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연구] 영원한 現役 권이혁의 감투哲學

  • : 최보식  cong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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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의대 학장-서울대 병원장-서울대 총장-문교부 장관-교원대 총장-보사부 장관-녹십자 회장-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환경처 장관-학술원 회장-성균관대 이사장…
『노력한 만큼 안돼』
 
  무례한 것이 아닌가. 권이혁 선생에 대해 「감투 인생」이라고 기자는 표현한 적이 있다. 기자가 제대 후 복학생이 됐을 때 그는 母校(모교)인 서울대의 총장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나이로 치면 喜壽(희수·77)다. 고령의 나이에도 성균관대 이사장, (주)녹십자 고문이라는 감투를 그는 여전히 쓰고 있다. 半평생 동안 그는 줄곧 장(長)의 자리에 앉아왔던 인물이다. 서울대 의대 학장-서울대 병원장-서울대 총장-문교부 장관-교원대 총장-보사부 장관-녹십자 회장-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환경처 장관-학술원 회장-성균관대 이사장으로, 한 자리가 끝났다 싶으면 쉴 틈 없이 다른 자리가 그를 불렀다.
 
  한번은 장관을 했던 모 인사에게 『장관직에서 물러나면 기분이 어떤가』라고 묻자, 그는 『언제까지 쉬어야 할지 모르니 정말 막막하지. 집사람에게 눈치가 보여 복도로 나가 담배를 피울 때도 있다』고 했다. 장관도 재직할 때나 장관이지, 물러나면 영락없이 궁색해진다는 뜻이다. 권이혁 선생에게는 이런 법칙조차 적용되지 않았다.
 
  진급에 한번 누락돼도 痛飮(통음)하면서 어깨 처지는 남자의 세계에서, 그는 절실한 연구 대상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에게 감투 인생의 비결이 뭐냐고 묻자, 그는 싱겁게 대답했다.
 
  『사람이 말이야, 어느 수준까지 가게 되면 자기 맘대로 안돼요. 성격이 낙천적이라 매사를 되면 되고 안되면 안되는 걸로 여기거든. 요즘처럼 경쟁하는 세상에는 내가 뒤떨어진 사람으로 비칠지 몰라. 일찍 태어나 다행인 셈이지』
 
  ―사람에게는 저마다 타고난 運(운)이 있다고 보는 겁니까.
 
  『나는 운명론자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어요. 물론 어느 정도 노력은 해야 하지요. 그러나 노력한 만큼 된다고 생각지는 않아요. 어떤 단계 이상 올라가면 더욱 그렇게 되지요. 時運(시운)이 맞고 상관을 잘 만나야 해. 아무리 능력 있고 실력 있어도 사람을 잘못 만나면 발휘할 수가 없어요』
 
  ―지금의 성균관대 재단이사장직은 어떻게 맡게 된 겁니까.
 
  『내가 왜 지목됐는지 모르겠어요. 학술원 회장직을 물러난 재작년 말, 성균관대 재단인 삼성그룹에서 이사장직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해왔어요. 그저 일 없이 老年(노년)을 보내는 것도 그렇고 해서 수락했어요. 건강에도 좋잖아. 그 전까지는 성균관대와 인연이 없었지. 삼성그룹의 오너도 잘 모르고』
 
  ―모든 자리가 그저 우연히 얻어진 것인가요.
 
  『이제껏 내가 나서서 해보겠다고 한 적이 없었어. 단 한 번, 학술원 회장을 빼면. 사실 그것도 他意半自意半(타의반 자의반)이라고나 할까. 환경처 장관을 마치고 학술원 회원이 됐는데, 학술원 회장직에 나서보라고 주위에서 권해. 학술원을 운영하는데 이제 행정 경험도 필요하다고 여겼는지 모르지.
 
  학술원 회장은 교황식 선거예요. 후보 없이 투표해 과반수 이상을 받아야 해. 원로 학자들이 모인 학술원은 까다로운 곳입니다. 관직 경력이라는 거 대수롭게 여겨. 오히려 푸대접을 주지. 학술원의 전통으로는 나처럼 外道(외도) 경력이 있는 사람은 자격에 미흡하지. 하지만 솔직히 난 학술원 회장은 되고 싶었어요. 나이 들어 욕심이 생긴 건가. 그 자리는 권력과는 무관해. 그러나 최고의 명예야. 2차 투표를 해서 내가 과반수를 얻었어요. 그렇게 된 게 신기해』
 
  사실 이보다 훨씬 앞서 그가 특정 감투에 대해 욕심을 낸 적은 있었다. 제일고보(현 경기중·고) 2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몇년 전 출간한 「또 하나의 언덕」이라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겨울방학 중 버스를 타고 고향(김포)에 갔는데 어떤 젊은 사람에게 많은 사람들이 굽실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제시대인지라 위세가 대단했던 일본인 순사까지 그 앞에서 굽실굽실하는 것이 동심에는 기이하게 비쳤다. 도대체 저 젊은 사람이 무엇이길래 저렇게 대우받는가 하는 의문과 호기심이 한꺼번에 생겼다. 알고보니 군수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군수에 대한 매력이 상당히 강해졌다. 이왕이면 나도 군수가 되겠다고 자신에게 다짐했다. 고등문관시험을 치기 위해 문과를 택했다. 하지만 경성의전 출신인 큰 자형으로부터 「조선 사람은 技術(기술)이 있어야 산다」라는 설득을 받고, 할 수 없이 의학 쪽으로 옮겼다>
 
  인생의 전환점에서도 그는 예의 「운명」이라는 걸 들고 나온다.
 
  『입학 시험 여섯 달을 앞두고 진로를 바꿨지. 당시만 해도 어른의 뜻을 거역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긴 했으나, 좋거나 싫거나 운명에 맡겨보자는 운명론자가 된 셈이지요』
 
 
  『혹 총리라면 모를까』
 
  그는 경성제대 醫豫科(의예과)로 진학했다. 그의 전공인 예방의학은 세상 감투와는 일견 무관한 것이었다. 졸업 후 그는 선배교수의 강의가 끝나면 흑판이나 닦는 無給(무급) 조교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한 선배의 권유로 마침 자리가 빈 獸醫學(수의학) 분야에서 가르쳤다. 얼마 안 지나 6·25와 함께 우여곡절이 있은 뒤로 그는 서울대에서 보건의학을 강의했다. 그는 대학 울타리 안에서 평생 살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관측과 다르게 펼쳐질 그의 앞날에 대한 어떤 前兆(전조)가 당시 없었던 것은 아니다. 5·16 쿠데타 바로 다음날. 한 위관급 장교가 그를 남산에 위치한 KBS로 데려가 혁명과업 홍보용 방송을 종용했다. 對談(대담) 형식으로 진행된 방송에서 그는 멋모르고 『혁명과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뭐니뭐니해도 사람의 건강이 전제조건으로 되는 것이며, 건강을 유지하고 향상시키기 위해 배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말했다.
 
  『5·16 며칠 뒤 최고회의가 구성되고 내각이 발표됐는데 초대 보사부장관으로 張德昇(장덕승) 장군이라는 중학·대학 선배가 임명됐어. 그분이 내게 차관을 맡아달라고 전갈을 보내왔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아. 여하튼 주변 선배들과 상의를 하니 모두 권해요. 그래서 이력서를 제출하게 됐어요』
 
  당시 33세의 차관이 될 뻔했다. 그렇다면 그의 감투 인생 역사는 달리 기록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력서를 보낸 다음날, 그를 발탁하려 한 張장관이 초창기 혁명 정부 안에서 벌어진 파워 게임 과정에서 전격 해임됐다. 그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감투 인생에서 가장 애착을 갖는 자리는 서울대 총장이다.
 
  『서울대 총장은 어디 가도 존경을 받아요. 권위에서도 장관급 정도가 아니지요. 李壽成(이수성) 교수가 서울대 총장이 됐을 때, 「되돌아보니 서울대 총장은 장관보다 훨씬 높은 자리다. 그까짓 장관 제의를 받더라도 절대 움직이지 마라, 혹 총리라면 모를까」라고 우스갯소리를 한 적 있어요. 李壽成씨는 과연 총리로 옮겼어요』
 
 
  건강론
 
  그는 계엄 치하인 1980년 6월 서울대 총장이 됐다. 임명장은 崔圭夏(최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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