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연구] 배우 출신 국회의원 申榮均의 성공적 人生

인기도 누리고 돈도 벌고 政治도 하고

  • : 서철인  iron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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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원작의 「老人과 바다」처럼 소년과 老人이 동시에 공감할 수 있는, 순수하면서도 人生의 깊이가 밴 그런 영화를 마지막 작품으로 남기는 게 제 꿈입니다』

「한나라당 상임고문, 한주흥산(주) 회장, 재단법인 신영문화예술재단 이사장」
申榮均 의원의 지갑 속에 들어 있는 여러 장의 명함이다. 서울大 치대를 졸업한 후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던 치과의사 申榮均. 그러나 그는 평소 좋아하던 연극, 영화를 택했다.
그리고 최고의 영화배우가 됐다. 정치인이 되고 나서는 한국 문화계의 발전을 위해 의정활동도 열심히 했다. 이제 그는 16代 국회를 마지막으로 정계를 떠난다. 정신없이 걸어왔던 칠십 평생의 길.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인간 申榮均」의 얘기를 그에게서 직접 들어본다
『이 감격스러운 자리에 서고 보니 설립자이신 申榮均씨를 어떻게 호칭해야 할지 조금은 당혹스럽다. 회장님이라고 해야 할지 의원님이라고 해야 할지…』
 
  1996년 제주도 남제주군 남원읍에 위치한 제주신영영화박물관 개관 당시 배우 金芝美(김지미ㆍ63)씨는 申榮均(신영균) 의원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申의원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金씨의 말에 공감했다. 배우는 물론 사업가와 정치인으로도 크게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보니 평소 申의원과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조차 그에 대한 호칭을 어떤 때는 「申회장」이라고 했다가, 또 어떤 날은 「申의원」이라고 바꾸어 부르기 일쑤다.
 
  그러나 그가 출연했던 「빨간 마후라」,「미워도 다시 한번」 등의 영화에 울고 웃었던 대부분의 대중들은 그를 여전히 배우 申榮均으로 기억하고 있다. 물론 자신도 사업가나 정치인보다는 배우로 불릴 때가 가장 자랑스럽고 행복하다고 한다.
 
  배우 출신의 사업가나 정치인으로서는 가장 성공한 모델로 꼽히곤 하는 한나라당 申榮均(전국구) 의원. 그는 배우로서 최전성기였던 1960~1970년대 이후 공식적으로 인터뷰를 한 적이 거의 없다. 배우로서는 이제 원로 중에서도 원로지만 정치인으로서는 왕성하게 의정 활동을 펴는 현역 의원이고, 사업가로서는 여전히 치밀하고 빈틈 없는 경영인으로 통하는 그를 1박2일 동안 동행 취재했다.
 
  지난 8월8일 오후 두 시경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申의원을 처음 만났다. 배우 출신답게 그는 하단이 유난히 긴 감색 양복을 멋지게 소화해 내고 있었다. 적당히 빗어 넘긴 머리와 부드러운 미소에서 중후한 신사의 품격이 그대로 배어났다. 그런 그가 배우로서는 어느덧 원로가 되었다는 사실이 도통 믿어지지 않았다. 申의원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이를 공개하는 기자가 제일 싫다』고 했지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나이를 공개하지 않을 수 없다. 申의원은 1928년 11월6일生, 우리나라 나이로 일흔여섯이다.
 
  인터뷰는 지난 8ㆍ15 광복절 특집으로 방송된 KBS 전국노래자랑 평양편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됐다. 애초 계획대로라면 申의원을 비롯한 문화관광委 소속 의원들은 이 프로그램 녹화 현장에 참관인 자격으로 참가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녹화 며칠 전 鄭夢憲(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의 자살사건이 터지자, 북한 당국은 『그 책임이 전적으로 한나라당에 있다』며 『국회의원이 아닌 일반인 자격으로 참관하라』고 일방통보했다. 이에 반발한 한나라당 의원들은 자진해서 당시 행사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그 바람에 고향이 이북인 그는 꿈에도 그리던 북녘 땅을 밟아 보지 못 했다.
 
  『정치적인 동기야 어떻든 간에 북쪽이 고향인 저로서는 방문이 취소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서운하고 아쉽고 그랬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떠나온 이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고향인데…』
 
 
 
 치과의사 가슴에 연극의 열정이 타오르다
 
  申의원의 고향은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필대리. 지주 집안은 아니지만 富農(부농)인데다 아버지 申泰賢(신태현)씨가 그의 모교 한포초등학교 설립자여서 그를 비롯한 3남매는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다. 그런 그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를 온 것은 1930년대 말.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홀로 3남매를 키우던 어머니가 자식들의 장래를 생각해 교육 환경이 좀더 나은 곳으로 이사를 감행한 것이었다.
 
  『6ㆍ25가 나기 전, 그러니까 제가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경제적 어려움 없이 그럭저럭 잘 살았어요. 그때만 해도 남북한 往來(왕래)가 자유로워 고향에서 쌀이며 곡식들을 다 가져다 먹었거든요. 그런데 38선이 생기는 바람에 왕래하기가 힘들어지면서 생활이 조금씩 어려워졌어요. 결국 생활력이 강하신 어머니가 쌀이며 떡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 때문에 대학 진학은 어려운 형편이었어요』
 
  6년제인 서울의 한성중학교 재학 당시부터 연극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졸업 후 본격적으로 연기 수업을 받기 위해 극단 「청춘극장」에 입단했다. 학창 시절 함께 레슬링 선수로 활약했던 친구의 아버지가 극단의 경영주이자 훗날 연극과 영화로 크게 성공한 소설 「검사와 여선생」의 원작자였다는 점이 인연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극단 생활을 오래 하지 않았다. 1년여 동안 무대 활동을 하면서 연극만으로는 한 家長으로 살기가 힘들겠다는 생각을 해오던 차에 어머니가 뒤늦게나마 대학 진학을 소원했기 때문. 결국 그는 이듬해 시험을 쳐 서울大 치대에 입학했다.
 
  『대학에 진학했다고 해서 연극에 대한 꿈까지 포기한 건 아니었습니다. 치대 연극반에 들었어요. 당시 치대 연극부는 서울大 내에서도 알아주었는데, 제가 연극부장을 맡으면서 단과대학 내 연극부를 하나로 통합하는 서울대 전체 연극부를 만들었습니다. 이때 같이 활동했던 사람이 지금은 고인이 된 박암씨, 吉屋潤(길옥윤)씨, 李樂薰(이낙훈)씨고, 현재도 TV와 연극 무대를 통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李順載(이순재)씨입니다』
 
  申의원은 1955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진해에 있는 해군본부에서 군의관으로 병역의무를 마쳤다. 그는 군생활을 하면서도 연극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지 않았다. 주말이면 서울로 올라와 연극계 사람들을 만나곤 했다. 부인 金善姬(김선희)씨를 만난 것도 연극 일을 하기 위해 서울에 잠깐 휴가를 나왔을 때다. 이 무렵의 이야기는 부인 金씨가 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제가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 재학 때였습니다. 남편을 처음 본 건 어린 조카의 무용 발표회가 있던 국립국장에서였는데, 정말 우연히 만났습니다. 남편이 제 조카 扮裝(분장)하는 걸 도와주러 왔다가 만난 거니까요. 제게는 조카뻘 되는 친척 중 당시 육군에 있던 사람이 있었는데 남편하고 친분이 각별한 사이여서 부탁을 했던 모양이에요』
 
  申의원은 외모나 성격이 고전적이고 동양적인 金씨에게 그날 첫눈에 반했다. 게다가 인연이 되려고 그랬던지 그 후 이상하게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누군가를 만나러 명동 은하수 다방에 갔을 때 근처 도서관에서 친구들과 공부하다가 함께 차를 마시러 온 것을 보고 申의원이 찻값을 미리 계산해 준 적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申의원이 프로포즈를 했고, 만나면 만날수록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오던 金씨도 이를 받아들였다. 재학생이 결혼할 경우 학교를 중퇴해야 하는 이화여대 학칙 따위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치과의사라는 직업은 물론 외모나 성격도 남자답고 준수해 金씨 역시 군의관 「신영균」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치과 의사라서 결혼했지 배우였다면 안 했을 거예요. 저는 그냥 큰 욕심 없이 조용하고 평화롭게 사는 게 꿈이었거든요. 그래서 회장님이 나중에 병원 그만두고 배우가 되겠다고 했을 때도 극구 반대했어요』
 
 
 
 「과부」에 첫 출연
 
   결혼 후 두 사람은 경남 진해에 신혼 살림을 차렸다. 자그마한 병원도 함께 개업했다. 그때만 해도 군의관들의 경우 근무 시간 이외에는 일반인들을 상대로 진료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는 밤이면 생활비를 벌 수 있었고, 알뜰하고 생활력이 강한 金씨는 졸지에 남편의 진료를 돕는 간호사 노릇을 하면서 한 푼 두 푼 들어오는 돈을 모았다. 그렇게 해서 申의원이 대위로 제대할 무렵에는 꽤 큰 몫돈을 만들었다. 덕분에 전역과 함께 서울 회현동에 살림집 겸 「동남치과」라는 병원을 낼 수 있었다.
 
  『말이 살림집이지 방 한 칸이 딸랑 달린 집이었습니다. 그것도 병원 한 귀퉁이에 임시로 만든 방이었죠. 그 방에서 진해에서 태어난 큰 애까지 세 식구가 함께 살았어요. 그래도 병원에 환자가 많아 힘든 줄 몰랐습니다. 나중에 들었는데 탤런트 金惠子(김혜자)씨도 경기여고 재학 당시 저희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병원에는 환자들로 넘쳤다. 그 중 반 이상은 연극 무대에서 함께 활동했던 선후배들이었다. 崔戊龍(최무룡), 尹一峰(윤일봉), 李樂薰 등 당시 연극과 영화계를 주름잡던 배우들은 치료를 핑계로 수시로 드나들며 옛 동지인 그에게 바람을 집어넣었다. 남의 썩은 치아 치료해 주느라 정작 자신의 재능은 썩히고 있다며 연극판으로 복귀할 것을 권유한 것이다.
 
  연기에 대한 열정을 가슴속에 담아 놓고 있던 그인지라 그들의 방문은 적지 않은 유혹이었다. 결국 그는 무대에 대한 동경 때문에 병원 진료 시간을 조금씩 줄이게 되었고, 부인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극 「삼일천하」에서 주인공 김옥균 역을 맡아 열연했다. 그리고 이 연극을 우연히 관람한 趙肯夏(조긍하) 감독의 권유로 1960년 黃順元(황순원)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과부」에 남자 주인공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여자 주인공은 당시 최정상의 자리에 올라 있던 李民子(이민자)씨였다.
 
   『남편이 작품에 출연한 것을 본 것은 「과부」가 처음이었어요.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고 좀 놀랐습니다. 남편은 연기자로서 이미 아마추어가 아니고 프로였기 때문이었죠. 영화가 끝났을 때 저는 「이 사람의 才能(재능)이 천부적이구나, 내가 아무리 반대해도 꺾을 수 없는 열정이 있구나」라고 중얼거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과부」가 상영되자마자 그는 순식간에 화제의 배우가 되었다. 기존 배우들과 달리 외모나 연기 양면에서 선이 굵고 강해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데다 서울大 치대 출신의 인텔리라는 점이 시너지 효과를 창출,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것이다.
 
  이후 출연 섭외가 물밀 듯이 밀려들어 데뷔 1년도 안 되어 그는 出世作(출세작)인 申相玉(신상옥) 감독의 「연산군」으로 1961년에 제정된 제1회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이 해에 그는 姜大振(강대진) 감독의 「馬夫」, 申相玉 감독의 「상록수」, 金基悳(김기덕) 감독의 「5人의 해병」, 金洙容(김수용) 감독의 「일편단심」 등 총 11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그리고 데뷔 2년째인 1961년에는 지금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무려 31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기록을 세웠다.
 
 
 
 『몸은 동태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흥행이나 작품성 면에서 한국 영화가 홍콩 영화를 훨씬 앞서고 있던 시절이기는 하지만 한 배우가 한 해에 출연한 작품이 서른 한 편이라고 하면 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죠. 그러나 저로서는 어쩔 수 없었어요. 신영균이 출연하지 않으면 지방 극장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며 영화 제작자들이 몇날 며칠이고 집에 와서 밤을 새우니 어떻게 합니까』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부인 金씨는 아예 코디네이터 겸 매니저로 나섰다. 그런 부인의 적극적인 내조 덕에 그는 의상이며 스케줄 문제는 물론 출연료 협상에서 수금까지 돈에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일체 신경 쓰지 않고 연기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3회 연속 수상한 것 외에도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2회나 수상했고, 청룡영화제와 백상예술대상에서 각각 남우주연상과 최우수 연기상을 3회, 2회씩 수상했다.
 
  『제가 영화계를 잠정적으로 은퇴한 게 1978년 金洙容 감독의 「화조」를 찍고 난 후예요. 그러니까 햇수로 19년 동안 배우 생활을 했는데, 그 기간에 출연한 작품이 총 300편이 넘습니다. 솔직히 그 중에는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작품도 많아요. 그래도 내게는 다 자식처럼 소중한 작품들인데, 그 중에서도 배우 申榮均의 자리를 확고하게 해주었던 「빨간 마후라」와 흥행 면에서 최고의 기록(관객 동원 45만 명)을 세운 「미워도 다시 한번」이 기억에 남네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던 제작 환경 때문에 겪었던 촬영 에피소드도 많았다. 가령 당시에는 촬영 전문 스튜디오가 없어서 세트를 허허 벌판에 만들어 놓고 찍는 일이 예사였다. 때문에 응접실 장면을 찍는 와중에도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뚫린 천장으로 그대로 새어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겨울에는 배우들의 입에서 허연 입김이 나와 촬영이 수시로 중단되곤 했다.
 
  『입김이 나올 경우 응급 처치 방법이 뭐였는지 아십니까? 배우들이 「레디 고」가 들어가기 직전까지 입에 얼음을 물고 있다가 뱉는 것이었어요. 그러면 입 안과 바깥의 온도가 같아져서 입김이 안 나오니까요. 그렇게 한 장면 한 장면을 촬영하고 나면 몸은 동태처럼 얼어붙어 있기 일쑤였죠. 지금 배우들은 아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겁니다』
 
 
 
 공포의 말타기
 
   그가 청춘 스타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1960년대에는 申相玉 감독의 영화 「연산군」이 흥행에서 크게 성공하자 史劇(사극) 영화 제작이 한창 붐을 이루었다.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고 氣槪(기개)가 넘치는 그는 당연히 史劇 영화 제작시 캐스팅 1순위 배우였다. 그러다 보니 史劇 전문 배우라 불릴 정도로 촬영 노하우가 생겼다. 그런데도 말 타는 장면만큼은 촬영 전날부터 미리 겁을 먹을 정도로 도무지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당시 영화 촬영에 사용되던 말은 요즘처럼 특수 훈련된 말이 아니라 그냥 競馬(경마)였어요. 그러다 보니 등에 올라타기만 하면 뛰는 바람에 죽을 고비를 한두 번 넘긴 게 아닙니다. 경복궁에서 촬영할 때는 타자마자 문간 쪽으로 쏜살처럼 뛰는 바람에 혼이 난 적도 있어요. 순간적으로 머리를 바짝 숙이지 않았다면 아마 목이 부러져서 반신 불수가 되거나 죽었을 거예요』
 
  차편 때문에 고생한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때는 차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유명 배우라 해도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또 있다 손치더라도 대부분 트럭을 개조한 차이거나 낡은 지프차를 수리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에어컨, 히터가 제대로 작동될 리가 없었다. 그래서 겨울엔 차 안에 석유 곤로를 싣고 다니면서 추위를 녹이곤 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청평 쪽에서 촬영을 하고 오는 길에 기사가 졸음 운전을 했던지 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했다. 곤로가 넘어졌는데도 차에 불은 붙지 않았다. 그런데 간신히 차에서 빠져 나온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건 차가 전복된 반대편의 경우 호수로 빠지는 천길 낭떠러지였다는 사실이었다.
 
  『金勝鎬(김승호) 선배와 「나그네」라는 영화를 촬영할 때는 팔당호에 빠져 죽을 뻔하기도 했어요. 노름만 아는 아들을 아버지가 배에 싣고 바다에 빠뜨리는 장면이었는데 겨울이라 물에 들어가면 춥다고 집사람이 몸에 비닐을 칭칭 감아준 게 문제였어요. 물에 빠지는 순간 물이 비닐 안으로 스며들어 몸이 천근 만근이더라구요. 거기다 몸이 얼어붙으니까 수영은커녕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습니다』
 
 
 
 사업가로 만들어 준 「알뜰한 당신」
 
  그렇게 고생해서 번 돈이라 부인 金씨로서는 한 푼도 헛되이 쓸 수 없었다. 또한 영화사에서 약속한 출연료는 어떻게 해서든 받아내곤 했다.
 
  『그때는 영화 제작 여건이 워낙 열악해서 출연료를 처음 계약금만 현금으로 받고 나머지는 2~3개월짜리 당좌수표로 주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이 당좌수표라는 게 촬영이 끝나기 전에 현금으로 챙겨 받지 않으면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아 계약금 외에는 전혀 받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저 같은 경우 한 달 내내 고생하고도 겨우 계약금만 받는 일을 몇 번 겪고 나니까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아예 장부를 만들어 언제 계약금을 받았고, 언제 원금을 받아야 하는지를 제가 꼼꼼하게 기록해 놓고 촬영이 끝나기 전에 정확하게 받아내곤 했지요』
 
  당시 그의 출연료는 편당 70만원 정도. 집 한 채 값이 400만~500만원 할 때니까 지금 잘 나가는 톱스타들이 받는 개런티에 비하면 그렇게 많은 액수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부인이 5년 동안 알뜰하게 차곡차곡 모아 놓으니 꽤 많은 돈이 되었다. 그는 이 돈으로 서울 금호동에 있는 금호극장을 인수했다. 사업의 첫 삽을 뜬 것이다.
 
  『배우만 한 제가 사업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겠어요. 극장을 인수한 건 제 손위 동서가 경기도 금촌에서 극장을 운영했는데 TV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꽤 잘되고 있었던 데다 함께 동업하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동업자가 마침 저와 고향도 같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어서 6 對 4로 투자를 했죠』
 
  극장은 그럭저럭 잘 운영되었다. 그가 한 해 동안 받는 출연료보다 극장에서 벌어들이는 한 달 수익이 더 많았다. 부인 金씨는 극장 수익금과 그의 출연료를 모아 이번에는 을지로에 있는 명보제과 건물을 인수했다. 점포가 여러 개 있던 이 빌딩은 담보 잡힌 게 많아 실제 주인에게 지불한 돈은 600만원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당시 집 한 채 값으로 빌딩 하나를 인수한 셈이다.
 
  『제과점이 50평 규모였는데 누구한테 맡기고 싶어도 맡길 사람이 없더군요. 그래서 제가 직접 운영했어요. 배우면 못 할 것도 없겠다 싶었던 거죠. 열심히 해서 그런지 장사는 상당히 잘 되었고, 몇 년 안에 담보 잡혀 있던 점포도 하나 하나 찾았어요』
 
  태극당, 뉴욕제과, 풍년제과 등과 함께 1960~1970년대 4대 제과점으로 지칭되었던 명보제과를 金씨는 25년 동안이나 운영했다. 케이크가 없어서 못 파는 크리스마스 시즌 때면 아이들까지 동원했는데, 아이들은 그럴 때면 『엄마는 놀 때 놀지 못하는 장사를 해 가지고 우리를 힘들게 한다』며 은근히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고 한다. 그래도 아이들은 열심히 도왔고, 그 경험이 밑거름이 되어 아들 彦植(언식)씨의 경우 한국 맥도날드 경영주가 되었으니 金씨는 남아도 한참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제과점에서 나온 수익금으로 명보극장까지 인수했습니다. 경영이라는 게 어려운 것으로만 알았는데 하나하나 배우다 보니 나름대로 재미있더라구요. 그래서 힘든 줄 모르고 했습니다. 현재의 명보극장은 제과점 건물과 옛날 명보극장 자리를 합쳐서 신축한 거니까 제가 흘린 땀도 많이 들어갔다고 보면 됩니다』
 
  조금씩 조금씩 영화 사업에 재미를 붙여 가던 申의원이 제주도 남원에 땅을 사기 시작한 것은 申相玉 감독의 영화 「마적」이 상영되던 1967년 무렵. 이 영화의 촬영지가 제주도여서 오랫동안 제주도에 머물렀던 그는 그곳 風光(풍광)에 반했다. 그래서 촬영이 끝나고 노후에 내려와서 살 만한 곳을 물색하던 중 남원의 해안경승지와 맞닿아 있는 3만여 평의 아름다운 땅을 발견했고, 그 땅을 수년에 걸쳐 조금씩 사들였다.
 
  『밭으로 일구어져 있던 곳은 평당 5000원에, 임야로 있던 곳은 평당 500원에 구입했어요. 당시만 해도 남원 일대는 관광지로 개발되기 전이어서 다른 곳에 비하면 땅값이 싼 편이었습니다』
 
 
 
 20년간 200억원 들인 박물관
 
   30년 넘게 귀한 자식을 다루듯 온갖 공을 다 들인 탓일까. 신영영화박물관이 들어선 이 곳은 이제 금싸라기 땅이 되었다. 이웃 주민들에 의하면 관광특구로 지정된 곳이어서 최소한 평당 100만원은 넘을 거라고 한다.
 
  물론 그는 땅 시세에 관심이 없다. 땅을 팔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그 동안 박물관에 들인 돈만 해도 200억원이 넘는다. 최소한 투기를 목적으로 땅을 산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박물관을 개관하기 전까지는 지역 주민들로부터 이런저런 오해를 많이 샀다.
 
  『박물관을 개관하기까지는 20여 년의 세월이 소요되었어요. 영화 관련 자료를 구하느라 개관 시기가 자꾸만 늦춰지다 그렇게 된 거죠. 남들은 대충해서 오픈하라고 했지만 한번 하기로 마음 먹은 건 확실하고 완벽하게 해야 하는 게 제 성격이어서 그렇게 얼기설기로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개관 시기를 조금씩 연기했는데, 그게 지역 주민들에게는 아마 뭔가 다른 꿍꿍이 속이 있는 것으로 보였나 봐요.
 
  제주도와 인연을 맺은 게 벌써 30년이 넘었는데, 그 동안 저희는 단 한 푼의 이익금도 손에 쥐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서울 사업체에서 번 돈을 계속해서 제주도에 투자해 왔죠』
 
  이에 대한 얘기는 현재 신영영화박물관장으로 있는 李德祥(이덕상ㆍ50)씨로부터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우선 박물관 관람료 수입이 적자도 흑자도 아닌 현상 유지 수준이라고 일러 주었다. 그리고 전국에 산재해 있는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박물관 중 적자를 내지 않는 곳은 겨우 1%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아울러 申의원이 그 동안 박물관에 쏟아부은 정성은 돈과 비교할 것이 못 된다고 했다.
 
  『3만여 평이나 되는 박물관 부지의 造景(조경)을 회장님이 직접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곳은 원래 암반이 많아 나무나 잔디를 가꾸기 힘든 곳이었어요. 때문에 한 트럭에 7만~8만원씩 하는 흙을 수백 트럭 사다가 암반을 덮은 후 나무를 심고 잔디를 입혔는데, 그러는 동안 들어간 돈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돈보다 더 값진 땀과 정성은 또 얼마나 들어갔게요』
 
  申의원은 「식물 박사」라고 할 정도로 나무나 화초를 심고 가꾸는 데 일가견이 있다. 그 덕분에 개관 10년도 안 된 박물관 주위에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잡목 숲에 흩어져 있던 걸 보기 좋게 옮겨 심은 동백의 경우 100년 이상 된 고목이 즐비하다.
 
  『남편은 제주도에 오면 사람보다 나무들의 안부를 먼저 챙기는 분이에요.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불면 뭐라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아, 나무들은 시원하고 배불러서 좋겠다」며 당신이 더 행복해 합니다. 배우로 활동할 때도 남편의 나무 사랑은 알아주었어요. 나무나 화초를 가꾸는 게 유일한 휴식이자 취미였으니까요. 틈만 나면 전지 가위를 들고 나무들을 가꾸어 서울 고덕동 집에도 예쁜 나무들이 참 많아요』
 
 
 
 『왜 여당 정치인으로 활동하기를 꺼려합니까』
 
   명보극장 경영과 박물관 건립에 온 정성을 쏟고 있던 그가 정치 쪽에 발을 디딘 건 지난 88년 13代 국회의원 총선 때였다. 자의가 아닌 他意(타의)에 의해 서울 성동丙 지역구 민정당 후보로 출마한 이 선거에서 그는 당시 5選의원이었던 민주당 朴容萬(박용만) 의원에게 1300여 표 차로 석패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무모한 싸움이었어요. 선거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에 출마 선언을 했으니 말 다했죠 뭐. 그것도 정치 경험이 전무한 제가 조직도 꾸리지 않은 채 선거 운동을 했으니 당선되었다면 아마 이변도 그런 이변이 없었을 겁니다』
 
  盧泰愚(노태우) 정권 시절이었는데, 당시 서울 지역은 야당 밭이나 다름 없었어요. 때문에 확실한 사람이 아니면 여당이 승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힘든 상황이었죠. 그런데다 지역구를 여러 개로 나눈 해여서 여당으로서는 후보로 공천할 만한 사람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공천을 받은 것이어서 당연하게 거절했어요. 그랬더니 당시 청와대에 있던 洪性澈(홍성철) 비서실장으로부터 한번 만나자는 전화가 왔더군요』
 
  洪性澈 비서실장은 그가 황해도민회 부회장으로 있을 때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걸 인연으로 안양의 한 골프장에서 만난 洪비서실장은 그에게 출마하면 어느 누구보다 승산이 있는 후보가 될 테니 결심을 굳혀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물론 그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자정이 한참 넘은 시각에 안기부로부터 전화가 왔다. 안기부(現 국정원) 고위 간부인 그는 앞뒤 설명 없이 그냥 『왜 여당 정치인으로 활동하기를 꺼려합니까』라고만 했다. 일종의 협박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그런 게 통하던 시절이어서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출마하게 되었다.
 
  『집사람은 배우 한다고 했을 때보다 더 심하게 반대했어요. 조용히 사업이나 하며 살 일이지 왜 시장 바닥 같은 정치판에 나서려 하느냐는 거였죠』
 
  이미 결정난 事案(사안)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자는 게 그의 인생 철학. 타의에 의한 강제적인 출마였고 조직도 갖추어지지 않았지만 그는 나름대로 열심히 뛰었다.
 
  『며느리를 마치 제가 숨겨 놓은 여자인 것처럼 몰아붙이고 비방하는 데는 뭐라 할 말이 없더군요. 시작도 하기 전에 정치에 환멸을 가질 정도였어요. 당락을 떠나서 두 번 다시는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리라 결심했습니다』
 
  그는 조직이 없는 관계로 다른 후보에 비해 선거 비용도 훨씬 많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힘들게 모은 재산이 많이 헐렸다. 이때 선거 비용으로 들어간 돈이 어림 잡아 20여억 원은 된다고 한다.
 
 
 
 꼼꼼한 국회의원
 
   그런 그가 다시 정치에 발을 들여 놓게 된 건 1996년 15代 총선 직후였다. 당시 그는 1993년에 당선된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藝總) 회장직을 연임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金泳三 당시 대통령은 전국구 의석을 그에게 맡겼다.
 
  『13代 총선에서 낙선한 이후 나름대로 결심한 게 있었지만 비례 대표라면 복마전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의원직을 기쁘게 수락했습니다. 우리 문화 예술의 발전과 부흥을 위해서는 현장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좀더 현실적인 정책을 많이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거든요』
 
  국회 입성 후 申의원은 국회문화예술연구회를 결성, 그 해 7월에 62명의 국회의원들과 함께 창립 총회를 가졌다. 국회의원들을 회원으로 하는 이 모임의 취지는 경제 개발 논리에 밀려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온 문화 예술 분야의 활성화를 위해 함께 고민하고 연구하자는 것이었다.
 
  창립 모임 후 그가 첫 번째로 주관한 행사는 정기 국회 개회식 날 정동 극장에서 가진 「국회 문화 예술의 밤」이었다. 의원들의 문화 현장 체험을 위해 국악과 뮤지컬 관람으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는 299명의 전체 의원을 부부 동반으로 초청, 與野를 막론하고 가장 많은 의원들이 참석하는 기록을 세웠다.
 
  金大中 정권 이전까지 예총회장을 겸임했던 그는 문화예술인들의 현실적 고충을 대변하는 의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국정감사에서도 그는 돋보인 전국구 의원이었다. 문화관광委 소속인 그는 폭로성 질의나 한건주의식 발언 대신 다양한 설문 조사와 분석 및 구체적인 사례로 문화관광 정책의 허점을 지적했다.
 
  그는 16代에서도 전국구를 맡아 올해로 의원 생활 7년째이다. 2002년 大選 당시 李會昌(이회창) 후보를 도와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던 그는 李후보의 낙선으로 사실 좀 기운이 빠졌다. 게다가 나이도 나이인지라 이번 임기를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영화든 사업이든 정치든 이제 인생을 마무리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저희 부부는 아직 제대로 된 여행 한번 다녀오지 못했어요. 내년 5월로 임기가 끝나니까 그 이후에는 그 동안 가고 싶었던 여행을 떠날까 합니다. 여행도 움직일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인데, 나이로만 치면 우린 벌써 늦었지요』
 
 
 
 3년 후 金婚式 치를 예정
 
   부인 金善姬씨와는 1956년에 결혼했으니까 올해로 결혼 생활 47년째다. 앞으로 3년 후면 금혼식이니 그야말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해로하고 있는 셈이다.
 
  『평생 고생만 시킨 것 같아 미안해요. 살면서 결혼 기념일은커녕 생일도 한 번 제대로 챙겨 주지 못했으니 남편으로서는 0점짜리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금혼식 때 그 동안 영화다 사업이다 해서 못 해주었던 것들 다해줄 생각입니다. 모범적인 家長이라고 제게 주례를 부탁했던 부부들도 빠짐없이 초청할 거고요』
 
  申의원 부부가 銀婚式(은혼식)을 치를 무렵 주례를 섰던 커플이 배우 李瑩河(이영하)·鮮于銀淑(선우은숙) 부부다. 그러고 보면 이들 부부도 어느덧 은혼식을 치를 때가 다 되었다. 「한 집 걸러 이혼」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으리 만치 이혼이 흔한 시대에 자신이 주례를 선 부부가 오랫동안 탈 없이 사는 모습을 보면 그는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꽤 많은 커플의 주례를 섰는데 아직까지 이혼한 부부 없이 모두 다 잘 살고 있습니다. 柳東根(유동근)·錢忍和(전인화) 부부도 그렇고, 李美淑(이미숙)·洪聖鎬(홍성호) 부부도 그렇고…』
 
  요즘은 이들 연예인처럼 10년만 잡음 없이 살아도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결혼 5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스캔들 한 번 없는 申의원 부부는 천연기념물감이지 않을까 싶다. 영화계 데뷔 전에 벌써 결혼한 유부남 스타로 어쩌면 구설수에 오르기 딱 좋은 여건이었는데도 언론의 「먹이감」이 되지 않았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데뷔할 때부터 은퇴할 때까지 배우로서 갖고 있던 저의 주관은 하나였습니다. 「유명한 배우일수록 스캔들이 있으면 생명은 짧아진다」는 것이었죠. 이런 생각을 갖게 된 데는 당시 톱스타였던 몇 명의 배우들이 서너 번씩 결혼하고 이혼했지만 결국은 모두 불행한 말로를 걸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안전 장치는 아내를 사랑하는 저의 마음이 항상 같았다는 거였지요』
 
 
 
 여배우 자살 사건
 
  그러나 50년 가까이 산 부부 사이가 연애 시절처럼 항상 좋을 수만은 없었다. 사소한 일로 토닥토닥하는 일이야 여느 부부처럼 노상 있는 일이었고, 서로에게 서운했던 적도 몇 번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스캔들 없는 배우」로 이미지 관리를 잘 해 오던 申의원의 명예에 타격을 줄 뻔하기도 했다.
 
  『제게 세 번째 대종상 남우주연상의 영예를 안겨 주었던 영화 「달기」를 찍고 난 후였습니다. 이 작품은 홍콩과 합작한 영화여서 제 상대역이 당시 「홍콩의 金之美」로 불렸던 린따이라는 여배우였는데, 촬영이 끝나고 얼마 안 되어 자살했습니다. 이걸 모 신문이 신영균과 사랑을 이루지 못해 자살했다고 대문짝 만하게 보도하는 바람에 대한민국이 들썩거렸죠. 곧 오보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누명은 벗었습니다만 기분이 좋지는 않더군요』
 
  뜻하지 않게 벌어진 이 소동은 부인 金씨의 적극적인 해명으로 오해가 풀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申의원은 해외에 나갈 일이 있으면 항상 부인과 동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때문에 홍콩 로케 당시에도 부부 동반이었고, 영화 촬영 내내 부인이 그를 그림자처럼 수행했다.
 
  『홍콩에 체류하는 동안 린따이와는 제가 더 친하게 지냈어요. 촬영 틈틈이 밥도 함께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자신의 남편과 사이가 안 좋다며 우울해 하기에 제가 위로해 주곤 했지요. 그런데도 두 사람 사이를 오해한 기사가 대서특필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니까 괜히 섭섭하고 속상하더라구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아는데 말입니다』
 
  그의 휴식 시간은 친한 정계 인사들과 골프를 치거나 박물관 정원에 심어놓은 나무를 가꿀 때이다. 인터뷰를 하기로 한 날에도 그는 새벽같이 일어나 목장갑을 낀 채 잔디에 물을 주고 전지 가위로 나뭇가지를 자르고 있었다.
 
 
 
 老人 역 해보고 싶다
 
  『花草나 나무들도 주인을 알아봅니다. 주인이 게으르면 벌써 시들시들해져요』
 
  그가 박물관 주변을 정리하는 동안 부인 金씨는 아침을 차렸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새벽 5시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는 부부의 아침 식단은 우유에 토마토를 갈아넣은 주스와 떡이었고, 後食은 과일이었다.
 
  申의원 부부는 슬하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아들 彦植씨는 서강大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에서 MBA(Master of Business Administration·경영관리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고, 딸 惠珍(혜진)씨는 서울예고를 졸업한 후 어머니의 모교인 이화여대에서 하프를 전공했다. 사위는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경영에 관한 한 아들이 저보다 훨씬 더 전문가입니다. 지금 운영하고 있는 한국 맥도날드의 경우 초기에 인수해 직영점을 무려 200개로 늘렸을 정도로 마케팅에 일가견이 있는 아이죠. 최근에는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다이어트 클리닉 센터를 제주도 중문에 열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저는 두뇌 회전이 빠른 아들아이를 보면서 내가 물러나야 할 때를 정한 사람이에요』
 
  申의원의 바람은 이제 하나다. 30년 넘게 떠나온 스크린으로 복귀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의사, 배우, 사업가, 정치인의 길을 걸으며 쌓은 삶의 이력 때문일까. 그는 인생을 관조할 수 있는 노인 역을 한번 멋들어지게 소화하고 싶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도 그렇지만 지금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헤밍웨이 원작의 「老人과 바다」이고, 가장 존경하는 배우는 그 영화에 출연했던 스펜서 트레이시입니다. 그 작품처럼 소년과 노인이 동시에 공감할 수 있는, 순수하면서도 인생의 깊이가 밴 그런 영화를 마지막 작품으로 남기는 게 제 꿈입니다』
 
  生의 다양한 길목을 돌고 돌아온 그가 마지막으로 정착할 곳은 역시 마음의 고향이었던 영화였다. 그가 生의 마지막 소원을 성취해 우리 앞에 진정한 노년의 스타로 다시 서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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