臨政시절 백범金九의 은신처탐방기

중국 정부, 金九 선생 피난처 「지방 史蹟地」로 지정, 「지방 史蹟地」로 지정, 항일투쟁 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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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容相 시인
1924년 서울 출생. 고려대·육군사관학교 졸업. 문공부 예술국장. 국립극장장.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상임이사 역임.
우리들이 잘 아는 바 중국의 孫文(호 中山)은 莊介石(장개석)이 영도하는 국민당에서나, 毛澤東의 공산당에서나 그 어느 쪽에서도 國父(국부)로서 대접받던 최고의 지도자였다. 우리나라에서 국부라는 칭호를 붙인다면 누가 있을까. 북한에서 「어버이 金日成 수령」은 「어버이」로서의 국부로, 「수령」으로서의 종교적 신격화로 북한쪽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음(그것이 세뇌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은 누구나 알고 있으나, 남쪽에서는 李承晩(이승만) 혹은 金九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연코 金九를 존경한다. 우리나라 잘난 사람의 표준은 언제부터인지 영어 잘하고 박사를 딴 사람으로 돼 있는데, 金九는 박사도 아니고 영어도 못했지만 나는 단연코 金九 편이다.
 
 
 
 왜 金九인가.
 
  대통령이나 주석같은 자리와는 초연스럽게 『우리 나라가 독립이 되면 우리 정부 문지기가 되는 것이 나의 바람』이라던 金九 선생!
 
  그 金九에게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그리고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두 여인이 있었다. 결코 숨겨 놓은 여인은 아니었다. 우리들이 아직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 두 여인이란 金九가 일제관헌에게 체포령을 받고 쫓겨다닐 때 생명을 걸고 金九를 도피시켜주고 또 숨겨줬던 중국여인들이었다.
 
  당시 金九 목에는 6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60만 달러는 지금도 큰 돈이지만 70년 전에 그 돈의 가치는 현기증이 날 아득한 액수가 아니던가. 돈에 탐이 난 일본 스파이들, 중국 스파이들, 조선 스파이들 할 것 없이 우리 임시 정부가 있던 상해의 프랑스 조계(외국인이 자유로이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 일대에는 각국 스파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金九 잡기에 나선 상황이었다.
 
  나라가 해방된 이후 金九는 자기를 잡으려던 이들 중 조선인 스파이가 가장 발악적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1932년 당시 金九는 우리 임시 정부와는 또 다른 모임을 비밀리에 조직, 양성하고 있었다. 그 이름은 「한인애국단」.
 
  일제는 날로 강해지고 포악해지고 있었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했고 북지에 쳐들어 왔고 상해사변을 일으키더니 이제는 상해를 발판으로 중지까지 먹으려하지 않는가. 대국을 자랑했던 중국이 하찮은 섬나라 일본에게 당하는 것도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지만 중국이 이 꼴이면 우리 조선독립은 점점 요원해지는 것은 뻔한 이치였다.
 
  이러한 긴박한 입장에서 金九는 외교수단을 앞세워 세계여론에 호소하고자 했던 임시정부의 독립방법과는 달리,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암살·파괴 등 적극적인 투쟁을 감행하되 그 비용과 인물 선택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자기가 하겠다고 임시정부에서 全權을 얻게 되었다.
 
  그 첫 공작이 1932년 1월8일. 일본 동경에서 있었던 李奉昌(이봉창)의 일본천황 암살폭탄사건이고, 그 다음이 4월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있었던 尹奉吉(윤봉길)의 폭탄 투척 사건이었다.
 
  두 義士의 거사는 안하무인격으로 만주와 대륙을 짓밟으며 한참 우쭐했던 일제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알고 보니 이봉창 열사나 윤봉길 의사는 모두 한인 애국단 단원이었고, 그 애국단 단장은 바로 임시정부 국무령 겸 상해 한인거류민단장인 金九가 아니었던가.
 
  일제로서는 金九를 잡아 능지처참을 해도 풀리지 않을 분통이었다. 金九는 이런 사정으로 겹겹이 둘러 싸인 놈들의 포위망을 뚫고 결사적인 상해탈출에 나섰던 것이다.
 
  金九가 망명하여 은신한 곳은 가흥(嘉興)市.
 
  金九선생께서 일본군경에게 쫓겨다녔던 「그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탐방여행」을 위해 나는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혼자서 중국으로 떠났었다.
 
  내가 떠나기 전날 金信(金九 선생의 아들·전 공군참모총장) 장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는데 상해비행장에 내리면 나를 마중 나올 사람이 있을 거란다. 과연 상해공항에는 「대한민국 이용상 환영」이라고 쓴 현수막을 든 남녀가 있었다. 늘씬한 키에 검은 안경을 낀 30代 미녀는 가흥일보 문화부장 夏贊生(하찬생). 그녀의 명함을 받아보니 그는 신문기자라기보다는 아동문학가로서 중국작가협회 회원이었다. 또 한 남자는 자싱시 인민정부 운전기사.
 
 
 
 중국인들의 金九사랑
 
  상해에서 가흥시까지는 자동차로 1시간 40분 거리라고 했다. 가흥시는 金九의 1차 피신처다.
 
  1932년 당시 金九가 결사적으로 상해를 빠져나와 가흥 은신처까지 가는데 기차로 10시간이 걸렸다는데 1시간 4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니 나는 잘 납득할 수 없었다. 아무튼 내가 탄 차는 가흥시를 향해 남으로 달렸다. 오늘 아침 꽁꽁 얼어붙은 성남을 떠나왔는데 북위 31도인 이곳 기후는 구름 한 점 없고 따뜻하다. 옛 중국 詩文에 「天上有天堂(하늘 위에는 천당이 있고) 天下有蘇抗(하늘 아래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바로 그 소주와 항주의 중간지점을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얼마 후 도착한 가흥시는 아담한 호반의 도시였다. 인구는 70만이란다. 그런데 넓고 넓은 중국 땅에서 金九는 무슨 인연으로 이곳에 몸을 피했을까. 그리고 당시 상해에서 거미줄처럼 펼쳐진 일본군 포위망을 어떻게 뚫고 나왔을까.
 
  지면관계로 조목조목 밝힐 수는 없지만 金九는 평소 임시정부를 동정했던 미국인 목사 費吾生(George. A. Fitch)의 집에 20일 간 숨어 있었으나 그곳까지 일본 군경의 손이 뻗치자 費목사가 운전하는 자동차로 대문을 부수며 포위망을 빠져나온 것이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임시정부요인 박찬익이 일찍부터 장개석의 국민당 당원으로 활약하면서 중국 요로와는 아주 친근했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로 1932년 4월29일 尹奉吉 폭탄거사가 있던 직후, 조만간 임시정부에 닥쳐올 위기를 짐작하고 절강성 성장대리에게 미리부터 은신처를 부탁해 두었던 것이다.
 
  박찬익은 후일 金九와 莊介石과의 비밀회담을 알선했는데 1933년 남경 중국 사관학교 안에 있는 莊介石의 관사에서 이루어진 비밀회담 후부터 莊介石은 물심양면으로 우리 임시 정부를 도운 것이다. 金九가 1919년 중국망명후 15년 만에 처음 있었던 莊介石과의 면담이었다. 이날 지하에 묻힌 이봉창과 윤봉길은 자기들의 殺身成人에 크게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도착한 그날 밤 市 인민정부 초대소에서 부시장 氾巴陵 여사가 베푸는 만찬에 참석했다. 교양미가 넘치는 50代의 그녀는 대외문화교류협회 회장이기도 했다. 氾여사는 현재 전국인민대표·가흥지역 주임직이었다.
 
  만찬회에 모인 신사숙녀들은 『金九주석과 가흥시의 관계는 중국과 한국과의 끊을 수 없는 우호와 의리의 상징이자 표본』이라며, 『金九주석과 임정요인들이 가흥시에 피신하여 무사히 위기를 넘겼기 때문에 오늘날 대한민국 법통이 중단없이 유지된 것이다』며 가흥市를 내세웠다. 그러고 보니 과연 우리 헌법전문에 있는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법통을 이어받아』라는 구절을 새삼스럽게 떠올리다가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는 생각을 했었다.
 
  金九와 蔣介石은 아주 단짝이었다. 그리고 金日成과 중공 역시 예나 지금이나 아주 단짝이다. 반대로 蔣介石은 毛澤東과는 아주 앙숙이었다. 그러면 金九와 북경정부와도 앙숙이어야 맞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 지금 만찬에 모인 이 사람들은 金九와 임시정부가 자기 고장에 와 있었다는 것을 기념하고 있으며, 자기들이 이곳에서 우리 臨政을 보호했다는 것을 뜻깊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것은 무엇을 뜻하며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야간도주 가능토록 도와줘
 
  나는 그날 밤 인사말에서 『본인도 50여년 전 중국 호남성에서 유격대원으로서 항일전에 참가한 사람이다』고 했다. 모두는 박수를 치면서 동지로서의 축배를 내게 권했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대륙유격대원이라면 최고로 여겨준다. 다음날 이번 여행목적지인 金九 은신처에 간다고 생각하니 흥분됐는지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가흥市 도착 이틀째(2000년 12월10일). 나는 드디어 64년 前 金九가 상해에서 도망쳐 이곳에 와서(1932년 5월 하순) 숨어살던 비밀가옥 앞에 섰다.
 
  기흥시 매만가 76의 4번지. 金九가 은신했던 2층 방문에 「대한민국 金九선생 항일시기 피난처」라는 간판이 단정하게 붙어있었다. 네 칸 정도 크기의 이층방. 벽에는 金九사진과 나란히 이곳을 피난처로 알선해준 당시 절강성장의 사진도 걸려있다. 그런데 실지로 이집 주인은 저씨가 아니라 저씨의 수양아들 진동손씨다. 바로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강물은 호수인지 하천인지 구별할 수 없었으나, 나를 안내하는 신문사 문화부장 하찬생은 『저 물위에 작은 배를 띄워놓고, 주애보는 밤새 기다렸다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일본스파이를 피해 낮이면 金九는 주애보가 노를 젓는 배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피신했으므로, 밤이면 숙소로 돌아왔는데, 만일의 경우 밤에 무슨 변이 있을 것을 대비하여 주애보는 숙소앞에 배를 대놓고 기다렸다』고 설명해준다.
 
  이때 이 집을 관리하는 직원이 허리를 구부리더니 살짝 마루 한 쪽을 들어올리면서 날더러 밑을 보라고 했다. 과연 들어올린 마루청 밑은 깜깜한데 하얀 물체가 보였다. 그것은 아주 튼튼하게 만든 사다리였다. 즉, 밤중이라도 밖에 이상한 기색이 있으면, 金九는 마루청을 열고 이 비상구를 통해서 주애보가 기다리고 있는 배를 타고 어디로든 도피할 수 있게끔 중국인들은 이웃나라의 혁명지도자를 이토록 세삼하게 보호했던 것이다.
 
  다음날(12월11일) 아침 하찬생 문화부장과 풍정곡 부주임의 안내로 나는 멀리 태평양이 바라보이는 하이엔으로 갔다. 이곳에서 산을 하나 넘어가면 金九의 제2차 은신처가 있다기에 온 것이다. 가흥을 출발 이곳까지 오는 80분 간, 나는 50년 前에 보았던 정겨운 중국 농촌풍경을 볼 수 없어 섭섭했다. 야트막한 초가 앞 연못에는 물오리가 헤엄치고 노는 풍경은 중국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하나의 향수였는데, 옛날과 같은 정겨운 초가는 없고 모두가 말쑥한 2층 기와집들 뿐이었다. 이 고장은 魚米의 고장(漁米之鄕)으로 부업의 수입도 좋아서 부자마을이라는 것이다. 집단농장제도가 폐지되고 이제는 모두 自營으로 성공한 것이다. 너무도 말쑥하고 위생적이어서 나는 미국 여류 작가 펄벅이 쓴 「大地」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파리가 없는 중국농촌이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는 그 구절 말이다.
 
  이곳은 市가 아니라 市보다는 좀더 시골인 현이다. 우리의 군과 같다. 일본 사람 이상으로 절도 있고 싹싹한 심여가 부현장과 보문달 주임 등 여러 간부들과 오찬을 하고 우리들은 金九 제2의 은신처로 떠났다.
 
 
 
 金九의 생명을 구해준 저부인
 
  은신처로 가는 산길은 주위가 모두 다 밭(茶園)이고, 유난히 자갈이 많았다. 68년 前 金九가 넘어갔던 바로 그 산길이다.
 
  당시 金九는 제1의 은신처를 냄새맡은 일본첩자들 때문에 위험해지자, 저보성의 장남인 저한추씨와 의논하여 이곳 해염으로 온 것이다. 해염에는 저항추씨의 처가가 있었는데, 이 지방에서는 제일가는 부자요, 제일가는 덕망가였다.
 
  저한추씨는 자기 부인 주기여를 金九 부인으로 가장시켜 金九와 단둘이만 이곳으로 보낸 것이다, 가흥을 떠난 두 사람이 이곳까지 오는데는 배를 타고 만 하루 걸렸다. 도착하던 날은 저한추씨 처가 즉 주가예의 친정집에 갔고, 다음날 金九는 지금 필자가 넘고 있는 이 자갈길을 저한추씨 부인과 하녀 세 사람이 넘어갔던 것이다. 그때의 심정을 金九는 「백범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씨 집에서 하루 밤을 묵고 기차를 타고 노리언에서 하차하여 산령까지 오륙 리를 걸었다. 저부인은 하이힐 구두를 신고 칠팔월의 염천에 친정 하녀에게 나의 식료와 각종 물품을 들려 가지고,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산고개를 넘는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활동사진 기구라도 있다면 내 일행의 이 행보를 찍어서 영구적인 기념으로 만세자손에게 전할 마음이 간절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후일 우리 국가가 독립이 된다면, 저부인의 용감과 친절을 우리 자손이나 동포들이 그 누군들 공경하고 우러러 사모하지 않으랴. 활동사진은 찍어두지 못하나, 글로라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성남市 모란 상인들의 성금으로…
 
  산꼭대기에 저부인 친정에서 지어놓은(이 일대는 모두 저부인 부친의 땅이다) 영안정이란 정자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金九와 저씨 부인이 도망자의 신분을 잠시 잊고 역사의 노곤함으로부터 해방의 공간으로 삼았던 유서 깊은 정자이다. 그러나 그들이 휴식의 달콤함을 느끼기에는 폐허의 스산함이 너무 컸다. 우리의 망각만큼이나 기왓장은 무너져 내렸고 주변의 풍광도 삭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리의 지방자치단체들은 역사의 고리를 연결할 수있는 작은 단서 하나라도 부풀리고 확대해석하여 가꾸고 다듬기를 과시하는데 비하여 비록 문화상품이 되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멀리 있다하여 100년도 안 된 귀중한 역사의 유적이 이렇게 방치되어서야 되겠는가. 이것만이라도 우리 손으로 복원해 韓中 간의 친선을 돈독히 하고, 金九 선생의 뜻을 알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하였다.
 
  답답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시 걷기 시작하여 얼마 동안을 갔더니 산중턱에 양옥 한 채가 보였다. 저부인의 친정아버지의 여름별장이었다. 즉 金九가 기식하던 피난처인데 지금도 그 때 金九가 쓰던 침대가 보관되어 있다. 이 사적은 그 동안 우리정부의 무관심 속에 그대로 방치되었지만 중국 정부는 1996년 10월10일 가흥시와 하이엔에 있는 金九 선생의 피신처를 「지방역사유적지」로 지정, 기념행사와 더불어 金九 선생의 항일투쟁을 기리고 있다.
 
  金九 선생의 피난처에는 「대한민국 金九 선생 항일시기 피난처(大韓民國 金九先生 抗日時期 避難處)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당시 기념식에 한국에서는 金信씨 이외에는 한 사람도 참석치 못했다. 이를 두고 중국인들 사이에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하는데 金九 선생이 한국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아닌가보다』라는 말이 나왔으며, 이 소식은 나의 가슴에 못이 되었다.
 
  고국에 다시 돌아와 나는 영안정 보수비용을 마련하는 데 여러 분들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성남市 모란상인회의 헌신적이고 감동적인 노력이 큰 힘이 되었다. 그들은 재래상인 5일장을 돌며 생계를 꾸려 가는 바쁘고 빠듯한 일상 속에서도 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직접 상인회의 기금을 내기도 하고 바자회를 조직하여 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성남市도 기꺼이 동참하여 작년 11월에는 1400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기금을 가흥시에 보수기금으로 전달하게 되었다. 드디어 지난 4월5일에는 영안정 중건 낙성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하이엔 현장등 현지의 관리 시민 성남의 시장 등이 함께한 이 역사적이고 감동적인 현장에서 역사로서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하는 白凡의 뜻을 마주하는 벅찬 감동에 목이 메었다. 역사와 단절된 개인이나 국가의 천박함은 미적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의 문제가 됨을 다시 깊이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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