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광수 北送, 韓·日 외교쟁점으로 부각
金大中 정부, 2000년 9월 일본 정부와 납치 피해자 모임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납치범 辛光洙를 북한으로 송환. 辛光洙는 영웅칭호 받고, 金正日의 對日 교섭 자문 中
朴承珉 일본「文藝春秋」서울특파원
金大中 정부, 2000년 9월 일본 정부와 납치 피해자 모임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납치범 辛光洙를 북한으로 송환. 辛光洙는 영웅칭호 받고, 金正日의 對日 교섭 자문 中
朴承珉 일본「文藝春秋」서울특파원

- 거물 간첩 신광수.
기자는 비전향 장기수들을 北으로 돌려보내기 하루 전날인 2000년 9월1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북악파크텔에서 취재할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辛光洙는 흰 모시 적삼과 바지에 모시 종류로 만든 밀짚모자 모양의 큰 모자를 쓰고 봉고차에서 내려 거의 90도에 가깝게 상체를 숙이고 서둘러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언론 취재를 의식해 자신의 얼굴을 가리기 위한 행동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기자가 『본인이 일본인 하라 타다아키를 납치했다고 밝혔는데, 北韓으로 돌아가는 소감이 어떠냐』고 묻자, 辛은 상체를 숙여 엎드린 채로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로비 주변에 있던 사복 경찰들에게, 「이 친구들을 끌어내요」라고 지시하듯 말했다. 사복 경찰들은 辛의 말을 듣고는 기자 일행들을 막무가내로 호텔 로비 밖으로 밀쳐 냈다. 비전향 장기수들을 안전하게 보내기 위해 상부로부터 이미 경찰에게 철저한 경계지시가 하달된 모양이었다.
그때의 유쾌하지 않은 기분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金大中 前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일본 땅에서 「납치」를 당한 경험이 있다. 金 前 대통령은 『현해탄에서 수장당하기 직전 미국 정보기관에 의해 구출됐다』고 주장해 왔다.
辛光洙를 北으로 보낼 때 金 前 대통령은 「하라 타다아키」가 공작선에 실려 북한으로 끌려갈 때의 심정과 자신이 납치선에 강제로 실려 끌려 올 때의 모습이 오버랩되지는 않았을까?
간첩 辛光洙의 행적辛光洙는 어떤 인물인가?
北韓과 日本 사이의 최대 현안은 일본인 납치 피해자 문제다. 이제까지 북한에 의해 납치된 일본인은 어느 정도 밝혀졌지만, 납치를 실행한 공작원이 누구인지는 거의 밝혀지지 않았다.
일본 영토에서 직접 납치해 간 북한 공작원의 신분이 본인의 자백에 의해 밝혀진 것은 아직까지 辛光洙가 유일하다.
辛光洙는 북한 공작원으로 일본에서 암약 중이던 1985년 2월 한국內의 스파이조직 점검과 국가기밀을 탐지하기 위해 입국했다가 안기부(現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에 의해 체포됐다.
안기부는 1985년 6월28일 간첩 辛光洙에 대한 수사 자료를 발표했다. 안기부 밝힌 그의 행적을 살펴보자.
辛光洙는 1929년 6월27일, 일본 시즈오카현(靜岡縣)에서 토건 노동자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고교 3년 재학 중 광복을 맞아 가족과 함께 귀국해 경북 포항중학교(당시 5년제)에 편입학했다.
1948년 교내 좌익학생데모에 가담해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자 서울로 도피해 보성중학교 3학년에 편입했으나 공산주의 사상에 경도돼 있던 辛은 5학년 재학 중이던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북한의용군에 자진 입대했다.
辛은 1971년 2월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산하의 당시 對南 공작기관인 198부대 對南 간첩요원으로 선발되어 2년 5개월간 간첩 밀봉교육을 받았다.
1973년 7월 북한 공작선을 이용해 원산항을 출발한 辛은 일본 이시카와현(石川縣) 해안으로 1차 침투한다. 일본에서 공작활동을 하던 중 1976년 9월 북한의 소환으로 일시 복귀한다.
그때 辛은 노동당 3호 청사의 金正日비서집무실에서 金正日 비서로부터 직접 「일본인을 납치해 北으로 데려와 일본인의 신원사항을 완전히 익혀 일본인으로 완전 변신한 후, 在日 대남공작을 계속 수행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1980년 미야자키서 하라 타다아키 납치![]() |
| 2000년 8월27일 연세大 대강당에서 열린 비전향 장기수 환송회에 참가한 장기수들이「연방통일조국 앞당기자」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
하라 타다아키 명의의 주민등록표, 여권, 운전면허증 등을 발급받아 완전히 일본인으로 변신한 辛은 이후로는 당당히 나리타공항을 통해 동남아·유럽 등을 거쳐 북한에 드나들며 모두 여섯 차례나 일본으로 침투한다.
日本 警視廳(경시청)은 지난 3월23일 在일본 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산하의 「在日조선오사카(大阪)상공회」를 포함해 6개의 관련시설에 대해 대대적인 가택수색을 단행했다.
辛光洙에 의해 북한으로 납치된 하라 타다아키가 요리사로 일했던 중화요리점과 그 가게 주인인 조총련계 李三俊(이삼준·74)도 압수수색의 대상이었다. 李씨는 하라 타다아키가 납치될 당시 오사카상공회의 이사장으로 있었으며, 하라를 「조국(북한)에서 요구한 적합한 사람」으로 辛光洙 등에게 납치 대상자를 소개한 인물로 나타났다.
1985년 11월30일 서울형사지방법원의 辛光洙 판결문을 보면, 하라氏의 납치에는 辛光洙와 1980년 당시 조총련 오사카상공회 회장이었던 李吉柄(이길병·사망), 辛光洙에게 포섭되었던 金吉旭(김길욱), 중화요리점 주인 李三俊 등이 용의주도하게 관여했다. 경시청이 하라 타다아키 납치에 적극 관여한 것으로 나타난 당시 오사카상공회와 간부, 하라의 직장이었던 중화요리점과 주인 등을 강제 압수수색한 데는, 납치문제에 있어 북한과 협상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나온 강한 압박전술로 보인다.
日本, 두 차례 辛光洙 국제 수배![]() |
| 일본 정부로부터 북한에 피랍된 일본인 요코다 메구미의 DNA 분석 결과를 공식 통보 받은 부모 요코다 시게루와 요코다 사키에 부부가 지난 4월11일 도쿄에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회견하고 있다.<마이니치신문 제공> |
또 지난 2월에는 경시청과 후쿠이현(福井縣) 경찰청이 辛光洙를 치무라 부부 납치사건에 「국외이송목적 약취」 용의로 국제 수배했다.
2002년 일본으로 귀환된 치무라는 『내가 납치됐을 때 실행범의 한 사람이 辛光洙였다』고 밝힌 바 있다.
또 다른 납치 피해 여성 「소가 히토미」는 귀환 후에 요코다 메구미 부모에게, 『메구미씨와 둘이서 辛선생님에게 물리와 수학을 배웠다. 메구미씨는 뭐든지 이해가 빨라 年下인데도 언니 같았다』, 『귀국했을 때 일본 정부 관계자가 보여 준 사진을 보고, 처음으로 (辛光洙) 선생님이 북조선의 공작원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소가는 또 『辛光洙가 「내가 요코다 메구미를 납치했다」고 고백했었다』고 밝혔다.
소가 히토미는 요코다 메구미와 1978년부터 1980년까지 평양시내 초대소에서 함께 생활했다고 증언했다. 이 시기는 辛光洙가 안기부 수사과정에서 자백한, 「1976년 9월에 북한의 소환을 받고 복귀한 다음, 1980년 4월에 일본에 두 번째로 침투했다」고 밝히고 있어 양쪽의 말이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치무라와 소가의 말이 사실이라면 辛光洙는 하라 타다아키 납치 이외에도 복수의 일본인을 납치한 것으로 보인다. 공작원으로 일본에 침투했을 뿐 아니라 일본인 납치 피해자들에 대한 교육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소가 히토미가 辛에게서 물리와 수학을 배웠다고 밝힌 부분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辛光洙는 학창 시절 理科(이과)에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辛이 포항중학교에서 서울로 도피해 보성중학교에 다닐 때 그에게 물리를 배웠다는 사람의 말을 빌리면, 「辛光洙 가정교사는 조용한 성격에 학구적이었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담당 수사관이 기억하는 辛光洙![]() |
| 2000년 8월27일 서울 미아동 한빛교회에서 납북자가족모임 대표 최우영씨가 비전향 장기수들과 만나 『북으로 돌아가면 납북자들의 귀환을 위해 힘써 달라』고 부탁하자, 한 장기수(오른쪽)가 『북에는 납북자가 한 사람도 없다』며 강하게 항의하고 있다. |
― 辛光洙는 어떤 인물이었나.
『일본과 루마니아에서 공부한 인텔리 공학도였다. 상당히 젠틀맨이었다. 아는 것도 많고 책도 많이 읽어 만나는 상대를 신사적인 분위기로 압도할 만한 사람이었다』
― 辛光洙를 체포하게 된 과정을 말해 달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 다만 한국 김포공항에 들어왔을 때부터 우리가 미행을 했고, 그가 신라호텔 숙소까지 가는 동안 면밀히 체크했다. 우리는 그를 입국 당일 체포하지 않았다. 며칠간 그가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내버려뒀다.
며칠이 지난 후 그가 외출하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올 때 엘리베이터 안에서 체포했다. 그는 北에서 가지고 온 자살용 독약 앰플을 소지하고 있었는데 자살 시도도 하지 못하고 우리에게 체포됐다』
― 그의 임무는.
『납치에 관여한 걸로 안다. 그런데 기억나는 것은 그가 페이퍼(보고서)를 기가 막히게 썼던 것 같다. 상황 분석력과 자료를 요약·정리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자신의 그런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페이퍼 공작원」이라고 불렀다』
― 요코다 메구미도 그가 납치한 것인가.
『그건 알 수 없다. 지금 일본에서는 그가 메구미를 납치했다고 알려졌는데, 그렇게 보는 것은 북한의 의도에 말려드는 일이다. 金正日이 메구미의 납치사실을 인정했지만, 자신과는 전혀 상관 없는 일당이 납치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다 보니 납치 책임을 辛光洙에게 덮어씌우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이건 金正日의 전략에 말려드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金正日이 납치를 지시했다는 점이다. 辛光洙가 했든 누가 했든 金正日의 지시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辛光洙와 辛建 前 국정원장의 인연―辛光洙는 1999년 12월 金大中 정권 때 석방된 후, 2000년 9월 北으로 살아서 돌아갔다. 그는 北에서 영웅대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왜 한국의 공안당국이 그를 살려 주고, 北으로 돌려보냈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辛光洙는 사람을 묘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辛光洙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는 국정원장을 지냈던 辛建(신건)씨였다. 辛建씨는 담당검사로 있으면서 辛光洙의 젠틀한 면에 매료된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辛建씨는 일차 수사를 끝내고 기소 단계에서 「辛光洙에게 사형 구형을 절대 못 하겠다」고 우리에게 알려 왔다. 무기징역을 구형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辛建 검사가 혹시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니야」라고 했다.
당시 분위기에서는 법원도 사형을 내린 수준이었는데 사형 구형이 아닌 무기징역 구형은 말이 안 되었다. 공안사건이라는 게 담당검사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결국 검찰은 (辛光洙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그는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나중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지만…』
―辛建과 辛光洙 간에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나.
『우선 두 사람 다 辛씨다. 매울 辛. 담당검사와 공작원으로 만났지만 나중에 辛建씨는 국정원장이 되어서 辛光洙를 北으로 돌려보냈다. 참 묘하다. 2000년 9월 북송을 앞두고 일본 정부 측에서 「辛光洙를 北으로 보내지 말라」고 요청해 온 것으로 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본 정부는 일본인을 납치한 辛光洙에게 관심이 많았다. 辛光洙를 국제 수배한 일본의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시 金大中 정권은 이를 무시하고 辛光洙를 金正日의 품으로 보냈다. 국제관례상 이는 한국과 일본의 외교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요청을 거부한 사건이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국제관례상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2000년 9월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게 「辛光洙를 北으로 보내지 말라」고 요청했는지에 대해, 일본 정부는 확인해 주지 않고 있다. 일본의 「납치 피해자 가족회」에서는 金大中 정부의 비전향 장기수 무더기 북송을 앞두고 당시 駐日(주일) 한국대사관에 辛을 보내지 말라고 요청했다.
北·日 교섭에서 金正日의 「오른팔」![]() |
| 2000년 10월10일 북한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노동당 창건 기념행사에 등장한 비전향 장기수를 환영하는 대형그림. |
일본의 「주간현대」는 지난 1월28일자 號에 북조선의 對日 관계자의 말을 인용, 辛光洙의 생활을 보도했다.
〈2005년 11월8일에는 金正日 총비서(국방위원장)로부터 금후의 北日교섭의 진행방법(대처방법)에 대해 직접 어드바이스(자문)를 요청받고 장시간 단독 회견(면담)했습니다. 北·日교섭에 관해서는 지금은 金위원장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사생활에 대해서는 박진옥이라는 36세 연하의 여성과 재혼해 평양시의 중심부 「중구역 동문 1동」의 고급 맨션에서 살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부분은 金正日이 對日 협상에 대해 辛光洙로부터 자문을 구한다는 것이다. 北·日 양국은 일본인 납치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서로가 원하는 국교정상화 합의를 못 하고 있다. 辛光洙는 납치 실행범 중의 한 명이다.
金正日은 辛光洙가 일본에서 태어나 현지에서 중학교까지 다녔으며 나중에는 공작원으로 다시 들어가 생활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일본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모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