연락했다. 그러나 중국대사관은 9월 13일 시점까지 세번이나 본국정부에 문의 전보를 쳤으나 회답이 없다고 했다.25)
이승만의 공식 전기를 쓴 올리버(Robert T. Oliver)에 따르면, 이승만은 국무부 여권과장 쉬플리(Ruth Shipley) 여사에게 여권 발급을 신청했는데, 번즈 장관은 런던으로 출발하기 직전인 9월 5일에 이승만의 여권발급을 재가했다.26) 런던에서는 9월 11일부터 2차세계대전이후의 첫 연합국 외상회의인 5개국(미, 영, 소, 중, 프랑스) 외상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승만은 발렌타인에게 전화를 걸어 더 이상 중경행은 바라지 않고 마닐라로 갔다가 그곳에서 한국으로 직행하겠다고 말했다.27) 이승만은 이 무렵 워싱턴에 와 있는 중국 행정원장 송자문(宋子文)이 자신의 중국행을 방해한다고 판단한 것이 틀림없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 창립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에 송자문은 이승만과 반대파들이 연합하여 단일의 한국대표단을 구성할 것을 종용했으나 이승만은 이를 거부했고, 송자문이 초대한 만찬에도 참석하지 않았었다.
합동참모본부의 스위니(Sweeney) 대령은 9월 13일에 태평양지역 미군최고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위원회위원장(Korean Commissioner) 이승만이 마닐라를 경유하여 귀국하고자 함. 견해 바람”이라는 전보를 쳤고,28) 그날로 승인을 받았다. 이튿날 발렌타인은 이승만에게 필리핀 경유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그의 구두신청이 허가가 났다는 것과 전쟁부가 교통편을 제공할 수 있다면 국무부로서는 그의 한국방문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통보했다.29)
李承晩은 “韓國으로 돌아가는 韓國人”
이렇게 하여 이승만의 출국수속은 비교적 순조롭게 끝났다. 그런데 국무부의 매닝(Manning)이 이승만의 교통편을 알아보고 있을 때에 이승만은 뜻밖의 장애에 부딪혔다. 그것은 국무장관실에서 쉬플리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이승만의 여권신청서에 신분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주미고등판무관(High Commissioner to the United States returning to Korea)”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므로 여권 발급을 취소해야 한다고 통보한 것이다. ‘주미고등판무관’이라는 명칭은 중경임시정부가 1941년 6월 4일에 이승만에게 부여한 ‘주미외교위원장’이라는 직명을 번역하여 사용하던 것이다. 매닝이 이승만에게 쉬플리 여사를 만나보라고 연락한 것은 9월 21일 오후였다. 그러나 이날은 금요일이었으므로 이승만은 월요일 아침까지 기다려야 했다.30)
월요일인 24일 오전에 굿펠로가 새로 극동국장이 된 빈센트(John C. Vincent)에게 전화를 걸었다. 굿펠로는 이승만은 이미 미군전구사령관의 입경 허가를 받았는데도 출국허가가 지연되고 있는 것은 그를 다른 한국인 출국허가신청자들과 동격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니냐면서 그 이유를 알고 싶다고 했다. 빈센트는 일본과장 딕오버(Dickover)로 하여금 굿펠로에게 연락하여 설명하게 했다.31) 딕오버는 굿펠로에게 그동안 이승만에게 확인을 위하여 그의 여행관계 문건들을 여권과에 돌려주도록 권고해 왔다고 말하면서, 9월 21일에 합동참모본부의 스위니 대령이 이승만의 신분을 “한국으로 돌아가는 한국인(Korean national returning to Korea)” 또는 여권과에서 사용하는 그밖의 다른 용어로 바꾸어야 한다고 통보해 왔다고 말했다.32) 이승만이 신청서에 기재한 그대로 맥아더사령부에 타전하여 입경허가를 받았던 스위니 대령은 이미 제재를 받은 상황이었다. 그것은 아마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간부 등 귀국을 목적으로 출국허가를 신청한 이승만 반대파들의 작용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때에 여권과에는 전경무(田耕武)를 비롯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간부들과 이승만 지지자인 윤병구(尹炳求) 등 10여명의 출국허가신청서가 제출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정당대표를 자처했다. 이승만의 일이라면 사사건건 방해해온 한길수(韓吉洙)도 국무부에 전화로 귀국을 희망했다.33)
빈센트는 공산당원이었는가
9월 24일 오전에 굿펠로는 쉬플리를 만나서 이승만은 아무런 직명도 필요없고, 홍보나 팡파르 없이 조용히 귀국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그에 따라 스위니 대령은 직명을 삭제한 군의 새 허가서를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굿펠로가 새 허가서를 들고 국무부의 매닝을 찾아가자, 매닝은 뜻밖에도 국무부는 더 이상 이승만의 여행계획을 지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잘라 말했다. 게다가 이승만이 오키나와나 도쿄에 기착하기 위해서는 맥아더 장군의 특별허가를 새로 받아야 하고, 한국으로 갈 비행기편을 제공하겠다는 맥아더의 보증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승만이 마닐라를 경유하여 귀국하기로 했다가 도쿄 경유로 바꾼 것은 여객기 사정으로 경유지를 선택할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다.34) 굿펠로가 스위니 대령에게 맥아더사령부에 타전해 줄 것을 부탁하자, 그는 국무부의 요청이 있기 전에는 할 수 없다고 했다. 굿펠로는 다시 쉬플리 여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녀는 국무부는 더 이상 이승만의 일에 개입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35)
이승만에 대한 국무부의 이러한 냉대는 하지 장군이나 베닝호프의 거듭된 건의에도 불구하고 반공반소주의자인 그의 귀국이 4대국에 의한 공동신탁통치라는 한반도에 대한 미국정부의 기본정책에 장애요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국무부안의 ‘친공 친일 분자들’이 자신의 여행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10월 1일자 메모랜덤에서 이승만은 “이들이 바로 한국을 소련의 영향력 아래 두기로 한 스탈린과의 비밀협정을 추진한 자들인데, 이들은 친공분자들을 한국에 보내려 하고 있다”라고 적었다.36) 실제로 대한정책의 고위 책임자인 극동국장 빈센트는 히쓰(Alger Hiss)와 함께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장기간 중국에서 근무하면서 중국공산당에 동정적이었던 그는 1951년에 전 미국공산당 활동가이자 소련 간첩이었던 저술가 뷰덴즈(Louis F. Budenz)에 의하여 공산당원이었다고 고발되었고, 트루먼 행정부의 국무차관과 국무장관을 지낸 애치슨의 강력한 변호에도 불구하고 1952년에 공직자 국가충성심사위원회(Civil Service Loyalty Review Board)로부터 공무수행부적격 판정을 받은 뒤, 1953년에 덜레스(John F. Dulles) 국무장관의 요청으로 국무부를 떠났다.37)
그러나 이때는 이미 국무부도 이승만과 전경무 등 한국인 출국허가 신청자들에게 출국허가서를 발급하기로 결정한 뒤였다. 번즈 국무장관은 9월 27일에 주중대사 로버트슨(Robertson)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면서 “현재 한국 밖에 있는 특정 정치단체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는 고려하고 있지 않으나, 한국내의 혼란한 정세 때문에 건설적인 능력이 있고 군정부의 틀 안에서 활동하기를 희망하는 인사들은 입국이 장려되어야” 하고, 여유가 있다면 육군통제하의 항공편을 제공해도 좋을 것이라고 타전했다.38) 임시정부 인사들의 귀국문제는 이러한 기준에서 중국정부와 상의하라는 것이었다.
맥아더에게 東京경유 허가 요구하는 電報쳐
이승만은 9월 29일에 맥아더에게 직접 전보를 쳤다. 하지 사령관으로부터 이승만을 빨리 귀국시켜야 한다는 제의를 받고 있던 맥아더에게 이승만의 전보내용은, 비록 정확한 사실은 아니었으나, 맥아더로서도 미상불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이었다.
“마닐라 경유로 한국에 들어가는 여권은 발급받았습니다. 장군의 승인에 따라 합동참모본부로부터 군의 허가도 받았습니다. 지금은 교통편이 문제입니다. 한국에 소련의 영향력을 수립하기 위한 송자문 행정원장과 스탈린 원수의 비밀협정에 따라 수천명의 한국공산주의자들이 시베리아로부터, 그리고 수천명의 중국공산주의자들이 연안(延安)으로부터 한국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다. 반대로 한국의 모든 민주적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중경에 발이 묶여 있고, 이곳에 있는 몇몇 사람들은 나에게 방해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오직 장군의 명령만이 필요합니다. 스위니 대령에게 나의 도쿄 경유 여행을 허가하시고 그곳에서 한국까지의 여행을 보증하는 전보를 쳐 주시기 바랍니다. 나의 여비는 내가 지불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나는 서울에 조용히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군과 전폭적으로 협조적인 행동을 취하기 위하여 장군이나 장군의 보좌관과 대화를 가졌으면 합니다.”39)
도쿄에 들른 이승만이 맥아더와 만나는 것은 이러한 그의 제의에 따른 것이었다. 한편 합동참모본부도 9월 30일에 맥아더사령부로 이승만의 일본 경유 허가를 요청했고, 맥아더사령부의 인사참모부장 구너(M. J. Gunner) 준장은 그날로 이승만의 도쿄경유 귀국을 허가했다.40)
韓國을 아시아의 스위스로, 민주기지로
이 무렵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보낸 전보에서 확언했듯이, 스탈린과 송자문은 소련이 한반도에 소비에트정권을 수립하는 것을 중국이 양해하는 비밀협정을 맺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1945년 9월 5일자 이승만의 메모랜덤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승만은 송자문이 워싱턴에 머물고 있으면서 스탈린과 소련에 있는 한국공산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아 트루먼 대통령으로 하여금 한국의 명목상 독립을 유지하면서 소련이 한국에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확립하는 것을 허용하도록 타협하게 하려 하고 있다고 적었다. 그리고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는, 비밀 양해에 따라 소련군이 급히 한국으로 쇄도하여 북반부를 점령하고 있고, 적어도 3만명의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으로 흘러들어와 전국에 걸쳐서 마르크스주의 신조를 퍼뜨리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한국의 민족주의 정부나 그 지도자들은 어느 누구도 아직 귀국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부조리한 상황이 모두 스탈린과 송자문의 비밀협정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적고 나서, 결론으로 한국의 장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매우 주목할 만한 제안을 했다.
“트루먼 대통령만이 미합중국 국회와 일반 공중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한국은 극동에서의 민주주의 작전을 위한 강력한 기지로 만들어야 한다. (한국에 대한) 불간섭정책을 (연합국이) 공동으로 선언함으로써 한국은 아시아의 스위스로서 영세중립국이 될 수 있다. 강력하고, 통합되고, 민주적이고, 독립된 한국과 함께 한국인들은, 지난 모든 세기에 걸쳐서 그랬듯이, 극동에서 평화의 안전판 역할을 할 것이다….”41)
이승만은 이 메모랜덤의 서두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지난 50년동안 한국의 독립을 완전히 회복하는데 영향을 미친 어떤 국제적 흥정도 반대하는 입장에 선 첫 미국대통령이라고 칭송했다.
국제관계에서의 중립(neutrality) 문제는 이승만이 한국의 독립방략과 관련하여 독립협회 운동때부터 천착해온 개념이었다. 그가 1910년에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취득한 박사학위 논문도 중립교역과 중립법에 관한 것이었다(『月刊朝鮮』 2003년 4월호, 「韓國人 최초의 政治學博士」 참조).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에 파리 강화회의에 가 있는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에게 보낸 문제의 위임통치청원서의 주지도, 한국을 독립을 전제로 일본으로부터 분리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고 모든 나라가 혜택을 받는 중립적인 상업지역으로 만들어 극동의 완충국이 되게 하자는 것이었다(『月刊朝鮮』 2004년 7월호, 「國際聯盟에 委任統治를 청원하다」 참조). 그러한 중립국 구상이 이제 한반도의 공산화를 방지하는 방책으로 발전한 것이다.
3. 東京에서 맥아더장군과 회담
이윽고 이승만은 10월 4일 밤9시 워싱턴을 출발했다. 홀로 남게 된 프란체스카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이승만 자신이 임명한 임병직(林炳稷) 등 여남은 사람이 그를 배웅했다. 워싱턴에서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하와이까지는 민간비행기편을 이용했으나, 하와이에서는 군용기를 타야 했다. 콰절린(Kwajalein)산호초와 괌(Guam)섬을 거쳐 10월 10일에 도쿄 인근의 아쓰기(厚木) 군용비행장에 도착했다.42)
그런데 이승만 귀국의 자세한 과정을 미 국무부는 잘 몰랐던 것 같다. 미 국무부는 1949년 8월에 이승만의 귀국과 그 이후의 정치적 부상에 미국이 얼마나 개입했는가를 내부적으로 은밀히 조사한 일이 있는데, 이승만의 귀국에 관해서는 “이 초기에는 대부분의 결정이 현장에서 군정사령부에 의해 그날그날 이루어졌기 때문에 증빙문건은 문서과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43)
이승만이 귀국하는데 실무작업을 맡았던 곳은 전쟁부 소속 군사정보국(Military Intelligence Service)의 워싱턴 지부였다. 그곳은 전쟁부 군사정보국과 해군 및 그밖의 정보기관들과 정보를 교환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군사정보국 워싱턴 지부는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워싱턴에 있는 이승만이라는 한국인을 찾아서 서울로 보내라는 전보를 받고 그대로 실행했다. 이 명령을 실행한 사람은 군사정보국 워싱턴지부의 행정관 킨트너(William Kintner) 대령이었는데, 그는 이승만이 누구인지도 전혀 몰랐다.44)
東京에서 하지장군과 맥아더장군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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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국하는 李承晩과 會談할 무렵의 맥아더 장군. 그는 1945년 9월 2일에 元帥로 승진했다. |
“도쿄와 요코하마(橫濱)를 가보니 쑥밭이 되고 말았었다. 미군의 폭격으로 인하야 요코하마는 90퍼센트, 도쿄는 75퍼센트가 파괴되고, 요코하마는 2주일 동안이나 건물이 타고 공장도 탔었다는데, 악독하던 왜적에 대한 당연한 천벌이라 하겠다. …”45)
도쿄에 머무는 며칠 동안 이승만의 행동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맥아더 장군과 하지 장군을 만난 일이었다. 재일본 정치고문대리 애치슨과도 만났을 개연성이 없지 않으나, 확인할만한 문서는 없다. 그런데 이후 한국의 정국운영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협의가 있었을 것이 틀림없는 이 주말 회동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어느쪽에서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귀국한 뒤에 이승만이 편지나 연설에서 단편적으로 언급한 내용만으로도 이들 사이에 중요한 대화가 있었고 또 이승만이 만난 사람이 맥아더와 하지만은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는 10월 12일 금요일에 서울을 떠나 도쿄에 도착했다. 한국신문들은 그가 38선문제 등 긴급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도쿄로 날아갔다고 보도했으나, 그의 도쿄행은 이승만을 만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옛王宮 하나를 李承晩의 처소로 제공하겠다고
하지는 일요일인 9월 14일에 이승만을 만났다. 이승만은 하지와 만났던 일에 대해 올리버에게 “하지와 나는 우리가 모든 준비를 갖출 때까지 나의 도착을 알리지 않기로 합의했다. 하지는 나에게 옛 왕궁 하나를 나의 처소로 마련해 놓겠다고 했으나, 나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라고 적었다.46) 이승만은 또 귀국직후의 방송을 통하여 도쿄에서 하지를 만나 “친밀한 가운데 이야기를 하고”, 이튿날 하지 중장이 서울로 떠나면서 “피로도 회복할 겸 쉬었다 오라고 하기에 사흘동안 도쿄에서 쉬고왔다”고도 했다.47)
이승만은 하지와 만나서 제반문제를 협의한 다음 오후 5시30분에 맥아더 장군을 예방했다. 맥아더의 약속기록부(appointment book)에는 이승만의 신분이 “한국위원회 위원장”, “전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적혀있다.48)
하지는 이승만이 맥아더를 방문했을 때에 합석했던 것이 틀림없다. 세사람이 함께 만났던 사실은 워싱턴의 임병직이 10월 18일 아침 일찍 로스앤젤레스의 동지회 남캘리포니아 지방회장 허성에게 전화를 걸어 “이박사께서는 도쿄에 주재하는 맥아더 장군의 청함을 받아 신문기자 3인과 미국헌병 4인을 대동하여 군용비행기로 일본 도쿄로 가셨고, 동시에 맥아더 장군은 한국에 주차한 하지 장군을 도쿄로 청하여 2일반 동안 3인이 회동한 후, 맥아더 장군은 하지 장군을 서울에 먼저 보내어 이박사 환영준비를 하게 하고…”49)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승만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도쿄에서 맥아더와 하지를 만났던 사실을 임병직에게 알렸던 것이다.
이자리에서는 많은 대화가 오갔던 것 같다. 귀국한 뒤에 이승만은 라디오방송을 통하여 맥아더 장군이 자기에게 큰 소리로 “한인들이 자치능력이 없다 하니 이것은 악선전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한인들이 만사를 잘해 가리라고 믿는다”라고 말했고,50) 또 “민족통일의 결집체를 만드는데 그 시일이 얼마나 걸리겠느냐고 나에게 물었다”고도 했다.51)
맥아더가 이승만에게 민족통일의 결집체를 만드는데 시일이 얼마나 걸리겠느냐고 물었다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하지와 애치슨이 합의한 새로운 구상을 맥아더는 이미 알고 있었고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이승만에게 물은 말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한국은 왜 소련지역과 미국지역으로 분할되었는가라고 물었다.52) 앞에서 보았듯이, 이승만은 한반도를 연합국이 군사적으로 점령할 필요가 있다면 많은 희생을 치르고 태평양전쟁을 종결시킨 미국이 단독으로 점령해야 한다고 맥아더에게 타전했었다. 한반도는 38도선을 경계로 소련군과 미군이 분할 점령한다는 것은 맥아더의 「일반명령 제1호」로 세상에 처음 알려지기는 했으나, 그러한 분단선 획정의 경위는 이때까지는 맥아더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승만은 전략첩보국(OSS) 부국장 굿펠로를 주한미군정부의 고문으로 초청할 것을 맥아더에게 강력히 권고했다. 이승만은 이 문제를 가지고 맥아더사령부의 다른 장성들과도 만났다.53) 올리버는 맥아더가 하지에게 “이승만을 국민적 영웅의 귀국으로 환영할 것을 권고했다”고 기술했는데54) 하지가 옛 왕궁 하나를 이승만의 처소로 마련하겠다고 한 것도 그러한 권고에 따른 조치로 생각한 것이었을 것이다.
全韓國 國民執行委員會 구성하도록
하지와 애치슨이 합의한 한국문제 처리방안은 이승만이 아직 도쿄에 머물고 있는 10월 15일에 애치슨이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전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1) 한국의 상황으로 보아 다소 진보적이고 대중적이며 존경받는 개인 또는 소그룹을 군정부와의 협조와 군정부의 지시아래 집행 및 행정적 정부기관(Executive and Administrative Government Agency)으로 발전할 수 있는 조직의 핵심으로 행동하도록 활용해야 한다. 그러한 핵심조직을 “대한민국임시정부”라고 부를 필요는 없으나, 일종의 “전한국국민집행위원회(National Korean Peoples Executive Committee)”라고 명명할 수 있다. 우리 지역내 한국인들의 이승만에 대한 존경심을 감안할 때에 위원회는 적어도 초기 단계에서 이승만과 김구, 김규식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2) 어떤 한 지도자나 그룹 또는 연합체를 공식으로 승인하거나 지지하는 것은 과거의 미국정책에는 위배되나, 현재의 한국 상황으로는 그러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정당하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어려움은 감소하기는커녕 증가하고, 소련이 북한지역에 수립하고 지지하는 공산주의 그룹은 그 영향력을 남한에까지 확대시킬 것이다.
(3) 10월 13일에 하지 장군과 면담했는데, 그도 이 안에 반대하지 않는다. 제안된 위원회는 군정부의 부속기관으로 수립될 수 있다.55)
애치슨 제안의 골자는 미군정부의 부속기관으로 이승만, 김구, 김규식을 핵심으로 하는 전한국국민집행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들을 공개적으로 승인하고 지지하는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 구상은 분명히 국무부의 대한기본정책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애치슨의 이 전문에 대해 국무부는 10월 22일 “베닝호프가 돌아오는 대로 그와 주의깊게 검토하여 가능한 한 빨리 회답하겠다”고 했으나, 회답은 없었다.56)
이승만은 월요일인 15일 오전에 다시 맥아더를 예방했다. 귀국인사차 들른 단순한 예방이었을 수도 있겠으나, 바로 전날 오후 늦게 중요 사안을 두고 깊은 대화를 나누고는 이튿날 오전에 단순히 작별인사만을 목적으로 다시 예방했다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다. 위에서 본대로 일요일에 맥아더를 만났던 이승만은 굿펠로 대령의 초청문제에 대하여 맥아더사령부의 다른 장성들과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하여 이날 다시 사령부를 방문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이승만은 10월 16일 오후에 맥아더가 내어준 그의 전용기 바탄(The Bataan)을 타고 김포비행장에 도착했다.57) 이때에 그는 미군복 차림이었는데, 그것은 군용기 탑승자들은 누구나 군복을 착용해야 했기 때문이다.58) 이승만을 마중하러 비행장에 나와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뒤늦게 通達된 「초기기본훈령」
이승만이 서울에 도착하던 날 미 국무부는 “북위 38도 이남의 미군사령부는 대표적인 한국인들로부터 개인자격으로 역내문제에 관하여 자문을 구하는 정책”을 시행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해외에 있는 모든 한국인에게 귀국의 길이 열렸으며, 최초의 귀국신청자는 이미 허가를 받았고 지금은 귀국도상에 있다고 이승만의 귀국 사실을 공표했다. 성명은 이어 태평양 지역 미육군사령관은 김구와 김규식이 귀국할 수 있도록 건의했다고 말하고, 그들은 현재의 군정장관 고문회의의 다른 위원들과 같은 조건으로 군정부에 협력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언명했다.59)
3부조정위원회가 오랫동안 검토하고 있던 「미군점령하의 한국지역에서의 민간행정을 위한 태평양지역 미육군총사령관에 대한 초기기본훈령」이 맥아더 장군에게 통달된 것은 10월 17일이었다. 「초기기본훈령」은 정치, 경제, 금융 등에 걸친 방대한 내용이었으나, 대부분 이미 미군정부가 취한 조치들을 추인하는 것이었다. 「군사적 권한의 근거 및 범위」항에서는 “귀관은 적국영토의 군사점령자가 통상으로 갖는 권한”이 부여되며, “귀관의 민간행정업무는 군의 안전이 양립하는 한 최대로 한국을 해방된 국가로 대우하는 기초위에서”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모든 행동은 미-소 양국에 의한 초기의 잠정적인 민간행정의 시기로부터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 기간을 거쳐 국제연합 가맹국으로서 궁극적인 독립에 이르는 점진적인 발전을 기도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것을 강조했다.
「초기기본훈령」의 「정치활동」항에서는 현존하는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를 즉시 통제아래 두고, 그 활동이 군사점령의 요구와 목표에 일치하는 것은 장려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폐지해야 된다고 명령했다(9-C항). 이승만이나 김구 등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대목이었다.
“귀하는 어떠한 자칭 한국임시정부 또는 비슷한 정치단체에 대해서도 ─ 비록 위의 9-C항에 따라 그 존립과 조직과 활동은 허용하더라도 ─ 이를 공식으로 승인하거나 정치적 목적에 이용해서는 안된다. 귀하는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조직에 대한 어떠한 언질없이 그러한 조직의 구성원을 개인자격으로 활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60)
이렇듯 「초기기본훈령」은 그동안 미군정부가 시행한 일련의 조치들을 추인하는 것이기는 했으나, 독립정부수립 이전에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 실시라는 한반도에 대한 미국정부의 기본정책에는 변함이 없음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4. 갑자기 나타난 ‘國民的英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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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의 귀국을 보도한 1945년 10월 17일자 『每日新報』. |
하지의 연락을 받고 맨 먼저 조선호텔로 달려온 사람은 윤치영(尹致暎)이었다. 뒤이어 허정(許政)이 찾아왔다. 이승만의 부탁으로 이날부터 윤치영의 부인과 임영신(任永信)이 이승만의 바라지를 했다.61) 이때에 윤치영과 허정이 이승만에게 한 국내정세 보고는 허정이 “나는 무엇보다도 이박사가 겨레의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좌익의 움직임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도 덧붙였다. … 당시 좌익중에는 교묘하게 우익으로 위장하고 있는 자도 없지 않았다”62)라고 회고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허정은 이승만에게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이 그를 영수로 추대한 사실을 말하고 수락할 것을 요청했으나 이승만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허정은 이승만이 자기나름의 뚜렷한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직감했다.63) 그것은 도쿄에서 맥아더 장군 등과 협의한대로 “민족통일의 결집체”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날 저녁까지 인사차 다녀간 사람은 송진우(宋鎭禹), 김성수(金性洙), 백관수(白寬洙), 장덕수(張德秀), 김도연(金度演), 김준연(金俊淵) 등 한민당 간부들이었다.64)
“하지위에 있는 분”이라는 이미지 심어줘
이승만의 귀국이 일반국민들에게 알려진 것은 이튿날 기자회견을 통해서였다. 하지와 이승만은 당분간 이승만의 귀국사실을 일반에게 알리지 않기로 했으나, 미국 기자들이 알고 하지에게 이승만과의 회견을 요구하여 한국기자들과 함께 만났다.
기자회견은 오전 10시에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열렸다. 10시 정각이 되자 회의실 옆문이 열리면서 흰 장갑을 낀 미군 헌병 2명이 들어와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뒤이어 하지가 옆걸음으로 들어오면서 정중하게 이승만을 긴 테이블 앞에 놓인 붉은 가죽의자로 안내했다. 붉은 가죽의자는 하지가 기자회견을 할 때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붉은 가죽의자는 두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한국기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승만은 짙은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이승만이 자리에 앉은 뒤에도 하지는 옆자리에 꼿꼿이 서 있다가 이승만이 앉기를 권하자 그제서야 의자에 앉았다. 하지의 이러한 태도는 한국기자들에게 이승만이야말로 “하지위에 있는 분”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다.65) 아널드 군정장관이 하지의 옆자리에 앉았고, 하지의 통역 겸 고문관인 이묘묵(李卯默)이 이승만의 옆자리에 앉았다.
하지는 일어서서 “오늘은 진귀한 정객 한분을 소개하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면서 이승만을 소개했다. 이승만은 처음에는 앉아서 영어로 말을 시작했으나, 차츰 흥분하면서 이묘묵의 통역도 필요없이 일어서서 우리말로 말하기도 했다.
그는 먼저 “내가 고국에 와서 미국사람들을 대해보니 그들이 염원하는 바는 대한민족이 어서 빨리 한덩어리가 되어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하고, 하지 중장이랑 아널드 소장과 이야기해보니까 “의견이 합치되어 협조해갈 수 있음을 믿었다”라고 마치 하지를 서울에 도착해서 처음 만난 듯이 말했다.
개인자격으로 귀국했음을 강조
이승만은 특히 자신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했음을 강조하고, 그러나 귀국이 가능했던 것은 미군정부의 협조에 힘입은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특히 내가 여기에서 분명히 말해두고자 하는 것은 나는 평민의 자격으로 고국에 왔다는 것이다. 임시정부의 대표도 아니요 외교부[주미외교위원부] 책임자의 자격으로 온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여기 오는 길을 열어준 것은 이분들이다.…”
이승만은 이어 앞으로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싸움을 할 일이 있으면 싸우겠다면서 빙그레 웃었다.
“나도 해외에서 상당히 싸움을 해온 싸움꾼이니까 건국을 위하여, 대한(大韓) 동포의 살길을 위해서라면 당당히 싸우겠소.”66)
국민적인 관심사에 관한 이승만의 견해는 뒤이은 일문일답에서 자세히 표명되었다.
기자들은 우선 이승만이 ‘대한’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생소했던 모양이다.
“대한이라는 말씀을 쓰시는데 그것을 국호로 생각하는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내의 독립투사들의 손에 의하여 수립되었다. 그 후 오늘까지 세계 각국이 이 임시정부의 실재함을 알고 있고 또 이 국호로 통해있다. 해외동포들은 이 정부에 세금을 바쳐 이 정부를 육성해왔고, 장개석(蔣介石) 주석도 이 정부를 원조해왔다. 그리고 그밖에 수삼개국이 이 정부를 승인하고 있는데, 다만 미국이 아직 승인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들을 깊이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미국의 승인문제도 해결될 쯤에 이미 도달되었음을 언명해둔다.”
“나는 알몸뚱이로 국제문제같은데 나서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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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16일 오후에 朝鮮호텔로 李承晩을 예방한 하지 장군. |
그리고 임시정부가 언제 환국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준비는 다 되어있다. 오직 남은 문제는 국내 통일에 있다. 우리의 힘이 한덩어리로 뭉쳐지는 날 돌아올 것이다”라고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하루라도 빨리 합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기자들이 묻자 이승만은 “먼저 개인이나 당파의 주의주장을 버려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정치적 야심이 없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무슨 높은 자리를 원치 않는다. 나는 나대로 내버려두면 좋다. 그래야만 여러분이 마음대로 써먹을 수 있으니까. 나는 그러한 알몸뚱이로 국제문제 같은데 나서고자 한다. 나는 지금까지 미국의 외무성[국무부]과 싸워온 사람이다. 우리가 지금 이 기회에 정신을 못 차리고 합동하지 않는다면, 이 기회는 다시 얻기 힘들 것이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김구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경과는 늘 연락이 있었으며, 특히 김구씨와는 각별한 연락이 있었고, 나는 그를 신뢰하며 또 신봉하고 있다. 그는 우리 독립을 위해 일생을 싸워오신 분이다. 한달 전에도 먼저 중경으로 급히 오라는 전보를 받았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갈 기회를 갖지 못했다.”
38度線은 “蘇聯쪽의 요구가 있었던 모양”
기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38도선 문제였다. 초미의 관심사이자 논쟁적인 문제인 38도선 문제에 대해서도 이승만은 불확실한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했다.
“북위 38도선 문제는 미국에 있으면서도 전혀 알지 못했다. 카이로 회담에서 루스벨트, 처칠, 장개석 3씨로부터 대한의 자주독립에 관한 것을 ‘어느 적당한 시기’라고만 말했을 뿐이고, 그 후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소련측의 혹종의 요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 후 얄타와 포츠담 회담이후 영-미국은 대한의 독립에 대한 하등의 간섭이 없었으며, 또한 트루먼 미국대통령은 불간섭주의를 역설한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이 38도 분할점령은 미-소연합군이 합작을 했을까 하고 의심하고 있으며 워싱턴 국무부에서도 이 문제를 조사하고 있다. … 이 문제는 결국 우리 대한 자체에 관한 문제이므로 우리가 협력 단결하면 곧 해결될줄 안다.”
38도선의 획정의 책임이 소련에 있다는 듯이 언급한 이승만의 이러한 발언은, 뒤에서 보듯이, 당장 미국 언론과 정부의 민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기자들은 이어 국내의 통일합동전선을 수립할 구체적 방침을 물었다. 이승만의 대답은 무슨 문제에 대해서나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미국정부나 군정부 당국자들과 사전협의가 있었던 것 같은 뉘앙스를 풍겼다.
“나 개인의 의사와 구체적 방침도 있으나 아직 공개할 것은 못 된다. 다만 하루라도 바삐 통합하자는 것뿐이고, 우리가 잘 합치면 (연합국이) 우리에게 자주독립의 기회를 곧 줄만한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확언해둔다. 해외에서 듣기에는 벌써 30 내지 60여개의 정치 단체가 있다고 하던데, 이렇게 정당이 많을 수 있을 것인가 스스로 반성해야 할 일이다. … 나 개인의 의사이지만 임시정부의 몇몇 분은 이것을 양해할 것이고,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의 시급한 문제는 잃은 땅을 찾는 것이다.”
“親日派문제는 國內가 統一된 뒤에”
합동문제와 관련하여 민족 반역자와 친일분자에 대한 질문이 없을 수 없었다. 그 문제에 대해서도 이승만의 대답은 명쾌했다.
“그것도 국내가 통일된 후에야 논의될 것인줄 안다. 외국에서도 전쟁 범죄자를 처벌한 실례가 있으니까… 그것이 급한 문제는 아니다.”67)
쟁점이 되고 있는 굵직굵직한 문제들에 대한 질문이 장시간 계속된 끝에 사사로운 질문이 이어졌다.
“선생님의 고향이 해주(海州)라고도 하고 평산(平山)이라고도 하는데 어디신지요?”
어려서 서울로 올라온 이승만은 조상들이 살았던 해주나 자신이 태어난 평산이나 특별한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빙긋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해주와 평산 사이라고 하면 되지 않겠소.”
“미국에 부인도 계시고 자녀가 계시다는데…?”
왜 같이 오지 않았느냐는 난처한 질문도 나왔다. 이승만이 외아들 태산(泰山: 일명 鳳洙)을 40년이나 전에 미국에서 디프테리아로 잃은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미 남남이 되어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태산의 생모 박씨부인과 그 주변 인물들밖에 없을 것이었다. 이승만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정치하는 사람이 가족을 일일이 말할 수 있소?”
이승만의 이러한 어물쩡한 대답도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는 정치인의 존경스러운 품격으로 받아들여졌다.68)
『뉴욕타임스』는 社說로 支持
이승만의 귀국 뉴스가 온 나라를 뒤흔들다시피 하는 상황 속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이승만의 첫 기자회견에 대한 미국신문과 미 국무부의 반응이었다.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는 존스턴(Richard J. H. Johnston) 특파원이 이승만의 기자회견 직후에 보낸 기사를 10월 18일자에 크게 보도했다. 존스턴은 먼저 한국임시정부 전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하지 중장의 손님(guest)으로 서울에 도착했는데, 그는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한 시민의 자격으로 귀국했다고 말했다고 썼다. 존스턴은 하지 장군이 중경의 김구 주석에게 한국의 정치적 장래를 토의하기 위하여 빨리 귀국하라고 초청했다는 사실도 이승만이 밝혔다고 했다. 이어 존스턴은 이승만이 소련의 정책에 대한 그의 적개심을 거리낌없이 표명했다고 강조했다. 존스턴은 이승만이 도쿄에서 맥아더 장군을 만나서나 서울에 와서 하지 장군을 만나서도 같은 질문을 했다면서, 미국의 많은 사람들이 왜 한국은 소련지역과 미국지역으로 분할되었느냐고 묻는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승만은 “나 자신의 견해는 있으나 지금은 거론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한국을 분할하기로 결정한 것은 얄타회담에서였다는 말을 그는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 들었다”고 덧붙였다고 썼다.69)
“나 자신의 견해는 있으나…”라고 했다는 말은 국내신문에는 정파들의 통일활동을 수립할 구체적인 방침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이승만의 대답으로 보도되었는데, 존스턴의 이러한 기사는 통역과정에 착오가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다.
『뉴욕타임스』는 존스턴 특파원의 기사를 받아 10월 20일자 사설로 이승만의 문제제기에 동조했다.
“세계의 민주적 국민들은 이승만 박사가 맥아더 장군과 하지 장군에게 물었다고 하나 분명히 만족할만한 대답을 얻지 못했을 질문 ─ 왜 한국은 소련지역과 미국지역으로 분할되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대답을 받을 권리가 있다. 이 질문에는 당연히 뒤따르는 비밀 ─ 언제, 어디서, 누가 이 결정을 내렸는가에 대한 질문이 추가된다.…”
『뉴욕타임스』의 사설은 이어 이승만은 지난 26년동안 한국의 독립을 주장해 왔는데 그는 그 결정이 얄타회담에서 이루어졌다고 믿고 있다는 것, 그러나 미국국민들은 한국문제가 제기되기 훨씬 전에 얄타회담의 비밀협정은 모두 공개되었다고 알고 있다는 것 등을 지적하고, 그러한 문제를 토의하기에는 포츠담회담이 더 적합한 자리였다고 보는 것이 더 논리적이라는 것 등을 설명했다. 이 시점에는 관계국들의 이 무렵의 외교문서가 공개되지 않아서 38도선 획정의 자세한 경위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사설은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맺었다.
“한국문제는 비밀히 또는 애매하게 은폐하기에는 너무 중요하다. 극동에서 미국의 도덕적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하게 작용해야 하는가는 우리가 한국, 일본, 필리핀, 그리고 태평양의 다른 지역과 아시아대륙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한국에 대한 분명한 입장 천명, 그리고 우리의 행동들에 대한 설명만이 당면한 혼란을 불식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70)
國務部는 李承晩발언에 크게 당황해
이러한 『뉴욕타임스』의 기사와 사설은 이승만의 권위를 한결 제고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이승만 지지자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그러나 미 국무부는 격앙했다. 소련과의 교섭을 앞두고 있는 국무부는 이승만이 끝까지 말썽을 부린다 생각했다. 번즈 장관이 재일본 정치고문 대리 애치슨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전보는 국무부가 『뉴욕타임스』를 보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뉴욕타임스』지의 10월 17일 서울발 리처드 J. [H] 존스턴의 기명기사는 이승만을 하지 장군의 손님이라고 말했다. 이 기사는 이승만이 ‘소련의 정책에 대한 그의 적개심을 거리낌없이 표명했다’고 적었다.
『뉴욕타임스』지의 10월 20일자 사설은 분명히 이승만이 한국에 도착한 뒤에 행한 38도선에 의한 국토의 분할에 관한 공개 발언을 언급하고, 그의 견해를 지지했다.
국무부는 이승만이 출국하기 전에 자신의 일차적인 목적은 한국인들을 단합시켜서 군사정부에 협력하는 것이라는 다짐을 받았다. 현지에서 자행된 국제문제에 대한 경솔한 언급은 머지않아 소련과 한국안에서 벌일 물자와 용역의 교환을 위한 협상을 복잡하게 만들 것 같다. 이에 대하여, 그리고 9월 27일자 그의 서약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시켜야 한다.…”71)
이승만은 9월 27일에 출국허가신청서를 새로 제출할 때에 신청서에 첨부된, 38도 이남지역이 미군의 군정아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모든 활동이 미군정부의 법령과 규칙에 의해 통제를 받는데 동의한다는 서약서에 서명했었다.72)
미국무부의 이러한 반응은 이승만의 공격적인 발언에 미국무부 안의 ‘친소 친일 분자’들이 얼마나 격앙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해프닝이었다.⊙
1) 『解放日報』 1945년 10월 18일자, 「社說: 第二次全國人民代表者大會의 政治的方向에 대한 提議」. 2) HQ, USAFIK, G-2 Weekly Summary no. 7(1945. 10. 30), A Message to USA Citizens(1945. 10. 5), pp. 1~4.
3) G-2 Weekly Summary no. 7(1945. 10. 30), The Traitors and the Patriots(1945. 10. 13), p. 2. 4) 『每日新報』 1945년 10월 11일자, 「朝鮮에 軍政府뿐 ─ 軍政長官아놀드少將發表」. 5) 『每日新報』 1945년 10월 11일자, 「政治能力表現에 不過 ─ 人民共和國委員會發表」. 6) 『每日新報』 1945년 10월 14일자, 「共和國性格을 解明」. 7) 李萬珪, 『呂運亨先生鬪爭史』, 民主文化社, 1946, p. 242. 8) 정진석, 『언론조선총독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p. 303. 9) H生, 「아놀드長官에게 忠告함」, 『每日新報』 1945년 10월 11일자. 10) 『朝鮮人民報』 1945년 10월 11일자, 「民族統一政權을 支持」; 『新朝鮮報』 1945년 10월 12일자, 「民族反逆者를 除外한 統一政府를 結成」.
11) Marshall to MacArthur,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1945, vol. Ⅵ,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9, pp. 1067~1068. 12) 『每日新報』 1945년 10월 13일자, 「惡質의 七法令撤廢」; 『南朝鮮過渡政府法令集』, 朝鮮行政學會, 1947, p. 11. 13) 『自由新聞』 1945년 10월 17일자, 「司法權의 神聖爲해 民主黨과 絶緣聲明」. 14) 『每日新報』 1945년 10월 15일자, 「裁判도 우리 손으로」; 森田芳夫-長田かな子 編, 『朝鮮終戰の記錄 資料篇(一)』, 巖南堂書店, 1978, p. 287. 15) 『每日新報』 1945년 10월 15일자, 「裁判도 우리 손으로」. 16) 『自由新聞』 1945년 10월 13일자, 「三法院六長官以下日人判檢事罷免」. 17) 『每日新報』 1945년 10월 12일자, 「獨立促成과 聯合國歡迎市民大會」. 18) 『每日新報』 1945년 10월 17일자, 「人民委員會主催市民大會中止」. 19) 『每日新報』 1945년 10월 14일자, 「市政은 市民손으로」. 20) 『每日新報』 1945년 10월 15일자, 「學者經歷者를 網羅 經濟對策委員會」.
21) 『每日新報』 1945년 10월 16일자, 「하지司令官, 軍政府의 定義表明」. 22) 鄭秉峻, 「해방직후 李承晩의 귀국과 ‘東京會合’」, 于松趙東杰先生停年紀念論叢刊行委員會 編, 『韓國民族運動史硏究』, 나남출판, 1997, p. 938. 23) 『북미시보』(제3권 제6호), 1945년 11월 1일자, 「리승만박사의 고별사」. 24) 미국무부문서 895.01/8-1545, Ballantine to Acheson, Sept.13, 1945, “Applications by Koreans to Return to Korea”(Internal Affairs of Korea 1945~1949); FRUS 1945, vol. Ⅵ, p. 1053, footnote. 71. 25) 미국무부문서 895.01/8-1545, Ballantine to Acheson, Sept.13, 1945, “Applications by Koreans to Return to Korea”.
26) Robert T. Oliver, Syngman Rhee─the Man Behind the Myth, Dodd Mead and Company, 1960, p. 210; Robert T. Oliver, The Way It Was─All The Way(unpublished), p. 44. 27) 미국무부문서 895.01/8-1544, Ballantine to Acheson, Sept.13, 1945, “Applications by Koreans to Return to Korea”. 28) Joint Chiefs of Staff to CINCAFPAC and COMGENCHINA INFO COMGENIBE, Sept.13, 1945, 『大韓民國史資料集(28) 李承晩關係書翰資料集(1)』, 國史編纂委員會, 1996, p. 46. 29) Ballantine to Rhee, Sept.14, 1945, Young Ick Lew ed., The Syngman Rhee Correspondence in English 1904~1948, vol. 3, Institute for Modern Korean Studies, Yonsei University, 2009, p. 387. 30)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pp. 210~211. 31) 미국무부문서 895.01/9-2445, Vincent to Dickover, Sept.24, 1945. 32) 미국무부문서 895.01/9-2445, Dickover to Vincent, Sept.24, 1945. 33) 미국무부문서 895.01/8-1545, Ballantine to Acheson, Sept.13, 1945; 895.01/9-2445, Dickover to Vincent, Sept.24, 1945. 34) 이정식, 「해방전후의 이승만과 미국」, 『대한민국의 기원』, 2006, 일조각, p. 317. 35) Robert T. Oliver, op. cit., p. 211; 이정식, 위의 책, p. 313.
36) 이정식, 앞의 책, pp. 313~314. 37) Wikipedia Encyclopedia, (Dec.12, 2009 modified). 38) Byrnes to Robertson, Sept.27, 1945, FRUS 1945, vol. Ⅵ, p. 1060. 39) Rhee to MacArthur, Sept.29, 1945, 『大韓民國史資料集(28) 李承晩關係書翰資料集(1)』, pp. 49~51. 40) 鄭秉峻, 앞의 글, pp. 930~931. 41) “Memorandum,” Sept.5, 1945, 『大韓民國史資料集(28) 李承晩關係書翰資料集(1)』, pp. 41~42.
42) 『新朝鮮報』 1945년 10월 18일자, 「歡迎! 民族最高의 指導者」; 『自由新聞』 1945년 10월 18일자, 「三十三年만에 故土를 밟은 建國의 巨人 李承晩博士」. 43) 미국무부문서 895.00/8-1949, Warren S. Hunsherger, “U. S. Involvement in the Return of Syngman Rhee to Korea and in His Subsequent Prominence in Korean Government and Politics”(Sept.2, 1949). 44) 킨트너證言, 이정식, 앞의 책, pp. 314~315. 45) 『新朝鮮報』 1945년 11월 8일자, 「李博士의 放送要旨」. 46) Rhee to Oliver, Oct.21, 1945, 『大韓民國史資料集(28) 李承晩關係書翰資料集(1)』, pp. 56~57.
47) 『自由新聞』 1945년 10월 19일자, 「李承晩博士, 故國에의 念願을 電波로 絶叫」; 『每日新報』 1945년 10월 18일자, 「李博士맞아 政局活潑進展」; 『新朝鮮報』 1945년 10월 19일자, 「李承晩博士放送要旨」. 48) “MacArthur’s appointment book”, 『大韓民國史資料集(28) 李承晩關係書翰資料集(1)』, p. 55. 49) 『북미시보』 1945년 10월 18일자(호외), 「워싱턴 외교위원부 장거리전화」. 50) 『自由新聞』 1945년 11월 8일자, 「李博士의 放送要旨」. 51) 『自由新聞』 1945년 10월 30일자, 「李承晩博士 敦岩莊에서 記者團會見」. 52) The New York Times, Oct.18, 1945, “Rhee, in Korea, Opposes Division; Urges Unity to Convince World.” 53) Rhee to Goodfellow, Nov.8, 1945, The Syngman Rhee Correspondence in English 1904~1948, vol. 1, p. 549. 54) Robert T. Oliver, op. cit., p. 213. 55) Atcheson to Byrnes, Oct.15, 1945, FRUS 1945, vol. Ⅵ, pp. 1091~1092. 56) FRUS 1945, vol. Ⅵ, p. 1092, footnote 1.
57) Bruce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Ⅱ, ─ The Roaring of the Cataract 1947~1950,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0, p. 233. 58) 張基永 證言. 59) Byrnes to Hurley, Oct.16, 1945, FRUS 1945, vol. Ⅵ, pp. 1092~1093. 60) SWNCC 17618 “Basic Initial Directive to the Commander in Chief, U. S. Army Forces, Pacific, for the Administration of Civil Affairs in Those Areas of Korea Occupied by U. S. Forces”, FRUS 1945, vol. Ⅵ, pp. 1073~1081. 61) 윤치영, 「나의 이력서(41)」, 『한국일보』 1981년 9월 8일자. 62) 許政, 『내일을 위한 證言』, 샘터사, 1979, p. 114.
63) 許政, 위의 책, pp. 114~115. 64) 尹致暎, 『東山回顧錄─尹致暎의 20世紀』, 삼성출판사, 1991, p. 157. 65) 文濟安 證言, 曺圭河-李庚文-姜聲才, 『南北의 對話』, 고려원, 1987, pp. 86~88. 66) 『每日新報』 1945년 10월 17일자, 「李承晩博士, ?三年만에 突然歸國」; 『自由新聞』 1945년 10월 18일자, 「歷史의 一瞬, 李承晩博士 첫會見」.
67) 『每日新報』 1945년 10월 17일자, 「李承晩博士, ?三年만에 突然歸國」; 『自由新聞』 1945년 10월 18일자, 「失地의 完全回復 무엇보다 急先務」. 68) 『自由新聞』 1945년 10월 18일자, 「歷史의 一瞬, 李承晩博士 첫會見」.
69) The New York Times, Oct.18, 1945, “Rhee, in Korea, Opposes Division; Urges Unity to Convince World.” 70) The New York Times, Oct.20, 1945, “Korea in Two Pieces.” 71) Byrnes to Atcheson, Oct.25, 1945, FRUS 1945, vol. Ⅵ, p. 1104. 72) Acheson to Robertson, Sept.27, 1945, FRUS 1945, vol. Ⅵ, p. 10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