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훈
1941년 대구 출생. 서울大 美大 졸업. 美 UCLA大·同 대학원 졸업. 1996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대표. 다수의 개인전과 해외전 개최.
1941년 대구 출생. 서울大 美大 졸업. 美 UCLA大·同 대학원 졸업. 1996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대표. 다수의 개인전과 해외전 개최.
郭熏 화백의 예술세계는 세계가 먼저 인정하고 난 다음에 고국에 알려졌다. 한국 미술계에서 인정을 받고 난 다음 세계 미술계의 문을 두드리는 것과는 다른 수순이었다.
<한국의 많은 작가들이 고국에서 교수 생활에 안이하게 매달려 있을 때, 郭熏은 수많은 난관과 경쟁의 파도를 헤치고 해외에서 성공한 드문 화가이다> (미술평론가 임주빈)
郭熏 화백을 만나기 위해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예화랑」을 찾았다. 그의 작품들은 추운 겨울바람에 아랑곳하지 않고 생명을 띄우기 위해 화려한 날갯짓을 하며 훨훨 날고 있었다. 전시회의 주제는 「씨앗」이었다.
『저는 꽃의 아름다움보다 그 아름다움을 탄생시킨 뿌리를 찾아갔습니다. 말하자면 생명의 원천을 표현한 것입니다. 꽃을 피우기 전 그 과정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매료된 것이죠』
![]() |
| CEI, Mixed Media on Laminated Rice Paper, 55×30〃, 1983 Collection of Santen Seyak Co., Tokyo. |
『모노톤의 단색조로 생명의 근원을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원색으로 강렬하면서 난폭하게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동물이나 식물이 생명을 가지는 순간은 강렬합니다. 생명은 조용하게 저절로 움트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 |
| CHI/SEED, Acrylic on Canvas, 5×4´ 2003 Artist’s Collection. |
![]() |
| CHI, Acrylic on Canvas, 5½×4½´ (Diptych), 2005. |
「씨앗」에 관심
―언제부터 씨앗에 관심을 가졌나요.
『1997년 外換(외환)위기 이후부터입니다. 그때 저는 현대미술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일류 畵廊(화랑)들의 시즌 오픈展(전)을 위한 대규모 설치작업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0월에 한국에서 IMF 외환위기로 나라가 부도위기에 처했습니다. 갑자기 제 앞의 세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구입하기로 했던 작품들이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IMF가 뭔지 몰랐습니다.
다른 나라의 화가들이 「IMF가 한 나라에 긴급 구제금융을 지원하면 외국에 나가 있는 그 나라의 예술가들이 破産(파산)한다. 후원 기업들이 후원금 지급을 중단하기 때문에 짐 싸들고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더군요. 한국에서 대규모 설치작업 후원을 약속했던 것이 다 취소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돈이 많이 들어가는 설치작업을 제가 부담할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한국으로 들어와 이천에 있는 작업실에서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던 중 어느 날 들녁에 날아다니는 흰색의 박주가리 씨앗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우주의 생명력을 보았습니다』
![]() |
| 뉴욕 「Contemplation」, 1992. |
『미국에서 無名(무명) 예술가로 설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버텼는데 그것을 접고 한국으로 들어오기에는 지난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動的(동적)인 것과 靜的(정적)인 것이 한 화면에 함께 나타나고 있습니다.
『動的인 것은 생명의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고, 靜的인 것은 생명 탄생의 순간입니다』
―이번 전시회에서 「씨앗」 하나만 주제로 삼았나요.
『참담한 좌절에서 나온 「씨앗」이 지금은 「우주의 생명」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씨앗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면 상당히 에로틱합니다. 동물의 교미와 꽃이 닮았습니다. 식물이나 동물의 사랑의 결실이 생명입니다. 그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郭熏 화백의 近作(근작)에 대해 미술평론가 임두빈씨는 이렇게 평한다.
<형상화할 수 없는 것을 형상화하는 것이 화가의 特權(특권)이다. 郭熏이 그린 古代 문명의 상징 같은 거대한 돌기둥은 폭발하고 있다. 영원회귀하며 生滅變天(생멸변천)하는 우주적 생명 현상의 장엄한 형상화다. 郭熏은 물감의 우연한 번짐 효과를, 아크릴과 먹의 상호 긴장관계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左翼 집안의 굴레
![]() |
| 안성 도자공방에서 대학동창인 조영남씨·김영동씨와 함께. |
서울大 美大(미대)에 진학했지만 4·19와 5·16으로 뒤숭숭하게 대학생활을 보냈다.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생활에 전념할 수 없었다.
『서울大 문리대 친구들과 고등학교 동창들이 4·19 주역들이었습니다. 민통련에 籍(적)을 둔 적이 있었지만 깊이 가담하지는 않았습니다.
숙부가 左翼(좌익)운동을 하다가 6·25 때 총살당하는 등 집안에 左翼이 많았습니다. 「학생운동에 깊숙이 관여하면 집안이 쑥대밭이 되겠구나」싶어 그만두었습니다』
![]() |
| 이천의 작업실에서. |
『당시 학교 분위기는 그림을 그릴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서울大 美大에서 그림을 제일 잘 그린 사람이 詩人 김지하씨였습니다.
저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했고, 國展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졸업 후에 이화女高 미술선생으로 일했습니다』
―당시 작가로 활동하지는 않았나요.
『國展에 출품하지 않은 작가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朝鮮日報 주최 「한국현대작가초대전」이었습니다. 거기서 최고상을 받고 작가로 데뷔했습니다』
―이화女高 미술 선생을 그만두고 美國유학을 떠나셨죠.
『당시 이화女高는 「예능 교육의 1번지」였습니다. 진학지도와 학생 레슨을 병행해야 했습니다. 레슨을 하면 그림 그릴 시간이 없습니다.
집안에 左翼 경력자들이 많은 탓에 「동정보고 대상자」로 분류돼 경찰의 감시를 받았습니다. 「미술선생은 위조지폐를 만들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감시가 더 심했습니다. 6개월마다 서대문 경찰서에서 교무실로 찾아왔습니다.
이를 안타까워하던 정희경 교장께서 하루는 저를 부르더니 「외국에 갈 수 있으면 빨리 가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1975년에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뉴욕의 광고회사에 취직
![]() |
| 이화女高 미술선생 시절. |
『아니오, 한국에서 화가는 실업자로 희망도 없고 대우도 받지 못하는 처지였습니다. 미국에서도 그런 줄 알고, 미국에 갈 때는 「화가 노릇은 그만두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제 화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건가요.
『뉴욕에서 처음 직장을 구한 것이 광고회사였습니다. 컨벤션센터 부스 디자인과 일러스트 작업을 했습니다. 말하자면 간판을 그리는 일이지요. 그때 具象(구상)을 다시 공부했습니다.
너무 고생스러워 「이렇게 할 바에야 미술대학에서 공부하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생각했습니다. 인생의 미래가 보이지 않아 암담했습니다. 「美大에 입학하면 작가가 되는 길이 보일 것」이라고 생각해 그동안 저축한 2만 달러를 들고 서부로 갔습니다』
―뉴욕에 살다가 왜 서부에 있는 대학을 선택했습니까.
『아이에게 뉴욕은 좋은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콘크리트 공간이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캘리포니아로 간 거죠』
UCLA 대학은 郭熏 화백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사했다. 그는 이 대학 재학 시절, 2년에 한 번씩 LA시립미술관에서 주최하는 新人(신인)데뷔 전시회에 입선했다. 동양인으로서는 두 번째였다.
LA타임스에 평이 실릴 정도로 평판이 높은 이 전시회는 美 서부에서 활동하는 신인화가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화랑들은 이 전시회를 보고 화가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 |
| THE BOWLS, Mixed on paper, 30×22〃, 1981 Kumho Museum of Art Collection. |
한국적 恨을 그리다
―데뷔 전시회 작품의 주제는 무엇이었나요.
『「呪文(주문)」입니다. 呪文은 한국적인 恨을 그린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6·25전쟁을 겪었는데, 사람이 죽으면 거적이나 가마니로 시신을 감싸서 장례 치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의 기억으로 작품을 그렸습니다』
― 한국의 정서를 작품 주제로 삼은 이유가 있습니까.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그려야 나를 잘 드러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한국에 살 때에는 저 자신을 「한국 현대사의 희생양」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숙부의 죽음으로 할머니가 가슴앓이하다 돌아가셨습니다. 얼마나 恨이 쌓였겠습니까? 그래서 한국인의 恨과 정서에 깔린 샤머니즘을 그렸습니다』
―샤머니즘은 한국적이어도 너무 한국적인 소재 아닌가요.
『한국적인 것이 아니고서는 국제화가 될 수 없습니다. 제가 미국에 산다고 완벽한 미국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저의 뿌리인 한국을 그려야만 했습니다.
샤머니즘만 그린 것은 아닙니다. 土器(토기)를 그렸습니다. 어린 시절, 전쟁 직후 학교 뒷산에서 땅을 파면 가야 토기가 나왔어요. 토기를 학교 미술 실기실에 가지고 와서 그림을 그리고 난 후 깼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행동이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도 토기의 귀중함을 알지 못했습니다. 1000년 전 토기가 나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닙니다. 미국 사람들은 상상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때의 기억으로 토기를 그렸더니 교수가 얼마냐고 묻더군요. 400달러라고 했더니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달에 100달러씩 4개월 동안 줄 테니 작품을 팔라」고 하더군요. 상상도 못 하던 일이었습니다.
대학원 학생들이 저에게 「프로작가가 되라」고 하더군요. 그 친구들이 저에게 「LA시립미술관에서 개최하는 데뷔 전시에 참석하라」고 권유했습니다. 슬라이드 심사와 인터뷰에 통과해 전시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茶碗 그림
![]() |
| 「예화랑」에서. |
<郭熏의 초기작 茶碗(다완)은 그의 역사와 현실의 경험에서 생성된 것이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옮겨 가 문화적인 충돌과 압력을 추상표현주의의 언어로 표현했지만, 그 언어들은 진정으로 그의 경험과 정신상태를 다 설명해 줄 수 없었다. 그에게 다완은 정신과 문화의 상징이다>
―초기 작품은 色이 단조롭습니다.
『물감 살 돈이 없어 단조로울 수밖에 없었어요(웃음). 미국에서 그림 그릴 때 캔버스를 사용했는데 작은 차로 이사 다니면서 보관하기 어려워서 많이 버렸습니다. 그래서 작은 차에 많은 그림을 싣기 위해 캔버스 천에 그림을 그린 후, 그것을 말아서 보관했습니다. 그러면 작은 차에 많은 그림을 실을 수 있어 좋습니다』
―色이 화려해진 것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인가요.
『그렇죠(웃음). 미국에서는 컬러가 들어가면 화가가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원 시절부터 아트페어를 통해 잘나가는 화가가 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습니다. 재료비 걱정을 하지 않게 된 거죠.
미국은 화랑에서 작가를 띄우면 「아트 컨설턴트」가 작품을 판매합니다. 한국과 시스템이 다릅니다. 저는 전속화랑이 있었기 때문에 아트 컨설턴트들이 작품을 많이 팔았습니다.
처음 아트페어에 참가할 때 한국 사람이 없었습니다. 구경하러 온 한국 사람을 보기 어려웠죠. 1980년대 중반부터 LA 아트페어에 한국의 화랑들이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제가 아트페어에 참여하는 10여 개 한국 화랑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미술평론가 임두빈은 郭熏 화백의 「氣」 작품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郭熏의 「氣」는 불가사의한 힘으로 가득 찬 우주의 신비를 그리고 있다. 그는 그 세계로 통하는 작은 暗號(암호)로서 그가 선택한 사물들을 응시하고, 해체하며, 再구성한다. 이를 통해 신비로운 생명의 힘이 약동하는 우주의 신비 속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郭熏의 시각에 의하면 사물들은 모두가 우주적 생명의 신비를 간직한 빛나는 존재들이다>
―「氣」 시리즈는 언제부터 하셨나요.
『1989년부터 「氣」 시리즈를 본격적으로 했지만 「呪文」과 「도자기」 시리즈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입니다. 큐빅 속의 氣가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남성의 氣가 밖으로 튀어나오는 형태입니다』
![]() |
| 199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한「겁/소리」. 설치작품과 스님들이 어울린 이 작품에 대해 큰 반향이 일었다고 한다. |
『크리스티 경매에서 나는 한국화가』
![]() |
| 뉴욕의 작업실에서 아내와 함께. |
『잘나가는 작가라고는 해도 저는 마이너리티에 속해 있는 사람입니다. 한국에서나 미국에서 主流(주류)사회에 속하는 사람은 아니지요. 인생에서 좌절과 굴절이 많았습니다.
미국에서 저처럼 빠르게 주목받은 화가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 인생에서 지금까지 제대로 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들은 제가 성공했다고 하지만 저는 아직 음지의 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폐증적인 심리가 표출돼 나온 것이 큐빅인 것 같습니다』
―미국 사회에서 少數(소수)민족에 속하기 때문에 오히려 기회가 빨리 온 것은 아닌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소수민족 출신이라서 빠르게 주목받을 수는 있지만, 그 이후가 더 중요합니다. 실력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바로 내려앉는 것이 미국의 미술계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작가로 데뷔하고 주목받았지만 크리스티 경매에서 저는 미국 화가로 분류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외국 화가들의 현실입니다. 미국이 개방적인 것 같지만 위로 가면 갈수록 더 폐쇄적입니다』
도자기와 스님들이 어우러진 「劫/소리」
郭熏 화백은 1996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대표로 작품을 출품했고, 세계 미술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가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한 작품은 「劫(겁)/소리(聲):마르코 폴로가 남겨 놓은 것은 무엇인가?」이다.
郭熏 화백의 설치작품 「劫/소리」는 작품의 전체 길이가 50m로 소나무로 대를 만들고 북 모양의 긴 도자기를 걸어 놓았다. 郭熏 화백은 스님들을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장에 초청함으로써 작품과 스님이 하나의 작품을 이루게 했다.
그의 작품은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해외 언론은 그에게 극찬을 보냈고, 이탈리아 대통령이 작품에 관심을 표했다.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오픈닝 행사는 畵廊主(화랑주)와 미술계 인사를 포함, 한국인만 2000여 명이 참석했을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郭熏 화백의 설치작품 「劫/소리」는 1996년 베니스 비엔날레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를 받았다. 그의 「劫/소리」 설치 작품은 한국에서 15회, 해외에서 30회 전시를 가졌다.
도자기의 미학을 탐구
―설치작업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뭔가요.『도자기 시리즈를 하면서 五行(오행)을 생각했습니다. 五行이 다 들어가 있는 것은 도자기밖에 없습니다. 火水木金土 흙, 물, 유약, 불, 금 미학적으로 도자기가 가장 완벽합니다. 도자기는 茶道(다도)와 결합합니다.
가야의 토기를 그리다가 가마 속의 도자기 제작과정에 관심을 가져 그것을 그렸습니다. 물감과 연필로만 가마 속의 도자기를 표현한 것이지요. 가마 속의 도자기를 그리다가 茶道로 넘어갔습니다.
茶道는 仙으로 가고, 仙은 氣로 갑니다. 작품이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이어져 가면서 도자기에 심취했습니다. 언젠가는 가마를 짓고 본격적으로 도자기 작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1988년 이천에 작업실 터를 마련했지만 근 5년 동안 한국에 오지 못했습니다』
― 작업실을 이천에 마련한 건 도자기의 美學을 탐구하기 위해서군요.
『네, 이천이 한국 도자기의 근원지이기 때문입니다. 베니스 비엔날레 작품은 안성의 도자기 공방에서 제작했습니다』
―옹기로 제작한 이유는 무엇인지요.
『매끈한 도자기보다 옹기가 현대성이 더 있습니다. 작품의 재료는 새끼줄, 소나무, 똥장군입니다. 한국에서 가장 흔한 소재를 가지고 가장 현대적 작품으로 만들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똥장군이 길게 늘어져 있는 모습은 피리를 연상시킵니다. 똥장군은 땅의 울림을 받아서 저절로 우는 피리입니다. 지천으로 흔한 것에 예술성을 부여하고 싶었습니다』
―스님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외국 사람들은 한국에 와서 길에서 비구니를 보면 눈을 떼지 못합니다. 비구니는 한국 佛敎(불교)를 상징합니다. 베니스에서 그것을 세계인에게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그때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큐레이터의 역할이 무엇인지, 화랑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몰랐을 때였습니다. 작품을 설치하기 위해서 큐레이터가 먼저 와야 했는데 정작 큐레이터는 개막 전날에 왔습니다. 스님 25명을 데려갔는데 스님들이 개성이 강해 작품에 대한 이해보다는 자신의 입장만 내세워서 애를 태웠습니다. 무엇보다 조수 4명을 데리고 설치작업을 하기에 벅찼습니다』
―설치작품이 팔렸나요.
『팔리지 않았습니다. 작업을 위해 가마까지 설치했지만 대형 설치작품을 항시 전시할 공간이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설치작업이 퇴조를 보이는 이유입니다. 설치작품을 전시하면 다른 수백 점의 평면작품을 걸 공간이 사라지고 작품 보관이 용이하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미술관에 설치작품 몇 개 있으면 미술관이 망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입니다. 이제 이 작품은 더 이상 국내에서 전시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경제적 이유 때문인가요.
『그것도 그렇지만 사람들이 「郭熏은 옹기 작품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10년 전 작품을 가지고 지금까지 이야기하는 것이 싫습니다. 결혼한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 결혼사진을 놓고 이야기하면 얼마나 맥 빠지는 일입니까.
한국에서는 익숙한 작품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새로운 작업을 하면 한국에서의 반응은 5년 후쯤 볼 수 있습니다. 외국에서 인정받았다고 하면 갑자기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죠』
―2006년 미국의 메이저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여러 차례 하셨더군요.
『한국의 위상이 높아져서 가능해진 일이죠. 미국에서 한국을 전반적으로 再평가하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보스턴·시카고 미술관에서 한국의 젊은 큐레이터들을 두고 있습니다』
―미국의 화랑과 큐레이터들은 주로 郭선생의 「샤머니즘」 그림을 원한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반대로 비구상 쪽으로 돌아섰지 않습니까.
『서양에서는 아직 한국의 추상미술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저의 최신작에는 아직 관심을 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작품을 계속 그리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그것을 패턴이라고 합니다. 「패턴 작가」로 불리는 순간 작가의 생명은 끝납니다』
『화가는 빵을 굽는 사람』
―앞으로의 계획은.
『새로운 방식의 작품을 하기 위해 페루에 있는 잉카 유적지인 마추피추에 갈 예정입니다. 그 다음은 알래스카를 둘러보려고 합니다.
화가는 빵을 굽는 사람입니다. 빵은 신선해야 맛있습니다. 빵 굽는 사람처럼 화가는 항상 신선한 작품을 생산해야만 합니다. 정글 속의 문명과 알래스카 차가운 공기 속 빛의 움직임을 보고 싶고, 그것을 다음 작품과 연결할 생각입니다』
郭熏 화백은 姜仁子(강인자)씨와 사이에 아들 (얼)씨를 두었다.●
사진 : 조준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