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길은 같은 시간에 두 번 지나갈 수 없기 때문에”(김재순 《샘터》 창립자)
⊙ 작가 정채봉 1978년, 한강 1993년 편집부 입사
⊙ 피천득·법정·최인호·이해인·장영희 등, 연재와 단행본으로 인연
⊙ “누군가를 ‘사랑해야 할 이유’보다는 ‘사랑하지 못할 이유’를 먼저 찾지는 않았는지”(故 장영희 교수)
⊙ 무기휴간에도 독자들 환불 사양… “잡지를 통해 받은 위로와 배움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 작가 정채봉 1978년, 한강 1993년 편집부 입사
⊙ 피천득·법정·최인호·이해인·장영희 등, 연재와 단행본으로 인연
⊙ “누군가를 ‘사랑해야 할 이유’보다는 ‘사랑하지 못할 이유’를 먼저 찾지는 않았는지”(故 장영희 교수)
⊙ 무기휴간에도 독자들 환불 사양… “잡지를 통해 받은 위로와 배움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 왼쪽부터 월간 《샘터》의 1970년 4월 창간호와 이를 본떠 만든 2026년 1월호 표지, 《56년 샘터 잊지 못할 명문장》
1970년 4월에 태어나 통권 671호를 세상에 내놓은 뒤, 2026년 1월호를 끝으로 잠시 쉼표를 찍은 《샘터》. 그 쉼표가 얼마나 길어질지는 아직 미지수다. 기약 없는 휴간의 배경을 《샘터》는 “스마트폰이 종이책을 대체하고 영상 수요가 활자를 월등히 뛰어넘는 시대적 흐름을 이기지 못한 데 따른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X세대인 기자와 꼭 같은 나이의 책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까닭 모를 착잡함이 밀려왔다. 마치 오래된 친구가 말없이 어디론가 홀연히 떠난 것 같은 기분.
《샘터》는 언제나 작았다. 문고판 크기, 작은 활자, 소박한 표지. 그러나 그 작음 안에 담긴 이야기들은 독자를 커다란 품에 붙잡았다. 이미 말라 버린 줄 알았던 눈물샘에서 핑, 물기가 느껴지는 문장들이 있었다. 어린 날 읽다가 눈시울이 붉어진 그 감각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적지 않을 것이다.
1970년 4월 창간호부터 2026년 1월호까지 671권에 수록된 수만, 수십만 개의 문장 중 100개의 문장을 모은 《56년 샘터 잊지 못할 명문장》은 그 세월을 한 권으로 눌러 담은 필사집이다. 공들여 고른 100개의 문장을 인간관계, 행복, 삶, 사랑, 자연이라는 다섯 키워드로 분류해 엮었다. 가히 56년 《샘터》의 압축판이라 할 만하다. 스마트폰과 AI가 쏟아 내는 정보가 순식간에 소멸되는 요즘, 반세기를 버텨 온 종이책 문장들의 무게는 새삼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책장을 넘기며 기자가 손가락으로 짚은 몇 개의 문장을 소개한다. 한 줄 한 줄 음미하듯 읽는 것, 그게 필사의 시작이다.
“좋은 일은 무엇이든 즉석에서”(김재순)
고(故) 김재순 《샘터》 창립자. 2011년 9월 지령 500호를 맞았을 때 모습이다.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인생길을 한 번밖에 지나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좋은 일,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즉석에서 할 필요가 있다. 늦추거나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이 길은 같은 시간에 두 번 지나갈 수 없기 때문에.’
- 김재순, 〈조그만 마음씨나마〉, 1970년 11월호
창간호가 나온 그해 11월, 제8호의 문장이다. 《샘터》가 처음부터 어떤 목소리로 독자에게 말을 걸려 했는지가 이 한 단락에 담겨 있다. 거창하지 않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조용한 재촉.
국회의장을 지낸 김재순(1923~ 2016년)은 샘터사 창립자다.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교양지’ ‘담배 한 갑 값 잡지’를 내걸고 출범한 《샘터》는 창간 10년 만에 발행부수 50만 부를 기록했다. 《조선일보》 1980년 3월 12일자 〈샘터 창간 10주(周)〉 기사는 “내용의 참신성 여부에 따라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잡지의 가능성’을 함께 보여 주었다”라고 그 의미를 짚었다.
김재순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1990년 5월 3일자)에서 이렇게 말했다.
“20년 동안 《샘터》를 보아 온 창간 독자로부터 편지가 왔더군요. 그분의 말이 ‘《샘터》는 나를 매달 한 번씩 사람으로 돌아가 눈물짓게 하는 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 그래도 뭔가 해낸 것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장영희와 샘터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미워하게 될 때 그를 ‘용서해야 할 이유’보다는 ‘용서하지 못할 이유’를 먼저 찾는다. 또 누군가를 비난하면서 그를 ‘좋아해야 할 이유’보다는 ‘좋아하지 못할 이유’를 먼저 찾고,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걸고는 누군가를 ‘사랑해야 할 이유’보다는 ‘사랑하지 못할 이유’를 먼저 찾지는 않았는지.
- 장영희, 〈못 줄 이유〉, 2000년 3월호
읽다가 잠시 멈추게 되는 문장이다. ‘사랑하지 못할 이유’를 먼저 찾는다는 고백. ‘나도 그랬구나’ 싶어지는 순간이 누구에게든 있을 것이다. 이런 문장이 잡지 한 귀퉁이에 조용히 박혀 있다가 어느 날 문득 독자의 눈을 찌른다.
고(故) 장영희(1952~2009년) 서강대 교수의 이름 옆에는 늘 《샘터》가 따라붙는다. 작가와 출판사라는 말에는 다 담기지 않는, 조금 더 오래된 관계다. 장영희의 문장은 《샘터》 지면을 통해 조용히 스며들었다. 위로와 희망이라는 말은 흔하지만, 그의 글에서는 그것이 낡은 표현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무심코 지나쳤을 문장이, 누군가의 하루를 붙잡았다.
그 글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내 생애 단 한 번》 《문학의 숲을 거닐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샘터》에 실렸던 장영희의 문장들은 모여서 책들이 되어 독자 곁으로 돌아왔다. 병상의 그가 받아들고 거짓말같이 이튿날 숨을 거둔 마지막 에세이집 《살아온 기적…》은 100쇄를 넘기며 오래 남았다. 사라지지 않는 문장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런 경우일 것이다.
《샘터》는 장영희를 단순히 ‘필진 중 하나’로 대우하지 않았다. 창간 40주년 기념호 표지에 그의 얼굴을 올렸고, 2010년에는 유족에게 ‘샘터 특별상’을 수여했다. 그의 책 인세(印稅)가 장학금으로 이어졌다는 사실까지, 이 관계는 자연스럽게 다음 이야기로 펼쳐졌다.
《샘터》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기도 했다. 이해인 수녀와 장영희의 첫 만남 역시 잡지 지면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졌다고 한다.
노벨문학상 수상 前 한강의 목소리

누군가를 만날 때면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보여 준 얼굴, 또는 내가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그의 얼굴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알 것 같기 때문이다.
- 한강, 〈지상에서 가장 부끄러운 고백〉, 1999년 12월호
작가 한강도 《샘터》 창간 그해 태어났다. 아무도 노벨문학상을 꿈꾸지 못했을, 막 서른을 앞둔 세밑의 목소리다.
한강은 1993년 대학을 졸업한 뒤 《샘터》 기자로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 1995년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을 출간한 뒤 직장을 그만뒀다. 젊지만 문학적 색깔이 분명한 ‘기자 한강’의 20대 때 문장들이 《샘터》 여기저기 남아 있다. 훗날 거목이 될 나무가 아직 씨앗이던 시절의 기록이다.
한강과 《샘터》의 인연은 거기서 끊어지지 않았다. 전업작가가 된 이후에도 에세이를 기고했다. 1998년 11월호 〈청동 하회탈〉부터 2000년 8월호 〈내가 아는 한 사미스님〉까지 18편의 글이 조용히 이어졌다. 여행과 사람, 그리고 그 사이를 지나가는 생각들. 짧지만 오래 남는 문장들이었다.
사반세기 흘러 그 글들이 다시 불려나왔다. 2024년 한강이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자 《샘터》는 과거 작가가 연재한 글들을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다만 작가의 요청에 따라 글들은 다시 내렸다.
‘무소유’의 법정, 30년 가까이 수필 연재

사랑이라는 건 내 마음이 따뜻해지고 풋풋해지고 더 자비스러워지고 저 아이가 좋아할 게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이지요. 사람이든 물건이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에 고통이 따르는 거예요. 보는 눈만 있으면 자기 것을 가지려고 애쓰는 것보다 훨씬 여유 있게 그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어요.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해요.
- 법정, 〈샘터 창간 33주년 기념 대담〉, 2003년 6월호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깊은 산속에 이르는 느낌이 든다. 고(故) 법정(1932~2010년) 스님의 글이 그렇다. 그리고 그 길의 시작에 《샘터》가 있었다.
인연은 197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어 1979년부터 1980년까지 ‘고사순례’, 1980년부터 1996년까지 ‘산방한담’.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스님의 문장은 독자 곁에 닿았다. 짧은 글들이지만 그 안에는 삶을 관통하는 사유(思惟)가 스며 있다.
글들은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어 세상 속으로 나왔고, 더 넓은 독자층과 만나게 되었다. 산중에서 빚어진 말이 도심의 책상 위에 놓이는 순간이었다. 《무소유》 역시 그 흐름 속에 있다. 1976년 처음 출간된 이 책은 오래도록 읽히며 하나의 기준처럼 남았다. 소유하지 않는다는 말이 오히려 더 깊이 남는 아이러니. 그것은 개념이 아니라 태도였고, 말이 아니라 삶에 가까웠다.
그 삶은 조용히 이어졌다. 해마다 인세를 정산하는 시기가 되면 스님은 출판사에 연락을 했다. 그리고 그 돈은 다시 누군가에게 건네졌다. 등록금을 마련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남기지 않는 무소유의 삶이 어떻게 나눔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 주는 순간이었다.
스님은 2010년 입적하며 “나의 모든 책을 불사르라”고 유언했지만, 창고의 책만 사라졌을 뿐 문장은 남았다. 10주기를 맞아 나온 특별판과 미처 세상에 나오지 못했던 강연 기록들까지. 한번 쓰인 문장이 여전히 누군가의 삶에 닿는 한, 《샘터》와 법정 스님의 인연은 끝났다고 말하기 어렵다.
《샘터》와 피천득·최인호의 인연
월간 《샘터》는 한국 문학의 두 거장인 피천득과 최인호를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했다.
피천득(1910~2007년)은 샘터사 창립자 김재순의 은사다. 김재순은 설날마다 은사 댁에 세배를 갔고, ‘첫눈 오는 날 서로 먼저 전화해 주기’ 약속을 40년 가까이 지켰다고 한다. 피천득과 《샘터》의 본격적인 인연은 1973년 10월호부터 수필을 연재한 것으로 시작되어, 2007년 타계할 때까지 꾸준히 글을 기고했다. 샘터사는 1996년 피천득의 수필집 《인연》을 출간하여 그의 문학 세계를 대중에게 널리 알렸다. 《인연》은 출간 이후 샘터사에서만 30만 부를 넘겼고, 출판사가 바뀐 이후로도 지금까지 팔리는 장기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았다. 표제작 〈인연〉은 국어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문학성과 대중성을 함께 인정받았다.
최인호(1945~2013년)도 《샘터》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는 1975년 9월부터 연작 수필 〈가족〉을 34년 6개월간 연재하며 국내 잡지 역사상 가장 긴 연재 기록을 세웠다. 최인호는 침샘암 투병으로 2008년 7월호부터 〈가족〉 연재를 일시 중단했다가 2009년 3월호부터 재개했지만 2010년 1월호를 마지막으로 35년간의 연재를 마감했다.

피천득(1910~2007년)은 샘터사 창립자 김재순의 은사다. 김재순은 설날마다 은사 댁에 세배를 갔고, ‘첫눈 오는 날 서로 먼저 전화해 주기’ 약속을 40년 가까이 지켰다고 한다. 피천득과 《샘터》의 본격적인 인연은 1973년 10월호부터 수필을 연재한 것으로 시작되어, 2007년 타계할 때까지 꾸준히 글을 기고했다. 샘터사는 1996년 피천득의 수필집 《인연》을 출간하여 그의 문학 세계를 대중에게 널리 알렸다. 《인연》은 출간 이후 샘터사에서만 30만 부를 넘겼고, 출판사가 바뀐 이후로도 지금까지 팔리는 장기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았다. 표제작 〈인연〉은 국어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문학성과 대중성을 함께 인정받았다.
최인호(1945~2013년)도 《샘터》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는 1975년 9월부터 연작 수필 〈가족〉을 34년 6개월간 연재하며 국내 잡지 역사상 가장 긴 연재 기록을 세웠다. 최인호는 침샘암 투병으로 2008년 7월호부터 〈가족〉 연재를 일시 중단했다가 2009년 3월호부터 재개했지만 2010년 1월호를 마지막으로 35년간의 연재를 마감했다.

이해인, ‘두레박’으로 시작된 인연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기 어려워 산에 오르면 산은 침묵으로 튼튼해진 그의 두 팔을 벌려 나를 안아 준다. 좀 더 참을성을 키우라고 내 어깨를 두드린다.
- 이해인, 〈산 위에서〉, 1987년 5월호
1984년, ‘두레박’이라는 작은 칼럼 하나에서 시작된 인연이다. 이후 ‘시인의 숲속’ ‘꽃삽’ 그리고 ‘고운 말 차림표’까지, 문패가 바뀌는 세월에도 이해인 수녀의 문장의 결은 달라지지 않았다. 부드럽고, 맑고, 오래 머무는 말들. 스쳐 읽히기도 했지만 어떤 문장은 오랫동안 마음을 맴돌았다.
글들이 서로의 몸을 이어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2002년)으로 묶이며 하나의 흐름이 됐다. 따로 놓여 있던 시간들이 이어지고, 그의 문장은 다시 독자의 손에 건네졌다. 이후의 책들도 그 흐름 위에 놓인다. 《꽃삽》(2003년)에는 일상의 사유가, 《엄마》(2008년)에는 사라지지 않는 그리움이 녹아 있다. 이해인 수녀에게 《샘터》는 작은 보석함 같다. 그 안에는 누군가의 문장이 아니라, 오래 곁에 두고 싶은 말들이 숨쉬고 있다.
《샘터》 속에서 자란 정채봉의 문학

밤은 다른 과실처럼 씨가 따로 있지 않다. 먹히는 살이 곧 씨앗이다. 당신의 사랑을 한 그루 나무로 키우려 한다면 먹을 것이 아니라 아껴서 심어야 하느니.
- 정채봉, 〈사랑과 밤〉, 1997년 10월호
어떤 인연은 한 권의 잡지 안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 사람의 문학이 자란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 작가’ 고(故) 정채봉(1946~2001년)에게 《샘터》는 그런 자리였다.
정채봉은 1978년 샘터사에 들어왔다. 편집부장, 기획실장, 주간, 편집이사로 직함이 바뀌면서도 그가 머문 시간들은 한 방향으로 수렴되었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는 잡지의 안쪽에서 글과 사람을 다루며 《샘터》의 한 시대를 함께 만들어 갔다. 그 시간은 개인의 이력이라기보다, 잡지의 전성기를 구성하는 단단한 하나의 축에 가까웠다.
그 무렵 《샘터》에는 많은 이름들이 머물렀다. 법정 스님, 최인호, 김승옥, 강은교, 정호승. 그 사이에서 정채봉은 원고를 받고, 글을 다듬고, 지면을 채웠다. 법정 스님과 맺은 인연도 그 시간 속에서 시작됐다.
잡지를 만든 시간들은 곧 자신의 글로 이어졌다. 《그대 뒷모습》(1994년), 《스무 살 어머니》(2001년) 같은 옛 산문집들이 2006년 다시 묶였고, 20주기인 2021년에는 《첫 마음》과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가 출간됐다.
정채봉과 《샘터》를 나란히 두고 보면 단순한 ‘직장과 작가’의 관계로 보이지 않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한 사람이 한 잡지 안에 오래 머무르며, 그 안에서 자신의 문장을 길어 올린 시간. 그리고 그 문장이 다시 같은 자리에서 독자를 만나는 시간의 반복. 잡지 한 권이 한 사람의 일생을 품을 수 있다면, 아마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절묘했던 ‘3·3·3 원칙’
“이보게 앞이 탁 트인 데 앉아서 시원하구나, 저긴 뭐가 있구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나? 나는 말야. 오히려 앞이 탁 막힌 데 앉아서 산 너머를 보는 연습을 하고 있는 거야.”
- 최완택, 〈막힌 곳에서〉, 1979년 4월호
《샘터》는 ‘3·3·3 원칙’을 지켰다. 지면의 30%는 전문 작가에게, 30%는 글솜씨를 지닌 일반인에게, 30%는 글과는 거리가 있지만 귀감이 되는 사람들의 삶을 기자가 전하는 방식으로 채웠다. 필력이나 기교보다 삶의 진실성을 중요시했다.
아이들 학교로 우산을 들고 갈 일이 있을 때엔 하나라도 우산을 더 챙겨서 갑니다. 우산이 없어 비를 맞는 것이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를 하나라도 줄이고 싶어서. 우산을 들고 아이를 마중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할 일하는 엄마를 한 사람이라도 줄이고 싶어서.
- 김미라, 〈우산 세 개〉, 2007년 7월호
온기 있는 문장. 유명인의 말이 아니어서 오히려 더 오래 온기가 남는다. 《샘터》가 늘 그랬다. 이름 없는 사람의 이야기가 이름 있는 사람의 글 옆에 나란히 놓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의 이치가 그렇듯이 우리의 단칸방 역시 괴로운 반면에 좋은 점도 지니고 있긴 하다. 좁은 공간에서 식구들의 표정을 가깝게 너무 잘 있다 보니 저절로 솟는 정은 서로를 보듬고 아껴 주는 사랑으로 똘똘 뭉쳐졌으니 말이다.
- 안춘자, 〈기도〉, 1987년 1월호
“환불 안 받겠습니다” ― 독자와 잡지 사이
《샘터》가 휴간을 결정했을 때, 출판사는 정기구독자들에게 남은 구독료를 환불하겠다고 안내했다. 그런데 일부 독자들이 사양했다. 수십만 원에 이르는 장기 구독료를 스스로 포기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잡지를 통해 받은 위로와 배움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한 장기 구독자는 “《샘터》는 단순한 잡지가 아니라 삶의 일부였다”며 “마지막까지 응원하고 싶다”고 말했다.
현재 《샘터》 운영을 맡고 있는 김성구 대표는 이 소식에 마음이 무거웠다고 했다.
“환불을 거부하겠다는 연락을 받을 때마다 오히려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독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잘 알고 있기에 더 큰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는 이어 “《샘터》가 잠시 멈추더라도 그 정신만큼은 이어 가겠다”고 했다. 또한 “창간 이후 지금까지 《샘터》를 지켜 온 힘은 결국 독자였다”며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독자들과 만날 수 있는 길을 고민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출판계에서는 이 장면을 두고 “콘텐츠 소비를 넘어 ‘관계’를 형성한 매체만이 가능한 일”이라고 평가한다.
《56년 샘터 잊지 못할 명문장》은 그 사랑의 기록이다. 잡지는 잠시 자리를 비웠지만, 문장들은 남았다. 쉰여섯 해 동안 사람들 곁에 앉아 속삭이던 아날로그 감성의 목소리들이, 이제 한 권의 필사집 안에서 다시 독자의 손을 기다린다. 물이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는 《샘터》. 언젠가 다시, 사람들에게 힘과 위로를 전하는 원천으로 솟아오르기를. 한 줄기 한 줄기의 문장이 또 다른 삶에 닿기를, 그 만남이 빛줄기로 피어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