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公槪念 도입, 재벌의 非업무용 매각 유도…
●업종 전문화·여신규제에 언론과 학자까지 동원하여 저항
●金泳三 정부가 「新경제」 슬로건下에 재벌의 고삐를 놓쳐 중복 과잉투자 유발, IMF의 한 원인이 됐다
●사돈 崔鍾賢 회장은 나 때문에 손해 보았다
●금융 실명제는 경제 正義 차원에서 접근할 땐 실패한다
●부작용 각오하고 주택 2백만 호 및 5大 신도시 건설 밀어붙였다
●「임금인상의 부작용 강조」는 기업과 가진 쪽의 논리… 소득 불균형 조정 과정으로 보아야
●鄭周永 회장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더니….
정리·金容三 月刊朝鮮 기자
1. 수치로는 최고, 여론으로는 바닥●업종 전문화·여신규제에 언론과 학자까지 동원하여 저항
●金泳三 정부가 「新경제」 슬로건下에 재벌의 고삐를 놓쳐 중복 과잉투자 유발, IMF의 한 원인이 됐다
●사돈 崔鍾賢 회장은 나 때문에 손해 보았다
●금융 실명제는 경제 正義 차원에서 접근할 땐 실패한다
●부작용 각오하고 주택 2백만 호 및 5大 신도시 건설 밀어붙였다
●「임금인상의 부작용 강조」는 기업과 가진 쪽의 논리… 소득 불균형 조정 과정으로 보아야
●鄭周永 회장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더니….
정리·金容三 月刊朝鮮 기자
한국경제 최고의 頂點
盧泰愚(노태우) 前(전) 대통령의 육성 회고록 이번달의 주제는 「경제」였다.
사실 6共 시대의 경제는 묘한 이중 불연속선을 노정하고 있다. 극심한 노사분규와 국제수지 적자, 국가 경쟁력 저하라는 惡材(악재) 속에서도 각종 경제지표는 건전한 상황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우선 주마간산격으로 통계수치를 살펴보자.
1987년 1천2백89억 달러이던 국민총생산(GNP)은 盧泰愚 대통령 재임 마지막 해인 1992년에는 2천9백억 달러로, 두 배가 넘게 증가했다. 1인당 GNP도 1987년 2천7백 달러에서 92년 7천 달러로 두 배 이상 상승. 세계 각국이 高실업의 고통을 겪고 있는 동안 우리는 평균 8.4%의 경제성장을 지속했다. 덕분에 실업률도 우리나라에서 고용통계가 시작된 1963년 이래 기장 낮은 2.3%를 기록했다. 사실상 완전고용을 달성한 셈이다.
자동차 보유대수는 1987년 71만8천 대에서 1992년 3백20만 대로 4배 증가. 전화회선은 1987년 1천22만 회선에서 1992년 1천9백만 회선으로 선진국 수준에 올랐다. 주택보급률도 1991년에는 74.2%로 중산층 이하 국민들에게도 내집 마련의 꿈을 실현했다. 수치상으로만 보면 한국 경제의 최고 頂點(정점)이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共의 경제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가혹했다. 1993년 2월13일 盧泰愚 대통령 퇴임 직전의 한국 갤럽 여론조사에 의하면 盧대통령 직무수행 중 경제를 「잘했다」가 7.8%, 「잘못했다」가 68.9%로 나타났다. 수치로 나타난 경제 상황과 세간 여론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라선 셈이다. 이러한 괴리감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6월4일 연희동 盧 前 대통령 자택을 방문했다. 盧 전 대통령은 매우 피곤한 기색이 얼굴에 쓰여 있었다. 지난 4월 하순 모친상을 당한 이래 편히 쉬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게다가 月刊朝鮮(월간조선) 6월호에 金泳三(김영삼) 전 대통령을 후계자로 세운 것과 관련한 『나는 색맹환자…』 발언 내용이 정치적 파장을 몰고 오는 바람에 정신적 피로가 덧씌워진 듯했다. 盧 전 대통령은 「색맹환자」 관련 보도에 대해 『궂은 소리가 들릴 것은 각오했지만 상황이 꼬여서 더 복잡하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날 인터뷰에는 6共 시절 보건사회부 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金鍾仁(김종인)씨, 그리고 공보처장관과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孫柱煥(손주환)씨가 배석했다. 먼저 盧 전 대통령이 인터뷰 진행에 대한 개괄을 소개했다.
『오늘 인터뷰 준비를 위해서 6共 시절 경제관련 참모들이 한자리에 모인 일이 있습니다. 나와 함께 경제관련 참모들이 6共의 경제정책을 일괄해서 큰 줄거리를 세웠고, 그 결과를 金鍾仁 장관이 정리했어요. 몇 가지 중요한 주제는 정리된 자료를 가지고 내가 설명하고,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은 金鍾仁 장관이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할까 합니다』
소득분배가 근로자에게 유리하게 시정된 시기
盧 전 대통령은 우선 6共의 경제정책 전반에 대한 개괄에 대해 육성증언을 시작했다.
<오늘날 선진국들의 산업화와 자본주의 발전과정을 보면 산업화는 경제적 효율에 의한 물질적인 富(부)만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과 행동의 변화를 수반한다. 인간은 일정한 경제적 수준을 향유하게 되면 새로운 욕망을 갖게 되고, 이를 달성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6·29 선언을 하면서 인식했다.
나의 경제정책의 기본 방향도 변화된 국민의 의식과 행태에 기초를 두고 설정될 수밖에 없었다. 과거처럼 경제의 효율과 성장만을 위한 일방적인 경제정책은 당시 정치, 경제, 사회 상황 모두를 고려할 때 수립도 집행도 될 수 없었다. 따라서 나의 경제정책은 종전과는 달리 경제적 효율을 크게 해치지 않으면서 경제外的(외적)인 상황을 함께 고려했던 것이다.
6·29 선언 이후부터 급격히 증가된 노사분규는 6共 출범 이후에도 수년간 지속되었다. 6共 이전인 1986년에 2백20건이던 노사분규는 6·29 선언 이후 1989년까지 3년간 해마다 평균 2천4백 건씩이나 발생했고, 이로 인해 임금은 급상승했다.
1987년 9%대의 임금상승률이 6共기간 중 해마다 16%씩 상승해 1백15%가 상승했다. 그 결과 근로자 소득이 두 배 이상 올랐고, 이는 중산층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이 기간이 과거 경제개발계획 이래 일방적으로 사용자, 즉 자본가에게 유리하던 소득분배가 어느 정도 근로자에게 유리하게 시정된 시기일 것이다.
이에 대해 6·29 선언 이전까지 정부의 일방적인 사용자에 치우친 노사관계에 습관화되었던 기업인들은 나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들은 근로자 소득이 증대되어 시장이 확대되고 마이카 시대 같은 새로운 수요를 창출함으로써 새로운 이윤 창출 가능성이 확대되었음을 간과하고 종전 관행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대통령으로서 다시 권위주의적인 통치형태로 회귀하지 않고 근로자들의 누적된 소득 분배의 시정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어느 기간 동안 노사관계를 인내로써 수용하여 자율적인 조화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정책적 결정이라 판단했다. 이러한 인내가 경제의 본질이 결정적으로 위협받지 않고 사회적 균형이 파괴되지 않는 한 오히려 장기적으로 경제적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정책기조 아래 나는 일정기간 10% 가까운 물가상승률로 과거 정권에 비해 물가정책에 실패했다는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단기간의 물가안정은 공공요금 동결, 인위적인 상품가격 억제, 임금억제, 巨視(거시) 긴축정책 등으로 달성될 수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한 부작용은 장기적으로 가격 구조의 왜곡으로 시장경제의 효율을 파괴하고 공급의 애로를 발생시킨다.
나는 종전처럼 낮은 율의 물가 목표를 포기하고, 정치적으로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는 線(선)인 한 자리 물가상승률 범위 내에서 그간 왜곡된 물가체계의 시정을 허용했다.
장기적인 생산기반 구축을 위한 사회간접 기반시설 확충으로 나는 경부고속전철, 서해안 고속도로, 영종도 국제공항을 착공했고 1991년 초 청와대에 「사회간접자본 기획단」을 발족시켜 그동안 병목현상을 나타내던 도로·항만·철도에 대한 공공부문 투자를 확대했다. 이렇게 하여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의 4차선化와 서울 경기 일원의 도로망을 확대했다.
부동산이 재산증식과 재산보존의 수단으로 인식되어 주기적으로 투기가 발생될 경우, 이로 인한 거품은 전체 경제의 효율을 저해한다. 나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토지에 대한 稅制(세제)를 강화하고 기업의 非업무용 부동산에 강력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오늘날까지 토지가격이 안정을 유지하게 했다.
또 내 임기 중 현재 우리나라 주택의 40%인 주택 2백70만 호를 건설하여 1992년부터 현재까지 주택 가격 안정에 기여했다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