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리랑〉 개봉 90주년 특집 - 〈아리랑〉 필름의 흔적

“〈아리랑〉 필름은 있다!”

  •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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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년 전 〈아리랑〉 필름 봤다는 증언 나와
⊙ 〈아리랑〉 필름은 잃어버린 한국 영화사의 복원, 민족운동 복원 위해 필요
⊙ 미군정, 남한정부에 권력이양 후 당시 영화필름 모두 가져가
⊙ 〈아리랑〉 필름 소장자인 아베, “통일이 되면 내놓겠다”며 끝내 공개 거부
⊙ 아베, “빨치산들 처형 필름, 안중근 기록 필름도 있어”
⊙ 해방 전까지 〈아리랑〉의 상영 광고 542차례…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인기
나운규프로덕션에서 만든 빈민애화 〈잘 있거라〉(1927년)를 제작하던 때의 나운규.
춘사(春史) 나운규(羅雲奎)의 무성영화 〈아리랑〉이 1926년 10월 1일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된 지 90년이다. 한국인에 의한 영화제작은 1919년부터 시작됐으나 〈아리랑〉은 민족주의적 주제와 영화기법에서 한국 영화사를 통틀어 명작으로 꼽힌다. 감독·주연·원작·각색까지 맡았던 나운규는 영화 〈아리랑〉 한 편으로 일약 민족의 영웅이 됐다.
 
  영화 〈아리랑〉은, 일제 강점기는 물론 해방 후, 1950년 6·25 전쟁 직전까지 상영됐다는 신문·잡지의 기사나 광고를 통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또 1952년 9월 대구 만경관에서 1주일간 〈아리랑〉이 상영됐다는 기사가 당시 대구에서 발행된 《영남일보》에 실렸다. 6·25 전쟁 이후에도 〈아리랑〉이 상영된 것이다.
 
  30년 가까이 한국인의 사랑을 받았던 영화 〈아리랑〉은 그러나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 오직 당시의 영화 〈아리랑〉을 재구성한 영화소설 《아리랑》(박문출판사, 1929년)이 한국 영화연구가 김종욱(金鍾旭)의 발굴로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을 뿐이다. 극장에서 〈아리랑〉을 봤다는 이들의 증언에서 그 위상을 확인할 수 있으나 증언자 대부분이 현재 사망한 상태다.
 
  흔히 나운규의 〈아리랑〉을 얘기할 때 1926년 작 〈아리랑〉을 지칭하지만, 춘사는 3편의 〈아리랑〉 연작을 만들었다. 1926년 작 〈아리랑〉과 속편인 1930년 작 〈아리랑, 그 후의 이야기〉는 무성영화다. 1936년 작 〈아리랑 3편〉은 발성영화로 제작됐다. 모두 춘사의 손으로 만들어진 연작이다.
 
  흥미로운 점은 2편과 3편이 개봉됐을 때도 1편 〈아리랑〉은 계속 상영됐고 일부 극장에서는 1편과 2편, 또는 1편과 3편을 동시 상영했다는 점이다. 1편 〈아리랑〉이 흥행·인기·내용 면에서 2, 3편을 압도했다. 하지만 연작 1~3편 모두 필름의 행방을 확인할 길이 없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김종원(金鍾元) 전 회장은 “사실주의적 민족영화로 알려진 〈아리랑〉을 명확하게 평가하기 위해 필름의 존재가 절실히 요구된다”며 “자칫 전설적 명성의 후광 아래 방치돼 부풀려지고 영화 자체에 부담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아리랑〉 필름은 잃어버린 한국 영화사의 복원, 일제 치하 민족운동의 복원을 위해 필요하다.
 
 
  “5년 전 영화 〈아리랑〉을 봤을 때의 감격 잊을 수 없다”
 
근현대사 자료 수집가 이석우씨.
  〈아리랑〉 필름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필름의 존재가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1993년 9월경이다.
 
  일본인 아베 요시시게(安部善重)의 컬렉션에 5만여 편의 옛 영화필름이 있는데, 필름 리스트 중에 〈아리랑〉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베는 소장 필름에 대한 접근을 거부했다. 영화감독 정수웅, 나운규의 아들 나봉한 감독, 아리랑 연구가 김연갑씨 등이 수차례 일본으로 건너가 아베를 설득했다. 아베는 요지부동이었고 2005년 사망했다.
 
  영화 〈아리랑〉 개봉 90주년을 앞두고 기자는 고서·골동품을 전문으로 수집하는 한 인사와 접촉했다. 그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을 ‘근·현대사 자료 수집가’라고 소개한 이석우(李錫雨)씨는 “5년 전 〈아리랑〉 필름을 봤을 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2011년 3월 무렵, 이씨는 일본인 중개상으로부터 〈아리랑〉 필름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급히 목돈을 구해 도쿄 하라주쿠로 갔다. 일본에 사는 친구들에게 급전까지 부탁했다고 한다.
 
  일본인 중개상은 〈아리랑〉 필름을 넘기는 대가로 2500만 엔(당시 한화 2억5000만원)을 요구했다. 낡은 함석 캔(깡통)에 담긴 필름을 꺼내 조명 아래 비춰 보니 영화 〈아리랑〉의 앞부분과 비슷한 영상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아리랑〉 영화의 도입부는 영화 대본이나 〈아리랑〉 연구자를 통해 알려져 있어요. 그리고 영화 스틸 컷 사진을 꾸준히 보았기에 배우나 영화 속 배경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처음 5분간 필름을 비춰 보니 〈아리랑〉 필름이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중간 부분에 이상한 장면이 나왔다고 한다.
 
  “계속 보니까, 기모노 입은 여성이 나오고 장검 든 사무라이가 나오고 …. 가짜였습니다.”
 
  — 그러니까 필름 앞부분은 〈아리랑〉인데 뒷부분은 아니었단 거죠?
 
  “네. (한국 농촌 배경이 나오는) 앞부분은 확실한데 뒷부분은 일본 무성영화의 장면이었던 겁니다. 깜빡 속을 뻔했어요. 그게 가능한 일이냐고요? 서로 다른 필름을 따붙이면 돼요. 기술적으로 가능합니다. 제가 화를 내니까, 일본인 중개상이 몇 번이고 사과를 했어요.”
 
 
  의외로 미국에서 나올 수도
 
한국 영화의 전설이 된 나운규(오른쪽 끝).
  이씨는 “〈아리랑〉 필름에 대한 관심 탓에 판매상들이 사기를 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아리랑〉 필름을 찾는 열기가 시들었지만 일본은 물론 타이완, 중국까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 그래도 (앞부분이 비슷한) 그 필름을 샀으면 어땠을까요. 영화 〈아리랑〉을 복원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
 
  “진품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거부했어요. 나중 일본인 수집상에게 물어보니 ‘이미 팔렸다’더군요. 누가 사 갔을까요?”
 
  — 과연 일본에 〈아리랑〉 필름이 있을까요.
 
  “1926년 12월 ‘야마니 양행’이 조선영화 〈아리랑〉을 수입·배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총독부가 일본에 수출한 것으로 돼 있어요. 당시 한국에서 영화를 만들면, 일본 요코하마 지역의 현상소까지 가서 현상·편집을 했어요. 그럴 경우 원본은 제작사나 현상소가 보관하고, 프린트 본(本·복사본)을 4~5본 만들어 배급합니다. 〈아리랑〉도 4~5본 정도 프린트된 것으로 봅니다.”
 
〈아리랑〉 성공 직후의 나운규(왼쪽)와 〈아리랑〉의 일본 상영을 알리는 신문 광고.
  — 일본도 〈아리랑〉 필름에 관심이 있나요.
 
  “한국보다 더할 겁니다. 제가 아는 일본인 서점 주인은 한국과 일본 잡지·신문에 소개된 영화 〈아리랑〉 관련 내용만 스크랩할 정도입니다. 분량이 엄청나죠. 단성사 직인이 찍힌 〈아리랑〉 영화 티켓 가격이 500만원을 호가합니다. 〈아리랑〉 관련 자료는 그만큼 천정부지로 뛰고 있어요. 타이완도 한국영화 필름에 대한 관심이 많은데 1950~60년대의 국내에 없는 필름이 타이완에 많아요. 우리나라는 먹고사느라 기록문화에 대한 관심이 없었잖아요.”
 
  그러면서 이씨는 “의외로 미국에서 〈아리랑〉 필름이 나올 수 있다”며 이런 말을 보탰다.
 
  “해방 후 미군정이 한반도에 주둔했잖아요. 미군정은 당시 국내·수입영화 검열도 하고, 물자가 귀한 시대라 필름 보급도 했어요. 또 ‘극영화 제작권에 관한 지령서’를 영화사에 보내기도 했고요. 영화정책에 다 관여했는데, 미군정이 한국정부에 권력을 이양한 뒤 당시 영화 필름을 다 가져갔다고 합니다. 추측건대 미국에서 〈아리랑〉 필름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미국은 기록문화를 중시하니 폐기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여요. 〈아리랑〉 필름의 가치를 모르는, 미군정에 당시 근무했던 이들의 후손 집에 잔뜩 먼지를 쓰고 있을지 모릅니다.”
 
  이씨는 옛 근·현대사 자료를 찾으러 격월로 일본에 간다. 10월에 도쿄, 12월에 오사카에 갈 계획이다.
 
  “요즘엔 무용가 최승희 관련 자료를 모으고 있어요. 최승희의 춤 동작을 펜으로 그린 책도 있고 화보집도 있는데 일제시대 일본에서 발행된 것이나 월북 후 북한에서 간행된 책을 매입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아리랑〉 필름을 찾고 싶어요. 필름 존재 가능성은 비관적이지 않습니다. 물론 저는 장사꾼입니다. 돈도 벌고 싶어요. 하지만 〈아리랑〉은 나운규 개인의 체험과 예술가로서의 개성이 담겨 있지만, 영화를 통한 저항정신, 당대 한국 영화예술을 엿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언젠가는 나오겠죠.”
 
 
  “고베에 사는 다른 군속이 〈아리랑〉 보관하고 있다”
 
〈아리랑〉 필름 소장자로 알려진 아베 요시시게 모습. 사진제공=김연갑
  ‘아리랑’ 연구가 김연갑(金鍊甲·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씨는 영화 〈아리랑〉 필름을 찾기 위해 20여년 전부터 일본을 찾았다. 〈아리랑〉 필름을 소장하고 있다는 아베 요시시게를 만나 수차례 인터뷰한 일도 있다.
 
  “아베의 부친 이름은 ‘아베 가나에(安部鼎)’인데 교토부립의대를 졸업, 경찰의(醫)가 돼 조선에서 근무했다고 합니다. 영화를 좋아했던 아베 가나에는 귀국 후에도 조선의 영화 관계자와 교류가 이어져, 이 과정에서 획득한 필름 중 60편가량의 조선영화가 있었다는 거예요.
 
  유년시절 아베는 아버지가 모은 영화를 집에서 봤는데 이렇다 할 재미가 없었다고 합니다. 영화 〈아리랑〉은 중학생 때(1930년대 중반) 처음 봤는데, ‘개와 고양이’가 타이틀 배경으로 되어 있고 주인공이 낫을 휘두르는 격투 장면이 인상에 남을 뿐 그 외에는 그다지 기억에 없다고 했어요. 〈아리랑〉에 대해 아베는 아버지로부터 ‘혁명분자의 눈으로 본 세상이라 위험한 영화’라고 해 한 번만 보고 봉인했다고 합니다.”
 
  〈아리랑〉에서 ‘최영희’로 분(扮)한 신일선(申一仙)은 〈아리랑〉의 첫 신(scene)을 회고한 적이 있다. 그녀가 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중앙일보 刊, 1973년)의 일부다.
 
아베의 집 거실에 쌓인 필름 캔들. 사진제공=김연갑
  〈… 두 사람이 클로즈업되어 마주 쳐다보는데, 한 사람은 한복을 입은 미치광이이고 다른 한 사람은 도리우찌에 몽당수염을 한 양복쟁이가 화면 가득 나온다. 이어 ‘개와 고양이’라는 자막이 비쳤다. (중략) 오기호가 영희를 겁탈하려 든다. 이러한 위기에 현구가 달려들어 격투를 벌이지만 기호에게 쓰러지고 만다. 이때 낫으로 세숫대야를 두드리며 아리랑 노래를 부르던 영진이 달려와 기호를 낫으로 찔러 죽인다. …〉
 
  개와 고양이는 서로 앙숙 간이다. 최영진(나운규 분)과 지주의 앞잡이 오기호(주인규 분)를 앙숙관계로 설정하는데 지배자인 일본과 피지배자인 한민족을 상징한다. 영화 〈아리랑〉은 통속극의 형태를 띠지만 그 흐름은 민족정기와 한(恨)이 담겨 있다.
 
  신일선의 회고로 볼 때, 〈아리랑〉에 대한 아베의 기억은 어느 정도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김연갑씨의 말이다.
 
  “아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태평양전쟁 당시 키가 작아 (군인 대신) 군속으로 복무했는데 화학공장에서 일했다. 화학공장에서 식민지 조선과 만주, 타이완에서 필름을 수거해 폭약 실험용으로 (필름을) 사용했다. 어느 날, 미군이 폭약공장을 급습한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을 포함한 군속 3인이 필름을 각각 분할해 보관했다. 고베에 사는 다른 군속이 〈아리랑〉을 보관하고 있다’는 겁니다.”
 
  아베의 말을 종합해 보면, 〈아리랑〉 필름은 조선에서 경찰의사로 근무했던 아버지가 구했으나, 보관은 제3의 인물(고베에 사는 군속)이 했다는 것이다.
 
 
  〈아리랑〉 개봉 70주년을 앞두고 이뤄진 아베와의 대화
 
아리랑 연구가 김연갑씨.
  김연갑씨는 20년 전, 그러니까 영화 〈아리랑〉 개봉 70주년을 한 해 앞둔 1995년 한 해 동안 3차례나 아베를 찾은 일이 있다. 그때 아베와 인터뷰를 가졌다. 그가 본 아베의 집은 낡은 목조건물에 각종 필름과 수집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겨우 한 사람이 미끄러지듯 좁은 통로를 지나야 방 안에 들어갈 수 있는데, 작은 다다미방에도 필름이 가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당시 아베와 나눈 대화를 녹음했는데, 기자에게 그 내용을 공개했다.
 
  〈… (김연갑) — 조선영화 필름만 아니라 당시 다른 나라 필름도 수집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베) “예, 있습니다. 만주 것은 관동군에 의해, 조선의 경우는 경성의 총독부에서 받은 것입니다.”
 
  — 요코하마 현상소에 있던 필름을 맥아더 사령부가 전부 회수해 갔다고 했는데 선생님 필름은 어떻게 보관됐는지요.
 
  “우리에게도 왔었지요. 그러나 사전에 제보가 들어와 산속에 모두 소개(疏開)시켜 놓았습니다.”
 
  — 2차 대전 중에 필름을 폭탄 만드는 재료로 썼나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소이탄이라는 게 있는데, 셀룰로오스를 원료로 하고 거기에 철분을 섞어 강산류, 초산, 염산이나 유산을 넣어 만든 것을 비행기에서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이탄입니다. 우리들도 그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황인탄(黃燐彈)이라는 것이 있는데 열이 2500도 정도가 나옵니다.”
 
  — 필름 재료와 폭탄 재료가 같은 것이란 말입니까.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쪽의 연구 목적은 폭탄 쪽이었습니다.”
 
  — 영화 〈아리랑〉을 확인한 것은 언제쯤입니까
 
  “처음 본 것은 소화(昭和) 10년(1935 년)이고, 그 다음은 소화 21년(1946년) 즉, 종전 직후입니다. 〈아리랑〉은 내가 모은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받아 온 것입니다. ‘이것이 〈아리랑〉이란 영화다’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당시엔 필름 깡통에 붓으로 써서 붙였습니다만, 풀로 붙인 것이어서 벗겨져 버렸습니다.”
 
  — 그러니까 최종적으로 확인한 것이 50년이 지났으니까 지금 찾아 확인한다고 해도 볼 수가 있을지 알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문제 없습니다. 50년이든 100년이든 문제가 없습니다.”
 
  — 어디에 보관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알 수 있다면 당장 찾겠지요. 찾고자 이야기된 지 수 년이 됩니다. 북조선의 여운각씨가 얘기한 지가 30년이 되니까요.”
 
  — 서울의 나봉한씨가 와서 찾는 것을 도와준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런 말은 모두가 합니다. 통일되고 나서 하기로 하지요.”
 
  — 1926년 개봉된, 우리들이 제일 관심을 갖고 있는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이 분명한 것이지요?
 
  “이것이 나오면 곧 가지고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가 가능하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빨치산들의 처형 필름도 있는데 공표하면 좋을지 어떨지 문제입니다. 참혹해서.”
 
  — 학술적으로 필요할 것입니다. 공개하시지요.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너무 참혹하니까. 처형당한 사람들의 명단도 나옵니다. 그리고 안중근의 기록 필름도 있지요.”
 
  — 주인공인 나운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웅입니다. 일본에서 말하면 가와카미 오토지로오(川上音二郞)와 아주 닮은 데가 있습니다.”
 
 
  아베의 죽음과 사라진 필름
 
한국영화 연구가 김종욱씨.
  김연갑씨는 “아베가 언급한 ‘북조선 여운각’은 ‘조총련 여운각’으로 여운형 선생의 6촌 동생을 지칭한다. 1980년대 초 여운각이 기록영화 자료를 수집하던 중 오사카에서 아베를 만났고 그를 통해 〈아리랑〉의 존재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다.
 
  “이후 북한에서도 〈아리랑〉 필름을 찾기 위해 애를 썼고 여운각도 아베와 여러 차례 만났지만 아베는 필름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아리랑〉은 식민지 시대의 반일(反日)영화인 만큼 일본인으로서 생각할 부분이 있다. 그렇다고 내놓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남북이 통일되면 평화를 위해 내놓겠다’는 거예요.
 
  할 수 없이 ‘〈아리랑〉 필름이 든 케이스라도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호소했지만 여러 핑계를 대며 확인해 주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태워 버렸다’고 공언한 일도 있어요.”
 
  아베 요시시게는 2005년 2월 9일 세상을 떴다. 상속인이 없어 그의 소장품과 5만여 점의 필름은 일본 문화청으로 넘겨졌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문화청은 “아베의 창고를 조사했지만 필름을 찾지 못했다”고 밝혀 의문을 남겼다. 5년 뒤인 2010년 8월 김연갑씨는 일본국립필름센터에서 아베의 소장 필름을 확인했지만 〈아리랑〉 등 한국영화는 단 한 편도 없었다.
 
  — 그렇다면 〈아리랑〉 필름은 어디에 있을까요.
 
  김씨는 “제2의 장소, 제2의 관리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생전 아베가 필름을 찾으러 온 나봉한 감독에게 ‘오사카 근처의 섬 3~4곳에 보관되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또 ‘고베 지진 때 다른 사람이 관리하는 필름창고가 피해를 보았는데 다행히 한국 필름은 거기에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고요. ‘제2의 아베(필름 관리인)’가 고베 인근(오사카 근처)에 있을 것으로 보이나 그가 누군지 여전히 미스터리입니다.”
 
  11년 전 상속인 없이 사망한 아베는, 죽기 직전 변호사를 선임했다고 한다. 변호사에게 유언을 남겨 〈아리랑〉을 포함한 자신의 필름들을 어디론가 숨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연갑씨는 9월 8일 일본으로 출국, 아베의 변호사와 만날 예정이다.
 
  “변호사가 저를 만나 줄지 알 수 없으나 그냥 부딪쳐 보려 합니다.”
 
 
  “한국인이면 〈아리랑〉을 좋아했고 사랑했다”
 
《조선중앙일보》 1936년 2월 6일자 신문 3면에 실린 〈아리랑 3편〉 전면광고. 자료제공=김종욱
  〈아리랑〉은 1926년 10월 1일부터 5일까지 단성사에서 처음 상영된 후 관객의 요구로 전국에서 재상영됐다. 극장 앞은 장사진이었고 지방도 서울 못지않은 대성황이었다. 당시 〈아리랑〉의 인기는 어느 정도였을까. 신문·잡지에 실린 상영 광고 빈도를 조사하면 대강의 윤곽이 그려질 수 있다.
 
  한국영화 연구가 김종욱 선생은 〈아리랑〉 전문가다. 《실록 한국영화총서》와 《춘사 나운규 영화 전작집》을 펴낸 그는 〈아리랑〉의 상영 광고를 실은 당시 일간지(조선·동아·시대·매일·중외·조선중앙 등)를 전수조사했다.
 
  수년간의 수작업으로 1926년 10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영화 〈아리랑〉(1~3편)의 상영 광고 횟수가 542회였음을 확인했다. 이 수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제외한 모든 신문이 1940년 전후로 폐간됐음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수다.
 
  최초의 〈아리랑〉 광고는 《조선일보》 1926년 10월 1일자 3면에 실렸다. ‘웅대한 규모! 대담한 촬영술! 조선 영화 사상의 신기록!’이라는 광고문안과 함께 ‘문전의 옥답은 다 어디 가고 동냥의 쪽박이 웬일인가’라는 아리랑 노래가사 5절이 들어갔는데, 이 문안이 총독부를 발끈하게 만들었다.
 
  이틀 뒤 10월 3일 발행된 《매일신보》에는 5절 가사가 삭제된 대신 ‘근사(謹謝) 초일(初日) 대만원(大滿員)’이라는 글이 들어갔다. 김종욱 선생의 말이다.
 
  “《조선일보》 1926년 10월 1일자 〈아리랑〉 광고문안(아리랑 5절 가사)이 총독부 공안당국을 방해할 가사로 받아들여 문구를 삭제했고 10월 1일자 “《조선일보》 역시 판매금지당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그런 이유에선지, 《조선일보》 본사도 그해 10월 한 달치 신문이, 제가 확인하기로, 보관돼 있지 않아요. 또한 〈아리랑〉 영화 상영 하루 전인 9월 30일, 영화 선전지 1만매를 종로경찰서가 압수한 일도 있습니다. 전단에 실린 노래가사가 ‘공안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말이죠.”
 
  — 개봉 당시 상황을 묘사한다면요.
 
  “2개월 남짓 촬영으로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아리랑〉이 처음 개봉됐어요. 닷새간 상영됐는데 팔걸이가 없는 긴 의자에 200여 명이 끼여 앉아 1시간30분 동안 고생하며 감상해야 했어요. 첫 개봉을 닷새로 한정한 것은 당시 극장 상영규례(規例)가 그랬는데, 밀려드는 외화를 소화할 수 없어 불가피하게 국내영화 상영 일수를 제한할 수밖에 없었죠. 사실, 단성사 첫 개봉에 모인 관객은 1000여 명에 불과했어요. 개봉 첫해(1926년)를 넘겨 단성사가 아닌 조선극장, 우미관 등지에서 〈아리랑〉이 재개봉되면서 인기가 올라갔고 그 파급이 당시 전국적으로 번지게 됐어요.”
 
  — 극장에서는 〈아리랑〉을 어떻게 상영했을까요.
 
  “극장마다 다른데 어떤 극장은 한 번 개봉하면 닷새 동안, 어떤 극장은 하루만 상영하기도 했어요. 〈아리랑〉만 계속 틀 수 없어 중간에 외화를 끼워넣어야 했는데, 대충 하루에 〈아리랑〉을 1~2회씩 상영했다고 추정할 수 있어요. 또 노동자 대회나 천도교 행사 등을 하면서 〈아리랑〉을 상영하기도 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갈 수 있었습니다.”
 
  — 〈아리랑〉 상영 광고가 542회나 된다는 의미는?
 
  “신문에 실린 〈아리랑〉 상영 광고가 19년간 542차례, 관련 신문·잡지의 기사(평론·인터뷰·대담 포함)까지 더하면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당대 〈아리랑〉에 쏠린 대중적 관심은 기네스북에 오를 만하고, 세계 영화사에 한 주제의 영화 한 편이 이처럼 방대한 숫자를 보인 경우는 전무한 일입니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나운규의 〈아리랑〉을 좋아했고 사랑했다는 귀결이 여기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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