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체불명 괴한 자택 맴돌아, 조사해 보니 세모 직원
⊙ 유병언 측 구원파 내 반대세력에 폭력행사
⊙ “탁명환, 유서 환상에 빠져 쓴 것”(유 전 회장 최측근)
⊙ 20년 전 탁씨 분석 現 상황과 묘하게 一致
⊙ 유병언 측 구원파 내 반대세력에 폭력행사
⊙ “탁명환, 유서 환상에 빠져 쓴 것”(유 전 회장 최측근)
⊙ 20년 전 탁씨 분석 現 상황과 묘하게 一致

- (주)세모 유병언 사장이 1991년 7월 30일 오후 검찰에 출두하기 위해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사무실에서 차에 오르면서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1979년 신흥종교문제연구소를 확대한 국제종교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그곳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현대종교》를 통해 사이비종교 및 기독교 이단에 대한 폭로활동을 벌였다. 융화교 사건(교주의 여신도 성폭행), 동방교 비리의 전말 등을 끊임없는 저술(약 25권)을 통해 세상에 알린 것이다.
그의 활동에 우려를 나타내는 시각도 있었다. 이단으로 지목했던 교파(敎派)가 기성교단으로부터 정통으로 인정받고,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사과문을 발표한 전력이 있어서다(1994년 2월 19일 《동아일보》). 그럼에도 탁씨가 국내 사이비종교와 기독교이단 연구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당시 언론의 평(評)이기도 하다.
세간에서 그를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1987년 오대양 사건 때문이다. 탁씨는 당시 오대양 공장의 천장에서 발생한 떼죽음의 배후에 대해 기독교복음침례회(일명 구원파)라는 특정 종파와 관련 사업체(세모·사장 유병언)를 지목했다. 그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는 여전히 검증되지 못했으나, 종교연구가로서의 명성(名聲)을 얻는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사이비종교 감별사’의 삶을 살던 탁씨는 1994년 2월 18일 피살됐다. 살해자는 박윤식 목사(당시 대성교회 담임)의 운전기사 임모씨였다. 임씨는 1994년 4월 14일 첫 공판에서 “평소 탁씨가 박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 비난해 탁씨를 제거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탁명환의 遺書
20년이 흐른 현재(2014년) 탁씨의 죽음이 새삼 재조명받고 있다. 탁씨가 사망하기 전(1991년 3월 13일) 쓴 유서(탁씨는 양심선언서로 표현)에 세월호 참사를 일으킨 청해진해운(세월호 선사)의 실소유주 유병언(兪炳彦) 전(前) 세모그룹 회장이 언급됐기 때문이다. 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밤을 지새우면서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면서 마지막 유서나 다름없는 양심선언서를 씁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신변의 위험 속에서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자살을 택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내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세모의 유병언의 소행임을 밝히면서 그 죄상을 첨부합니다.(이하 생략)>
이 같은 내용은 탁씨의 저서(著書) 《세칭 구원파의 정체》에 나와 있다.
이 부분에서 한 가지 확실히 짚고 넘어갈 점은 탁씨의 유서에 유 전 회장의 이름이 언급돼 있긴 하지만 그가 탁씨의 죽음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실제 수사과정에서 탁씨를 살해한 임모씨가 유 전 회장이나 구원파로부터 어떤 사주를 받았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탁씨가 사망했을 당시 오대양 사건과 관련한 상습사기 혐의로 유 전 회장은 감옥에 있었다.
그럼에도 탁씨가 남긴 유서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서 내용이 사실이라면 유 전 회장이 탁씨 죽음의 배후는 아니지만, 유 전 회장 본인 또는 그와 관련한 자들이 탁씨에게 끊임없이 신변의 위협을 느낄 만한 행동을 한 것 아니냐는 추정이 가능한 탓이다. 앞서 언급했듯 탁씨는 오대양 사건의 배후로 구원파라는 특정 종파와 관련 사업체(세모)를 꼽았다. 유 전 회장 입장에서는 자신의 치부(恥部)를 파고든 탁씨가 달가울 리 없었을 것이다.
長男 탁지일 교수의 증언
그렇다면 실제 유 전 회장 또는 그의 측근들이 탁씨에게 신변의 위협을 가했을까. 사실이라면 어떤 방식으로 탁씨를 두려움에 떨게 했을까.
부친(父親)의 역할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둘째 지원씨에게 문의했다. 신학대 졸업을 앞두고 아버지의 일을 도왔던 지원씨는 피살사건 직후 목사의 꿈을 접고 부친이 설립한 현대종교(과거 국제종교문제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아버지 유서와 관련해서는 큰형이 잘 알고 있다”며 장남인 탁지일 부산장신대 교수를 연결해 줬다. 다음은 탁 교수와의 문답(問答)이다.
—유 전 회장이 언급된 부친의 유서가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자필로 된 유서 원본을 가지고 있습니까.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1991년 7월 3일 구원파와 (주)세모가 관련이 있다고 한 인쇄물에 대해 유 전 회장이 선친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는데, 곧바로 마포서 강력계 형사들이 압수수색 영장도 없이 인쇄물 2000여 장과 원판 필름을 압수해 갔습니다. 그때 유서 원본도 가져간 것으로 압니다.”
—원본이 없는데 부친의 유서가 있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선친께서 그 내용을 저서에 담았기 때문입니다.”
—그 저서가 《세칭 구원파의 정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네.”
—유서 내용이 사실이라면 유 전 회장 또는 그의 측근들이 부친에게 신변의 위협을 느낄 만한 행동을 취한 게 되는데, 객관적 근거가 있는지요.
“선친의 저서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 책 내용을 믿지 못하겠다면 할 말이 없지만, 시판했던 책입니다. 거짓을 적으셨겠습니까. 그쪽(세모)도 선친을 상대로 한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손해배상을 취하했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 아니었겠습니까.”
실제 (주)세모는 1991년 8월 18일 탁씨를 상대로 낸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갑자기 취하했다. 이와 관련, 구원파 핵심 관계자는 “책 내용에 문제가 없어서 소송을 접은 게 아니다”며 “유 전 회장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지만, 오대양 사건과 관련한 상습사기 혐의로 유 전 회장이 구속(1991년 8월 2일)된 후 사기가 떨어진 회사 사람들이 소송을 끌어갈 자신이 없어 취하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과거 탁씨가 《기독공보》에 구원파와 관련한 기사를 실었는데, 이와 관련, 《기독공보》 편집국장이었던 고○○ 목사가 사과문을 내기도 했다”며 “탁씨는 잘못된 이야기를 써 놓고도 자신이 옳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경찰에 신변보호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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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년 5월 3일 오전 승용차 앞바퀴에 장치된 부비트랩이 터져 눈주위 등을 크게 다친 국제종교문제 연구소장 탁명환씨. 그는 이 사건이 ‘사이비 종교인의 테러행위’라고 주장했다. 이 사고는 구원파와는 관련 없다. |
탁씨는 저서에 자신이 어떤 식으로 압박받고 있는지를 꽤 상세하게 적었다. 《세칭 구원파의 정체》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 있을까요?》 등 책에 실린 관련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1987년 10월 19일 충북 보은에서의 들소리자(본인)에 대한 집단폭행 사건 직후, 보은경찰서의 한 간부가 무심코 “오대양 사건을 다룬다고만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흘린 말에서도 이 집단폭행 사건의 배후에 ○○교와 정체불명의 권력층이 도사리고 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 있을까요?》 368페이지>
당시 사건으로 탁씨는 오른쪽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다. 탁 교수는 “선친이 말씀하신 정체불명의 권력층은 유 전 회장 측을 뜻할 것”이라고 했다.
<1990년 12월 10일 밤에 집에 괴전화가 걸려 왔다. 필자가 모처에 여자를 두고 있으니 찾아가 보라는 전화였다. 사흘 후인 13일 다시 협박전화가 걸려 왔다. 필자가 지방출장을 가면서 주차해 놓은 차의 사진과 함께 필자가 사회생활 관계로 안 지인들과 식사하러 가는 장면, 승차한 장면들을 사진으로 만들어 마치 필자가 여자에게 아파트도 사 주고 동거하는 것마냥 비방하는 편지가 ○○○교회 성도로부터 왔다. 12월 19일 내가 몸담았던 ○○○교회 전 제직들 앞으로 이 편지가 두 번씩이나 보내졌다. 12월 24일. 얼굴 없는 범인들은 전국 교회에 성탄카드 대신 필자를 비방하는 괴편지를 보내고 그 후에 또 한 차례 보냈다. 12월 27일. 새벽 2시30분에는 남자의 협박전화가 걸려 왔고 28일 아침 8시에는 경상도 말을 하는 남자로부터 협박전화가 걸려 왔다. 1월 5일에는 ○○○교회 집사를 가장해서 전화를 걸어 협박했다. (중략) 3월 9일 누군가에 의해 필자의 집과 사무실의 전화를 9개월간 도청한 녹음테이프가 전국 교회에 일제히 뿌려졌다. 녹음테이프가 살포되기 20일 전 ○○○(세모 관계자)가 녹음테이프 건을 이야기한 것이 의아하다. 증거가 없으니 어떤 추측도 섣불리 할 수 없긴 하지만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칭 구원파의 정체》 88~8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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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명환씨의 저서 《세칭 구원파의 정체》. |
<1991년 때로는 10여 일간이나 6~7명이 찾아와서 사무실을 점거하고 ‘세모와 오대양이 관련되었다는 증거를 대라’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으나… -《세칭 구원파의 정체》 91 페이지>
<1991년 3월 31일 오전 7시경, 필자가 사는 성북전철역 근처 삼호아파트 주변에는 운동복에다가 운동화를 신고 가죽장갑을 낀 정체불명의 괴한 10여 명이 아파트 주변을 배회하자 관리실에서 이상한 사람들이 서성거린다는 인터폰이 왔다. 밖을 내다보니까 역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늘 테러의 위협이 있는지라 아파트 관리실에서도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 필자는 테러나 납치를 하러 온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112에 긴급신고를 했다. 즉시 경찰순찰차가 달려왔고 그들은 재빨리 도망가는 것이었다.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현장에 남아 있던 한 명을 잡아 불심검문을 하자 그 사나이는 ‘아침 산책을 나온 선량한 시민을 경찰이 괴롭힐 수가 있느냐’고 마구 항의하면서 검문에 불응하다가 끝내 신분증을 내놓았다. 현 거주지가 김포읍 사우리 ○○연립으로 돼 있고 이름은 김○신이었다. 새벽에 김포에서 월계동에까지 운동하러 왔다는 것이 이해가 안 돼 조사해 보니 세모 외주과에 근무하는 자였다. -《세칭 구원파의 정체》 93 페이지>
당시 계속되는 위협을 받은 탁씨는 경찰서에 신변보호를 요청하기도 했다.
1991년 7월 26일 당시 주요 언론은 오대양 사건과 세모 구원파와의 관계를 밝힐 예정인 탁씨가 서울 중랑경찰서와 노원경찰서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가사를 보면 탁씨는 “자택에 괴한이 찾아와 위협한 데다 사무실에도 협박전화가 하루 5~6차례씩 계속 걸려와 신변보호를 요청한다”고 했다.
삼우트레이딩주식회사 직원의 폭력
탁씨는 “유 전 회장 측이 자신들에 반(反)하는 세력에는 가차없이 폭력을 행사했다”며 그 사례를 적기도 했다. 《그들은 이렇게 속았다》에 나온 내용이다.
<대전경찰서는 1983년 2월 15일 삼우트레이딩주식회사(세모그룹의 전신 격) 사장 유병언 외 영업주임 김○○씨와 종업원 김○○씨 등 5명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했음이 뒤늦게 알려졌다. 경찰에 의하면 영업주임 김씨는 1983년 2월 11일 오후 6시30분쯤 회사 종업원 30여 명을 대형 버스에 분승시키고 경기도 부천에 있는 회사를 떠나 그날 밤 11시30분쯤 대전 동구 용전동 문○○씨 집에 찾아가 그곳에 기거 중인 구원파 중앙위원 이○○ 목사와 이○○ 전도사 등이 신도들에게 회사를 중상모략하는 유인물을 돌려 회사가 문을 닫게 됐다고 하면서 이 목사 등을 한 시간 이상이나 감금하고 협박했다는 것이다. 종업원 김씨 등 4명은 전날인 10일에도 문씨 집을 찾아가 목사 이씨에게 욕설을 퍼붓고 횡포를 부렸다. -《그들은 이렇게 속았다》 227페이지>
이 같은 내용은 《한겨레》 1991년 7월 25일 자에도 보도됐다. 이 목사는 1983년 1월 16일과 2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교회와 사업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목사 측은 ‘기독교복음침례회 복음수호를 위한 형제·자매들의 외침’이란 제목의 성명에서 유 전 회장이 건축헌금 등의 명목으로 거둔 엄청난 액수의 돈을 사업에 전용한 점, 유 전 회장과 가까운 신도들이 유씨를 신격화하고 있다는 점 등을 강력히 비판했다. 보도에 따르면 삼우트레이딩 직원들에게 감금 폭행을 당한 이 목사는 자신을 따르던 교인(敎人) 수천 명과 함께 교단(敎團)을 떠났다.
유 전 회장 측 “신변위협 가한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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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세모 사장 유병언씨가 1991년 7월 30일 오후 대전지검에 출두, 검찰청사에 들어가기에 앞서 보도진에 둘러싸여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유 전 회장의 핵심 측근은 유 전 회장 측이 9개월 동안 탁씨를 불법 도청한 녹음테이프를 전국 교회에 뿌렸을 가능성이 크다는 탁씨의 주장에 대해 “저희가 거대한 권력집단이나 정보기관이 아닌데 어떻게 도청을 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하고 “당시 녹음테이프에는 여자랑 통화한 내용이 있는데 그것이 밝혀지니까 우리에게 덮어씌운 것”이라고 했다. 그는 탁씨가 유 전 회장의 이름을 거론한 유서에 대해서도 “본인이 우리를 많이 공격하다 보니 생긴 환상”이라고 일갈했다.
자신을 구원파 평신도라고 소개한 관계자는 “탁명환씨는 이단 사이비를 쫓는 사람이다 보니 신변의 위협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구원파)는 살해위협을 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며 “누구든 세월호 침몰사건에 묻혀 유 전 회장을 살인마로 몰아간다면 법의 판단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는 저희 쪽에서 (탁씨에게) 테러를 가하거나 위협을 가한 적은 단 한 건도 없다”며 “탁씨를 폭행하거나 구타한 사람들과 저희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했다.
유 전 회장과 탁씨의 악연(惡緣)은 197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원파의 창시자로 알려진 권신찬 목사는 1961년 11월 네덜란드 선교사 케이스 글라스(한국명 이기수)로부터 ‘죄사함’을 깨닫고 대구에서 개척활동을 시작했다. 특유의 달변으로 주로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신도(信徒) 수를 늘려 가던 권 목사는 이곳에서 선교사를 통해 청년이었던 유 전 회장을 만났다. 뜻이 맞았던 두 사람은 힘을 합쳐 대구를 비롯하여 안양, 서울, 인천 등지까지 교세를 넓혀 나갔다. 당시 유 전 회장은 저소득층 주민들을 상대로 말세론과 통용의 교리를 강조하면서 전도활동을 해 열성적인 청년 전도사로 통했다.
탁명환과 유병언 惡緣 언제부터 시작됐나?
이 과정에서 유 전 회장은 66년 권 목사의 큰딸 윤자씨와 결혼, 두 사람은 장인 사위의 관계까지 맺었다. 윤자씨는 연예계 대표적 구원파 신도로 2009년부터 청해진해운의 지주회사인 아이원아이홀딩스 이사, 노른자쇼핑의 대표이사, 유 전 회장의 경기도 안성 소재 구원파 종교시설인 금수원의 이사를 맡고 있는 탤런트 전양자씨와 친자매처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권신찬 목사의 딸이자 유 전 회장 부인인 권윤자씨와 친자매처럼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유 전 회장 부부와 자주 어울리기도 했습니다.”(전양자씨 1991년 8월 1일 자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그해(66년) 2월 권 목사는 현(現) 《극동방송》의 전신인 국제복음주의방송 선교부장으로 부임, 매일 새벽 ‘은혜의 아침’이라는 선교방송을 통해 수많은 청취자를 사로잡았다. 당시 대구에서 개척활동을 해 오던 유 전 회장은 72년 《극동방송》에 부국장으로 입사, 권 목사와 함께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한국 평신도복음선교회라는 이름 아래 계속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이때 방송을 통한 전도는 구원파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탁씨가 이들을 처음 만나게 된 게 바로 이때(72년)다. 당시 신흥종교연구소장으로 있던 탁씨는 극동방송 선교 프로에 게스트로 출연, 계룡산 등지의 사이비종교와 기독교 이단파들에 대한 강연을 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관계자는 “이때부터 탁씨는 종교계의 스타로 부상, 자타가 공인하는 ‘이단 감별사’로서의 자리를 굳히게 됐다”고 했다.
권 목사와 유씨로부터 탁씨가 등을 돌리게 된 시점은 지난 74년 2월 장로교통합기관지인 《기독공보》에 ‘구원파 신도들, 남녀혼숙 등 이단행위 일삼아’ 등의 기사가 실린 데서 비롯됐다. 탁씨는 《세칭 구원파의 정체》에서 당시 상황을 이같이 설명했다.
“1973년 필자의 요청으로 권씨를 만나 인터뷰를 한 결과 앞으로 무서운 이단이 한국교회 주변에서 일어나 위세를 떨치게 될 징후를 권씨의 말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탁씨의 기사를 계기로 74년 ‘새벽머리맡의 감로수’로 불리던 권 목사는 기존 교단으로부터 십자포화를 받고 유씨와 함께 《극동방송》을 떠났다.
당시 탁씨의 기사는 《기독공보》 측의 일간지 사과광고 게재로 일단락됐지만 구원파 측에서는 아직도 “당시의 상황은 반 구원파 측의 지원을 얻으려는 탁씨의 계획된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구원파는 83년 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에서 이단으로 지목됐다. 이후 탁씨와 권 목사, 유 전 회장의 악연은 탁씨가 살해된 94년까지 계속 이어졌다.
1990년대 언론 보도에 따르면 구원파가 내거는 신조는 ▲신구약 성서를 예언서로 취급하되 ▲하느님의 보편성은 부인하며 ▲천년왕국설을 믿는다는 것이다.
특히 구원파는 ▲조직이나 건물은 교회가 아니고 거듭난 자가 바로 교회라며 유형교회를 부정하는 등 조직개념이 별로 없고 ▲목사나 교회보다는 평신도를 중시하며 ▲예배라는 용어보다 모임이란 말을 더 자주 쓸 만큼 평신도 간의 유대를 강조, 주로 공동체생활을 추구하고 있다.
公權力 우습게 보는 유 전 회장 一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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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4년 3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삼우트레이딩 부천공장에 들러 근로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이 이 회사 대표 유병언씨. |
무엇이 유씨 가족을 배짱 부리게 하였을까. 정·관계 세력의 비호(庇護)가 작용한 것은 아닐까.
실제 대균씨는 평상시 ‘정·재계’의 고위층 인맥을 과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5월 12일 자 《동아일보》는 2004년 유씨를 처음 만나 10년 이상 교류했다는 사업가 A씨의 이야기를 통해 대균씨의 ‘정·재계’ 인맥이 상당하다고 보도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A씨는 유씨가 12일 오전 검찰 소환 조사를 앞두고 “검찰 수사에 자신감을 표현했다”며 “평소 (유씨가 나에게) ‘검찰에서 안 풀리면 언제든 내게 연락하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유씨가 정·재계 고위층과 두터운 교분을 쌓고 있다는 걸 과시하면서 자신감을 드러낸 대목이다.〉
사건이 생기면 국정원 직원이 직접 와서 유씨와 상의하기도 하고 검사에게도 부탁했다는 증언도 있다. 유 전 회장이 오라고 하면 오고, 하라고 하면 하는 권력기관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출입국관리사무소와 미리 다 짜고서 통과한다. 그런 전화를 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권력 실세가 유 전 회장을 비호한다는 의혹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오대양·세모 비리사건을 수사할 때도 끊임없이 나돌았다. 유 전 회장이 1985년 유수의 조선업체들을 따돌리고 한강유람선 사업을 따내는 데 권력층과의 유착이 있다는 정황들이 발견됐다. 유 전 회장 스스로 청와대 고위층과 친분이 있다는 말을 하고 다닐 정도였다(1991년 7월 31일 《한겨레》).
유 전 회장의 옆에서 9년간 통역을 돕다가 77년 구원파를 탈퇴한 정동섭 전 침신대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5·6공 당시 유 전 회장은 민정당 재정위원과 월계수회 회원으로 막강한 권력과 재력을 등에 업고 있었다”고 했다.
당시 자료를 확인해 보니 유 전 회장이 민정당 재정위원이었던 것은 사실었다. 재정위원이었던 그는 1991년 2월 9일에 열린 민자당 창당 기념식에서 모범당원 표창을 받았다. 그가 표창을 받은 사실은 당시 민자당 중앙당의 ‘모범당원 표창명부’와 《민주자유보》의 표창자 명단을 통해 확인했다. 이는 1991년 8월 15일 자 《조선일보》에도 잘 나와 있다.
민자당도 이런 사실을 인정했다. 월계수회 회원 여부는 확실치 않다. 월계수회와 세모의 관계를 짐작게 하는 일화가 많긴 했지만 유 전 회장이 월계수회 회원이었다는 결정적 증거는 없었다. 유 전 회장의 측근은 “민자당 후원위원이었던 것은 맞지만, 월계수회 회원은 아니었다”고 했다. 월계수회는 87년 대통령선거 때 노태우 후보의 당선을 위해 박철언(朴哲彦) 정무1장관이 사실상 조직 관리하고 주도해 온 여권 내 최대 사조직이었다.
유 전 회장 측 관계자는 “롯데호텔에서 자연기금 바자회를 여는데 노태우 당시 내무장관이 바빠서 부인 김옥숙 여사가 대신 참석했다”며 “유 전 회장이 김 여사에게 사모님 소리도 안 하고, 같이 테이프 커팅도 하지 않았다. 이후 엄청나게 고생했다. 전경환씨와 가깝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데 유 전 회장은 전씨를 개인적으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5·6공 때 비호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라고 했다.
사정 당국에 유병언 장학생 포진?
탁씨는 《세칭 구원파의 정체》에서 검찰, 경찰 등 사정 당국이 유 전 회장을 비호해 준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을 밝히기도 했다.
<1990년 11월 23일 유병언을 대리한 세모 상무 ○○○씨의 고소 건에 대한 2차 조사를 받기 위해 중랑경찰서로 갔다. 1차 조사 때와는 담당 경찰관의 태도가 180도 달라져 있었다. 뭔가 있다고 직감했다. 한 형사가 필자에게 신호를 보내 그를 따라 나갔더니 ‘세모 측에서 서장에게 로비하고 갔다’고 귀띔했다. 담당 형사는 권신찬(유 전 회장의 장인)의 친척으로 알려진 서장에게 불려 올라가 (나를)구속할 수 있도록 조서를 꾸미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전했다.>
<세모 측은 필자를 구속할 음모를 짜 가지고 권신찬의 친척인 K검사 지원하에 로비활동을 했다.>
<도대체 유병언이란 자가 무슨 거물급 인사라고 민원사건인 고소사건을 9개월간이나 중랑서→마포서→대구남부서→마포서→중랑서→검찰청 등으로 핑퐁식 수사로 사건처리를 지연시킨단 말인가.>
<구원파와 세모가 관련이 있다고 한 인쇄물에 대해 유병언이 본인에 대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자 마포서 강력계 형사들이 압수수색 영장도 없이 인쇄물 2000여 장과 원판 필름을 압수하는가 하면 몇 주일을 잠복근무까지 했다. 명예훼손 사건에 강력계 형사들이 배당된 의도가 의심스럽다.>
1991년 7월 30일 《조선일보》도 “유씨 피소 10회 모두 무혐의 검-경 왜 미온 처리했나”라는 제목의 기사로 탁씨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당시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찰과 검찰이 그동안 유병언씨에 대한 고소·진정사건을 다루면서 대부분 무혐의 처리하거나 혐의사실이 확인된 경우에도 미온적으로 처리한 것으로 드러나 수사과정에 배후가 있지 않나 하는 의혹을 사고 있다.(중략) 오대양의 배후에 세모가 있다고 폭로한 현대종교 발행인 탁명환씨와 유씨가 90년 11월 서울 중랑경찰서에 맞고소한 사건에서도 탁씨가 고소당한 사건은 2달 만에 검찰로 넘어갔으나 유씨가 고소당한 사건은 중랑경찰서에서 서울-대구의 4개 경찰서를 오가며 8개월 동안 처리가 늦어지다 최근에야 검찰에 송치됐다. 중랑경찰서는 집단자살로 오대양 사건이 다시 사회문제가 되자 세모로 유씨를 찾아가 서둘러 진술서를 받고 사건을 서울지검 북부지청으로 넘긴 것으로 밝혀졌다.(중략) 치안본부 한 관계자는 “맞고소가 들어온 경우 접수 경찰서에서 일괄처리하는 것이 관례이며 신원이 확실한 저명인사의 수사를 주소지 관할경찰서를 이유로 8개월간 떠넘긴 것은 경찰이 유씨 수사에 소극적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 같은 비호설은 오대양 사건과 관련한 검찰 수사 결과 흐지부지됐다.
하지만 탁 교수는 유 회장 측이 정·관계에 심어 놓은 ‘장학생’들이 있을 것으로 봤다. 이용욱 전 해경 정보국장과 같은 인물이 그렇다는 주장이다. 세월호 침몰 사고 초기 수사를 맡은 이 전 국장은 기독교복음침례회(세칭 구원파) 신자였으며 한때 세모그룹에서 일했던 것으로 드러나 경질됐다.
이와 관련, 이 전 국장은 “세모그룹에서 근무한 것은 사실이지만 말단 직원이어서 유병언 전 회장과 만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또 “대학에 들어가기 전 구원파에서 생활했고 거기와의 인연은 퇴사 후 모두 끝났다”고 했다. ‘세모’ 경력은 있지만 ‘유병언 키즈(kids)’는 사실무근이란 얘기다.
소위 말하는 사정 당국의 ‘유병언 장학생’ 논란과 관련, 구원파 측 관계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는 “교인 중에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그 인맥을 따라가다 보면 그런(사정 당국 관계자) 사람들이 한둘 있을 수 있지만, 의도적으로 측근을 사정 당국에 포진시킨다는 게 말이 되는 이야기냐”고 말했다.
탁명환씨의 20년 전 유씨 행적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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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병언 일가의 관계자들 보유 지분 구조. |
<유병언의 상투적인 수법은 자신은 쑥 빠지고 직원들을 시켜 일을 저지르고 문제가 되더라도 자기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뗀다. 그뿐 아니라 신문에 광고를 낼 때도 세모 직원 일동이나 세모 오대양 진상규명대책위원회 등 대표자 이름을 밝히지 않고 만약 문제가 되면 회피하는 방법을 쓴다. 필자가 유병언을 고소했던 명예훼손 사건도 그런 식으로 빠져나갔다.>
현재 유 전 회장 측은 청해진해운에 지분이나 직책이 없는 만큼 세월호 사고와 유 전 회장은 아무 관련이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해 오고 있다. 20년 전 탁씨의 분석과 묘하게 일치한다.
서지문(徐之文) 고려대 명예교수는 《프리미엄조선》에 ‘그립네요, 탁명환씨’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올렸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세월호’가 소속된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가 1980년대의 악명 높은 오대양 사건 배후로 지목되었던 유병언이라고 하니까 그의 교단인 ‘구원파’를 비롯한 우리나라 사이비종교의 실상을 폭로하다가 1994년 살해된 탁명환씨가 기억났다. 나는 탁명환씨와 안면도 없고 그의 성품이나 인격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일생 우리나라 사이비종교들의 허황된 교리와 신자를 유인해서 옭아매는 수법, 신자의 이탈을 막기 위한 잔인한 폭력을 용감하게 폭로했고, 그 때문에 여러 번 습격을 당했으며 결국 살해당한 것이 틀림없으리라고 본다.(중략) 탁명환씨가 좀 더 살아서 구원파의 실체를 계속 낱낱이 폭로했더라면 세월호 사건은 방지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탁씨의 저서 내용 중에는 사실도 있고, 추측도 있을 것이다. 사실이 아닐 개연성도 당연히 있다. 다만 탁씨가 말한 유 전 회장 측의 수법이 오늘날 유씨 일가의 행동과 닮은 점이 많은 것은 눈길을 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