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性仁 前 오사카 民團 단장이 말하는 在日 民團의 60년 本國 짝사랑

“대한민국은 60여 년 敵陣에서 외롭게 싸운 야전부대를 벌써 잊었는가?”

  • : 김남성  sulsu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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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團 60년 비화

在日 민단 교포들, IMF 때 15억 달러 본국 송금

⊙ 6·25전쟁 때 642명의 재일동포 아들들이 자원해서 참전. 휴전 후 대한민국 정부의 무성의로
    참전자들 국내에 발 묶여
⊙ 일본 내에 있는 대사관, 총영사관 건물 10개 중 9개를 민단 단원들의 모금으로 건설
⊙ 1988년 서울올림픽 때 민단에서 성금 100억 엔(당시 환율로 한화 약 540억원) 의 거금 모아
    한국에 후원
⊙ 서울 무교동 대한체육회 건물의 엘리베이터도 민단 간부들이 기증한 것
⊙ “경찰 사이드카 예산 없다” 소식 듣고 한녹춘 회장이 80대, 강계중 前 민단 단장이 60대를 사서
    보내

洪性仁
⊙ 1935년 제주도 한림 출생.
⊙ 민단 소속 백두학원 졸업.
⊙ 오사카 민단 청년부장, 감찰위원장, 단장, 민단중앙본부 감찰위원장, 재일본태권도협회 명예회장,
    학교법인 백두학원 이사, 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
⊙ 상훈: 국민훈장 모란장(1996년), 제주도 문화상.
6·25 당시 자원입대한 재일학도의용군.
일본 오사카의 핵심지역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미도스지(御堂筋). 우리 광화문路(로)에 해당된다. 일본의 유명 백화점과 전 세계 名品(명품) 브랜드숍들이 이 거리 양쪽에 경쟁적으로 들어서 있다. 백화점·명품숍 아니면, 일본 굴지의 대기업 건물들이 대부분이다.
 
  땅값도 비싸다. 2007년 1월 일본 국세청의 발표에 따르면, 이 지역 땅값은 1㎡당 696만 엔. 우리 식으로 따지면 1평(3.3㎡)에 약 2100만 엔(한화 약 3억원)이다.
 
  일본 전체에서 비싸기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이 거리 한복판에, 가로·세로 2m가 넘는 대형 태극기가 나부끼는 건물이 있다. 대한민국 오사카 총영사관 건물이다. 대지 약 519㎡(150여 평)에 9층 높이의 총영사관 건물은 1974년 완공됐다. 이 거리에 영사관을 건설한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빗줄기가 간간이 내리는 오사카 총영사관 건물 앞에서 洪性仁(홍성인·74) 在日本(재일본) 대한민국 민단(이하 민단) 前(전) 오사카본부 단장을 만났다.
 
  홍성인 단장은 1958년 민단에 들어가 중앙본부 청년부장·감찰위원장, 오사카본부 단장(1995~2000년)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9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吳榮煥(오영환·57) 오사카 총영사는 홍 단장을 일러 “재일동포 사회에서는 ‘민단의 살아 있는 歷史(역사)’라고 부른다”고 했다. 민단에 자신의 인생을 건 지 半(반)세기. 그는 여전히 민단 일에 모든 시간과 열정을 쏟고 있다.
 
  홍 단장은 오사카 총영사관 건물 밖에 나부끼는 태극기를 한참 동안 쳐다봤다. 그에게 이 건물과 태극기는 언제 봐도 애틋하다. 그는 태극기 아래에 있는 건물 개요를 담은 동판을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오사카 일대 민단 단원들이 미도스지에 총영사관 건물을 짓고 나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이 거리에 꼭 태극기를 걸겠다고 다짐 다짐하며 한두 푼씩 모아 땅을 사고 건물을 올렸어요. 건물을 완공하고 나서 오사카府(부) 등기에 ‘대한민국’이라고 적었어요. 민단 단원들도 가난했고, ‘조센징’(조선인)이라고 멸시 받았지만, 우리보다 더 가난한 本國(본국)에 이 땅과 건물을 바쳐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건설 당시에도 이 일대 땅값이 비쌌습니까.
 
  “물론이죠. 미도스지는 오사카의 중심입니다. 1971년부터 1년 동안 오사카, 효고, 교토, 나라, 와카야마 등 긴키(近畿: 오사카와 교토 등 2府와 나라, 효고현 등 4縣을 이르는 지역-편집자 주) 소속 민단 단원들이 돈을 모았습니다. 당시 저는 민단 중앙본부에서 청년부장으로 활동했는데 월급을 8만 엔 받았습니다. 매달 1만 엔씩 월급에서 떼서 총영사관 기금으로 냈어요. 긴키 일대 민단 단원들이 날품팔이, 막노동을 해서 1000엔, 2000엔씩 모아 16억 엔을 만든 겁니다.”
 
 
  “대사관, 총영사관 건물 10개 중 9개는 민단이 세워”
 
홍성인 단장이 미도스지에 있는 오사카 총영사관 건물에서 동판을 가리키며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당시 재일교포 가운데 성공한 분들이 기금 마련에 도움을 주지 않았나요?
 
  이 질문에 홍 단장은 “동판에 적혀 있는 건축주 이름을 보라”고 했다. 동판에 적힌 건축주는 ‘대한민국 정부’가 아닌 ‘주 대판 대한민국 총영사관 건설기성회 회장 韓綠春’이었다.
 
  韓綠春(한녹춘·87).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오사카 일대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홍 단장에 따르면, 그는 일본 최대의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 구미(組)에 자신이 만든 조직을 이끌고 投身(투신), 야마구치 구미 7명의 ‘오야붕’ 가운데 한 명이 됐다. 한녹춘 회장은 민단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일본 최대 야쿠자 조직의 ‘오야붕’이 어떻게 대한민국 영사관 건축주가 됐을까? 홍 단장의 이야기다.
 
  “한녹춘 회장은 야쿠자로 수십 년간 활동한 탓에 민단에서 어떤 직함도 갖지 못했습니다만, 민단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항상 뒤에서 도와줬어요. 당시 민단 간부들이 총영사관 건물을 짓겠다고 하니, 선뜻 1억 엔을 내고 기성회 회장이 되어 모금을 독려했어요.”
 
  한녹춘 회장이 나서자 민단 단원들이 용기백배했다. 한 회장이 뒤에 있다면, 영사관 건물 짓는 게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년 만에 목표액 16억 엔을 채웠지만 난관에 부딪혔다. 당시 미도스지 지역은 한국 사람이 땅을 살 수 없었다. 한녹춘 회장이 다시 나섰다. 일본인인 자신의 부인을 내세워 땅 거래를 했고, 부인 명의로 땅을 매입했다.
 
  오사카 민단은 총영사관 건물을 짓고 나서, 한 회장 부인 이름에서 대한민국으로 명의를 변경해 등기를 했다. 한녹춘 회장이 건축주로 이름을 올리게 된 건 이 때문이다.
 
  오사카 총영사관 건물을 짓고 나서 민단 청년부 소속 단원들이 조를 짜 하루 종일 경비를 섰다. 홍 단장은 “당시는 조총련 세력이 매우 강할 때라 언제 총영사관을 습격할지 몰라 경비를 단단히 해야 했다”고 회상했다.
 
  현재 오사카 총영사관, 도쿄 아카사카의 한국대사관 등을 포함, 일본 내에 있는 대사관, 총영사관 건물 10개 가운데 9개를 민단 단원들의 모금으로 건설했다. 홍단장은 여러 차례 태극기와 동판을 어루만진 후 총영사관 앞을 떠났다.
 
 
  민단과 조총련은 한뿌리
 
김한익 현 오사카 민단 단장.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은 1946년 10월 3일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이라는 이름으로 결성됐다. 당시 오사카 지역 교포들을 중심으로 2000여 명이 참여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같은 해 10월 민단은 재일동포 공인단체로 인정받았다.
 
  역사적으로 민단과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의 뿌리는 하나다. 1945년 10월 ‘재일조선인연맹’(이하 조련)이란 단체가 탄생했다. 현재 민단과 조총련의 母胎(모태)다. 하지만 조련이 공산주의 인사들에 의해 좌우되자 조련의 우파 인사들이 조련을 탈퇴했다.
 
  조련에서 탈퇴한 이들은 1945년 11월 16일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건청), 1946년 1월 20일 신조선건설동맹(건동)을 결성했다. 이 두 단체가 주축이 되어 20개의 우파 단체가 모인 것이 오늘날의 민단이다. 민단 결성 후, 남은 조련 인사들은 1955년 북한의 지원을 받아 조총련을 결성했다.
 
  민단은 도쿄에 있는 중앙본부 외에 긴키지협(近畿地協), 간토지협(關東地協) 등 7개의 지협이 있다. 지협은 일본 전역을 크게 나눈 것으로, 각 지협 아래 모두 48개의 지방本部(본부)가 있으며, 지방본부 아래 303개의 支部(지부)가 있다. 예를 들어 긴키지협에는 오사카부 본부, 효고현 본부, 교토부 본부, 나라현 본부 등 6개 지역본부가 있다. 오사카부 본부에는 각 동마다 지부가 있다.
 
  민단 중앙본부가 2006년 12월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전체 민단 단원 수는 약 38만명이다. 이는 지난 2002년 2월 발표한 약 41만명보다 3만명이 줄어든 수치다. 오사카 민단 北(북)오사카지부의 鄭善博(정선박·62) 단장은 “교포 3, 4세들이 귀화하거나, 일본인과 결혼해서 낳은 자녀들이 자동적으로 일본 국적을 갖기 때문에 단원 수가 점점 줄고 있다”고 했다.
 
  전체 단원 가운데 오사카부 본부 소속 단원의 숫자가 절대적이다. 오사카부 소속 단원은 10만7000여 명으로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같은 긴키지협 소속 5개 본부를 합하면 약 19만명으로, 절반에 이른다. 이러한 이유로 민단의 중앙본부가 있지만, 긴키지협 민단이 민단의 중추가 돼 왔다.
 
 
  민단 설립자 91세 변기주 翁
 
변기주 옹이 국제노동동맹이 미 군정과 오사카부로부터 현 오사카 민단본부 부지를 영구 무상임대 받았다는 증명서를 보여주고 있다.
  이틀 내내 찌푸려 있던 오사카에 시원하게 비가 내렸다. 오사카 혼마치(本町)에서 도보로 10분 떨어진 쓰루하시(鶴橋)역 근처의 한국식당에서 邊基柱(변기주·91) 翁(옹)을 만났다. 변기주 옹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두 시간 동안 꼿꼿하게 앉아 민단의 태동기를 증언했다. 다음은 변기주 옹과의 대화.
 
  ―변기주 선생께서는 민단의 모태였던 재일조선인연맹(조련) 때부터 활동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나서 저와 黃性弼(황성필·초대 오사카 민단 단장), 金聖洙(김성수·8대 오사카 민단 단장) 등 5명이 조선인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금방 사람이 불어나 1945년 10월에 ‘국제노동동맹’이라는 단체가 됐어요. 비슷한 시기에 오사카에 조련이 생겼습니다.”
 
  ―사무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현재 오사카 민단본부 건물 부지에 있었어요. 그곳은 과거 內鮮協和會(내선협화회)가 있던 자리였습니다. 협화회는 在日(재일) 조선인들을 감시하기 위해 1938년에 일본 정부가 만든 단체예요. 일본이 패망한 뒤, 협화회는 오사카부 興生會(흥생회)로 변경됐어요. 저희들이 흥생회에 舊(구)협화회 건물들을 무상으로 영구 임대해 달라고 요구했어요. 당시 미군 군정 시절이라 미군이 허가를 해줬습니다.”
 
  변기주 옹이 가져온 문서에 의하면, 당시 국제노동동맹의 김성수, 변기주, 高應權(고응권), 金啓祐(김계우), 楊乙釗(양을쇄) 다섯 명은 1945년 12월 27일 미 군정과 오사카 지방정부의 사카모토(板本深藏) 씨에게 협화회가 사용하던 건물들을 영구 무상임대 허가를 받았다. 변 옹은 “현재 오사카 민단 건물을 영구임대 받았다는 증거가 이 서류”라며 “그때 우리가 영구임대 허가를 받지 못했다면 오사카 민단본부 건물은 아직도 짓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조총련 전신인 조련은 美 군정에 의해 해산당해
 
1950년 6·25 당시 오사카 재일거류민단에 설치된 학도의용군 지원접수처. 변기주 옹은 학도의용군 모집에 앞장섰다.
  국제노동동맹은 조련 사람들과 함께 협화회 건물 등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들과의 동거는 오래가지 않았다. 북한에 조선노동당이 생기면서 조련의 핵심인사들이 親北(친북)으로 기울었다. 당시 조련에는 사회주의자들이 많았다. 조련은 태극기를 내리고 조선노동당 깃발을 올렸다. 이에 반발한 국제노동동맹 사람들이 조련에 사무실 퇴거를 요구했지만, 오히려 조련에 사무실을 빼앗기고 쫓겨났다. 변기주 옹의 이야기다.
 
  “조련에 있는 친북 사회주의자들은 굉장히 폭력적이고 强性(강성)이었어요. 수차례 양쪽이 싸웠는데, 각목과 무기를 들고 흉포하게 나와 우리 측에서 부상자가 줄줄이 나왔어요.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사람들 같더라고. 할 수 없이 우리가 협화회 건물에서 도망쳐 나왔죠. 더 있다가는 사람이 죽을 것 같았어요.”
 
  국제노동동맹은 신조선건설동맹(건동)으로 개칭하고, 1947년 1월 3일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이 됐다. 변 옹과 함께 국제노동동맹에서 활동하던 황성필씨는 초대 민단 오사카본부 단장이 됐다. 황성필씨는 단장이 된 후, 조련에 빼앗긴 협화회 건물을 되찾기 위해 1948년 8월 28일 오사카지방검찰청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피고소인은 조련 오사카본부 책임자였던 송문기였다. 정선박 단장이 수십 년간 묻혀 있던 당시 고소장을 발견했다. 고소장에 조련의 폭력성이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국제노동동맹이 재류동포의 귀국을 알선할 때 조선인연맹(이하 조련으로 약칭)의 방해에 의해 사무소를 파괴당하였기에 당시 미 군정관 몬스키 소좌에 호소한 결과 舊(구)협화회 회관을 정식으로 빌려 사용해 왔으나, 조련의 사무소가 좁아서 1실을 빌려 달라는 요망이 있었기에 식당 1실을 빌려주었으나 1946년 2월 5일 또 다시 조련은 폭력행위로 사무소를 점령하였습니다.
 
  당시의 카난 소좌에게 (조련의 폭력행위를) 호소한 결과 조련은 금후 국제노동동맹 사이에 충돌을 일으킨 때는 언제라도 해산명령에 응한다는 서약서를 넣었기에 사무실 절반을 조련에 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카난 소좌의 중개에 의하여 사무소의 절반을 빌렸는데도 불구하고 조련은 현재 또 전부를 점령해 버렸습니다.>
 
  조련은 이 고소장이 접수된 후 또 다시 난동사건을 일으켜 미 군정에 의해 해산당했다. 조련이 해산된 후에야 오사카 민단은 협화회 사무실을 되찾았다.
 
 
  “내가 헛짓을 한 건가?”
 
  변기주 옹은 13세 때인 1931년에 고향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 당시 먼저 일본에 와 있던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가 일본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전교에서 조선인은 12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당시 차별을 많이 당했겠네요”라고 묻자, 변 옹은 “보통 차별이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먹고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다 민단 설립자들인 朴烈(박열)씨를 만났다. 박열씨는 민단의 초대 단장을 역임했다. 그는 사회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 1946년 민단이 설립되고 1948년 조국이 남북으로 분단되자, 박열씨 등은 남북 통일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박열 민단 초대 단장은 1948년 남한 정부가 수립되자,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건너갔다. 그 뒤치다꺼리를 변 옹이 맡았다.
 
  “한국에 가려는데 돈이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나가사키에 여관을 하나 얻어서, 민단에서 모은 돈을 한국에 있는 박열 단장에게 보내는 일종의 연락병 노릇을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내가 먹고살 돈이 없는 거야. 여관비와 식비는 자꾸 늘어나고. 참 죽겠더라고.”
 
  ―어떻게 버티셨습니까.
 
  “당시 여관에서 일하던 식모를 설득했어요. 한마디로 몸으로 때웠지(웃음). 식모에게 비위를 맞춰 주니까 먹을 것도 주고, 전화비 여관비도 자기가 내주더라고. 그렇게 1년을 버텼어요.”
 
  나중에 홍성인 단장에게 들은 얘기지만, 변 옹은 1948년 그 식모에게서 아들을 하나 얻었다. 그 아들은 변 옹과 함께 살지 못하고 도쿄에서 살았다. 변 옹은 아들이 결혼했을 때, 몰래 결혼식에 다녀왔다고 한다. 홍 단장은 “민단 일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지만, 변 선배나 아들, 그 엄마 모두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민단 간부들은 의용군을 조직해 한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642명의 재일동포 아들들이 자원해서 참전했다. 변기주 옹은 의용군을 모집하기 위해 동포들을 만나러 다녔다. 욕도 많이 먹었고, 조총련 측 인사들에게 엄청난 공격을 받았다. 이들은 “남조선에서 일본 동포들을 징용 보내 다 죽인다”고 악선전을 했다. 이들은 변 옹에게 “너나 가서 죽으라”고 공격했다. 변 옹의 얘기다.
 
  “그때 정말 통일이 눈에 보였어요. 대동강 지나고 압록강까지 올라가는데. 이제 통일이 되는구나 싶었죠. 그런데 결국 아무 것도 안 되더라고. 박열 단장은 북한에 끌려가서 죽었고, 남북은 결국 60년간 분단됐고, 지난 60년 동안 통일되나 싶어서 이일 저일 했는데. 결국 다 실패야.
 
  그런데 홍 단장 참 이상하지. 우리가 3000만일 때도 통일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고, 7000만인 지금도 반대하는 사람 없는데, 왜 통일이 안 될까? 나는 이제 통일이 안 보여, 통일은 없어졌나봐. 난 60년 동안 헛짓한 건가? 내가 헛짓했나?”
 
 
  “우리는 본국 도울 생각만 하지 도움 받을 생각은 안 해”
 
  변 옹은 서러운 표정이었다. 홍성인 단장은 떠나는 변 옹을 배웅하며, “변 선배, 지금까지 잘 사셨어요. 절대로 잘못 살지 않았어요”라고 여러 번 말했다. 변 옹은 “그런가?” 라며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변 옹을 배웅한 후 일행은 오사카 민단본부 건물 앞에 도착했다. 홍성인 단장은 민단본부 건물 초석을 바라보며 “이 건물 지을 때도 우리 민단 단원들이 정말 힘들었다”고 했다. 오사카 민단본부 건물은 1986년 건설됐다. 이전에는 舊흥화회 건물을 사용했다.
 
  ―민단본부 건물 지을 때 한국 정부의 지원은 없었습니까.
 
  “10원 한푼 안 왔습니다. 전부 우리 민단 힘으로 건설한 겁니다. 재일동포 1세대들이 주축이 돼서 15억 엔을 모았어요. 이때도 한녹춘 회장, 鄭健榮(정건영) 회장, 姜桂重(강계중) 前(전)단장 등이 큰 도움을 줬죠. 한 회장이 5000만 엔을 냈고, 서용호 전 단장이 1억 엔을 냈어요. 지회 단원들도 몇 만 엔씩 수차례 보내와 겨우 건물을 지었죠.”
 
  ―1986년이면, 한국 정부도 도와줄 수 있는 형편이 됐을 것 아닙니까.
 
  “우리 동포 1세대들은 본국에 기대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본부 2층에 있는 단장실에서 金漢翊(김한익·72) 단장을 만났다. 김 단장은 오사카 민단 감찰위원을 지냈으며, 2006년 오사카 민단 중앙위원회에서 제43대 단장으로 선출됐다. 민단 조직은 정부의 3권 분립과 닮아 있다. 중앙본부든 지방본부든 행정부 首長(단장)인 단장, 국회의장 격인 의장, 사법부 역할을 하는 감찰부장으로 나뉘어 있다.
 
 
  1세대 노인들 위한 복지관 건립 난항
 
홍성인 단장이 수양아들인 조병덕 (주)현대 RNC 건설 전무(왼쪽)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조 전무는 15년 전부터 홍 단장의 민단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김 단장과 나눈 얘기다.
 
  “민단 옆의 땅을 3억 엔 주고 매입해서 현재 1세대들을 위한 복지회관을 지으려고 합니다. 일본에 와서 고생만 하면서 늙은 1세대들이 이제는 쉴 곳이 없어요. 일본 양로원 들어가려면 1만 엔이 든다면, 우리는 1000엔만 주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사비가 1억5000만 엔 드는데, 5000만 엔 모으기도 어렵네요.”
 
  ―한국 정부에서 민단에 상당한 금액을 지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본국에서는 그렇게 알고 있소? 본국에서 지원금이 오긴 합니다. 1년에 73억원 정도 보내주죠. 중앙본부에서는 단원 수를 기준으로 각 지방본부에 배정합니다. 오사카는 지난해 5억원 정도 받은 것 같은데요. 이 돈은 민단 직원들 월급 주는 데는 못 씁니다. 주로 청년회, 부인회 지원금으로 나갑니다.”
 
  ―언제부터 본국 정부에서 민단 지원금이 온 겁니까.
 
  “朴正熙(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0년대부터, 청년 육성금 명목으로 약 10억원씩 보내 왔어요.”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겠군요.
 
  “매번 그렇습니다. 예산은 주로 단원이 내는 단비로 운영하는데, 지금은 회비가 잘 안 걷혀요. 일반단원들이 한 달에 500엔, 1000엔씩 내게 돼 있는데, 어디 가서 생맥주 한잔은 아깝지 않게 마시면서 단비는 잘 안 내요. 3세대, 4세대로 내려갈수록 한국사람이라는 생각이 옅어지고 민단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으니까요. 과거에는 단비만으로 운영이 가능했는데, 지금은 어렵죠.
 
  ―과거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나 어렵습니까.
 
  “1970년대는 연간 단비가 10억 엔 이상 걷혔는데, 지금은 3억 엔도 어려워요.”
 
  오사카 민단본부는 예산이 줄면서 조직을 대폭 축소했다, 과거엔 상근 직원이 20명 이상이었지만 현재는 10명이다.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한 명이 여러 부를 담당하고, 부단장도 다른 일을 겸한다.
 
 
  IMF때 15억 달러 송금
 
  민단은 지난 60년간 本國(본국)인 대한민국이 어려운 고비마다 돈뿐만 아니라 몸을 던져 도움을 주었다. 재일동포들은 자신의 아들들을 6·25 전쟁터에 보내 여러 젊은이가 죽고 다쳤다. 더욱 안타까운 건 한국군에 참전했던 사람들이 일본의 가족 품에 돌아오지 못한 부분이다. 홍성인 단장의 얘기.
 
  “재일동포 의용군 가운데 유엔군에 배속됐던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왔지만 한국군에 속했던 사람들은 한 명도 못 돌아왔어요. 한국 정부가 이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낼 교통편을 마련해 주지 못해 한국에 눌러 살아야 했던 것이죠. 본국 정부가 재일동포 출신 의용군에 너무 무신경했던 탓입니다. 그 때문에 변기주 선배 등 우리 선배 세대들이 의용군 가족들에게 고개를 못 들고 다녔어요.”
 
  지난 1997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사상 최대의 위기였던 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홍 단장을 포함해 1세대들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고 한다.
 
  “본국이 망한다고 생각했어요. 통일도 되기 전에 본국이 없어지면 어쩌나, 밤잠이 안 왔어.”(변기주 옹)
 
  “이건 정말 위기다. 저러다 북한 놈들이 오판하고 쳐들어오는 것 아닌가 했어요. 무조건 돈을 모아서 도와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죠.”(崔翼龍·80·오사카 민단 고문)
 
  “본국이 없어지면, 우리 아이들은 꼼짝없이 일본 놈이 되는구나 싶었어요. 손자들까지 귀화를 안 시키려고 싸웠는데, 온몸의 힘이 다 풀리더군요.”(李龍權·70·오사카 민단 의장)
 
  민단은 대규모 외화송금운동을 벌였다. 1세대들은 10만 엔 이상씩 송금할 것을 강요(?)당했다. 100억 엔을 목표로 시작한 운동은 결국 목표의 9배인 900억 엔이 모였다. 당시 환율로 15억 달러에 달했다. 전국적으로 벌인 금모으기 운동으로 약 20억 달러가 모인 것과 비교하면 그 액수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1964년 도쿄올림픽이 열리자 민단은 ‘재일한국인 후원회’를 결성해 본국 대표팀 지원에 나섰다. 민단은 환영행사를 열었고, 한국 선수단의 경기장을 찾아 매일 응원을 나갔다. 가난한 한국 선수단에게 식사를 제공했고, 용돈을 줬다. 뿐만 아니라 한국 선수단에서 유도 경기에 나갈 선수가 없어 민단에서 재일동포 선수를 대신 출전시켰다. 홍 단장이 말하는 秘話(비화) 한 토막이다.
 
  “1956년에 민단에 체육회가 생겼어요. 도쿄올림픽 당시 중앙체육회장이 정건영 회장인데, 이 양반이 야쿠자예요. 도세이카이라는 조직의 ‘오야붕’이었죠. 관서체육회는 李熙健(이희건)씨가 맡았는데, 본국 정부 관계자가 이희건씨에게 찾아가 ‘유도 경기에 참가해달라’고 요청했어요. 달랑 태극기 하나 주고 선수단을 만들어 달라고 한 거죠. 그래서 이희건씨가 정건영 회장에게 말해서, 교포 가운데 선수 몇 명을 차출해서 선수단을 만든 겁니다.”
 
  그렇게 급조한 유도 선수단에서 경사가 났다. 당시 천리대 학생인 김의태 선수가 한국 유도사상 처음으로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홍 단장의 얘기.
 
  “과거 서울 무교동에 대한체육회 건물이 있었어요. 당시 공사비가 부족해 엘리베이터를 못 넣는다고 해서 정건영, 한녹춘 회장 등 세 분이 돈을 내서 엘리베이터를 사서 보냈어요. 민단이 스포츠단 지원을 많이 했죠.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우리 동포들이 감격했어요. 도쿄올림픽 때 우리가 선수단 밥 먹이고 돈 줘서 겨우 올림픽 치렀는데, 그렇게 못살던 본국이 올림픽을 개최한다니….”
 
  민단은 서울올림픽 후원회를 결성했다. 후원회장은 李熙健(이희건·92) 前(전) 오사카興銀(흥은) 회장이었다. 이 회장은 신한은행 설립자다. 민단은 일본 열도를 돌며 모금을 독려, 100억 엔의 성금을 모았다. 당시 환율로 한화 약 540억원의 거금이었다. 홍 단장의 설명.
 
  “이희건 회장이 당시 다케시타 노부로 일본 총리를 만나 ‘재일동포들이 내는 후원금에 대해 세금 감면을 해달라’고 했어요. 다케시타 총리가 즉석에서 승낙했답니다. 후에 다케시타 총리가 이희건 회장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이 회장님, 당시에 후원금이 많이 모여도 10억 엔 정도라고 생각해서 즉석에서 승낙했는데, 100억 엔이 모여 깜짝 놀랐습니다. 일본 정부가 큰 손실을 봤어요.’”
 
  홍 단장은 “한국 경찰이 사이드카를 가지게 된 것도 민단이 지원했기 때문”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1971년에 金鍾泌(김종필)씨가 국무총리가 되고 나서 민단 간부들을 만났어요. 경찰에 사이드카가 필요한데 예산이 없다는 겁니다. 그 얘기를 듣고는 한녹춘 회장이 80대, 강계중 前(전) 민단 단장이 60대를 사서 한국에 보냈습니다. 이 두 분이 아니었으면, 본국 경찰은 한참 후에나 사이드카를 가졌을 겁니다.(웃음)”
 
 
  韓綠春 회장
 
한녹춘 회장은 197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민단 역사를 정리할 때 빠지면 안 되는 인물이 한녹춘 회장이다. 민단 1세대들은 그를 재일동포의 숨은 조력자로 꼽는다. 민단뿐만 아니라, 대한민국도 그의 공로를 인정했다. 1971년 한녹춘 회장은 신한은행 설립자인 이희건 회장과 함께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오영환 주 오사카 총영사는 그를 이렇게 말했다.
 
  “한녹춘 회장은 음지에서 우리 재일동포들을 가장 열심히 도운 분입니다. 대한민국이나 교민 사회가 한 회장에 대한 고마움을 잊으면 안 됩니다.”
 
  홍성인 단장은 젊은 시절부터 한녹춘 회장과 절친했다. 글자를 읽지 못하고,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한녹춘 회장은 홍 단장이 있어야 한국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지난해 8·15 건국 60주년 행사에 한녹춘 회장은 정부의 초대를 받고 來韓(내한)했을 때도 홍 단장이 통역을 하며 한방을 썼다.
 
  홍 단장은 한 회장을 ‘영감’이라고 했다. 홍 단장은 “영감은 한글이든 일어든 글자를 전혀 모르고, 숫자도 잘 이해하지 못해 항상 같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홍 단장에 따르면, 한녹춘 회장은 13세 때인 1935년 고향인 강원도 고성에서 오사카로 왔다. 그의 작은형이 ‘일본에 가면 먹고살 수 있다’면서 밀항선을 태워줬다고 한다.
 
  오사카에서 부두 노동자로 일하던 그는 일보다 싸움을 더 많이 했다. 160㎝ 단구의 한 회장은 한 번 맞으면, 자신을 때린 사람이 무릎을 꿇을 때까지 돌을 들고 따라다녔다. 16세에 이미 수십 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다니며 자신의 조직을 만들었다. 홍 단장의 얘기다.
 
  “영감이 21세 때 이미 큰돈을 만졌다고 합니다. 그 돈으로 오사카의 환락가였던 도톤보리에 오사카 최대의 카바레인 ‘후지 카바레’를 만들었어요. 3층짜리 후지 카바레는 부지면적만 약 4500㎡(1500평)예요. 후지 카바레는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해외 정치인들도 자주 찾는 오사카의 명소였습니다. 지난 1965년 한일회담을 위해 일본을 찾았던 김종필씨 등 우리 정치인들이 파티할 곳이 없어, 후지 카바레를 빌렸어요. 영감이 야마구치 구미에 들어간 것도 후지 카바레 때문입니다.”
 
 
  “그가 없었으면 신한은행도 없었다”
 
1970년대 조총련의 행사 모습. 민단 정선박 지단장이 조총련 몰래 사진을 찍었다.
  한녹춘 회장은 카바레를 운영하며 이신카이(一心會)를 조직했다. 이후 오사카·고베 일대의 재일동포 조직을 흡수 통합한다. 호남 출신이 만든 난도카이(남도회), 간다히치로(강신옥)파, 고베의 다카야마파를 무력으로 눌렀다. 오사카 남부에서 가장 큰 조직이 된 이신카이지만, 고베의 야마구치 구미를 당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큰 사건이 일어났다. 홍 단장의 설명.
 
  “야마구치 구미의 3대 회장인 다오카가 어느 날 후지 카바레에 놀러갔다가, 재일동포 조직인 메이유카이(明友會) 사람들과 시비가 났어요. 메이유카이는 야마구치 구미가 강한 조직인 줄 모르고 회장인 다오카를 건드렸죠. 이튿날 야마구치의 조직이 총동원돼 메이유카이 회장의 팔목을 잘랐습니다. 그때 행동대장도 하필 재일동포인 양원석이라는 사람입니다. 야마구치 구미의 힘을 본 영감은 카바레 운영을 위해서는 야마구치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한녹춘 회장은 카바레를 운영하며, 야마구치 구미의 7명의 ‘오야붕’ 가운데 한 명이 됐다. 야쿠자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엄청난 부를 쌓았다. 오사카 일대에 후지 카바레 규모의 땅을 세 곳이나 구입했다. 현재 이 땅의 가치는 모두 1조5000억원 정도라고 한다. 홍 단장과 나눈 얘기다.
 
  ―야쿠자로 활동하면서 민단 일에 관심을 가지게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회장은 민단 일, 재일동포 일이라면 뭐든지 발 벗고 나섰어요. 우리는 1960~70년대 청년활동을 하면서 조총련 아이들과 매일 싸웠습니다. 그럴 때면, 조직의 ‘오야붕’인 영감이 직접 나와 같이 삐라를 뿌리고 벽보를 붙이고 다녔어요. 겨울에는 ‘추운데 뜨끈한 오뎅이라도 먹으라’고 몇 만 엔씩 쥐여줬습니다. ‘총련 아이들과 싸울 때 칼은 쓰지 마라. 돌멩이와 주먹으로만 때려라’라고 항상 일러줬습니다. 칼을 쓰면 중범죄자가 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 양반처럼 물심양면으로 동포를 도운 사람은 없습니다. 민단 건물 만들 때, 본국을 돕기 위해 성금 모을 때, 한 회장은 한마디도 안 하고 거액을 내놨어요.”
 
  홍성인 단장은 “지금의 신한은행도 영감이 없었으면 태어날 수 없었다”고 했다.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오사카에는 동포은행이 두 개 있었어요. 오사카 興銀(흥은)과 商銀(상은)입니다. 이희건 회장이 흥은 이사장 선거 나갈 때, 영감이 지원해서 당선시켰습니다. 오사카 흥은이 설립된 지 얼마 안 돼 돈이 없어서 망하게 생겼다고 해요. 이희건 회장이 후지 카바레를 찾아가 한녹춘 회장에게 ‘도와달라’고 사정을 했어요. 한 회장은 ‘우리 은행이 망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지’라며, 후지 카바레에 들어오는 돈을 매일 흥은에 입금시켰습니다. 그래서 흥은이 망하지 않고 버텨온 겁니다. 이희건 회장이 흥은의 돈으로 본국에 신한은행을 설립한 것 아닙니까. 신한은행의 역사에 ‘한녹춘’이라는 이름을 반드시 올려야 해요.”
 
  한녹춘 회장은 일본 부인 두 명 사이에 아들 딸 다섯 명을 뒀다. 사위 한 명이 한국인이지만, 자식 가운데 한국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도 한글을 모르고, 한국말을 잊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고향인 대한민국에 아낌없이 베풀었다.
 
  “가끔 자기 고향인 고성과 자신을 일본으로 보내 준 형님 얘기를 합니다. 고향에서 어렵게 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해요. 그런 기억 때문에 본국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게 아닌가 싶어요. 고향인 강원도에 노인회관도 지어주고, 운동장 만들 땅도 사줬어요. 陸英修(육영수) 여사가 살아 계실 때 남산에 어린이회관을 짓는데 돈이 없다고 해서 1억 엔을 줬고, 영남대에 건물 짓는데 1억 엔을 줬어요. 그런데도 음지에서 살던 분이라 누구도 영감의 이름을 기억해주지 않아요. 난 본국이 ‘한녹춘’이라는 이름을 꼭 기억해줬으면 해요.”
 
 
  재일교포 北送 저지 위해 기차 세우기도
 
최익룡 민단 고문. 그는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이 일어났을 때, 민단 대책위원장이었다.
  오사카 이쿠노구(生野區)에서 민단의 최익룡 고문, 이용권 의장을 만났다. 홍성인 단장과 이들은 1960~70년대 민단과 조총련의 대립이 극심했던 시절, 함께 청년활동을 하며 조총련과 투쟁했다. 오랜만에 만난 이들은 소주를 마셔 가며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이들은 조총련과 대립이 가장 극심했던 사건으로, 만경봉호 사건과 문세광 사건을 꼽았다.
 
  “1959년부터 재일동포 北送(북송)사업이 벌어졌어요. 조총련은 ‘세금도 없다. 교육비와 병원비가 안 든다. 지상천국이다’라며 재일동포들의 북송을 홍보하고 다녔습니다. 우리는 북한이 어떤 곳이라는 걸 알았지만, 일본에서 힘들게 살던 많은 동포들은 북한의 선전에 솔깃했습니다. 그래서 민단 청년부를 중심으로 ‘북송’을 저지하기 위해 ‘조총련의 거짓말에 속지 말라’고 홍보하고 다녔어요. 1959년 12월 14일 북송 1진이 니가타항(新瀉港)을 출발하는 걸 막으려고 니가타항에서 시위를 했어요.”(최익룡 고문)
 
  “철로에 주저앉아 우리 동포들을 태운 기차를 세웠어요. 그러나 아무리 홍보를 해도 가는 사람들은 가더라고. 민단에서 적극적으로 막았으니 그 정도만 북한으로 갔지. 우리가 손 놨으면, 속아서 북한에 간 사람이 훨씬 많았을 거예요. 당시 북송선 탔던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사는지….”(이용권 의장)
 
1974년 만경봉호의 오사카항 입항을 저지하는 모습. 당시 민단 소속 6만명이 모여 반대 시위를 벌였다.
  북송선 만경봉호는 일본의 니가타항에서 주로 출발했지만, 1974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사카에 들른 적이 있었다. 당시 오사카 민단은 만경봉호의 오사카항 입항을 결사적으로 막았다. 당시 오사카항에서 시위를 벌였던 홍성인 단장의 회고.
 
  “그때가 1974년 4월 7일이에요. 만경봉호가 민단의 안방이나 다름없는 오사카에 들어온다는 얘기를 듣고 6만명 가까이가 오사카항에 모였어요. 일본 경찰 수십 명이 모였지만, 우리가 워낙 기세등등해서 막을 수 없었죠. 만경봉호가 입항해 만경봉호 승무원들이 오사카 세관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항구와 세관까지 몸으로 막았어요. 만경봉호가 떠날 때까지 우리가 시위를 해서 오사카에서는 재일동포들을 데려가지 못했습니다.”
 
  ―문세광 사건 때도 민단과 총련이 극심하게 충돌했죠?
 
  이 질문에 최익룡 고문이 답했다.
 
  “문세광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제가 민단 대책위원장이었어요. 문세광이 살던 집이 제가 단장으로 있던 이쿠노 北(북)지부 소속이었어요. 문세광이 처음에는 민단 단원이었습니다. 1974년에 민단에서 제명된 한국청년동맹 소속이었죠. 문세광도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 전에 민단에서 제명됐어요. 문세광은 민단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사사건건 한국 정부에 반대하고 북한이 좋다는 식으로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제가 여러 번 경고했는데, 도저히 안 돼서 민단에서 제명했어요. 당시는 민단에서 제명하면 한국 여권을 받을 수가 없어 문세광이 한국에 입국할 때 일본 여권을 들고 갔더라고요.”
 
 
  민단 단원이었던 문세광
 
1974년 8·15 저격사건 후 민단 오사카 지부 단원들이 북한 규탄 시위를 벌이고 있다.
  ―육영수 여사 저격 때 민단 단원들이 8·15 행사장에 많이 있었을 텐데요. 민단에서 제명된 사람이 어떻게 한국에 왔는지 의심하지 않았습니까.
 
  “당시 민단 단장이 黃七福(황칠복)씨, 부단장이 沈在仁(심재인)씨였어요. 이 두 분 모두 문세광을 잘 몰라요. 오사카 쪽에서 활동하던 단원 가운데, 문세광을 모르는 사람들만 8·15 행사에 갔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 한 명만 거기에 갔으면 문세광을 막을 수 있었겠죠.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실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이쿠노 北(북)지부 쪽에 살던 민단 단원들은 자신의 집에 문세광을 비난하는 플래카드를 걸었는데, 그런 집은 어김없이 조총련의 공격을 받아 유리창과 문이 부서졌다. 민단 청년부 단원들은 매일 밤 순찰을 돌며 조총련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 와중에 조총련 이쿠노 西(서)지부 소속 청년들이 민단 지부의 간판을 칼로 긁은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격분해 당시 사무실에 있던 최 고문과 홍 단장 등 20명의 청년부 단원들이 조총련 이쿠노 서지부를 습격했다. 조총련 사무실에는 약 70명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습격을 받고 창문과 뒷문으로 도망쳤다. 민단 단원들은 조총련 지부에 태극기를 꽂고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홍성인 단장의 얘기다.
 
  “문세광이 제명됐지만, 하필이면 민단 오사카 소속이었다는 게 우리를 부끄럽게 했어요. 그래서 더욱 이를 물고 싸웠지. 오사카가 민단의 본거지인데, 거기 단원 출신이 육 여사를 저격했으니까요. 우리는 본국과 박정희 대통령에게 참 미안했어요.”
 
  문세광 사건이 일어났을 때, 문세광의 가족은 교포사회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했다. 그에게는 어머니가 있었는데. 하필 성이 ‘陸(육)’씨였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선술집을 운영하며 생계를 꾸려갔다. 그 선술집은 민단 단원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문세광이 사형당한 후, 문세광의 어린 딸은 어디론가 보내졌다고 한다.
 
 
  민단 소속 대학교 세워야
 
육영수 여사 저격범 문세광은 한때 민단 오사카 지부 단원이었다.
  이튿날 오사카 히라노(平野)구에 있는 홍성인 단장의 자택을 찾아갔다. 30년 전에 지은 2층집은 어둡고 어수선했다. 14년 전에 부인이 간암으로 세상을 뜬 후, 홍 단장은 홀로 살고 있다. 그는 “집이 지저분해서 오사카에 살고 있는 아이들(2남 2녀)도 못 오게 한다”며 웃었다. 평생 민단 일만 해온 홍 단장은 자식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게 가슴 아프다고 했다.
 
  “민단 월급 받아서 도저히 대학을 못 보내겠더라고. 죽은 아내가 바느질해서 생계에 보탰는데 부족했죠. 하지만 데리고 살던 남동생 두 명은 대학을 보냈습니다. 동생들은 대학교 안 보내고 아들만 대학교 보낸다는 얘기를 듣기 싫었어요.
 
  대학에 못 보냈지만 다행히 아이들이 자기 밥벌이 잘하고 있어요. 저는 애들을 일본 고등학교 안 보내고, 본국 정부가 승인한 금강학원에 보냈어요. 거기서 민족교육을 시켰죠. 덕분에 며느리, 사위 모두 한국인이에요.”
 
  ―민단 소속 학교가 있습니까.
 
  “백두학원, 금강학원 두 곳이 있어요. 과거 백두학원은 민단과 조총련이 반반씩 돈을 내서 중립교육을 시킨 곳이었습니다. 문세광 친형이 이곳에서 선생을 했어요. 나도 백두학원을 졸업했는데, 너무 북한 쪽으로 기울어서 제가 이 학교에 태극기를 올리고 북한과 친한 교사들을 다 쫓아냈습니다. 지금은 본국 정부에서 교사가 파견됩니다. 금강학원은 설립 때부터 본국 교육을 시키는 곳이었습니다.”
 
 
  “본국은 이제 우리를 잊었는가?”
 
  ―민단 소속 대학교는 없습니까.
 
  “대학교가 없을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도 너무 적어요. 현재 일본에 조총련 소속 학교만 140여 개가 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북한 교과서를 가지고 북한 김일성 父子(부자)에 대한 교육을 받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북한 사고방식으로 공부를 하는 겁니다. 조총련은 조선대학교도 있어요. 이에 비해 우리는 달랑 고등학교 두 개입니다. 본국이 이제 일본에 대학교를 설립할 수 있는 재력이 있잖습니까. 고등학교도 더 늘리고 대학교를 세워서 본국을 교포 4세, 5세들에게 이해시켜야 합니다. 북한 식 민족교육을 받은 교포들이 늘어나면 결국 본국에 해가 됩니다.”
 
  ―한국에서는 민단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민단이 지난 군사독재 정권과 지나치게 유착됐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저는 그런 얘기가 너무 원통합니다. 민단의 강령 1조가 ‘대한민국의 國是(국시)를 준수한다’입니다. 대한민국의 국시는 조국통일과 자유민주주의입니다. 민단은 지난 60년간 어느 정권이 들어서든 이 국시를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어요. 본국 정부가 독재를 한다고 해서, 민단이 본국 정부와 싸운다면 일본에서 우리가 버티고 산 목적이 없어지는 겁니다. 우리는 생각이 조금 달라도 본국 국민이 선택한 본국 정부의 시책을 따르는 게 우리의 임무라고 생각해요.”
 
  홍성인 단장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盧武鉉(노무현) 정권 때 일본에 왔던 386 국회의원 한 명이 ‘왜 민단은 민주화 운동을 안 했냐’고 비난하더군요.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북한 조총련과 투쟁한 것을 잊고, 오로지 왜 박정희와 안 싸웠는지를 비난하는 겁니다. 본국 국회의원이 이런 얘기를 하는 걸 듣고 우리 1세대들은 너무 억울하고 슬펐어요.”
 
  ―지난 반 세기 동안 민단 일 해오신 게 아깝지 않으세요.
 
  “절대로 그 시간이 아깝지 않아요. 하지만 이제 본국이 민단을 잊은 게 아닌가 싶어서 답답합니다. 민단은 죽어서도 본국에 돌아가기 위한 교포들의 야전사령부 같은 곳입니다. 우리는 지난 60년간 敵地(적지)인 일본에서 북한과 일본을 상대로 홀로 싸웠습니다. 이런 야전사령부를 본국은 이제 잊어버린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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