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기 위해 많은 청년들이 전쟁에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후에도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무리한 저항을 말렸다.
하지만 지금도 國父로 추앙받고 있다.
嚴相益
⊙ 1954년 경기도 평택 출생.
⊙ 경기고·고려대 법대 졸업.
⊙ 군법무관시험, 사법고시 합격. 大盜 조세형, 탈주범 신창원, 탈북 난민 한영숙씨 사건 등 변호.
⊙ 수필집: <변호사와 연탄 구루마> <욕심그릇이 작을수록 자유롭다> <하나님 엄변호삽니다>
<은빛남자의 금빛이야기> 등.
소설: <여대생 살해사건> <검은 허수아비>,
논문: <미국과 프랑스의 언론법 비교>.
하지만 지금도 國父로 추앙받고 있다.
嚴相益
⊙ 1954년 경기도 평택 출생.
⊙ 경기고·고려대 법대 졸업.
⊙ 군법무관시험, 사법고시 합격. 大盜 조세형, 탈주범 신창원, 탈북 난민 한영숙씨 사건 등 변호.
⊙ 수필집: <변호사와 연탄 구루마> <욕심그릇이 작을수록 자유롭다> <하나님 엄변호삽니다>
<은빛남자의 금빛이야기> 등.
소설: <여대생 살해사건> <검은 허수아비>,
논문: <미국과 프랑스의 언론법 비교>.

- 친일파 시비에 휘말렸던 신현확 전 국무총리.
이어서 무용가 崔承喜(최승희)를 비롯해 日帝(일제)시대의 화가, 음악가, 그리고 시인들의 흑백사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들이 모두 親日派(친일파)라는 내레이션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친일이라는 죄를 지으면 뼈까지 삭은 후에도 편치 못한 것 같았다. 우리 민족의 모든 불행이 친일파 때문이라고 했다. 친일파가 정리되어야 우리의 민족정기가 살아난다고 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어 발표하겠다는 기자회견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시민들이 한푼 두푼 낸 성금으로 민족문제연구소는 위대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신현확 전 총리가 친일파라는 말은 얼핏 납득이 가지 않았다. 신 전 총리는 친구의 아버지였다. 일제시대에 고등문관시험(행정고시)에 합격한 그는 평생 나쁜 일이라곤 조금도 하지 않은 분으로 알고 있었다.
중·고교 동창인 申喆湜(신철식) 차관(전 국무조정실 정책차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일제시대에 고등문관 시험에 수석합격한 아버지에 이어 행정고시에 합격한 그는 평생 관료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 고교 시절 나는 그와 같은 반의 짝이었다. 서로 집을 오가면서 같이 잠도 자고 밥도 먹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했다. 아버지의 서재에 몰래 나를 데려가 책상 위의 낡은 서류철 한 권을 손에 집어들고 자랑했었다. 아버지가 부흥부장관 시절(1959~60년)에 수립한 경제발전계획이라고 했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공무원은 아버지 신현확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친일파래”
시청 앞 광장 근처에서 친구인 그를 만나기로 했다. 그 무렵 매일 밤 수만 명이 모여 촛불시위를 하고 있었다. 친일파 매국노 같은 쇠고기 수입 협상대표들이 식탁 주권을 미국에 팔아넘겼다는 것이다. 40대의 여성이 청계광장에 나온 중·고교생 앞에서 이렇게 외쳐댔다.
“대통령 한 놈만 국민 무서운 걸 모르고 있습니다.”
저주와 증오가 난무했다. 중학생들까지 쇠파이프를 들고 경찰에게 덤벼들었다. 경복궁 담 위에 올라가고 가로수 버팀목을 뽑아 광화문 네거리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술판을 벌였다. 그런데도 방송은 평화시위라면서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주최측도 문화행사라고 주장했다.
현장에서 보이는 섬뜩한 구호와 충혈된 눈은 우리 사회의 분열증상을 느끼게 했다. 같은 사실도 시각에 따라, 편에 따라 전혀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찍힌 쇠고기협상대표는 무조건 친일파 매국노가 됐다. 나는 그런 세월을 살고 있었다.
빌딩 지하다방에서 친구 신철식 차관을 만났다. 평소 온유하던 그가 분노로 얼굴이 새까맣게 타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우리 아버지가 친일파래. 그러면서 친일인명사전이라는 인간 쓰레기통에 아버지를 처넣겠다는 거야.”
내가 물었다.
―왜 친일파래?
“아버지가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고 사무관으로 근무한 것 때문에 그렇다는 거야.”
―지금으로 치면 行試(행시)에 합격하고 사무관에 임명된 걸 친일파라는 거야? 그러면 그 시절 체제 내의 엘리트는 다 친일파게?”
친구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연구소의 소장이라는 분과 만났어. 아버지의 일제시대 행적을 자세히 얘기해 줬지. 아버지는 광복 전에 일본 경찰의 수배자가 됐었는데 친일파로 몰다니 말도 안돼. 당시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분의 진술서까지 증거로 제출했어. 그런데도 안 믿나 봐. 친일파로 인명사전에 수록해서 발표하겠대.”
‘친일파’란 용어의 파괴력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기자회견을 할 당시 친일파로 지목된 인물들의 가족들이 몰려와 강하게 반발하는 장면이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때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니들이 뭔데 임마, 니들이…. 아무나 친일파야?”
“니들이 뭔데?”라는 외침 속에는 “누가 너희에게 역사의 심판권을 줬느냐?”는 항의가 들어 있었다. 국민이 동의할 근거가 있어야 했다. 친구에게 물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公的(공적) 기관인가?
“아니지. 私設(사설)단체에 불과하지.”
―연구소라고 하면 전부 학자들인가?
“아닌 것 같아. 운동을 하던 사람부터 여러 종류야.”
뭔가 이상했다. 우리 사회에서 친일파란 용어의 파괴력은 대단하다. 한 사설 연구소에 그런 식으로 한 인간을 단죄할 권한은 아무도 주지 않았다. 對外的(대외적)으로 그렇게 발표를 하는 행위는 이미 연구의 한계를 넘은 것이다. 예컨대 신철식 차관이 장관이 된다고 가정할 때, 아버지가 친일파로 낙인 찍히면 절대로 청문회를 통과하기 어렵다. 누가 판단하건 친일파라는 낙인은 후손에게 치명적인 장애물이 될 수 있는 것이 우리 사회였다.
나는 일단 논쟁 장소를 연구소에서 법정으로 옮기기로 했다. 신현확 전 총리를 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시켜 달라는 假(가)처분신청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신청 이유는 이랬다.
<인격권으로서의 명예권은 일생을 청빈하게 살아온 관료나 그 자손에게는 생명같이 소중한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명예권에 대해 회복하기 어려운 위험이 닥칠 경우 事前的(사전적)인 금지가 허용되는 것이 우리 대법원의 입장이기도 합니다.(대법원 2005.1.17 선고 2003마1477 참조)
신현확 전 총리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주춧돌 같은 존재입니다. 그는 부흥부장관으로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을 모시고 대한민국을 위해 일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오늘의 경제대국을 만들었습니다.
반면 친일파란 개념은 아직도 구체적으로 정의되지 않은 추상적 개념입니다. 그 용어의 현실적 파괴력에 비추어 볼 때 한 인간에게 친일파란 낙인을 찍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마땅하다는 의견입니다.>
이어서 나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국회 공청회 당시 발표한 내용을 인용했다.
친일파란 무엇인가?
![]() |
|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체포된 친일파들이 법정에 출두하고 있다. |
1904년 한일의정서를 체결할 때 李址鎔(이지용)이 1만원의 운동비를, 을사조약 체결시 이토 히로부미가 300만원을 갖고 들어와서 대신들에게 뇌물을 풀었다고 합니다. 현재 자료상 확인되는 것은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실제로 거액의 기밀비를 일본 외무성에 요청한 사실이 있고, 그 구체적인 사용내역이 일본 외무성에 있다고 합니다.
일제의 공식적이고 체계적인 보상, 다시 말하면 우리 입장에서 보면 매국행위의 대가는 합병 직후 이루어진 爵位(작위)의 수여와 恩賜金(은사금) 지급과정을 통해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구체적으로 1910년에 발표된 귀족령에 의해 일본은 조선인에게 작위를 부여하고 은사금을 지급하게 되는데 그 귀족령 제3조를 보면 ‘공로가 있는 조선인’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나라를 팔아넘긴 것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측은 국회 공청회에서 친일파는 그런 친일 매국형으로 한정해야 객관성과 투명성이 있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나는 최근 한 교수의 책에서 본 내용도 덧붙였다.
<安秉直(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친일파로 몰아버리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없어지는데 친일파 거론의 저의가 있다는 의견을 개진하고 있습니다. 신현확 국무총리가 일제시대 사무관이 됐던 사실을 확대해서 친일파로 단죄하는 것 역시 맥락을 같이한다고 봅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반박
이상의 주장을 담은 문서는 법원을 통해 민족문제연구소에 전달됐다. 이어 민족문제연구소 측의 반박서면이 법원을 통해 나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재판에서 이쪽과 저쪽이 서로 주고받는 준비서면을 통해 논쟁이 이루어지는 게 보통이다. 연구소 측은 전문용어를 사용해 가면서 나의 무식을 꾸짖기 시작했다.
<舊韓末(구한말) 독립신문을 보면 동학혁명군을 匪賊(비적)이라고 칭하면서도 영국·프랑스의 제국주의를 찬양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상적 한계 때문에 친일은 구조적인 문제이지 한 개인의 단순한 양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목적은 구조화된 파시즘적 지배구조와 사상을 청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제 식민통치를 체험한 일반 민중들에게 말단 관리나 순사들이 악질적인 친일파로 각인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유의해야 할 점은 이들이 지배체제의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면의 현실입니다.
이들이 가혹한 행위를 자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강고한 식민지 지배체제의 상부구조가 작동하고 있으며, 따라서 식민통치의 상부구조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폭압적 지배의 책임을 면할 수 없음이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현확의 경우는 일제 말기 국가총동원체제의 핵심인 軍需省(군수성)의 軍需官補(군수관보)로 근무하다가 군수관으로 승진하였다는 점에서 고의성이 높다고 할 것입니다. 신현확은 히라바야시 유우코쿠로 창씨개명을 합니다.
신현확이 근무할 당시 일본 제국주의는 戰時(전시)동원체제를 대폭 강화하여 민중에 대한 수탈이 극에 달할 때였습니다. 획일적인 파시즘적 지배체제가 구축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군수성은 제국주의 침략의 중심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신현확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협력했습니다. 그는 광복 전 군수성을 이탈하여 일제의 수배를 받았다고 항의하고 있습니다. 신현확이 군수성을 이탈하여 수배를 받았다면 군수관보에서 군수관으로 승진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명백한 허위 주장입니다. 신현확은 생전에 일제의 공무원 근무를 이탈했다는 주장을 한 적이 없습니다. 신현확은 月刊朝鮮(월간조선) 1988년 11월호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시 나는 일본 동북구 센다이에서 군수관리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가만히 전황을 보니 일본은 곧 망할 게 틀림없었어요. 마침 한 열흘쯤 한국으로 출장을 갈 일이 생겨 현해탄을 건넜지요. 그 길로 나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일본에 돌아가질 않고 왜관에서 아버님을 모시고 3년 전부터 병원을 개업하고 있는 큰형님댁에 눌러앉아 버렸습니다. 말하자면 근무지 이탈이라면 이탈인 셈입니다.”
수배중인 사람이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을 개업하고 있는 큰형님 집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친척들도 모르는 은밀한 곳에 숨었을 것입니다. 물론 위 인터뷰의 내용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신현확이 이완용보다 더한 친일파?
그들의 반박문을 읽으면서 나는 혼란을 느꼈다. 내게 역사의식이나 사회의식이 결여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에 다닐 때 교과서에서 ‘동학란’이라고 배웠다. 또 조선말기에 민란이 많이 일어났다고 배웠다. 성공하면 혁명군이고 실패하면 역적 내지 비적이었다.
독립신문을 만든 개화파들이 영국·프랑스의 제국주의를 찬양했다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들이 영국과 프랑스를 배우자고 한 것은 발달된 西歐(서구)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이자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게 제국주의를 찬양한 것이라는 해석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게 많은 것 같았다. 연구소는 신현확이란 인물에 대해 이렇게 결론지었다.
<결국 신현확의 행위는 친일을 넘어 국제범죄에 협력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현확은 민족을 탄압하는 것을 넘어서 중일전쟁·태평양전쟁으로 수천만의 민중을 학살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군수물자를 관리하는 군수관의 역할을 담당한 것입니다. 신현확은 우리가 친일파로 인식하고 있는 李完用(이완용)보다 국제사회에는 더욱 극심한 피해를 끼친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갓 고시에 합격해서 20대 초반의 나이에 초급 관료에 임명된 사실을 너무 거창하게 확대해석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안경인 ‘구조론’으로 보면 괴물이 상당히 탄생할 것 같았다. 그런 안경을 통해서는 관료라는 입고 있는 옷만 보이지, 몸통인 인간 자체는 잘 안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 구조론이라면 사업가나 당시 체제 내에 존재하던 지식인·지주들은 어떻게 보일까 의문이 일었다.
이런 얘기가 있다. 선생님이 백지에 점을 하나 찍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뭐가 보이냐”고. 아이들은 “점이 보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너희는 점이 보이지만, 나는 점보다 훨씬 넓고 큰 흰 면이 보인다”고 했다.
인간 신현확의 진면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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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9년 39세의 신현확(왼쪽에서 두 번째)은 부흥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맨 오른쪽이 후일 3·15부정선거의 주범으로 지목돼 처형된 최인규 내무장관이다. |
신현확은 시대의 고비마다 고위 관직에 있었다. 이를테면 남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셈이다. 독일 속담에 “나무 위의 원숭이는 엉덩이를 숨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신현확은 1920년 10월 29일 경북 칠곡군 양목에서 출생했다. 그는 23세인 1943년경 경성대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고문) 행정과에 합격한 후 일본 상공성 사무관으로 임명됐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조선총독부나 조선 내에서 관직을 맡은 이는 여럿 있지만 신현확처럼 식민지 본국 정부의 사무관으로 활동한 사람은 일제 36년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다. 이 사실은 신현확이 비범한 인재였음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겠다.
상공성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군수성으로 이름이 바뀌어 태평양전쟁을 치르는 데 있어 군수물자 생산 및 조달 등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군수성에서 엘리트 관료의 길을 걷던 신현확은 어느 날 갑자기 직장을 무단 이탈한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로서는 출세를 포기하는 행위였다.
일제시대에 그가 특별한 친일활동을 했다는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광복 후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반민족행위자 처벌 특별위원회(반민특위)에서는 친일파를 색출, 단죄했다. 당시 대구대학 교수이던 신현확이 친일의 혐의를 받은 적은 없었다.
신현확은 李承晩(이승만) 정부 출범 후 상공부 공업국 공정과장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공업에 대한 체계적 지식을 두루 갖춘 인재가 귀했던 시절이라 그는 상공부에서 광업국장, 전기국장, 공업국장 등 4대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공업발전, 6·25 전란으로 폐허가 된 공업시설의 전후복구에 전력투구했다. 그는 한강철교 개통, 충주비료공장 건설, 화천수력발전소 복구 등 수많은 건설 사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미국의 원조를 성사시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그를 본 아이젠하워 美(미)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미스터 신과 같이 우수한 관리를 거느리고 있는 당신이 부럽다”고 말했다. 이 사실은 당시 신문 1면에 보도됐다.
“저에게 사형을 선고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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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두순시를 나온 박정희 대통령을 안내하는 신현확 보건사회부 장관(왼쪽에서 두 번째). |
제1공화국 시절,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산업개발 제1차 3개년 계획’과 ‘제2차 3개년 계획’의 수립이었다. 이 계획들은 5·16 후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이어졌다. 정치 르포라이터 송우씨는 젊은 신현확 장관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3·15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경북 출신인 신현확 장관이 선거 격려차 대구에 왔다. 김천·선산·구미 등지에서 동원된 청중이 대구의 철길가에 운집했다.
청중은 당연히 신현확 장관이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붕을 뽑아 달라고 연설할 것으로 예상했다. 다른 모든 장관과 공직자들이 총동원되어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 장관의 입에서는 이승만의 ‘이’자도 나오지 않았다. 신현확 장관은 오직 조국의 부흥만을 역설하다가 “누가 조국을 부흥시킬 수 있는 사람인가는 유능한 유권자들이 스스로 판단하라”고 연설을 끝맺었다. 신현확 장관이 연설을 마치고 단하로 내려올 때 모여 있던 사람들이 감탄해서 소리쳤다.
“야, 저런 훌륭한 장관도 있구나.”
비록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모시고 장관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대쪽 같은 인물이었다.>
4·19 이후, 이승만 정권 마지막 내각의 각료였던 신현확에게는 쓰나미 같은 불행이 닥쳤다. 장면 정권은 물론 5·16 군사정권에서도 부정선거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은 것이다. 정작 부정선거를 획책한 다른 장관들은 변명하기에 바빴지만, 신현확은 달랐다.
“자유당 정권에 의해 조직적인 선거부정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 때문에 나라가 뒤집어졌고, 그것 때문에 정권이 무너졌고, 이런 사태가 일어났으면 그걸 책임질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국무위원이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저는 국무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져야 하겠습니다. 저에게 사형을 선고해 주십시오. 저는 책임이 있다고 인정하고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가정을 하나 하겠습니다. 만약 새 인생을 살 기회가 나에게 다시 주어진다면 나는 지금까지 해 온 것과 똑같이 하겠습니다.”
신현확은 그 재판에서 징역 7년6월을 선고 받았다.
그가 ‘부정선거의 원흉’으로 몰려 실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3년이 넘게 생활하던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이 그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박 대통령은 석방된 그를 불러 상공부 장관 자리를 권했다. 혁명재판정에서의 그의 최후진술에 감동한 것이다.
신현확은 박정희 대통령의 장관 제의를 거절했다. 박정희는 1964년 그를 경제과학심의회 상임위원으로 임명했다가, 1974년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입각시켰다.
권력자 앞에서도 소신 있게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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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현확 전 총리는 신군부가 5·17계엄확대 조치를 취한 후인 1980년 5월 20일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
당시 각료의 대다수가 반대 입장이었다. 의사 집단의 반발이 대단했다. 신현확 장관은 장관직을 내걸고 대통령과의 담판을 통해 정책을 실현시켰다. 그 결과 적어도 이 나라에선 돈이 없어 병원에 가 보지도 못하고 끙끙 앓는 ‘有錢無病(유전무병) 無錢有病(무전유병)’의 설움은 없애자는 목표를 달성하게 됐다. 당시 의료보험정책이 실행되지 못했다면 오늘날 전 국민이 의료보험의 혜택을 누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8년 신현확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임명했다. 신현확 부총리는 대통령 앞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
1979년 청와대에서 ‘농가주택개량사업 업무보고’가 있었다. 이 업무보고에서 대통령은 농가개량 규모를 당초 안인 9만 호보다 더 늘리라고 했다. 그런데 신현확 부총리는 3만 호로 대폭 감축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래도 6만 호는 해야 하는 것 아니오?”라면서 타협안을 제시했다. 신 부총리는 단호하게 “안되겠습니다”라고 했다. 경제안정 기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건설 자재값과 건설 노임 상승 등을 불러올 수 있는 농가주택 개량사업을 축소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래도 박정희는 신현확을 계속 중용했다. 경제를 위해서는 어떤 외압이나 정치논리와도 타협하지 않는 그의 성품을 높이 산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 밤 金載圭(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했다. 김재규는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육본 벙커에서 각료들을 불러들였다. 최고 권력자의 유고라는 사상 초유의 상황을 맞아 권총을 찬 김재규는 비상소집된 국무위원들에게 독 오른 목소리로 계엄령 선포를 요구했다. 뒤늦게 육본에 도착한 신현확 부총리는 앞에 있던 김재규에게 따져 물었다.
―대통령 有故(유고)의 내용이 뭡니까?
“그것은 밝힐 수 없습니다.”
―다치셨습니까, 아니면 갑자기 병이 났습니까?
“그건 밝힐 수 없습니다. 비밀에 부쳐야 합니다.”
―유고의 내용도 모르고 어떻게 비상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습니까?
이처럼 김재규를 집요하게 추궁하는 바람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자신이 집권을 하려던 김재규의 계획은 무산됐고, 그는 全斗煥(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체포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 시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침묵을 지킨 崔圭夏(최규하) 국무총리 등 국무위원들은 서슬 퍼런 김재규의 언동에 우유부단한 행동을 하거나 기회주의적으로 처신을 했으나 오직 신현확 부총리만이 목숨을 걸고 자기 할 일을 다 한 덕에 김재규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신현확은 또 ‘서울의 봄’ 당시 국무총리로서 최규하 대통령을 보좌하면서 헌법 개정, 민주정부 수립을 추진했으나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보위 설치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는 신군부의 드라이브에 밀려 1980년 5월 17일 내각 총사퇴를 하고 역사의 전면에서 물러났다.
그는 1980년 봄 수차에 걸쳐 최규하 대통령에게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직’을 반대했으나 권력에 눈이 먼 최규하 대통령의 기회주의적 행동으로 인해 민주정부 수립의 꿈은 좌절됐다.
신현확의 기나긴 인생역정을 보면 분명히 일관성이 있었다. 그는 옳고 그름에 따라 반듯하게 인생길을 걸어간 사람이었다. 출세욕 때문에 그의 도덕성이 흔들린 적이 없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신현확이 일제시대에 군수관보에서 군수관으로 승진했다”면서 이를 근거로 그를 기회주의적 출세주의자로 몰았다. 확인해 보니까 이는 승진이 아니라 수습 사무관에서 정식 사무관이 된 것에 불과했다. 지금도 행정고시에 합격하면 일정기간 試補(시보)로 수습 과정을 거친 후 정식으로 사무관이 된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민족문제연구소는 신현확에 대한 비난의 수위를 높였다.
<국내외에서 전개된 지속적인 항일운동과 압도적 다수 대중의 반일 정서 등 당시의 현실은 신현확의 공직 선택을 관용하기에는 어려운 상태였다고 판단됩니다.
해외 항일단체와 항일운동가의 존재와 활동, 국내의 각종 반일운동, 연합군의 반격 등 일제 침략에 대한 저항이 공공연한 사실로 인지되고 있던 시기에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복무할 수밖에 없는 위치인 관료를 지향하고 또 그 지위에 오르는 것은 일제에 대한 전반적인 동의와 충성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아가 임시정부가 일제에 선전포고를 한 1941년 12월 9일 이후 일제의 통치기구에 간부로 재직한 자는 敵國(적국)의 식민통치와 전쟁수행에 협력한 반역죄를 저지른 반국가 범죄자로 간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제하에서 일개 사무관이었던 신현확에 대한 혐의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어느새 ‘반역죄’ 내지 ‘반국가 범죄’로 커져 있었다.
抗日과 親日의 갈림길
우연히 TV에서 곽선희 소망교회 목사가 설교하는 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분, 일제시대에 우리 독립군이 일본인 한 명을 죽이면 일본군대는 만주의 우리 민족을 100명이나 죽였습니다. 그런 독립운동을 민족에게 계속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독립운동은 그렇게 무모하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온 민족이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의 힘을 기르고 민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나라를 위한 일이고 독립을 위한 기초를 다지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청산리 대첩 이후 일제는 간도 일대에서 우리 동포들을 상대로 보복 학살을 자행했다. 애국지사들의 항거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기세는 꺾일 줄 몰랐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애국심만 가지고 무모한 투쟁을 하는 것은 현명한 독립에의 길이 아니다”라는 생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국이나 러시아가 아닌 조선 내에서 조직적이고 지구적인 저항운동을 하려면 인도의 국민회의처럼 합법적인 정치운동의 방법을 취해야 한다”거나 “모두 다 총을 들고 만주로 갈 것이 아니라 각자 있는 그 자리에서 조선민족을 위해 자신의 최선의 길을 다하자. 경제인은 민족을 위해 사업을 하고 학교에서는 민족정신을 아이들에게 가르쳐 정신적으로 그들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온 것이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파의 개념과 일제 후반의 사회의식, 그리고 민족이 해야 할 태도에 대해 이렇게 주장했다.
<일제 강점기 전 기간에 걸쳐 식민지배의 정당성과 안정성이 전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대중 일반에 승인된 적이 한 시기도 없었던 역사적 현실을 고려하면, 식민지배체제의 가담은 기회주의적이며 출세지향의 비도덕적 행태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친일파’는 ‘일제에 대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발적이든 피동적이든, 우리 민족 성원에게 신체적·물질적·정신적으로 직·간접적으로 상당한 피해를 끼친 자’로 우리는 정의합니다. 이런 관념은 사회적으로 이미 통용되었고 이른바 시민권을 얻은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일제시대 내내 우리 민족의 대부분은 저항정신과 독립의 의사를 분명히 유지했다는 주장 같았다. 나도 그러기를 바랐다. 나는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일제 후반기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논문과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그 공통된 내용을 요약해 재구성하면 이렇다.
“민족으로서의 조선인 전체가 일제에 전향”
<1938년 경 조선은 근 30년 일본의 점령 아래 있어 온 셈이었고 3·1운동 이후 거의 20년이 지났다. 1919년 3·1운동이 실패하고 일본의 군사력은 압도적이며 외국 열강의 지원이 없는 데서 많은 한국인들은 절망감을 느꼈다. 이제 일본이 동양의 중심으로서 중국의 자리를 대신했다.
조선의 많은 엘리트들이 중국 중심에서 벗어나 서양과 일본을 새로운 세계문명의 모델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식민지 지배 아래서 태어나 성인이 된 조선인 신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 독립국이던 시절을 아직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도 식민지 체제는 일상 생활의 일부가 되어 갔다. 일본제국이 패망하리라는 징조는 전혀 없었다.
실로 일본제국은 1930년대에 극적으로 팽창했고, 이제 일본은 동아시아 대륙을 훨씬 넘어서 지배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조선 내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은 그 명맥마저 희미해진 상태였다. 많은 조선인의 생각이 달라졌다. 일본의 힘에 압도되어 독립보다는 현실에 순응하고 일본에 편승하는 게 조선의 장래를 위해서 바람직하다는 인식도 대두됐다. 일본의 연전연승을 보면서 앞으로 이런 체제가 최소한 200년은 갈 것이라는 의견도 많았다.>
1939년 4월 조선 시사잡지 <삼천리>에서 사회주의자 인정식은 이렇게 절망했다.
<오늘의 정치적 상황을 3·1 운동 당시와 비교해 본다면 천양과 같은 차이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개개인이 轉向(전향)한 것이 아니라 민족으로서의 조선인 전체가 일제에 전향한 것이다. 이제는 오직 일본제국의 대륙침략정책에 끝까지 협동하는 충실한 국민으로서만 조선인이 존재하며, 금일의 조선인의 정치적 노선이란 이 길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많은 조선인들은 이 사실을 만주사변에서 이미 직관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사회주의자 인정식이 당시 사회를 그렇게 비관한 배경의 분석은 이랬다.
<3·1 운동의 실패로 좌절감이 민족에게 스며들었다. 그 후 일본이 만주와 중국을 제패하는 세계 강국으로 대두되자 사람들은 절망감을 넘어 이제는 스스로 일본 시민권을 가진 일등 국민이 되고자 하는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일본의 만주침략에 따른 만주 붐에 대한 조선인들의 기대가 민족적 저항을 누그러뜨렸다.
일제의 중국 침략을 통해 복리와 번영을 기대하는 조선 민중의 의사가 內鮮一體(내선일체)의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지원병 제도는 조선인 중·하층민의 신분상승의 기회로 이용되고 이제 조선의 대중은 신분상승을 위해서라면 일본군대에도 거리낌 없이 갈 정도로 변질됐다. 조선인들의 이런 의식변화는 동아시아의 정세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이 舊韓末(구한말)보다 향상된 데도 원인이 있다.>
당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회색지대 사람들은 이랬다는 것이다. 일본이 중국대륙을 제패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그런 민족의식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희미해지고 지식인층의 생각들도 달라졌다고 했다.
말꼬리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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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 등의 친일문제 제기 결과 노무현 정권 시절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만들어졌다. |
“아버지가 일본 상공성에 근무를 했다. 이걸 가지고 친일파라고 그러면, 그 당시에 열심히 국가를 위해서 한국사람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은 다 친일파입니까?”
‘오늘의 한국발전을 위해서 공헌한 아버지에 대해 너무하다’는 자식의 호소였다. 하지만 ‘그 당시에’라는 말이 들어간 건 실수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인터뷰 당시의 말 실수를 물고 늘어졌다. 연구소 측은 법정에 이런 서면을 내놓았다.
<차관까지 지낸 신현확의 아들이 그렇게 항의하는 것이 과연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할 수 있는 행동인지 극히 의문입니다. 그것은 또 다른 민족정기를 훼손하는 언동이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국가는 제국주의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일으키고 있었고 대내적으로는 국가총동원체제하에서 징용 징병 등 민중에 대한 착취가 극에 달했습니다.‘그 당시에 열심히 국가를 위해서 한국사람으로 활동했던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친일파라고 스스로 자인하는 셈입니다.
신현확의 아들은 이런 자신의 인터뷰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면서 법원에 신청을 한 것입니다. 일제의 착취에 분개해도 부족한 판에 오히려 그 시절을 옹호하는 듯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현확이 당당한 사람이라면 역사와 민족 앞에 반성해야 합니다. 신현확의 아들 신철식의 이런 법적인 신청 그 자체만으로도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크게 해치는 행위라고 봅니다. 따라서 이 신청은 당연히 기각되어야 마땅합니다.>
선릉역 근처에 있는 于湖(우호)재단 사무실에서 신철식 전 차관과 만났다. 신현확 전총리의 호를 딴 재단이었다.
“나 여태까지 많이 참았는데 이제는 정말 화가 났어. 연구소에서 내 말꼬투리를 잡아 비트는데 정말 펄쩍 뛰겠어. 방송국에서 갑자기 전화가 왔기에, ‘우리 아버지가 국가경제에 공헌을 했는데 그런 건 전혀 보지 않고 일제시대 사무관을 했다는 자체만으로 친일파라는 건 너무하다’고 했지. 그런데 야비하게 말꼬리를 잡고 있잖아?”
나는 아들의 본심을 알고 싶었다.
고등문관시험
―아버지가 고등문관시험을 치신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내가 물었다. 그 시대 체제 내에 존재하는 엘리트들의 상당부분 소원은 관료가 되는 것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원래 고등문관시험을 치지 않으려고 하셨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워낙 강요하는 바람에 시험을 치신 거야.”
하지만 신현확이 일제 말기 상공성에서 근무하다가 근무지를 이탈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미 일본 세상이었던 당시, 출세길에 접어든 20대 젊은이가 모든 걸 포기하려 했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출세길을 왜 박차고 나오셨을까?
아들은 말이 없었다.
―아버지가 대학을 나오고 고등문관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던 사실이 수치고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해?
한참을 생각한 친구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아니지.”
―그러면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장처럼 국민 앞에 사과할 게 있어?
“없어.”
그가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일제시대 우리의 엘리트들이 행정이나 군사·문화 등 각 방면에서 교육을 받고 그게 터전이 되어 오늘의 한국을 이루었는데, 어떻게 생각해?
“당연하지. 문화나 문명이라는 건 국경이 없이 세계에 서로 서로 흐르면서 전파되는 건데, 그걸 일본 학교에서 배우든 영국 학교에서 배우든 무슨 상관이야. 나도 모르겠어. 아버지가 근무지에서 이탈해서 수배까지 받으면서 광복을 맞았다는 사실을 말이야. 더구나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지금 물을 수도 없고 말이야.”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를 찾아가 조사책임자에게 물어보았다.
―위원회에서도 구조론에 입각해서 친일을 결정합니까?
“아닙니다. 연구소 측이 그럴지 몰라도, 우리 위원회는 법에 따라 합니다.”
조사 책임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민주사회에서 단죄할 필요가 있을 때는 엄격한 법해석을 통해 해야 한다. 몇몇 일부 인사들의 구조론으로 과거를 무리하게 분류해서는 안된다.
“신현확을 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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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현확 전 총리의 아들 신철식 前 국무조정실 차장. |
그 시절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느냐만 보고 친일파로 손가락질하는 것도 맞지 않다는 생각이다. 관료라든지 군인이라는 외형적인 옷보다 중요한 건 몸통인 개인의 양심이기 때문이다. 겉만 보고 죽였다면 모세나 요셉, 다니엘, 에스더 등 성서 속의 영웅들도 다 민족반역자로 처단되어야 했다.
인도의 간디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기 위해 많은 청년들이 전쟁에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지금도 國父(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이후에도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무리한 저항을 말렸다. 아마 그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쯤 친일파라고 곤욕을 치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소설의 한 페이지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듯 인생의 한 점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려는 흑백논리와 완벽주의는 옳지 않다. 자기의 불행을 모두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도 비겁한 일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신현확을 ‘반역죄를 저지른 반국가 범죄자’로 몬 것은 지나치게 모욕적이고 악의적인 표현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그들의 주장처럼 ‘건전한 역사의식과 가치관의 확산’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라면 좀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마땅하다.
역사를 해석하는 시각은 여럿 있을 수 있다. 나와 다른 여러 견해가 다양하게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나만 깨달았고, 내 생각만 옳고, 내가 하는 행동만이 정의라는 것은 또 다른 교만일 수 있었다.
재판 도중 민족문제연구소 측으로부터 신현확을 친일인명사전에서 빼기로 결정했다는 통보가 왔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신문에 이렇게 발표했다.
<당초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될 예정이었던 故(고) 신현확 국무총리가 명단에서 제외된다. 연구소 관계자는 “유족의 이의신청을 받아들여 수록 대상자 중 신현확 전 총리를 제외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연구소는 그러나 명단 수록을 둘러싸고 파장이 일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 장면 전 총리, 음악가 안익태, 홍난파, 무용가 최승희, 현상윤 고려대 총장은 그대로 수록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