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인물 탐험] 金玉均 암살한 洪鍾宇

君權강화로 國體 확립, 세력균형 이용한 자주외교 꿈꿔

  • : 신동준  
글자 크기 조정
  • 스크랩
  • 본문 음성 듣기
  • 글자 크기 조정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정부 형태를 그대로 지켜 나가면서 유럽문명을 이용하고자 한다』

申東埈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高·서울大 정치학과 졸업. 정치학 박사(管仲 연구). 일본 東京大 객원연구원, 조선일보·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 역임. 現 고려大 강사. 저서 「관중과 제환공」, 「통치학원론」, 「삼국지통치학」, 「조조통치론」, 「논어론」, 「공자의 군자학」, 「실록 열국지」, 「순자론」 등 20여 권.
「어떤 정치적 자객」에 실린 洪鍾宇의 초상.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가 그렇듯이 사람에 대한 평가 역시 史料(사료)가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사료가 빈약할 경우 제대로 된 평가가 나오기 어렵다. 「3일천하」의 주인공 金玉均(김옥균)을 살해한 자객 洪鍾宇(홍종우)의 경우가 그렇다.
 
  그의 삶을 추적할 수 있는 사료는 극히 제한돼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金玉均 살해범」 정도로밖에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洪鍾宇는 조선국의 여권을 소지하고 최초로 프랑스에 유학한 卓異(탁이)한 인물이었다.
 
  洪鍾宇는 1890년 12월 프랑스에 도착해 2년 반 가량 파리에 체류했다. 기메 박물관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여행가들의 모임」 등에 참석, 조선의 실정과 역사·문화 등을 소개하는 민간외교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그는 소설가 로니의 도움을 얻어 「춘향전」을 佛語(불어)로 번역해 출간했다. 그는 조선의 고전소설 「枯木生花(고목생화)」 등을 프랑스語로 번역했다.
 
  「기메 박물관 연보」 26호에는 동양학자 앙리 슈발리에와 함께 한국인의 점성술을 다룬 「直星行年便覽(직성행년편람)」의 번역본이 실려 있다. 洪鍾宇와 교분이 있던 동양학자 펠릭스 레가메는, 洪鍾宇의 파리 생활을 소개한 「어떤 정치적 자객」이라는 글을 동양학 학술지 「통파오」(通報·통보)에 발표했다.
 
 
  하급문관 출신 殘班의 아들이었을 듯
 
F 레가메의「어떤 정치적 자객」이 실린「통파오」誌.
  이처럼 탁이한 인물이 어떤 이유로 金玉均을 살해하고, 皇國協會(황국협회)를 이끌면서 獨立協會(독립협회)를 견제하고, 마지막으로 濟州牧使(제주목사)를 지낸 후 행적이 묘연해졌는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조선이 합병되면서 日帝(일제)가 金玉均을 높이 기리자, 洪鍾宇가 스스로 자취를 감췄을 공산이 크다. 일본인 작가 아오야기 미도리(靑柳綠)는 洪鍾宇의 일생을 다룬 역사소설 「李王の刺客(이왕의 자객)」에서 洪鍾宇가 韓日합방 이후 제주목사 시절에 사귄 애첩과 함께 프랑스로 도주한 것으로 묘사해 놓았다.
 
  洪鍾宇의 삶을 추적할 수 있는 사료로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日帝 때 만들어진 「고종실록」과 국사편찬위원회가 2001년에 펴낸 「한불관계자료」, 아오야기 미도리의 역사소설 「李王の刺客」이다.
 
  「고종실록」에 실려 있는 洪鍾宇에 관한 기록은 모두 金玉均 저격 이후 과거에 급제해 중앙정계에서 활동하다가 제주목사로 내려가게 될 때까지의 官歷(관력)에 관한 것뿐이다. 洪鍾宇에 관한 기록은 모두 25건이다.
 
  아오야기의 「李王の刺客」은 어디까지 사실에 기초해 복원해 놓은 것인지 파악하기 쉽지 않다. 그가 일본 유수 일간지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의 오사카 本社에 입사한 후 오랫동안 기자생활을 한 경력에 비춰 나름대로 열심히 취재한 자료를 토대로 복원해 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洪鍾宇의 일본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일독할 필요가 있다.
 
  洪鍾宇의 파리 생활을 알기 위해서는 「한불관계자료」에 실려 있는 사료를 참조해야만 한다. 특히 레가메가 동양학 학술지 「통파오」에 게재한 「어떤 정치적 자객」 모음집은 洪鍾宇의 사상과 행보를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洪鍾宇가 어떤 가문 출신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이왕의 자객」에서는 洪鍾宇의 부친을 孝昌園(효창원) 능묘지기로 기술해 놓았으나 사실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이를 추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료는 레가메의 「어느 정치적 자객」에 나오는 다음 기록이다.
 
  <洪鍾宇, 철종 5년(1854) 서울에서 태어남. 기혼, 1녀를 둠. 文官(문관)의 獨子(독자)로 2년 동안 일본에 있었음>
 
  레가메의 기록에 비춰 그의 부친은 하급문관 출신의 殘班(잔반)이었을 공산이 크다. 아오야기는 洪鍾宇가 冠禮(관례)를 행하고 결혼한 지 2년이 지난 高宗 8년(1871)에 부친상을 당한 것으로 기술해 놓았다. 당시 洪鍾宇는 17세였다.
 

 
  日 정객 이타가키의 추천장 얻어 渡佛
 
  그는 언제 무슨 이유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일까? 당시 조선은 壬午軍亂(임오군란)과 甲申政變(갑신정변) 등으로 인해 커다란 혼란을 겪고 있었다. 아오야기는 洪鍾宇가 이런 사건을 지켜보면서 입신출세를 위해 34세 때인 高宗 25년(1888) 5월에 일본 화물선을 타고 渡日(도일)했다고 기술해 놓았다.
 
  당시 高宗이 해외사정을 듣고 싶어 한 나머지 일본이나 淸나라 사정 등에 밝은 자들에게 別入侍(별입시)의 명예직을 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기술은 洪鍾宇의 삶을 개관할 때 사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洪鍾宇도 사람인 만큼 입신양명의 뜻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의 渡日은 입신양명보다 개화를 통한 救國(구국)의 일념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레가메의 기록 등에 비춰볼 때 당시 洪鍾宇는 부인과 10여 세의 딸을 조선에 두고 渡日했다.
 
  아오야기는 洪鍾宇가 도쿄에서 「아사히신문」의 임시 植字工(식자공) 등을 하다가 「조선국 의정부 공조참의 洪鍾宇」라는 가짜명함을 만들어 生絲(생사) 무역을 하여 제법 돈을 번 것으로 묘사해 놓았다. 대략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洪鍾宇의 유럽여권에 나오는 다음과 같이 기술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 대프랑스국에서 법학을 공부할 洪鍾宇에게 한국 정부의 교섭통상사무아문 督判(독판)은 위 문서를 발급하며, 그가 어떠한 잘못도 저지르지 않고 학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그의 품행을 관찰하기 바란다>
 
  이는 洪鍾宇가 일본의 유력 인사를 통해 이런 여권을 만들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는 일본에 있을 때 일본의 명망가들과 교유했다. 레가메의 다음 기록이 그 증거이다.
 
  <그는 2년 동안 일본에 있을 때 정치인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들 중 한 명이 급진적 자유주의로 인해 권력에서 배제된 전직 장관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였다. 그가 洪鍾宇에게 프랑스 총리 클레망소에게 가는 추천서를 써 주었다>
 
 
  「아시아의 프랑스」 꿈꿔
 
洪鍾宇가 渡佛할 때 도움을 준 일본의 民權派 정치인 이타가키 다이스케.
  레가메의 기록에 따르면, 洪鍾宇가 유럽으로 간 것은 高宗 27년(1890) 12월이었다. 그렇다면 洪鍾宇는 왜 프랑스行을 선택한 것일까? 아오야기는 「이왕의 자객」에서 이같이 분석했다.
 
  <洪鍾宇는 일본의 개화된 모습을 볼 때마다 이 나라에 이토록 혜택을 입힌 유럽 본고장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別入侍가 되어도 일본에 관한 화제만으로는 이미 국왕이 진귀하게 여기지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레가메의 기록과 배치된다. 레가메는 이같이 기록해 놓았다.
 
  <洪鍾宇는 배움에 목말라했다. 매우 야심적인 그는 自國(자국)의 이익을 위해 유럽문명을 이해하기를 갈망했다. 무엇보다 프랑스의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현 일본 정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유사한 움직임을 이끌기 위해 몇 년 내에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원했다>
 
  洪鍾宇의 삶의 궤적에 비춰 볼 때 레가메의 기록이 훨씬 사실에 가깝다. 설령 洪鍾宇가 別入侍 등의 벼슬을 얻기 위해 度日했다고 가정할지라도 최소한 그는 이타가키와 같은 인물 등과 교유하며 이내 조선의 開化(개화)에 대해 깊이 고심한 것으로 보인다. 레가메의 다음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洪鍾宇는 교양 있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아주 관대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自國의 이익을 위해서는 중요한 역할을 할 사람이다. 공정한 목적을 가진 몇몇 사람들이 프랑스에 온 최초의 한국인의 생활비를 대주었다>
 
  그렇다면 洪鍾宇는 왜 프랑스를 선택한 것일까? 대략 일본內의 대표적인 親佛派(친불파)이자 民權(민권)운동가인 이타가키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레가메의 다음 기록을 보면 洪鍾宇가 왜 조선을 「아시아의 프랑스」로 만들고자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洪鍾宇는 영국을 몹시 싫어한다. 이는 단지 영국이 2년 전부터 홍콩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평소 러시아와 미국에 흩어져 있는 몇몇 동지들과 함께 다음 두 가지 계획을 실천코자 했다. 한국을 압박하고 있는 중국·일본·러시아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루고, 세계로부터 한국을 격리하는 장벽을 제거하는 것이 그것이다>
 
 
  『호랑이가 나에게 주었던 감탄과 공포를 그로부터 발견했다』
 
  이는 金玉均과 유사한 생각이었다. 洪鍾宇는 파리에 머물 당시 프랑스 언론들로부터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일간지인 「르 피가로」紙는 洪鍾宇를 「모든 애국주의자들을 감동시키는 헌신적이고 숭고한 영웅」으로 칭하면서 「그날그날」이라는 코너에 그에 관한 長文(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洪鍾宇의 애국심은 대단했다. 그는 파리 시내를 상투를 틀고 한복을 입은 채 활보했다. 레가메의 기록이다.
 
  <洪鍾宇가 내 사무실로 처음 왔을 때, 그는 파리에 도착한 지 며칠 안 되었고 佛語는 한마디도 몰랐다. 한 일본인 통역이 우리를 도와주었다. 내가 그 한국인을 보자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그는 최대한 몸을 쫙 펴고서는 긴장된 얼굴에 번쩍이는 눈으로 오만한 모습을 보였다. 옛날 싱가포르에서 보았던 커다란 호랑이가 나에게 주었던 감탄과 공포를 그로부터 발견했다>
 
 
  『유럽문명 수용만이 우리가 구제될 수 있는 길』
 
洪鍾宇가 앙리 슈발리에와 함께 번역한「直星行年편람」이 실린「기메 박물관 연보」.
  아오야기는 洪鍾宇가 프랑스 외무성을 찾아가 통사정을 한 끝에 루브르 박물관의 잡역부로 일하다가 1년 뒤 루브르 박물관에 동양미술부가 신설되면서 사무촉탁으로 일한 것으로 기술해 놓았다. 그러나 레가메의 기록에는 루브르가 아닌 기메 박물관으로 나온다. 레가메의 기록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洪鍾宇의 파리 생활은 기메 박물관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당시 파리에 체류하던 동양인 중 한국어와 중국어, 일본어를 능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박물관에서 일하게 된 것은 漢籍(한적)을 자유자재로 접할 수 있는 그의 뛰어난 한문 실력 덕이었다.
 
  파리에서의 그의 행보는 단순한 유학이 아니라 해외독립운동에 가까웠다. 그가 「춘향전」 등을 번역한 것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동호회인 「여행자들의 모임」 등에 참석해 한국의 위기상황을 소개하며 적극적인 도움을 요청했다. 레가메는 「어떤 정치적 자객」에 당시 洪鍾宇가 행한 연설 전문을 기록해 놓았다.
 
  <현재 저의 동포들은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 일부 사람만이 우리가 직면한 위험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나라 상황은 매우 위태롭습니다. 유럽문명의 수용만이 우리가 구제될 수 있는 길입니다. 일본에서 체류기간을 연장하면서까지 정치를 깊이 연구하는 와중에 그런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현명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洪鍾宇는 2년 반 동안 프랑스에 머문 뒤,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 귀국을 서둘렀다. 아오야기는 洪鍾宇가 보일러 화부를 자원해 영국 배와 일본 배를 바꿔 타고 고베(神戶)까지 가서 부두노동으로 여비를 번 뒤 조선으로 돌아온 것으로 기술해 놓았다.
 
  그러나 高宗 30년(1893) 8월로 기술된 귀국시점은 7월22일에 洪鍾宇와 헤어진 것으로 되어 있는 레가메의 기록과 적잖은 차이가 있다. 만일 洪鍾宇가 고베를 거쳐 조선으로 귀국한 것이 사실이라면 당시의 교통사정을 감안할 때 洪鍾宇의 귀국시점은 이 해 가을께로 보는 게 타당하다. 洪鍾宇가 高宗을 배알했다는 「이왕의 자객」의 다음 대목은 허구일 공산이 크다.
 
  <洪鍾宇가 외국에서 공부하고 와 국가의 장래를 우려하고 있음을 가상히 여긴 高宗은 그에게 『희망을 말해 보라』고 했다. 洪鍾宇는 당장 벼슬 이야기를 하는 것도 속이 보는 것 같아 『나라와 君王을 위해 粉骨碎身(분골쇄신)하는 것만이 소원』이라고 대답한 뒤 물러났다>
 
 
  귀국 도중 李逸稙의 사주 받아 자객으로 변신
 
   당시 조선 조정은 자객을 밀파해 일본에 망명 중인 金玉均과 朴泳孝(박영효)를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본의 지리와 풍습에 어두운 자객들은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아오야기는 洪鍾宇가 金玉均을 저격한 사실에 지나치게 주목한 나머지 高宗의 밀명을 받은 것으로 추정했다. 아오야기는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당시의 상황을 이같이 묘사했다.
 
  <高宗이 洪鍾宇와 獨對(독대)하는 자리에서 문득 묻기를, 『전에 그대는 짐을 위해서라면 분골쇄신할 각오가 있다고 했는데』라고 하자, 洪鍾宇가 『거짓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高宗이 곧바로 『그렇다면 荊軻(형가)의 古事(고사)를 알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洪鍾宇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으나 형용하기 어려운 예감으로 가슴이 고동쳤다>
 
  형가는 戰國시대 말기에 秦始皇(진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유명한 자객이다. 洪鍾宇가 高宗을 알현했다면 일본 사정에 밝은 洪鍾宇에게 번번이 실패로 끝난 金玉均 제거의 밀명을 내렸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위의 대화는 어디까지나 아오야기의 상상에 불과할 뿐이다.
 
  대다수 연구자들은 洪鍾宇가 귀국 도중 일본에 들렀을 때 金玉均과 朴泳孝를 암살하러 온 李逸稙(이일직)을 등을 만났고, 그의 사주를 받고 개화파의 일원으로 가장해 金玉均에게 접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여러 정황에 비춰 洪鍾宇는 귀국하기 위해 일본에 머물던 중 자객으로 변신했을 공산이 크다.
 
  洪鍾宇가 高宗 31년(1894) 1월에 새해를 기념해 고베의 한 호텔에서 레가메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이다.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병이 들어 오랫동안 누워 지냈습니다. 저는 아직 고국에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불쌍한 제 아내가 지난해 5월에 세상을 떠나 매우 안타깝습니다」
 
  洪鍾宇가 귀국하기 위해 고베에 머물던 중 문득 병이 들어 적잖은 시간을 일본에서 보냈음을 뜻한다.
 
 
  洪英植의 至親으로 위장해 金玉均에게 접근
 
  洪鍾宇는 金玉均에게 어떻게 접근한 것일까? 당시 金玉均은 삿포로에서 도쿄로 돌아온 뒤 유라쿠초(有樂町)의 하숙집에 머물며 이와다 슈사쿠(岩田周作)라는 變名(변명)을 쓰고 있었다.
 
  「이왕의 자객」은 洪鍾宇가 유락쿠초에서 가까운 간다(神田)의 고급 하숙에 머물며 기회를 노리던 중 자신을 프랑스에서 막 돌아온 동포로 소개하면서 金玉均에게 접근하는 것으로 묘사해 놓았다. 이 소설에서는 金玉均이 洪鍾宇에 관한 소식을 신문을 보고 알았다며 반가이 맞이한 것으로 그려져 있으나 이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1894년에 나온 「일본외교문서」에는 洪鍾宇가 金玉均에게 자신을 개화당 洪英植(홍영식)의 至親(지친)으로 소개하면서 모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에 망명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접근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에 따르면 洪鍾宇는 金玉均에게 일본 군함을 이끌고 가 權貴(권귀)를 盡滅(진멸)하고, 國紀(국기)를 바로 세워 갑신정변 실패의 恨(한)을 푸는 8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洪鍾宇는 金玉均 앞에서 자신의 굳은 결의를 이같이 밝혔다.
 
  『이 8조는 대장부 畢世(필세)의 快事(쾌사)로 바다를 건널 때 이미 銘心(명심)한 바가 있소』
 
  대략 이 기록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일본인 화가가 그린 金玉均 암살도.
 
  홍문관 副修撰으로 발탁
 
능지처참된 후 효수된 金玉均의 死體.
  洪鍾宇가 高宗 31년(1894) 3월에 金玉均을 上海로 유인해 저격한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레가메의 기록에 나오는 「중국전신」 5월21일자의 기사는 이 사건에 대한 淸나라의 기본입장이 어떠했는지를 보여 준다.
 
  『텐진(天津)의 한국영사가 上海에 4월16일에 도착해 중국인 판사에게 갔다. 그의 방문목적은 金玉均의 死體(사체)와 암살범 洪鍾宇를 동시에 서울로 이송하기 위한 것이었다. 긴 협상 후에 그의 요구가 수락되었고, 중국 선박을 이튿날 제물포를 향해 출발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내 金玉均의 死體가 배로 옮겨졌고, 洪鍾宇는 군대의 호위하에 가마를 탄 채 배로 옮겨졌다』
 
  高宗을 비롯한 조선 조정은 洪鍾宇의 金玉均 암살에 歡呼雀躍(환호작약)했다. 「고종실록」 31년 3월9일자의 다음 기록은 당시 조선 조정이 洪鍾宇의 거사를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를 뒷받침하고 있다.
 
  <洪鍾宇가 上海에서 金玉均을 살해하고 淸나라에서 그 시체를 京江(경강·서울의 서강)으로 보내오자 의정부에서 보고하기를, 『중국 兵船(병선)이 월미도 앞바다에 와 정박하였는데 역적 金玉均의 시체를 싣고 왔으므로 즉시 한양으로 오는 배에 옮겨 싣고 이어서 京江으로 출발하였다고 합니다. 檢屍(검시)는 한성부와 형조에서 법에 따라 당일로 거행하게 하고, 檢驗(검험)한 사정을 즉시 보고토록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윤허하였다>
 
  당시 영의정 沈舜澤(심순택)과 판중추부사 金弘集(김홍집), 좌의정 趙秉世(조병세) 등 時任(시임) 및 原任(원임) 대신들은 연명으로 올린 箚子(차자)에서 金玉均의 시체를 즉시 陵遲處斬(능지처참)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高宗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이같이 批答(비답)했다.
 
  『지금 경들이 피를 뿌리고 눈물을 머금은 의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귀신과 사람이 공분하고 여론이 더욱 격화되어 있어 그만둘 수 없다. 아뢴 대로 윤허한다』
 
  洪鍾宇의 出仕(출사)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高宗은 이 해 4월20일 성균관에서 치러진 특별과거시험인 三日製(삼일제)의 詩 부문에서 幼學(유학: 벼슬하지 않은 선비) 洪鍾宇를 直赴殿試(직부전시: 곧바로 최종시험에 응시함)토록 조치했다.
 
  洪鍾宇는 여기에 합격해 이 해 5월28일에 홍문관 副修撰(부수찬)에 제수되었다. 과거급제자의 첫 관직으로는 파격적인 처우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高宗이 직접 시험지를 채점하여 落點(낙점)한 데 따른 것이었다. 洪鍾宇는 부수찬이 된 지 10일 만에 사헌부 獻納(헌납)으로 승진했다.
 
 
  대한제국 선포 후 승지 역임
 
  「고종실록」은 이후 洪鍾宇가 어떤 관직을 거쳤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 그에 관한 기록은 高宗이 大韓帝國(대한제국)을 선포한 지 2년째가 되는 高宗 35년(1898) 1월부터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후의 기록을 보면 洪鍾宇는 高宗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承旨(승지)를 역임한 것이 확실하다.
 
  당시 법부대신 署理(서리) 趙秉式(조병식)은 洪鍾宇에게 警務使(경무사)의 책임을 맡길 것을 적극 건의해 윤허를 받았다. 경무사는 지금의 경찰청장에 해당한다. 이는 당시 조정의 신료들 사이에서 洪鍾宇에 대한 신망이 매우 높았음을 뒷받침한다.
 
  洪鍾宇는 高宗 35년(1898) 3월에 庶政(서정)쇄신을 요구하는 관료 및 유생들의 연합 상소를 주도하는 疏頭(소두)가 되기도 했다. 이후 그는 모두 7차례에 걸쳐 상소를 올린 바 있다. 이 해 4월 16일자에 나오는 「前 ?書丞(전 비서승) 洪鍾宇」라는 기록에 비춰 그는 이 일로 인해 면직되었을 공산이 크다. 당시 그가 올린 상소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세계 판도를 놓고 볼 때 러시아가 제일 강대하여 각국이 의심하고 꺼리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동양과 서양 사이에 위치하여 천하의 요충지가 되고 있습니다. 외국의 상인들이 수도 안에 영업소를 벌여 놓거나 국내를 돌아다니며 장사하는 일이 천하만국 어디에도 없는데 어째서 우리만 특별히 승인합니까.
 
  속히 의정부에 명하여 각국 공사관과 영사관의 공동 회의를 열어서 국내에 주재하고 있는 외국 군대를 본국으로 철수시키고 수도 안에 영업소를 벌여 놓은 국내의 행상을 항구로 내보낸 다음 다시 규정들을 약정하소서. 하나같이 공법을 따르도록 한다면 우리의 자주권을 온전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하정세와 조선의 현실을 통찰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高宗은 「말은 비록 쉽게 하지만 일의 핵심은 깊이 헤아려야 한다」는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洪鍾宇는 이 해 8월10일에 다시 상소를 올려 이같이 諫(간)했다.
 
  『현재 凶書(흉서)가 마구 나돌고 있습니다. 간사한 무리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헤아릴 수 없는 禍(화)가 조석에 문득 일어나게 될 것이고 이를 막아 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속히 法部(법부)로 하여금 잡아 내서 끝까지 치죄하여 亂賊(난적)의 소굴을 제거해서 세상의 의혹을 제거토록 하소서』
 
 
  독립협회를 「간사한 무리」로 간주
 
독립협회 탄압에 앞장선 趙秉式.
  여기의 「간사한 무리」는 바로 독립협회를 지칭하는 것이다. 유럽의 중심에서 유학을 한 洪鍾宇는 君權(군권)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정부가 들어서야 독립을 유지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아오야기는 「이왕의 자객」에서 그 배경을 이같이 기술해 놓았다.
 
  <근래 독립협회는 연설이나 상소를 통해 趙秉式 이하 4명의 대신을 5凶(흉)으로 지목해 처벌을 요구하고 있었다. 한국인이 정치에 각성한 것은 좋으나 그것이 親日단체임을 알고 있는 洪鍾宇는 증오를 느꼈다>
 
  이는 사실에 가깝다. 최근의 연구결과 독립협회의 「의회개설 운동」에 日帝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 대거 참여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독립협회와 高宗은 의회개설 문제로 팽팽히 맞서 있었다.
 
  이때 공교롭게 러시아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온갖 전횡을 자행하다가 해임된 뒤 흑산도로 유배 간 통역관 金鴻陸(김홍륙)이 궁중요리사를 사주해 高宗의 커피에 아편을 넣어 궁중이 발칵 뒤집히는 소위 「毒茶事件(독다사건)」이 일어났다. 독립협회는 이 사건의 철저한 조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 와중에 경무사 閔泳綺(민영기)가 죄인들을 혹독하게 다루고, 중추원이 갑오경장 때 폐지된 連坐法(연좌법)의 부활을 정부에 요청했다. 독립협회는 罪刑法定主義(죄형법정주의) 등을 내걸고 강력 반대하고 나섰다. 중추원 의장 겸 법부대신으로 있는 申箕善(신기선)이 이를 묵살하자 독립협회는 곧바로 의회 설립과 민권 신장 등을 내세우며 개혁 성향의 새 내각 구성을 촉구했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이 해 10월1일부터 12일간 궁궐을 에워싸고 연일 수구파 일곱 대신의 파면을 요구하는 철야시위를 벌여 마침내 이를 관철시켰다. 이에 朴定陽(박정양)을 정부 수반으로 하여 의회 설립을 주장하는 閔泳煥(민영환)은 군부대신에 임명되는 등 새 내각이 들어섰다.
 
  독립협회는 곧 新정부에 공문을 보내 의회설립을 위한 협의를 제청하고 나섰다. 皇權(황권)의 약화를 두려워한 高宗이 이내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금지하는 조칙을 내렸다.
 
  독립협회가 이에 반발해 철야시위를 계속하던 중 마침내 양측의 합의로 종로에서 시민과 정부 관원을 합석시킨 가운데 국정의 전반적 개혁과 의회 설립을 다짐하는 官民共同會(관민공동회)가 열렸다.
 
  이 해 10월30일에 6개조의 獻議(헌의)가 결의되자 高宗이 다음날 조칙을 내려 이를 승인하였다. 상원으로 개편된 중추원 議官(의관)을 선출하기 하루 전날인 이 해 11월4일 밤에 이를 반대하는 壁書(벽서)가 시내 곳곳에 나붙었다.
 
  「조선 왕조가 이미 쇠퇴했으므로 온 백성이 공동으로 尹致昊(윤치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면 정부와 서민이 모두 승복하고 국민이 각성하여 개명진보를 이룰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흑색선전이었다. 결국 이로 인해 이날 밤에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빚어졌다. 李商在(이상재)와 鄭喬(정교), 南宮檍(남궁억), 李建鎬(이건호) 등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이 전격 체포됐고, 독립협회 회장인 윤치호는 체포되기 직전에 도주했다.
 
 
  보부상 동원해 독립협회 탄압
 
  이 일로 인해 이날 오후에 수천의 군중이 모여 석방을 요구하는 소위 萬民共同會(만민공동회)를 열었다. 이에 놀란 高宗이 닷새 뒤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벌금형으로 감형해 석방했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종로로 장소를 옮겨 군중집회를 계속했다. 大怒(대로)한 高宗이 마침내 황국협회를 동원했다. 아오야기는 이때 高宗이 洪鍾宇에게 밀명을 내린 것으로 묘사해 놓았으나,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전국에서 몰려온 2000여 보부상들의 무차별 공격으로 시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에 격분한 서울 주민들이 거리로 나와 이 보부상들을 공격해 돈화문 밖으로 쫓아냈다. 이때 趙秉式과 함께 민원의 대상이 된 洪鍾宇와 吉永洙(길영수), 朴有鎭(박유진) 등의 집이 습격을 받아 모두 파괴되었다. 당황한 高宗이 이 해 11월22일에 趙秉式 등을 재판에 회부하고 독립협회의 復設(복설)을 승인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詔令(조령)을 내렸다.
 
  「洪鍾宇와 길영수, 박유진 등은 제 마음대로 소동을 피운 만큼 그대로 놓아 둘 수 없다. 모두 법부로 하여금 법조문을 적용하여 유배하도록 하라」
 
  그러나 이는 표면상의 조치에 불과했다. 高宗은 애초부터 洪鍾宇 등을 처벌할 생각이 없었다. 이는 4일 뒤에 내려진 다음과 같은 詔勅(조칙)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오늘의 勅諭(칙유)로 이미 上下가 서로 믿게 되었고 나라의 형편이 안정되었으니 죄질이 가벼운 죄수는 석방하고 중범은 각각 1등을 감하도록 하라. 洪鍾宇와 길영수, 박유진 3인은 유배령을 특별히 환수토록 하라」
 
  만민공동회가 이같은 조치에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조병식을 비롯해 閔種默(민종묵), 兪箕煥(유기환), 李基東(이기동), 金禎根(김정근)을 포함해 洪鍾宇와 길영수, 박유진 등을 소위 「8逆」으로 규정하고 시위를 계속했다. 시위가 계속되자 高宗이 경무사 등을 보내 해산을 촉구했다.
 
  만민공동회는 趙秉式과 洪鍾宇 등 「8逆」을 즉시 체포하여 의법 조치하는 등의 3개 조건을 내걸었다. 國政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자 高宗은 마침내 12월22일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해산시킨 후 새 내각을 발족시켰다. 洪鍾宇에 대한 高宗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洪鍾宇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의회개설 등을 둘러싸고 高宗과 대립할 때 시종 高宗 편에 서 있었다.
 

 
  평리원 재판장
 
  이듬해인 高宗 36년(1899) 2월7일에 高宗은 中樞院(중추원) 議官(의관)으로 있던 洪鍾宇를 의정부 총무국장에 임용하고 勅任官(칙임관) 3등에 敍任(서임)했다. 이 해 5월에 보부상들에게 상업적 특권을 주는 「商務社規則(상무사규칙)」이 반포된 것은 興利(흥리)를 통한 재정자립을 주장한 洪鍾宇의 건의를 수용한 데 따른 것이었다.
 
  高宗은 이 해 6월17일에 洪鍾宇를 지금의 고등법원 판사에 해당하는 平理院判事(평리원 판사)에 임명했다. 洪鍾宇는 프랑스에서 법학을 공부했다는 이유로 법관으로서 새 출발을 한 셈이다. 그는 高宗 37년(1900) 3월에는 法部(법부) 司理局長(사리국장), 두 달 후에는 다시 평리원 재판장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洪鍾宇는 사실상 법조의 총책이 된 셈이다.
 
  그러나 洪鍾宇는 두 달 뒤 죄수들이 많아지게 했다는 이유로 高宗의 질책을 받게 되었다. 「고종실록」 37년 7월28일조에 실려 있는 高宗의 조령은 그 이유를 이같이 설명해 놓고 있다.
 
  <형법은 성왕들이 부득이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므로 내버려 두고 쓰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주나라에서 감옥이 텅 비었다든지, 당나라에서 사형 죄수를 놓아 보낸 것은 모두 이런 의리를 취한 것이었다.
 
  근래 감옥 안에 죄수가 차고 넘쳐 울부짖는 소리가 그칠 날이 없다. 재판장 洪鍾宇는 왕명을 펴나가야 할 처지에 있는데도 백성들의 고통을 돌보지 않아 죄수들이 많아지게 하였으니 경계시키지 않을 수 없다. 중하게 견책토록 하라>
 
  당시 洪鍾宇는 법부대신 대리로 있던 민씨 척족 閔鍾默의 무사안일한 태도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高宗은 엉뚱한 이유를 들어 이를 저지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견책을 받은 洪鍾宇가 곧바로 올린 상소 내용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의정부에서 민종묵에 대한 규탄이 있어야 하는데도 마치 입을 봉한 듯이 잠잠하니 이것이 어찌 폐하의 뜻에 대답하고 조칙을 받드는 도리이겠습니까. 대신들로 하여금 민종묵의 소행을 경계하게 하지 않아 민종묵이 하는 대로 하게 한다면 재능과 덕행을 보고 인재를 등용하는 날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臣은 바야흐로 허물을 반성하고 있으니 속히 有司(유사)로 하여금 직책을 수행하지 못한 臣의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얼마 후 법부대신이 權在衡(권재형)으로 교체되었다. 洪鍾宇와 함께 책임을 물어 교체한 것이다. 洪鍾宇에 대한 기록은 이듬해인 高宗 38년(1901) 12월에 다시 나온다. 이때 洪鍾宇는 평리원 재판장에서 면직된 뒤 중추원 議官(의관)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高宗 39년(1902) 4월12일에 洪鍾宇가 의관 겸 칙임관 2등에 다시 서임된 기록이 나온다.
 
舊韓末 토지 측량 모습. 洪鍾宇는 제주목사로 제주지역의 토지 측량 책임을 맡았다.
 
  日帝 침략 본격화하자 제주목사로 부임
 
  「고종실록」은 高宗 40년(1903) 2월9일에 나오는 다음 기록을 끝으로 洪鍾宇에 대한 기록을 마무리짓고 있다.
 
  <地契衙門(지계아문·토지정리국) 총재서리 閔泳璇(민영선)이 아뢰기를, 『지계아문에서 토지를 측량하는 일을 현재 濟州牧(제주목)에서 시행하려고 합니다. 제주는 전라남도의 관할하에 있기는 하나 바다 가운데 섬에 위치해 있어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일체 감독하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제주목사 洪鍾宇를 제주지역의 지계감독으로 특별히 임명해 그로 하여금 전적으로 이 일을 맡도록 해 속히 일을 끝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는 洪鍾宇가 高宗 39년 말에 지방관인 제주목사로 내려갔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아오야기는 「이왕의 자객」에서 보부상들의 만민공동회 습격 사건 이후 신변의 위험을 느낀 나머지 趙秉式의 권유를 받아 제주목사가 된 것으로 묘사해 놓았으나 이는 「고종실록」의 기록과 배치된다.
 
  洪鍾宇는 왜 이때 閒職(한직)인 제주목사로 내려가게 된 것일까? 관련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으나 일본의 조선침략이 본격화하는 상황에서 신변의 위협 등을 느껴 자진해 제주목사로 내려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洪鍾宇가 제주목사로 내려간 이후의 행적은 전혀 알 길이 없다. 언제 관직을 사임하게 되었는지 오리무중이다. 아오야기는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 「이왕의 자객」의 맨 마지막 구절을 이같이 끝맺고 있다.
 
  <洪鍾宇는 한일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발효를 기다리지 않고 관기 출신 애첩과 함께 시베리아를 경유해 파리로 떠났다>
 
  그러나 無名(무명) 시절에도 파리에서 크게 활약한 洪鍾宇와 같은 인물이 韓日합방 이후 프랑스로 망명했다면 그의 이름이 프랑스 언론에 대서특필되지 않을 리 없다. 일각에서는 洪鍾宇의 사망시점을 韓日합방 3년 뒤인 1913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이 또한 무슨 뚜렷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로서는 洪鍾宇가 과연 韓日합방 때까지 제주목사로 재직해 있었던 것인지, 辭職(사직)은 자발적으로 이뤄진 것인지 여부 등에 관해 전혀 알 길이 없다. 다만 洪鍾宇가 乙巳條約(을사조약)이 이뤄지는 高宗 42년(1905) 전후로 사직서를 내고 은신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金玉均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日帝가 金玉均 저격범인 洪鍾宇를 그냥 놓아둘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洪鍾宇의 제주목사 이후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문학적 상상력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아오야기는 나름대로 사실에 토대해 洪鍾宇의 삶을 복원코자 노력했으나 상당부분은 상상력을 동원했다. 韓日합방 직후 제주목사를 그만둔 洪鍾宇가 의병을 일으킨 崔益鉉(최익현)을 만나 高宗의 칙서를 훔쳐 달아난 대목 등이 그 실례이다. 대부분의 역사소설이 그렇듯이 사료가 남아 있지 않은 부분에 상상력을 동원해 가장 그럴듯한 내용으로 채워 넣는 것은 전적으로 문학가의 특권이다.
 
 
  洪鍾宇와 金玉均의 공통점
 
  洪鍾宇는 여러 면에서 金玉均과 대비된다. 두 사람에 대한 평가가 反비례의 관계에 있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金玉均과 관련해 그의 外勢(외세)동원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자주적인 근대화 의지만큼은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는 하나의 통설로 굳어져 가고 있다.
 
  반면 洪鍾宇의 경우는 개화당의 당수인 金玉均을 살해하고, 독립협회와 대립하던 황국협회를 이끈 까닭에 부정적인 견해가 압도적이다. 최근에 발표된 일부 논문조차 그를 「정치적 암살자」 내지 「난동자」 등으로 규정하면서 保守反動(보수반동) 성향이 강했던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과연 이런 평가가 정당한 것일까.
 
  당대 최고의 閥門(벌문) 출신인 金玉均은 이른 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출세가도를 달리면서 외세를 끌어들여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추구했다. 이에 반해 하급관원을 지낸 寒門(한문) 출신인 洪鍾宇는 30代의 나이에 처자식을 조선에 남겨 둔 채 조국의 근대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渡日했다. 金玉均이 젊은 나이에 비록 「3일천하」에 그치기는 했으나 일시 천하를 호령할 당시 洪鍾宇는 이름조차 전혀 알려지지 않은 필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적잖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두 사람의 나이가 거의 같다. 金玉均은 철종 2년(1851)에 태어났다. 洪鍾宇는 그보다 세 살 아래이다. 두 사람 공히 「서양문명을 조속히 받아들여 조국을 근대화하는 길만이 열강의 각축 속에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 모두 자주적인 개화론자였다. 특히 두 사람 모두 「아시아의 영국」으로 불린 일본과 달리 프랑스를 모델로 하여 조선을 「아시아의 프랑스」로 만들고자 했다.
 
  많은 연구자들은 洪鍾宇의 渡日 및 渡佛의 배경을 프랑스의 정치사상이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을 보고 흥미를 느낀 데서 찾고 있다. 10년간에 걸쳐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자신의 주변에 매우 민감했던 金玉均이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洪鍾宇를 만나 별다른 의심 없이 곧바로 幕友(막우)처럼 가까이 지내게 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君權강화를 바탕으로 자주적 근대화 꿈꿔
 
  두 사람의 근대화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은 전혀 달랐다. 金玉均은 외세를 끌어들여서라도 급속히 조선을 개화하고자 한 데 반해, 洪鍾宇는 王權을 강화한 가운데 列强(열강)의 세력균형 정책을 이용한 等距離(등거리) 자주외교를 통해 독립하고자 했다.
 
  당초 개화당은 전래의 性理學(성리학) 전통에 입각해 臣權(신권) 우위의 통치제도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金玉均 등이 시종 西歐(서구)의 통치제도를 조속히 도입할 것을 주장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洪鍾宇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오히려 君權(군권)을 강화한 가운데 國體(국체)를 확립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그가 사상 최초로 佛譯(불역)한 「심청전」의 서문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프랑스인들이 우리 조선 사람들이 선조가 세운 정부 형태에 집착하는 것을 탓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것은 기질의 문제일 뿐이다. 국민의 관습에 미치는 기후의 영향에 대해서는 오래 전에 증명된 바 있다. 나라마다 다른 政體(정체)가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 정부 형태를 그대로 지켜 나가면서 유럽문명을 이용하고자 한다>
 
  그의 이런 입장은 동양의 전통 위에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소위 「東道西器論(동도서기론)」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는 하나, 여기에는 적잖은 차이가 있다. 동도서기론은 서양의 문명을 단지 技術的(기술적)인 차원에서 도입할 것을 주장한 데 반해 洪鍾宇는 동양 전래의 통치제도 및 통치사상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토대로 서양 통치사상 및 제도의 도입을 선별적으로 도입코자 한 것이다.
 
  洪鍾宇는 기본적으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서구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중요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선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을 분명히 갖고 있었다. 이는 레가메가 洪鍾宇와 헤어질 때의 정황을 묘사해 놓은 다음 기록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그와 헤어지면서 문득 『프랑스의 나쁜 점이 무엇이라고 보느냐』고 묻자, 그는 즉시 『利己主義(이기주의)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2년 넘게 살게 해준 사람들의 호의에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는 것도 생각지 않았다. 입에 담배를 물고, 회색의 긴 한복을 입은 채 똑바로 앉은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洪鍾宇는 西歐문화가 일종의 개인주의 문화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통찰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의 전통과 서구문명을 조화시켜 독립을 달성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분명 성리학적 통치질서의 유지를 추구한 斥邪衛正派(척사위정파)와 달랐지만, 金玉均이 이끄는 개화당과 같이 무조건적인 西歐化에 반대했다.
 
  그는 「심청전」의 서문에서 조선의 지정학적 상황을 이탈리아와 비교해 제국주의 열강에 둘러싸여 있는 양국 간의 유사점을 강조하면서 中·日·러의 조선침략 정책을 경계한 바 있다. 프랑스의 주요 일간지 「르 피가로」가 그의 식견을 높이 평가하면서 「조선의 개화파에 속하면서 옛 제도와 싸우고 있는 사람」으로 소개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金玉均과 개화당의 한계
 
  洪鍾宇는 애국심 면에서 金玉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파리에 있는 동안 늘 상투를 튼 채 한복을 입고 있었다. 金玉均이 和服(화복)을 입고 일본식 이름을 사용한 것과 대조된다. 洪鍾宇가 「여행가 회의」에 참석해 『조선의 건국연대가 기원전 2000년 이전으로 올라간다』고 강조한 것은 뜨거운 애국심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洪鍾宇가 金玉均을 저격한 것은 그의 이런 강렬한 애국심이 발동한 결과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金玉均을 비롯한 개화당 인사들은 갑신정변의 실패원인을 자신들의 조급한 일처리 등에서 찾기는 했으나, 근본적으로 일반 민중의 몰지각에 그 책임을 돌리고 있다. 1948년에 나온 「서재필 박사 자서전」에 나오는 다음 대목이 그 증거이다.
 
  <독립당의 계획은 부실한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패인은 그 계획에 까닭도 모르고 반대하는 일반 민중의 무지 몰지각이었다>
 
  독립당들의 「反외세」는 정확히 말하면 일종의 「反淸(반청)」에 불과했다. 이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키는 전후과정에서 일본에 의해 철저히 이용당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들은 다윈의 「진화론」을 인간의 사회에 적용시킨 H 스펜서의 소위 「사회적 진화론」에 함몰된 나머지 조선을 제국주의 열강의 하부기구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는 곧 이들이 내심 「近代化」를 「西歐化」 내지 「日本化」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사고방식에서 올바른 근대화 방안이 나올 리 없었다. 이를 간파하고 이들의 무모한 책동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견해가 당시에도 있었다. 朴殷植(박은식)은 일찍이 「韓國獨立運動之血史(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개화당을 이같이 비판했다.
 
  <대체로 갑신혁명은 기본적으로 국민의 동의를 얻지 못했고, 일본에 속았고, 독립운동을 남의 힘을 빌려서라도 조속히 이루려고 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金玉均의 三和論에 반대
 
  金玉均이 청나라로 가기 전에 자신의 일본식 이름을 이와다 슈사쿠에서 다시 이와다 미와(岩田三和)로 바꾼 것은 한국과 청나라, 일본의 공존화합을 통해 서양에 대응한다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일본을 맹주로 한 東아시아 3國이 문명화하여 서양의 침공에 대항해야 한다」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일본맹주론」을 飜案(번안)한 것에 불과했다. 金玉均에게는 한국을 중심으로 한 방략이 빈약했다.
 
  洪鍾宇는 「조선독립」이라는 뚜렷한 주체의식과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가 1893년 가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기 위해 일본에 기항하던 중 이일직 등과 만나 모의 끝에 金玉均을 上海로 유인해 저격하게 된 진정한 배경이 여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洪鍾宇는 金玉均을 「日帝의 나팔수」 정도로 간주했다. 洪鍾宇는 金玉均 살해 후 청나라 관원에 의한 訊問(신문)과정에서 이같이 말한 바 있다.
 
  『金玉均은 갑신정변 때 죄 없는 사람을 대거 살해하고, 국왕을 선동해 나라를 혼란케 만들고, 외국 군사를 이끌고 궁중에 난입하고, 아시아 3국의 국제관계에 큰 해를 끼쳤다』
 
  洪鍾宇는 외세에 의존한 급격한 쿠데타로 인해 조선왕실의 권위가 추락하고, 마침내 조선과 일본은 물론 일본과 淸國의 관계가 급랭해 조선이 戰禍(전화) 입을 것을 크게 우려했던 것이다. 개화를 반대하고 수구파 정권을 옹호하기 위해 金玉均을 살해한 것이 아니었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그런 것은 더욱 아니었다.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에게 살해당한 閔台鎬(민태호) 등의 부자형제들이 洪鍾宇의 저격에 감격해한 나머지 그를 초대해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을 때 그는 이렇게 일갈했다.
 
  『일의 형세로 말하면 諸公(제공)을 대신해 원수를 討滅(토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소. 그러나 소생의 본지는 결코 제공의 私敵(사적)을 토멸하는 것에 있지 않소. 또한 그가 甲申의 역적이고 국가의 共敵(공적)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소. 그의 생존이 東亞(동아) 3국의 和盟(화맹)을 방해하고 있고, 이로 인해 이들 3국이 一戰(일전)한다면 東亞의 戰亂(전란)도 헤쳐 나갈 길이 없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소』
 
  이는 金玉均이 주장한 소위 「三和論(삼화론)」의 허실을 통찰한 발언으로 이해된다. 「일본외교문서」에 따르면 洪鍾宇는 上海에서 환국한 뒤 어느 세도가와 대담하는 자리에서 이같이 말한 바 있다.
 
  『우리나라는 비록 貧殘(빈잔)하지만 그 누구도 우리나라의 내정을 조종할 수는 없다』
 
 
  「위로부터의 근대화」 추구
 
  척사위정파의 맹목적인 애국론에서 탈피해 열강의 세력균형론을 올라탄 자주외교를 통해 조선의 독립을 꾀하고자 하는 매우 현실적인 접근이었다. 그가 과거에 급제한 후 7차에 걸친 상소를 통해 時弊(시폐)에 대한 개혁론을 강력히 주장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의 상소는 기본적으로 열강의 조선 利權(이권)침탈에 대한 결사반대와 국내 상업의 흥기를 통한 재정의 확충, 군사권의 확립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는 金玉均 등 개화당 인사들과 달리 王權의 강화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王權의 강화는 재정의 확충과 군사권의 확립으로 요약된다. 이는 戰國시대 말기에 韓非子(한비자)가 『富國强兵(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엄격한 법치를 통한 君權의 강화 및 兵農一致(병농일치)를 통한 軍權(군권)의 강화가 절대 필요하다』고 주장한 대목을 상기시킨다.
 
  그의 이런 주장은 대한제국 후반기 일본의 조선침략이 노골화하면서 점차 힘을 잃고 말았다. 반면 일본을 중심으로 한 소위 「문명개화론자」들이 득세했다. 중앙정계의 거물이었던 그가 제주목사로 내려가게 된 것은 이런 세태 변화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洪鍾宇는 비록 金玉均과 같이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추구했으나 그 방법론만큼은 현저히 달랐다. 그는 조선황실을 강화한 가운데 이를 달성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의 정황에 비춰 洪鍾宇의 방략이 훨씬 適宜(적의)하면서 현실적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
 
  그림 : 이우범
  • 스크랩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