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바둑계 이끄는 이세돌(九단)·최철한(九단)·원성진(九단)·윤준상(七단)·강동윤(九단)·김지석(六단)·박정환(四단) 등이 그의 제자
孫鍾洙 <월간바둑> 편집장
⊙ 1958년 서울 출생.
⊙ 월간 <바둑세계> 편집장, 주간 <바둑361> 편집국장, <일간스포츠> 농심 신라면배 관전기자 역임.
⊙ 現 세계사이버기원 사업본부장.
孫鍾洙 <월간바둑> 편집장
⊙ 1958년 서울 출생.
⊙ 월간 <바둑세계> 편집장, 주간 <바둑361> 편집국장, <일간스포츠> 농심 신라면배 관전기자 역임.
⊙ 現 세계사이버기원 사업본부장.

- 도장에서 제자를 지도하고 있는 권갑용 七단(오른쪽).
그 주변을 에워싼 한국 프로바둑의 젊은 남녀 棋士(기사) 40여 명이 환한 웃음으로 축하인사를 건네는 가운데 누군가 ‘사모님’을 찾았고, 뒤늦게 식장 출구 쪽에서 하객들과 인사를 나누던 중년의 여자가 무대 쪽으로 이동했다.
사회자가 무대 하단에 선 중년 부부를 소개했다. 그 뒤로 도열한 40여 명의 젊은 프로와 300여 명의 하객이 다시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쏟아냈고 뒤이어 ‘스승의 은혜’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단발머리 소녀에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애제자 하호정 三단이 ‘스승에게 드리는 편지’를 낭독하는 순간 26년의 艱難辛苦(간난신고)가 영상필름처럼 스쳤기 때문일까.
여자는 기어이 눈가의 물기를 찍어냈고 남자는 그저 묵묵히 여자의 손을 잡았다.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을 것 같은 생애 최고의 시간.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걸린 이 중년부부는 한국 프로바둑 최초로 ‘一門(일문) 200단’ 돌파의 위업을 이룬 ‘권갑용 바둑도장’의 창업주 權甲龍(권갑용) 七단과 부인 박옥주씨다.
권갑용. 그는 보통사람이다. 사법고시보다 더 어렵다는 프로바둑 입단 관문을 통과할 만큼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을 보통사람이라고 하면 ‘무례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분명히 보통사람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올해 53세(1957년생)의 프로 입단 34년차로 具體(구체·프로 七단의 품계.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춰 완성에 이르는 단계)에 머물고 있는 그는, 승리를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승부의 논리로 따질 때 타이틀 획득 한 번 없이 스포트라이트의 死角(사각)지대에서만 20여 년을 보낸 평범한 프로 바둑기사다.
그러나 그는 위대하다. 그가 위대한 이유는 曺薰鉉(조훈현)·李昌鎬(이창호)처럼 세계 무대에 나가 중국, 일본의 정상급 프로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세계 타이틀을 획득했기 때문이 아니라 李世乭(이세돌)·崔哲澣(최철한)·원성진·尹畯相(윤준상)·姜東潤(강동윤)·김지석·박정환 등 조훈현·이창호의 뒤를 이어 한국 프로바둑의 오늘을 떠받들고 있는 수많은 동량을 배출한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바둑교육’이라는 용어조차 생경한 26년 전 척박한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그 뿌리가 깊게 자리 잡을 때까지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성장해 온 한국 바둑의 큰 나무다.
바둑계의 블루오션 개척
그가 잠실에 ‘수양바둑교실’을 개설한 1983년만 해도 한국은 ‘바둑 종주국’을 자처하는 중국과 ‘현대바둑의 메카’로 자부하는 일본의 틈새에 끼여 변두리 취급을 받았던 바둑 약소국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세 차례나 ‘全冠制覇(전관제패·한 해에 모든 프로기전 타이틀을 석권한 기록)’의 위업을 기록한 조훈현보다 일본에서 名人(명인)을 쟁취하고 최고 타이틀 棋聖(기성) 도전에 나선 趙治勳(조치훈)의 일거수일투족이 신문, 방송에 크게 보도됐다. 자발적인 바둑꿈나무들의 교육은커녕 팬들도 프로들도 일본바둑, 일본유학을 동경할 때였다.
그런 환경에서 조훈현·서봉수처럼 이름을 떨친 정상급도 아닌 無名(무명)의 젊은 프로가 토너먼트 프로의 꿈을 접고 바둑 지도자의 길로 나섰다. 주변에서는 당연히 ‘파산하기 쉬운 모험’이라고 만류했으나 그의 신념은 확고했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처음으로 열어 가는 시도였기에 시행착오도 있었고 고생도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그는 나아갈 방향을 잃지 않았다. 1987년 잠실에서 반포로 옮기고 거기서 뿌리를 내렸다. 1993년 ‘권갑용 바둑도장’으로 간판을 바꾼 그는 비로소 마음 깊이 품었던 뜻을 펴기 시작했다.
준비하고 기다려 온 사람에게 때가 왔다. 조치훈의 명인 획득(1980년)과 기성 쟁취(1983년), 조훈현 전관제패(1980, 1982, 1986년) 당대의 高手(고수)들을 꺼꾸러뜨리며 어린이바둑 붐을 일으킨 이창호의 입단(86년), 조훈현의 잉씨배 우승(89년)이 맞닿아 연쇄폭발을 일으켰고, 바둑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가파르게 치솟았다.
바둑 영웅을 꿈꾸는 ‘조치훈 키드’, ‘조훈현 키드’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 시기에 누구보다 먼저 바둑교실을 개설하고, 다시 진일보한 바둑 도장으로 발전시켜 국내 최고의 바둑 지도자로 일어선 그의 성공이 과연, 우연한 행운의 결과일까.
아니다. 권갑용은 한국 바둑교육에 최초로 기록될 블루오션(Blue Ocean)의 개척자였다. 그가 1983년 바둑교실을 개설하며 주목했던 ‘어린이 바둑교육’은 2005년 김위찬 교수와 르네 마보안 교수의 共著(공저)로 출간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블루오션 전략>의 바로 그 ‘블루오션’(경쟁이 무의미한 새로운 시장공간의 창출)이었다.
승부를 업으로 하는 프로 세계에 입문해 승부사가 아닌 지도자로서 최고가 된 사람. 아시아, 유럽, 미주지역에서 바둑 유학을 온 외국의 젊은이들은 그를 ‘그랜드마스터’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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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 21일 서울 반포의 팔래스호텔에서 권갑용 도장 200단 돌파 기념 행사가 열렸다. 앞줄 왼쪽에서 6번째가 권갑용 七단, 왼쪽이 부인 박옥주씨. |
권갑용 바둑도장 20년의 役事
1987년에 둥지를 튼 반포 시대부터 서래마을 시대(2008년 이전)까지 20년 동안 ‘권갑용 바둑도장’(이하 권 도장)이 일으킨 役事(역사)를 더듬어 보면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이곳에서 배출된 프로기사는 모두 44명인데 현재 한국기원에 소속된 현역 프로기사들의 수가 240명이니, 한국 프로기사 전체 숫자의 6분의 1이 ‘권갑용 사단’이라는 얘기가 된다.
또 이들의 단위를 모두 더하면 207단(200단 돌파는 올 5월 백홍석이 七단으로 승단하면서 이루어졌다). ‘一門(일문) 200단’ 돌파에는 또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을까.
점점 의미와 가치가 퇴색하고 있지만 프로 九단 즉, 入神(입신: 신의 경지에 들어선 단계)에 오르는 일은 모든 프로의 염원인데, 200단을 그 입신의 단위로 나누면 정확히 23명의 몫으로 떨어진다.
재능 있는 한 어린이가 프로 수업을 거쳐 입신에 도달하는 기간은, 거의 바둑도장과 연구생 생활로 채워지는 입단공부 10년과 입단 이후 九단으로 승단하기까지 20년을 더해 대략 30년 안팎으로 본다.
개인 차가 있고 새롭게 바뀐 승단제도에 의해 젊은 강자들의 승단기간이 대폭 단축돼 지금은 많이 다르지만 입신이 입신답게(?) 희귀했던 시절의 승단제도라면 권 도장이 일군 207단은 약 700년이라는 시간의 무게를 갖는 셈이다.
기록의 성찬은 더 있다. 권갑용 바둑도장 출신 중에서 가장 먼저 타이틀을 획득한 프로는 ‘풍운아’ 이세돌(1983년생, 1995년 입단. 2000년 제5기 박카스배 천원전 우승). 이후 현재까지 10년 동안 ‘권갑용 사단’이 그러모은 타이틀은 60개가 넘는다.
그동안 후원 기업의 여러 이해관계로 명멸한 기전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지만 보통 한 해에 개최되는 프로기전의 숫자는 세계대회를 포함해 20~25개, 10년이면 최대 250개가 된다. ‘권갑용 사단’이 10년 동안 열린 국내외 프로기전 타이틀의 4분의 1을 쓸어 담았다는 뜻이다.
이들이 쌓아 올린 종합기록이 규모와 숫자에서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한다면 그 내면을 이루는 각 개인의 기록과 이야기는 아기자기하고 독특하다.
조훈현이 잉씨배(응창기배) 우승으로 한국바둑의 위상을 단숨에 중국과 일본의 어깨 위로 끌어올렸던 1989년은 권 도장 출신이 처음 프로 입단을 기록한 元年(원년)이다.
입단 1호 박승문(1964년생, 六단)을 시작으로 매년 입단을 기록하며 빠른 속도로 프로 육성의 명문 도장으로 자리 잡았다. 초기에는 주로 여자 원생들을 입단시켜 ‘여자 프로 전문양성소’라는 비아냥도 있었으나 그런 폄하의 목소리는 남녀 프로들이 고르게 배출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초기엔 주로 여자 프로기사 배출
1990년에 입단한 남치형(1975년생, 初단)은 권갑용 바둑도장 출신의 여자 프로 1호이면서 조영숙(1975년 입단, 三단), 윤희율(1975년 입단, 은퇴) 이후 15년 만에 재개된 한국기원 여자프로 입단대회의 맥을 이은 신세대 1호였다.
입단 당시에는 여자바둑계에 적수가 없는 강자였으나 학문에 뜻을 두고 서울대에 입학하면서 승부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현재는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로 재임하면서 바둑의 학문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1992년에 입단한 윤영선(1977년생, 五단)은 남치형의 뒤를 이은 신세대 여자프로 1세대의 최강자로 군림했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여류 국수전 3회 우승, 2002년 제1회 호작배 세계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는 박지은·조혜연 등 샛별들의 추격이 맹렬해진 2006년부터 해외 바둑 보급으로 눈을 돌리더니 2007년 수학을 전공하는 독일 청년과 결혼해 현재는 독일 함부르크에 거주하며 유럽 최고의 바둑 전도사로 활약 중이다.
권 도장의 지휘자 권갑용의 생애에 가장 기쁜 일을 꼽으라면 뭐가 있을까. 모르긴 해도 1995년, 장녀 권효진(1982년생, 五단)이 입단의 관문을 돌파해 한국기원 최초의 父女(부녀) 기사로 등록하게 된 일은 반드시 후보로 오를 것이다.
입단 초기부터 기자들이 뽑은 ‘여자 프로바둑 5강’에 꼽히는 등 좋은 성적을 올려 아버지를 기쁘게 했던 맏딸은 좀 더 넓은 땅에서 새로운 경험을 쌓고 싶다며 훌쩍 중국으로 떠났다가 어느 날 선녀가 되어 하늘 높이 뜬 달을 따가지고 돌아왔다.
갑자기 웬 전래동화냐고? 못 믿겠지만 이건, 동화가 아니라 현실이다. 중국어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거의 필수코스로 거치는 실전수업 자료 중 중화권 최고 가수로 꼽히는 덩리쥔(鄧麗君)의 ‘웨량다이뱌오워더신(月亮代表我的心. 달빛이 내 마음을 비춰주네)’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권효진이 중국 체류 중에 만나 결혼(2005년)까지 골인한 천생연분의 이름이 웨량(岳亮, 1982년생, 五단)이기 때문이다.
선녀를 따라온 그를 먼발치서 본 적이 있다. 과연, ‘달빛’이란 호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훤칠한 미남. 그는 현재 한국기원 객원기사로 활동 중이다.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가 프로의 길을 원한다면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한국 최초의 ‘프로 삼대’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七劍의 최고봉 ‘폭풍검’ 이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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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돌 九단. |
후기의 권 도장은 최정상을 노리는 승부사들의 조련장으로 바뀌었다. ‘돌부처’를 숭배하는 ‘이창호 키드’가 아니라 거리낌 없이 ‘타도 이창호’의 기치를 들어 올리고 1인자를 무너뜨릴 야망을 키우는 戰士(전사)들의 무한경쟁이 펼쳐지는 격전장으로 바뀐 것이다.
바로 그곳에서 1995년의 이세돌을 시작으로 1997년 최철한(1985년생, 九단), 1998년 원성진(1985년생, 九단), 2001년 윤준상(1987년생, 七단), 2002년 강동윤(1989년생, 九단), 2003년 김지석(1989년생, 六단), 2006년 박정환(1993년생, 四단)까지 순도 높은 원석들이 권갑용이라는 시금석을 거쳐 눈부신 보석(입단)으로 탄생했다.
열거한 젊은 프로들은 권갑용 바둑도장의 武力(무력)을 대표하는 일곱 자루의 검, 즉 ‘七劍(칠검)’이다. 이 명칭은 <영웅문> 시리즈로 유명한 진융(金庸)과 더불어 중국무협의 양대 비조로 꼽히는 량위성(梁羽生)의 작품에서 차용했다.
많은 동문 청년기사 중에서 일곱만 뽑아낸 이유는 이들만이 공식기전 타이틀을 획득했었거나 현재 보유하고 있기 때문. 특히 원성진과 박정환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은 모두 이창호를 상대로 타이틀을 획득한 기록을 갖고 있다.
일곱 자루의 검 중에서 가장 강력한 ‘폭풍검’ 이세돌의 기록을 보면 ‘과연 쎈돌’이란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입단 첫해, 나이 열둘에 LG배 세계기왕전 본선에 진출하고 거의 모든 국내기전 본선에 뛰어들더니 잔뜩 엎드려 있다가 5년차가 되던 2000년에 대폭발을 일으켰다. 32연승(역대 3위 기록)을 질주하며 박카스배, 배달왕전에서 연속 우승.
이세돌에게는 ‘이창호로부터 타이틀을 빼앗은 최초의 후배기사’라는 훈장이 있다(2003년 제7회 LG배 세계기왕전). 이창호가 1인자의 자리에서 물러난 뒤, 한국바둑리그에 얽힌 분쟁으로 ‘휴직 선언’이라는 폭탄을 터뜨리고 홀연히 사라질 때까지 22개월 연속 랭킹 1위를 지킨 ‘지존’도 이세돌이다.
권 도장이 획득한 타이틀 60여 개의 절반에 해당하는 30개가 ‘이세돌 컬렉션’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존재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0년 전 중국의 프로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敵(적)은 이창호였는데, 그 대역을 떠안은 이세돌이 휴직 선언으로 자리를 비운 뒤 여파가 갈수록 커지는 느낌이다.
최근 제14회 삼성화재배 4강전에서 고군분투하던 이창호가 결국 탈락했고 결승은 중국기사들의 手足相殘(수족상잔- 동족상잔, 형제대결과 같은 중국인들의 표현)이 됐다. 한국의 조훈현·유창혁이 그리고 이창호·박영훈이 후지쓰배 우승을 놓고 형제대결을 벌인 것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찬반, 가부의 논쟁을 떠나 ‘이세돌의 조기복귀론’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毒劍’ 최철한과 ‘一劍’ 원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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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철한 九단. |
이창호에게 타이틀을 빼앗은 최초의 후배는 이세돌이었지만 이창호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天敵(천적)은 최철한이었다. 스스로 ‘맹독’이라는 닉네임을 만들어 가질 만큼 치열한 기풍을 가진 최철한은 2004년 제47기 국수전, 15기 기성전 도전무대에서 이창호를 연파하며 주가를 올렸다.
대다수 바둑 관계자들은 박영훈이라는 동갑내기 견제자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이때부터 ‘최철한 시대’가 시작됐을 것이라는 견해에 공감한다. 최철한은 모든 바둑 팬의 우상 이창호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죄(?)로 한동안 많은 팬으로부터 지탄을 받았다.
그 지탄은 세계대회에서 이창호를 꺾고 올라가 중국 기사들에게 패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또 다른 승부에 악영향을 끼칠 만큼 심각한 스트레스를 안겨 주었다. 팬들은 거친 기풍을 가진 프로들의 대다수가 기풍과는 정반대로 마음이 여리다는 사실을 알까.
최철한은 2005년 제5회 잉씨배에서 이창호를 꺾고 결승에 올라가 중국의 창하오에게 패하면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 어둡고 긴 터널을 벗어나는 데 꼬박 4년이 걸렸다. 공교롭게도 은인(?)은 이번에도 이창호였다.
2009년 3월 제6회 잉씨배 결승에서 다시 이창호를 희생양으로 대망의 우승컵을 차지하며 겨울옷처럼 두텁게 온몸을 감쌌던 부진을 벗어던졌다. 괴로웠던 팬들의 지탄은 정면으로 돌파했다. 올해 처음 중국바둑리그로 뛰어들어 정상급 기사들을 상대한 주장전에서 6승1패를 기록, ‘중국 기사들에게 약하다’는 인식을 깨끗하게 지워버렸다.
11월부터 동문의 2년 선배 이세돌이 비운 랭킹 1위의 자리를 최철한이 지키고 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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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성진 九단. |
사실 정상을 향한 원성진의 행군은 동갑내기 최철한, 박영훈보다 한발 빨랐다. 하필이면 2003년, 2004년 연속 LG배 세계기왕전 4강전에서 이창호를 만나 무너지지 않았다면. 이창호는 2004년 LG배 세계기왕전 우승을 정점으로 서서히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원성진은 LG배 4강전 좌절의 충격 이후 3년이 지난 2007년 비씨카드배 신인왕전 우승으로 타이틀의 코를 뚫고 같은 해 박카스배 천원전 우승으로 정상 대열에 합류했다.
2008년에는 한중천원전에서 포스트 이창호 시대의 최강자로 꼽히는 중국의 구리(古力)를 2 대 0으로 눌러 진가를 확인시켰고, 중국에서 열린 세계마인드스포츠게임 바둑부문 단체전에 출전해 금메달을 따냈다.
원성진은 2009년 한국바둑리그 ‘바투’팀의 주장으로 출전해 정규리그 준우승을 이끌며 포스트시즌 챔피언 결정전을 기다리고 있다.
‘鈍劍’ 윤준상, ‘蛇劍’ 강동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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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준상 七단. |
그런데 국수전 5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중국 우한(武漢)에서 막이 오른 도전 1국에서 일을 저질렀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것이 이창호 퇴진의 신호탄이었는지도 모른다. 중국 바둑저널에서 이창호의 전성기에 이런 기사를 게재한 적이 있다.
“날카로운 검으로는 石佛(석불)을 베지 못한다. 鈍刀(둔도)를 휘둘러야 석불을 베어 넘길 수 있다.”
윤준상의 기풍이 딱 그랬다. 이창호는 거울과 싸웠다. 윤준상은 12년 젊어진 이창호였다. 신예답지 않게 서두르지 않고 끈끈하게, 침착하게 끊임없이 1인자를 압박했다. 중국의 3대 열탕으로 꼽히는 우한에서 비지땀을 흘리던 이창호는 결국 하얀 수건을 들어 올렸고 서울로 돌아와 국수의 자리를 12년 후배에게 넘겨주었다.
윤준상은 드러난 이미지 그대로 선하다. ‘둔검’이란 표현은 그래서 더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또 윤준상은 조용하다. 나아갈 때 요란하지 않고 물러설 때도 소리 없다. 국수 첫 방어전에서 동문의 선배 이세돌에게 타이틀을 양도하더니 잠수함처럼 수면 깊숙이 사라졌다. 이따금씩 한국바둑리그나 삼성화재배 같은 넓은 바다에서 잠망경을 올리지만 아직은 별 소식이 없다. 그래도 모른다. 소리가 없을 뿐, 지금 이 시각 굵직한 목표를 향해 어뢰를 조준하고 있을지도.
윤준상의 한 해 뒤 입단의 바통을 받은 ‘蛇劍(사검)’ 강동윤은 치열한 기풍에서 선배 최철한과 비슷하다. 최철한에게 가장 많이 따라붙는 별명이 ‘독사’인데 알다시피 강동윤은 뱀띠, 이쪽이 진짜 독사고 그래서 ‘사검’이다.
둘은 ‘毒(독)’이라는 유사한 살상력을 가졌다. 최철한의 독이 좀 더 파괴적이라면 강동윤의 독은 좀 더 치명적이다. 최철한의 독은 상대를 서서히 괴사시키지만 강동윤의 독은 이빨이 박히는 그 순간 죽음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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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동윤 九단. |
강동윤은 2005년 두 개의 신예기전(오스람배, SK배)을 제패하고 국내외 기전 본선무대에서 1년의 숨고르기를 가진 뒤 바로 정상으로 뛰어올랐다. 그 상대가 내리막길을 걷던 이창호였다.
이해의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결승은 찔리는 순간 숨이 끊어지는 ‘사검’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창호는 우승을 눈앞에 두고 한순간의 착각으로 무너졌다. 이런 패턴은 강동윤과 만나기만 하면 어김없이 되풀이됐다. 강동윤은 이세돌·최철한이 받았던 ‘이창호 팬들의 지탄’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제가 몇 년 동안 모은 안티 팬들을 동윤이가 한 번에 다 가져가 버리던데요?”
이세돌의 조크가 이창호-강동윤의 惡緣(악연)을 극명하게 그려 준다. 이 악연은 2009년 7월 제22기 후지쓰배 결승까지 이어졌다. 강동윤은 익숙해진 공식대로 이창호를 밀어내고 세계대회 첫 우승의 기쁨을 맛봤고, 이창호는 세계대회 연속 준우승의 징크스를 이어갔다(현재 세계대회 7연속 준우승).
관측자들이 강동윤에게 기대가 큰 이유는 ‘강동윤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진행형의 성적이 이 정도라면 앞으로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동료들이 부르는 강동윤의 별명은 ‘깡통’이다. 이름에 빗댄 단순함이 친근하다. 그 안에 무엇을 더 담을지 지켜볼 일이다.
‘花劍’ 김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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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석 六단. |
그만큼 어렸을 때부터 주변의 기대와 관심을 받아온 ‘神童(신동)’이었다는 얘기다. 김지석은 다섯 살 때 거장 조훈현의 테스트를 받았다. 조훈현으로서는 이창호 이후 두 번째로 관심을 가진 棋才(기재)였다. 그때 조훈현의 말.
“오랜만에 쓸 만한 녀석이 나타났어.”
조훈현은 두 번째 제자를 키우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여러 사정이 겹쳐 사제의 연은 맺지 못했다. 거장과의 인연이 어긋났기 때문인지 조훈현과의 만남 이후 좋은 스승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몇 년 동안 광주에서 서울로, 다시 광주로 바둑학원을 전전했다. 많은 사람이 기대했던 재능도 연구생 6, 7조를 오가는 정도였는데 어느 때는 10조 바닥으로 주저앉으며 좀처럼 피어나지 못했다.
일찌감치 조훈현에 버금가는 천재성을 인정받고도 5, 6년을 그저 그런 수준에 머물렀던 김지석은 그래도 프로가 될 운명이었나 보다. 2000년에 드디어 프로 양성의 명문 권갑용 바둑도장의 문을 두드린 것을 보면. 이미 지도자로 달인의 경지에 이른 스승은 한눈에 김지석의 문제점을 알아보았다.
“어린 나이에 매스컴을 타고 신동으로 뜨다 보니 또래의 경쟁자들에게는 오히려 미움을 받게 돼 있었다. 내게 왔을 땐 바둑에 병이 들어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기초부터 다시 쌓아야 했고 특별관리가 필요했다. 스승은 판단했다. ‘김지석은 강하게 다뤄야 할 타입’이라고. 무조건 바둑만 두게 하는 것보다는 기초를 다잡는 것이 급선무라 진단했다. 어린 나이에 대회에 나가 성적을 내는 게 반드시 좋은 건 아니다. 지역에서 천재니, 신동이니 하다가 기초를 다질 시기를 놓쳐 소리 없이 스러져 가는 천재가 적지 않다.
조훈현이 인정한 천재답게 계산이 빨랐고 상상력이 뛰어났다. 棋質(기질)은 장미꽃처럼 화사하고 그 가시처럼 날카로운 공격력이 있었다. 잠재력과 폭발력에서 大器(대기)의 재목이 분명했기에 일부러 대회에 내보내지 않았다.
김지석은 3년 뒤 스승의 판단과 기대에 그대로 부응했다. 입단 뒤 김지석의 성적은 신통치 않았으나 스승은 실망하지 않았다. 김지석은 스스로 자신감을 일으켜야 제 빛을 드러내는 타입이었다.
한국바둑리그에서 크게 활약한 2007년 랭킹 20위 안에 진입하더니 2009년에 비로소 조훈현이 보았던, 그리고 스승이 기대했던 화사한 꽃망울을 터뜨렸다. ‘화검’ 飛散(비산)!
이창호를 꺾고 물가정보배 우승을 차지했고 2009년 11월 9일 현재 60승(다승) 81%(승률), 14연승(연승)을 달리며 12년 전 이창호가 작성한 이래 맥이 끊겼던 ‘꿈의 기록’ 다승, 승률, 연승 3관왕(1997년 이창호 76승, 77.6%, 20연승)을 눈앞에 둔 김지석을 지켜보는 스승의 가슴은 벅차다.
‘柔劍’ 박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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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환 四단. |
입단 2년째에 동문 선배 김지석을 누르고 마스터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했고, 올해 역시 동문의 선배 백홍석을 꺾고 원익배 십단전에서 우승, 적응기도 없이 바로 정상에 올랐다.
호칭이 ‘유검’인 이유는 눈부신 내용을 보여주다가도 터무니없이 쉽게 무너지기 때문이다. 타이틀은 쥐고 있지만 입단 3년차답게 덜 영글었다는 얘기. 아직은 유약하다.
그럼에도 스승은 ‘향후 한국바둑은 김지석과 박정환의 경연장이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덜 영글었다고 생각하는 바둑으로 남들은 평생 하나도 갖지 못하는 타이틀을 척척 따내고 있으니 완숙의 경지에 이르면 어떻게 바뀌겠는가.
재미삼아 권 도장의 젊은 강자 중에서 타이틀 유경험자로만 ‘칠검’을 뽑았지만 타이틀과 연이 닿지 않았을 뿐 ‘칠검’에 준하는 강자는 많다.
한국 랭킹을 정리하다가 새삼 깨닫는다. 미리 봐둔 건 아니었는데 ‘칠검’의 전원이 상위랭킹을 점거하고 있었다.
랭킹 20위 안에 권 도장 출신의 젊은 강자들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칠검’에 들지 않은 이영구(1987년생, 2001년 입단)가 12위, 백홍석(1986년생, 2001년 입단)이 15위. 이쯤 되면 권 도장이 곧 한국 프로바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터뷰] 權甲龍 사범
“아이들 입단했을 때 가장 보람”
―모두가 염원하는 입단이었고 승부할 나이였는데 왜 지도자의 길을 택했나?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승부보다 바둑 자체를 워낙 좋아했다. 2세를 키우면 바둑을 꼭 가르치고 싶었다. 입단 초기부터 언제쯤이 좋을까 많이 생각했다. 병역을 마치고 진로에 대해 고민하다가 ‘김희중 바둑교실’에서 바둑교육의 경험을 쌓으며 그 결심이 확고해졌다.”
―말투나 목소리가 굉장히 다정다감한데 스파르타 교육의 호랑이 선생님이란 얘길 들었다.
“젊었을 때는 스승은 엄해야 한다는 의식 같은 것이 강했다. 지금은 안 그렇다. 어렸을 때 여기서 배운 친구들은 지금도 날 어려워한다. 소질이 없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그만두게 했다. 재능이 없으면 빨리 포기시켜 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게 그들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 더 도움이 될 테고. 단호하게 확인시켜 주지 않으면 미련을 가지고 어딘가에서 또 시작할지 모르니까.
독설도 자주 내뱉었던 것 같다. 실수도 너그럽게 넘어갈 부분이 있는 법인데 젊을 때는 내가 좀 혈기왕성해서 잘 참질 못했다. 고지식했다. 그런 일들이 후회가 된다. 본의 아니게 아이들에게 상처를 많이 준 것 같다. 돌이켜보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내가 깨닫는 것들이 더 많았다. 그게 인생의 연륜이 되는 것인가.
다른 분야에 계신 분들을 만날 기회가 많아서 그 사람들의 생각과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언도 듣고…. 나의 교육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세계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니 그것이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이들에게는 저마다의 재능이 있다. 다 같지 않다. 그걸 살려줘야 한다. 뛰어난 부분이 서로 다르다. 한동안 나는 하나의 방법으로만 가르쳤다. 그게 맞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상처가 되고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그걸 깨달아서 다행이다.”
―프로기사 랭킹을 보니 권 도장의 위상이 실감난다.
“내게는 행운일 수도 있겠다. 그 시기에 기재 넘치는 아이들이 많이 들어왔다. 이세돌·최철한·원성진·박승철·이영구·윤준상·천스위안(한국에서 입단해 대만으로 귀향)·김주호…. 재주 있는 아이들이 참 많았다.
이세돌이야 워낙 잘했고. 이영구는 굉장히 특이했다. 바둑을 너무 빨리 두고 경솔했다. 천천히 두게 하니까 바둑이 안되고 도무지 안 늘기에 일부러 더 빨리 두게 했더니 순발력이 살아났다. 보통 천천히 두면 빨리 두게 하고, 빨리 두면 천천히 두게 하면서 조절하도록 하는데 이영구는 특이했다. 더 빨리 두니까 재능이 번뜩번뜩 나타났다.”
―도장을 운영하면서 어떤 순간이 가장 뿌듯했는지.
“아이들이 입단했을 때다. 이럴 때 생기는 自足(자족)의 에너지도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작지 않은 힘이 된다. 제자들이 입단하고 나서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가르친 스승을 뛰어넘어 타이틀도 따고 이창호를 넘어서고 세계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지도자로서는 당연히, 또 순수하게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도 기쁨이 충만해진다. 그런 기쁨이 다 삶의 에너지가 된다.”
―어렵고 힘든 순간도 있었을 텐데.
“첫 번째는, 나이는 점점 차오르는데 바둑실력도 점점 늘고 있는데 나이 때문에 바둑을 접어야 하는 아이들을 보면 정말 괴롭다(한국기원 연구생 제도는 18세를 넘기면 퇴출된다). 더 아픈 건 애들마다 재능이 다르고 발달시기가 달라서, 분명히 재능도 있고 열심히 하는데도 성적이 안 나올 때다. 다양한 재능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정말 쉽지 않다.”
―토너먼트 프로의 길을 포기한 선택에 대해 후회한 적은 없었는지.
“많이 후회했다. 나중에는 그럴 때마다 스스로 위로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내가 타이틀을 못 따더라도 내가 가르친 아이들이 따면 충분하지 않나. 대리만족이랄까.”
―처음 바둑교육을 시작했을 때와 현재 달라진 게 있다면.
“처음엔 모든 일에 대한 사고방식이 맹목적이었다. 내 고집대로 하고 남의 말도 잘 안 들었다. 매사 부족했는데 그걸 소신이라고, 신념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이제는 바둑 이전에 제대로 된 사람, 사회에 바르게 적응할 수 있는 人性(인성)교육을 많이 한다.
바둑계에 제자들이 많다. 앞으로는 바둑계에 나보다 그 친구들이 할 일이 더 많으니까 인성교육이 중요하다. 바둑계를 이끌어가야 할 사람들은 실력도 중요하지만 덕이 있어야 한다. 이창호 사범처럼 실력과 인품을 겸비한 대기사가 될 수 있도록 가르치려고 노력한다. 예전에 비해 바뀐 것이라면 그런 정도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