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소설] 安重根 義擧 100주년 - 하얼빈 (2)

  • : 이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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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淸은 누구인가?
1945년 울산 출생.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 저서로는 창작집 「우리들의 肖像」과 장편소설 「사바행」, 「회색의 봄」, 「나의 살던 고향은」, 「부처님 동네」, 「우리 옆에 왔던 부처」, 「사리」, 「바람 따라 흐르는 구름 따라」 등이 있고, 수상집으로 「무문관 가는 길」, 「제3공화국 경제비화」, 「話頭의 향기」 등이 있다. 꾸밈없이 평이한 문장으로 사물의 본질에 곧장 육박하는 힘을 지닌 작가로 알려져 있다.
10월 하순. 시베리아에 얼어붙어 있던 찬바람이 대흥안령을 넘어 남쪽으로 밀려 내려오면서 태평양에서 불어오던 샛바람을 밀어냈다. 눈이 쏟아질 듯 하늘은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 본역의 중세식 역사 건물도 때 이른 한기에 어깨를 움츠리고 서 있었다.
 
  우랄산맥 너머 유럽에서 장장 수만 리를 달려온 시베리아 철도가 태평양을 만나 급히 멈춘 곳, 驛舍(역사) 앞 마당 바른편에는 화강암을 네모로 잘라 땅속에 심어 놓은 간이의자가 몇 개 듬성듬성 서 있었다. 그러나 기차 시간을 기다리기 위해 그 차가운 돌 덩어리 위에 엉덩이를 내려놓고 앉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땅바닥을 쓸 듯이 긴 외투 자락을 질질 끌고 다니는 러시아 병정 두 명이 무릎까지 올라오는 펠트 장화를 자랑스럽게 돌 의자 위에 올려놓고, 기차를 타려고 역사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안중근과 우덕순은 벌써 두 시간째 역 광장 건너편 골목의 중국음식점 차일 그늘에 몸을 가리고 병정들의 동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 방향으로 가는 열차는 하루 세 편, 그중 특별 급행열차는 삯이 보통 열차의 두 배나 되기 때문에 수중에 지닌 돈으로는 호사를 부릴 수 없는 형편이고, 다른 두 열차 중 하나는 화물열차였고 다른 하나는 보통 우편열차였다. 오늘 떠나기 위해서는 우편열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우편열차는 차비가 특별열차의 반액인데다 출발시간이 아침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이나 장춘에 도착하는 날짜와 시각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으나 10월16일 시모노세키를 출항하여 18일 대련에 도착한 것이 사실이라면 대련과 여순에서 이틀 정도 보내고 장춘을 거쳐 하얼빈까지 오는 데는 길어야 열흘, 빠르면 일주일이면 올 것으로 예상할 수 있었다. 오늘이 21일이었으므로 한시라도 빨리 하얼빈으로 가 있어야 그 손님을 만날 기회가 생긴다는 계산이었다. 오늘 아침에 출발하는 우편열차를 반드시 타야 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두 명의 러시아 병정이 말뚝처럼 박혀 서서 열차를 타려고 지나가는 행인들을 훑어보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이런 경우를 예상하여 기차 시간보다 훨씬 앞당겨 역으로 나온 것이 다행이었다.
 
  다시 반 시간이 흘렀다. 역사 지붕의 커다란 시곗바늘이 오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러다가 기차를 놓치겠어』
 
  우덕순이 누런 반외투의 깃을 끌어올리면서 말했다. 안중근은 우덕순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아 주면서 말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있어 봅시다. 어차피 역에 들어가도 기차는 시간이 돼야 떠나니까요』
 
  『그렇구먼』
 
  우덕순은 수긍했다. 안중근의 말을 들으면 언제나 마음이 편해졌다. 회령전투 때도 그랬었다. 그는 이 젊은이를 따라나선 것이 정말 잘한 일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누군가 우덕순의 외투 자락을 잡아당겼다. 기겁을 한 우덕순이 돌아보자 서른 중반의 여자 하나가 대여섯 살 난 계집아이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엄마와 아이는 모두 거지나 다름이 없는 모습이었는데, 엄마는 격심한 고통을 참아내느라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고 아이는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었다. 우덕순의 앞에 서서 역 광장을 지켜보고 있던 안중근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어디선가 낯이 익은 사람들이었다. 하긴, 조선 사람들은 어디서 만나도 모두 낯이 익은 모습이니까.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아』
 
  여자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여자의 탄성과 함께 안중근도 기억이 되살아났다. 사흘 전 연추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오는 배에서 만난 가족이었다. 멀미를 심하게 하여 창자까지 다 토할 듯 뱃전에 목을 늘여 놓고 있던 여인의 뒤에 불안하게 붙어 서서 엄마의 옷자락을 꼭 잡은 채 떨고 있던 계집아이를 중근이 안아 주었다. 배에는 손님의 절반이 조선 사람들이었고, 그들 대부분이 이 모녀와 다름이 없는 행색이었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으나 중근은 이들 모녀를 보자마자 진남포에 두고 온 아내 아려와 아들 생각이 나서 가슴에 뜨거운 물이 고였다. 해주와 평양으로 간다는 정대호에게 자신의 가족을 동행하여 데리고 오도록 부탁을 해놓았으니 지금쯤 모자가 진남포를 떠나 멀고 아득한 북만주를 향해 여행길에 올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눈앞에 있는 모녀와 그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중근은 자신의 외투를 벗어 계집아이를 감싸주고 여자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여인의 입에서는 물 한 방울도 나오는 것이 없었다. 빈 창자를 몇 번 더 끌어올리다가 여인은 뱃전에 기대앉았다.
 
  『고맙슴』
 
  여인이 신음 같은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말투로 보아 함경도 사람이었다.
 
  『어딜 가시오?』
 
  여인은 눈으로 계집아이를 가리켰다.
 
  『이 애 아버지가 하루빈(하얼빈)에 가서 일해요. 철도 만드는 공사장에 간 지 5년이나 됐어요. 이 애 얼굴도 모르고 떠났지요. 죽었는가 했는데 기별이 왔어요. 하루빈에서 아라사(러시아) 사람들 상대로 무슨 장사를 하고 있으니 오라고요』
 
  바로 그 모녀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이틀을 보내고 지금 기차를 타려고 역으로 나가고 있는 중이라 했다.
 
  『허어 참, 묘한 인연이로구먼. 우리도 마침 기차를 타러 가던 중입니다. 함께 갑시다』
 
  중근은 우덕순에게 눈짓을 하고 여인이 안고 있던 보따리를 받아 들었다. 보따리를 받아 들면서 빠른 손놀림으로 자신의 외투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어 여인의 보따리 속에 쑤셔 넣었다. 그런 다음 보따리를 우덕순에게 내밀었다.
 
  『이건 우형이 좀 들고 갑시다』
 
  우덕순이 보따리를 받으면서 자신의 가슴에 숨겨 두었던 권총을 꺼내어 보따리 속에 감추었다. 그런 다음 중근은 계집아이를 들쳐 업었다. 우덕순은 한 손으로는 때에 절은 검은색 광목 보따리를 끌어안고 한 손으로는 여인을 부축했다.
 
  네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되어 역 광장으로 걸어 나갔다. 러시아 병정 두 명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전에도 이 광장에 와본 일이 있었는데』
 
  고개를 세우고 촌사람이 도시 구경하는 모양새로 사방을 휘둘러보면서 중근이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저런 병정들은 없었소. 만주 서쪽 끝에서 오고 있는 손님 때문에 동쪽 끝에서도 채비를 하는가 봅니다』
 
  『우리도 환영해 줍시다, 기필코』
 
  우덕순이 깨문 입술 사이로 말을 씹어 뱉었다. 중근은 낮게 드리운 하늘을 쳐다보며 「하」 하고 숨을 뿜었다.
 
  『이건 전쟁이오』
 
  우리는 전쟁을 하는 병사다. 그리고 지금 어느 때보다 중요한 작전을 수행 중이다. 안중근이 입버릇처럼 해오던 말이었다. 우덕순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근의 등에 업힌 계집아이는 사내의 너른 등짝에 얼굴을 파묻고 두 손으로 목을 끌어안았다. 다시 뜨거운 것이 가슴에 고였다. 태어나 여태까지 아비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아이였다. 갑자기 나타난 조선 남자가 아버지 같았기 때문일까. 이들을 북만주의 추운 들판으로 내쫓은 승냥이 같은 놈들을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하늘이 준 이번 기회를 잃어버리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므로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했다.
 
  대합실 안쪽의 입구에 러시아 병정 두 명이 더 지키고 서 있었다. 그들도 중근과 우덕순, 그리고 모녀를 잠깐 유심히 바라보았으나 곧 시선을 거두었다. 모녀를 차가운 나무의자에 앉혀 놓고 중근과 덕순은 기차 시간표와 요금표가 걸려 있는 벽 밑에 섰다. 가끔 이쪽을 힐끔거리는 러시아 병정들의 눈길을 일부러 무시했다. 권총을 여인의 보따리 속에 숨겨 놓았으므로 거칠 것 없이 행동하는 것이 의심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아무래도 하얼빈행 특별 급행열차가 마음을 끌었다. 급행열차는 하얼빈까지 직행한다. 시간도 빨랐다. 그러나 차비가 보통 우편열차의 두 배였다. 수중에 지닌 100루블 가지고 두 사람이 하얼빈까지 갈 수는 있겠으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남의 땅에서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엄중한 사실을 뼈에 시리도록 겪어온 터이라 그런 모험은 이번 임무를 포기하자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두 사람이 아니라 일행이 세 사람하고 어린아이까지 덧붙어 있었다.
 

  『일단 綏芬河(수분하·스이펜호)까지 갑니다』
 
  『수분하는 왜?』
 
  우덕순이 물었다.
 
  『거기 한의원 하는 유경집이라는 조선인이 살고 있습니다. 전에 연추에서 알았던 분인데 매우 진중하고 속마음이 뜨거운 분입니다. 유경집에게 이 여자와 아이를 맡겨볼까 합니다. 아무래도 저대로 하얼빈까지 가다가는 도중에 무슨 변을 당할 것 같아서요』
 
  우덕순은 저만치 나무의자에 앉아 있는 모녀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몸에 남아 있는 생기가 희미하게 꺼져 가고 있었다.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유경집에게 젊은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 젊은이가 아라사 말을 곧잘 합디다. 이 사람을 하얼빈까지 우리의 길잡이 겸 통역으로 동행해 가면 좋을 것 같아서요』
 
  『좋은 생각이오』
 
  우덕순이 감탄했다. 중근과 덕순 두 사람 다 러시아말을 할 줄 몰랐다. 말은 몰라도 무작정 살아가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어린 딸을 데리고 하얼빈에 있다는 남편을 찾아 나선 저 여인처럼, 결국은 어딘가로 가게 마련이니까. 그러나 작전을 수행하는 데는 장님 문고리 잡듯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여인과 다섯 살짜리 계집아이가 훌륭한 역할을 해주었다. 모녀를 쉬게 하여 생명을 되찾아 주고 새로운 보조자를 찾자는 제안이었다. 중근은 기차 시간표와 요금안내판을 바라보며 계산해 보더니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소리령까지는 세 사람 다 3등칸에 타고 갑니다. 소리령에서 수분하까지는 2등칸으로 갈아타야 합니다』
 
  「가진 돈이 넉넉지 못할 텐데 갑자기 소리령에서 수분하까지 2등칸은 왜?」 하고 우덕순은 의아한 눈빛으로 중근을 바라보았다.
 
  『수분하는 하얼빈이나 블라디보스토크만큼 큰 도시는 아니지만 제법 큰 국경 고을입니다. 저것 보세요. 기차가 오래 정거하여 물과 석탄을 공급받는 중간 기착지입니다. 거기서 내리려면 세관의 엄격한 검사를 통과해야 하고, 갑자기 경계가 강화된 걸로 봐서 수분하역에서 만만찮은 병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2등칸에서 내리는 손님에 대해서는 세관의 검사도, 병사들의 검문도 형식적이거나 그냥 통과시키거든요』
 
  『역시』
 
  우덕순은 감탄했다.
 
  『대한 독립군의 참모중장이라는 직위가 그저 생긴 것이 아니로구먼. 나 지금 감탄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태운 보통 우편열차는 오전 8시30분에 블라디보스토크역을 출발하여 힘겹게 북만주의 중심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주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영사 사사키는 사전 기별도 없이 숙소로 불쑥 찾아온 한성의 조선주차군 헌병대 장교인 이시무라 소좌의 방문을 받았다. 문관 출신으로 군인들의 무식한 행동을 경멸하고 있던 사사키는 예의도 차리지 않고 저녁 늦게 들이닥친 이시무라 소좌를 뜨악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땅으로 밀려오고 있더군요』
 
  『러시아 당국에서도 골치를 앓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동하는 것은 장마철에 개미가 이동하는 것, 난파선에서 쥐떼가 바다로 뛰어드는 것과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아서 국경을 총으로 지키는 것만 가지고는 해결이 되지 않을 거요. 도대체 조선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요?』
 
  『영사님께서는 마치 남의 나라 일처럼 말씀하시는군요. 한가해 보이십니다』
 
  『한가한 것은 조선통감부와 주차군이오. 다 된 밥에 계속 코를 빠뜨리고 있지 않소』
 
  『통감이셨던 이토 공작께서 지금 하얼빈으로 오고 계십니다』
 
  『알고 있소』
 
  『러시아와의 관계를 다져 놓고 만주를 공동 경영할 기반을 확실하게 해놓은 다음 조선을 합병하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알고 있소. 이미 내각에서 결정한 일이오』
 
  사사키는 불쾌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처럼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사케 한잔을 즐기려던 참에 조선에서 온 헌병 소좌와 어리석은 소리나 지껄이고 있을 정도로 자신이 한가한 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일 참이었다. 이시무라 소좌는 일어서는 사사키 영사의 옷깃을 잡듯 서둘러 본론을 꺼냈다.
 
  『러시아 땅에 근거지를 두고 두만강을 넘나들며 소위 의병활동을 하던 조선인들 중 일부가 이토 공작의 이번 만주 방문을 기회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일을? 무슨 일을 어떻게 꾸며? 저들은 오합지졸들이오. 총을 가진 자도 세 놈에 한 놈이고 자금이 없어 움직이지도 못하오』
 
  『자금이 조선에서 흘러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걸 막으라고 조선주차군이 있는 것 아니오? 아니면 조선에 제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이유가 따로 또 있어요? 당신들은 원족이라도 나온 거요?』
 
  이시무라는 울퉁불퉁 제멋대로 생긴 상판과는 달리 참을성이 많았다.
 
  『그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조선 황실에서 내탕금으로 은밀하게 의병활동을 지원하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그러나 확인하지는 못했어요. 확인하지 못했을 뿐 그런 사실이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황제라는 자가 앞으로는 이토 통감에게 보호를 요청해 놓고 뒷구멍으로 밀사를 헤이그에 보내어 「일본이 강제로 조선을 침탈하고 있다」 는 식으로 떠들고 다닌 것도 내탕금의 힘입니다』
 
  『그럼 돌아가 조선 황실의 내탕금을 모조리 압수해 버리시오』
 
  『왜 이러십니까, 영사님, 긴급한 정보를 가지고 의논 드리려고 온 사람입니다』
 
  『말해 보시오. 빙빙 돌리지 말고』
 
  『조선인 반란 단체가 이토 공작을 살해할 음모를 꾸미고 활동에 들어갔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이토 공작은 만주 서쪽의 요동반도에 계시오. 그쪽에는 관동도독부가 있지 않소』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여순과 대련, 장춘까지는 제국 군대의 힘이 미치는 곳이니까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문제는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는 장춘 동쪽입니다. 하얼빈은 그중 한 곳이고, 특히 블라디보스토크는 불량한 조선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니까 여기서 이토 공작 살해를 모의하는 놈들이 발진할 거라는 정보입니다』
 
  『정보와 상상은 다르지요. 확실한 정보가 있소?』
 
  『아직 그런 것은 없습니다. 다만 러시아 당국에 의뢰하여 수상한 조선인들의 열차 이동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살피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것 보시오, 이시무라 소좌』
 
  사사키는 이제 정말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접견실을 나가려다 말고 돌아보고 한마디 했다.
 
  『당신들 군인들은 정말 단순하고 무지하구먼. 그 정도 조치는 이미 해놓았어요. 이토 공작께서 여순과 대련, 장춘을 거쳐 하얼빈으로 오고 있는 중이라는 얘기는 이곳에 사는 제국 신민들도 가슴 들떠 지켜보고 있는 중이지만 조선인들도 술렁이고 있소. 그 이유를 모를 정도로 내가 바보라고 생각하오? 러시아 당국에서 이미 기차역마다 검문을 강화하여 쥐새끼 한 마리 움직이지 못하도록 둑을 막아 놓았소. 만약 수상한 자가 있으면 민간인으로 가장한 러시아 비밀경찰이 끝까지 추적하도록 협의를 끝내 놓았소』
 
  『옛, 그렇습니까, 그것도 모르고 정말 무례했습니다. 이 무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빌어먹을 놈」
 
  사사키는 돌대가리 같은 조선주차군 헌병 소좌를 흰눈으로 작별한 후 접견실을 나가 버렸다.
 
 
  5. 가미사마
 
  관동도독부의 헌병부대 상등병 치바 도시치(千葉十七)는 새벽부터 군화를 닦고 군복을 다려 입느라 정신이 없었다. 새벽잠을 설치고 일어나 한 시간 동안 공을 들인 결과 군화는 파리가 낙상할 정도로 반질반질 광이 났다. 먼지 하나 앉아도 비칠 정도였다. 군화 주둥이에 「후」 하고 입김을 불자 김이 둥근 원을 그리며 앉았다가 연기처럼 작아지며 사라졌다. 다음에는 군복이었다. 어제 저녁 육군 정량 한 끼 밥을 고스란히 물에 풀어 풀을 만들고 행사용 여분의 군복에 풀을 먹여 놓았는데 하룻밤 사이에 잘 말라 있었다. 다리미를 들고 취사장으로 가서 타다 남은 불 덩어리 몇 개를 담아 왔다. 그것으로 오랫동안 정성스럽게 옷을 다렸다. 깃이 꼿꼿하게 섰다. 한쪽 바짓가랑이를 다리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군복 한 벌이 떨어졌다. 돌아보니 오장(伍長) 이노우에였다.
 
  『어이, 내 것도 다려』
 
  이노우에 오장의 군복은 이미 어제 다려 주었는데 그 사이에 새로 다린 옷을 한 번 입고 나가더니 구겨진 것을 펴라는 지시였다. 치바 상병은 말없이 자신의 군복 바지를 밀쳐 놓고 이노우에 오장의 군복부터 먼저 다려 대령했다.
 
  『좋아』
 
  이노우에 오장이 자신의 군복 바지를 쳐들고 이리저리 살핀 후 말했다.
 
  『잘 다렸어. 그러나 난 너 같은 놈이 싫어』
 
  『옛』
 
  『뭐가 예야? 미야기겐(官城縣)의 촌놈 주제에』
 
  이노우에 오장은 자신이 에도 출신이라는 점을 늘 자랑하고 있었다. 에도 이외의 지역에 살던 놈들과는 근본이 다르다는 말투였다. 치바는 사는 지역에 따라 인간의 근본이 다르다는 이노우에의 생각을 모두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에도 출신과 옛 다테번(伊達藩)인 미야기겐 출신의 사람들 사이에 뭔가 다른 것이 있다는 정도는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이노우에가 흘러간 시대의 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나 에도 홍등가에서 밑을 파는 여자들을 지켜 주고 뜯어먹으며 사는 막된 인생이었다는 말도 들었으나 그래도 에도는 에도, 다테번은 다테번이었다.
 
  다른 때보다 아침밥을 일찍 먹은 이날의 차출병 스무 명은 오장 이노우에의 지시에 따라 부대 본부 건물 앞에 정렬했다. 부대장 모리나가 중좌가 대열 앞에 섰다. 치바 상등병은 부대장 모리나가 중좌의 멋진 군장을 바라보았다. 눈이 부셨다. 머리에 눌러쓴 군모와 어깨의 견장, 구김살 하나 없이 꼿꼿하게 날이 선 군복과 아침 햇살을 받아 번쩍이는 군화에 이르기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치바는 부대장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것이 대일본제국이구나」 하는 감동을 느꼈다. 바로 그 대일본제국이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오늘 어떤 사명을 띠고 영광스럽게도 차출되었는가? 아는 놈 있으면 말해 보라』
 
  모두 알고 있었으나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군대에서는 중간에 서서 대열을 따라가기만 하면 그만이지 절대로 앞에 나서서는 안 된다는 소중한 교훈을 깨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모리나가 중좌가 불쾌한 낯빛으로 이노우에를 힐끗 바라봤다. 이노우에는 화가 치민 눈빛으로 대열을 훑다가 그 눈빛을 치바 상등병의 얼굴에 박았다. 치바는 감전된 것처럼 차려 자세를 하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옛, 추밀원 의장이신 이토 공작 각하의 여순 방문 일정을 호위하는 영광스러운 임무입니다』
 
  『맞았어. 어이, 이노우에군, 저 병사를 눈여겨보아 두게. 나중에 다른 임무를 부여할지도 모르니까』
 
  『옛,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부대장은 기분이 좋아져서 하던 말을 이었다.
 
  『공작 각하를 호위하는 부대는 우리 헌병대 말고도 관동도독부 예하의 부대 장병 수천 명이 동원된다. 그러나 그런 부대와 너희들의 임무는 다르다. 너희들은 공작 각하의 발뒤꿈치를 따라다녀야 하는 근접 호위 임무를 맡는다. 제국 헌병으로서 품위를 지키고 개미 새끼 한 마리 공작 각하의 옆에 얼씬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감시하도록, 알겠는가?』
 
  치바의 가슴이 뛰었다. 이토 공작을 지근 거리에서 뵙게 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날 이토 공작의 일정은 오전 10시에 여순역 도착, 여순 서쪽 외곽에 있는 일로전쟁 때 전몰한 제국군대 합동 묘지 참배, 이어서 격전지였던 203고지를 둘러보고 관동도독부를 시찰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관동도독부 시찰을 마치고 오후 6시 특별열차편으로 대련으로 돌아가 청나라에 와 있는 각국 외교관과 일본 관헌 및 민간인들이 합동으로 마련한 환영회에 참석하게 돼 있었다.
 
  「참 바쁜 분이군」
 
  치바 상등병은 생각했다. 아무리 특별열차를 타고 다니고 수하들이 준비를 해놓는다 해도 하루에 그 많은 일정을 소화한다는 것이 보통 사람으로는 해내기 어려운 일로 생각됐다. 게다가 만나는 사람들도 국가의 흥망이 걸린 문제를 두고 이해가 대립되는 외국 사절들이거나 대표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귀신처럼 요리하는 솜씨를 지닌 이토 공작이야말로 살아 있는 신이라고 치바는 생각했다. 미야기겐의 궁박한 시골에서 평생 농사를 짓던 아버지 치바 신기치(千葉新吉)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살아서 큰일을 하는 사람은 죽어서 신이 된다』
 
  아버지가 몰랐던 일이 있었다. 살아서 큰일을 한 사람은 죽어서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이미 신의 자리에 올라가는데 이토 공작이 그 경우였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고향에 돌아가 이 사실을 알려 주고 싶은데 불행하게도 아버지는 세상에 없었다.
 
  치바는 여순역에서 처음으로 그 신(가미사마)을 보았다. 짙은 초록색으로 칠한 특별열차는 예정대로 오전 10시에 여순역에 도착했다. 군악대가 팡파르를 울리고 행진곡을 연주하는 가운데 줄잡아 서른 명 가까운 수행원을 꼬리처럼 길게 거느리고 걸어오는 노인이 있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노인의 흰 수염을 건드리자 수염들은 보기 좋게 날렸다. 노인은 마중 나간 관동도독부 하세가(長谷川好道)와 대장의 영접을 받고 그와 악수를 나눈 다음 사방을 돌아보았다. 웃음을 띤 얼굴이었다. 욕심 같은 것이 붙을 자리가 없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하고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치바는 마음이 하늘에 붕 뜨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살아 있는 신을 보고 있다. 저승에 간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았으면 좋으련만 어떻게 알릴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안타까웠다.
 
  치바는 일로전쟁의 개전이 임박했던 1904년 벽두에 군문에 들어왔다. 그때까지 군인이라는 직업은 특정계급의 독차지여서 농사꾼이 넘볼 처지가 아니었으나 막부시대가 가고 메이지 시대가 열리면서 國民皆兵(국민개병)의 천지개벽이 이루어졌고, 처음으로 징집제도가 실시됐다. 농사꾼이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나라가 주는 돈을 만져 보려면 군문에 입대하는 것이 최상의 길이었다. 치바는 징집을 당했으나 징집이 아니더라도 입대하고 싶었으므로 자원입대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가 입대하자마자 일로전쟁이 벌어져 제국군대의 절반이 만주 땅에서 흙이 되었으나 운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치바는 센다이의 보병연대에서 전쟁 이야기를 먼 소문으로만 듣고 지냈다.
 
  전쟁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몹시 부끄러워하던 치바는 기회가 오자 헌병에 지원했다. 군대 내에서 헌병이 인기 있는 고급부대였고, 당연히 떨어지는 푼돈이 많았다. 시골에 있는 가족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그를 헌병으로 지원하게 등을 떠민 가장 큰 힘이었다. 헌병이 된 치바는 조선주차군으로 파견됐다. 그리하여 조선주차군 사령부의 헌병대에서 1년 하고도 반이나 근무했었다. 주로 대한제국 정부의 각료들 집을 경비하고 불순한 조선인들의 방화, 약탈, 파괴공작을 막는 임무였다. 치바 자신은 총리대신 이완용의 집을 외곽에서 경비했다. 부대원 중 통감부에 파견 나가 있는 군인들도 있어 그들로부터 이토 통감의 거동과 소식을 들을 뿐 이토 통감을 목전에서 본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일본제국도 내부적으로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그런데도 이웃 조선을 개화시켜 문명국으로 이끌고 유럽과 청나라나 러시아 등의 침탈 야욕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은 이토 통감의 자비심 때문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부엌의 식칼이나 쇠똥을 치우던 쇠스랑 따위를 무기라고 들고 싸우자고 나서는 어리석은 민초들이 있다. 누군가 그들을 책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토 통감은 인내심을 가지고 제국의 돈을 끌어다가 철도를 놔주고 학교를 세워 주고 있다. 신이 아니면 이런 일을 누가 하겠는가』
 
  조선주차군에서 근무할 때 치바는 동료 헌병들에게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었다. 그때의 생각이 옳았다. 한 가지 치바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었다. 이토 공작의 원모는 단순히 조선의 보호와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거대한 청나라의 코를 꿰어 꼼짝 못 하게 눌렀고, 지구 상에서 가장 큰 나라 러시아를 밟았다. 다시 꿈틀거리는 러시아의 백곰을 수중에 넣어 요리하기 위해 이번 만주 여행길에 오른 것이라고 뭘 좀 아는 동료들로부터 들었다. 저 작은 체구의 노인이 전 세계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움직이고 있었단 말인가. 치바 상등병은 믿어지지 않았다.
 
  한 가지 욕심이 생겼다. 저 위대한 신을 좀더 가까이 모시고 싶다는 욕심이었다. 일본 국내에서와는 달리 만주는 세계 여러 나라의 이권과 관심이 칡넝쿨처럼 얽히고 설켜 있는 땅이다. 청나라의 비적들도 들끓고 있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여 떠도는 조선 사람들도 의병이니 뭐니 하는 이름으로 비적 같은 작당을 꾸미고 있다. 치바는 그들로부터 이토 공작을 지키는 일이라면 장춘과 하얼빈까지 수행하여 호위하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다. 오장에게 말해 볼까? 그러나 오장의 힘만으로 그런 중대한 결정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부대장 모리나가 중좌는 할 수 있을까? 아까 『저 병사에게 다른 임무를 맡기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혹시 그런 임무가 아닐까?
 
 
  6. 그물과 물고기
 
  203고지는 이름이 고지이지 작은 언덕이었다. 이토 공작은 하세가와 대장의 안내를 받으며 고지 정상에 올라 눈 아래의 개활지와 그 너머 흰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황해의 거친 물결을 바라보았다.
 
  『1904년 2월19일부터 북진을 시작한 제국군대는 3월 중순에 평양에 집결하고 진남포에 상륙한 제1군 2개사단과 함께 5월5일에 요동반도에 상륙하여 모두 세 차례의 총공격으로 6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여순의 적을 패퇴시켰습니다. 이로써 러시아 함대의 본거지를 뿌리 뽑아 적의 한쪽 날개를 꺾어 버린 셈이 되었습니다』
 
  이토는 하세가와 대장의 뻔한 설명을 듣고 있지 않았다. 조선주차군 사령관이던 하세가와를 여순 공략 다음의 봉천전투에 투입한 사람이 이토 자신이었다. 러시아와의 전쟁이 승리로 끝났을 때 조선반도를 선점한 것만 가지고는 전승의 공을 다툴 수 없다. 만주에서의 대회전에 참가해야만 그 공이 평가될 것인즉 조슈번(長子藩)의 후광을 업고 있는 하세가와를 어떤 명목으로든 봉천전투에 투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 5개군단 25만 명과 크로파토킨 사령관이 이끄는 러시아군 32만 명이 대결한 봉천전투에서 승패의 열쇠는 시간이었다. 시간은 병력을 전장에 투입하고 보급품을 실어 나르는 데 절대적인 常數(상수)이다. 시간을 내 편으로 하는 쪽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었다. 시간을 내 편으로 하기 위하여 일본과 러시아는 사력을 다한 경주를 벌여 왔다. 일본은 부산에서 의주에 이르는 철도 부설에 박차를 가하였고, 러시아는 재정이 엉망인데도 무리하여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건설했다. 일본의 작전은 시베리아 황단철도가 완성되기 전에 러시아군을 격파하는 것이었고, 러시아군은 대륙을 횡단하여 지원군과 보급품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크로파토킨 사령관은 비록 여순에서는 물러났으나 봉천에서는 증원군 2개군단 10만 명이 도착하기만 하면 일본군 25만 명을 일거에 제압해 버린다는 계산으로 버티고 있다.
 
  『러시아 군대는 무기와 사기가 형편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세계 최강의 육군 전력을 가진 대국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이 군대는 어느 곳에 진지를 구축할 때 그저 참호만 파고 장벽만 쌓는 것이 아니라 천년 만년 살 것처럼 견고한 영구 진지를 구축합니다. 콘크리트로 깊고 넓게 구축한 참호는 아군의 융단 포격에 먼지만 일으킬 뿐이었습니다. 이 고지에서도 그랬고, 봉천전투에서도 그것이 전투를 어렵게 한 결정적인 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여순에서 6만 명, 봉천에서 7만 명의 아까운 제국의 젊은이들 눈에 흙이 들어갔다. 이 어리석은 장군들은 아직도 여순과 봉천 대회전의 승리가 자신들의 공인 줄로 착각하고 있다는 말인가? 한심한 놈들 같으니라고.
 
  일로전쟁에서 최후의 승패를 가른 봉천전투를 앞두고 중과부적의 전세를 뒤엎은 것은 하세가와 같은 장군들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조선에서 데리고 있던 在鮮(재선) 헌병대 사령관 아카시(明石元二郞)의 공작 때문이었다. 아카시가 공작금 100만 엔을 청구하자 일본 정부는 물론이고 군부에서 미친 소리라는 듯이 일축해 버렸다. 그러나 이토가 그 공작을 살려냈다. 거금을 손에 쥔 아카시는 주영 공사관부 무관인 우쓰노미야(宇都宮太郞) 대좌와 협력하여 러시아 내부의 혁명세력에게 군비와 무기를 공급했다. 해외에 나와 있는 과격파 혁명 세력에 자금을 공급했다.
 
  그 결과 1904년 10월4일 파리에서는 유럽 각국에 흩어져 있던 러시아 자유당과 혁명당 등의 대표자 대회가 열리고 그 힘을 바탕으로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1905년 1월22일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 파업이 일어나고 10만 명의 군중이 동궁을 향해 행진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군대가 무차별 발포하여 사망 1000명, 부상자 2000명을 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단발로 그치지 않았다. 거대한 러시아는 돌이킬 수 없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봉천전투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는 러시아군에 약속됐던 지원군 10만 명은 끝내 오지 않았다. 국내 폭동을 진압하는 것이 더 화급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러시아군은 잘 버텼다. 비록 사망 9만 명에 2만 명을 포로로 내어 주고 패퇴하기는 했으나 잘 싸웠다. 승리한 일본도 기진맥진하여 더 싸워 볼 여력이 조금도 없었으니까.
 
  끔찍한 일이었다. 이토는 그때를 생각할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러시아의 항복을 받아 내고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주선으로 강화회담이 열리게 되었으나 일본은 전승국이라기보다 패전국처럼 돌이키기 어려운 골병이 들어 있었다. 만약 그런 때에 조선에서 무장 봉기라도 일어났더라면, 그 봉기를 청나라가 돕고, 미국·영국과 프랑스·독일이 지원하고 나섰다면 모르긴 하지만 일본은 조선 합병의 꿈을 접고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대륙에 걸친 거대 제국의 꿈은 한바탕 개꿈으로 접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무장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다. 간헐적이고 산발적인 의병활동은 꾸준히 이어졌으나 전국적인 규모로 이끌 지도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유가 어디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토는 일본 정부 내의 어리석은 각료들과 군인들, 그리고 지식인들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단견에 침을 뱉었다. 조선의 무장봉기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은 것은 자신이 심어 놓은 환상 때문이었다. 조선 사람들은 러시아와 청나라의 부당한 압제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본이 두 차례나 전쟁을 수행했다는 이토의 말을 그대로 믿어 주었다. 자신이 공을 들여 가꾸어 놓은 친일세력이 여론과 민심을 이끌었다. 이제 그 친일세력들이 성급하게 일한 합방을 요구하며 일본 정부를 움직이려 하고 있다. 그것을 반대하는 자신을 통감 자리에서 밀어낼 정도로 조선 사람들은 어리석었다.
 
  『바가야로』
 
  『옛?』
 
  『아니, 대장 보고 한 말은 아니오. 내가 혼자 생각을 하다가 무심코 뱉았소이다』
 
  『혹시 조선 사람들을 생각하신 것입니까?』
 
  이토는 하세가와가 오랜만에 자신의 생각을 짚어 내자 기분이 좋아졌다.
 
  『대장도 조선을 생각하오?』
 
  『물론입니다. 저의 생각은 언제나 조선에 가 있습니다. 조선은 단순히 대륙으로 가는 중간 교량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제국의 값진 영토입니다』
 
  이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힘을 얻은 하세가와가 말을 이었다.
 
  『이런 비평을 읽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일본의 조선 경영은 실패할 것이다. 만주 공략도 실패할 것이라는 얘기인데, 그 이유인즉 이렇습니다』
 
  하세가와는 이토가 무관심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이쪽으로 귀를 열어 놓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일본은 조선을 사실상 합병과 마찬가지로 점령하고 있으나 그 점령이라는 것이 선과 점으로 이어지는 것일 뿐 화학적인 해체에 이르지 못했다. 만주는 더하다. 만철을 통해 남만주의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으나 선과 점으로 그어 놓은 경영이지 광활한 만주 벌판은 여전히 청국의 문화와 지배권 아래 놓여 있다. 그러므로 일본은 결국 만주와 조선을 토해 놓고 섬나라로 물러날 것이다. 그때는 참으로 비참한 모습일 것이다, 하는 어리석은 예상을 해놓은 책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나도 읽었소. 무정부주의자인가 허무당인가 하는 것에 오염된 책상물림의 글이었지, 아마. 점과 선의 경영이라는 근본 파악에서부터 그자는 틀렸소. 우리는 점과 선으로 조선과 만주를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물로 감싸 놓고 그 안에 있는 고기를 요리하는 전략이오. 책상물림들의 작은 대가리에 그런 차원 높은 전략이 보일 리가 없지』
 
  『그물에 갇힌 물고기는 어떤 상태입니까?』
 
  『조선은 거의 숨통이 끊어진 시체와 같지. 다만 죽은 물고기의 온몸에 가시가 돋아 있어 한 입에 삼킬 수 없다는 것뿐이오』
 
  『그 죽은 물고기가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킬 가능성은 없습니까?』
 
  『그건 대장이 나보다 더 잘 알 것 아니오. 어떻게 보시오?』
 
  『직정적인 사람들입니다, 조선 사람들은. 무지하지만 잘못된 충성심이 때로는 엄청난 짓을 벌이게 합니다. 그걸 경계해야 그 죽은 물고기를 안심하고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을 것입니다』
 
  『잘 보셨소. 조선 합병과 그 후의 통치가 우격다짐만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군인들은 성급해서 말이야』
 
  그날 저녁 대련으로 돌아간 이토는 청나라와 러시아, 그리고 북경과 만주에 나와 있는 유럽 각국 외교관들이 공동으로 마련한 환영회에 나가 연설을 했다.
 
  『나는 예전부터 만주를 한번 방문하고 싶었는데 아시는 바와 같이 분주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이번에야 겨우 시간이 나서 천황폐하의 허락을 얻어 꿈에 그리던 방문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어제 막 도착했기 때문에 아직은 별로 할 얘기가 없으니 오히려 여러분의 좋은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만, 짧게나마 평소 품어 왔던 생각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극동의 평화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평화의 유지를 위해 우리 일본의 책임이 막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만주에 재류하는 일본 정부의 관계자는 언제나 문호의 개방과 기회균등의 정신을 가지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관민일체가 되어 성의를 다하고 노력한다면 이후에도 청나라와 러시아 사람들과 지금보다 훨씬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토의 연설은 평범한 인사치레였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일본의 정책 방향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주시하고 있는 청나라와 러시아, 그리고 유럽 각 나라들을 안심시키려는 교묘한 사탕발림이 녹아들어 있었다. 연설을 하면서 이토는 먼 발치에 서서 팔짱을 끼고 히죽 웃음을 띠고 있는 키 큰 서양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 그 사내는 찡긋 눈웃음을 쳤다. 급히 외면하면서 이토는 생각했다. 저자가 누구였지? 미국에서 온 철도왕인가 뭔가 하는 놈이었지, 아마. 영국과 프랑스, 독일과 미국이 공동으로 차관을 마련하여 만주 철도의 운영권을 양도받고 일정 기간 운영한 후에 본래 주인인 청나라에 넘겨 주자고 주장하는 미국 상인이었다. 말이 공동 경영이지 만주 철도를 미국이 먹겠다는 해적 같은 발상이었다.
 
  불쾌하고 또 불안했다. 이토는 생각했다. 「우리가 청나라, 러시아와 싸워 얻은 전리품을 손도 안 대고 먹어 버리겠다는 야욕을 지닌 미국을 경계해야 한다. 러시아도 적이지만 진짜 적은 미국이다」 하고.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서 이토는 급히 연회장을 떠나 숙소로 돌아와 버렸다. 환영 연회는 썰렁하게 끝나 버렸다.
 
 
  7. 아, 하얼빈
 
  기차가 소리령에 도착하자 중근과 우덕순은 2등칸으로 옮겼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함께 온 모녀는 3등칸에 남겨 두었다. 모녀 중 엄마가 열이 심하고 헛구역질을 해대는 품이 심상치 않았으나 다행히 어린 계집아이는 눈망울이 말똥말똥했다. 헤어지기 전에 우덕순은 자신이 안고 있던 여인의 옷보따리 속에서 권총 두 자루를 꺼내어 품에 지녔다. 2등칸으로 가면 검문이 거의 없거나 있어도 형식적이기 때문에 권총을 품에 지녀도 괜찮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2등칸은 등받이가 높아 앞뒤의 손님들과 격리되어 있었고, 의자가 푹신했다. 소리령을 떠날 때 짧은 북국의 해가 떨어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더니 곧 깜깜한 밤이 되었다. 우덕순이 품에서 중근의 권총을 꺼내어 건네 주자 중근이 그것을 받아 자신의 가슴 안쪽에 넣고 나서 덕순에게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우형의 그것을 내게 줘보시오』
 
  덕순이 자신의 권총을 내놓자 중근은 주변을 살피고 나서 덕순의 권총 탄창에서 탄환 여섯 발을 모두 꺼냈다. 그런 다음 자신의 주머니 속에서 새 탄환 여섯 발을 꺼내어 덕순의 탄창에 장전했다.
 
  『탄환 머리에 십자로 줄을 그어 놨어요. 이게 몸에 박히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거든요』
 
   중근의 권총은 브라우닝 8연발이었는데 우덕순의 권총도 모양이 비슷하고 口徑(구경)도 같았으므로 같은 탄환을 사용할 수 있었다. 적을 만나면 절대로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비장한 결심으로 가능한 모든 준비를 했다.
 
  기차는 오후 9시25분에 수분하역에 도착했다. 여기서 석탄과 물을 보급받기 위하여 한 시간 정도 머물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들어서 알고 있었으나 중근이 플랫폼에 내려 차장에게 다시 확인한 후 모녀와 함께 역을 빠져나갔다. 예상했던 대로 역에는 러시아 병정들이 굳은 얼굴로 지키고 있었고, 세관은 세관대로 검사가 철저했다. 여인의 남루한 옷 보따리를 모두 풀어 헤쳐 볼 정도였다. 그러나 2등칸에서 내려 별도의 개찰구로 나간 중근과 덕순은 아무런 검사도 받지 않고 개찰구를 통과했다.
 
  밝은 역사 안에서 갑자기 어둠 속으로 나오니 길을 찾기 어려웠다. 유경집이 수분하 역전에서 한의원을 하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했던 중근은 우덕순과 모녀를 잠시 역 광장 한쪽 옆에 세워 놓고 혼자서 거리로 나섰다. 추위 때문인지 거리에는 지나다니는 행인라고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함께 기차에서 내린 손님도 어둠 속으로 흡입되어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중근의 계획으로는 병들고 지친 모녀를 일단 수분하의 유경집에게 맡겨 놓고 자신과 우덕순은 타고 왔던 기차를 다시 타고 하얼빈으로 갈 작정이었다. 하얼빈에서 길 안내를 해 줄 러시아 말을 할 줄 아는 사람도 한 사람 부탁할 작정이었는데 이 밤중 짧은 시간에 가능할지 그게 걱정이었다. 중근이 속으로 꼽고 있는 유경집의 아들 유동하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지, 살고 있어도 동행해 줄지 여부는 역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역전에서 길은 세 갈래로 갈라졌다. 중근은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가운데 길로 접어들었다. 크지 않은 마을이니 조금 가다가 아니다 싶으면 되돌아올 작정이었다.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으로 20m쯤 가다가 옆을 보니 한글로 고려한의원이라는 작은 간판이 붙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 한글 간판은 무슨 마력을 지닌 것처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붉은 벽돌의 2층집이었는데 간판은 아래층의 길가에 붙어 있었다. 중근은 길가로 난 문을 밀어 보았다. 잠겨 있었다. 몇 번 주먹으로 두드리자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누구요?』
 
  한국말이었다.
 
  문이 열리자 중근은 말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약방으로 쓰고 있는 대청에서 희미한 등불이 대문간까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온 사람은 유경집이었다. 마흔줄에서 쉰줄로 넘어가고 있는 유경집은 중근이 두만강을 넘나들며 왜놈들과 싸우다가 부상을 당했을 때 제 가족 이상으로 헌신적인 치료를 하여 완치시켜 주었고, 군자금도 몇 번 대 준 일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연추에서 수분하로 떠나면서 한 말이 있었다.
 
  『안중장, 왜놈과의 전투는 머지않아 만주땅과 중국 천지에서 벌어질 것이오. 그때는 수분하에 내가 있다는 것이 힘이 되어 줄 것이오』
 
  정말이지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안중장 아니오?』
 
  중근은 유경집의 입에 손을 갖다 댔다. 두 사람은 말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경집의 아들 유동하가 방에 있다가 아버지와 낯선 손님이 들어오자 가만히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어인 일이오?』
 
  『하얼빈으로 가는 길에 선생님이 궁금해서 잠시 들렀습니다. 기차가 마침 한 시간 정도 머문다기에』
 
  『자알 오셨소. 근데 하얼빈에는 무슨 일로?』
 
  『이토 히로부미라는 늙은이가 요동반도에 내려 장춘을 거쳐 하얼빈으로 오고 있는 중입니다. 내 그자를 마중하려고 갑니다』
 
  중근은 품에서 권총을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역시 안중장이오. 큰일을 하게 될 줄 알고 있었소. 한데 내가 무엇을 도우면 좋겠소?』
 
  『두 가지 청이 있습니다. 이곳으로 오다 보니까 러시아 병정들이 경계를 서기 시작했더이다. 러시아말을 모르고 헤매다가는 자칫 할 일을 못 하고 엉뚱하게 봉변이나 당하게 될 것 같더이다. 하얼빈까지 가는 길에, 그리고 하얼빈에서 정보를 얻고 정확하게 움직이기 위하여 러시아말을 하는 동포가 한 사람 있어야겠습니다. 그럴 만한 사람이 있으면 유선생님께서 한 사람 천거해 주십사 하는 부탁입니다』
 
  『마침 잘 됐소』
 
  유경집이 말했다.
 
  『방금 앉아 있다가 자리를 뜬 내 아들 동하가 러시아말을 할 줄 압니다. 게다가 녀석을 내일쯤 하얼빈으로 보낼까 하던 중입니다』
 
  『아드님을 무슨 일로?』
 
  『하얼빈에 가서 약재를 구해 오는 심부름을 자주 했거든요. 이번에도 약재를 사러 가야 합니다. 그리고…』
 
  유경집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하얼빈에 가면 한국민회 회장 노릇을 하고 있는 김성백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안중장의 하고자 하는 일을 음으로 양으로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 사람의 동생과 동하의 여동생이 약혼해 놓은 사이라 사돈간인 셈이지요. 동하와 함께 가시면 숙식은 말할 것도 없고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중근은 앞길에 놓여 있던 장벽이 무너지고 갑자기 길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유경집이 말했다.
 
  『동하에게는 안중장의 계획을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 아이는 아직 그런 일에 참여시킬 정도는 못 됩니다. 길 안내에만 쓰시고 돌려보내 주시면 합니다만』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저 아이에게 안중장이 무엇 때문에 하얼빈으로 가는 중이고 길 안내가 필요한지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제 아내와 아들이 만주로 오고 있습니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 하얼빈으로 가는 중이고 거기서 길이 어긋나면 장춘까지 가야 하는데 차표 사는 일조차 마음대로 안 되니 답답해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겠습니다』
 
  『좋습니다. 훌륭한 핑계군요. 한데 정말 가족이 오고 있습니까?』
 
  『평양까지 가는 정대호라는 사람에게 가족을 부탁해 놓았습니다. 제 식솔은 진남포에 살고 있는데 이 사람을 따라 만주로 오라고 편지를 보내 놓았습니다만, 정말 올지 안 올지는 모릅니다』
 
  『반가운 손님들이 많군요. 부디 행운이 함께하기를 빌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부탁은?』
 
  『오는 길에 기차 안에서 조선인 모녀와 동행했습니다. 다섯 살짜리 계집아이 손을 잡고 철도 공사장 인부로 하얼빈에서 살고 있는 남편을 찾아 나선 젊은 여인인데, 얼른 보아도 몸이 성치 못한 것 같아 유선생님에게 잠시 맡겨 진맥도 받아 보고 약도 먹여 사람을 살려 놓아야겠다 하는 마음에 수분하에서 내리게 했습니다』
 
  『그 여인이 어디 있습니까?』
 
  『역 마당에 세워 놓았습니다』
 
  『이런』
 
  유경집은 아들 동하를 불러 중근과 함께 가서 모녀를 데리고 오도록 일렀다. 중근이 유동하를 데리고 역전 마당으로 오니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세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여인은 동하가 부축하고 계집아이는 중근이 업었다. 한의사 유경집은 여인의 낯색을 힐끗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진맥을 해보더니 중근과 우덕순에게 말했다.
 
  『숨이 붙어 있으니 사람이라 해야겠으나 시체나 다름이 없습니다. 맥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허약한데다 간이 손에 잡힐 정도로 크게 부었어요. 폐도 약하여 움직임이 거의 잡히지 않을 정도이고, 살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우덕순이 간청했다. 오는 도중에 정이 들었는지 덕순과 여인은 가족 같은 끈끈한 마음으로 이어져 있었다.
 
  『나라가 백성을 안아 주지 못하니 지어미와 철없는 여식이 지아비를 잃고 저리 고생하며 죽어 가고 있습니다. 이 춥고 낯선 땅에서 저 사람들의 뼈를 묻어서는 안 되지요. 내 나라 땅에 돌아가기까지는 절대로』
 
  우덕순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묻어 있었다.
 
  『여자와 아이는 저에게 맡겨 주시고 안중장께서는 어서 하얼빈으로 가서 기다리던 가족을 상봉토록 하시오』
 
  유경집은 아들 동하에게 『이 사람들과 함께 지금 당장 하얼빈으로 가되 먼저 이분들의 길 안내를 해드리고, 그 다음에 약재를 구하여 곧 돌아오도록 하라』고 일렀다. 『하얼빈에 가면 먼저 사돈인 김성백의 집으로 이분들을 안내하고 숙식을 해결하도록 주선하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동하가 행장을 꾸리는 것을 기다렸다가 세 사람이 수분하역으로 나오니 마침 하얼빈행 열차는 물과 석탄을 재공급받고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급히 3등칸 차표 석 장을 사서 어두운 플랫폼으로 뛰어나가니 이때는 역 개찰구와 플랫폼에 경계하는 러시아 병정이 한 명도 없었다.
 
  3등칸 안은 을씨년스러운 한기가 돌고 있었다. 멀찍이 떨어진 좌석에 따로 자리잡은 동하는 졸고 있었으나 중근과 덕순은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기차는 어느새 새벽의 미명을 달리고 있었다. 날이 새자 북만주의 끝없는 벌판이 눈앞에 전개됐다. 이미 추수가 끝난 곳이 대부분이었으나 일부 논에서는 아직 추수의 끝마무리를 하는 듯 아침부터 움직이는 농부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것뿐이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산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광막한 들판이었다. 이 비옥한 땅에 부지런한 한국인들이 살았더라면, 하늘이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이런 땅을 내려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으로 밖을 내다보는 중근에게 덕순이 말했다.
 
  『옛 고구려 땅이 맞지요?』
 
  『아마, 그럴 거요』
 
  자신이 없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고구려라는 이름이 두 사람의 상상력을 아득한 세월 건너편으로 싣고 갔다. 말을 달리며 웅혼한 기상으로 대륙을 휘젓던 고구려 사람들을 생각하니 이 낯선 북만주의 늦가을이 갑자기 정겨워지는 것이었다.
 
  기차는 끝없는 들판을 가로지르면서 허기진 굉음을 내며 종일 달렸다. 다시 해가 지고 땅거미가 내린 저녁 9시22분에야 겨우 하얼빈역에 닿았다. 1909년 10월22일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지 만 하루 반이 지나서야 운명처럼 가슴에 맴돌던 하얼빈에 도착한 것이었다.
 
  하얼빈역에도 러시아 병정들이 승객 한 사람 한 사람을 유심히 살피면서 경계를 서고 있었으나 러시아와 청나라 국경의 수분하처럼 세관의 검사는 없었으므로 세 사람은 조선인 노동자의 차림으로 별 다른 주목을 받지 않고 개찰구를 나왔다.
 
  역 광장으로 나오니 갑자기 별세계가 펼쳐 있었다. 휘황한 가스등의 불빛이 잠들지 못하는 도시 전체에 흐르고 있었고, 광장 건너 길거리에는 대낮처럼 사람들이 몰려가고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도시와도 다른 모습이었다. 사진이나 이야기 속에서 보았던 유럽의 대도시 그대로였다. 그 불빛이, 그 사람의 물결이 삶의 활기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근은 이를 악물었다.
 
  『하얼빈이여, 내가 왔다. 진정한 활기가 무엇인지 너희도 알게 될 것이다』●
 
  그림 : 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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