阿Q의 시 읽기 〈57〉 마거릿 애트우드·이구락·박상봉·김환중의 ‘진짜 이야기’

물같이 살아가는 게 착하게 사는 일

  •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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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해하며 지니는 것, 칼, 푸른 불, 행운, 선한 말…
⊙ 새마을체육대회 찍힌 똥빛 수건과 색색의 빨래집게
물은 낮은 곳으로 밀려가며 더 낮은 곳을 찾아 힘차게 온몸 던져 꿈꾼다. 공주 청벽에서 바라본 금강의 모습이다. 사진=조선일보DB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큼직한 대서사(大敍事)가 아니다. 길지도 특별하지도 않다. 평범하고 그저 그런 이야기, 마치 속엣말 같은 소(小)서사, 우리의 독백이다.
 
  ‌‌진짜 이야기를 청하지 마라.
  왜 그게 필요한가?
 
  그것은 내가 펼치는 것이거나
  내가 지니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항해하며 지니는 것,
  칼, 푸른 불,
 
  행운, 여전히 통하는
  몇 마디의 선한 말, 그리고 물결.
 
  -마거릿 애트우드의 ‘진짜 이야기’ 일부

 

  거짓말이 아닌 ‘진짜 이야기’는 어디에 숨겨져 있어서 펼쳐야 하거나, 가지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 꺼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작년 11월 국내 번역된 캐나다 시인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1939~)의 시집 《진짜 이야기》(허현숙 옮김)에서 말하는 ‘진짜 이야기’는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항해하며 지니는 것, 칼, 푸른 불, 행운, 선한 말, 물결, 가진 적 없는 어떤 것, 이동하는 빛, 검은 나뭇가지들이 엉킨 것, 내 발자국, 부엉이의 죽음, 달, 구겨진 종이, 동전, 옛 소풍의 반짝임’ 등등이다. 모두 추억이 있거나 사연이 있는 기억 혹은 사물들이다.
 

  이 중에서 ‘몇 마디의 선한 말’이라는 표현이 와닿는다. 진심의 표현에는 장광설이나 수사(修辭)가 필요 없다.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고 표현할 수 있는 몇 마디의 진심(선한 말)이면 충분하다.
 
  작년 11월에 간행된 이구락 시인의 시집 《낮은 위쪽, 물같이》에 실린 동명의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물같이 살아가는 게/ 착하게 사는 일임을 알게 된다’. 흘러가는 순리(順理)에 따라 물처럼 흘러가는 삶이야말로 ‘진짜 이야기’가 아닐까.
 
  화려한 성과나 커다란 훈장을 단 이야기는 어쩌면 ‘진짜 이야기’가 아닐지 모른다. 역설적이게도 시인은 ‘(물이) 더 낮은 곳으로 뛰어내릴 때/ 가장 큰 소리로 노래 부른다’고 말한다.
 
이구락 시인의 시집 《낮은 위쪽, 물같이》.
  ‌‌물은 낮은 곳으로 밀려가며
  더 낮은 곳을 찾아
  힘차게 온몸 던져 꿈꾼다
  물의 감응*은 늘 낮은 쪽이므로
  더 낮은 곳으로 뛰어내릴 때
  가장 큰 소리로 노래 부른다
 
  칠성시장 좌판 앞에 앉아
  늘 온몸으로 노래 부르는 김씨부인처럼,
  때로는 구정물이나 맹물 같은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의 도시
  구멍가게 박씨부인처럼
 
  그러나 낮은 곳은 감응이 늘 위쪽이므로
  온몸으로 밀려오는 물을 받아들이며
  위쪽이 곧 낮은 쪽임을 느낀다
  낮은 위쪽은 물의 통로이므로
  우리들 꿈의 열려진 창이므로
  우리는 모두 흘러가는 물의 길 보며
 
  물같이 살아가는 게
  착하게 사는 일임을 알게 된다
 
  -이구락의 ‘낮은 위쪽, 물같이’ 전문

 
  *감응(感應): 중생이 불심을 느끼는 감(感)과 부처의 신력이 이에 응(應)해 교류하는 것을 의미하는 불교 교리.
 
이구락 시인
  시 ‘내려다보면’에서 시인의 이야기꾼, 스토리텔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삶을 조망하는 관찰자의 시선이 따스하다. ‘새마을체육대회 찍힌 똥빛 수건 한 장’ ‘우리슈퍼마켓 백합미용실 동해식육식당의 간판’에 생명을 불어넣은 시인의 손길에 생의 ‘진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무지갯빛 희망’을 노래하나 그리 거창하진 않다.
 
  ‌‌깨어진 기왓장 사이 비에 젖어 해진 종이비행기, 끈 떨어진 슬리퍼 한 짝, 대문 슬래브 위 옹기종기 모여 앉아 초겨울 해바라기 하는 장독, 녹슨 티비 안테나와 여기 저기 말라붙은 흰 비둘기똥, 빨랫줄에 새마을체육대회 찍힌 똥빛 수건 한 장과 심심하게 매달린 색색의 빨래집게, 햇빛 없는 삼각형 마당 귀퉁이 허약한 석류나무와 누추한 장미 두 송이, 우리슈퍼마켓 백합미용실 동해식육식당의 간판 간간이 보이는 구겨진 골목길과 그 끝의 소문장여관 야한 옆모습
 
  아, 내려다보면 나는 신이 되고 싶다 낡은 안테나 선 타고 다니며 그들의 안방과 장롱 속 참담한 그리움 은밀히 다스리고 싶다 더욱 섬세한 전선줄 타고 다니며 부엌과 마루 밑에 웅크린 당당한 식욕도 타이르고 싶다 넝마처럼 뒹굴어 다니는 그들의 무지갯빛 희망과 더 많은 절망들에 골고루 물뿌리개를 들이대고 싶다 내려다보면 세상은 보이지 않고 세상의 가장 정갈한 윗부분만 보이니, 아 나는 또 내려다보고 다시 내려다본다
 
  -이구락의 ‘내려다보면’ 전문

 
 
  이구락·박상봉 시인의 이야기
 
박상봉 시인의 시집 《불탄 나무의 속삭임》.
  작년 7월에 나온 박상봉 시인의 시집 《불탄 나무의 속삭임》에 실린 ‘귀를 빼 서랍에 넣어두었다’를 읽었다.
 
  이 시를 읽으며 ‘진짜 이야기’는 듣기 싫어도 자꾸 들리는 ‘이명(耳鳴)’이나 아픈 상처로 여겨지는 ‘나무에 박인 옹이 같은 것들’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랍 안에(기억 속에) 구겨 넣은 것, 까맣게 잊어버렸다가 우연히 찾은 기억을 시인은 ‘잃어버린 귀를 찾은 반가움’으로 표현한다. 그 반가움에 다시 귀를 꽂으니 ‘이명’은 사라지고 ‘바다’ 혹은, ‘파도 여닫는 소리’로 변해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이명’을 ‘파도 소리’로 변하게 만들었을까. 세월일까.
 
  ‌‌갈수록 이명이 들린다
  미처 알아듣지 못한 말 남겨둬야겠기에
  귀를 빼 서랍에 넣어두었다
 
  나무에 박인 옹이 같은 것들
  차마 버리지 못하고
  나중에 꺼내 볼 요량으로 넣어둔 것들
  그러나 정작 서랍을 열어 보는 경우는 드물다
 
  언젠가 우연히 서랍을 열었을 때
  잃어버린 귀를 찾은 반가움이란
  집 나간 아이를 만난 것만큼 살가운 일이다
 
  귀를 꽂고 나니 바다가 보인다.
  언젠가 무작정 기차를 타고 가서 만난
  한때 연인이었던 바다
  언제 나를 따라와 얼마나 오래
  서랍 속에 머물렀던 걸까?
 
  서랍에 넣어둔 구름을 꺼내어 본다.
  청춘을 기록한 구름의 목록은
  공증이 필요 없는 신원보증서
 
  삶의 칸칸마다 미주알고주알 채우고 살아온
  일기장은 먼지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오늘은 지구의 모퉁이로 우두커니 밀려난
  낡은 서랍장에 모자를 벗고 머리를 집어넣는다
 
  파도 여닫는 소리가 들린다
  삐걱거리며 살아온 세월이 어쩌면
  바다였는지도 모른다
 
  -박상봉의 ‘귀를 빼 서랍에 넣어두었다’ 전문

 

  어머니 이야기야말로 ‘진짜 이야기’가 아닐까. 어떤 수사를 동원해도 부모를 다 표현하기 어렵다. 시인은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산을 넘는다.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받쳐 든 우산 속으로 스며드는 빗소리가 ‘양은솥에 우엉잎 찌는 소리 같다’. 아들이 갈 때마다 얼갈이배추, 절인 고추, 깻잎장아찌 따위를 한 보퉁이 챙겨주시는 어머니를 시인은 ‘세상에서 손이 제일 크다’고 표현한다.
 
  ‘밥 한 숟갈 끌어안은 구수하고 쫄깃한 우엉잎’을 시인은 ‘울 어무이 젖 맛’이라고 했는데 그 ‘젖 맛’이 어떤 맛인지 알 수 없지만, 신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준 ‘만나(manna)’ 같은 것이 아닐까.
 
  ‌‌우엉잎 쳐놓았다며
  가져가 쌈 싸먹으라고
  어머니 전화하셨다
 
  오래전 아버지 떠나신 집에
  혼자 사시는 어머니
 
  어머니 집에 가려면 산 하나 넘어야 한다
  비 오는 날 학산 넘어간다
  받쳐 든 우산 속으로 스며드는 빗소리
  양은솥에 우엉잎 찌는 소리 같다
 
  갈 때마다 얼갈이배추며 절인 고추,
  깻잎장아찌 따위 한 보퉁이 챙겨주시는
  세상에서 손이 제일 큰 우리 엄마
 
  손바닥 위에 가득 펼쳐놓고
  자글자글 된장국 끓여 쌈 싸먹는 저녁
 
  밥 한 숟갈 끌어안은 구수하고 쫄깃한 우엉잎
  영락없는 울 어무이 젖 맛이다
 
  -박상봉의 ‘우엉잎’ 전문

 
 
  이극래·곽은주 시인의 이야기
 
이극래 시인의 시선집 《정(情), 그 아름다운 이미지》.
  작년 10월에 펴낸 이극래 시인의 시선집 《정(情), 그 아름다운 이미지》에 실린 ‘삶 그리고 죽음’이라는 시를 읽었다.
 
  6행의 짧은 시지만 한참을 생각하게 할 만큼 묵직하다. 삶의 엄숙함, ‘진짜 이야기’가 느껴진다. 잘 살지 못하면서 그럴듯한 껍데기를 남기려 억지스레 아등바등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뒤돌아보게 한다. ‘사는 것같이’ 살더라도 저마다의 ‘진짜 이야기’를 쓰듯 살아야 한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이가 있고
 
  죽어도
  죽는 게 아닌 이도 있다.
 
  사는 것같이 살다가
  무언가 남기고 떠날까 봐.
 
  -이극래의 ‘삶 그리고 죽음’ 전문

 
곽은주의 시집 《숲은 너에게 동화가 있느냐고 묻는다》.
  ‘진짜 이야기’에 정답은 없다. ‘알 수 없는 일’일지 모른다. 작년 10월에 나온 곽은주의 시집 《숲은 너에게 동화가 있느냐고 묻는다》에 실린 서시(序詩) ‘알 수 없는 일’을 읽었다. 시인은 깊은 산골에 핀 꽃이 바람도 없는데 수줍게 피었다가 제 시름에 지는 것을 ‘깊은 산골의 일’이라 표현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마찬가지여서 돌아설 수밖에 없는 운명 앞에 ‘흔들리는 작은 꽃잎’ ‘애절한 꽃’이 되고 마는 삶도 ‘깊은 산골의 일’이다. 이 산골의 깊은 사연이야말로 ‘진짜 이야기’다.
 
  바람도 없는데,
  꽃은 수줍게 피어
  산과 냇물을 조용히 기다리게 하다가
  제 시름에 지는 것도
  그만 떨어져 버리는 것도
  깊은 산골의 일은 알 수 없다
 
  당신과 엇갈린 길을 가다 스칠 때
  벗어 버릴 수 없는 옷 때문에
  가슴 아플지라도
  돌아서는 길에
  흔들리는 작은 꽃잎이 마음을 부여잡을지라도
  애절한 꽃
  깊은 산골의 일이라 알 수 없는 것이다
 
  -곽은주의 ‘알 수 없는 일’ 전문

 
 
  김환중 시인의 이야기
 
어제를 시침질한 저녁은 뒷걸음치며 붉은 근심을 풀어놓아요. 전남 영광군 백수읍 인근 서해가 붉게 물들었다. 사진=조선일보DB
  작년 11월에 나온 김환중 시인의 시집 《걱정발 구르다 생각코만 하염없이 늘입니다》를 읽었다. 다양한 부사와 형용사들이 관찰자의 시선에 따라 소박한 ‘진짜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집에는 ‘언어 요리사’가 만드는 맛깔스러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햇발이 바다에 엎드려 업무 일지’ ‘어제를 시침질한 저녁’ ‘달빛 무도회를 준비하던 파도’란 표현에 밑줄을 긋고 싶다.
  ‌
  파도 소리 채록하기 위해 나선 햇발이 바다에 엎드려 업무 일지를 쓰네요 어제를 시침질한 저녁은 뒷걸음치며 붉은 근심을 풀어놓고요 또록또록 반짝이는 음표를 문 물새들 울음 꼭지를 공중에 걸어 놓는군요
 
  어둠이 거드름 피우며 겁에 질린 해를 몰아내고요 멜랑콜리 피 물려받은 물고기들이 떼 지어 몰려왔군요 늑골에 낀 허물 뽑아내듯 무연고자 꼬리표를 초저녁 별들에게 건네주네요
 
  달빛 무도회를 준비하던 파도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진 파도들을 목청껏 불러 세우고요 진땀 흘리며 리허설 무대에 오르는 파도, 돌연 고해성사하듯 자신의 주름진 속살까지 헤집어 숨은 곡절 낱낱이 풀어놓는군요
 
  -김환중의 ‘저녁의 알리바이’ 전문

 
  시 ‘밥 짓는 소리’도 특별나다. 저마다의 생명을 지닌 시어들이 마치 꿈틀대는 듯하다. 시가 심각하지 않고 즐겁다. 사는 재미가 느껴진다. ‘구름쌀 꾸어다 밥 짓던 눈송이들’ ‘허기진 세상 뱃구레 채우는 소리들’이란 표현에 밑줄 쫙~.
 
 
  소리들이 밥을 안친다
 
김환중 시인의 시집 《걱정발 구르다 생각코만 하염없이 늘입니다》.
  보삭보삭 보글보글 사르륵사르륵 잘강잘강 조록조록 두순두순 들들들들 똑또그르르 포르릉포르릉 꾸르렁꾸르렁 아르렁아르렁 왈강달강 웽그렁뎅그렁 와당탕퉁탕 와릉와릉 쿵덕쿵덕 닐리리쿵더쿵 지은 밥 모록모록 퍼 올린다
 
  무심한 장난감 병정들 보이지 않는 소리를 움켜쥔 공연장에 긴장이 흐른다 만져지지 않는 소리 허공을 떠도는 소리 누군가 목숨처럼 붙들었다 놓쳐 버린 줄기 거머쥐려는 소리꾼들 몽환적인 물감 풀어 놓은 강물에 발 담근 채 방정식을 풀고 있다 그러모은 소리로 채색옷 입은 조명발 들러리 발가락으로 소릿발 치켜세우고
 
  골짜기 굴참나무에게 밥그릇 움켜쥐고 눈치 싸움하다 솔금솔금 허리 휜 소나무 부메랑처럼 울음을 던지는 시냇물 채워지지 않는 허기 때문일까 강물의 혀가 지느러미처럼 욜랑욜랑 술꾼에게 주안상 차리는 술비 쏟아지던 날 언덕 너머 하냥 떠돌던 소리꾼 마약중독 환자처럼 현실과 환상의 허들을 넘나든다
 
  타들어 가는 사물의 입이 동그라미 그리며 침을 삼킨다 구름쌀 꾸어다 밥 짓던 눈송이들 침묵 연주회를 연다 허기진 세상 뱃구레 채우는 소리들 적요를 깔고 누워 있다 무릎걸음으로 하늘 오르는 계단 밟고 있다
 
  -김환중의 ‘밥 짓는 소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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