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잘 웃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여성들에게 인기 1순위 남자는 「유머가 풍부한 사람」이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여럿이 모였을 때 남자들은 「음담패설」, 여자들은 「뒷담화」, 즉 남의 흉을 보는 것으로 시간을 때우는 일이 많다.
지난해 KBS 2TV 「서세원 쇼」의 「토크 박스」라는 코너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 연예인들이 자신이 겪은 포복절도를 털어놓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그 코너를 통해 새로운 스타가 줄줄이 배출되었다. 「토크 박스」는 대중 앞에서 자신의 얘기를 잘 하지 않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습성을 바꾸어 놓았다는 평가를 얻었다. 이 프로그램으로 떠돌아다니는 유머보다 직접 겪은 생생한 해프닝이 더 큰 웃음을 자아낸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스무 명에게 듣기만 하면 웃음이 터질 만한 직접 겪은 일에 대해 원고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에는 모두들 『별로 그런 일이 없는데, 내 얘기가 뭐 재미있을까』 했지만 곧 포복절도할 사건을 담은 원고가 속속 도착했다.
자신이 겪은 일을 주변사람과 즐겁게 나누는 것은 건강을 위해서도 아주 필요한 일이다. 30년 간 웃음과 건강을 연구한 미국 스탠포드 의대 윌리암 프라이 교수는 『10초 동안 배를 잡고 깔깔 웃으면 3분 간 힘차게 노를 젓는 것과 똑같은 운동효과가 있다』고 했다. 사람은 여섯 살 때 하루에 400번씩 웃다가 40代가 되면 하루에 평균 14번 정도 웃는다고 한다. 한 번 폭소를 터트릴 때마다 엔돌핀이 나오고, 그 엔돌핀이 유지되는 시간은 5분이다. 그래서 의학자들은 5분마다 배꼽을 잡고 웃으면 병이 생길 틈이 없다고 말한다. 5분마다 한 편씩 읽으면 엔돌핀이 팍팍 공급되는 스무 편의 얘기를 준비했다.
◈朴正熙 대통령에게야당 당수 권유
奉斗玩 방송인
1935년 황해 수안 출생. 연세大 영문과 졸업, 美 아메리칸大 대학원 수료. 동화통신 정치부 기자, 한국일보 駐美특파원, 중앙일보 동양방송 논평위원, 11·12代 국회위원,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역임. 광운대 신방과 교수, 천주교한민족돕기회 회장, 천주교남북한 장애인 걷기운동 고문, 클린 인터넷 국민운동협의회 의장. 현재 iTV 「봉두완의 진단 2002」 진행.
22년간의 신문기자 생활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방송인」이라고 불리는 나는 서슬이 시퍼렇던 유신시절에 말을 가리지 않고 하다가 몇 차례나 혼난 뒤 방송을 중단당한 적이 있다. 얼마 전 경인방송 iTV에서 大選 주자 대담을 하면서 『盧武鉉 후보는 金大中 대통령을 닮아서 거짓말을 잘한다던데…』라고 말했더니 네티즌들이 인터넷 사이트에 『봉두완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험한 글을 퍼부어댔다.
1968년 워싱턴에서 귀국하여 첫 TV 방송을 하던 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흐른다. 단 한 번도 카메라를 쳐다보지 못했는데, 그때 얘기만 나오면 우리집 사람은 지금도 이불을 뒤집어쓴다.
1970년 초부터 매일밤 「TBC 석간」 앵커를 맡았는데 그것은 단순한 아나운서가 아닌 자신의 논평을 곁들이는 「앵커」의 시발점이 되었던 프로그램이다. 밤 10시에 생방송으로 진행하다 보니 저녁에 술이라도 먹게 되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느 날 밤 9시까지 술을 마시고 술이 덜 깬 상태에서 뉴스 생방송을 하는 도중에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건설부 담당 국장을 앉혀 놓고 고속도로 현장 진척상황에 대한 질문을 하는 시간에 똑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했더니 그 국장이 『방금 물어보셨잖아요』라고 답했을 때서야 「이크」 하고 정신이 퍼득 들었다. 다음날 홍진기 사장의 『술 좀 그만 처먹어!』라는 불호령에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그 다음부터는 뉴스 생방송하는 날 저녁엔 소주 한 병을 절대로 넘기지 않았다.
1971년에 金大中씨가 大選에서 진 다음 TBC TV 「동서남북」에 金大中, 金泳三, 李哲承씨를 모셔 신민당의 앞날에 대한 대담을 나누었다. 당시 경남高 야구시합이 있었는데 거기 응원 갔다온 金泳三씨가 술을 좀 먹고 스튜디오에 들어왔다. 스튜디오가 라이트 때문에 뜨거워서 그런지 金泳三씨가 구토를 일으켰고 나는 졸지에 출연자를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등을 두드려 줘야 했다.
한번은 「굿모닝」이라는 생방송 프로그램에 스포츠신문 기자들과 야구선수를 초대했다. 나는 그때 야구에 대해 거의 문외한이었다. 공만 받는 캐처에게 계속 『홈런 몇 개 쳤냐』고 질문하는 바람에 스튜디오에 폭소가 터지고 카메라맨들이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1971년 서울컨트리 클럽으로 한라그룹의 정인영 회장, 홍성철(당시 국무총리 비서실장) 등과 골프를 치러갔다가 朴正熙 대통령 일행을 만나게 되었다. 그늘집에서 맥주를 한잔 두잔 받아 마셔 꽤 취하게 되었을 때 朴正熙 대통령은 느닷없이 『사람들이 날더러 독재한다고 하는데 정말 한번 독재해 볼까? 봉두완씨 생각은 어때?』하고 물었다.
나는 혼비백산하여 『아이구, 각하, 그러시지 말고 1975년에는 대통령 그만 하시고 제1야당 당수로 멋있는 정치 한번 해보시죠!』 했다. 朴대통령은 껄껄 웃으며 한번 생각해 보겠노라고 가볍게 넘겼지만 ,그날부터 내 주변은 갑자기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경색되었다. 회사 내에서나 내 친구들은 날더러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너무 호들갑 부린다』며 『겁나서 너랑 친구 못 하겠다』고 말했다.
얼마 후 육영수 여사의 부름으로 청와대에 갔을 때 나는 한 시간 내내 호소 섞인 질책을 감내해야 했다. 방송내용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저녁 6시쯤 소접견실에 들른 朴대통령은 나를 보고 『깡패가 왔구만』 하고 웃으며 반겼다. 나는 그날 저녁 朴대통령과 양주 한 병을 다 마시고 별의별 말을 다 하면서 횡설수설했다. 또 한 병을 거의 반쯤 비웠을 때 육여사가 술병을 슬쩍 들고 나가자 朴대통령이 『그거 도로 갔다 놔』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아이구, 간 떨어질 뻔했다』고 하자 모두 한바탕 웃었다. 우리는 화장실에 가서도 소리를 지르다시피 하며 떠들어 댔다.
여러 가지 에피소드 중에 뭐니뭐니 해도 내 막내아들 녀석이 한 얘기가 가장 포복절도할 만한 일이다. 내가 1981년 민정당 대변인 시절이었다. 아침마다 기자들이 그날의 중요 사안을 알아보기 위해 우리 집으로 전화를 했다. 어느 날 내가 화장실에 있을 때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아들이 전화를 받았다. 기자들이 나를 바꿔달라고 하자 그 녀석 왈, 『대변인께서 지금 대변실에 계시는데요』라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출입기자들은 화장실에 갈 때면 『야! 나 대변인실에 갔다올게』 했다.
◈『살이 아니었네!』
金泳 (주) SEIN 대표이사
1961년 서울 출생. SEIN JAPAN 대표이사. 세인 KOREA ART 사장. SBS 한국 슈퍼모델 뷰티 아카데미 이사장. 한국연예정보노동조합 자문위원. (주)동양방송(OSB TV) 고문.
金大中 대통령이 당선되고 집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시 金重權 비서실장이 선거 때 도와준 사람들을 초대한 일이 있었다. 나는 金大中 대통령의 코디네이터와 이미지 메이커로 활동했던 인연으로 참석했는데, 그날의 홍일점이었다. 몇몇 아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개 처음 만난 스물다섯 명의 점잖은 남자들은 눈이 마주치면 목례를 하며 교양 있는 미소를 지었다. 金重權 비서실장이 그날 참석자들을 소개하다가 나를 지목했다.
『이미지 메이킹을 하신 분으로서 대통령을 위해 한 말씀 해 주시죠』
기업체 강연을 하느라 남자들 앞에서 종종 서 보았던 나는 스스럼없이 일어나 나의 견해를 밝혔다.
『주변에서 TV에 비친 대통령이 우울해 보이고 나이가 들어 보인다고 하더군요. 대통령께서 웃으면서 인터뷰에 나가실 수 있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 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혹시 미친X 시리즈 아세요?』
그랬더니 모두 모른다는 것이었다. 당시 유행한 야한 유머 「미친 X 시리즈」를 다섯 가지 정도 얘기했더니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가까이 계신 분들이 대통령께서 TV 인터뷰를 하시기 직전에 귀에다 대고 이 얘기를 해 주세요. 그러면 얼굴에 미소가 머물러 있을 테니 훨씬 젊어 보이실 거예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하면서 많은 얘기가 오고 갔다. 식사가 끝나고 돌아가려는데 안면이 있는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아까 그 얘기 내가 다 아는 거였어요』
그 순간 민망해서 어디론가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느냐고 물었을 때 이구동성으로 모른다더니 뒤늦게 알고 있다고 밝히는 심보는 대체 뭔가? 그때의 당혹감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얼마 후 金대통령이 미국 순방에 나서게 되었다. 대통령이 미국에서 머무는 동안 입을 옷의 코디네이션을 맡게 되었다. 옷을 선정한 다음, 며칠 밤을 새워 어떤 넥타이에 어떤 재킷이 어울릴지 일일이 보드지에 사진을 붙여서 청와대로 씩씩하게 들어갔다. 10여 명의 사람들 앞에 서서 설명을 하게 되었는데 두 명을 제외하곤 모두 남자였다. 그들과는 모두 아는 사이였는데 내가 설명하는 모습을 보는 남자들의 표정이 그날따라 참으로 미묘했다. 야릇한 미소를 짓는 사람도 있고, 민망해 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체 저 표정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당시 옆구리에 지퍼가 달린 딱 붙는 투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너무 옷이 붙어서 그러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나는 평소 심플한 옷을 좋아하는데 그 옷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의상이었다. 나는 그들의 수상한 시선에 개의치 않고 준비한 것을 열심히 설명했다. 설명을 다 마친 후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내게 말을 걸었다.
『옷 한번 만져 봐도 돼요?』
『물론』
성격이 털털한 편인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놀라는 목소리로 말했다.
『살이 아니었네!』
무슨 얘기인가 했더니, 세상에나 그들은 내가 거의 나체로 앞에 서있는 줄로 착각한 것이었다. 초록색 불망(프랑스 망사) 안에 연한 베이지색 안감이 달린 투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멀리서 봤을 때 안감은 보이지 않고 구멍이 숭숭 난 초록색 불망만 보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안감이 피부색과 거의 비슷하긴 했다.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무려면 내가 살이 완전히 다 드러나는 망사만 입고 브리핑을 했을까? 여자라면 누구나 아는 불망을 모르는 남자들은 내가 설명을 하는 동안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
金亨坤 코미디언
1960년 경북 영천 출생. 동국大 국어교육과 졸업. KBS 유머1번지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김형곤 쇼」 등 다수. 연극 「여부가 있겠습니다」, 「투비오나투비」 등 다수. 뮤지컬 「왕과 나」 각색·출연. 1996년 제32회 백상예술대상 코미디언 연기상 수상. 1987년 KBS 코미디 대상. 저서 「개그맨은 대통령하면 안 됩니까」, 「형곤이도 하는데」.
몇 년전 개그맨 장두석씨와 미국 공연을 함께 간 적이 있다.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치고 나서 우리는 환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찾았다. 장두석씨가 그곳 호텔에서 일하는 한국인 종업원 최씨에게 중매를 섰는데 미국에 오면 꼭 한번 모시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호텔에 갔더니 최씨는 우리에게 무료 식사 쿠폰까지 주면서 친절을 베풀었다.
장두석씨와 나는 방에다 짐을 풀자마자 얼마 남지 않은 여행경비를 털어 도박장으로 내려갔다. 「블랙잭」이라는 도박을 대충 배워서 게임을 시작했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허전한 마음에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배가 고팠다. 무료 식사 쿠폰이 생각나서 장두석씨에게 식사를 하자고 했더니, 입맛이 없다며 『영어가 안 돼서 혼자 밥 먹으러 못 가지?』 하고 놀리는 것이었다.
『웃기지 마, 나 혼자 갈 거야』
큰소리 치고 새벽 두 시에 혼자 식당으로 갔더니 사람들로 붐볐다. 그런데 모두 돈을 잃어 풀이 죽었는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메뉴판을 보니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기왕에 무료 식사 쿠폰이니 제일 비싼 걸 시키자는 생각에서 가격만 보고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잠시 후 세숫대야만 한 그릇에 가득 담긴 야채샐러드가 나왔는데 드레싱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곧이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가 나왔다. 도저히 먹을 기분이 나지 않았다. 다른 걸로 바꾸고 싶은데 말이 안 통해서 난감해 하는데 장두석씨가 지나가는 것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일어서면서 『어이, 장형!』 하고 부르는데 이게 웬일인가. 엄청나게 튀어나온 배가 탁자에 걸려 야채샐러드와 스테이크 그릇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조용히 식사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지배인이 달려와서 나에게 뭐라고 떠드는 순간 알량한 애국심이 발동했다. 여기서 한국말을 했다가는 나라 망신이라는 생각이 들어 중국말을 하기 시작했다.
『쟈우띵 와셔 니똥샤. 멍구추산 쓰샤이와 팔보채, 난자완스』
내 엉터리 중국어가 그럴 듯하게 들렸던지 미국 지배인이 무전을 치자마자 중국인 매니저가 달려왔다. 동족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 남자가 중국말로 떠들었다. 나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 모든 것을 체념하고 방 열쇠를 미국인 매니저에게 건네줬다. 방 번호를 보고 어디다 전화를 하자 잠시 후 한국인 매니저가 와서 겨우 식당을 빠져나왔다.
밖에서 배회하던 장두석씨를 만나 함께 힘 없이 호텔방으로 돌아왔는데 이게 웬일인가. 탁자 위에 칩이 놓여 있는 것이었다. $1000이라는 선명한 글자와 함께 「Good Luck」이라고 적혀 있었다. 도박장에서 봤던 칩과 똑같은 것이었다. 감격한 얼굴로 칩을 바라보는 나에게 장두석씨는 『인간관계를 나처럼 하란 말야』 하면서 의기양양해 했다. 최씨가 우리가 돈을 잃고 올라와서 실망할 걸 알고 마련해 둔 게 분명하다며 큰소리를 뻥뻥 쳤다.
『장형, 최씨는 정말 멋진 사람이야. 우리 이걸로 심기일전해서 잃은 돈 다 따자!』
나는 기도를 한답시고 칩을 손바닥 사이에 끼우고 『하나님, 우리에게 행운을…』 하면서 장난스럽게 읊어댔다. 그런데 손바닥이 끈적끈적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손바닥을 펴보니 칩이 녹아서 흐물거렸다. 알고 보니 1000달러짜리 칩과 똑같이 생긴 룸서비스로 주는 초콜릿이었다. 우리는 멋쩍게 웃다가 주머니를 뒤져서 남은 동전을 다 찾아냈다. 반드시 잃은 돈을 찾자며 再도전에 나섰다.
둘이 다시 도박장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는 돈은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절대로 도박은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건만 그래도 미련이 남아 다른 사람들 도박하는 것을 구경하며 도박장을 어슬렁거렸다. 그런데 어떤 여자가 나에게 『김형곤씨죠? 남편하고 함께 왔는데, 우리랑 차 한잔해요』 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옛 정권 실세의 아들이었다. 우리가 얼마 안 되는 돈을 다 잃었다는 얘기를 했더니 그 남자는 나와 장두석씨에게 선뜻 2500달러씩 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들었더라면 『정치인들이 뒤로 엄청 꼬불친다더니, 그 아들까지 미국에서 도박이나 하고, 돈이 얼마나 넘치면 다른 사람에게 5000달러를 척 내주냐』 하면서 흥분했을 텐데, 그 자리에서 나는 이게 웬떡인가 싶었다.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장두석씨와 나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면 세 번째 도전에 나섰다.
행운의 여신이 그제야 우리를 알아봤는지 그 돈으로 내가 잃었던 돈을 다 회복하고도 1만 달러나 더 땄다. 장두석씨도 잘 풀려서 약간의 돈을 땄다. 우리는 여기서 그만두자며 황급히 호텔방으로 되돌아왔고 다음날 라스베이거스를 떠났다. 그후에도 한두 번 라스베이거스를 찾았지만 다시 그런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우린 그날 분명히 취했었다
朴城浩 (주)인포아트 대표이사
독일 베를린 자유大 졸업. 센터코리아(주) 대표이사 역임. 문화관광부 「2000 새로운 예술의 해」 추진위원. 조선大 겸임교수.
1991년부터 1994년까지 독일에서 공부할 때 잊혀지지 않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맥주의 나라 독일답게 독일 친구들은 술을 잘 마신다. 금요일이면 나도 독일 친구들과 함께 술을 궤짝으로 사다 놓고 마시곤 했다. 그날도 세 명의 독일 친구와 밖에서 생맥주를 마셨다. 밖에서 마시면 너무 비싸서 마음 놓고 마실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한 잔씩만 마시고 내 방으로 2차를 갔다.
집에서 마시는 거니 조금 비싼 것으로 사도 괜찮겠다며 선택한 맥주가 「바슈타이너」였다. 500ml짜리를 24병이나 샀으니 넷이 마음 놓고 먹을 만했다. 우리는 마실 때마다 병을 「짠짠」 부딪치면서 『사나이의 우정을 위하여!』, 『 한국과 독일의 발전을 위하여!』 등 생각나는 문구를 몽땅 끌어다대며 건배를 했다.
빈 병이 늘어가면서 취기도 덩달아 올랐다. 새벽 세 시쯤 되자 육체적인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슬슬 졸리기 시작한데다 모두 헛소리를 해댔다. 그래도 우리는 마지막 남은 기운을 짜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서로를 격려하며 끈질기게 술을 마셨다.
드디어 우리는 마지막 병을 따고 「짠짠」 술병을 부딪치며 건배를 했다. 그때였다. 한 녀석의 얼굴이 갑자기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그야말로 「허걱!」 하고 숨이 넘어가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걱정스런 얼굴로 녀석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봤다. 그는 거의 사색이 되더니 이렇게 외쳤다.
『알콜프라이잖아!』
영어 알코올 프리(Alcohol Free)의 독일어 표기는 「Alkoholfrei」이다. 아니 지금까지 몇 시간 동안 우리가 무알코올 음료를 마셨다는 말인가? 순식간에 술이 확 깬, 아니 아예 취한 적이 없는 우리가 빈 병을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몽땅 무알코올 음료였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우리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서로를 바라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있자니 우습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절대로 남에게 얘기하지 말자고 굳게 약조했다.
유학기간이 끝나갈 무렵 용기를 내서 친구 따라 남녀 혼성 사우나에 간 일도 기억에 남는다. 잔뜩 기대하고 갔더니 모두 수영복을 입고 온탕과 미끄럼틀 등 각종 시설을 이용하고 있었다. 괜히 긴장했다는 생각을 하며 온탕을 즐기고 있는데, 친구가 나를 끌고 다른 문으로 들어가면서 『오늘 물 좋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물이 더 좋은 곳이 있나 보다」고 생각하며 따라갔는데 친구가 수영복 바지를 쑥 내리는 것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비장한 심정으로 나도 수영복을 벗었다.
혼성 사우나의 문을 여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서른 개의 눈동자가 우리의 아랫도리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이었다. 모두 40代 정도 된 여성이었다. 그제야 「보러 갔다가 보여 주고 온다」는 말이 실감났다. 그 자리에 10초 정도 서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시간이 왜 그리 길던지. 쓰러지지 않고 자리를 잡은 게 다행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여자들을 슬쩍 훔쳐보는데 또 한 번 얼굴이 화끈거렸다. 모두 수건을 깔고 앉아 있는데, 나 혼자 수건으로 가리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슬며시 수건을 걷어 깔고 앉았다. 이상하게도 조금 지나자 앞에 앉아 있는 그녀들이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한두 번 정도 더 혼성 사우나에 갔는데, 그 다음부터는 아주 편하게 사우나를 하고 왔던 기억이 난다.
◈공포의 아마존 여행
趙周淸 만화가·여행가
1945년 경북 안동 출생. 연세大 경영학과 졸업.
세계 112개국을 여행한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콜롬비아 레티시아이다. 레티시아는 콜롬비아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마존과 닿아 있는 곳이다. 그곳은 브라질과 페루의 국경지역으로 오지 중의 오지이다.
나는 아마존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8년 전 콜롬비아로 날아가서 세계에서 가장 사고율이 높은 콜롬비아 국영항공 아비앙카에 몸을 실었다. 드디어 아마존의 정글이 보였고 아마존강에 떠 있는 섬, 레티시아가 보였다. 위에서 내려다볼 때 정글 속에 있어서인지 활주로가 굉장히 좁아 보였다. 게다가 사고율이 가장 높은 항공이라니… 식은땀이 흐르고 무사히 착륙했다. 그 순간 기내는 박수 소리로 덮여 버렸다. 겉으로는 태연해 보이던 南美 사람들도 모두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승객 가운데 동양인은 나 혼자였다.
레티시아는 스페인어권으로 영어는 단 한 마디도 통하지 않았다. 호텔도 두 개밖에 없었는데 우리나라 여인숙보다 못했다. 온갖 보디 랭귀지를 동원해 15달러에 묵기로 하고 보따리를 풀었다. 적도 부근이라 늘 덥다는데 내가 갔을 때가 유난히 더 더워서 수은주가 섭씨 43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습도가 높아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렀다.
시내 구경을 하다가 너무 목이 말라서 스낵코너에 들어갔더니 30代 여인이 탁자에 엎드려 졸고 있었다. 인기척에 깬 그 여자에게 아이스크림을 달라고 했지만 도무지 알아듣지 못했다. 메모지에 아이스크림을 그려서 보여줬다. 콘에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돌돌 말아 담은 모양이었다. 그러자 여자가 오만상을 찡그리며 나를 아래 위로 훑어봤다. 아무리 자는 걸 깨웠기로서니 인상까지 쓰다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여자는 아이스크림을 줄 생각도 하지 않고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더니 코를 싸 쥐고 화장실 문을 여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내 그림이 「그것」과 많이 닮아 있었다. 나는 폭소를 터트린 후 그 그림을 받아서 혀로 핥아먹는 흉내를 냈다. 그제야 내가 아이스크림을 원한다는 사실은 안 여자가 배를 잡고 구르며 웃었다.
겨우 아이스크림 하나 얻어 먹고 다시 거리로 나섰는데 다행스럽게도 브라질 여자 선교사를 만났다. 그 여자는 영어와 스페인어에 모두 능통했다.
그녀의 도움으로 배를 한 척 빌려 4일 간 아마존을 여행하기로 하고 200달러에 합의를 했다. 알시머라는 이름을 가진 배 주인은 흑인과 백인의 혼혈이었는데 거의 흑인에 가까웠다. 어깨가 딱 벌어진 근육질에 키가 크고 인상이 험악했다. 인상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선불로 50달러를 주고 나머지는 여행 끝난 뒤에 주기로 한 뒤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날 포구에 나가보니 알시머는 아내와 아들까지 배에 태워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인이 흑인이어서인지 아들은 완전한 흑인이었다. 열여덟 살이라는데 아버지보다 더 건장했다. 그 녀석도 인상이 썩 좋은 편이 아니어서 출발할 때부터 왠지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배를 타고 아마존강 상류로 올라가다가 지류로 들어갔다. 중간에 알시머의 아내가 바나나와 흡사하게 생긴 플라타노스를 기름에 튀겨서 주었다.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계속 그것만 먹으려니 고역이었다. 하지만 험상궂게 생긴 그들이 주는 대로 받아먹는 수밖에 없었다.
지류로 들어가니 점점 강폭이 좁아져서 나중에는 5m 정도밖에 안 되었다. 계속 올라가다가 스크류에 수초가 걸려 알시머 부자가 제거하느라 애를 먹었다. 갑자기 식인 고기가 달려들어 알시머의 손을 물어 피가 나기도 했다.
몇 시간 들어갔더니 드디어 배가 질퍽질퍽한 늪에 닿았다. 알시머가 내리면서 우리들에게도 내리라고 손짓했다. 정글 속은 대낮인데도 컴컴했다. 갑자기 섬뜩한 공포가 몰려오면서 등골이 오싹했다. 아마존이고 정글이고 뭐고 그냥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근육질의 두 흑인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마구 몰려왔던 것이다.
가슴을 졸이며 그들 뒤를 따라 가는데 갑자기 앞서 걷던 알시머가 뒤를 휙 돌아보더니 허리춤에서 30㎝짜리 칼을 쑥 뽑아들었다. 그때 알았다. 너무 놀라면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또 모골이 송연하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를. 그야말로 피부가 탁탁 터지는 느낌에다 정신까지 아득했다.
「지구를 돌아 돌아 결국 南美 끝 아마존에서 개죽음을 당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순간 알시머가 칼로 나무를 탁 쳤다. 가지를 코에 들이대고 냄새를 맡더니 나에게 내밀면서 『빠,빠』 하는 것이었다. 그가 코에 들이민 나무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났다.
「뺘?」
그러고 보니 「퍼퓸」이라는 얘기였다. 향료의 원료가 되는 나무를 나에게 보여주기 위해 알시머가 나뭇가지를 칼로 내리친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며 다리가 풀렸다. 알시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뭐라고 계속 얘기했다. 왜 그러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알시머가 친절하게 여기 저기 안내하는데 나는 괜히 서두르며 빨리 돌아가자고 재촉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사람을 믿고 좀더 여유 있는 여행을 할걸」 하는 후회가 들지만 당시 나는 정말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다.
◈너무나 예뻤던 그 여자
任俊爀 씨멘스오토모티브 이사
1959년 서울 출생. 서울大 사회학과 졸업.
1995년, 전 직장에 다닐 때의 일이다. 우리 회사에서 개발한 부품을 한국의 모 자동차에 장착하는 일로 그 자동차 회사 직원들과 일본에 함께 가게 되었다. 일본에서 브레이크 시스템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일행들 가운데 일본에 처음 온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 출장이 잦았던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들의 관광안내 역할을 맡곤 했다. 그날도 저녁을 먹고 나자 세 명의 직원이 심심한데 시내에 나가 보자며 나를 졸랐다. 그래서 신주쿠 공원 쪽으로 산책을 나갔는데 그날따라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많았다. 그제야 신주쿠 공원에 저녁이면 몸을 파는 여자들이 모여든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생각났다.
『햐, 웬 여자들이 저렇게 많아요? 다들 야한데다 예쁘기까지. 이게 무슨 일이야?』
『야, 오늘 우리 여기서 역사를 하나씩 만들어 보는 게 어때』
직원들이 흥분하는 것을 보자 그녀들의 정체를 밝히기가 미안했다.
『저, 저 여자들은 콜걸인데…』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세 남자의 얼굴은 실망으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곧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우리 네 남자의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예쁜 여자가 공원에 나타났다. 다른 콜걸들과는 다르게 단정하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일행 중 한 명이 『와, 정말 너무 예쁘다. 저 여자랑 어떻게 좀 안 될까요?』라며 탄성을 질렀다.
『저 여자는 콜걸이 아닌 것 같아. 그냥 놀러 나온 거 같은데』
『하긴 저기 다른 여자들과는 격이 다르네. 진짜 예쁘다. 말이라도 한번 해 봤으면 소원이 없겠네』
우리는 아쉬움에 그저 그 여자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이상하게도 그 예쁜 여자가 또다시 등장해서 공원을 배회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또다시 그 예쁜 여자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저 여자 콜걸이 분명해. 안 그러면 왜 혼자서 공원을 배회하겠어. 우리는 말이 안 되니 좀 나서봐요. 그냥 얘기라도 하고 싶어요』
일행 중 한 명이 계속 나를 재촉했다. 셋은 부끄러웠던지 나무 뒤에 숨어 있고 내가 할 수 없이 그 여자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더욱 미인이어서 바라보기가 황홀할 지경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 『내 친구가 당신에게 반했다. 좀 만나줄 수 있겠니』라고 말하자 그녀는 서툰 일어로 나에게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어왔다. 알고 보니 싱가포르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은 학생인데 저녁이면 아르바이트로 콜걸 일을 한다며 2만 엔을 내라는 것이었다. 실망스러웠지만 티를 내지 않고 친구에게 물어보겠다며 되돌아왔다.
그 여자를 마음에 들어 했던 직원은 2만 엔은 너무 비싸다며 1만5000엔으로 흥정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졸지에 심부름꾼이 된 내가 다시 그 여자에게 다가가 5000엔만 깎아달라고 하자, 그녀가 갑자기 『저를 자세히 봤대요? 정말 제가 마음에 든대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예쁜데다 겸손하기까지 한 여자가 콜걸이 되다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물론』이라고 답했다. 그 여자는 갑자기 배시시 웃더니 『정말 나를 자세히 봤대요?』라고 다시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답하자 순간 그 여자가 자신의 얼굴을 내 얼굴에 가까이 들이밀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I am a man』
방금 전 예쁜 목소리가 아닌 게이 특유의 중성적인 목소리를 듣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여자, 아니 그 남자는 형언하기 힘들 정도의 요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깔깔 웃었다. 일행들 쪽으로 돌아오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잔뜩 기대하고 있던 직원은 『뭐래요? 깎아준대요?』 하면서 나를 재촉했다.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남자라도 괜찮겠어?』
◈새와 친한,씻지 않는 父子
尹茂夫 조류학자·경희大 교수
1941년 경남 거제 출생. 경희大 생물학과·한국교원大 대학원 졸업. 한국동물·생물학회 이사, 서울시 환경 자문위원, 경희大 생물학과 교수, 자랑스런 서울시민 100人 선정(1993년).
일생동안 새를 찾아다닌 내가 가장 흐뭇하게 생각하는 일은 아들 종민이도 새를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들은 경희大 생물학과에서 공부한 후 지금 미국 미시간대학원 동물학과에 재학중인데, 요즘은 새가 알 속에 있을 때 무엇을 하는지 연구하고 있다.
흔히 머리 나쁜 사람을 「새 대가리」라고 부르는데, 새는 정말 머리가 나쁘다. 새는 두 시간만 지나면 모든 걸 잊어버리기 때문에 동료가 죽은 전깃줄에 금방 다시 날아와 앉는다. 하지만 알 속에 있을 때 들은 어미의 목소리를 기억했다가 알에서 나오면 아무리 많은 새 무리 속에서도 어미의 목소리를 가려낸다.
새는 머리가 나쁜 대신 눈이 무지하게 밝다. 여태까지 참새가 탱자나무 가시에 앉다가 눈을 찔렸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고, 나뭇가지에 앉다가 미끄러져서 다리 부러졌다는 새를 본 적이 없다. 참새는 50m 밖에 있는 좁쌀을 발견하고 독수리는 1900m 밖에서 10㎝의 들쥐를 발견해서 낚아챈다.
이렇게 눈이 밝으니 새로운 것, 화려한 것을 보면 금방 피해 버린다. 새를 만나러 산에 갈 때면 나는 그야말로 머슴 복장을 하고 간다.
1972년에 충북 음성군 생극면에서 마지막 황새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모든 사진기자들이 황새를 찍으러 몰려들었지만 결국 나 혼자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을 동아일보에 제공했다.
나는 그 동네 里長에게 옷을 빌려 입고 지게와 모자를 쓰고 일하는 척하다가 황새가 논과 아카시아 나무에 앉아 있는 모습을 찍었다. 아무리 머리 나쁜 새지만 매일 보는 동네 사람은 알아보기 때문에 피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 키가 158㎝밖에 되지 않아 몸을 숨기기 쉬운 것도 새를 연구하는 데 아주 좋은 조건이다.
나는 새를 찾아다닐 때는 씻지도 않고 속옷도 갈아입지 않는다. 아내는 여행일정에 맞춰 속옷과 양말을 가방에 차곡차곡 넣어 주지만 하나도 갈아입지 않고 고스란히 갖고 온다. 보름 정도 씻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으면 그야말로 냄새가 진동한다. 남들은 불편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나는 그것 때문에 덕을 많이 본다.
예전에는 제주도를 오갈 때 배를 이용했는데 모두 누워서 가려고 자리 쟁탈전이 벌어진다. 하지만 사람이 많아 자리를 넉넉하게 잡을 수가 없다. 그러나 냄새를 푹푹 풍기는 나는 언제나 두 팔과 다리를 쭉뻗고 편하게 다녔다.
게다가 부산에서 서울로 오는 기차를 타면 내 옆자리 승객은 코를 감싸 쥐고 있다가 참지 못하고 일어서 버린다. 그러면 나는 의자에 누워서 편하게 서울까지 오는 것이다.
아내는 요즘도 나에게 제발 좀 자주 씻으라고 잔소리를 하지만 사람을 만나거나 강의를 갈 때 외에는 잘 씻지 않는다.
아내는 차라리 발냄새는 참겠으나 입냄새는 참지 못하겠다며 제발 이라도 닦으라고 하지만 나는 끝까지 버틴다. 자면서 푸푸거리면 입에서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별거를 할 수는 없어 궁여지책으로 우리는 침대에서 거꾸로 잔다.
그런데 아들 동민이도 나를 닮아서 잘 씻지 않는다. 미국에 있는 제 누나 집에서 2년 정도 함께 살다가 얼마 전에 독립했는데, 딸은 매일 집에 전화를 해서 동생이 씻지 않는다고 푸념을 늘어 놓곤 했다. 그러면 아내는 집안 내력이니 어쩌겠느냐며 그래도 동생을 잘 데리고 있으라고 당부하곤 했다.
씻지 않는 것까지 닮은 아들 동민이가 새 연구를 더 열심히 해서 나보다 더 훌륭한 새박사가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아들이 돌아오면 함께 우리나라를 누비며 누가 더 안 씻고 오래 견디나 내기를 해봐야겠다.
◈뉴욕, 새벽 2시의 타잔
金武貞 국민일보 종교부 차장
1958년 서울 출생.
1999년 5월, 취재차 뉴욕에 갔을 때였다. 귀국할 항공편 예약이 취소되는 바람에 평소 친분이 있는 Q한인교회 게스트하우스에 이틀 동안 신세를 졌다. 지하철을 타고 맨해튼 중심부인 타임스퀘어로 나가 오페라 「미스 사이공」도 보고 센트럴 파크에서 커피도 한잔 마시며 모처럼 뉴욕의 여유를 만끽했다. 그러나 이 휴식을 시샘하는 엄청난 사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게스트하우스는 호텔 시설에 비해 다소 떨어지지만 엄청난 호텔비를 절약하고 식사에 전화까지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를 받았으니 나로선 감지덕지였다. 귀국 전날, 아침에 입을 옷만 남겨 놓은 채 가방을 꾸리다 보니 러닝셔츠와 잠옷까지 넣어 버렸다. 뉴욕의 5월 날씨는 꽤 후텁지근해 팬티만 입은 채 그냥 자기로 했다. 침대 커버와 담요가 있으니 특별히 문제될 게 없었다.
단잠을 자다 요의를 느낀 나는 룸 밖에 따로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일어났다. 팬티 차림인 것을 의식했으나 「이 야밤에 누가 보랴」는 생각과 잠결에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방문을 나섰다. 화장실을 향해 두세 걸음 걸었을까. 등뒤로 「철컥」 하는 파찰음이 들렸고 거의 동시에 나는 『앗!』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이 방은 안에서는 열리지만 밖에서는 열쇠로만 열리는 구조였던 것이다.
난 새벽 2시의 타잔이었다. 관리인이 아침에야 나오는데 정말 난감하고 아득했다. 더구나 맨발에 팬티 차림이니 새벽기도회에 나올 여자 성도들이 나를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아무리 방법을 짜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다 슬슬 추위까지 엄습했다.
추위를 피하느라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변기에 앉았다. 바로 문 안쪽에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구절이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 감사하자. 오늘 흰색 삼각팬티를 입지 않고 그나마 무늬 있는 사각팬티를 입은 것을 감사하자」고 생각했다.
내가 짜낸 최종안은 이 어려운 상황을 글로 적어 건물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사람이 본 뒤 관리인에게 연락해 주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펜과 종이는 어디 있는가. 건물 곳곳을 뒤졌다. 혹시 경보시스템을 잘못 건드리면 이대로 경찰에게 끌려가야 하니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어린이 예배실에서 연필 한 자루와 백지 한 장을 찾아낸 기쁨이란.
나는 연필에 침을 묻혀 가며 조난상황을 상세히 기록했고, 관리인이 기진한 나를 찾아온 것은 오전 6시경이었다. 그런데 나를 더욱 기가 막히게 한 것은 관리인의 한마디였다.
『이런 일이 종종 있어 비상키 넣어둔 곳이 바로 옆에 있는데…』
요즘은 해외 출장을 가면 잠잘 때 복장을 다시 점검하고, 머리맡에 있는 키를 반드시 확인한다.
◈『아줌마, 여기 불고기 100인분만 일단 줘 보세요』
邊雄田 자민련 총재비서실장
1940년 충남 서산 출생. 중앙大 심리학 학사. 서울大 행정대학원 수료. 문화방송 아나운서협의회 고문. 제15代 국회의원. 자민련 대변인 역임.
오락프로그램인 「유쾌한 청백전」은 내 아나운서 시절의 꽃이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나를 만나면 『아, 유쾌한 청백전?』 하며 말문을 연다.
1963년 KBS에 입사했던, 나는 1969년 MBC로 직장을 옮겼고, 곧바로 공개 오락 프로그램인 「유쾌한 청백전」 진행을 맡았다. 이 프로그램이 「명랑운동회」로 이어져 1988년 끝날 때까지 나는 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 동안 이 프로그램을 맡았던 PD가 19명, 풋내기 아나운서였던 나는 아나운서 실장을 거쳐, 방송위원까지 승진했다.
일요일 아침 10시부터 한 시간 동안 진행됐던 「유쾌한 청백전」에는 스포츠맨, 연예인, 모델 등 인기인들이 총출동했다. 지금과 같은 「시청률 조사」가 없었던 시절이었지만, 일요일에 텔레비전을 켜놓은 사람 거의 모두 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1970년대 초반 프로 레슬링의 인기도 대단했다. 프로 레슬링 경기를 TV로 지켜보다 심장마비로 죽는 사람이 생겨나고, 시합이 열리는 장충체육관 주변에 장사진이 펼쳐지곤 했다.
이 무렵 프로 레슬러 다섯 명이 「유쾌한 청백전」에 출연했다. 한 주에 출연하는 사람은 10명, 5명씩 청·백으로 편을 갈라 게임을 했다.
방송이 끝나고 천규덕, 장영철 등 다섯 명의 프로 레슬러에게 3500원씩 출연료를 건넸으나, 그들은 돈을 받지 않았다.
『형님, 저녁이나 배부르게 한번 사시면 되지, 쑥스럽게 무슨 돈을 주고 그러십니까』
지금처럼 출연자 통장에 돈을 입금시키고, 송금증을 보관해야 하는 그런 시절이 아니었다.
며칠 뒤 貞洞(정동) MBC 근처의 한 고기집에서 프로 레슬러 다섯 명과 우리 제작팀 다섯 명이 저녁 식사를 하게 됐다.
『아줌마, 여기 불고기 100인분만 일단 줘 보세요』
불고기용 석쇠가 달아오르기도 전에 다섯 명의 巨漢(거한)은 불고기를 올려 놓았다. 고기에 불 기운이나 배었을까 싶은데, 고기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젓가락으로 집어먹기가 불편했는지 프로 레슬러들은 『아줌마, 밥공기 갖다 주세요』 하고 외쳤다.
제대로 익지도 않은 불고기가 다섯 개의 밥공기에 가득 담겨졌고, 100인분의 고기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PD, AD(조감독)를 포함한 우리 제작팀은 기가 질려 젓가락질도 몇 번 해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다섯 명의 선수들은 배가 덜 찼는지 우리 눈치를 슬슬 보면서, 50인분의 불고기를 추가로 주문했다. 식당에서는 고기가 다 떨어졌다고, 돼지고기를 갖다 줬다.
프로 레슬러들은 소주를 냉면 사발로 마셨다. 냉면 사발에는 2홉들이 소주가 2병 반이 들어간다. 냉면 사발에 든 그 엄청난 양의 소주를 그분들은 죽죽 들이켰다.
「천하장사는 이런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불고기 집에서 나온 음식값은 프로 레슬러 다섯 명에게 나온 출연료의 30배 정도가 되는 거액이었다.
프로 레슬러들은 미안했는지 『2차는 우리가 사겠다』며, 다른 고기집으로 우리 일행을 끌고 갔다.
『아줌마, 여기 달걀 열 줄만 삶아 주세요』
큰 함지박에 담아 내온 100개의 삶은 달걀을 앞에 두고 나를 비롯한 「유쾌한 청백전」 팀은 다시 할 말을 잃었다. 우리가 삶은 달걀을 하나씩 집고 껍질을 까는 사이, 다섯 명의 프로 레슬러들은 술안주로 땅콩을 집어 먹듯이 나머지 달걀을 다 먹어 치워 버렸다.
『저녁이나 한번 배부르게 사라』는 프로레슬러의 말이 얼마나 엄청난 얘기였는지 나는 그때서야 깨닫게 됐다. 30년 전의 일이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참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떡 5000개로 다섯 명이먹고 남은 사연
宋吉源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사람들 대표
1957년 부산 출생. 고신大 대학원, 고려大 대학원(상담심리 전공), 미국 개혁신학원 목회학 박사, 안양大 신학대학원 가정사역 주임교수 역임, 서울 사랑의교회 협동목사. 기독교가정사연구소 소장. 저서 「행복한 가정에는 아버지의 향기가 있다」 외 다수.
나는 설교할 때 재미있는 얘기를 예화로 자주 드는 편이다. 웃음으로 시작하면 교인들도 마음을 열고 설교를 잘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가장 재미있는 예화는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은 「오병이어의 기적」이다.
<이제 갓 신학교를 졸업한 한 전도사가 시골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자신을 멋들어지게 이미지 메이킹하고 싶었던 그는 가장 드라마틱한 설교를 전하고 싶어했다. 五餠二魚(오병이어)의 본문을 택했다. 우리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창출하는 교인이 되어보자고. 그런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실수를 하고 말았다.
『예수님이 5000개의 떡과 2000마리의 물고기를 가지고 다섯 명을 먹이고도 남았다』
순간, 설교 시작 전부터 졸기 시작해 전도사의 비위를 상하게 했던 장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거라면 나도 하겠다』
전도사는 어떻게 마무리지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허둥대며 설교를 마쳤다. 겨우 교인들에게 부임 인사를 받고 집에 들어 왔을 때 그야말로 초죽음 상태가 되어 있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살짝 지나도 될 일에 창피를 준 장로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는 저녁 내내 고민을 거듭했다.
「내가 이러고서도 계속 이곳에서 목회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일주일 내내 고민은 계속되었고 아무 결론도 얻지 못한 채 떠밀려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만회하고 싶었다. 이대로는 물러설 수 없다는 오기(?)도 생겨났다. 각오가 선 전도사는 여전히 지난 주일의 본문을 택했고 틀리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하면서도 열심히 전했다. 덕분에 전혀 틀리지 않았고 교인들은 지난 주일보다 더 열심히 경청하는 듯했다. 이제는 됐다 싶었을 때 전도사는 그 장로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장로님, 지난 주일에 하실 수 있다 그랬지요? 이번 주일에도 하실 수 있겠어요?』
전도사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장로가 냅다 소리 질렀다.
『지난 주일 먹고 남은 것 있잖아!』>
이 얘기를 하면 많은 교인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날이 있다고 했던가? 해외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시차에 적응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 교회에서 설교를 하다 엉뚱한 소리를 하고 말았다.
『예수님께서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가지고…』
그런데 아무도 안 웃는 것이었다. 5000개의 떡과 2000마리의 물고기라고 시작해야 하는데 성경 그대로 얘기했으니 누가 웃겠는가? 처음에는 내가 잘못 말한 줄도 모르고 이 양반들이 내 말귀를 못 알아듣나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때의 황당함이란….
결국 이야기를 속히 마무리짓고 다른 이야기로 교인들의 웃음을 끌어내기 위해 애썼다. 이번에는 정신을 차려 제대로 했다.
『사과를 따기 가장 좋은 때가 언제인 줄 압니까?』
『가을이지요』
교인들이 또록또록 대답을 했다. 내가 재빨리 수정을 했다.
『아닙니다. 주인 없을 때입니다』
그래도 안 웃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설교한 동네가 과수원 지역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내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또다시 시도했다. 그래도 안 웃는 것이었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설교를 하다 말고 물었다.
『아니, 안 우스워요? 왜 안 웃지요』
그러자 한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다.
『우, 우리는 당회(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된 모임)에서 허락해 줘야 웃는구만요』
그만 내가 포복절도를 하고 말았다. 살면서 아직 그때처럼 크게 웃어본 적이 없다. 웃기려다 내가 웃은 것이다.
◈치과계의 전설따라 삼천리
尹泰哲 이오치과 대표원장
치의학 박사. 연세大 치과대학 보존학교실 부교수, 연세大 치과대학 부속 세브란스치과병원 원장, 스웨덴 카롤린스카 인스티튜트 방문교수 역임.
어느 직종이나 그러하겠지만, 치과 의사들은 학창시절의 기억을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속이 쓰려 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미소를 짓는다. 때로는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웃기는, 물론 당사자는 말하기 창피스러운 사건이 종종 벌어진다. 거의 2, 3년에 한 번씩은 일어나는 치과계의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치과에 자주 다녀보신 분들께서는 본(치과에서는 「인상」이라고 한다)을 뜨고 치아 모형을 만드는 과정을 잘 아시리라. 치아 모형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알지네이트」라는 재료를 물과 잘 섞어 인상을 뜨기 위한 용기에 넣고, 이 용기를 구강 내에 넣는다. 알지네이트는 원래는 분말 형태인데, 물과 섞으면 약간 묽은 진흙처럼 되었다가 시간이 지나면 고무처럼 굳어진다. 이렇게 굳어진 알지네이트가 바로 인상(본)이다.
알지네이트의 색깔은 흰색, 붉은색, 미색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석고나 경석고 또한 분말 형태이다. 이것들을 물과 섞으면 회반죽처럼 되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굳는다. 경석고 중에도 붉은색을 띠고 있는 것은 굳으면서 열을 낸다.
본과 2학년 보철 실습시간이었다. 한 친구가 실습에 참석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실습에 필요한 재료를 「꼬불쳐서」 나중에라도 결석한 친구가 나홀로 실습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하였다. 며칠 후, 결석했던 친구가 일과가 끝나자마자 나홀로 실습을 감행했다.
알지네이트와 경석고를 처음 만져보는 왕초보였다. 실습에 참여한 친구들이 침을 튀기며 브리핑(?)해 준대로 알지네이트와 물을 잘 섞어서 틀에 넣고, 곧이어 자신의 입 안에 넣었다. 나홀로 실습이니 자신이 실습대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알지네이트가 굳지를 않는 것이다. 책에 따르면 5분 정도면 충분히 굳어야 하는데 말이다. 10분이 지났지만 굳기는 커녕, 오히려 열을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홀로 실습생은 「이런 알지네이트도 있나 보다」 하면서 꾹 참았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30분. 어느 정도 굳었다 생각한 이 친구는 알지네이트를 입 안에서 꺼내기로 했다. 기다리기가 지겹기도 하고, 뜨겁기도 하고, 술 약속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알지네이트가 돌처럼 굳어서 빠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빠지지 않았다. 턱도 점점 아파 오고 침은 계속 흘러나왔다. 나홀로 실습생은 하는 수 없이 보철과 선배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 광경을 본 선배는 『올해도 전설의 고향은 계속되는구나…』라며 픽 웃었다.
이 친구는 알지네이트 대신 경석고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 당시 우리 대학에서는 최고 품질의 재료를 사용해 실습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경석고와 알지네이트 모두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치과의 「치」자를 배우기 시작한 초보자들은 감촉만으로는 알지네이트와 경석고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이와 이 사이를 경석고가 가득 메우고 있고, 경석고 위에는 본을 뜨기 위한 금속제 틀이 완강하게 자리를 잡고 있으니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친구의 고통은 점점 심해지고 선배는 밤새 치과용 드릴을 이용하여 조금씩 조금씩, 구석구석의 경석고를 제거했다. 경석고는 굳으면 웬만한 돌처럼 단단해진다.
사고를 친 그 친구야 고생해도 싸지만, 애꿎게 후배 녀석 때문에 고생하신 우리 선배님은 누가 보상하나. 말이 쉽지 치아 사이에 꽉 들어찬 경석고를 제거하는 일은 엄청난 노력과 인내력과 시간을 요한다. 치과대학 후배들이여, 부디 실습에 빠지지 마시길….
◈한국에서 절대로사용하면 안 되는 단어
조화유 在美저술가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부산高·서울大 사회학과·美 웨스턴미시간大 졸업. 조선일보 기자·한국일보 美洲판 편집국장 역임. 1972년 토플시험 어휘·작문부문 세계최고 득점. 저서 「이것이 새천년 미국영어다」 등.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내 친구가 한국서 다니러 오신 그의 아버님께 비타민을 잡수시라고 권하면서 『아버님, 이거 매일 한 알씩 꼭 잡수세요. 유명한 게브랄티입니다』고 했다. 그랬더니 노인께서 『미국 사람들도 물개 불알이 좋다는 것을 알긴 아는구나』 했다고 한다. 또 관광차 미국에 온 한국 사람이 어느 약방에 들어가 서툰 영어로 『게브랄티 있느냐』고 물었다. 미국 약사가 알아듣지 못하고 그게 무엇에 쓰는 약이냐고 묻자, 한국인은 『비타민』이라고 대답했다. 약사는 『비타민?』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오, 바이더민 지브럴 티이!』 하면서 그것을 내주더란다.
미국 약사가 얼른 알아듣지 못한 것은 물론 한국인이 vitamin을 『비타민』이라고 발음하고 Gevral T를 『게브랄티』라고 발음했기 때문이다. vitamin의 영어 발음은 『바이터민』이지만, 영국 사람들이나 이렇게 발음하지 미국 사람들은 『바이더민』이라고 발음한다. 그리고 Gevral T도 『지브럴 티이』라고 해야 미국 약사들이 알아듣는다.
얼마 전 한국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워싱턴 지역의 한 슈퍼마켓에 들렀더니, 일본 여행사의 광고지가 한쪽에 쌓여 있었다. 호기심에 하나를 집어들고 보는 순간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왜냐하면 일본어와 영어로 된 이 광고지에 「Fry Two for $777 Roundtrip」이라고 크게 인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人 왕복요금 777달러」란 뜻으로 쓴 것인데, L과 R을 제대로 구별해서 발음하지 않는 일본인이 Fly(비행하다, 항공운반하다)를 일본식 발음대로 Fry(기름에 튀기다)라고 썼기 때문에 777달러를 내면 두 사람을 「기름에 튀겨주겠다」는 뜻이 되어버렸다.
영어 발음 나쁘기로는 아시아권에서 일본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나라다. 평균적으로 말해서 일본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 한국인들의 영어 발음은 꽤 괜찮은 편이다.
한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미국 친구들에게 나는 농담삼아 『한국에 가거든 절대로 「jot」과 「sip」, 이 두 단어는 쓰지 말라』고 말해 준다. 짐작하겠지만, 그 이유는 이 두 단어의 발음이 남녀의 은밀한 부분을 가리키는 토속적인 한국말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쭉쭉빵빵한 영국 여대생이 1년 간 서울의 한 영어학원에서 강사로 일하기로 계약하고 한국에 왔다. 첫 한 달 강의를 마친 그녀는 『여러분은 지난 한 달 동안 내 강의를 들었다. 내 강의에 대한 솔직한 의견을 간단히 적어달라』면서 15분 간의 시간을 주었다.
모두 열심히 적기 시작했으나 한 남학생만은 이 영국 아가씨의 미모에 넋을 잃고 그녀만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러자 여강사는 그를 향해 Why don’t you jot down your opinion, Mr. Kim?(와이 돈 츄 좃 다운 유어 오피니언, 미스터 킴)이라고 물었다.
학생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jot down의 발음 때문이었다. 미스터 김이라는 남학생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다. 왜냐하면 여강사의 섹시한 몸매에 매료된 남학생은 그때 자연스레 그의 「남성」을 세우고 있었는데, 여강사가 그것을 알아채고 jot down, 즉 『X를 내려』라고 말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jot down은 write down과 같이 「적는다」는 뜻이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jot down은 빨리, 간단히 적는다는 뜻이다. jot을 명사로 쓰면 a little amount, 즉 「아주 조금」이란 뜻이 된다. 그래서 not a jot는 not a bit와 같은 말, 즉 「조금도 ∼하지 않다」는 말이 된다. 예를 들어 Would it bother you? (그래도 당신은 괜찮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Not a bit. 또는 Not a jot.이라 대답하면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뜻이 된다. Not a jot.을 「X도 아니다」고 해석하면 곤란하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미국 청년이 역시 영어강사로 서울에 왔다. 하루는 강의를 마치고 강사실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는데, 자기 강의를 수강하는 한 여학생이 들어왔다. 미국 강사는 여학생에게 자리를 권하고 테이블 위에 놓인 coffee pot을 턱으로 가리키며 Care for a sip?(케어 포 러 씹)이라고 말했다. 이 말에 놀란 한국 여학생은 질겁을 하고 강사실을 뛰어나갔다. 그녀는 이 미국 강사가 한국에 와서 상스러운 말을 먼저 배워 가지고 자기에게 이상한 요구를 하는 줄로 오해했던 것이다.
역시 「sip」의 발음 때문이었다. sip은 drink와 같은 말이지만, 맛을 음미하며 「조금씩 마신다」는 뜻으로 동사와 명사로 다 쓰인다. 그러므로 미국 강사가 한 말은 Care for a sip of coffee?의 준말이었으며 그 뜻은 『커피 좀 마시겠느냐?』에 불과했다.
요즘 한국의 어떤 부모들이 영어 발음 잘 하라고 자식들의 舌小帶(설소대)를 잘라 주는 수술까지 시킨다는 보도를 보았다. 영어가 뭐길래, 영어 발음이 뭐길래 이 야단들인지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다.
◈바른생활 사나이는 괴로워
李雄鎭 좋은만남 (주)선우 대표
1965년 서울 출생.
11년 전 책상 하나, 전화기 두 대, 창업자금 1만원으로 결혼정보업을 시작했다. 처음 우리 회사의 이름이 「선우이벤트」였는데, 이벤트를 하다보니 자연 언론에 홍보를 많이 했고 그 덕분에 회사가 많이 성장했다. 언론 홍보를 하다 보니 자연히 내 얼굴도 언론에 자주 등장했고, 아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어디를 가나 아는 체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바른생활 사나이」가 안 되려야 안 될 수 없는 상황이다.
유능한 커플매니저들이 늘어난 요즘과 달리 예전에는 반드시 사장이 배우자감을 골라 줬으면 좋겠다는 회원들이 있었다. 고객은 왕이니 나서는 수밖에 없다. 『눈을 낮추라』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커피숍보다는 맥주집으로 가는 게 더 낫다. 그날도 서울 신촌의 K바에서 미스코리아급 외모에 학력, 집안, 직업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도도한 여자 회원을 만났다. 그런데 그녀와 내가 「밀담」을 나누는 모습을 웨이터들이 흘끔흘끔 훔쳐보는 게 아닌가. 예쁜 여자는 어디를 가나 눈길을 끈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계산을 하려는데 웨이터가 징그러운 웃음을 흘리며 귀엣말을 했다.
『결혼 사업하는 분이죠? 꽤 괜찮은 일인 것 같네요. 그저께는 모델 같은 아가씨와 즐기시더니, 오늘은 웬 미스코리아?』
그런 미인들을 만나 일을 하고 있으니 나도 행운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3년 전, 중학교 동창 둘이 오랜만에 회사로 날 찾아왔다. 그날따라 처리할 일이 많아 피곤했지만, 몇 년 만에 만난 친구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술을 곁들여 저녁을 먹고는 2차로 호텔 나이트클럽으로 몰려갔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는데도 클럽 안은 만원이었다. 우리는 옆 사람과 어깨를 부딪쳐 가며 열심히 몸을 흔들었다.
남자들만 와서인지 계속 부킹이 들어왔다. 두어 번 거절했지만, 계속되는 콜 사인에 친구가 『재밌겠다. 한번 만나보자』고 제의하는 것이었다. 술이 제법 오른 우리들은 의기투합하고 여자들을 부르기로 했다.
20代 중반의 여자 셋이 우리 자리에 합석했다. 내 옆에 앉은 여자가 내게 착 달라 붙어 해실해실 웃었다. 하지만 술이 취한 상태에서도 행여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제하고 있었다. 그러자 친구는 『너 좋다는데 왜 마다하냐?』며 나를 부추겼다.
은근히 「그럼 손목이라도 잡아봐?」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이번에는 너무 술이 취해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냥 앉아서 내 파트너와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앉아 있었을까. 제풀에 지친 여자들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파트너가 마지막으로 일어서며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선우 사장이시죠? 저, 오늘 선우에 가입한 회원이거든요. 친구들끼리 자축 겸해서 왔는데, 사장님과 합석했네요. 어떤 분인지 보려고 제가 꼬리를 좀 쳤죠, 뭐. 부킹에 응하시다니 유감이네요』
순간 술이 확 깼다. 다행히 별일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큰 망신을 당할 뻔했다. 그 자리에서 회원에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사과의 의미로 우리 회사에서 가장 유능한 커플매니저를 소개해, 하루빨리 결혼시키라고 계속 압력을 넣었다. 다행히도 그 회원은 5개월 후 아주 괜찮은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 사건 이후 난 나이트클럽은 절대 가지 않는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혹시 저 아세요?』라고 묻는 버릇까지 생겼다.
◈全力으로 달려와서 「풍덩!」
全東均 시인
1962년 경주 출생. 중앙大 문예창작학과 및 同 예술대학원 졸업. 시집 「오래 비어 있는 길」, 산문집 「나뭇잎의 말」. 현재 한국방송광고공사 출판부 근무.
한참 낚시에 빠져 있던 몇 해 전의 일이다. 초보 낚시인이 대부분 그렇듯 나와 O형도 주말이 오기만 기다리며, 수요일이나 목요일쯤이면 「이번 주에는 또 어디로 갈까?」 행복한 고민에 빠지곤 했다.
나보다 늦게 낚시를 시작했지만 O형의 열성은 대단했다. 일요일 새벽 4시 반이면 어김없이 집 앞에 차를 몰고 와 기다리곤 했다. 그는 유난히 집중력과 의지가 강해서, 한번 낚시를 시작하면 그 자리에서 좌선을 하듯이 몇 시간이고 꼼짝하지 않고 찌만 보며 앉아 있었다.
언젠가는 강화에 함께 낚시를 다녀온 다음날 새벽, O형 혼자 낚시를 간 일도 있었다. 집에 돌아와 잠자려고 누웠는데 그날 잡다 놓친 월척 붕어― 여자는 헤어진 여자가 더 아름답게 보이고, 붕어는 놓친 붕어가 더 크게 보이는 법이다― 가 금빛 지느러미를 흔들며 천장 위를 유유히 왔다갔다 하는 바람에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런 증상은 초보 낚시인이라면 통과의례처럼 겪는 일이기도 한데, 지금 생각해도 O형의 경우는 조금 심각한 편이었다.
몇 해 동안 그와 낚시를 다니면서 이런 저런 일들을 많이 겪었다. 김밥과 떡밥을 같은 비닐봉지 안에 넣었던 탓에 떡밥으로 뒤범벅된 별미(?)의 김밥을 먹은 적도 있고, 비포장 농로에 차가 빠져 낚시는커녕, 몇 시간 동안 진흙창에서 고생만 하다 온 적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일은 어느 봄날, 강화의 수로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날 따라 날씨도 좋았고 아침부터 붕어의 입질도 좋았다. 한참 낚시를 하다 보니 정오가 다 됐는데 몇 번이나 밥을 먹자고 해도 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지금 고기가 잘 잡히고 있고, 씨알이 점점 커지고 있으니 나중에 먹겠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혼자 도시락을 꺼내 먹고 있는데 그가 엉거주춤 일어서서 내 쪽으로 왔다. 밥 먹으러 오는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소변이 마려워 잠시 일을 보고 올 테니 낚싯대를 좀 봐 달라고 하면서, 혹시 입질이 오면 빨리 불러달라고 당부를 했다. 하기야 내가 앉아 있는 방둑과 그의 낚싯대가 있는 자리는 가파른 경사가 지긴 했지만 불과 몇 미터 거리였다.
말이 씨가 되었을까?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수초 속에 던져두었던 두 칸 반짜리 낚싯대의 찌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는 약속한 대로 『형, 찌 올라와!』라고 소리 쳤고, 그 말이 떨어지자 마자 일을 보다 말고 황급하게 뒤돌아서는 O형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채 여미지 못한 바지를 한 손으로 부여잡은 채, 전력으로 달려오던 그의 모습을. 그리고 잠시 뒤, 바위라도 굴러 떨어진 듯 힘차게 들려오던 「풍덩」 소리를. 그는 너무 급하게 달려오다 그만, 경사진 비탈에서 미끄러져 물 속으로 빠져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날도 그는 물에 빠진 옷과 신발을 봄볕에 말리며 저물녘까지 낚시를 했으니….
◈최대의 비굴함으로 난국 돌파
崔潤姬 프리랜서 카피라이터
1947년 광주 출생. 이화女大 국문과 졸업. 기업체, 주부 대상 강의활동. KBS 라디오 「안녕하셔요? 황인용, 김미화입니다」 등 3개 프로그램 고정출연. 저서 「행복, 그거 얼마예요?」, 「고정관념 와장창 깨기」.
나는 호기심의 천재다. 아직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것 해 보기, 말하자면 첫 경험해 보기를 무지 좋아한다. 언젠가 전철표 한 장 달랑 들고 종점에서 종점까지 왕복여행을 하기로 작정하고 「가쁜사쁜」 집을 나섰다. 평소에 나는 유난히 큰 트렁크형 핸드백 속에 필통, 책, 노트, 생수통까지 온갖 것들을 이동 백화점 비슷하게 짊어지고 다닌다. 그래서 그날은 이륙 직전의 비행기처럼 날렵한 「야호!」 포즈였다.
나는 헐렁헐렁한 시간을 택해 마치 먼 타향에서 온 여행객처럼 느긋함을 즐기며 전철을 한 바퀴 돌았다. 기기묘묘 사람 풍경을 관람하던 나는 내 「삼빡한」 아이디어에 별 5개를 줘야지 하며 팝콘 기계처럼 마음껏 팽창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어떤 남자가 내 앞에 63빌딩처럼 떡 하니 섰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붕대로 머리를 감싼 미스터 근육질, 올록볼록 보디빌딩이었다. 이마 부분에선 빨간 피(아마도 머큐로크롬?)가 배어 나와 공포 분위기 100% 초과 달성중이었다.
「에그머니나, 맙소사, 우야꼬, 워쩐다냐?」
평소에도 겁쟁이로 소문난 나는 갖가지 사투리를 연발하면서 숨이 덜커덕 막혔다. 그런데 그 무시무시한 남자에게서 생각지도 못할 야들야들한 말이 튀어나왔다.
『누나, 1000원만 줘!』
마치 6·25 전쟁 때 헤어진 피붙이 이산가족이라도 되는 양 「함초롬하게」 웃고 서있는 30代 초반의 남자! 그러나 나는 지금 핸드백도, 돈도 없잖은가. 그렇다고 그에게 이렇게 말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동생아, 누나는 지금 달랑 전철표 한 장 들고 첫 경험중이걸랑!』
그가 그것을 믿어줄 리 만무하고 나는 그의 혹독한 심판을 받을 것이 두려웠다. 그 순간 갑자기 전광석화처럼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옆 사람에게 빌리는 거야! 나중에 갚으면 되지 뭐!」
쥐가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 나는 옆에 자고 있는 할머니를 마구 흔들었다.
『할머니, 할머니!』
나의 다급한 소리에 단잠을 깬 할머니는 부스스 눈을 뜨며 물었다.
『시방 불이라도 낭겨?』
『할머니, 1000원만 꿔 주세요!』
할머니는 어이없다는 듯 딱, 한 마디만 남긴 채 야속하게도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나 돈 어!』
아, 부러운 할머니의 팔자!
나에겐 최후의 선택밖에 없었다. 1. 맞장을 뜬다 2. 최대의 비굴함으로 난국을 돌파한다.
「용기결핍증」인 나는 부끄럽게도 2번을 선택했다. 그것도 그의 팔뚝에 새겨진 문신을 보고 가까스로 얻은 용기였다.
「왼쪽 팔뚝─차카게 살자. 오른쪽 팔뚝─일편단심」
난 그에게 온갖 비굴한 표정으로 베팅을 했다.
『집이 일산이라 맨날 이 전철을 타고 다닌다. 언젠가 또 만날 것이다. 그때 따따블로 갚겠다』
대충 이런 내용의 말을 덜덜 떨면서 간신히 뱉어낸 나는 눈을 「조신하게」 내리깐 뒤 그의 처분만을 기다렸다. 사형? 무기징역? 집행유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누나, 나중에 오리발 내밀지 마. 약속은 꼭 지켜야 해?』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나는 휴우~ 한숨을 쉬면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제껏 내가 보아온 어떤 남자의 뒷모습도 저렇게 멋있진 않았다! 나는 그날 이후 빳빳한 1000원권 세 장을 지갑 속에 넣고 다닌다. 그리고 그를 애타게 기다린다.
『제발 나타나라, 나타나라. 갚아주마, 갚아주마!』
내가 이토록 애타게 기다려도 그는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개과천선해서 전업을 했나? 아니면 세계화 추세에 맞춰 필리핀, 일본 등지로 무대를 옮겼나?
◈한 명의 사망자는 어디로 갔을까?
金榮 부산MBC 사장
경북 영주 출생. 부산수산大, 동아대大 대학원 졸업. 1998년 「수필문학」에 수필추천 완료. 저서 방송칼럼집 「세상을 흔들어 깨우는 소리」. 1994년 제21회 한국방송대상 수상.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던 한여름의 무더위가 채 식기도 전인 1978년 7월15일 오후 8시50분. 부산에서 양산군 철마면으로 넘어가던 경북 5자 40××호 시외버스가 「갈치고개」에서 불이 났다.
주말이라 부산에서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학생, 직장인들로 만원을 이룬 버스가 헐떡거리며 고개를 오르는 순간 「펑」 하는 폭음과 함께 버스 안이 불바다가 되고 말았다. 승객들은 서로 먼저 뛰어내리려고 아우성을 쳤고 이 틈을 타 불길은 승객들의 호흡을 가쁘게 조여들었다.
30분 간에 벌어진 버스 화재사고였다. 순간에 일어난 참상이었다. 이 사고로 현장에서 승객 8명이 숨졌고 병원에서 다시 4명이 숨짐으로써 사망 12명, 중화상 12명의 대형교통사고였다.
이 사고는 벼 병해충 방제용 동력분무기에 사용할 휘발유를 권모라는 승객이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버스 안에 실었다가 넘어지면서 흘러나온 휘발유에 불티가 옮겨 붙어 일어났다. 20代의 신혼부부가 바닥에 떨어뜨린 황금팔찌를 찾기 위해 성냥불을 그어대는 순간 불바다가 된 것이다. 무더운 한여름 밤 화상 입은 환자의 비명도 비명이지만 갈치고개의 우거진 아카시아 숲은 칠흑 같은 여름밤의 공포였다.
사건의 전말은 이런 것이지만 경찰이 검찰에 사건경위를 보고하는 과정에서 해프닝이 벌어졌다. 동래경찰서 출입 J기자의 연락을 받고 내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관할 양산경찰서 M서장이 사망자를 확인하느라고 바빴다. 현장에서 확인된 사망자는 9명이라고 경찰은 밝혔다. 그리고 검찰에 보고했다. 아,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밤새워 구조작업을 하고 날이 밝아 다시 확인하니 사망자는 9명이 아니라 8명뿐이었다. 한 명의 시신은 어디로 갔을까? 야단이 났다.
그러나 의문은 이내 풀렸다. 경찰은 어젯밤 사망자의 머리를 세어서 9명이라고 했는데, 다음날 아침 밝은 세상에서 다시 보니 사망자는 8명이고 불에 그을린 커다란 수박 한 덩어리가 시꺼먼 모습으로 발견된 것이다. 화끈거리는 차체 속에서 조그마한 손전등으로 엉겁결에 수박을 사람의 머리로 잘못 본 것이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참!
터덜거리는 시골길 시외버스 만원승객들, 무더운 한여름 더위, 그날 밤의 모기는 어찌 그렇게도 물어뜯던지? 지금 생각해도 식은땀이 주욱 흘러내리는 공포의 참상이었다.
◈『그만들 혀, 어디까지 씹을겨?』
鄭德姬 명지大 사회교육원 주임교수
1956년 충남 예산 출생. 동국大 교육대학원 교육경영전공. 경인女大 교수 역임. SBS 파워FM 「정덕희의 신나는 세상」 진행. 삼성·현대·LG 외 1000여 개 기업체 출강. 저서 시집 「변신하는 여자」, 수필 「여자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남편이랑 느티나무 그늘 밑에 자리 깔고 누워 매미 소리 들으며 수박 먹고 싶었던 나. 살다 보니 내가 느티나무가 되어 가족에게 안온한 그늘을 주는 여자가 되어 있다. 내 나이 여자로 태어난 특권은 남편의 그늘에서 혀 짧은 소리로, 『여봉~ 몇 시에 올 거야?』, 『나 사랑해?』 하며 살다 가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세상의 그 거친 바람을 막아주는 남편. 그런 남편에게 못 해 줄 게 뭐 있을까?
어쩌다 TV라는 대중매체에 알려졌지만 실체의 내가 아닌 각자의 주관적 잣대로 사람들에게 입방아의 대상이 될 때가 제일 싫다. 그날도 평촌에서 오전 강의를 마치고 한정식 집에 점심을 먹으러 갔을 때다. 미닫이 문으로 분리된 방. 옆방의 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그런 방에 자리를 잡았다. 동창모임인지 계모임인지 옆방 여자들의 수다는 대단했다.
『왜, 있잖니. 정덕희. 그 여자』
한 여자가 대화 중 정덕희를 끄집어 냈다. 그때부터 수다의 메뉴가 정덕희다.
『그 여자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니? 밥맛 떨어지더라』
『아니야. 얼마 전 강의를 들어봤는데 내 얘기하는 것 같아 가슴이 뜨끔뜨끔해 혼났어』
『어떻든 그 여자 내 체질 아니야. 하여간 이상해. 그 여자 공주병 중증 아니니?』
『얼마나 멋지니? 당당하게 살잖아. 시원해서 좋더라』
옆방에 내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각각의 생각과 평가를 마구 쏟아 놓았다. 얼마쯤 하다 그만둘 줄 알았는데 좋아하는 여자, 싫어하는 여자가 확실하다 보니, 내편 네편 갈수록 열띤 토론회장이 되었다. 그냥 있기엔 내가 더 불안했다. 무슨 말이 더 나올까? 벌떡 일어나 미닫이 문을 열었다.
『그 여자 여기 있어요. 그만들 혀~ 밥이 안 넘어가네. 어디까지 씹을겨?』
40代 여자 여덟 명이 깜짝 놀라 당황하더니 이내 깔깔대고 난리다.
『어머! 어머! 세상에 이런 자리에서 만나다니! 손 좀 만져봐요』
『화면보다 이쁘네』
『역시 정덕희답네요. 문 열고 들어올 수 있는 걸 보면…』
열정적으로 환영하는 사람 속에 머쓱해 얼굴을 붉히며 벌레 씹은 모습의 여자도 있다. 히히~ 깔깔∼ 속없는 여자가 되어 푼수라는 무기로 구부리고 또 구부린다. 나는 난데,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평가하니 너무나 속상하다. 아무렇지 않은 양 좋은 강의 소재 건졌다며 일행과 작별인사를 하고 차에 오르니 허탈함에 가슴이 휑 했다. 조용히 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난 눈물이 주르르∼ 볼 위를 타고 흘러 입 안에 스민다. 텅빈 가슴. 눈을 감아 버린다.
『내세에는… 내세에는 연약한 여자로 살다 가게 하소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서태지의 「金日成」사건!
金恩先
SBS FM 「최화정의 파워타임 작가」
연세大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KBS TV 연예가 중계, KBS 2FM 최화정의 가요광장 등 구성. 1995년 KBS 라디오 최우수작가상 수상. 한양女大 문예창작과 출강. 콩트집 「사랑풍경」 015B 앨범수록 -동화 「푸른바다의 전설」.
서태지를 만난 건 1990년대 초, 공영방송 FM 간판 프로그램 정오 시간대를 집필할 때였다. 지금은 세월이 좋아져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당시엔 간담이 서늘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인기스타가 나오는 코너였는데 신세대 문화의 기수로 대변되던, 초절정 인기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오는 날이었다. 그들의 말 한 마디, 손짓 하나가 전국의 10代들을 동요하던 그런 때였다
「서태지와 아이들」 중 서태지는, 나이도 제일 어리고 동안이었지만 과묵했다. 뭐라고 물으면 「그런데여∼ 아닌데여∼」 특유의 콧소리로 말끝을 흐리며 배시시 웃는 수줍은 미소년이었다. 질문 중에 『앞으로 단 한 번의 콘서트를 한다면 어떤 무대에 서고 싶은가?』 하는 게 있었다. 순간, 서태지는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그랬다.
『북한에서 통일 콘서트를 하고 싶은데여, 金日成 각하도 초대하구여, 북한 동포가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 콘서트를 하고 싶어여』
문제는 「각하」라는 호칭이었다. 세상에, 大공영방송에서 金日成 각하라니, 사건이었다. 지금처럼 남북한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50년 만의 해빙 무드라면, 그때의 해프닝이 오히려 참신한 뉴스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7∼8년 전만 해도 방송에서 이런 발언은 감히 상상도 못 했었다. 게다가 「무찌르자 金日成」도 아니고 「金日成 괴수」도 아니고, 「金日成 각하」를 초대해서 공연을 하고 싶다니….
스태프들의 얼굴은 납덩이로 변했다. 담당 프로듀서는 당황한 나머지, 인터뷰를 황급히 끊고, 바로 음악을 틀었다. 그 사이 스튜디오에서는 『金日成 각하라는 존칭이 말이 되느냐, 金日成이라고 정정해라, 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얼떨결에 나온 말이라고 해명해라』 하며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작가인 나도 뭘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겁만 잔뜩 먹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부장님이 생방송 주조종실로 뛰어내려오고, 사태는 일파만파로 번지는 듯했다. 허옇게 질린 프로듀서는 곧바로 심의실에 전화해서 선수를 쳤다.
『생방송 도중에, 약간의 불미스런 일이 눈깜짝할 새 있었는데, 전혀 의도된 바가 아니며, 어린 서태지가 잘 모르고 통일 콘서트를 하고 싶은 마음에, 말이 헛나와 金日成 각하라고 한 거다. 절대, 사상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며 극구 해명을 했고, 다행히도 사건은 가까스로 진정되는 듯했다.
하지만 혹시나 기사화돼서 어르신들 귀에 들어가면 어쩌나, 담당 프로듀서가 잘리면 어쩌나, 그 불똥이 작가한테까지 튀면 어쩌나 별별 비굴한 생각으로 가슴 졸이며 몇 주간을 보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사건 이후 서태지의 태도가 우리를 또 한 번 긴장하게 만들었다
분이 안 풀린 프로듀서는 서태지를 만나 『지금 시국이 어떤 시국인데 그런 불온한 발언을 했느냐, 누구 잡을 일 있느냐, 괘씸죄를 적용해서 방송출연 중지를 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서태지는 눈썹하나 까딱 안 했다. 되레 코너에 몰린 서태지는 동요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뜻은 없었구여, 북한에선 金日成을 각하라고 부르지 않나여? 그리고, 하루속히 북한에서 평화 콘서트를 하고 싶기 때문에 말한 건데여』
사실 그 말이 맞다. 석고대죄를 할 만큼 죽을 죄를 진 것도 아닌데,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방송정지도 달게 받겠습니다』 할 서태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시국 상황으로 보면 이런 비상사태에선 누구라도 뒤탈 없게 몸 사리지 않았을까 하는 게 중론이었다. 그러면 더 이상 추궁 안 받고, 모두가 편하게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서태지는 잘못한 게 없다고 딱 잘라 말했었다. 물론 사과도 없었다. 중요한 건 「金日成 각하」가 아니라 「통일 콘서트」였다는 게 그의 답이었다.
이제 세상은 변했다. 서태지의 예견대로 남북한 가수들이 한데 어우러져 공연도 하게 되고, 서태지의 평화 콘서트도 시간 문제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시엔 「서태지의 金日成 사건」이라 하여 행여 밖으로 샐까 봐 쉬쉬 했던 비화, 이제는 웃으며 말할 만큼 세월이 지났다. 그래서 세상은 오래 살고 봐야 한다고들 하는가 보다.
◈목욕탕 다녀와서 아내에게 맞은 사연
白鉉樂 방송작가·미디어컴 대표이사
1961 부산 출생. 미국 뉴저지州 라이더大 회계학과 同 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MBA). 미국 뉴저지州 공인회계사 자격증 취득. CNC TELECOM 한국 지사장. 조선일보 「백현락의 연예가 파일」 기고. SBS TV 「코미디 전망대」, 「LA 아리랑」 집필. 저서 「미국분 미국인 미국놈」.
내가 미국생활 13년을 끝내고 막 귀국한 1994년 여름. 그때 나는 신입 죄수 입방 신고식하듯 매일매일 얻어터지며 한국 사회에 대해 하나씩 배워가고 있었다. 에어컨이 생활화되어 있던 미국에 비해 내가 머물고 있던 처갓집은 에어컨 켤 때마다 장인 어른 눈치 봐야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사건은 찌는 듯한 무더위로 인해 벽걸이 에어컨 하나가 온 집안을 식히기엔 역부족이었던 어느 날 일어났다. 나는 집사람에게 등을 떠밀려 공중목욕탕에 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 마침 정기휴일이었다. 그 당시 나는 백수였는데, 사실 작가는 맘만 먹으면 언제나 백수가 될 소질을 가진 사람들 아닌가? 시간도 남겠다, 간만에 호사도 즐길 겸 택시를 잡아타고 시내 고급 호텔 사우나로 갔다.
그 호텔에는 사우나와 지금은 가족탕 또는 증기탕(증말 기찬 목욕탕의 준말?)으로 바뀐 터키탕이 하필 같은 층에 있었다. 고백컨대 그때 나는 터키탕이 터키식 사우나를 하는 곳으로 알았다. 한 아리따운 아가씨의 손길에 이끌려 독탕에 들어갈 때만 해도 『이제 한국도 서비스 수준이 많이 향상되었구나』 하며 흐뭇해 했다. 욕조에 물까지 받아주고 나가면서 아가씨는 일본말로 뭐라고 했는데 눈치를 보니 『빨리 옷 벗어 욕조로 들어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여자들의 말 들으면 손해 보지 않는다는 우리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나는 벗은 옷도 정리해 놓지 않고 몸을 욕조 속으로 날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더위로 지친 몸이 눈 녹듯 풀어져 비몽사몽 간을 헤매고 있을 무렵, 비키니 차림의 젊은 여자가 노크도 없이 내 방에 들어와 일본말로 뭐라 지껄이더니 곧장 내 몸에 비누칠을 하기 시작했다. 남자가 외간 여자 앞에서 일방적으로 알몸을 내놓고 있는 것이 조금 창피하게 여겨졌지만 「한국도 참 많이 개방됐군. 남탕에 여자 때밀이가 다 들어오고」 하는 생각에 꾹 참고 서비스를 받았다.
등과 목 등 온몸에 마사지를 해 준 것까지는 좋았는데 잠시 후 그 아가씨가 불을 끄고 비키니를 벗기 시작할 때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 직감적으로 느꼈다. 『뭐하느냐?』고 한국말로 물었더니 그 아가씨는 『어머, 일본 사람 아니었어요?』 하고 반문했다. 나는 『일본 사람이고 한국 사람이고 뭐고 지금 뭐 하느냐고?』고 촌티 팍팍 날리게 물었더니 그녀는 「도대체 여기 왜 왔냐, 이 쨔샤!」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때서야 나는 바로 이게 홍콩 영화 속에서나 보던 「알몸 비누 마사지 서비스」라는 것을 깨닫고 팬티도 거꾸로 입는 등 허둥거리며 그곳을 뛰쳐나왔다. 집에 와서 집사람에게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다 해 줬더니 돈 많이 썼다고 바가지로 한 대 도지게 맞았다. 그날 밤 나는 삼삼하던 그 아가씨의 각선미가 눈에 아른거려 밤새 한숨 못 잤다. 남자분들께 마지막으로 한 마디.
『속지 말자 증기탕, 다시 보자 가족탕!』
◈산골 아이들의 껌 만들기
鄭用熙 (주)뉴페이지 대표
1964년 충북 음성 출생. 숭실大 전기공학과 졸업. 「인터넷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운영.
1960년대 충청도 시골에서 자란 나에게 산과 들이 놀이터이고 장난감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또래들과 달리 유독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호기심을 결국 실행에 옮겨 말썽이 생긴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바로 「껌 만들기 사건」이다.
당시 우리 집에는 밭이 많아 동네 아주머니들이 품앗이로 일했다. 그날도 동네 아주머니들이 일하고 있을 때 할머니와 어머니는 새참을 만들어 오셨다. 어머니를 따라온 동네 친구들과 나는 어른들 옆에서 맛있는 손칼국수를 얻어먹었다.
점심을 먹고 나자 친구 하나가 『우리 집에 껌 있다』 하면서 자랑을 늘어 놓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껌은 귀한 물건이었다. 어쩌다가 껌이 생기면 하루 종일 오물거리다가 형제들 몰래 비밀 장소에 살짝 붙여 놓고 잠들 정도였다. 모두 껌이 있다는 친구를 부러워할 때 「호기심 왕자」였던 나는 머리 속으로 어떻게 하면 껌을 만들 수 있을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끙끙거리며 궁리하던 내게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끈적한 송진과 하얀 밀가루를 섞어서 만들면 껌이 되겠구나」
나는 친구들에게 시키는 대로만 하면 껌을 실컷 씹을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장담했다. 녀석들은 일제히 나를 주목했다. 껌을 실컷 씹도록 해 주겠다니? 시골 꼬마들에게 이보다 대단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정말 네가 껌을 만들 수 있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그러면 매일 새 껌을 씹을 수 있어』
나는 호언장담을 하고 아이들에게 역할분담을 시켰다. 일부에게는 소나무에서 흘러내리는 송진 가운데 제일 깨끗한 것을 채취하라고 지시하고, 일부에게는 밀가루를 갖고 오게 했다.
기대에 들뜬 녀석들은 내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달려나갔다.
얼마 후 모두 자신의 채취물을 갖고 모였다. 정말 많은 양의 송진과 밀가루였다. 우리는 늦은 봄날, 이름 모를 묘지의 상석 위에서 밀가루와 송진을 한데 섞어서 반죽하기 시작했다. 진한 송진 냄새도 아랑곳없이 오로지 껌을 씹을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모두 열심히 반죽했다. 그런 다음 일정한 크기로 떼어서, 밀가루를 씌워 구슬처럼 동그랗게 만들었다.
드디어 구슬 모양의 껌을 수북이 만든 다음 친구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지금부터 이걸 100번 씹어. 그러면 껌이 돼』
잔뜩 기대에 부푼 친구들은 모두 한 덩어리씩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순간 모든 아이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뱉으려는 아이에게 나는 『꾹 참고 100번 씹어야 한다니까』 하고 독려했다. 친구들의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을 보며 나는 진짜로 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고, 정말 그렇게 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한 명, 두 명 밀가루 송진을 뱉어버리고 울기 시작했다. 결국 자연산 껌 만들기 작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사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때 온 동네 아이들이 배탈이 나서 아프다고 난리를 친 것이다. 결국은 아주머니들이 우리 집에 몰려와서 어머니께 한바탕 항의를 했고, 어머니는 백배 사죄하면서 약값을 주겠다며 사과해 사태가 진정되었다. 그런데 지금도 의문인 것은 「왜 나는 씹지 않고 친구들만 그것을 씹게 하였을까」 하는 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