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한복」사진 전시회 갖는 曺世鉉

『에르미타주가 내 사진세계 평가…20년 매달린「한복」컬렉션 선보여』

  • : 이근미  www.rootlee.com
글자 크기 조정
  • 스크랩
  • 본문 음성 듣기
  • 글자 크기 조정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曺世鉉
1958년 경북 고령 출생. 중앙大 사진학과 졸업. 상명大·경일大 대학원 사진학과 강사, 부천영화제 집행위원, 대한사회복지회 입양아동 홍보대사, 조선일보 광고대상 심사위원, 랑콤(로레알) 신인디자이너상 심사위원, 미스코리아 심사위원 역임. 저서 「曺世鉉 패션사진 Fp」, 「The Man」 등 다수.
사진가 曺世鉉(조세현·48)씨가 운영하는 서울 청담동의 「아이콘 스튜디오」를 찾았을 때 벽면을 가득 메운 톱스타들의 사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배용준·권상우·현빈·이영애·김혜수·고소영 등 그야말로 별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낡은 쳄발로를 비롯하여 오래된 사진기, 각종 탁상시계 등이 정갈하게 전시되어 있는 사무실은 마치 박물관을 연상케 했다. 그에 비하면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의 曺世鉉씨는 경쾌한 모습이었다. 知天命(지천명)의 나이를 코앞에 두고 있는데도 30代로 보일 만큼 童顔(동안)이었으며, 키 182cm에 마른 체형이어서 날렵해 보였다.
 
  曺世鉉은 스타들의 「전속」 사진사로 유명하다. 「조세현이 아니면 안 찍겠다」는 연예인들이 꽤 있다. 스타들보다 더 유명한 사진작가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그가 20여년 가까이 진행해 온 다큐멘터리 작업이 있다. 바로 「한복」이다.
 
  1985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500여 점의 작품을 만들었다.
 
  한복 사진 작품을 500여 점 만드는 데 적잖은 돈과 품이 들었다. 한복과 잘 어울리는 안동 하회마을이나 서울의 궁궐에서 촬영을 했고, 한민족의 옷이라는 상징성을 살리기 위해 금강산에서도 찍었다. 한복은 이영희씨 같은 내로라하는 디자이너들이 만들었고, 모델도 가능하면 그 옷에 맞는 사람을 찾아서 썼다. 그리고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
 
  『고종황제의 옷은 손자인 이석씨를 모델로 세웠고, 대비의 옷은 탤런트 김용림씨를 모델로 썼어요. 새색시 옷은 직접 발탁한 10代 여성에게 입혔습니다. 예전에는 대부분 10代에 결혼을 했잖아요. 양반집의 일가족을 찍으면서 부인과 여러 소실들을 그 나이에 맞는 모델로 썼습니다. 역사성과 사실성을 살리는 데 공을 들였습니다』
 
  이런 노력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됐다.
 
  오는 9월 말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옛 레닌그라드)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메인 갤러리에서 40여 점의 한복 사진을 전시할 예정이다. 그의 작품은 현재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전시 중이다.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인 러시아 에르미타주에서의 전시를 앞두고 그는 흥분된 표정이었다.
 
  『제가 그곳에서 전시회를 갖는 두 번째 한국인이라고 해요. 1970년대에 김흥수 화백이 했고, 제가 그 다음이랍니다. 1970년대에는 국교도 수교되지 않았을 때인데 김흥수 화백을 초청해 간 걸 보면 에르미타주의 눈이 대단한 것 같아요. 에르미타주에서 사진작가를 초청한 것은 제가 처음이라고 합니다. 에르미타주가 저와 저의 사진예술을 평가해 준 데 대해 고마울 따름이죠』
 
 
  인화지 대신 韓紙 사용
 
금강산에서 찍은 한복 사진. 모델은 배우 이영애.
  그는 『분단국가인 우리가 한민족의 동질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문화코드의 하나가 한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20여 년간 이 주제에 매달려 왔다』고 했다.
 
  『저는 얼굴이 돋보이는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한복 입은 사람」을 찍는 겁니다. 그래서 사진이 굉장히 動的(동적)입니다. 신랑이 왔을 때 달려 나가는 새색시의 모습, 고싸움하는 장면 등 역동적인 모습들을 통해 한복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우리 역사를 알리고자 합니다』
 
  曺世鉉은 자신의 한복 사진의 부드러운 質感(질감)을 살리기 위해 인화지 대신 韓紙(한지)를 쓰고 있다. 그는 『이 韓紙를 제작하는 방법이 나의 특별한 노하우 중의 하나』라며 『상업화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고 공개했다.
 
  그는 롯데백화점 명품관 에비뉴얼 화랑에서열리는 아프리카 사진전 준비로 도 한동안 분주했다. 지난 5월 아프리카 케냐 북부 수단과 국경지대인 투르가나 지역에서 기아와 가뭄 피해가 극심한 4개 마을과 인근 초등학교, 로드워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기아 아동의 모습을 찍었다.
 
  당시 촬영한 5000여 장의 사진 가운데 30장을 8월16~25일까지 전시한다. 아프리카 사진 12장으로 만든 내년도 달력, 포스터 등을 판매하여 전액을 세계 최대의 기독교 구호단체인 「월드비전」에 기부할 예정이다.
 
 
  『신뢰가 사진작업의 바탕』
 
영화배우 고소영과의 작업.
  고소영·이영애·고현정 같은 톱스타들은 사진작업을 할 때 「曺世鉉」을 고집한다. 가수 조성모씨는 1집 때부터 계속 曺世鉉씨에게 앨범 재킷 사진을 맡겼다. 왜 그럴까. 曺世鉉씨는 「신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사진은 그림이나 詩와 다르게 능동적이고 현장성이 있습니다. 대상이 없으면 못 찍고 배우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품은 누가 찍으나 사진이 거의 비슷하게 나옵니다. 하지만 사람은 찍으면 다 다릅니다. 모델 각각의 사람에 대한 마음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모델에 대한 애정과 존경의 마음을 갖고 사진을 찍습니다』
 
  예전에는 유명 연예인을 인터뷰하거나 사진 찍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홍보를 위해 서로 나오려고 했던 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1990년대 중·후반에 스타 마케팅이 시작되면서 소속사 차원의 관리가 시작됐다.
 
  2000년대 들어 韓流(한류)바람이 불면서 일부 톱스타들은 접근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그러다 보니 어떤 스타와 작업하느냐가 사진가의 실력을 판가름하는 시대가 되었다. 「스타들이 가장 찍히고 싶어 하는 사진가」, 「스타보다 유명한 사진가」 등이 曺世鉉씨에게 붙는 수식어다.
 
  ―촬영 의뢰가 들어올 때 어떤 기준에 의해 선택합니까.
 
  『저와 맞아야죠. 저를 존중해 주고 제 작품을 이해해 주는 거. 작가들에게 결국 남는 건 자존심 아닙니까? 작가는 자존심에 약해요』
 
  ―사진을 찍을 때 모델에게 어떤 주문을 합니까.
 
  『카메라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을 보라고 합니다. 저의 연출 키워드는 「자신을 표현하라」입니다. 키워드가 정확하게 사진으로 전달됩니다. 「자신이 희로애락 중에 어느 감정을 갖고 있느냐, 그걸 생각해 보라」고 하면 모델들이 자신을 표현하고 저는 그 순간을 포착하는 거죠』
 
  曺世鉉씨는 벽에 걸린 몇몇 스타의 사진을 가리키면서 스타들이 자신의 클라이맥스를 표현했기 때문에 좋은 사진이 나왔다고 말했다.
 
  『저 에너지, 저 모습이 다시 나오지 않기 때문에 사진가는 스타들이 표현을 잘할 수 있도록 분위기 조성을 잘해야 합니다. 사진을 찍을 때 모델이 자기 속의 것을 끄집어 내고 실제보다 더 잘 나올 수 있다는 환상까지 심어 줘야 합니다』
 
  ―좋은 사진을 만들려면 모델과 인간적으로 친밀해야겠습니다.
 
  『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번 알면 10년 이상씩 작업합니다. 한 스타의 이미지를 계속 만들어 나가는 것은 매니저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것이어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종군기자가 되고 싶었다』
 
기누族과 함께.
  曺世鉉씨는 유명 스타를 촬영하는 일보다 개인작업이 많은 편이라고 소개했다.
 
  『화려한 스타를 찍으니까 그게 상대적으로 부각되는 거죠. 미디어의 영향입니다. 상업적인 사진은 한 달에 두 번 정도 찍습니다』
 
  전체적으로 자신이 투자하는 시간을 나눠 보면 상업적인 작업 20%, 非상업적인 촬영 40%, 교육 40%라고 한다. 작년까지 모교인 중앙大 사진학과 겸임교수를 지냈고, 현재 상명大·경일大에서 가르치고 있다. 16년 동안 줄잡아 800여 명의 제자가 배출되었고, 그 가운데 50여 명은 사진작가로 맹활약하고 있다.
 
  曺世鉉씨의 원래 꿈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였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실리는 사진 같은 걸 찍고 싶었죠. 종군기자도 되고 싶었어요. 지금 이라크에 가라면 갈 수 있습니다』
 
  그는 20년 전 베트남 「보트피플」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소외계층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000년 가톨릭사회복지회가 운영하는 서울 증산동 「바오로교실」을 방문해 정신지체를 앓고 있는 학생 30여 명의 사진을 찍어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내 주었고, 이듬해 몸이 불편하고 집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경북 고령지역 「들꽃마을」 식구 100여 명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이 사진을 본 사단법인 대한사회복지회에서 「영아원에 수용된 아기들의 백일사진을 찍어 줄 수 있겠느냐」고 연락해 왔다. 曺世鉉씨가 바로 승낙하자 오히려 전화한 쪽에서 더 놀랐다고 한다. 그는 천사 같은 아이들을 찍는 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고 한다.
 
 
  「천사들의 편지」 사진전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대한사회복지회 입양아동 홍보대사가 되었고, 2003년부터 「천사들의 편지」 사진전을 열고 있다. 스타들이 지체부자유 아동, 미혼모의 아이들, 입양을 기다리는 아기들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전시회를 열고, 캘린더로 제작하여 판매도 한다. 수익금은 매년 말 대한사회복지회에 기탁한다.
 
  「천사들의 편지」 사진전을 위해 吳世勳(오세훈) 서울시장, 朴槿惠(박근혜) 前 한나라당 대표, 한나라당 羅卿瑗(나경원) 의원, 열린당 張香淑(장향숙) 의원, 바이올리스트 장영주, 지휘자 정명훈, 연극배우 손숙, 영화배우 권상우·고소영·황신혜 등이 曺世鉉씨의 카메라 앞에 노개런티로 섰다.
 
  톱스타와 유명인사를 무료로 동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曺世鉉의 힘」이다.
 
  曺世鉉씨는 대구 대륜중학교 때 음화와 양화가 합쳐져 그림이 되는 현상에 흥미를 느껴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대구에서 서울 중동고등학교로 전학 와서 사진반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전국 학생사진대회에서 동상을 받았다. 그런데 친한 선배들에게 빌려 준 사진도 금상과 은상을 받았다.
 
  그의 부모는 장남이 상경계열로 진학하길 원했다. 하지만 그는 고민하다가 입시를 한 달 남겨 놓고 무작정 중앙大 사진학과를 찾아갔다.
 
  『사진을 너무 하고 싶은데 부모님은 절대 안 된다고 하니 갈등이 있었지요. 중앙大에 찾아갔을 때 우연히 한국 사진의 代父(대부)인 임응식 선생님을 만났어요. 고민을 얘기했더니 그 선생님이 「너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하셨습니다. 콧수염에 선글라스를 끼고 계셨는데 너무 멋져 보였어요』
 
  그는 1977년 중앙大 사진학과에 입학한 이후 부모의 지원을 못 받아 4년 내내 청량리에 있는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쳐 돈을 벌었다.
 
 
  잡지기자 거친 뒤 프리랜서로
 
조세현의 사진, 배우 배용준
  1983년에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일간지에서 잠깐 일한 뒤 여성잡지 「주부생활」로 옮겨 9년간 일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원한 대로 인물탐험이나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었다.
 
  『입사하고 몇 년 후 우연히 패션사진을 찍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제가 잘하는 분야를 나중에 알게 된 셈이지요. 인물사진과 패션사진이 비슷한 면이 있어서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패션 브랜드였던 「오리지널리」의 이신우씨가 그에게 카탈로그를 맡겼고, 외부 의뢰가 늘어나면서 월급보다 부수입이 더 많아졌다. 사진부장으로 일했던 1991년 회사를 그만두었다.
 
  ―프리랜서로 나서서 고생하진 않았습니까.
 
  『대한민국 최고 디자이너인 이신우 선생이 저에게 일을 척척 맡기니 여타 디자이너들이 접근을 못 할 정도였어요. 처음부터 일류와 일하게 되다니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아마 저의 가능성을 보고 전폭적으로 밀어 주신 것 같아요. 최고와 일하는 건 사진가라면 누구나 원하는 일이죠. 후배들이 「지금 선배가 아무리 잘 나가도 1980년대 말보다 못하다」고 해요. 그때 정말 하늘을 찔렀습니다』
 
  프리랜서로 진출한 후 曺世鉉씨는 한불화장품·제일모직 카탈로그 등 굵직굵직한 일을 하면서 승승장구했다.
 
  10년 동안 프리랜서로 상업적인 활동을 왕성하게 해 온 曺世鉉씨는 1990년대 말부터 자신이 원하는 사진만 찍기로 결심했다.
 
  ―그런 결심을 한 계기가 뭡니까.
 
  『제 본성과 고집이 발휘된 거죠. 40代가 되면서 철이 들었다고 할까요. 사진은 유행이 있어요. 거기에 맞춰 찍어야지 안 그러면 도태됩니다. 하지만 거기 맞추다 보면 10년 넘게 찍어도 자기 스타일이란 게 생기지 않습니다』
 
  그는 배용준씨 사진이 많이 실린 일본잡지를 보여 주면서 자신이 찍은 사진을 찾아보라고 했다. 배경 없이 얼굴을 클로즈업한 曺世鉉씨의 사진은 다른 사진과 확연히 구별이 되었다.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했을 때 외부 반응이 어땠습니까.
 
  『안 좋은 소리를 많이 들었죠. 요구를 안 들어 주니까 건방지다며 등 돌린 광고주들도 있습니다. 그때 결심했죠. 「욕심 안 부리고 내 길을 걸어야겠다」, 「대학 1학년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생각했지요. 지금이 더 즐겁습니다. 가끔 젊은 친구들이 저에게 「소문으로는 까다롭다고 하던데 그렇지 않네요」라고 합니다』
 
  ―계속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는 데도 같이 작업해야겠다고 다들 몰려오면 어떻게 할 겁니까.
 
  『가격을 더 올려야죠(웃음). 조정해서 생활도 하고, 적당히 할 일도 하고 그래야죠』
 
  ―반대로 아무도 찾지 않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때는 작품 콘텐츠를 팔아야죠. 이제는 콘텐츠 시대입니다. 가을에 아프리카 사진집을 내기로 했습니다. 출판사에서 먼저 제의가 왔어요. 다른 자료들도 많은데 제가 가진 콘텐츠에 관심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다면」이라는 가정은 사실 曺世鉉씨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 스스로 지금이 頂點(정점)이라고 말했다.
 
  『한창 일할 때죠. 피카소도 50세를 전후해서 딱 10년 정도 작품활동한 겁니다. 그 후에도 그림을 그렸지만 그때 작품이 좋았죠. 저도 앞으로 한 5년 후면 힘들 겁니다. 일은 하겠지만 내용이 지금만 못하겠죠. 열심히 해야죠』
 
 
  「曺世鉉 스타일」이 정착되다
 
  曺世鉉씨는 사진을 찍을 때 인물 뒤에 배경을 넣지 않는다. 인물에 대한 집중도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의상조차 표정과 인물 전체의 느낌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曺世鉉씨가 자기 스타일을 고집한 이후 「曺世鉉 사진은 똑같다, 발전이 없다」는 비판이 나왔다. 뜻밖에 그는 그런 지적을 즐거워했다.
 
  『저는 그 말이 너무 좋아요. 「드디어 이제 이런 말을 듣는구나」 하는 생각에 흐뭇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보세요. 소재는 다르지만 똑같잖아요. 세잔·몬드리안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작품 중에서 曺世鉉 사진이 드러나는 게 제 바람입니다』●
  • 스크랩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