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米壽에 역사소설 펴낸 소설가 金聲翰

내 소설의 테마는 無常…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 : 김성동  ksdhan@chosun.com
글자 크기 조정
  • 스크랩
  • 본문 음성 듣기
  • 글자 크기 조정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역사소설은 역사에 생명을 불어넣는 바람… 과거와 현재를 함께 볼 수 있게 한다』

김성한
1919년 함남 풍산 출생. 일본 도쿄大 법학부 중퇴. 영국 맨체스터大 사학과 졸업. 월간 「사상계」 주간. 동아일보 논설위원·출판국장·편집국장 역임. 예술원 회원. 195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無名路(무명로)」로 등단. 「이성계」, 「요하」, 「임진왜란」, 「왕건」, 「진시황제」 등 역사소설 펴냄. 단편 「바비도」로 제1회 동인문학상 수상(1955).
「국가는 한 사람으로 인해서 흥할 수도 있고 한 사람으로 인해서 망할 수도 있다」
 
  원로 역사소설가 金聲翰(김성한·88)옹이 쓴 역사소설 책 표지 왼쪽 상단부에 적힌 글귀다. 중국 北宋(북송) 시대의 학자로 唐宋八大家(당송팔대가) 중 한 명인 蘇洵(소순)의 글이다.
 
  米壽(미수)를 갓 넘긴 이 원로작가는 「이성계」(1966), 「왕건」(1981), 「진시황제」(1998) 등 王朝(왕조)의 창업과 관련된 역사소설을 써왔다. 최근에 낸 「조선 태조 이성계의 大業」(全3권, 이하 「大業」)은 1966년에 펴낸 「이성계」를 개작해 펴낸 것이다.
 
  「大業」을 발간한 출판사 「해와 비」 관계자에 따르면, 원작과 비교해 40% 이상의 분량이 새롭게 써지거나 해석돼 재구성됐다고 한다. 이 책이 全3권으로 구성된 점을 감안하면 金옹은 최소 새로운 장편 소설 한 권을 써낸 셈이다.
 
  지난 10월1일 오후 그를 만났다. 1년 반 전 건강상의 이유로 서울 신대방동을 떠나 일산에 정착한 金옹의 아파트에서는 멀리 호수공원이 보였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와 같은 라인의 다른 층 한 채를 서재 겸 손님을 만나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大業」을 보완하고 수정하는 작업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주인보다 손님이 먼저 도착해 있는 서재에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주인이 나타났다. 곱게 늙어 가는 얼굴이었지만 몸은 많이 불편해 보였다. 심장과 관절이 안 좋다고 했다. 하루 두어 번 지팡이에 의존해 일산 호수공원을 산책하는 일이 그에게는 즐거우면서도 소중한 일과로 보였다.
 
  목소리가 낮고 작아 알아듣는 데 애를 먹었지만 인터뷰가 진행되던 2시간 내내 그의 자세와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어차피 말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책 표지에 적힌 소순의 글귀를 화제로 삼아 2007 大選(대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물었지만 대답은 싱거웠다.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외면하는 척하면서 산다』는 말로 직답을 피했다. 그는 지금도 漢文(한문)과 관련된 잡지에 고정적으로 글을 쓰고 있다.
 

 
  육필로 원고 집필
 
  ―글쓰기는 컴퓨터로 하십니까.
 
  『예나 지금이나 원고는 육필로 써요. 그런데 제가 쓴 육필 원고를 하나도 보관하지 못하고 있어요』
 
  ―40여 년 만에 다시 작품을 고쳐서 냈는데 역사적 사실이 변하기도 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관점이 변했다고 해야 할까요. 40년 동안 저 자신이 인간으로서 달라진 면이 있다고 봐요. 당시 고증을 하면서 소설을 썼지만 지금보다는 사료가 많이 부족해서 상세한 부분은 상상력에 의존한 부분이 컸죠. 그런 부분들을 사실에 기초해 다시 썼죠』
 
  ―1966년에 낸 「이성계」와 이번에 낸 「大業」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부분은 어떤 겁니까.
 
  『40년 전에는 「이성계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많았는데, 지금은 「이성계가 위화도 回軍(회군)을 선택한 데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게 다르죠. 저는 기본적으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대륙을 향한 우리 민족의 비전을 좌절시키는 행위였다고 봅니다. 그때 만약 고려軍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격했다면 요동은 회복할 수 있었다고 보는 거죠.
 
  건국 초기의 明(명)은 허약했고, 元(원)은 쇠약해지면서 北(북)으로 쫓겨 간 상태였습니다. 요동에는 주인이 없었던 거죠. 그런 큰 기조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明나라와 元나라의 힘의 균형을 고려해 달걀로 바위를 때리는 격이라고 생각한 이성계의 판단에 일리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1960년대보다 이성계에 대해서 훨씬 더 온정적이 되신 거네요.
 
  『온정적이라기보다 객관적으로 보게 된 거죠』
 
  「大業」의 주인공은 당연히 이성계다. 소설 초기에 등장하는 이성계는 백성들의 피폐한 삶을 보며 고뇌하는 武將(무장)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이 「고뇌하는 무장」에게 당시 수도 개경은 음모와 모략을 일삼는 정치인들이 머무는 곳일 뿐이었다. 정치를 혐오했지만 홍건족과 왜구 토벌, 시기하는 세력의 모략, 위화도 회군, 권력의 장악, 무참한 살육, 역성혁명의 완성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고뇌하는 무장」은 어느새 「정치인 이성계」로 변화한다.
 
 
  최영과 이성계에 대한 생각
 
  이성계와 대비되는 인물이 최영이다. 이성계가 개경 정치인들에게 모략·중상의 대상이 되었을 때 바람막이가 돼 그를 지켜 준 사람이 최영이다. 최영이 없었다면 이성계는 고려 사회에서 고위직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이성계가 그 고마움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위화도 회군 후 쿠데타로 최영을 사로잡는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성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자기는 인간으로서는 차마 못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최영, 생명의 은인이요 자기의 오늘을 있게 한 제2의 어버이 최영, 최영이 아니었던들 이미 한 줌 흙이 되어 땅속에 누워 있을 자기 이성계였다>
 
  ―선생님께서는 최영과 이성계 중 누구의 편도 안 들고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고 하셨지만, 제가 보기에는 최영의 편을 많이 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영에 대해서는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면서 충절과 기개를 높이 사고 있는 반면, 이성계에 대해서는 정몽주의 입을 빌려 간교하고 음흉하고 교활하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런 건 있죠. 원래 우리 민족의 무대는 만주까지 포함했습니다. 최영은 고구려가 지배했던 우리 민족의 무대를 회복하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어요. 고려 태조는 그 희망을 가지고 국호를 고려라고 했단 말예요. 그걸 추진한 게 최영이었죠.
 
  그런데 최영이 패함으로써 우리 민족에게는 그 희망이 끊어진 것이죠. 이성계는 대륙을 향해 가던 우리 민족의 길을 180도로 바꾸어 놓았고, 그 일이 지금 우리가 처한 운명의 시초가 됐을 겁니다. 물론 앞서 말했지만 이성계가 회군한 것이 일리는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가을에 지더라도 봄에는 피워야지요』
 
  ―이방원 일파가 정몽주를 죽인 후에 이성계가 화를 내니까 지화(이성계의 계비 강씨)가 이성계를 달래면서 『가을에 지더라도 봄에는 피워야지요』 했는데, 이 대목을 이 시대에 대입해 보면 요즘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들의 속성을 드러낸 것 같습니다.
 
  『인간 세상의 살아가는 이치를 말한 거죠. 가을에 지더라도 봄에 살아나는 게 자연의 이치거든요. 권력의 속성을 이야기한 측면이 있죠. 李承晩(이승만) 정권이 영원히 갈 것 같았지만 끝났고, 朴正熙(박정희) 정권이 지고, 金大中(김대중) 정권이 지고, 盧武鉉(노무현) 정권이 지나갈 것이고, 이 다음에 어느 정권이 올지 모르지만 피고 지고 하는 게 인간사 아니겠습니까』
 
  ―강화도에서 고려 왕씨들이 처형당할 때 오랜 수용생활로 옷차림이 비루하고 피골이 상접했다고 기록하셨더군요. 이 사람들이 바다로 떠밀려 죽어 가는 상황을 묘사한 대목 중에 「비명은 있었지만 애걸은 없었다」 는 구절이 있습니다. 왕씨들의 죽음 앞에서 의연한 모습을 묘사했는데, 소설 곳곳에서 묘사되고 있는 이성계의 모습과 대비가 됩니다. 고려조에 대한 애정이 더 깊은 것 같습니다.
 
  『심정적으로 그런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최영이 요동 정벌을 하려고 할 때 전투병 2만5000을 합쳐서 5만의 병력을 동원했다고 합니다. 그 정도 규모의 병력을 동원하는 것은 후세의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그 당시 고려 왕조가 그토록 부패했다면 가능한 일이 아닐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이성계가 고려 왕실을 왜 그렇게까지 죽였겠느냐를 생각해 봐야 해요』
 
  ―여진족 출신으로 이성계의 친구인 퉁두란이 조선 왕조를 창업하기 전 고민하고 있던 이성계에게 『옳은 길이 반드시 착한 길은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더군요. 1966년 이 소설이 처음 나왔을 때 朴正熙 대통령이 이 대목을 읽고 자신의 군사혁명을 정당화하기 좋은 이야기라고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떠오르던데요.
 
  『朴대통령이 그래서 좋아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런 걸 의식하고 쓰지 않았고요. 그때도 全3권으로 냈는데 한꺼번에 세 권을 다 낸 것이 아니라 순차적으로 나왔어요. 2권까지 나왔을 때 朴대통령이 기자들과 환담하는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했다고 하데요. 그런데 3권에서 이성계의 말로는 비참하잖아요. 아마 3권을 봤으면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성계는 여진족 출신?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說과 몽골족 출신이라는 說이 제기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런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보십니까.
 
  『이민족의 피가 섞였느냐, 아니냐는 사실 중요하지 않아요. 제왕은 같은 민족이어야 한다는 선입관도 시야를 넓혀 세계사 전체를 보면 일종의 신화에 지나지 않아요. 피차 어울리고 피를 섞어 가면서 발전해 온 것이 인간세상입니다.
 
  이성계는 함경도 영흥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장성한 사람입니다. 태어날 당시 영흥은 元나라의 통치하에 있었고, 이성계가 만 21세 때에야 고려의 영토로 돌아온 지역입니다. 이성계는 이 고장에서 대대로 千戶(천호)의 벼슬을 이어온 집안에서 태어났죠. 함경도 일대는 고려인과 오랑캐들이 뒤섞여 사는 고장이었고, 남녀 간에 혼인을 맺는 처지에 있었죠.
 
  이성계는 고조부터 5代를 그런 환경에서 살아왔으니까 이들 이민족과 인척 관계를 맺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이성계의 근친 중에는 「完者不花(완자불화)」니 「塔思不花(탑사불화)」 같은 이국적인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이성계가 이민족과 피가 섞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죠. 추측일 뿐이죠』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이성계는 당시 글로벌化한 지도자였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몽골어, 여진어 등 여러 나라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 시대는 몽골어가 세계어였죠. 몽골의 중급관료인 천호의 집안에서 태어나 장차 천호를 계승할 위치에 있었던 이성계가 몽골어에 능통했으리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적어도 이성계는 고려어·몽골어·여진어 3개 언어에 능통한 국제성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지금 기준으로 글로벌 시대의 지도자 자격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죠』
 
  ―이성계의 아들 가운데 이방원(태종)은 고려조에서 문과로 급제했더군요. 이방원은 조선 초기 정적 제거에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좀 욕심이 많았죠. 담백한 사람은 아니고 출세욕이 강한 사람이죠. 그 시대의 과거라는 것은 유일한 출세의 길이고 유일하게 잘사는 길이었죠』
 
 
  왕건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이성계가 순수한 武將의 길을 걷던 시절 당시의 서울인 개경을 「협잡과 이간질이 벌어지는 곳」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 서울에서 벌어지는 정치와 당시 개경에서 벌어지던 정치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시대가 다르고 여러 가지 상황이 달라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시대에는 최영이라는 뚜렷한 비전을 가진 사람이 있었죠. 옛 영토를 회복해서 고구려를 재건해야 한다는 비전을 가진 지도자가 있었죠.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잘 모르겠어요. 이미지는 비전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거죠』
 
  ―역사소설을 쓰면서 이성계 등 왕조를 창업한 분들의 이야기를 많이 쓰셨습니다. 선생님의 소설 속에 나타난 고려 태조 왕건의 리더십은 「포용」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것 같고, 이성계의 리더십은 「힘」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게 왕건의 리더십입니까, 이성계의 리더십입니까.
 
  『왕건의 리더십이죠』
 
  ―지금과 같은 위기상황에서 왕건의 리더십은 너무 유약하지 않습니까.
 
  『왕건이 유약하지만은 않아요. 부드러움으로 强을 누른 사람입니다』
 
  ―후삼국 시대의 지도자 가운데 왕건을 최고의 德將(덕장)으로 꼽으시는데, 이성계에게는 德이 부족했습니까.
 
  『왕건은 장사꾼 출신입니다. 그 사람은 전쟁은 잘 못 해요. 그 대신 사람을 끄는 재주가 있어요. 칼을 빼들고 전장에 나가 봐야 백전백패합니다. 이성계는 처음부터 무장의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두 사람은 성장배경이 전혀 다르죠. 왕건은 타고난 재주가 德이고, 이성계는 타고난 재주가 武였던 거죠』
 
  ―德으로 집권한 왕건의 말년은 쓸쓸하지 않았지만, 무력으로 집권한 이성계의 말년은 너무 쓸쓸했습니다. 인과응보였을까요.
 
  『인과응보라는 것도 있죠. 이성계는 사람을 많이 죽였잖아요』
 
  ―역사소설이라는 게 뭡니까.
 
  『역사가 나무와 줄기와 큰 가지라면, 역사소설은 잎사귀이자 생명을 불어넣는 바람입니다. 역사소설을 통해 과거의 시대와 현재의 시대를 함께 돌아볼 수 있는 거죠』
 
 
  『임기 끝낸 대통령은 조용히 있어야』
 
  ―1919년에 태어나셔서 일본 왕을 비롯해 정부 수립 후 역대 대통령 등 수많은 지도자들을 겪으셨습니다. 우리 민족을 위해서 바람직했던 지도자를 꼽는다면 어떤 분을 꼽을 수 있을까요.
 
  『지도자라는 게 장·단점이 있어요. 李承晩 대통령이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 양반은 너무 자신만만했어요. 구한말에 미국 유학을 하고 그랬으니까 당시로서는 그럴 수 있었을 거예요. 지도자는 떠날 때 잘 떠나야 되는 거예요. 朴正熙 대통령 역시 그렇고.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이광요) 수상은 朴대통령을 대단히 높게 평가합디다.
 
  단기간에 농업국가를 공업국가로 만든 것은 그분의 공로라고 말이죠. 그런데 이 양반도 떠나야 할 때 떠날 줄 몰랐단 말이에요. 역사는 조그만 데서 틀어지게 돼 있어요. 끝맺음을 잘 한 지도자는 아직 없죠』
 
  ―임기를 마친 대통령이 많이 나왔는데요.
 
  『임기가 끝나서 물러나면 조용히 있어야 돼요. 임기가 끝난 사람이 이 소리 저 소리 하고 참견하면 별로 보기가 좋지 않잖아요』
 
  ―전직 대통령의 경륜이나 경험이 국가를 위해서 필요할 때도 있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죠. 전직 대통령들 자신이 「내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죠. 그래도 다 단절을 해야죠. 역사는 그렇게 말할 겁니다』
 
  ―선생님 작품을 읽다 보면 선생님이 허무주의자는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던데요.
 
  『제가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제 소설의 테마가 「無常(무상)」입니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게 없어요』
 
  ―역사소설을 쓰는 이유가 인생의 무상함을 이야기하기 위한 겁니까.
 
  『그런 목적을 가졌던 것은 아니고, 역사에 흥미를 가지고 있으니까 쓰게 된 거죠』
 
  ―문학하는 사람들이나 입이 거친 비평가들 가운데는 「소설가가 어느 날 갑자기 역사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작가적 상상력이 고갈돼서 그런 것 아니냐」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혹시 상상력이 고갈돼서 역사소설로 방향을 전환하신 겁니까.
 
  『그랬을지 모르지(웃음)』
 
  195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無名路(무명로)」가 당선돼 등단한 金聲翰옹은 1955년 단편 「바비도」로 제1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1958년에는 「5분간」(발표는 1957년)으로 제 5회 자유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1966년 역사소설 「이성계」를 발표할 때까지 그는 더 이상의 창작소설을 발표하지 않았다.
 
 
  절대자의 존재는 믿지만…
 
  ―1957년 이후 10여 년 만에 소설을 다시 쓰신 게 역사소설이었는데, 무슨 계기가 있었습니까.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현대를 사는 우리가 올바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우리는 어떤 운명에 처해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쓰게 된 거죠. 「이성계」를 처음으로 쓰게 된 것은 직전의 왕조에서 우리 운명의 대부분이 결정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흥미를 가지게 된 거죠』
 
  ―소설을 안 쓰신 동안 유학을 다녀오기는 했지만, 10년이라는 공백이 너무 길어 보이는데요. 발표를 안 하신 겁니까. 아예 쓰지를 않으신 겁니까.
 
  『신문사(동아일보)에 있으니까 시간이 없었어요. 그 시대라는 게 어려운 시대라 매일매일 긴장하면서 일하다 보니까 글을 쓸 시간이 없었죠』
 
  ―선생님의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대부분은 현실과 불화하는 사람들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젊은 시절에 세상과 불화하면서 사셨습니까.
 
  『어느 시대나 그럴 겁니다. 그 시대에 만족하지는 못할 겁니다. 「이 시대가 태평성세다」 하는 시대는 많지 않았을 겁니다. 항상 비판적으로 살아온 것은 사실이죠. 그런데 인간세상이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나 자신만 그 시대에 그랬던 게 아니겠죠』
 
  ―선생님의 「암야행」 같은 단편소설들을 보면 종교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것으로 느껴지던데요. 종교는 갖고 계십니까.
 
  『그 시대에는 좀 그랬어요. 그런데 기독교든 불교든 간에 종교에 대해서 부정적이지는 않아요. 저는 절대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아요』
 
  ―사모님도 종교가 없습니까.
 
  『교회에 다녀요』
 
  ―영향을 받으시겠네요.
 
  『안 받아요(웃음). 절에도 안 다니고. 절대자에게 의존을 해야 되겠는데 말이죠. 그게 잘 안 됩디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는 많이 피곤해했다. 그럼에도 그는 1981년에 발표했던 역사소설 「왕건」을 다시 개작하고 싶다고 했다.●
  • 스크랩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