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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甲濟 기자의 역사적 인터뷰] 盧泰愚 육성회고록②/政治秘史편(50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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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金容三 月刊朝鮮 기자
  국내정치에 대한 평가
 
  盧泰愚(노태우) 전 대통령을 인터뷰하기 위해 지난 3월30일, 4월1일, 5월3∼4일 나흘간 서울 연희동 자택을 방문했다. 3월 말에도 비가 왔고, 5월3일에도 보슬보슬 봄비가 하루 종일 내렸다.
 
  그러나 3월 말과 5월 초 사이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盧 전 대통령은 4월4일 모친상을 당했고, 또 자신의 육성 회고록 1회분 내용이 실린 月刊朝鮮(월간조선)이 세상에 소개됐다.
 
  盧 전 대통령은 90세로 타계한 모친(金泰香 여사)을 회고하며 『어머니는 젊어서 아버님을 잃고 평생을 홀로 사셨다』고 말했다.
 
  『돌아가신 어머니 祭(제)를 일주일에 한 번씩 지내기 때문에 내가 매주 주말이면 대구에 내려갑니다. 지난주에 대구에 갔더니 고향 친구들이 내 인터뷰 기사가 실린 月刊朝鮮을 많이 읽었더라고. 盧대통령 하면 가슴 아픈 상처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사를 읽고는 자기들이 잊고 있었던 것을 찾았다고 하더군요』
 
  肉聲(육성) 회고록 제2회분의 주제는 국내정치다. 6·29 선언에서 시작하여 민주화의 진통, 중간평가 유보, 3당합당, 민자당 대통령 후보 결정, 1992년의 14대 大選(대선)이 주된 흐름이다.
 
  정치란 궁극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다. 따라서 정치 문제에 대한 대화 중간중간에 盧 전 대통령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아울러, 그 상황과 관련된 인물에 대한 평가를 솔직하게 밝혔다.
 
  盧 전 대통령은 어느 인물을 언급할 때마다 신중하게 객관적 평가를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盧 전 대통령은 대화 중간중간에 전임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간간이 밝혔다. 그것을 종합하면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존경하는 마음을, 그리고 全斗煥(전두환) 대통령에 대해서는 미안한 감정이 스며 있음을 알게 된다. 金泳三(김영삼) 대통령에 대해서는 『나를 비롯해 우리나라 識者(식자)들 모두가 色盲(색맹)환자였다』면서 허탈과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지난 호 북방정책을 증언할 때는 차분하고 이성적이었던 盧 전 대통령은 민감한 질문이 이어질 때마다 희노애락의 감정적 기복을 숨기지 않았다. 특히 金泳三 전 대통령에 대한 증언 부분에서는 목소리 톤이 크게 달라지기도 했다.
 
  盧 전 대통령은 인터뷰 내내 『나의 발언이 또다시 어떤 정치적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의 육성 회고록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더 나은 정치, 더 좋은 정치상황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면서 신중하게 가려서 써줄 것을 수차 당부했다.
 
 
  민주투쟁과 권력투쟁
 
  盧 전 대통령은 군사문화와 민주주의가 결코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라면서 「군인이기 때문에 非(비) 민주적일 것이고, 민간정치인이기 때문에 민주적일 것이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선입감이라고 지적했다. 군사문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을 들어본다.
 
  <흔히 軍을 이야기하면 「민주주의」나 「자유」 같은 개념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여러 가지 통제를 받는 조직이어서 그렇게 豫斷(예단)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피상적으로 보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군조직 속에서 체험으로 얻은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은 軍 생활을 마치고 일반사회에서 갖게 된 것 못지 않게 민주적이었다고 자신할 수 있다. 민주적인 사고방식과 민주적인 절차를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 軍의 제도가 일본 군국주의를 본받지 않고 미국식을 따른 것은 천만다행이다.
 
  초급장교 시절에 일본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 軍의 제도는 미군 제도를 따온 것이다. 때문에 軍을 운용하는 데 필요한 원칙과 교본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삼아 민주적인 사고방식과 절차 등을 담고 있는 것이다.
 
  軍의 전투력을 극대화시키는 데는 민주적인 절차가 아주 중요하다.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명령을 받아 그대로 하달하기보다는, 지휘관과 참모들의 의견을 종합해 결정하곤 했다. 나뿐만 아니라 軍에서의 결정은 거의 대부분 이같은 절차를 거친다. 거의 체질화되어 있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과거에 많은 정치인들이 「민주투사」인양 부각된 적이 있는데, 그들이 민주화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추적해 보면 뚜렷한 자취를 찾아보기가 힘든 경우가 없지 않다. 오히려 민주투쟁이라기보다는 「권력투쟁」인 예가 많았다. 훌륭한 민주투쟁의 자취를 남겼다고 평가받을 분들은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나는 軍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나와서도 많은 직책을 맡았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정부 조직이나 당에 있으면서 군대에 있을 때 비해 『민주주의를 새롭게 배우는구나』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게 아닌데, 명색이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에서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민정당 대표위원 시절 당이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당직자 회의나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으면 간부들이 말을 막거나, 미리 결론을 유도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시간 낭비를 줄이고 회의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는 핑계에서였다. 이 점에서는 야당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나는 그래도 민주적인 절차가 중요하다고 강조하곤 했다>
 
 
  『팔자에도 없는 대통령』
 
  盧 전 대통령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6·29 선언이다. 기자가 1987년 6·29 선언의 진실에 대해 질문하자 盧 전 대통령은 미리 준비했던 기록 내용 중 6·29 선언과 관련된 자료를 꺼내 육성 증언을 시작했다.
 
  陪席(배석)했던 孫柱煥(손주환) 전 공보처장관은 『6·29 관련 내용은 盧 전 대통령의 자필기록과 구두증언, 그리고 李丙琪(이병기) 당시 민정당 대표 보좌역, 崔秉烈(최병렬) 당시 민정당 정세분석실장이 배석해서 그들의 체험을 보충하여 작성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경제사정이 크게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朴正熙 대통령 말년과 마찬가지로 국민들의 저항은 날이 갈수록 거세졌다.
 
  5共의 헌법에서는 대통령 임기가 「7년 단임」으로 마치게 되어 있었다. 그 당시 국민들의 심리가 全斗煥 대통령은 과연 이를 지킬 것인가. 全대통령이 단임으로 그만둘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5共 초기만 해도 별로 없었다. 임기 말쯤 되면 무슨 변란이 있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 識者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全대통령이 단임으로 물러난다면 그 자체로써 민주주의가 크게 발전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나는 처음부터 全대통령이 단임을 지킬 것이라고 확신했다. 12·12 사건 당시 내가 지켜본 바로는 정권에 대한 욕심이 분명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두 사람이 만날 적마다 全대통령은 내게 『팔자에도 없는 대통령을 하게 됐다』고 심중을 털어놓곤 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그 말을 믿었다.
 
  나는 1985년에 민정당 대표위원에 취임하면서 당시의 헌법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대통령 중심제 護憲(호헌)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護憲에 대해 이론 무장을 갖추라고 지시하기까지 했다.>
 
 
 
全대통령, 유럽순방 후 내각제로 돌아

 
  <물론 민주주의라는 차원에서 보면 당시의 護憲은 설득력이 없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절대적으로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되어야 한다. 따라서 능률과 효율, 國力(국력)의 집중을 강조해야 했다. 黨(당)에서는 이런 논리를 열심히 설명하고 국민들의 호응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보수세력 중에는 동조도 많았다. 그러나 정치권, 在野(재야), 학생들의 반대는 날이 갈수록 거세졌다.
 
  1986년 봄 全대통령은 유럽을 순방(편집자 注:1986년 4월5일∼21일 영국·서독·프랑스· 벨기에 등 4개국 순방)하고 돌아오자마자 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의원내각제를 해야 한다고 지침을 내렸다. 護憲에 안간힘을 기울이고 있는데 내각제를 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내각제가 민주주의의 교과서라는 것은 상식이지만 우리의 특수 여건에서는 신중해야 할 문제였다. 게다가 아무리 명분이 좋다 해도 중요 정책을, 그것도 헌법을 급선회하는 식으로 바꾼다는 것은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수동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는 정도의 반응만을 보였다. 全대통령은 이런 나의 태도가 못마땅했는지 당직자들을 별도로 소집해 정식으로 검토 지시를 내렸다. 당직자들 역시 내각제가 좋기는 하지만 야당과 국민들이 대통령 직선제를 원하고 있는 시점에서 내각제를 수용하겠느냐며 자신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유럽에 가기 전에는 내각제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없던 全대통령이 누구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강한 소신을 피력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全대통령은 내각제를 밀고 나가라고 엄명을 내렸다. 이 때문에 어떤 당직자는 『현행 헌법을 지키는 것보다는 명분이 있는 일이므로 밀고 나가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하여튼 全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내각제를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우려했던 대로 여당이 추진하는 내각제 개헌안은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야당과 언론은 『또 하나의 장기집권 음모』라고 몰아붙였다. 과거의 정권이 명분을 내걸고 개헌해서 장기집권했던 그 공식에 이를 집어 넣어 우리를 공격했다. 국민들도 거의 그렇게 믿는 형편이었다.
 
  결국 몇 달 동안 많은 노력만 낭비하고 내각제 추진은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다시 護憲이라는 원상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내각제 개헌의 후퇴는 그 동안 강력히 추진하던 대통령 중심제 護憲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한국 정치에서는 어떤 정책이든 야당에게 한 번 밀리기 시작하면 계속 밀리는 특징이 있었다. 때문에 처음부터 강하게 버텨야만 밀리지 않는다는 말까지 있었다. 서로 밀고 당기고 해서 중간타협이란 좀처럼 기대하기 힘든 것이 한국의 與野(여야) 관계였다. 말하자면 협상과 타협이라는 민주주의의 관행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멀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대통령은 하늘이 낸다
 
  <1987년의 6·10 사태는 어떻게 보면 그 이전에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극한 충돌이 그 전에 발생하지 않은 것은 국민들의 열의와 관심이 아시안게임에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 아시안게임은 1988년 서울올림픽의 예비대회와도 같아 아시안게임이 성공해야 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이 끝나자 학원가는 다시 시끄러워지고 政街(정가)는 또다시 대립이 심화되었다.
 
  해를 넘겨 1987년에 들어서서는 朴鍾哲(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웠다. 치안본부장에서 검찰총장, 안기부장까지 자리를 내놓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다.
 
  당시 권력자 입장에서는 「양보는 곧 후퇴이며, 질서를 지킬 수 없게 되면 사회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되어 정권이 무너지고 국민 모두가 불행해진다」는 인식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강경 일변도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어수선한 政局(정국) 속에서도 與圈(여권)에서는 全대통령을 잇는 후계자가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 거명되었지만, 몇몇 인사들도 함께 이름이 올랐다.
 
  하지만 나 자신은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생각뿐 대통령이 되겠다는 욕심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려니와, 만에 하나 내가 대통령이 되고 싶어하는 언동을 하고 다녔다면 대통령이 되기는커녕 어떤 悲運(비운)을 겪었을 게 틀림없었을 것이다.
 
  나는 운명론자는 아니지만은 대통령은 하늘이 내는 것이며 天心(천심)과 民心(민심)이 合一(합일)되어야 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全斗煥 대통령 역시 나와 같은 시각에서 사람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1987년 봄을 맞이하면서 국민들 사이에서는 후계자를 가시화하라는 요구가 커져갔다. 집권 여당의 책임을 맡은 지 3년째가 되자 당에서는 나를 제외한 대안이 없는 것으로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나의 새로운 역할을 보면서 역사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국민들도 두렵게 느껴졌다. 솔직히 나 이외에 다른 훌륭한 후보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1987년 6월 내가 후계자로 공식화될 때까지 나는 全대통령과 후계자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주고 받은 일은 없었다. 간접적인 암시만 몇 차례 있었던 것같다.>
 
 
 
6월10일 밤에 6·29 선언 결심

 
  <全대통령은 1987년 6월2일 당무위원들을 청와대 상춘재에 초청해 만찬을 함께 했다. 全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나의 후계자로 盧泰愚 당 대표가 적당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니 여러분들께서 동의한다면 당에서 합법적인 절차를 밟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전원은 만장일치로 동의했다(편집자 注:1987년 6월2일 저녁 6시30분 全대통령은 민정당 중앙집행위원 및 민정당 소속 국회의장단을 상춘재로 초청해 盧泰愚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추천하는 의식을 진행했다)
 
  全대통령에 대해 고마운 생각이 든 것은 물론이지만, 그 순간 역사와 국민에 대한 두려운 생각에 온 몸이 긴장되어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눈물이 절로 나왔다.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민정당 전당대회는 6월10일 올림픽공원 내에 있는 실내체육관에서 성대하게 거행됐다. 열기는 대단했다. 全대통령은 나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연설에서 『우리 憲政사상 처음으로 단임으로 정권을 평화적으로 이양하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대통령과 정부가 국민과 역사 앞에 한 약속을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과 함께 감격스러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와 달리 국민들의 반발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듯했다.
 
  6·29 선언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6월10일 저녁 나를 위한 축하연이 열릴 힐튼 호텔로 가는 승용차 안에서였다. 대통령 후보 지명 축하 리셉션에 참석하기 위해 집사람과 함께 차를 타고 연희동에서 중앙청, 남대문을 지나 힐튼 호텔에 들어설 때까지 거리에서의 시위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날 국민운동본부가 주도한 「朴鍾哲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護憲철폐 국민대회」는 전국을 휩쓸다시피 했다. 게다가 연세대생 李韓烈(이한열)군이 전날인 9일의 시위 도중 최루탄 파편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는 뉴스로 인해 불에 기름을 부은 듯 규모가 커지면서 더욱 격렬하게 전개됐다.
 
  이 때문에 시내가 온통 최루탄 가스 냄새로 가득찬 것 같았다. 콧물과 눈물이 그치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 내외가 호텔에 들어서자 안에서까지 가스 냄새가 나고 있었다. 참으로 착잡한 느낌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부터 나는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밤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는 기쁨보다 「이제까지는 정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다른 지도자들과 책임을 함께 했지만, 앞으로는 모든 게 내 책임이다. 따라서 내 스스로 이 난국을 헤쳐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운명에 놓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6·29 선언의 핵심이 된 직선제는 1987년 들어서부터 숱하게 듣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청와대나 당 주변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공론화하지는 못했다. 「全대통령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나는 「변화가 있어야겠다. 역사에 하나의 획을 그어야겠다」고 결심했다.>
 
 
  李萬燮 국민당 총재의 격려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다음날인 6월11일 아침 나는 黨舍(당사)에 나가자마자 참모와 당직자들에게 전날 밤의 심중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국민들이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리해서 보고하고 『헌법제도까지를 포함해 나라를 불행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당시 나를 돕고 있던 朴哲彦(박철언) 안기부장 특보에게도 같은 지시를 했는데 朴특보는 이미 그 전부터 별도의 팀을 구성해 나를 위한 여러 가지 연구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현행 헌법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좋은지, 또 현행 헌법으로 하되 올림픽을 치른 후 與野 합의로 헌법을 개정하는 것이 좋은지, 그리고 직선제와 간선제는 어떤지 등등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검토하고 있었다.
 
  6월17일 저녁에는 청와대 대식당에서 全대통령을 만났다. 당의 주요 간부들도 배석한 이날 만찬에서 全대통령은 『盧후보를 중심으로 시국 수습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그 말에 힘입어 그날 밤 연희동 집으로 돌아와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에게 『언론이 하자는 대로 해야겠지. 그게 국민의 뜻을 따르는 일일 테니까. 이제부터는 내가 리드할게』 하고 말했다.
 
  일부 언론은 내가 「시국수습의 전면에 주도적으로 나설 것을 시사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나는 이에 힘입어 6월18일과 19일 이틀 동안 거의 당 집무실에서 당직자들을 포함해 수십 명의 의원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의견을 들었다.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 나는 야당 책임자들과 종교계 지도자들을 만나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기로 하고 『6월20일에 만나 뵙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다.
 
  6월20일은 내게 있어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이날 하루 국회 귀빈식당에서 국민당의 李萬燮(이만섭) 총재, 신민당의 李敏雨(이민우) 총재, 金壽煥(김수환) 추기경을 잇따라 만나 내가 갖고 있는 고민을 털어놓고 어떤 방법이 나라의 어려움을 풀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가, 무엇이 국민의 뜻이고, 또 무엇이 올바른 길인가를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고 그분들의 의견을 들었다.
 
  그 분들은 한결같이 직선제를 받아들이라고 권했다. 가장 먼저 만난 李敏雨 총재는 『야당뿐만 아니라 국민의 절대 다수가 대통령 직선제를 원하고 있으니 盧대표가 마음을 비우시오』하는 요지로 말했다. 李萬燮 총재도 강한 어조로 『국민들의 저항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직선제밖에 없는데 盧대표는 직선제로 나가도 당당히 이길 수 있지 않겠느냐』며 웃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改憲 문제로 갈팡질팡
 
  <하지만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현행 헌법은 黨論(당론)이자 대통령의 강한 의지이므로 나는 꺾을 수 없다』고 답했다.
 
  李萬燮 총재는 『그렇다면 대통령을 만나서 설득해 볼 용의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全대통령에게 야당 당수와 종교계 지도자들을 만나 달라고 건의할 터이니 청와대에 가서도 그렇게 말씀해 달라』고 말했다.
 
  金壽煥 추기경 역시 『직선제를 해야만 국민의 마음을 달래고 돌릴 수 있을 것』이라면서 『盧대표, 마음을 비우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이 말씀을 잊지 마세요』 라고 말했다.
 
  이 분들 외에 여러 사람을 더 만났는데 한결같은 얘기들이었다. 당초에는 金泳三 민주당 총재에게도 만날 것을 제안했지만 金총재가 領袖(영수)회담을 고집하는 바람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한편, 당에 지시했던 것을 확인해 보니 정부나 당의 입장에서는 (직선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올림픽을 치러야 하는데 직선제를 하니 안하니 하면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어떻게 올림픽을 치르냐」는 소리가 나오게 되고 결국에는 「나라가 폭삭 망해버리면 어떡하느냐」는 우려마저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올림픽을 치를 때까지는 현행 헌법으로 하고, 올림픽을 치르고 난 뒤에는 與野가 협의해서 헌법을 개정하자』는 의견이 당 쪽에서는 지배적이었다. 물론 나도 그런 의견을 갖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라 운명을 책임질 가능성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심각하게 판단해야 할 상황인 것만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당내에는 직선제를 택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부나마 있었다. 또 나를 아끼는 주위 사람들은 이미 1987년 들어서서부터 나에게 직선제를 수시로 건의하곤 했다.
 
  정부 여당 쪽에서는 참으로 많은 말이 왔다갔다 했다. 의원내각제는 與野, 언론, 지식인할 것 없이 언제나 선호도가 제일 강한데 그것을 여당에서 하자니까 『장기집권 음모다. 盧泰愚 대표를 앉혀 놓고 뒤에서 全斗煥 대통령이 다 (지휘)할 것이다』는 식으로 반대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1987년 들어 다시 현행 헌법대로 한다며 「4·13 조치」를 내놓았다.
 
  정책의 혼선으로 인해 당의 책임을 지고 있는 대표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黨論(당론)을 대통령 간선제―의원내각제―또 대통령 간선제, 이렇게 돌린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 간부들을 일일이 불러 설득해야 하고, 그걸 신념화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1백만명이 넘는 당원들에게 같은 신념을 갖게 해야 하기 때문에, 연설 잘하는 사람을 뽑아 연수원에서 토론, 강연도 하게 해야 하는데 그 작업이 몇 달씩이나 걸려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자연 『대표위원이라는 사람이 신념이 확고하지 못하고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왔다갔다 한다』는 지탄을 받을 수밖에 없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나는 李萬燮 총재와 만난 자리에서 직선제 이야기가 나오자 「4·13 조치를 한 지도 얼마되지 않았는데 全대통령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내가 아무리 직선제를 한다고 해도 全대통령이 안된다고 할 텐데 그게 가능할 것인가」 하고 걱정했다.
 
  그래서 李萬燮 총재가 『全斗煥 대통령을 만나서 설득하겠다』고 했을 때 「그게 좋겠구나. 내가 만났던 야당 지도자와 종교계 지도자들을 全대통령과 만나게 해줘야 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이다.
 
  나는 이틀 뒤인 6월22일 오전 청와대에 올라가 全대통령에게 『이러이러한 분들을 만나 보시는 것이 좋겠다』고 與野 領袖(영수)회담을 건의했다.>
 
 
  全대통령, 6월24일에 盧대표에게 직선제 제의
 
  <당시 全대통령의 지론은 우선 발등에 떨어진 혼란을 막고 보자는 것이었다. 타협이나 대화보다는 물리적인 힘으로 막아놓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해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全대통령은 나의 건의를 받아들여 각계 지도자들을 만났다.
 
  全대통령은 6월22일 오후 尹潽善(윤보선), 崔圭夏(최규하) 전 대통령을 만난 데 이어 이틀 뒤인 6월24일에는 金泳三 민주당 총재, 李敏雨 신민당 총재, 李萬燮 국민당 총재를 잇따라 만났다. 나는 그 회담을 지켜 보면서 「무슨 변화가 있겠구나」하는 기대를 가질 수는 있었다.
 
  全대통령은 6월24일 저녁 나를 불렀다. 청와대에 올라가 시국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全대통령은 불쑥 『직선제를 해도 마, 이기지 않겠소?』 하고 말을 꺼냈다.
 
  나는 『무슨 말씀이십니까? 직선제로서 이긴다고요? 안될 말씀입니다』 하고 부정적으로 반문했다. 全대통령의 태도가 자주 바뀌어 왔으므로 나는 全대통령이 직선제를 한다고 했다가 번복이라도 하게 되면 그야말로 나라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全대통령의 이야기를 「앞으로 절대 변하지 않는 결심」으로 굳혀야겠다는 마음에서 『그게 되겠느냐』는 식으로 反語法(반어법)을 쓴 것인데, 후에 이 대목에서 내가 반대한 것으로 알려지는 이유가 된 것 같다.
 
  하여튼 全대통령은 내가 반문하자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金大中씨를 사면 복권시킨다 해도 盧대표가 그 동안 국민들에게 심어 놓은 좋은 인상으로 보아서는 이길 것 같다. 내가 최선을 다해 밀어줄 테니까 직선제로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나는 『변함없는 생각이십니까』하고 全대통령의 말을 재확인했다. 그랬더니 『그 방법밖에 없지 않느냐』고 해서 『알았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지 모르겠지만 이왕 내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으니 선거에서 이기든 지든 앞으로의 문제에 대한 책임은 모두 다 제가 지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각하의 뜻을 알았으니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나한테 맡기고 관여하지 말아 주세요. 앞으로의 운명은 제가 책임지고 개척해 나가겠습니다』하고 말했다.
 
  그 자리에 全대통령의 아들 宰國(재국)이든가 영부인(李順子 여사) 이 두 사람 모두, 아니면 한 사람은 배석했던 것 같다. 그 날 재국이가 나에게 큰 절을 했는데, 그 자리였는지 그 대화 이전이었는지는 기억이 확실하지 않다.>
 
 
  『내 책임하에 내가 한다』는 다짐 받아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1987년 들어서서 나는 줄곧 여러 사람들로부터 건의를 받으면서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여러 가지 방안을 고려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6월10일 이후부터는 직선제와 金大中 사면 복권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이 무렵 나는 만약 全대통령이 대통령 직선제와 金大中씨 사면 복권 문제를 꺼내지 않는다면 이 문제에 대한 나의 결단을 全대통령에게 밝혀 그의 동의를 얻어야겠다고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全대통령은 나의 이런 배경을 모르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여튼 그 자리에서 6·29 선언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은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는 「직선제를 한다, 金大中씨를 사면 복권한다」는 두 가지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선 『전부 내 책임하에 내가 한다. 내가 해야만 국민들이 제대로 받아들인다』고 다짐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극비로 보안조치를 취하고 중간 중간 선언문 초안 내용을 검토하면서 약간의 보완을 한 후 최종 문안은 6월27일에 결정을 보아 李丙琪(이병기) 당 대표 보좌역에게 淨書(정서)를 시켰다.
 
  일부 보도에는 내가 발표 문안을 들고 청와대에 들어가서 협의를 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6월24일 이후 6·29 선언 때까지 나는 청와대에 올라간 일이 없었다.
 
  선언 직전 주말인 6월27일 청와대에서 내게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어도 올라가지 않았다. 후에 들은 이야기로는 청와대의 몇몇 비서관이 『어떻게 이것을 盧대표 단독으로 하게 합니까. 합작품 내지는 全대통령 각하의 작품으로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그 때문은 아니었지만, 나는 全대통령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중대선언이 금명간에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아 기자들이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상황이어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全대통령에게 『기자들이 집을 둘러싸고 진을 치고 있어 갈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애당초 (내 책임하에 추진하고 관여하지 않는다는) 약속도 했지 않습니까』하고 말했고, 全대통령도 『알았다』고 해서 전화 통화만으로 끝냈다.
 
  그리고 선언 내용을 (우리 쪽에서) 청와대에 보낸 일도 없었다. 6·29 선언과 관련해 청와대와의 관계는 이것이 전부였다.
 
  선언 당일 아침 나는 안채 2층 서재에 올라가 李舜臣(이순신) 장군의 「必死卽生」(필사즉생)을 붓글씨로 썼다. 그리고 그것을 서재 책상 위에 놓아 두고 집사람에게 『여보 미안해. 내가 이 어려운 시대를 극복해 나가는 희생물로서 역사의 제단에 오르려 하니 거두어 들일 준비를 하세요』 하고 말했다>
 
  1987년 6월29일.
 
  盧泰愚 당시 민정당 대표는 오전 8시30분 연희동 자택을 출발, 8시50분에 서울 종로구 관훈동의 민정당 중앙당사에 도착했다. 이어 9시3분에 대표위원실을 나서 9시5분,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실에 나타났다. 이날 회의실에는 수많은 내외신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마이크 앞에 앉은 盧대표는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각계각층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여 이 나라의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정부 역시 국민들로부터 슬기와 용기와 진정한 힘을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역사와 국민 앞에 서게 됐습니다』라고 서두를 뗀 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 金大中 사면 복권 등 「국민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일명 6·29 선언) 8개항을 차분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다시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으로 돌아가 본다.
 
  <선언문을 읽고 나니 홀가분했다. 발표장에서 나오면서 어느 기자에겐가 『나는 이제 완전히 발가벗었다. 또 다른 아무런 마음도 갖고 있지 않으며, 오직 국민들 뜻대로 한다는 생각뿐이다』하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국립묘지에 가서 헌화하고 묵념하면서 수십만 영현들에게 『여러분들은 목숨을 던져 戰火(전화)에서 조국을 구하셨습니다. 이제 나도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내 몸을 희생해 이 나라에 민주화의 꽃을 피우고자 합니다』 라고 독백했다.
 
  나는 현충사로 향하는 승용차 안에서 李丙琪(이병기) 보좌역에게 『내 인생의 최고 절정이 오늘 이 순간인 것 같다. 이제부터는 내리막이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李보좌역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고 했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다.
 
  서울에 돌아와 보고를 받아 보니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정계, 종교계, 학계 할 것 없이 각계각층이 환영일색이었다. 특히 金大中 民推協(민추협) 공동의장이 『인간에 대한 신뢰감이 생긴다』, 金泳三 총재가 『훌륭한 결정이다. 이 시대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발표로, 전적으로 환영한다』고 논평한 것을 보고 가슴이 뿌듯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金宗輝 교수가 가장 먼저 직선제 건의
 
  <지금도 일부 사람들은 6·29 선언에 대해 「상황에 밀려 마지못해 받아들인 결과」 또는 「全斗煥 대통령의 작품을 낭독한 데 불과하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당시 나의 심정은 「선거에서 지더라도 민주화에 이바지한다면 기꺼이 내 몸을 바치겠다」는 확고한 것이었다.
 
  나중에 보도를 보니 金容甲(김용갑) 청와대 민정수석이 내게 직선제를 건의했다느니, 金復東(김복동)씨가 나를 설득했다느니 하는데, 그들 말고도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한 사람은 많다.
 
  그런데 정작 직선제를 내게 제일 먼저 건의한 사람은 선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金宗輝(김종휘) 국방대학원 교수였다. 金교수는 1987년 초 우리 집에 새해 인사를 하러 와서는 『직선제를 받고 金大中씨를 사면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나는 『軍 연구원에 있는 사람이 정치에 무슨 관심이 그렇게 많은가』 하고 핀잔을 주면서도 『이 친구가 아주 용기가 있구나』 하고 감동해마지 않았다.
 
  李鍾贊(이종찬) 의원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李의원은 여러 차례 내게 여론을 전하면서 직선제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직선제 건의를 수없이 들었지만, 무언가 결론을 내려고 하면 『올림픽이다, 혼란이다』 해서 걸리적거리곤 했다.
 
  6·29 선언이 성공한 것으로 평가되자 많은 사람이 나를 찾아 왔다. 그리고는 자신도 뭔가 6·29 선언에 이바지했다고 생각해서인지 신문, 방송, 잡지 등에 인터뷰를 하곤 했다. 그러니까 6·29 선언이 발표된 후 「내가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졌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 것도 전혀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6·29 선언이나 5共청산에 관련된 글을 보면 사실이 아니면서 사실처럼 되어 있는 것들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구차스런 변명을 하는 것 같아 진실을 밝히기 어려웠다>
 
 
  극적인 효과 위해 演技한 것 없다
 
  6·29 선언에 대한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에 이어 질의 응답이 이어졌다.
 
  ―全대통령이 金聲翊(김성익) 통치사료 담당 비서관에게 술회한 내용 중에는, 『일단 盧후보께서 全대통령에게 직선제를 건의하면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처음에는 全대통령이 그것을 거부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건의했는데 全대통령이 『그것은 좀 곤란하다』는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뭔가 演技(연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민주화의 祭壇(제단)에 내 스스로를 던져버린 겁니다』
 
  ―여러 기록을 보면 盧 전 대통령께서 6월27일 安家(안가)에서 全대통령을 만나 최종적으로 6·29 선언내용에 합의한 것으로 나옵니다.
 
  『바로 그 부분이 사실과 달라요. 6월24일에 내가 全대통령을 만나 가장 중요한 사안을 논의했고, 그 후에는 (全대통령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요. 다만 6월27일에 청와대에서 전화가 온 적은 있습니다.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대통령의 지시였는데, 내가 안 갔지』
 
  배석한 孫柱煥 전 장관은 당시 정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6월27일 두 분의 만남 계획은 그 당시 청와대 참모들 몇 사람만 사전에 알고 있었던 사안이라고 추측됩니다. 그런데 대통령으로부터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고도 盧후보가 안 들어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문제니까, 그날 모임을 알고 있었던 몇몇 참모들은 두 분이 6월27일에 만난 것으로 알고 기정사실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리를 해 봅니다』
 
 
  全대통령 가족이 나를 밀었다
 
  ─그 당시 盧 전 대통령께서 작성한 6·29 선언 문안은 발표 전에 全斗煥 대통령에게 전달이 됐습니까.
 
  이 질문에 孫柱煥 전 장관이 답했다.
 
  『문안을 최종 정리한 분이 李丙琪 보좌역입니다. 李보좌역의 증언에 의하면 6월28일 오후에 安武赫(안무혁) 안기부장에게서 전화가 와서 「나에게는 좀 보여줘야 되지 않겠느냐」 해서 6월28일 저녁에 安부장에게만 선언문 복사본 한 부를 보냈답니다. 그 외에는 청와대쪽으로도 일체 보낸 것이 없어요』
 
  盧 전 대통령은 『安부장에게 전달된 것이 청와대에도 보고된 것으로 봐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청와대도 내가 선언을 발표하는 정확한 날짜와 시간은 몰랐어요. 내가 청와대에도 일체 알리지 않았으니까』
 
  ─盧 전 대통령께서 全대통령과 金大中씨 사면 복권문제를 논의할 때 兩金(양김)씨가 단일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논의가 있었습니까.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이 없는데, 어쨌든 全대통령은 내가 1985년에 당에 들어와 3년 동안 이미지를 닦아 왔으니 그만하면 되지 않겠느냐. 또 직선제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티다가 전격적으로 받은 데 대한 반대급부로 인기가 높아질 테니 한 번 해볼 만하다는 의견이었죠』
 
  ─6월29일 오전에 선언을 하신 후 청와대에 들어간 것이 7월1일인데요. 그 때 全대통령과 어떤 이야기가 오갔습니까.
 
  『내가 6·29 선언을 하면서 全대통령에게 미안했던 것은 「이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겠다」는 표현을 썼어요. 이건 국가원수에 대한 결례인 셈이라 마음에 걸렸지요. 그래서 거기에 대해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양반이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주었기 때문에 부담을 덜었습니다』
 
  ─全대통령 아들 全宰國씨가 盧 전 대통령에게 절을 한 것은 무슨 뜻이었습니까.
 
  『全대통령이 후계자 선정 과정에서 고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가 많이 들려오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측근 중에서 나를 후계자로 진지하게 건의한 사람이 全대통령 가족이었어요. 재국이가 미국에 공부하러 갔을 때 자기 아버지에게 「盧대표가 최선의 길」이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후계자 결정 과정에서 아들 역할이 중요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절을 시키지 않았나 생각돼요』
 
  ―6·29 선언 후 13대 大選(대선)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기간 중에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만, 軍에서 일부 강경파들이 일종의 친위 쿠데타 비슷한 것을 일으켜 대통령 출마한 분들을 다 배제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그것이 끝나면 병영으로 돌아간다는 계획을 추진했는데 盧 전 대통령께서 그들을 설득해 좌절시켰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루머 수준에 지나지 않는 얘기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軍 지휘관들은 6·29 선언의 성격을 알고 공감했어요. 이제 軍이 정치에 이바지할 시기는 지났다는 것이었지요. 우리 軍이 너무 권위주의적인 집단으로 국민들의 거부감을 조성한 데 대한 반성, 그런 역할을 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 이런 것까지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때문에 군부에서 나에게 「全대통령이 권위주의자로 매도를 당했는데, 그 분을 올바르게 받들지 못한 몇몇 사람은 6共에 참여시키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하는 탄원을 받은 적은 있습니다. 상황이 이랬기 때문에 나에게 反하는 친위 쿠데타가 일어날 수 없는 분위기였지요』
 
 
  너무 쉽게 5년제 單任에 동의
 
  盧 전 대통령은 준비된 자료를 꺼내 13代 大選과 관련된 육성증언을 이어갔다.
 
  <당과 정부는 바쁘게 돌아갔다. 우선 헌법개정을 위해 여야가 개헌 협상을 위한 전담기구를 구성해서 개헌작업에 들어갔다.
 
  당시로는 野(야)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수용을 해 주겠다고 마음 먹고 헌법 개정작업에 들어 갔으므로 서로의 이해가 엇갈려 다툴 일은 거의 없었다. 다만 『대통령 임기가 4년 重任(중임)이냐, 아니면 6년 單任(단임)이냐』 하는 의견을 냈더니 여야 모두가 『다소 불합리하긴 해도 5년 단임으로 결론을 냈다』고 해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여당은 權翊鉉(권익현) 의원이 8인 정치 회담 대표를 맡고 있었는데, 좀 더 토론해서 조정할 수 있었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남아 있다. 내 생각으로 임기 5년은 국회의원 선거, 지방선거 등과 주기·간격이 맞지 않아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金大中씨와의 운명적인 첫 대면이 이루어졌다. 7월4일 미국 독립기념일을 기념해 駐韓(주한) 미대사관저에서 리셉션이 열렸다. 닉슨 전 대통령도 참석해 국제정세에 대한 연설을 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곳에서 나는 金大中씨 부부를 처음으로 만났다. 사람들이 많아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우리 두 사람은 매우 의미 있는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서 있던 李姬鎬(이희호) 여사와 인사를 나누었다. 내가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라고 하자 李여사는 깍듯이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합니다』 라고 정중히 인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두 사람과의 만남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金大中씨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금상태에 있었던 데다 오래 전부터 기피인물로 지목되어서 마주칠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날도 참석인사들과 언론인들이 나의 주위를 둘러싸다시피 했다.
 
  나는 힘이 솟았다. 내가 가질 수 있는 利點(이점)을 모두 다 던져버린 빈털터리인데도 마음은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두려움도 없었다. 이제 정권은 민간 출신에게 이양해 줄 시기라고 보았는데, 하늘은 오히려 그 시기를 늦추고 있는 것 같은 예감이 들기도 했다. 국민들은 『盧泰愚 선언 잘 했다. 이제는 깨끗이 물러날 준비를 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나에게 기대를 거는 것 같았다.
 
  내가 어릴 때 스님이 들려주던 말씀, 그리고 6·29 선언 직전 金壽煥(김수환) 추기경이 해 주던 말씀, 즉 『비워라, 그러면 얻어진다』는 얘기가 현실로 나타난 것 같았다.
 
  나는 처음부터 (야당의) 단일후보가 굳혀지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늘이 주신 이 기회를 YS건 DJ건 누가 포기하겠는가. 모든 것이 어떻게 하면 民心(민심)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그들 나름대로의 작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金鍾泌(김종필)씨 역시 비운을 겪었지만 공화당이 이룩한 업적에 대한 국민들의 향수심을 기대해 출마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6·29 선언을 한 시점에는 많은 당원들이 동요하고 자신을 잃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선언 이후에 일어나는 현상은 그 반대였다.
 
  나는 아무리 우리편이 수적으로 많더라도 명분이 약하고 떳떳하지 못하면 안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모든 유리한 점을 다 털어버리고 불리한 입장에 서니 오히려 엄청난 힘이 솟아나고 있었다. 이 평범한 진리를 과거 정권과 정치인들은 왜 깨닫지 못했을까. 나는 어디로 가든 누구를 만나든 떳떳하고 거칠 것이 없었다>
 
 
  레이건과 부시 만나다
 
  盧泰愚 후보는 大選(대선)을 앞둔 1987년 9월13일 워싱턴을 방문, 다음날 레이건 미 대통령을 만났다. 레이건 대통령은 『盧총재의 6·29 선언에 감명을 받았으며, 한국에서의 긍정적인 발전과정을 통해서 한국인의 소망이 성취될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訪美(방미)와 관련한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을 들어본다.
 
  <레이건과 만날 때 레이건의 뒤를 이을 부시 부통령이 배석했다. 대화는 주로 레이건 대통령과 나누었기 때문에 부시 부통령과는 별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었는데, 헤어지면서 악수를 할 때 둘이 『파이팅』을 외치면서 『다음엔 승리한 입장에서 다시 만납시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부시 부통령과는 이틀 뒤 우연히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9월16일 아침 7시 NBC 텔레비전의 「투데이」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해 방송국에 갔더니 부시 부통령이 와 있었다. 그는 내 직전에 인터뷰를 하고 나오고, 나는 들어가면서 마주쳐 다시 한 번 『파이팅』을 외쳤다.
 
  백악관에서 나온 나는 워싱턴 포스트 本社(본사)를 찾아 회장인 캐더린 그레이엄 여사를 비롯한 간부진들과 오찬 겸 간담회를 가졌다. 그들은 나의 방문을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앞으로 내가 워싱턴에 들를 때면 한 가족처럼 만나자고 했다. 오래 전부터 교분을 가졌던 돈 오버도퍼 기자는 이제는 중진 기자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6·29 선언의 내용과 성격에 대해 높은 관심을 표명했다.
 
  訪美 사흘째인 9월15일 낮 내셔널 프레스 클럽의 오찬연설 및 간담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언론인들을 상대로 하는 정치성 있는 국제행사는 처음이라고 생각하니 어려울 것 같았다. 반대로 쉽다고 생각하니 쉬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나는 단전호흡을 몇 번 하고 회담 장소에 들어갔다. 신기하게도 마음이 가라앉아서 차분해졌다.
 
  13代 대통령 선거전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복병이 터져 나왔다. 鄭昇和(정승화·前 계엄사령관)씨가 12·12 사건을 가지고 거세게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복병이 초기에 나타나서 천만다행이었다. 만일 선거 막바지에 나타났다면 큰 곤욕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여튼 鄭昇和씨와 金泳三씨의 합류는 내게 적지 않은 상처를 입혔다. 여론조사 결과 상승 추세에 있던 나의 인기가 갑자기 하강하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다행히 그 무렵에 나를 초청하는 관훈클럽 토론회가 열렸다. 그 토론회에서 마치 검사의 심문을 받듯이 12·12 사건의 전모 등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나는 당당히 대응해서 그들에게 나의 신념을 평가받았다>
 
  이 대목에서 盧 전 대통령은 농담을 한 마디 했다.
 
  『내가 (12·12 사건으로) 검사에게 조사를 받을 때도 이 얘기를 했어요. 「당신들 1987년 대선 당시 관훈클럽에서 나에게 따진 것보다 더 약한 것 같다」 이렇게 말이야』
 
  다시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으로 돌아가 본다.
 
  <토론회를 계기로 내 인기가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정치인으로서 이런 토론회는 처음이었지만 「나는 던져진 몸이다. 희생되어도 아깝지 않다」는 신념으로 임한 것이 하늘이 도왔는지 예상 외로 좋은 반응이 왔다.
 
  여담이지만 어느 패널리스트가 『盧후보가 옛날에 헤르만 헷세의 詩(시)를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시 한 구절을 들려 달라』고 주문한 일이 있다. 나는 갑자기 받은 주문이라 잠시나마 『큰일 났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마침 계절이 가을이라 가을을 소재로 한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숲가의 나뭇가지가 금빛으로 타오를 때/오솔길을 따라 나는 혼자 걷는다/사랑하는 님과 함께/수없이 거닐었던 이 길을…」 하고 읊어 나갔다.
 
  국민들이 직접 자기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가 16년 만에 부활되고 보니 국민들의 선거에 대한 관심과 열기는 대단했다. 가장 힘들었던 유세는 전라도 광주(1987년 11월29일)와 군산(12월10일)의 유세였다. 특히 광주에서의 유세는 유세라기보다는 전쟁터에서 적진 깊숙이 포위된 상태와 같았다. 나를 지지하는 군중도 기만을 넘었으므로 불상사를 막기 위해 이들을 연단 가까이에 자리잡게 했다.
 
  유세장에서 연단까지는 그리 힘들지 않게 올라갔다. 청중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돌과 쇠붙이 등이 수없이 날아왔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세를 시작했다. 돌과 쇠붙이는 멈추지 않았고, 심지어 나를 막고 있던 경호원의 머리에 맞아 피가 낭자하게 흘렀다. 도저히 유세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 순간 내 머리에 번개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애국가를 부르자』 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친애하는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 다 함께 애국가를 부릅시다』 하고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하고 先唱(선창)을 했다.>
 
 
  아수라장의 光州 유세
 
  <단상에 있는 사람들이 그대로 따라 부르자 연단 밑의 청중들도 따라 불렀다. 그 순간 빗발처럼 날아오던 돌이 잠시 멈추기 시작했다. 나는 그 순간을 이용해 유세를 계속했다. 상황으로 봐서 유세를 계획대로 전부 할 수는 없으므로 요약해 한 5분 이내로 끝낼 작정이었다. 그런데 애국가를 마치고 연설을 하니 다시 돌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경호원들이 나를 에워싼 가운데 요약된 연설을 마쳤다.
 
  끝내고 밑으로 내려와 보니 나를 지지하는 청중들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반대편 청중들로부터 각목으로, 돌로 무참히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열을 흐트리지 않고 우리가 단상에서 내려와 차를 타고 빠져나가는 길을 확보해 주었다. 그 사이에도 우리를 향해 돌이 무수히 날아왔다.
 
  겨우 빠져 나와 교외에서 현장보고를 받아 보니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나를 지지한 청중들이 많이 다쳤다고 했다. 특히 아들 재헌이의 친구 수백 명이 지원을 나왔다가 수십 명이 다쳤다고 해서 가슴이 아팠다.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지역 감정에 불을 지른 결과가 도처에서 이런 현상을 일으켰다.
 
  그런데 내가 광주에서 심하게 당하는 모습이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방영되자 반작용이 나타났다. 대구만 하더라도 그 전까지는 원래 野性(야성)이 강해 나의 지지도가 그리 높지 않았는데, 그 일이 있은 후로는 압도적으로 지지도가 높았다.
 
  군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군산敎大(교대) 흥남 캠퍼스 운동장 유세를 통해 야심찬 공약을 발표함으로써 호남에서의 열세를 만회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즉 서해안 시대의 개막을 선언하고 엄청나게 발전하는 서해안의 청사진을 제시함으로써 군중들의 갈채를 받을 것을 기대했다. 그런데 박수는 고사하고 빗발치는 돌만 맞았다>
 
  盧 전 대통령은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선거유세 당시 선언한 「서해안 시대의 개막」은 지역감정 해소 차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전에 내무장관 때부터 여러 번 강조했어요. 오래 묵은 지역감정을 해결하려면 노력도 중요하지만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발전축은 서울-대구-부산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러니 호남 푸대접이라 해서 지역감정의 골이 더 깊어진 것이다. 오늘의 사정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가 살아나갈 수 있는 생명선이 일본과 미국이었기 때문에 그쪽으로 나가자면 결국 서울-대구-부산 축이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는 그 축선이 달라진다.
 
  중국과 우리가 국교 정상화가 된다 했을 때 일본은 인구가 1억2∼3천만이지만 중국은 10억이 넘는다. 열 배가 넘는 우리의 시장이 서쪽에서 다가온다. 이 준비를 하기 위해 내가 「서해안 시대」 개막을 선언한 것이다. 이제 엄청난 물동량이 오갈 것에 대비해 서해안에 비행장, 항구, 도로를 만들어야 한다. 발전 벨트가 서쪽으로 옮겨오고 이 지역에 사람이 몰려와 20∼30년 우리가 중국과 교역하면 千年(천년) 지역감정의 골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주택 2백만 호 건설 公約
 
  ―大選(대선) 公約(공약)은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별 신뢰성을 두지 않고 지나가는 말로 받아들이기 쉬운데요. 盧 전 대통령께서는 공약을 만들 때 실현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만드셨습니까.
 
  『나는 그런 부분이 내 이름과 마찬가지로 크게(泰) 어리석다(愚)고 생각해요. 공약은 실천해야 된다고 믿었습니다. 내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公約 문제를 가지고 외국 頂上(정상)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얘기가 「선거 공약은 30%만 실천하면 잘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더군요. 그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나는 다르다고.
 
  프랑스의 지스카르 대통령은 출마할 때 선거공약집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지켜봐라. 꼭 공약을 지키겠다」 이런 식으로 믿음을 주었다고 해요. 나는 大選 때 이 말을 듣고 나도 그 이상으로 유권자와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결심하고는 「지킬 수 없는 공약은 만들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각 부처에서 우수한 요원(국장급 이상)을 전문위원으로 위촉해서 이 사람들에게 예산과 우리 현실을 감안해 지킬 수 있는 공약을 만들도록 요구한 겁니다.
 
  그 중 가장 어려웠던 것이 주택 2백만 호 정책이었습니다. 그때 주택문제 때문에 폭동이 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주택을 지으려 했는데, 과연 이것을 실천할 수 있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이 컸지요. 5共 초기에 5백만 호 주택을 짓겠다고 했다가 약속을 지키지 못해 웃음거리가 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고 당부했습니다.
 
  전문가들이 연구한 결과 2백50만 호 정도는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래도 미덥지 않아 50만 호는 깎아버리고 2백만 호로 결정했는데, 검토 단계에서 2백만 호도 어려울 것이란 얘기가 많았습니다. 건축자재 파동 문제도 심각하게 대두됐고, 임금상승도 논의됐습니다. 그러나 역시 서민들의 집에 대한 욕구를 볼 때 2백만 호는 할 수 있다고 여러 번 다짐을 받고 공약을 한 겁니다. 4백50여 항목의 대선 공약은 내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반드시 그 추진일정과 성과를 챙겼고, 국민들에게 그 내용을 공개했습니다』
 
  옆에 있던 孫柱煥 전 장관은 『공보처가 발간한 「제6공화국 실록」을 보면 「盧泰愚 대통령의 공약 4백59건 중 1992년 임기 말 현재 이 가운데 8건을 제외한 4백51건을 착수해 2백29건을 완료하고, 2백22건은 추진 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부연설명했다.
 
  ―이 기간 중에 盧 전 대통령께서 원탁회의도 하고 가방을 직접 들고 다니시지 않았습니까. 또 대통령 호칭도 「각하」라는 것을 폐지하는 등 일종의 脫권위주의적인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만 치중해서 일종의 스타일리스트적인 정치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軍部(군부)에 대한 거부감에다 권위주의적인 색채, 이런 것들이 識者들의 마음에 불만을 갖게 했습니다. 본래 내 성격은 권위라든가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가방 같은 것은 내가 직접 들고 다니는 편입니다. 그런 모습을 일부러 보이기 위해 연출한 것은 아니었어요』
 
 
  朴대통령과 권위주의
 
  이 대목에서 盧 전 대통령은 朴正熙, 全斗煥 대통령과 관련된 일화를 몇 가지 소개했다.
 
  『내가 朴대통령을 모시면서 느낀 건데 朴대통령은 원래 성격이 소탈한 편입니다. 누구나 가까이 만날 수 있고, 늘 편안한 자세를 가졌지만 대통령을 모시는 사람들은 그렇질 않았어요. 내가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하면서 내 권한으로 할 수 있는 한 시정하려고 했지만 車智澈(차지철) 경호실장이 朴대통령을 「우리의 태양」 이렇게 떠받들곤 했지요.
 
  朴대통령도 그렇게 소탈한 분이 車智澈 경호실장이 하늘처럼 떠받드니까 좋아하더란 말이야. 그래서 내가 갈등을 좀 일으켰어요. 어떻게 보면 대통령도 인간이니까 편안한 걸 좋아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었어요.
 
  나도 실수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내무장관 시절 감기가 들었는데 全대통령이 부르신다는 전갈이 왔어요. 그래서 내가 「지금 감기가 몹시 들었다. 대통령에게 감기를 옮기면 결례 아니냐. 급한 일이 아니면 다음으로 미루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얘기를 비서관이 곧이 곧대로 全대통령에게 보고한 겁니다. 그러자 全대통령이 「盧장관이 최고다. 저렇게까지 대통령을 위하는구나」 이런 반응이 오더군요. 사정이 이렇게 되니까 그 다음부터 경호원들이 대통령 접견하는 사람들 감기 들었나 안 들었나 조사하기 시작하더군요』
 
  ―대통령이 누구를 만나자 하면 대부분이 『무슨 말을 해서 대통령을 즐겁게 해 드릴까』 하는 생각이 80∼90%라고 합니다. 그리고 10%∼20% 정도는 直言(직언)을 해야 되겠다 이렇게 결심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대통령 입장에서는 90%의 좋은 이야기만 듣고, 나머지 10% 정도만 비판하는 이야기를 듣는데 그것도 그냥 흘려버릴 겁니다.
 
  『내 경우는 참모나 비서관들이 내가 심기가 불편하다 해서 좋은 얘기만 한 적이 별로 없었다고 봅니다. 왜냐면 텔레비전과 신문에서 대통령의 정책, 정부의 국정운영을 혹독하게 비판했기 때문이지요. 언론이 그런 내용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통제했다면 문제가 달라졌겠지요』
 
  ―우리 현실에서 민주화의 핵심은 대통령이 언론과 검찰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론은 간섭하지 않고 가만 놔두는 게 제일 좋은 것 아니오? 나는 재임 시절 「정부가 언론을 간섭할 수도 없고, 간섭해서도 안 된다」는 6·29의 언론 조항을 충실히 지켰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내가 어느 정권보다 언론의 자유를 크게 보장했지만 그 보답으로 언론이 나를 크게 비판하고 나섰잖아요.
 
  검찰 문제는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됐어요. 나는 검찰이 국가의 엘리트에 속하니까 검찰의 독립과 독자성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과거에는 안기부가 검찰에 자꾸 손을 대고 참견했는데, 내 재임 시절에 그런 선을 거의 끊었습니다. 아마 6共 때 나와 함께 일했던 검찰 총수들은 그런 면에서 보람을 느낄 거구만. 그렇게 했는데도 퇴임 후 나와 검찰과의 관계를 보세요. 그러니까 아이러니지, 허허허』
 
  ―취임 후 이른바 「5共청산」 과정에서 全斗煥 전 대통령과의 인간적인 관계가 불행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우선 그 내용에 대해 준비된 것이 있으니 정리된 생각을 먼저 밝히도록 하지요. 그 다음에 추가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盧 전 대통령은 소위 「5共청산」과 관련하여 준비된 자료를 꺼내 육성증언을 시작했다.
 
 
  4·26 총선─충격적 패배
 
  <먼저 6·29 선언이나 5共청산에 대한 글들을 보면 사실이 아니면서 사실인 것처럼 되어 있는 것이 너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진실을 밝히는 것도 구차스런 변명 같아 그 동안 침묵을 해 왔다.
 
  13대 국회의원 선거는 개정 법률에 의해 소선거구제로 실시하게 되었다. 선거일은 4월26일로 확정되었는데, 우리는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한 여세를 몰아 總選(총선)에서도 압승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당에서는 蔡汶植(채문식) 대표와 沈明輔(심명보) 사무총장이, 청와대에서는 崔秉烈(최병렬) 정무수석이 선거를 관장했다.
 
  선거기간 중 간간이 당선 예상자 수를 보고 받았는데, 언제나 3분의 2 내외의 압승을 거둔다는 자신에 차 있었다. 아무리 못해도 과반수는 넘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너무나 의외였다. 총 2백24석 중에서 민정당이 87석, 평민당 54석, 민주당 46석, 공화당 27석, 무소속 10석으로 여당이 과반수에 훨씬 못 미치는 與小野大(여소야대)의 어려움이 연출된 것이다. 우리 쪽은 말 할 것도 없고 언론과 국민들조차도 의아해 할 정도의 참패였다. 참으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원인 없는 결과 없다」면서 여당이 너무 과신하고 교만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국민들은 그런 여당을 보면서 6共이 독재체제로 회귀할 수 있다고 우려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선거 결과를 하늘의 뜻으로 알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것은 내가 1987년 대통령 선거에 임하면서 선언한 「3金시대의 종말」을 아직은 하늘이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특히 金泳三씨와 金大中씨는 수십 년간의 민주화 투쟁을 통해 그 세력이 전국 도처에 깊게 뿌리 박혀 있기 때문에 그들을 역사의 뒤안길로 흘려 보낼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렇게 시도한다면 엄청난 저항이 일어나 국가적인 불행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잘되든 못되든 그들에게 한 시대를 맡겨야 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요, 역사의 가야 할 길이라는 인식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집권당 일변도의 정치 시대는 지나가고 여야 동반자 시대가 도래했으므로, 여야 협조체제가 궤도에 오를 때까지는 부단히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려면 인내와 관용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이런 기본 자세를 갖지 않고서는 역사를 전진시킬 수 없다」고 마음을 정리했다.
 
  與小野大 정국에서 野 3당은 「5共청산」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경쟁이나 하듯이 5共 정권을 두들겨 패고, 언론은 이를 받아, 불만을 토로하는 국민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어느 시대건 잘한 것과 못한 것이 함께 있기 마련인데 明(명)과 功(공)을 내세우는 자는 아무도 없고, 잘못된 暗(암)과 過(과)만을 들추어 냈다. 욕하고 두들기고 단죄하는 것이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다는 식이었다. 우리 민족의 슬픈 특성이기도 했다.>
 
 
  與小野大가 「5共청산」 불러
 
  <5共 시절 어느 저명한 識者가 신문에 기고하기를 『全斗煥 대통령이 單任(단임)을 지킨다면 그 자체가 민주주의에 큰 발전을 뜻하는 것』이라고 논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국가가 내포하고 있는 현실은 여러 가지 형태로 역사 발전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인데 우리의 정치 현실은 그러하지 못했다. 全斗煥 전 대통령 내외와 친인척은 말할 것도 없고, 권력 측근에 있었던 사람들, 5共과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까지 총체적으로 죄인으로 전제해 놓고 잘못을 찾아내는 식이었다.
 
  결국 사태는 새마을회장을 지낸 全敬煥(전경환)씨를 도화선으로 삼아 불붙기 시작했다. 與小野大의 국회는 「5共特委」(5공특위)를 구성하고 청문회를 가동시켰다. 청문회를 통해 5共 비리를 낱낱이 추궁하여 단죄함으로써 5共을 청산하겠다는 것이다.
 
  시대가 바뀌어 권위주의 배격과 민주 자율의 바람이 휩쓰는 속에서 사람들의 변화 기대가 부풀다 보니 상류층 사람들이 곤욕을 치르는 것을 속시원하게 생각하는 경향마저 나타났다. 때문에 정확한 사실을 입증하기보다 소문만 듣고 근거도 없는 것을 고발하거나 무고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5共 청문회에서도 이런 양상이 그대로 나타나 정치재판, 여론재판, 사법재판이 마구 뒤섞여 벌어졌다. 정부로서도 홍수처럼 흐르는 물줄기를 다스리기 힘들 정도였다.
 
  나는 이같은 현상이 그 동안 규제에 묶여 있던 여러 분야가 민주화라는 역사적 명제 속에서 일시에 해방됨으로써 용수철 처럼 튀어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안되겠다고 해서 다시 누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그냥 가만히 두게 되면 격렬한 왕복작용을 하다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동적으로 멈추어져 자율이라는 규범 속으로 가라앉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爲政者(위정자)는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평소의 신념을 떠올리며 용수철이 서서히 멈추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고발 사태는 全敬煥씨의 비리를 다스리라는 빗발치는 여론을 바탕으로 시작되어 全 전 대통령 주위의 모든 친인척들에게 이어졌다. 나는 민정수석을 불러 『여론에 밀려 무고한 사람을 해치는 일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는 나의 뜻을 司正(사정)기관에 전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국회에서까지 고발을 해대니 수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사를 하면 죄는 튀어 나오게 되어 있었다.
 
  내가 아는 한 全斗煥 전 대통령은 친인척 관리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관계수석들에게 엄중히 관리하라고 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불미스러운 일들이 일어났는가.
 
  나는 첫째 한국적인 풍토가 그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는 情(정)이라는 것이 알맞으면 인정이 넘치는 훈훈한 사회를 만들지만, 지나치면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게 되어 있지 않은가. 둘째는 권력지향적인 한국의 사회 분위기를 들 수 있다. 권력이 있는 쪽으로 사람들이 몰리다보니 권력의 혜택을 보려는 사람들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친인척들을 찾아 다니며 그럴 듯한 명분을 갖다 붙여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셋째는 대통령 친인척들에게 공직을 맡기는 데 문제가 있었다.>
 
 
  友情의 한계
 
  <어쨌든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들고 일어나는 험악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친인척과 측근들을 비난하다가, 급기야는 포위망을 압축시켜 비난의 화살이 全 전 대통령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全斗煥 대통령 시대를 5共이라 하고 나의 시대를 6共이라고 한다. 그런데 全 전 대통령과의 인간관계는 내 개인에게는 무척 중요한 것이다. 사관학교 생도시절부터 시작해 全대통령과 내가 國政(국정)의 최고 책임자로 나서게 될 때까지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밀접했다.
 
  우리 두 사람은 우정과 동지애가 유난히 강했는데 公人(공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특수한 관계였다. 그러나 그것이 한 시대를 책임져야 하는 국가 차원에 올라서서는 한계에 부딪치고 말았다. 국가보다 더 상위에 놓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어 나가는 흐름은 인간관계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때문에 나는 5共청산 전 과정을 통해 엄청난 고민을 해야 했다.
 
  6共이 출범할 때 前(전) 정권이 내게 남겨둔 짐은 크게 두 가지 였다. 권위주의와 친인척 비리가 그것이었다. 국민들, 특히 識者들은 권위주의 청산을 열망했다. 또 전임 대통령 친인척들의 부조리를 다스려야 한다고 엄청난 압력을 가하며 나를 괴롭혔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언론 등에 의해 과장된 부분이 적지 않아 처리를 더욱 힘들게 했다. 설상가상으로 與小野大라는 국면에 처해 끈질긴 정치공세를 받았다.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서도 「인간적인 관계의 원칙을 깨지 않겠다」고 작정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全 전 대통령을 고생을 덜 하게 할 수 있을까」하고 고민도 많이 했다. 이렇듯 1989년까지는 5共청산의 고통에 많이 시달렸다. 그러다가 1990년에 들어와 3당 통합이 이루어짐으로써 어느 정도 난관을 극복하게 되었다.
 
  5共청산은 누가 직접적으로 내게 건의해서 하게 된 것은 아니다. 국회와 언론, 학생들을 비롯해 국민들의 뜻이 너무나도 분명한 상황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국은 스스로 판단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에서는 「5共청산도 완벽하게 마무리짓지 못한 채 全 전 대통령과의 인간관계만 앙금을 남기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지적하기도 하는데, 그 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5共청산을 완벽하게 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완벽하게 할 수 있다고 했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5共청산 대차대조표는 역사가 만들어 줄 것
 
  <분명한 것은 대통령이자 한 인간인 내 입장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5共청산에 대한 대차대조표는 역사가 만들어 줄 것이다. 다만 6共에 들어와 권위주위가 어느 정도 청산되고, 그만큼 민주화가 진전된 데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나와 전임 대통령은 국가를 통치하는 개념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전임 대통령은 「통치하는 데 어느 정도의 권위주의는 필요하다」고 생각한 데 비해 나는 「권위주의로 다스려서는 안된다」고 봤다. 권위주의가 심하면 독재가 된다고 여겼다>
 
  盧 전 대통령은 5共청산과 관련된 증언을 해나가면서 내내 표정이 어두웠다. 준비된 자료를 읽어나가던 盧 전 대통령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全 전 대통령 친인척 비리에서부터 새마을운동본부, 새세대육영회, 일해재단 등등 잇따라 문제가 터져 나왔지만, 6共 정부가 먼저 나서서 조사하고 처벌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언론 등에서 먼저 제기돼 어쩔 수 없이 손대야 하는 상황이 되었지요…』
 
  다시 盧 전 대통령의 증언으로 돌아가 본다.
 
  <「청산」이란 용어가 언론이나 野圈(야권)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는데, 정부나 여당에서 한 것으로는 기억되지 않는다. 그것은 청산이라기보다 역사의 진전이라고 해야 한다.
 
  李丙琪 수석은 『全 전 대통령측 사람들은 지금도 6共 정부가 의도적으로 자신들을 죽이려 한 것이라는 오해를 하고 있다. 그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5共청산이라고 하면 말 자체로서는 5共을 청산해 버린다는 뜻이므로 적합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全斗煥 대통령 시절 사람들은 『全대통령이 7년 단임만 지켜줘도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영웅이 될 것』이라고들 했다. 그런데 全대통령이 그것을 지켰는데도 이것 저것 들추어 구속시키라고 했다.
 
  全대통령에 이어 한 시대를 책임진 나로서는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나는 「역사가 부정 일색으로 나가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그런 의지에 대해 내 참모들 가운데 『그게 아닙니다』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워낙 야당과 언론 등의 요구가 강했기 때문에 듣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5共 사람들은 『대통령이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思考(사고)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대통령이 마음만 있으면 못할 게 없다. 전임 대통령이 왜 백담사에 가야 하느냐』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그런 기대를 이해는 했지만 내 자신은 다른 입장이었다.
 
  대통령이 국민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그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독재자라는 것이 나의 통치 철학이었다. 그런 인식의 차이로 인해서 나의 전임자가 섭섭해 하고, 나는 나대로 미안해 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徐義玄 스님이 칩거지로 백담사 선정
 
  <이른바 5共청산의 전 과정을 통해 나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나는 원래 감성적이어서 눈물도 많이 흘리는 편이다. 그런데 全 전 대통령이 백담사에 가서 『우리 집안에 제사 지낼 사람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다 갇혀 버렸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몹시 괴로웠다.
 
  칩거지를 백담사로 정한 것은 全 전 대통령 측근들이 조계종 총무원장인 徐義玄(서의현) 스님과 상의해서였다고 들었다. 徐義玄 스님이 내게 직접 들려준 얘기로는 후보지로 월정사 등 몇 군데가 논의되었는데, 徐義玄 스님은 『기자들이나 사람들이 찾아가 전기, 수도 등의 환경이 좋으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그런 비난을 받지 않고 국민들의 동정을 살 수 있도록 서울에서 거리가 멀면서 환경이 나쁜 곳으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해 백담사로 결정했다고 들었다. 徐義玄 스님은 후에 백담사를 자주 찾아간 것으로 안다.
 
  결국 全 전 대통령이 그 의견을 받아들인 후 백담사로 떠나기 직전에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부에서는 내가 그 때 『얼마만 고생하면 어떻게 하겠다』고 보장했다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참으로 미안하다. 지금 상황이 불가피하게 되었으니 원상복구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뜻의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랬더니 全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잘 돼 나가도록 하기 위해 희생을 십분 감수하겠다』고 말했다.
 
  1988년 4월 공천 당시 5共 세력들이 배제되었다고 해서 말이 난 일이 있다. 그것을 놓고 나나 내 참모들이 감정적으로 처리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는 것 같았다. 공천은 광범위한 여론을 토대로 하는 것이었다. 당의 의견이었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5共청산 문제에 대해 盧 전 대통령은 개인적인 감회를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에 5共청산이 개략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만, 내 심정을 1백% 전달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근본적으로 全대통령과 나와 思考(사고)의 차이가 있었어요. 그 사람 중심으로 생각하면 5共청산 과정에서 나에 대해 한없는 배신감을 느끼고 서운할 수 있는 거지요. 또 나의 철학과 권력의 잣대로 생각하면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5共청산과 관련하여 두 분이 서로 통화를 한 것은 (백담사로) 떠나기 전에 전화 온 것이 처음입니까. 혹시 두 분간의 통화에서 서로 섭섭한 감정을 교환하지는 않았습니까.
 
  『백담사에 가서도 몇 번 통화했고, 섭섭한 감정표현도 없잖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결론은 全대통령은 「내가 한 시대의 책임자였기 때문에 나는 고생해도 좋으니 당신들은 잘 되시오」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참으로 미안하게 됐소. 어쨌든 조금만 더 건강하게 참으시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만 살기 위해 저쪽을 희생시킨 것이아니다』
 
  ―저는 그 때 盧 전 대통령께서 국민들을 직접 설득했다면 우리 국민들이 끝까지 全대통령에 대한 처벌을 원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나도 수십 번 생각했지요. 내가 나서서 진정시킬 방법이 있었다면 왜 안 나섰겠어요. 與小野大 상황에서 내가 앞장서서 설득하러 나섰을 때 정치권과 국민들은 「둘이서 야합했다」고 나올 것이 뻔했어요. 야합의 소릴 듣건 뭐하건 全대통령을 보호할 수만 있으면 괜찮은데, 당시 상황은 아닌 말로 폭동 날 판이었습니다. 그래서 참모들과 여러 가지 논의를 했지만 참모들 의견이 「우리만 살기 위해 저쪽을 희생시키자」는 심정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당시 민정당 정세분석실장으로 당쪽에서 5共청산의 실무를 담당했던 孫柱煥 전 장관은 이런 의견을 제시했다.
 
  『5共청산에 대해 청와대에서는 崔秉烈 정무수석이 담당했고, 당에서는 국책조정위원들이 담당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5共 핵심의 한 분이었던 李鶴捧(이학봉) 의원도 국책조정위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李의원이 그 일을 맡았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국책조정위원회는 週(주) 2∼3회 모여서 5共청산을 어느 수준으로 할 것이냐를 논의했고, 5共청산의 기본 골격을 종합해서 정무수석에게 전달했습니다. 그것은 당시 국민들의 뜻을 집약한 것이라는 설명이 될 겁니다』
 
  ―6共 출범 초기에 全斗煥 전 대통령이 국정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하고 사무기구가 커지니까 6共의 참모진들이 기분 나쁘게 생각하고, 그것을 기자들에게 흘려서 문제가 불거진 것 아닙니까. 따라서 5共청산은 언론이나 야당에 의해 문제가 제기되었고, 6共 정부는 따라가기만 했다는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봅니다.
 
  이 질문에 孫柱煥 전 장관이 답했다.
 
  『당시 5共청산은 국민의 뜻이었고, 우리가 추진했던 5共 인사들에 대한 일련의 조치는 국민의 요구를 최소화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5共청산을 우리 참모진이 꾸며서 시작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국민의 뜻과는 달리 그런 계획을 의도적으로 꾸미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끝까지 구속되는 것은 막았다
 
  ―5共청산 과정에서 「레만호 작전」이라 하여 全대통령을 스위스로 망명시킨다는 그런 계획이 정말 있었습니까.
 
  『그것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얘기할 가치가 없다고 봐요. 그런데도 이런 유언비어가 많이 떠도는 것은 얘기 퍼뜨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무슨 망명설이다 뭐다 이렇게 만들어낸 것 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孫柱煥 전 장관이 덧붙였다.
 
  『全대통령과 盧대통령 두 분의 인간관계가 아직 완전히 회복된 단계는 아니라고 봅니다. 전직 대통령도 이제는 평범한 시민으로서 친구관계의 복원에 언론도 一助(일조)를 해주십사 하는 부탁을 드립니다』
 
  ―과거에 全대통령과 盧대통령 두 분이 만나서 화해했다는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그 후에도 앙금이 가시지 않았습니까.
 
  『가슴에 남아 있는, 씻을 수 없는 사연이 남아 있다는 것은 하나의 역사지요. 그런 상처를 인위적으로 말끔히 없앤다는 것은 힘들지만 극복해야 한다, 이런 생각은 全대통령도 충분히 하고 있다고 봐요. 또 한 가지, 우리 두 사람의 화합하는 모습이 주위 사람들이나 국민들을 편안하게 해 줄 수도 있지만 반대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어요. 지난 95년에 국립묘지를 참배한 후 둘이 만나서 서로 불행했던 일은 다 잊고 새롭게 나가자며 서로 안았습니다. 그 연장으로 그 해 가을에 陸士(육사) 입교 40주년 기념일 행사에 참석해서 다시 만나 다정하게 안았는데, 그 후에 우리가 어떻게 되었지요? 참 이상한 일이지요』
 
  ―5共청산 당시 어떤 경우라도, 여론이 全斗煥 전 대통령을 구속하라고 했지만 구속만은 안된다는 기본선은 가지고 계셨습니까.
 
  『그렇지』
 
  ―全斗煥 전 대통령에 대해서 한쪽은 청산해라, 구속하라는 쪽이었고, 다른 쪽은 盧 전 대통령께서 전임자를 보호해야 된다는 두 가지 길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백담사行으로 타협한 것 아니냐 이렇게 생각됩니다.
 
  『당시 분위기는 구속하라, 심지어 망명이나 해외도피 얘기도 나오고. 저쪽(全대통령)에서는 「죽으면 죽었지 해외는 안나간다」 이런 의사표시도 하고. 그래서 전임자를 보호하려면 잠시 피해 있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었지요』
 
  ―여야 정치권이 全斗煥 전 대통령의 국회증언으로 5共청산을 마무리한다고 합의했습니다. 저는 1989년 12월31일에 국회 방청석에 앉아 全斗煥 전 대통령의 국회증언 현장을 취재하고 있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全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집어던지는 등 아까운 시간만 낭비하고 말았지요.
 
  『그 때 내가 여당 원내총무를 불러서 혼을 냈어요. 저건 내가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이야. 당시에는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지요』
 
  ―全斗煥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갈 때 1백39억원을 헌납했습니다. 그런데 액수를 정하는 과정에서 全대통령측은 89억원밖에 없었고, 청와대에서 『1백억원 이상은 되어야 국민이 납득한다』 해서 50억원을 보태주는 식으로 1백39억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내가 헌납 과정과 액수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은 못 들었구만』
 
  ―全斗煥 전 대통령이 퇴임하면서 5백50억원을 넘겨주어서 그것을 4·26 총선에 사용한 것은 사실입니까.
 
  『여러분이 추측하는 것을 막을 생각은 없지만 내 입으로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1988년에 들어 노사분규 현장과 학원시위 현장에 공권력 투입 지침이 바뀌었습니다. 대학에서 총장이 부를 때만 경찰이 투입된다든지, 가능하면 자율로 해결하라는 원칙이 분규 현장에 적용되다 보니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현행법규를 어기며 행패를 부리는 일들이 방치됐습니다. 이를 감당할 수 없으니까 노동자가 요구하는 대로 임금 인상을 할 수밖에 없는 역학관계가 조성됐습니다. 公權力(공권력)은 일종의 법이고, 법은 엄중하게 적용되어야 하는데, 犯法(범법)현장을 방치했고, 그 결과 임금이 상승하여 高비용 低효율의 사회구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 아니냐 하는 의견이 있는데요.
 
  『그런 견해가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설명을 하기 전에 우선 준비된 내용부터 읽고 설명하기로 하지요』
 
  盧대통령은 준비된 자료를 꺼내 육성증언을 시작했다. 자료에는 「민주화의 진통 시작되다」 라는 제목이 달려 있었다.
 
 
  스스로 민주질서 세우길 기대
 
  <민주주의의 실천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당시의 시대상은 질서 확보를 위한 행동을 민주주의를 역행하고 말살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민주질서란 官(관)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민 스스로가 자율적으로 세워 나아가야 하는데도 공권력에 대한 불신은 높기만 했다. 그래도 나는 우리 국민들의 교육 수준이 높으므로 적절한 동기만 유발하면 가닥이 잡혀갈 것이라고 믿었다>
 
  이 대목에서 盧 전 대통령은 권위주의 사회에서 민주화 사회로 가는 과도기의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했다.
 
  『6共 때 공공질서나 법질서를 엄격히 적용했다면 국가 질서가 완전히 무너지는 상황이 전개됐을지도 모릅니다. 법대로 하자면 위반자들을 잡아 넣어야 하는데, 학생 소요만 하더라도 현행법을 위반한 학생들을 다 잡아넣으면 형무소가 지금 있는 것보다 1백 배가 더 많아도 소용이 없어요. 그러니 뻔히 違法(위법)인 줄 알면서도 잡아넣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킬 수 없는 법을 만들어 왔다」 이렇게도 말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다시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으로 돌아가 본다.
 
  <한편으로는 노사분규가 도처에서 벌어졌다. 그 동안 억눌렀던 임금을 일시에 올리려는 근로자들의 욕구가 분출했다. 대부분의 기업이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간 버티기 힘들게 되어 결국 기업과 근로자가 모두 망하고 말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운동권, 在野(재야), 야당 정치권 할 것 없이 모두가 勞組(노조)측을 부추겼다.
 
  나는 먼저 기업인들이 성의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금 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에 기업인들이 최선을 다하고, 그 다음에는 나와 동지들이 기업인과 근로자들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勞使(노사)협상이 하나 둘 타협되어 나갔다.
 
  그렇지만 뚝 떨어진 국제경쟁력은 되살아 날 줄 몰랐다. 기술과 생산성이라도 올라가야 하는데, 기술과 생산성은 그대로이고 노임만 비싸니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기술과 생산성을 올리기 위해서는 경제구조 자체를 선진국형으로 바꿀 수밖에 없다고 판단해 거의 매달 관계자들을 소집해서 강조하고 독촉하고 격려했다. 금융 및 정책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어려울 것만 같았던 기술, 생산성에서도 서서히 그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경제가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민주주의도 질서를 지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을 때 하나의 위험한 집단이 등장했다. 북한의 金日成을 신봉하는 이른바 主思派(주사파) 학생들이었다. 민주주의 혼란기에는 이들과 같은 사람들이 활동하기 좋게 마련이다.
 
  순진한 학생들은 아직도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부정적이거나 애매모호했다. 또 자본주의 초기여서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갈등은 거의 적대관계에 가까웠다. 교수들은 학생들의 인기를 어떻게 얻을까 하고 눈치를 살피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참고 용서하고 기다리자
 
  <主思派 학생들은 이러한 사회현상을 교묘히 이용했다. 학생들을 비밀리에 모아 철저한 세뇌교육을 시켰다. 1990년도에는 焚身(분신)자살조까지 만들어 사회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당국이 이들을 힘으로 다스렸다면 이들의 저항은 더욱 심해져 불행한 사태가 오래 지속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들을 힘으로 다스리기보다는 이들의 실체와 부당성을 노출시켜 학생들 스스로가 과연 그것이 올바른 길인가를 판단하게 했다.
 
  그 결과 나약하기만 했던 교수들도 차츰 힘을 얻어 師道(사도)로서의 사명감을 갖기 시작했다. 학교가 정상을 찾아가면서 민주주의도 궤도에 올라갔다. 사회 곳곳이 민주화되면서 그들은 투쟁 목표를 상실했다.
 
  물론 민주주의의 옥동자를 낳기 위한 産苦(산고)는 이만 저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혼란과 무질서에 지친 국민들은 『軍 출신 대통령이 왜 저렇게 힘이 없나. 강하게 잡아야 하지 않는가』 하고 수군거렸다. 심지어 「물 대통령」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됐다. 듣기 거북한 것은 물론이고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참모들 보기가 민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힘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그 이상 쉬운 것이 없는 일이었다. 나는 민주주의가 힘으로 이룩될 수 있다는 데 懷疑(회의)를 가졌다. 「더 많은 희생과 代價(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 국민 스스로가 자유롭게 이룩한 진정한 민주주의여야 튼튼한 뿌리가 내려지고, 더 싱싱하게 자랄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었다.
 
  어느 날 기자 간담회에서 내가 『참용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대답하는 기자가 없었다. 나는 『참용기란 참고, 용서하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참석한 기자들은 그 의미를 되새기는 기색이 역력했는데 『이것이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나의 철학』이라고 덧붙였다>
 
  이어서 민주화와 관련된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어떻게 보면 6共시대는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체험적으로 교육받은 시기였습니다.
 
  『민주주의는 공짜가 아닙니다. 반드시 그에 합당한 代價(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지요』
 
  ―민주주의 실천 과정에서 임금 인상이 이루어지고, 또 法治(법치)가 파괴되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또 2백만 호 주택 건설을 했습니다. 이런 것을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그만한 돈이 비생산적인 면에 투입됐기 때문에 자원의 배분에 한계를 드러냈고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했다고 비판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 부담이 金泳三 정권으로 넘어가 무역 적자가 나기 시작한 것 아닙니까.
 
  『내 재임 중에 계속 무역적자가 생겼지만 金泳三 정부에 넘겨줄 때는 다시 흑자 상태로 인계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金泳三호는 순풍에 돛을 단 배」라고 몇 차례나 얘기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盧 전 대통령의 얼굴은 착잡한 표정으로 변했다.
 
  『경제의 거품을 걷어내고 임금 상승으로 인한 고난을 이겨내니까 기술수준이 뚝 떨어졌습니다. 그것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 무역수지가 회복되어 흑자 단계에서 정권을 인계한 겁니다. 그런 기조에서 제7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울 때 전문가들은 실제 성장률이 12∼13%도 가능하다고 했지만 우리가 7%로 억제하고 내실을 기하는 방향으로 긴축을 했습니다. 그런데 金泳三 정부가 억제했던 것을 일시에 풀어버리니까 우리가 거품을 걷어내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맸던 것이 무효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힘으로 통치하기는 쉽다
 
  ―저는 1987년 大選 때 盧 전 대통령을 지지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일단 당선된 다음에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민주 선거를 통해 출범한 정권은 국민이 정통성을 부여한 것이다. 대통령이 군인 출신이라 해도 민간인으로서 국민의 심판을 거쳤기 때문에 군사정권이 아닌 민주정권이다. 따라서 盧泰愚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사람들과는 함께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왜 盧 대통령께서 필요한 시기에 공권력을 발동하지 않느냐, 법대로 해야 되지 않느냐 하는 입장이 되었지요.
 
  『힘으로 질서를 잡으면 통쾌하기도 하고, 또 통치하기도 쉬워요. 검찰총장에게 「저 사람 잡아 넣어」 라고 하면 힘이 납니다. 그런데 「구속하지 말아라. 용서해라」 하면 어깨 힘이 빠지기 마련이죠. 우리 상황에서는 자생력을 기르는 단계를 겪지 않으면 진정한 민주주의가 어려웠을 겁니다』
 
  孫柱煥 전 장관은 盧 전 대통령의 독특한 리더십을 이런 말로 설명했다.
 
  『힘을 가진 권력자는 강하게 힘을 쓰는 것보다 절제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盧대통령은 군인 출신입니다. 군 출신 대통령이 힘을 억제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안목과 철학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당시는 많은 사람들이 盧 전 대통령이 힘에 밀렸기 때문에, 힘이 없기 때문에 공권력을 쓰지 못하는구나 라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그렇게 생각한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뭐든지 명분을 만들어 권력을 휘두른다는 것은 유혹입니다. 극복하기 힘든 유혹이지요』
 
  ―그러면 盧 전 대통령께서는 재임 중 한 번도 약하다든가, 불안감을 가져 보신 적이 없었습니까.
 
  『그런 감정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약하다고 불안을 느끼는 사람은 절대 국민 앞에서 「나는 힘이 없다」 이런 소릴 못합니다. 대신 「나는 끝까지 참는다, 나는 약하다」는 소리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강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6共 정부는 지식인들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해서 지식인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도 있었을 겁니다. 識者라는 것이 참으로 묘해. 이중적이지요. 그렇지만 국가의 방향을 정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또 識者들입니다』
 
 
  국민과의 약속은 지킨다
 
  5월3일.
 
  아침부터 기분 좋게 단비가 내렸다. 盧 전 대통령 자택의 정원은 집안 수리공사로 엉망이었다. 비가 오는 데도 내부에서 공사를 하는지 뚱땅거리는 소리, 그라인더로 뭔가를 갈아대는 파열음, 그리고 여기저기 자재들이 널려 있었다.
 
  이날 대화 주제는 중간평가에서 시작해 3당합당, 민자당 大選 후보 경선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盧 전 대통령은 준비된 자료 중에서 중간평가 관련내용을 꺼내 육성증언을 시작했다.
 
  <1987년 大選(대선)에 나서면서 나는 중간평가를 공약했다. 그것은 정치인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믿음이 매우 낮은 상황에서 신뢰도를 높여보자는 생각에서였다.
 
  특히 6·29 선언과 대통령선거 공약의 실천 여부를 중간평가를 통해 국민들로부터 확약받겠다는 욕심도 있었다. 大選 때의 공약사항을 실제 대통령에 당선되어 하나하나 챙겨 나가는 정치인, 정치 지도자들이 전 세계를 통틀어 별로 없다는 사실이 「내 자신은 꼭 이것을 실천해 보겠다. 국민들에게 한 번 보여줘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부추겼다.
 
  때문에 「대통령에 당선돼 올림픽을 마치고 국민과의 약속대로 중간평가를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은 1988년을 거쳐 1989년 초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물론 야당측에서는 중간평가를 하라고 요구했고, 여당에서는 「국민과의 약속이니 평가를 해야 된다」는 주장과 「엄청난 국력낭비이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엇갈렸다.
 
  그러나 국민과의 약속이라는 차원에서 나는 중간평가를 하기로 작정하고 청와대 참모들과 당에 『올림픽이 끝난 후 중간평가를 실시할 준비를 갖추라』고 지시했다.
 
  내가 중간평가를 공약할 때 신임투표를 염두에 두었느냐, 아니면 정책평가 개념으로 한 것이냐를 놓고 나중에도 논란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분명히 신임투표로 생각했다. 정책평가를 한다 해도 내 입장에서는 신임에 연관되게 마련 아닌가.
 
  내 개인적으로는 1987년 선거에서 『3金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이야기했던 만큼 중간평가를 통해 한 번 더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또 與圈(여권) 일부에서는 野圈(야권)이 5共청산 문제를 거세게 들고 나온 데 대해 중간평가로 그 공세를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野圈에서는 중간평가를 통해 이 정권을 몰아내자는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특히 金泳三 통일민주당 총재가 가장 강력하게 중간평가 실시를 요구했다.
 
  반면에 중간평가를 하지 말자는 반대론도 여야 모두에 있었다. 여권에서는 국가적으로 큰 혼란이 야기된다는 점과, 헌법상 문제를 제기했다. 중간평가를 하자면 국민투표의 방법으로 해야 하는데, 그것이 헌법에 저촉된다는 것이었다.
 
  야권에서도 金鍾泌 총재의 경우 違憲(위헌) 소지를 들며 중간평가를 반대했다. JP의 표현을 빌면 『헌법상 보장된 대통령 임기를 물리적으로 조정하려는 처사는 擧黨的(거당적)으로 반대한다』며 중간평가를 『헌법에도 없는 철없는 소리』라고 했다.>
 
 
  DJ와의 묵계설은 근거 없는 낭설
 
  <나는 이같은 찬반론에 대해 1989년 1월17일 연두기자회견에서 『…나는 지금 당장에라도 중간평가를 받을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간평가에 대한 시각이 混在(혼재)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행여나 憲政질서를 혼란하게 한다든가 국력을 낭비하게 한다든가, 국민화합, 민주주의와 나라 발전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이런 것들을 피하고 적절한 시기와 방법을 택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1989년 2월의 취임 1주년 기자 간담회에서는 『중간평가는 야당 총재와 회담 후 결정하겠다』고 밝히고 3월7일 金鍾泌 공화당 총재, 3월10일 金大中 평민당 총재를 각각 만난 것이다.
 
  金鍾泌 총재와 나는 「중간평가로 인해 정국이 극한 상황으로 치닫지 않게 노력한다」는 데 합의했다. 金大中 총재와의 회담 자리에서 金총재가 중간평가를 할 것이냐고 물은 데 대해 나는 『국민과의 약속이니까 해야 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金총재는 『중간평가를 국민투표의 방법으로 하는 것은 헌법 위반인데 대통령이 어떻게 헌법을 위반합니까』 하고 말했다.
 
  나는 이전에는 중간평가에 대한 법률적 측면에서의 문제점을 깊이 고려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金大中 총재와의 회담을 통해 그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일부에서는 金大中 총재와의 묵계설을 제기하고, 중간평가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돈까지 오갔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 金大中 총재측에서 違憲이라는 마당에 뭣 때문에 뒷거래를 하겠는가.
 
  나는 참모들을 통해 법조계 의견을 듣도록 했는데, 역시 문제가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大韓辯協(대한변협)은 3월18일 『막연한 중간평가를 위한 국민투표는 違憲』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 정치적으로 판단해 볼 때 중간평가에서 이겼다 해도 3金시대를 끝내기는 힘들 것 같았다. 3金이 물러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후퇴하지 않을 명분을 찾으려 할 경우 여야는 더 극한대립으로 치달아 결국 나라가 혼란스러워질 것이었다. 그래서 유보하기로 결심했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 보아도 잘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내 결심이 당에 잘 전달되지 않아 오해를 불러일으킨 일도 있다. 중간평가를 대통령의 신임과 연계시키지 말고 정책에 대한 평가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나는 그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이왕 하려면 국민투표로 해야 한다고 마음 먹었다.
 
  중간평가로 與小野大 국면을 극복하려고 생각했는데, 좀 더 깊이 생각하면 그것으로 극복할 수가 없었다. 아마 중간평가를 실시했으면 3당통합도 안됐을 것이다>
 
  이어서 중간평가와 관련된 내용을 주제로 대화가 이어졌다.
 
  ―1987년 12월12일에 중간평가 公約을 공표하실 때 참모들이 헌법과의 충돌 부분까지 충분히 검토를 못한 상황이었습니까.
 
  『그것까지는 검토가 안됐던 것 같아요. 그 때는 헌법에 위배된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DJ가 내 의도 꿰뚫어 봤다』
 
  ―중간평가 公約이 득표에 영향을 줬다고 보십니까.
 
  『글쎄, 그건 자신을 못 하겠군요』
 
  盧 전 대통령은 중간평가 문제에선 金大中 평민당 총재의 위헌 주장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했다.
 
  『당시만 해도 당에서는 「마, 이거 차고 나갑시다. 차고 나가서 3金을 완전히 퇴진시킵시다」 이게 당의 강력한 결의였어요. 그런 생각은 나도 없지 않았단 말이야. 중간평가 이놈을 가지고 與小野大를 극복해 나가자. 그렇게 되면 자연히 정계개편이 되지 않겠느냐. 이런 생각에서 강하게 밀려고 했는데 金泳三씨는 「중간평가를 하라」 이러고, JP는 반대하고. 이 상황에서 DJ가 「중간평가 하라」 이렇게 나왔으면 틀림없이 강행했을 겁니다. 그런데 (DJ가) 브레이크를 걸고 나섰어요. 나는 중간평가를 해서 3金을 완전히 물러나게 하겠다 이런 생각을 했는데 (DJ가) 내 의도를 꿰뚫어 본 것 같아.
 
  DJ가 「그거 헌법위반입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온 게 아니라 가볍게 짚더군요. 「대통령이 헌법 위반해서 되겠습니까. 違憲사항일 텐데요」 DJ의 그 말에 나는 「대통령 취임식 때 첫째로 헌법을 지키겠노라 선서를 했는데 어떻게 헌법을 위반하겠습니까. 그래선 안돼죠. 검토를 하겠습니다」라고 답변을 하면서 속으로는 「내가 저 사람한테 한방 먹었구나」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중간평가를 하면 자기 설 땅을 완전히 잃는다, 이걸 누구보다 정확하게 감지한 사람이 DJ구나, 이렇게 바로 보이더군요』
 
  ―金大中씨의 말이 중간평가 유보에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한 겁니까.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요. 안 그랬으면 다소 무리가 가더라도 강행했을 겁니다. 그런데 중간평가에서 승리하여 우리 뜻대로 되면 (3金씨들은) 「違憲이다」 이렇게 나왔겠죠.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DJ와의 묵계설이란 것은 성립될 수가 없는 겁니다』
 
  ―당시 중간평가를 위해 대책본부도 만들고, 朴泰俊씨가 중심이 되어 선거자금 5백억원을 모았는데 유보가 되니까, 그걸 줬던 기업인들에게 돌려줬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옆에 있던 孫 전 장관이 답했다.
 
  『그 때 제가 국회의원으로 당에 있을 때(편집자 注:당시 孫 전 장관은 민정당 정세분석실장이었다) 중간평가를 위한 선거자금을 당의 공식기구인 당 재정위원들 통해 일부 모금했던 기억이 납니다. 중간평가가 유보된 후에 돌려주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나를 편하게 해준 JP
 
  ―청와대에서 모은 게 아니고 당에서 모은 겁니까.
 
  『당에서 모으는 것은 한도가 있어요. 선거에서 몇십억은 모을 수 있을 겁니다』
 
  ―이때 金鍾泌 총재와 만났을 때 JP가 그 자리에서 공화당과 민정당의 합당 이야기를 꺼냈습니까.
 
  『그 양반은 (나를) 굉장히 편하게 해줬어요. 내가 취임 전에도 만났는데 마음으로 축하를 해 주고. 「국민이 직접 뽑은 대통령이니까 그 이상 정통성이 확보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소신껏 하십시오.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당당하게 말했어요. 그런데 합당 이야기는 안했을 겁니다』
 
  ―합당 이야기가 공화당 쪽에서 먼저 제의된 게 아닙니까.
 
  『어디서 먼저 제의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필요성은 다 알고 있었으니까』
 
  ―1988년 4월 總選(총선)을 全斗煥 전 대통령 재임기간, 즉 2월에 하느냐 아니면 4월에 하느냐로 의견이 갈렸지 않습니까. 지나놓고 아쉬워 하는 사람들 쪽에서는 2월에 했으면 大選 승리의 여세를 몰아서 與小野大는 안됐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는데요.
 
  옆에 있던 孫柱煥 전 장관이 말했다.
 
  『어느 시기를 택하든 당시 여당이 總選에서 질 것이라는 징후는 전혀 없었습니다. 투표 전날에도 관계기관의 분석은 압승이란 거야, 압승. 그래서 오히려 운동 강도를 좀 낮추자는 얘기도 있을 정도였죠. 그런데 전혀 의외의 결과가…』
 
  ―2월에 총선을 실시하면 全斗煥 현직 대통령이 공천권에 영향력을 행사할 우려가 있으니까 그걸 피하기 위해 4월로 정했다가 실패했다, 全 전 대통령 쪽에서 이런 요지로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게 잘못 전해졌을 거요. 全대통령 본인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리가 없다고 봅니다』
 
  다시 孫柱煥 전 장관이 말했다.
 
  『다음 대통령이 확정되어 있으니 차기 대통령 취임 후에 새 대통령의 책임 아래 여당 공천이 이루어지고 총선이 진행되는 것이 순리입니다. 퇴임을 목전에 둔 대통령이 공천권을 행사하여 선거를 한다는 것은 정치 道義(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또 해서도 안될 일입니다』
 
  ―全斗煥 대통령이 현직에 있을 때 두 분이 만나면 서로 말을 놓았습니까, 아니면 존칭을 사용했습니까.
 
  『대통령이 되면 私人(사인)이란 건 사라집니다. 公人(공인) 입장이 되기 때문에 둘이만 만날 때도 꼭 존대말을 쓰지요』
 
 
  내가 모른다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
 
  盧 전 대통령은 『지도자급 위치에 오른 분들 중 全대통령 만큼 노력을 많이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권위적인 면을 대단히 중시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권위라는 것은 체제유지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권위주의가 되면 비판이 많이 따릅니다. 그 양반(全斗煥)은 권위를 대단히 소중히 여기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런 성격이 한편으론 아쉬우면서도, 그런 면이 있기 때문에 모든 일을 무섭게 추진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인간에게 있어 콤플렉스는 말만 조금 바꾸면 사람을 뛰게 만드는 動力(동력)이 된다고 합니다. 혹시 盧 전 대통령께서는 스스로 어떤 콤플렉스가 있다고 보십니까.
 
  『내가 남보다 유능하다거나 똑똑하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내가 모른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성격입니다. 또 어떤 결함이나 약점을 감추려고 해본 적도 없어요. 여기 孫柱煥 장관도 있지만 재임 시절 장관들 앞에서도 「이건 내가 잘 모르니까 알기 쉽게 설명해달라」 하는 소릴 예사로 했어요』
 
  ―재임 중 대외행사에서 꼭 말씀자료를 보면서 대화하셨기 때문에 좀 부자연스럽게 보였다는 평을 하는 분들이 많던데요.
 
  『내가 재임 중에는 밤에 잠을 안 자더라도 수석 비서관이 준비해 준 말씀자료를 반드시 검토했어요. 대통령의 말 한 마디는 천금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검토해서 고칠 것은 고치고 첨가할 부분은 첨가해서 만들어진 자료를 놓고 그것을 중심으로 발언을 했습니다. 아무리 유능한 세계의 지도자들이라도 자료 없이 즉석연설하는 것이 제일 나쁜 점입니다. 나도 준비된 원고 없이 그냥 할 때도 가끔 있었지만 원칙은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시켰습니다』
 
  배석했던 孫 전 장관이 말했다.
 
  『말씀자료는 참모들이 일방적으로 작성하여 올리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께서 골격과 뼈대를 주시고, 거기에 참모들이 집을 짓는 겁니다. 그 자료를 대통령께서 보고 다시 추가와 수정을 거쳐 완성되지요』
 
  ―지금 말씀을 듣고 보니까 盧 전 대통령께서는 「발언」 때문에 말썽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金泳三 전 대통령의 경우 『가진 자들이 고통받는 사회를 만들겠다』 『음해세력』 『내부의 적』 『공무원들이 개혁에 동참 안하면 그만두는 게 좋다』 등등 여러 차례 발언 실수로 국민에게 충격을 주고 가슴에 상처를 준 바 있습니다.
 
  『물론 책임은 본인에게 돌아가지만 상당 부분은 그 분을 옹호한 언론인들이 져야 합니다. YS가 한참 정치인으로 성장할 때 수없는 발언 실수가 있지 않았겠어요? 그걸 그대로 보도해서 시련을 당하게 했어야 말이 무섭다는 것을 알고 조심했을 텐데, 언론이 아주 아름답게 만들었단 말이야』
 
 
  4·26 총선 패배 직후부터 합당 검토
 
  다음 주제는 1990년 신년 벽두를 놀라게 했던 3당 합당이었다. 盧泰愚 전 대통령은 1990년 1월 초,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보수 야당인 민주당, 그리고 신민주공화당과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한다는 이른바 3당합당을 전격 발표했다.
 
  이로써 與小野大 상황에 처해 곤란을 겪던 盧泰愚 정부는 일거에 안정의석을 확보해 國政운영에 숨통을 트게 됐다. 과연 3당합당은 어떤 과정을 거쳐 추진됐을까.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이 계속된다.
 
  <1987년 大選을 치르면서 나는 「이제 3金 시대는 지났다. 3金은 이번 大選에서 심판받아 청산될 것이다」라고 생각했고, 실제 그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 나는 6·29 선언 8개항을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실천에 옮길 것인가 하는 데 대한 지혜를 얻기 위해 자문팀을 만들었다. 거기에는 분야별로 많은 교수들이 참여했다.
 
  이 분들을 만나면서 나는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서먹서먹했다. 왜 그런지 알아 보았더니 그들 대부분이 대통령 선거 때 나보다도 상당수가 金泳三씨를 찍었다는 것이었다. 왜 金泳三씨를 선호했는지 이유를 물어보니 『金泳三씨는 민주주의를 할 사람』이라는 쪽으로 요약됐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 「아하,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3金시대가 끝날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짚어 봐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당초 3金시대는 지나간 것으로 간주해 國政 운영을 해 나갈 구상을 갖고 있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내 스스로가 브레이크를 걸게 되었다.
 
  다음으로 1988년 4월26일에 실시된 총선 결과 역시 나의 3金청산 생각을 바꿔 놓았다. 그래서 「3金시대를 청산하겠다는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이구나. 하늘의 뜻은 그게 아니다」 라고 여기게 되었다. 3당합당은 이런 생각들이 시발점이 되어 추진된 것이다.
 
  3당합당 이야기가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1988년 4월 총선 직후부터였다. 4월27일 여권 핵심간부들이 安家(안가)에 모여 4·26 총선 결과에 따른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합당」 이야기가 제안돼 갑론을박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달포쯤 지난 6월22일 金鍾泌 공화당 총재는 오스트리아 대사관저에서 서울에 주재하는 6개국 대사와 오찬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보수연합의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리고 열흘 후인 7월2일 내가 국회에 요청한 鄭起勝(정기승)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과반수(1백48표)에서 7표가 모자라 부결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與小野大의 충격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JP가 保革구도 제안
 
  <8월1일에는 金鍾泌 총재가 미국 방문 중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월셔 호텔에서 기자 간담회를 갖고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서는 盧대통령 임기 중 내각제 개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는 金鍾泌·金泳三·金大中 총재와 각각 영수회담을 갖고 시국안정과 서울올림픽 개최를 위해 超黨的(초당적)으로 협조해줄 것을 당부했다. 그런데 영수회담 자리에서 金鍾泌 총재가 『保革(보혁)구도로 가자』고 제안함으로써 공화당과의 합당을 위한 실무 접촉이 시작된 것이다.
 
  1990년 1월3일 나는 「이제 민생 경제문제 해결하자-과거문제 종결에 즈음하여 국민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對국민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사흘 전인 1989년 12월31일 全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으로 5共청산 문제가 종결되었으니 더 이상 과거문제는 재론하지 말자는 취지에서였다. 이로써 1989년 암울했던 청문회 정국은 기나긴 터널을 겨우 벗어났다.
 
  여야를 막론하고 보수세력들은 나라의 방향이 어디로 나아갈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 속에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1989년 한해 동안 많은 정치인과 각계 각층 인사들을 만나 정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우리나라의 정치풍토나 수준으로 보아 與小野大로는 정국을 끌어가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나왔다. 때문에 정계개편을 해서라도 여당이 다수당이 되어야만 안정된 정치를 해나갈 수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정치 지도자들의 성향으로 보아서는 金泳三 총재나 金鍾泌 총재가 모두 보수성향이었다. 따라서 민정·민주·공화 3당이 합당되면 가장 이상적이지만 金泳三 총재는 어려울 것이므로 공화당만이라도 합당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다 1990년 1월4일 金泳三 총재가 텔레비전 기자회견을 통해 地自制(지자제)에 앞서 政界(정계)개편이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했는데, 나는 이를 지켜보며 민주당 내에서도 보수연합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곧 金大中·金泳三·金鍾泌 등 3당 총재를 청와대로 초청해 개별 영수회담을 갖고 정계개편을 포함한 정국운영 전반에 관해 솔직한 의견을 나누기로 했다. 그리고 새로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 민정당 대표위원에 朴泰俊 의원, 사무총장에 朴俊炳(박준병) 의원, 원내총무에 鄭東星(정동성) 의원을 각각 임명했다.
 
  金泳三·金鍾泌 두 총재는 이틀 뒤인 1월6일 골프 회동을 갖고 「정계개편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 그런데 金大中 총재만이 반대의사를 갖고 있었다.
 
  나는 1월11일부터 야당 총재들을 초청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金大中 평민당 총재를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겸한 단독회담을 갖고 광주 보상문제, 民生(민생)문제 등 광범위한 주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DJ에게 먼저 합당 제의
 
  <그는 회담준비를 치밀하게 해 왔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제시하기도 하고, 내가 하는 말을 일일이 메모해 빠짐없이 확인했다. 國政 전반에 걸친 의견을 대통령에게 제시하고 거기에서 얻은 결과가 무엇이라는 것을 정리해 회담이 끝난 후 국민에게 발표함으로써 제1야당 당수인 자신의 의견을 최선을 다해 국정에 반영하게 한다는 이미지를 심으려는 의지가 역력해 보였다. 나는 그의 방식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듣던 대로 머리가 치밀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대화 중 『與小野大 정국을 이끌어 나가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디 합쳐 볼 생각은 없으십니까』 하고 가볍게 웃으면서 의중을 떠보았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의 심중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여당과 합친다는 말이 나오면 내 입장이 아주 어려워질 것입니다. 비록 與小野大의 4당 체제지만 협조할 것은 협조해 드릴 테니 이대로 끌고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합당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나로서는 앞으로 합당을 추진하더라도 특정 정당끼리만 비밀리에 상의하고 어느 당은 모르게 제쳐놓는 그런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면 당당히 하고 싶었다.
 
  원래 「보수」와 「혁신」은 합치기 힘든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金大中 총재가) 내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다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간평가를 유보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내가 國政을 편하게 펼쳐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 일도 있다. 견제할 것은 견제하고 협조할 것은 협조해 주는 자세야말로 민주주의에 있어서의 하나의 藥(약)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때문에 3당합당을 하면서 제1야당이 전혀 모르게 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차원에서나, 정치적인 차원에서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런 뜻에서 제1야당인 평민당 총재와도 가볍게나마 상의를 한 셈이었다.
 
  다음날인 1월12일과 13일 金泳三 총재, 金鍾泌 총재를 각각 만나 정계 개편, 地自制 실시, 선거공영제, 경제 사회현안 등에 대해 깊이 있게 논의했다. 특히 「보수대연합」 「온건 중도세력 총망라」 등에 대해 인식을 함께 했다.
 
  정계개편을 위해 합당하려면 3당이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나와 참모들은 YS와 JP를 접촉한 결과 그 가능성을 확신할 수 있었다. 또 대부분이 의원내각제를 선호하는 성향이므로, 그렇게만 되면 차기 大權(대권)이 YS에게 간다 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당 대표위원을 위시한 당직자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의사를 타진해 보았다. 모두가 나와 같은 의견이었다. 청와대 수석들도 마찬가지였다.>
 
 
  신당의 政綱은 의원내각제
 
  <그러나 이를 공개적으로 추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의 정치 풍토로 보아 공개적으로 해서는 될 일도 안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에 비밀리에 이를 추진할 실무급 책임자를 정했다. 청와대에서는 朴哲彦 정무1장관을, 당에서는 朴俊炳 사무총장을 지명해 합당작업을 추진하게 했다.
 
  이와 관련해 내가 내린 지침은 ▲색채는 보수 ▲정강은 의원내각제로 하고 ▲지도체제는 총재를 정점으로 각 당 1명씩 최고위원으로 협의체를 구성하며 ▲金泳三 총재의 위상과 대우를 배려하라는 것 등이었다.
 
  합당 추진에 있어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난점은 신뢰에 관한 문제였다. 수십년간 깊은 골이 패인 不信(불신)을 어떻게 해소하고 신뢰관계를 구축하는가가 문제 해결의 열쇠였다.
 
  나는 朴哲彦 의원에게 야당 총재들을 만나 6·29 선언에 임한 나의 심중과 그 이후 약속을 실천해 온 과정,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文民에게 정권을 넘겨 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 적어도 한 번은 역사에 책임을 져야 할 3金觀(3김관) 등에 대해 설명하고 이해를 시키라고 지시했다. 朴의원은 나의 뜻을 논리정연하게 이야기해 YS를 설득시켰다고 보고했다.
 
  나는 「하늘이 정해주신 길」이라고 믿었다. 10여 일간에 걸쳐 간접적이나마 여러 차례 대화가 오가면서 不信의 껍질들이 하나하나 벗겨졌다. 드디어 1월22일에는 나와 민주당 金泳三, 공화당 金鍾泌 총재가 청와대에서 9시간의 장시간 회동 끝에 3당통합 차원의 新黨(신당) 창당에 합의하고 각 당별로 5명씩 15명으로 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그리고 兩金씨를 좌우로 세워 국민 앞에 『우리는 정치 경제적 변화를 수용하고,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3당통합 차원의 신당 창당에 합의했다』고 전격발표했다. 1월25일에는 가칭 「민주자유당」 공동대표인 나와 金泳三, 金鍾泌 3당 총재와 15인 창당준비위원들이 청와대에 모여 창당 일정을 협의하고 창당에 앞서 단일교섭단체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예상했던 대로 金大中 평민당 총재는 3당합당을 반대한다면서 반대투쟁을 평화적으로 전개하겠다고 했다. 내각제를 지향한다는 내용이 발표에는 없었는데, 그 내용을 짐작한 평민당은 내각제 개헌 반대 1천만 서명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당시 우리는 「내각제를 지향한다」는 내용을 명시할 것을 검토했다가 그 眞意(진의)가 곡해되어 야당의 거센 반발에 부닥칠 우려가 있고, 또 대통령 선거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국민들의 정서가 아직은 직선제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거론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3당 총재의 각서에는 내각제를 명시해 놓고서도 이를 공개하지 않기로 합의한 것이다.
 
  합당 절차는 계획대로 진행돼 민정·민주·공화 3당은 2월9일 오전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회관에서 합당수임기구 합동회의를 열고 통합 신당인 민주자유당을 창립했다. 이로써 민자당은 2백16석(민정계 1백27석, 민주계 54석, 공화계 35석)의 국회 의석을 보유하는 거대 여당으로 공식출범했으며, 4·26 총선으로 탄생했던 4당구조는 양당체제로 바뀌었다.
 
  돌이켜 보건대 합당을 이룩함으로써 정국 안정은 물론이고 국민에게 공약한 사업들을 계획대로 추진할 수 있었다. 국민에게 공약한 민주화와 자율화, 그리고 주택 2백만 호 건설을 비롯한 큼직큼직한 국책사업, 방대한 사회간접자본 투자 등 모든 것들이 政爭(정쟁)에 휘말려 실현되지 못하게 되었을 때의 사회 불안을 무엇으로 메울 수 있단 말인가.
 
  YS의 경우 오랜 야당 생활에서의 투쟁 경험으로 인해 무리한 요구도 있을 것이고, 또 서로 융합하기 힘든 점 등도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나 자신이 「큰 용광로가 되겠다. 모든 것을 용광로 속에 안고 녹일 것이다. 참고 용서하고 기다리자」고 했던 다짐을 되새기며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신념을 굳혔다,
 
  그러나 합당 직후부터 어려운 고비가 닥쳐왔다. 내 북방정책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소련과의 修交(수교)를 위한 물밑 접촉이 한창 무르익어가고 있는 중에 YS가 소련 방문을 희망했다. 나는 북방정책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그가 소련을 방문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없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합당 후 처음으로 내세우는 부탁인지라 받아들이기로 했다(편집자 注: 金泳三 최고위원은 1990년 3월19일부터 8일간 소련을 방문했다. 金최고위원은 소련 방문 時 朴哲彦씨와 마찰을 빚는가 하면 고르바초프와 개별적으로 만나는 등 돌출행동을 했다).
 
  두 번째 고비는 우리 세 사람이 합당을 약속하면서 서명한 내각제 합의각서가 유출되어 중앙일보(1990년 10월26일자)에 기사화된 사건이었다. 그것은 의원내각제를 약속한 비밀문서로, 朴俊炳 사무총장이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유출됨으로써 내각제 의도가 조기에 노출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어떤 불행한 일들이 발생할까 걱정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YS가 유출사건을 「내각제를 기정사실화하려는 민정계의 의도적인 공작」으로 단정해 분노를 표시했다.>
 
 
  YS의 능력 誤判, 국민과 역사 앞에서 죄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기사가 나온 지 나흘째 되던 10월30일 당 지도부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마산으로 내려가 은둔해 버렸다. 나는 일이 고약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온 국민이 지켜보고 있으므로 자칫 잘못하다가는 창당하자마자 당이 분열한다는 좋지 못한 이야기가 나올 가능성이 있었다. 당에서는 金潤煥(김윤환) 의원을 마산으로 내려보내 YS가 오해를 풀고 하루 속히 黨務(당무)에 복귀하도록 종용했다.
 
  민정계 측에서는 『YS가 저렇게 안하무인격으로 돌출행위를 하는 것을 그대로 용납하면 당 기강이 문란해질 뿐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따끔하게 반성을 시키든가, 그렇지 않으면 떨어져 나가게 두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합당으로 인한 고비가 여러 번 닥칠 것을 각오하고 있던 터였으므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의 오해를 풀고 黨務에 복귀하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다. 국민 앞에 합당을 선언한 지 얼마 되었다고 벌써 깨지니 마니 하는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나는 金鍾泌, 朴泰俊 최고위원을 불러 나의 간절한 뜻을 전했다. 그들도 전적으로 동감하여 나의 뜻을 받들 것을 다짐하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YS는 마산에서 올라왔다.
 
  11월6일 나는 金泳三 대표최고위원을 청와대로 불러 내각제 합의각서 유출로 생긴 그 동안의 오해를 풀고 당 내분을 수습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논의했다. 원만한 결론을 얻기 위해서는 참기 어려운 인내심이 요구되었다.
 
  당시 나의 마음 속에는 YS를 여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만들려는 구상이 서서히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나는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했으므로, 그 약속을 실천하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내가 말하는 징검다리 역할이란 내 다음 대통령 후보는 軍 출신이 아닌 민간 출신으로 하겠다는 취지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때 순수 민간 출신인 張勉(장면) 총리가 정부를 이끈 적이 있긴 하지만 국가경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나는 그 이유가 국가 경영에 대한 노 하우가 쌓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6·29 선언 이후 5년 정도면 경륜을 쌓고 올바른 위기관리 능력을 갖출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입장에서 나는 다음 대통령감으로 YS를 지목했다. YS는 大選에서 나 다음으로 표를 많이 얻은 후보인 데다가 자문교수를 비롯한 識者들의 평가가 가장 나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IMF 사태를 초래한 것은 어쩔 수 없는 하늘의 뜻인지도 모른다. 나는 한편으로는 역사와 국민 앞에 죄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大權 가까이 오자 마음 바꾼 YS
 
  3당합당과 관련된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에 이어 관련내용을 주제로 대화가 진행됐다.
 
  ─지금 들으니까 1990년 1월에 들어가 3당합당이 본격화된 것으로 말씀하셨는데요. 사실은 그 전에 이미 朴哲彦, 金潤煥, 朴俊炳 이런 분들이 야당측과 활발한 접촉을 하지 않았습니까.
 
  『1989년에 청문회 정국을 겪으며 與小野大라는 어려움을 뼈저리게 실감하면서 개별접촉은 있었으리라 보는데, 이것이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진행된 것은 아닙니다. 5共청산이라는 무거운 짐을 정리하는 데 큰 에너지를 소모했고, 전임 대통령을 백담사로 은둔케 하고, 그 열악한 여건 속에서 고생시키는 것이 참으로 고통스러웠어요. 밤에 잠도 잘 수 없을 정도였지. 겨우 연말에 가서야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기 때문에 그 전에는 합당을 주제로 움직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金泳三, 金鍾泌 총재 두 분에게 합당 이야기를 꺼낸 것은 1월12일∼13일 이때가 처음입니까.
 
  『내가 두 사람을 불러서 논의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지만 개별적으로 그 전부터 왔다갔다 했을 것으로 봅니다. 1989년까지 우리 당의 분위기는 「JP와 합당은 쉽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버티기 힘들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YS까지 끌어 안아 보수대연합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YS가 동의하겠는가」 이런 견해였어요』
 
  ─1월12일에 金泳三 총재와 만났을 때는 내각제까지 합의가 됐습니까.
 
  『내각제가 구체적으로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내 생각에 金泳三씨는 원래 내각제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전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내각제 문제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배석한 孫柱煥 전 장관은 『앞서 盧대통령께서 증언하신 내용 안에 1월22일의 세 분 회담에서 처음부터 내각제가 합의됐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고 답변을 거들었다.
 
  ─당시 金泳三씨 하면 「의회주의자」라는 평판이 있었기 때문에 내각제주의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요. 민정당 쪽에서 金泳三씨 성향에 대해 오판한 것이 아닌지요.
 
  『오판했다고 보지는 않아요. 의회주의자 성향은 맞는데, 권력이 가까이 오니까 YS가 생각을 바꾼 것 아니냐 나는 그렇게 봐요』
 
  ─金泳三 전 대통령측에서는 자기가 대통령을 쟁취했다고 주장합니다. 朴哲彦 정무장관을 공격해서 물러나게 했고, 마산에 내려갔다 와서는 盧 전 대통령과 합의하여 「내각제는 국민이 원치 않으면 추진하지 않는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거든요. 그러니까 盧 전 대통령께서는 3당합당의 기본인 내각제까지도 양보한 것입니다. 전술적 수정이 아닌 전략적 퇴각이지요.
 
  『그것은 전략적 후퇴라기 보다도 일이 아주 고약하게 돼버렸단 말이오. 내각제를 한다는 비밀협정이 무너져 버렸단 말야. 그러니까 YS는 「나에게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 일부러 노출시켰다」 이렇게 나왔어요』
 
 
  합의각서는 누가 유출시켰나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孫柱煥 전 장관은 이런 요지의 보충설명을 했다.
 
  <1990년 초 3당통합의 막후 협상과정에서 내각제 추진을 통합의 대전제로 여기고 있던 민정당과 공화당은 金泳三 민주당 총재에게 내각제 개헌을 수락하도록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대통령제 고수를 간직한 金총재는 『개헌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라는 이유를 들어 난색을 표명하다가 통합의 필요성 때문에 일단 표면적으로 이를 받아들여 기자회견을 통해 『내각제 개헌 논의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애매모호한 입장을 받아들였다.
 
  1월22일 통합 선언 이후에도 당시 金최고위원이 내각제 개헌에 적극적 의사를 나타내지 않자 민정계와 공화계는 내각제 개헌 추진을 위해 최고위원 3인 명의의 각서 작성을 은밀히 추진했다. 그러나 金최고위원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진전을 보지 못하자 민정계와 공화계는 5월9일 제1차 전당대회를 그 轉機(전기)로 삼았다.
 
  전당대회 직전인 1990년 5월6일 朴俊炳 사무총장이 각서 원본을 들고 상도동으로 金최고위원을 방문하여 서명을 요구했다. 金최고위원은 이 자리에서 30여분간 서명을 거부했다. 그러나 朴총장은 『전당대회에서 金최고위원이 맡기로 되어 있는 대표최고위원 자리를 경선하자는 주장이 민정계에서 나오고 있는데, 이는 金최고위원이 내각제 추진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움직임이 계속될 경우 전당대회에서의 「반란」을 배제할 수 없다는 朴총장의 압력에 金최고위원은 할 수 없이 서명했다….
 
  (각서유출과 관련하여) 朴총장은 10월27일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밝혔다.
 
  『내가 내실 서랍에 보관하고 있던 사본 1부가 6월 초 며칠간 없어졌다가 되돌아왔다. 그 서랍에는 자물쇠가 없었고, 내 방 열쇠 관리도 부실했다. 각서가 들었던 봉투는 스카치 테이프로 봉해져 있었는데 이것이 뜯어져 있었다』>
 
  ─내각제 합의각서는 朴俊炳 사무총장이 정치적 계산을 해서 고의적으로 유출시킨 것 아닙니까.
 
  『그게 나쁘게 말하면 정치적 음모설인데, 朴俊炳씨는 그렇게 할 사람이 아닙니다. 또 거꾸로 YS측에서 그것을 어떻게 유출시켜서 내각제를 깨버리려고 한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한테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孫 전 장관이 보충해서 답변했다.
 
  『이 보도가 내각제 추진을 어렵게 하느냐 쉽게 하느냐 그것을 분석해보면 적어도 朴俊炳씨가 의도적으로 그 서류를 유출시켰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소위 「노란봉투」 사건 내막
 
  ─그리고 金泳三 최고위원이 朴哲彦 정무장관과 티격태격할 때, 흔히 언론에서 「노란봉투 사건」 이라고 하는 게 있었습니다. 안기부에서 작성한 「金泳三 최고위원의 최근 특이동향」이라는 보고서를 입수한 金최고위원이 이것을 노란봉투에 담아가지고 청와대를 찾아와 盧대통령에게 高聲(고성)으로 격하게 항의했다는 겁니다.
 
  『허허허 그런 사실은 있을 수도 없고, 그저 뭐 무슨 드라마 라디오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라디오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연극 대본같애. 도대체가…. 그것도 하나의 다큐멘터리 아냐? 그걸 검증 없이 지 멋대로 하나. 난 그걸 도대체 이해를 못하겠어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기사가 金泳三 측근 쪽에서 이야기한 것이 기정사실로 되어 가지고 지금까지 언론에 되풀이 전해져 내려오는데요. 그래서 이 부분을 확실히 밝혔으면 합니다.
 
  『그건 내가 좀 설명을 하지. 내가 대통령을 할 때 YS가 週例(주례)보고를 했고 또 특별한 일이 있으면 만났지만 YS가 굳어져 가지고 말도 잘 안하고 삐껴가지고, 이런 어려움을 겪은 것은 마산 내려갔다가 金潤煥씨가 내려가서 불러올려 가지고 청와대에 들어와 설득을 시키는데, 그 때 상당한 곤욕을 치른 것은 내가 기억을 해요. 조금 더 부연하자면 (YS가) 마산에 내려갔을 때 「YS 버려버리자. 잘됐다 버려버리자」 이런 의견이 많이 들어왔다고.
 
  내가 왜 그렇게 할 수 없었느냐. 천하 세계에다가, 3당 통합이라는 명분을 걸어놓고 이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지 않나 이거야. 이런 명분에서, 이런 목적에서 나라 역사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통합하겠습니다. 이게 엊그제 같은데 내부의 일로 속이 상했다고 해서 「그래 네 갈 길로 가라」 이게 되겠느냐. 이것은 국민과 역사를 우롱하는 짓이다. 처음부터 안할 바에야 모르겠지만 역사 앞에서 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런 어려움을 극복을 못해서 그대로 깨버리면….
 
  특히 대통령 입장에서는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YS가 완전히 사람이 미치지 않은 이상에는 생각을 고쳐 가지고 원래 우리가 목적한 대로 걸어가야 한다. 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YS는 자기를 올가미로 묶어 가지고 그러려는 짓이 아니냐 이런 생각을…. 金潤煥씨가 많이 설득을 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왔더라고. 그래서 「그게 아니다」 라는 것을 설득했어요.
 
  내가 이제 「YS 입장을 이해해야겠다」 라고 생각한 것은, 야당 지도자들이 과거 속이고 속는 정치풍토에서 남을 불신하는 것이 체질화돼 있다. 그래서 아무리 내가 진실된 이야기를 해도 저 사람은 믿지 않는다. 내 입장 같으면 괘씸하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과거에 그렇게 당했기 때문에 저런 것이다. 이렇게 측은한 생각이 함께 들고 이랬기 때문에 어떻게 하더라도 진심을 보여야지, 또 이런 취지를 金鍾泌, 朴泰俊 최고위원들에게도 그 얘기를 했을 것이오. 그 사람들도 똑같은 심정이에요. 나하고. 아무리 튀더라도 우리 달래자.
 
  그렇다고 해서 YS가 거기서 고함을 고래고래 질렀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고. 그저 입을 꽉 다물고 있었던 거예요. 뭐라고 해도 대답도 안하고 말이야. 아마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거라. 몇 시간 걸렸을 거야. 이래 가지고 겨우 설득을 시킨 거야. 그게 제일 어려웠다고. 나머지는 뭐, 그래 저거는 있어. 내(나)한테 와 가지고 인사한다는 것이 그저 약간 고개를 숙일까말까 이런 거지. 金大中씨도 오게 되면 정중하게 인사하고 다 이렇게 하는데, 그런 건 좀 뻣뻣한 점이 있었어요. 나머지 뭐 불손스러운 자세라든가 이런 거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안기부에서 중요 첩보가 빠져나갔다
 
  ─모임에서 노란봉투 들고 와서 개봉해 가지고 들이댄 적이 없었습니까.
 
  『없어, 없어』
 
  ─근데 경향신문 기자가 쓴 「청와대 극비문서」라는 책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에 열을 받은 盧대통령이 주치의에게 우황청심환을 달라고 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전혀, 전혀 없어』
 
  ─그럼 노란봉투를 놓고 나왔습니까. 분명히 항의를 하긴 했을 것 같은데.
 
  『노란봉투를 내가 기억나(하)는 것은, 「당신 왜 메모 안해」 YS가 내(나)한테 이렇게 주의를 여러 번 받았다고. DJ는 오게 되면 좍 메모 다 하고 자기 얘기 다하고 하는데, 이 사람은 무슨 머리가 천재라도 그럴 수 없었을 터인데 메모 하나도 안하고 당에 가서 자기 멋대로 지침을…. 확인을 해 보면 말야. 그걸 내가 여러 번 지적했어요. 「메모를 하시오」 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어요. 그래서 가져 온 것이 메모한다고 봉투를 가져 온 거야』
 
  ─이 문제를 가지고 제가 盧在鳳(노재봉) 당시 비서실장과 徐東權(서동권) 당시 안기부장에게 확인을 해보니까 徐부장 이야기로는 안기부 자료가 金泳三씨에게 넘어간 유출경위를 조사했고, 누가 누출시켰는가까지 파악을 했는데 그냥 덮었다고 하던데요.
 
  『가만 얘기를 들어보니까 바람직스럽지 못한 것이지만 안기부라는 기관이 선이 많아. 그래 가지고 與野 할 것 없이 중요한 첩보가 빠져나간다는 이야기를 내가 직접 보고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돼요. 내 후계가 YS가 될 거다 하면 우리나라 수준과 풍토에서는 중요 기관에서 자연히 그쪽에 충성하는 사람이 생긴단 말이야. 청와대에도 생긴다고 했잖아. 그때 안기부장 입장에서는 중요한 문서가 빠져나가니까 조사해라 이렇게 된다고. 틀림없이 그런 게 있었을 거야. 그래서 누출 경위를 조사한다는 사실이 그쪽 귀에 들어가면 이 내용이 에스컬레이트 되는 거지요』
 
  ─대통령께서 워낙 여러 일을 하시니까 기억 못하실지 모르지만 盧在鳳씨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더군요. 어느 날 盧대통령이 오시더니 「金泳三 대표에 관한 무슨 보고서를 본 적이 있느냐」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통령께서 보시고 넘겨준 보고서를 다시 보니까 거기에 「金泳三 대표최고위원 특이사항 보고」란게 있더랍니다. 비서실장에게 그 보고서를 찾아보라고 지시하신 것은 金泳三 대표에게 무슨 불평을 들었기 때문에 확인하는 의미에서 그런게 아니냐, 저는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청와대에서 문서가 유출된 게 아닌가 걱정했답니다.
 
  『내가 아까 이야기한 그런 일은 가능할 거구만』
 
 
  YS와의 週例회동은 후계자 교육이었다
 
  ─3당 합당 과정에서 롯데그룹의 辛格浩(신격호) 회장이 중간에서 메신저 역할을 했습니까.
 
  『辛格浩씨가 특별한 역할을 하지는 않았지만, YS에 대해 괜찮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느냐 이렇게 생각됩니다. 참 희한한 것은 내 참모 중에서 제일 적극적으로 (金泳三씨에 대해서) 건의한 것이 朴哲彦씨야. 그 때가 아마 둘이 제일 (사이가) 좋았던가 봐요』
 
  ─金泳三 대표가 마산에서 돌아온 후부터 週例회동을 시작했습니다. 盧 전 대통령께서는 週例회동을 통해 金泳三 총재를 대통령감으로 교육을 시킨다는 뜻이 있었습니까.
 
  『그렇지요. 외교와 안보는 어떤 것이다, 또 경제는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다 등등 國政을 펼쳐나가는 사항을 하나하나 들어가며 이렇게 저렇게 설명도 해주면서 이야기를 나눈 거지요』
 
  ─정치에 대해서는 그 분이 경험이 많으니까 곧 이해를 했겠지만 경제나 외교, 군사,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이해가 빨랐습니까.
 
  『당시에는 이해를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모르겠어요. 그 양반은 과거에 군대도 가지 않은 입장이니까 안보는 상당히 중요하다 해서 내가 핵심부분부터 설명도 하고 이해를 시키고 했어요. 이만하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까 이해를 올바로 했으면 그렇게 했겠느냐 싶어』
 
  ─1990년 봄에 鄭鎬溶씨가 대구 補選(보선)에서 출마하겠다고 하자 안기부가 출마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부인이 자해소동을 일으킨 적도 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안기부가 아직도 정치에 개입한다는 사실이 노출됐는데요.
 
  『5共청산 협상에서 鄭鎬溶씨를 물러나게 한다는 게 조건이었죠. 鄭鎬溶씨 출마를 방치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金大中·金泳三 총재와의 약속을 깨뜨리는 거지요. 鄭鎬溶씨가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약속은 내가 이행을 해야 될 게 아닌가. 그래 당분간 물러나 있으라 한 겁니다』
 
  ─내각제냐 대통령 중심제냐 하는 것이 지금까지도 팽팽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사실 저 자신도 오늘 아침은 내각제가 그럴 듯한데 내일은 대통령제로 계속 가야 된다 이런 생각도 들고 해서 판단을 내리기가 힘든데요.
 
  『다 일장일단이 있지만 훌륭한 인물이 대통령이 되면 그 인물의 능력과 인품에 대통령제의 장점이 합쳐져 큰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엔 나라에 큰 위험부담이 됩니다. 이렇게 될 바에야 집단으로 함께 책임을 지는 체제가 낫지 않느냐. 또 우리나라 정치사의 흐름이 과거에는 개인의 카리스마라는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거든. 그런 카리스마를 가질 수가 없고, 카리스마가 훌륭한 힘을 내는 그런 시기가 지나버린 겁니다. 게다가 권력의 속성은 이걸 갖고 싶지 누구에게 주고 싶지가 않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자꾸 문제가 생깁니다. 물론 내각책임제도 정치투쟁만 하고, 속시원한 결론을 못 내리는 것이 하나의 단점이지요. 그러니까 어느 것이 최선이냐 이것을 딱 부러지게 얘기할 수 없어요』
 
 
  5년 단임제 下에선 대통령이 허전하다
 
  ─우리나라는 국가적 통합의 상징인 國王도 없고 분단 상황이니까 내각제를 채택하더라도 대통령이 외교나 군사문제를 직접 챙기는 일종의 이원집정제적인 요소가 가미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때만 해도 내각책임제가 월등 좋다 해도 국민의 뜻이 「대통령은 내 손으로 직접 뽑겠다」 하니까 아무리 제도가 좋아도 그걸 택할 수가 없어요. 이제 다섯 명의 대통령을 직접 뽑아 겪어보고 있으니 국민들도 대통령 직선제의 장단점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 우리가 채택한 대통령 직선, 5년 단임제는 여러 가지 모순이 있어요』
 
  ─모순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어떤 점입니까.
 
  『대통령이 통치를 잘 하고 못하고를 평가 받을 기회가 없어요. 평가를 못 받게 되면 책임도 없어져버리고, 임기가 지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 위험이 있지요. 대통령 5년 하면 그만이니까 밑에 거느리는 사람은 기회가 이번밖에 없다. 이렇게 되니까 여기에 따르는 부작용이 확대되어 간다 이 말이지요』
 
  ─열심히 일하면 다음에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가 말하자면 일을 하는 동기부여를 하는 것인데, 평가받을 기회도 없이 물러나면 좀 허전하겠습니다.
 
  『全대통령도 私席(사석)에서 그 얘길 많이 했어요. 아, 이렇게 하는 게 대통령이구나. 이제 일할 능력 갖췄다고 생각하는 순간 임기가 끝난다는 거지요』
 
  ─盧 전 대통령께서 하신 두 가지 정치적인 큰 승부가 6·29 선언과 3당합당입니다. 6·29 선언은 성공했지만 3당합당은 지금까지 정치사적으로 성공이냐 실패냐가 애매한 상황이 됐습니다. 3당 합당의 이념이 실종됐기 때문이지요.
 
  『성공은 성공인데, 그 성공의 선을 지속화시키지 못한 겁니다. 그러니까 전쟁에서도 城(성)을 점령하는 자체는 성공했지만 그걸 계속 守城(수성)해 가느냐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3당합당이라는 안정된 구도가 영속되지 않은 이유는 합당 자체가 호남 대 非(비)호남 구도였기 때문에 지역감정을 융화시키는 장치가 없었던 게 한 가지 원인이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원인이 되겠지만 (YS측이) 정책과 이념을 함께 한다는 차원에서 통합한 게 아니라 권력쟁취의 방편과 수단으로 통합한 것이 부서진 하나의 원인이 아니냐 이렇게 봐요』
 
  ─金泳三 대표가 대통령이 되는 분수령은 결국 마산에 내려간 것이라고 봅니다. 金대표를 설득해서 모셔다가 다독거리고, 또 週例회동 이런 식으로 가니까 누가 봐도 차기 후보에 대한 盧대통령의 마음이 金泳三 대표 쪽으로 기울어졌다고 보인 것 아닙니까.
 
  『3당합당 때부터, 아니 「3金 청산은 하늘의 뜻이 아니다」라고 판단할 때부터라고 봐요. 그러면 3金 중에 누구냐 이렇게 물으면 YS라는 것이 스르륵 내 마음 속에서 답이 나왔어요』
 
 
  3金의 뿌리는 간단한 게 아니었다
 
  ─그 당시 盧 전 대통령께서 비판을 받더라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3金 시대를 여기서 끊겠다고 강력하게 추진했으면 3金청산도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나는 지금도 불가능하다고 봐요. (3金의) 뿌리가 간단한 게 아니더라고. 그걸 역사에서 제치고 나갈 수 없다는 게 지금도 변함없는 생각입니다. 결국은 우리나라의 운명이지요』
 
  ─金潤煥 사무총장이 그 무렵 盧 전 대통령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 代案(대안) 不在論(부재론), 3不可論 이런 주장을 하면서 金泳三 대표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밀었는데요. 盧 전 대통령과 사전 교감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일부러 내가 지시한 건 아닙니다. 자기가 자연스럽게 판단하고 내 마음을 읽어서 그렇게 했겠지요』
 
  ─그때 민자당 운영비는 대통령께서 직접 주셨는데, 金泳三 대표를 통해서 주었습니까. 아니면 사무총장에게 주었습니까.
 
  『사무총장에게 나가게 되어 있어요』
 
  ─월 20억 정도였습니까.
 
  『그런 건 내가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는 없는 거고. 당이 소위 운용할 만한 돈은 나갔지요』
 
  ─그때 월계수회라는 조직에 대해 반감이 많았는데요. 그 문제는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월계수회는 1987년 大選을 위한 사조직이었어요. 대통령 선거 마치면 해체되는 것이 원칙인데 내가 한 2년간은 용납을 했고, 사후관리에 내가 자금도 좀 줬어요. 그 월계수 조직을 朴哲彦씨가 자기의 어떤 욕심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해 나간다는 생각은 전혀 안했지.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비쳐지고, 실제 그렇게 나가는 것처럼 보이니까 문제가 됐지요. 그래 나중에 내가 해체를 시켰습니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선거를 통해서든 뭘 통해서든 자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어떤 조직이 형성됐다 하면 욕심 있는 사람은 그냥 안 놔두는 모양입니다』
 
 
  역사란 평가의 대상이지 심판의 대상은 아니다
 
  ─1989년 6共의 정치흐름에서 중요한 徐敬元(서경원) 의원 사건이 발생했고, 수사가 확대되어 金大中 총재와 직접 연결됐습니다. 전에는 정부와 평민당이 서로 협조하는 자세였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 보수세력의 평민당에 대한 시각이 나빠졌고, 그래서 3당합당도 평민당과 안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徐敬元 사건 당시 DJ가 뒤에서 돈을 줬니 받았니 이런 문제가 야기됐지요. 아마 양극체제가 엄존하고 있는 상태였다면 내 그냥은 안 넘겼을거요. 소련 연방이 무너지고 동구권이 붕괴되는 상황에서 과거 공산당들도 「그때는 공산주의가 좋은 줄 알았는데, 해보니까 시장경제체제가 낫더라」 이러면서 돌아오면 「참 고맙다, 잘됐다」 하면서 우리가 안아주어야지요』
 
  ─徐敬元 사건, 文益煥(문익환) 목사 訪北사건 등이 발생했을 때 金大中 총재와 자꾸 연결되는 듯한 조짐들이 나오니까 軍部나 안기부, 또 국가안보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盧 전 대통령께서 金총재에게 강경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건의를 했을 것 같은데요.
 
  『군부는 내 성향을 잘 아니까 자기들이 대통령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다」고 건의하는 일은 없었어요. 오히려 보수 우익의 학자나 언론이 소리를 높인 경우가 많았지요』
 
  ─全斗煥 전 대통령이 백담사에서 2년 남짓 살다가 歸家(귀가)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정치 지도자들에게 양해를 구한 겁니까.
 
  『내 입장은 1990년 1월에 담화를 발표했잖아요. 이제 모든 것을 이것으로 끝낸다, 담화 발표 후 즉시 (백담사에서) 내려와도 좋다 이런 자세를 취했지. 1989년 12월31일에 全대통령이 국회 증언을 한 다음에는 언제든지, 내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보호를 하니까 와주십사 하는 게 나의 자세였습니다. 나의 이런 의견에 金大中씨나 金泳三씨가 반대가 없었어요. 이런 뜻이 몇 번 오갔는데 (全 전 대통령측에서) 「지금 내려가면 안전하겠느냐. 시기는 내가 알아서 내려가겠다」 이렇게 된 거지요』
 
  ─당시 불교도들이 버스를 대절해서 全 전 대통령 강론 들으러 백담사 가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됐었습니다.
 
  『그 전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군 후배 崔世昌(최세창)씨가 백담사를 가려다가 혹시나 해서 李賢雨 경호실장에게 의견을 물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李실장이 「軍 후배들이 찾아가면 이 양반 더 어려워진다」 이렇게 답했다고 해요. 이것을 全대통령이 서운하게 생각했지. 한번 섭섭하게 되면 다른 건 다 잊고 계속 섭섭한 것만 생각나는 거라』
 
  ─1989년 12월31일 全 전 대통령의 국회증언으로 5共청산을 끝내고 희망찬 90년대로 가자 이렇게 됐는데 1994년부터 다시 12·12, 5·18 문제가 제기됐습니다.
 
  『내가 재판정에서 「역사란 평가의 대상이지 심판의 대상이 아니다」 이런 진술을 한 것이 외국 신문에 소개된 적이 있어요. 역사란 그런 것 아니겠소?』
 
 
  YS측은 차기 정권의 담보를 요구
 
  5월4일.
 
  盧 전 대통령과 孫柱煥 전 공보처장관은 박찬호 선수가 등판한 야구경기를 시청하고 있었다. 무사 1,2루 상황에서 강타자 세 명을 연속 삼진으로 잡아내자 盧 전 대통령은 『박찬호가 명예회복을 했구만』 하고 활짝 웃었다. 그 소릴 들으며 기자는 우리의 전직 대통령들은 언제쯤 명예회복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전날과 달리 화창한 날씨였다. 盧 전 대통령의 뜰에 서 있는 소나무에 바람이 불 때마다 송화가루가 날렸다. 오늘의 주제는 14대 大選과 중립내각. 盧 전 대통령은 준비된 원고를 꺼내 육성증언을 시작했다.
 
  <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92년 1월10일, 年頭(연두)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서 나는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는 黨憲(당헌)에 정해진 대로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서 競選(경선)에 의해 선출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우리 현실로 보아 합당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후계자가 부각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YS측에서는 후계구도가 조속히 가시화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합당 후에도 (우리측을) 확고하게 믿는 자세가 아니었다. 혹시라도 이용만 당하다 일정한 시기가 지나 「烹」(팽)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태도가 매우 못마땅했지만 야당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들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수십년간 속아 왔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식의 사고가 깊이 박혀 있는 듯이 보였다.
 
  나는 그 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직간접적으로 YS를 차기 후계자로 보장받고 싶어하면서 국민들에게도 그것을 기정사실화시키려고 애썼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우리 정치인들의 불신풍조에 대해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했다. 나는 그 책임이 어떤 면에서는 여당측에 더 크게 있다고 느끼기도 했다. 과거 여당측이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데서 연유된 불신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시대가 달라져 내 재임 중에는 그런 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달라진 시대에 대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나와 정부는 與野(여야)가 완전 합의한 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쳐 개정하고, 국민과의 약속 또한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 정부를 과거와 마찬가지로 생각해 자기 주장만을 관철시키려는 태도가 섭섭할 정도였다.
 
  나는 그들에게 한결같이 믿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 가슴에 도사리고 있는 의심을 말끔히 씻어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鄭周永 저지 대책」 승인 않았다
 
  <합당의 목적에 있어서도 서로간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나와 여당은 國政(국정)을 원만히 수행해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던 데 비해 그들은 차기 정권의 담보를 받고자 했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 合黨한 것이라면 국민 앞에 명분이 서는 일이지만 차기 정권 담보가 목적이었다면 야합으로 보일 뿐 국민들이 수긍할 리가 없었다.
 
  또 하나 대통령 선거에 큰 변수를 예고하는 움직임이 그 전 해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현대그룹의 鄭周永(정주영) 명예회장이 大權(대권)에 도전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편집자 注:鄭周永 명예회장은 1992년 1월3일 경영 일선에서 은퇴하고 新黨 창당 의사를 발표했고, 1월10일에는 가칭 통일국민당 발기인대회를 열어 창당준비위원장에 추대됐다. 5월15일에는 鄭周永 대표가 국민당 임시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아무리 내가 대통령이라 해도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을 물리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참모들이 건의한 「鄭周永씨 政界(정계)진출 저지방안」을 승인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 하지만 鄭회장의 政界 투신이 앞으로 적지 않은 혼란과 불안을 몰고 올 것이라는 걱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측근 가운데서 鄭회장과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을 불러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의 政界 투신을 막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조용하게 밝혔다. 그 측근은 나름대로 알아본 후 『뜻을 돌리기에는 이미 시기를 놓쳤습니다』고 내게 보고했다.
 
  당시 여당 내부의 움직임은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YS는 처음부터 大權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李鍾贊(이종찬) 의원은 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표면화시키지 않은 채 기회를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당 내의 대체적인 견해는 『YS가 순리』라면서도 그의 국가관리 능력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편이었다.
 
  나는 다음 후계자에 대해 공개적으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몇 가지 정해놓은 원칙들을 비공개적으로나마 밝혀 놓고 있었다. 첫째, 軍(군) 출신은 다음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없다. 둘째, 내 친인척 중에서 大權 후계자가 나와서는 안된다. 셋째, 여당 후보자는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자유로운 競選을 통해 결정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나의 뜻은 1987년 大選(대선) 당시 국민들에게 약속한 바를 그대로 지키겠다는 기본원칙에서 비롯된 것이다.
 
  1992년 3월에 있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YS 진영에서는 여러 채널을 통해 「대통령 후보가 總選(총선) 전에 可視化(가시화)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했다(편집자 注:1992년 1월7일 金泳三 민자당 대표는 『총선 전에 대통령 후보가 결정돼야 한다』고 공식 표명).
 
  이 문제에 대한 당이나 청와대 의견은 모두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대통령 임기가 1년 이상 남아 있는 시점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열어 후보자를 정해버리면 통치권의 누수현상은 물론, 14代 총선의 공천에도 혼선을 빚어 당의 단합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초래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의견을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 『3월에 총선을 치르고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는 5월에 여는 것으로 하라』고 원칙을 정해 주었다.
 
  3월 총선을 마친 후 나는 대통령 후보 경선이 민주적이고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당 元老(원로)들의 의견을 들어야겠다고 작정했다.
 
  그런데 면담을 시작하기도 전에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 터지고 말았다. 1992년 3월28일 YS가 내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후보 경선에 나서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바로 전날인 3월27일 나와 YS는 총선 후 첫 회동을 갖고 민자당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를 5월에 갖기로 합의했는데,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이 없다가 일을 벌인 것이다.
 
  가능한 한 대립을 피하고 원만한 타협을 통해 경선 절차에 따라 대통령 후보를 정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고 있던 내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더구나 내가 정한 원칙들은 YS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치고 나온 것이었다. 나는 몹시 당혹스럽기도 하고 화도 났다. 黨內(당내) 사정은 이 일로 인해 더욱 어려워졌다.>
 
 
  李鍾贊 후보, 경선을 거부하다
 
  <며칠 후인 4월2일 金泳三 대표가 週例보고차 청와대로 왔다. 그는 자신이 일방적인 행동을 취한 데 대해 깊이 사과했다. 만약 그가 야당 출신이 아니라 여당 출신으로서 그같은 행동을 취했다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야당 체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저지른 일이라고 이해해 그의 잘못을 논리적으로 따져 자신이 잘못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시키는 것으로 일단락지었다.
 
  나는 金대표에게 (경선이) 국민들의 관심이 지대한 사안임을 감안해 크고 관대한 모양을 보임으로써 국민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이제 겨우 잘 되어가는가 했는데, 대통령 후보 경선을 위한 전당대회를 불과 이틀 앞두고 李鍾贊 의원이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그리고는 이번 경선이 불공정하며 특정인을 당선시키기 위한 위장 경선이라면서 대통령 후보 경선을 거부하겠다고 공식선언했다(편집자 注:5월13일 李鍾贊 의원은 후보 경선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金泳三 후보 추대위」 해체 등을 요구했으며, 5월17 롯데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경선 거부를 선언했다).
 
  나는 역사가 내게 맡긴 과제는 「민주주의를 이 땅에 실천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생각했다. 진실로 민주주의를 실천하자면 수없는 결단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 결단의 모습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비쳐지게 마련이다. 참아야 하는 결단, 관용해야 하는 결단, 기다려야 하는 결단…. 이 모든 결단이 그 내용에 있어서는 더 어렵고 무서운 것이지만 사람들에게는 약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비쳐지게 되어 있다.
 
  민주주의가 무엇이기에 대통령이 이렇게 약하고 무른 모습을 보여야 되는가 하고 생각하면 화가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결국은 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입장에서 누군들 혼을 내지 못하겠는가. 눈을 부릅뜨고 화를 내기야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렇게 하면서도 나라를 위하고 정의를 위한다고 얼마든지 명분을 세울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 대통령이 참으로 속시원하게 잘 한다』는 평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렇게 할 경우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를 실천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아무리 거북하고 싫더라도, 또 인기가 없더라도 참고 용서하고 기다려야 했다. 결단력이 약하고 우유부단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마음 먹었다.
 
  경선을 위한 전당대회는 5월19일, 李鍾贊 후보가 경선을 거부한 가운데 예정대로 열렸다. 민자당 총재인 나는 이 대회에 참석해 치사를 통해 『공정한 경선이 되도록 최선을 다했으나 후보로 나섰던 동지 한 사람이 경선을 거부, 이 순간 나의 심정은 침통하기 이를 데 없다』고 말했다.>
 
 
  YS가 총리 교체와 거국내각 요구
 
  <金泳三 대표가 대통령 후보로 결정되기 전까지는 별의별 이야기가 많았지만 이제 결정된 마당에는 나가야 할 길이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최선을 다해 그를 대통령에 당선되도록 돕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달갑지 않은 일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선거 때가 되면 야권에서는 거국내각을 구성하라는 요구를 단골 메뉴로 내놓게 마련이다. 이번 大選(대선)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야당측에서는 공정선거를 보장하기 위해 거국내각을 구성하고 대통령이 당직을 내놓으라고 주장했다. 과거의 예로 보면 여당은 國政 차질을 내세워 이런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야권과 똑같지는 않았지만 예상 외로 많은 사람들이 改閣(개각)을 요구하는 분위기였다. 뿐만 아니라 1992년 8월31일에는 한준수 전 연기군수가 3·24 총선 당시의 官權(관권)개입 폭로사건으로 官權선거가 쟁점으로 떠올라 정부가 곤혹스런 처지에 몰렸다. 또 年初(연초)에 연기하기로 했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도 야당의 공격거리로 다시 떠올라 특단의 정치적 조치가 필요하게 되었다(편집자 注:金泳三 총재는 1992년 9월16일 기자회견을 갖고 연기군 사건과 관련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官權선거가 있었다는 심증을 갖게 됐다. 당시의 집권당 대표로서 감독을 철저히 하지 못한 데 대해 역사와 국민 앞에 사죄를 드린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YS가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적으로 총리 교체와 거국내각 구성을 요구하는 바람에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총리는 鄭元植(정원식)씨였는데, 어려운 시국을 슬기롭게 풀어나가느라 애쓰면서 당과의 관계에서도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었다. 그는 특히 90명의 우리 대표단을 이끌고 평양을 방문해 남북총리회담과 제8차 남북고위급 회담(1992년 9월15일∼18일)을 진행해 화해·불가침·교류협력 등 남북이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의 3개 부속합의서와 화해공동위 구성 운영 합의서 등 4개 문건을 쌍방 총리의 서명을 거쳐 발효시키고, 공동위원회를 11월 중에 가동하기로 합의하는 등 역사적인 결실을 얻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YS 진영의 총리 교체요구에 너무도 실망해 이 사람들이 과연 국가의 장래를 진정으로 생각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국가 운영과는 관계없이 모든 초점을 선거에 맞추어 새로운 이미지를 부각시키거나 충격을 던져 국민들의 기대와 관심을 집중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6·29 선언을 발표해 국민들의 의표를 찔러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던 것처럼 YS도 그런 거리를 찾느라 골몰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중립내각 위해 黨籍 버리다
 
  <그런 상황에서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대통령인 내가 黨籍(당적)을 떠나 명실공히 중립내각을 구성해 官權의 개입을 차단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선거 문화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것이 6·29 선언으로 시작된 나의 민주화 과업을 명예롭게 마무리짓는 일이라는 생각이었다. 야당이 아무리 중립내각 구성을 외쳐대도 현실적으로 정부와 여당이 이를 받아 들이리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는 선거에 임하는 국민들의 의식을 분석해 보았는데, 국민들의 의식 수준은 과거와는 판이하게 높아져 있었다. 官權을 이용하던 과거에는 여당이 유리했지만 오늘날에는 官權을 이용하다가는 오히려 여당이 불리해질 수 있다고도 판단되었다.
 
  나는 나의 당적 이탈과 중립내각 구성에 관한 문제에 대해 몇몇 측근들과 긴밀히 상의했다. 그들 의견은 찬반으로 엇갈렸는데 결론적으로는 내가 어떻게 결심하든 따르겠다는 입장이었다.
 
  나는 9월18일 오전 金泳三 총재를 불러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했다. 내 의견을 경청한 金총재는 공감을 표시했다. 특히 『내가 이런 조치를 취한 가운데 金총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야 정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당선된 대통령으로서 야당 아니라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떳떳하고 당당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 그래야 부담없이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강조하자 그도 전적으로 공감했다.
 
  나는 또 『그대들이 改閣(개각)을 요구하고 있으므로 나의 중립내각 구성은 빠를수록 좋다』고 밝히고 민자당에도 내 결심을 통보했다. 나는 공정한 선거관리를 위한 중립적인 선거관리 내각의 구성과 운영에는 어려움도 적지 않겠지만 6·29 선언을 하던 그 당시의 심정과 각오로 결연하게 실천해 나가겠다고 결심했다.
 
  다음날인 9월19일 오전, 나는 청와대에서 임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나의 탈당 및 중립내각 구성 방침을 설명한 뒤 『내 결단을 깊이 이해해 사명감을 갖고 결연하게 실천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공보처가 전국의 20세 이상 成人(성인) 남녀 8백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81.5%가 중립내각 구성 조치를 환영했다.
 
  10월2일에는 청와대에서 金泳三 총재와 만찬 회동을 갖고 중립 선거내각 구성 문제를 집중논의했다. 金총재는 내가 구상하고 있는 원칙에 합의하고 개별적인 각료 추천은 사양하면서 전적으로 내게 일임한다고 했다.
 
  다음날 나는 정무수석을 통해 야당측에서 추천하는 인물이 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케 했는데, 야당측에서도 대통령의 권한을 존중하는 뜻에서 人選(인선)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혀 왔다는 보고였다.
 
  10월5일 오전 나는 민자당 黨舍(당사)를 방문해 정식으로 탈당계를 제출하고 金泳三 총재 주재로 열린 확대 당직자 회의에서 『민자당은 떳떳하고 당당하게 국민의 심판을 받아 역사 앞에 한 점 부끄럼 없는 결실을 거두어 주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내가 만든 당을 떠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아쉬움과 착잡함이 가슴을 아프게 했지만 억지로 이를 참아 냈다.
 
  작별 인사를 마치고 당직자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를 나눌 때 대부분의 당직자들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특히 1987년 大選 때 나와 함께 뛰었던 당직자들은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나도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모두가 필요로 하고, 아쉬워할 때 물러서는 것이야말로 어렵지만 잘하는 일이라고 확신하며 마음을 달랬다>
 
 
  李鍾贊 의원으로부터 수모당해
 
  14대 大選과 관련한 盧 전 대통령의 증언은 여기서 끝났다. 이어서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李鍾贊씨가 (대통령 후보 경선을) 사퇴한 명분이 제한경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朴泰俊씨의 출마를 포기하도록 李相淵(이상연) 안기부장이 압력을 넣었다는 이야기인데.
 
  『YS가 이렇게 (3월28일에) 돌출행동으로 차고 나왔잖아요. 이게 어떤 문제로 내가 어렵게 됐냐면, 차고 나간 이튿날 李鍾贊씨가 찾아왔어요. 자기도 경선에 나서겠다, 대통령에게 임하는 자세가 고약하게 되어버렸어요. 「허락해 주십시오」 이게 아니라 통보야. YS가 길을 텄으니, 生의 선배요, 학교 선배요 모든 입장이 그런 나에 대해서도, 그러니까 어떻게 말하면 「당신 그것 왜 제지 못했나. 못했으면 당신 자격 없소」 이런 말과 마찬가지로 내가 수모를 겪은 거요.
 
  李鍾贊씨가 군부의 장군까지는 안됐지만은 따지고 보면 군부 출신이다 이 말이야. 내 후배고 이렇기 때문에 내가 구상하는 후보군 속에 들어갈 수가 없어. 직접적으로 얘기하진 않지만 간접적으로 「이제 순수 민간 출신이 國政의 책임을 몇 번 맡아보면 과거 군부 출신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희석되고 이해되고, 아 이젠 군부 출신도 군복을 입은 상태에서 통치한다는 것은 안되는 일이지만 예편해 가지고 당당하게 절차를 밟아서 하면 군부 출신이라도 상관없다는 국민의 인식이 이루어질 때가 온다. 그때까지는 참아야 된다. 크거라 크거라. 이런 내 마음을 가지고 간접적인 신호를 주고 한 거거든. 이 친구는 못 참은 거지. 못 참고 뛰어나간 거지.
 
  물론 이제 YS 대 李鍾贊, YS 대 朴泰俊 이런 문제가 나오지만 내 측근의 참모들, 주요 당직자들, 간부들 다 어떻게 생각하는 것을 내가 파악할 거 아니겠어요. 그 결과가 국정에 대한 능력은, 국가관리 능력은 못 믿겠지만 그래도 YS가 순리다. 대부분이 이거요, 전부 다. 李鍾贊씨는 안된다는 거였어요.
 
  朴泰俊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야. 그 양반도 군부 출신이고. 朴泰俊씨가 저렇게 나오게 된 것은 그 중의 일부 책임이 나한테 있어요. 朴泰俊씨를 民正系(민정계)를 관리하는 사람으로서 최고위원도 주고, 합당 전에는 대표위원도 시키고 이랬단 말이오. 좋은 뜻에서 민정계를 내가 올바르게 육성시킨다 하는 포부와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 이래가지고 합당이 됐단 말이야. 그런데 朴泰俊씨 입장에서는 불만이 자꾸 터져나온단 말이야. 이따금씩 만날 때마다 불만을 들어보게 되면 맞는 것이 많거든. 그러면 내가 이제 「그게 아니오. 이건 이렇소」 이렇게 안하고 공감을 해준단 말이야. 이게 하나 둘 축적이 되니까 朴泰俊씨는 「대통령은 말이야, YS를 잘 안 믿는다」 자기에게 공감을 하니까 「나를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렇게 쌓여진 것 같아요』
 
 
  朴泰俊 후보 사퇴 내막
 
  다음날에는 李漢東(이한동) 의원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대통령을 대하는 태도가 李鍾贊 의원처럼 강경하지는 않아 盧 전 대통령이 설득을 시켜 출마의사를 꺾었다고 한다. 그 다음날엔 朴泰俊(박태준) 최고위원이 찾아왔다.
 
  『내가 그 양반(朴泰俊)한테 직설적으로 「당신 하시오, 마시오」 이렇게 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도 「내가 나서겠습니다」 이런 얘기를 나한테 못해. 운만 떼는 입장이야. 그러니까 내 입장에서도 「朴최고위원 당신 안되겠소」 이렇게 얘기하기엔 너무 안됐고 이래서 빙빙 둘러서 간접대화로 힌트만 주는 거지. 그게 되겠느냐. 내가 이제 생각할 때는 그 정도 얘기를 했으면 물러설 것으로 생각했는데, 나가서 보니 물러서지 않더라고.
 
  朴泰俊씨가 만약 경선을 차고 나오게 되면, YS한테 맞는 것이 아니라 민정당(민정계) 내에서 얻어맞는 준비가 이렇게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는 보고가 나에게 들어오더라고. 딱 누가 벼르고 있다 이거야. 박태준씨 과거지사 뭐 전부 해가지고 치고 나오면…. 내가 판단해 보니까 이건 말이야. 한동안 浦鐵(포철) 신화를 남긴, 참 우리나라 기간산업을 육성한 데 대해서는 참 공로자란 말이지. 길이길이 명예를 존속해야 할 사람이 정치인가 뭔가 하는 바람에 이것저것 다 망가져 버리고 무너져 버리고 내가 인간 朴泰俊씨, 또 나로서는 軍의 선배 아니야. 이런 여러 가지 입장에서 봤을 때 보호를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졌다고.
 
  내가 지방행사에 참석하러 가는 어느 날 아침에 李相淵 안기부장을 불러가지고 「이렇다. 너는 어떻게 판단하느냐」고 물었더니 물론 자기도 똑같이 「염려스럽습니다」 그러면 뭐 대통령이 말이야 당사자한테 뭐라 하면 체면도 있고, 그 사람 사기 문제도 있고 하기 때문에 당신은 안기부장이란 직책이 있으니까 내가 하지 못할 얘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박태준씨한테 미리 연락을 해 놓으마. 내가 朴泰俊씨에게 전화를 했어. 「朴선배가 나라를 위해 쌓아 올린 명예가 조금이라도 손상되기를 원치 않는다. 이게 내 진심이다. 이런 차원에서 李相淵 안기부장을 보낼 테니 이야기를 잘 들어보고 입지를 정하는 데 참고해 달라」 이렇게 전화통화를 하고 지방으로 내려갔단 말이야.
 
  올라와서 안기부장에게 결과보고를 받았는데 「잘됐습니다. 그대로 말씀드리니까 朴泰俊씨가 알겠다. 거기에 대한 섭섭함이라든가 어떤 反論(반론)이라든가 이런 것이 일체 없이 순조롭게 순순히 응해서 후퇴를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잘됐다 이래가지고 일단락이 된 거요』
 
 
  평양에서 남북회담 중인 총리 교체를 요구하다니…
 
  ─만약 그 때 朴泰俊씨가 출마를 강행해서 나왔다 해도 경선에서 金泳三 대표한테….
 
  『안돼, 안돼. 당시엔 민정계가 분열되어 협조를 기대하기란 어려웠을 겁니다』
 
  ─朴泰俊씨는 자기를 사퇴시키기 위해 안기부가 뒷조사를 해서 협박했다는 식으로 이해한 것 같은데요.
 
  『내가 안기부장에게 지시한 것은 「안기부가 민정계 내부의 움직임을 확인해서 朴泰俊씨에게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朴泰俊씨 입장에서 보면 안기부가 뒷조사를 해서 자신을 후퇴시키려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었겠지요』
 
  ─朴泰俊씨와 金泳三 후보와의 사이가 악화돼서 金泳三 후보가 朴泰俊씨에게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 찾아갔을 때도 협조를 거부했고, 大選 때는 외국에 나가 있었는데요. 그 때 盧 전 대통령과 朴泰俊씨간에 어떤 협의는 없었습니까.
 
  『朴泰俊씨가 후보 사퇴의사를 밝힌 뒤 위로 차원에서 만나 「金泳三씨를 도와달라」고 이야기를 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YS와는 협조관계가 맺어질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쌓였던 것 같습니다』
 
  ─鄭元植 국무총리가 남북회담을 위해 평양에 체류 중에 YS가 총리 교체 요구를 했는데요.
 
  『부끄러운 일이지요』
 
  배석했던 孫柱煥 장관이 대신 답했다.
 
  『당시 평양의 남북회담은 남북기본합의서에 명시되어 있는 후속일정을 협의하고 결정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3개의 부속합의서는 남북기본합의서를 구체화시키고 실질적인 남북관계의 진전을 위한 법적 구속력을 가진 중요한 문서로, 이런 역사적 문건을 발효시키자는 회담이었습니다. 따라서 YS가 회담의 중요성을 몰랐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중요한 회담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협상 대표로 평양에 가 있는 총리와 정부의 뒷다리를 잡아당기는 발언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이 질문에 盧 전 대통령은 『단정하긴 어렵지만 金泳三 후보는 나의 6·29 선언처럼 국면전환을 위한 획기적인 이벤트 거리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고 답했다.
 
  ─盧 전 대통령께서 중립내각 아이디어를 金泳三 후보에게 통보했을 때 충격을 받지는 않던가요.
 
  『긴장은 하더군요. 그렇지만 내가 알아듣기 쉽도록 설득했습니다. 나중에 DJ도 나에게 실토를 하더군요. 아무리 야당이 거국내각 공세를 펴도 대통령은 여당 당적을 버리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답니다. 그런데 내가 중립내각을 발표하는 순간 DJ는 「盧대통령이 6·29 선언도 하더니 중립내각까지 하는구나」 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겁니다. 내가 이 말을 들으면서 「나는 아직도 정치인이 못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중립내각 출범으로 대체로 공명한 선거, 관리는 의도대로 되셨습니다. 다만 盧 전 대통령께서 민자당을 탈당했기 때문에 金泳三 정부 출범 후 여당에 가지고 있어야 할 정치적 영향력을 스스로 포기한 상황이 된 것 아닙니까.
 
  『한국적인 정치현실로 보면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한 셈입니다. 그런데 金泳三 대통령이 내 노선을 그대로 계승하는 입장이었다면 내가 黨籍(당적)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됐겠죠. 그 반대 입장이 됐기 때문에 내가 당적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주 거북한 존재가 되어 오히려 더 불행한 일이 일어날 염려가 있었다고 봐요』
 
 
  1백 번 죽어도 국민들의 실추된 명예 회복시켜드릴 수는 없어
 
  盧泰愚 전 대통령은 5년간 재임하며 북방정책, 민주화 실천, 주택 2백만 호 건설 등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퇴임 후 터져나온 비자금 사건으로 언론과 국민들로부터 모진 비판과 손가락질을 당했고, 2년여 세월 囹圄(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다.
 
  비자금 사건에 대해 비록 법정에서 「포괄적 뇌물수수」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아직도 그 진상이 명쾌하게 밝혀졌다고 믿는 국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이 부분은 여러가지 불필요한 오해와 추측을 줄이기 위해 盧 전 대통령의 발언 그대로를 옮긴다.
 
  ─지난번 비자금 사건 때 해명되지 않고 넘어간 것인데요. 제가 사실 비자금 사건 관계 재판자료 수사자료를 다 우리집에 갖다놓고 봤습니다. 숫자도 몇 번 맞춰보고 그랬는데. 비자금을 조성하신 것과 쓴 것 사이에 약 1천억∼2천억원 사이가 비는데, 저는 그것이 선거기간 중에 金泳三 대통령 캠프로 지원하신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합니다. 재판정에서도 盧 전 대통령께서도 부인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金泳三씨가 답변했잖아. 한푼도 안 받았다고. 그런데 내가 뭐라고 해야 되겠어. 거기(비자금 재판자료)에도 그런 내용이 아마 담겨 있으리라고 보는데 國政을 책임졌던 사람, 한 시대 책임을 졌던 사람, 다른 말로 통치권자다, 이런 입장에서 그 시대에 이루어졌던 모든 통치행위를 알고 싶다는 사람은 전부 알고 싶어 하겠지만 실제 책임졌던 사람은 이것이 국민에게 알려져서 나라에 도움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않을 수가 없다고요.
 
  비자금 문제로 국민들에게 큰 충격과 실망을 안겼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을 할 수 없습니다. 죄송스럽기 짝이 없고, 심지어 1백 번 죽어도 국민들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켜드릴 수는 없다고 봅니다. 두 사람의 전직 대통령이 구속됨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우리의 위상이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는데, 더 이상 내가 특정인을 지목해서 뭔가를 밝힐 경우 당장 쾌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또 한번 명예를 실추당하는 일을 되풀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심정으로 내가 어려움을 참았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비자금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盧 전 대통령은 내내 착잡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내면으로 감정을 자제하는 듯 상기된 표정이었다.
 
  『대통령의 통치자금이나 비자금은 공장의 기계가 순조롭게 움직이도록 하는 윤활유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대통령이 국가를 위해 꼭 필요한 조직의 사기를 올리려 할 때 대통령이 금일봉을 만들어 격려의 말 한 마디를 써서 주면 거기서 솟아나는 위력은 평범한 사람이 주는 것보다 수백 배 위력이 나와요. 이것은 해 본 사람만이 그 眞價(진가)를 압니다.
 
  내가 朴대통령의 조직 운영술을 지켜봤고, 또 실제 경험도 했고 全대통령이 하는 것도 봤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대물림 문화이고,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의 情문화입니다. 지휘관이 부하를 알아주면 그 부하는 지휘관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이처럼 情이란 아무 조건이 없는 겁니다. 정치 비자금을 정경유착이니, 기업을 봐주었느니 하는 부정적 시각으로 보면 문제가 달라지는 것이죠』
 
 
  비자금 문제를 상의할 기회가 없었다
 
  ─저는 기자 생활 20여 년 하면서 정치에 대해서는 국민들한테 제대로 알리지 않은 책임이 기자들에게 있다고 봅니다. 정치의 실상을 알리려면 정치에 돈이 어떻게 작용하고, 돈과 정치인이 어떤 생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알렸어야 하는데, 그걸 알리지 않고 다만 정치인들이 외양적으로 부르짖는 명분이라든지 민주주의라든지 이런 것을 알렸기 때문에 국민들은 정치를 그런 쪽으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비자금 문제가 터졌을 때 국민들은 정치에 작용하는 돈의 생리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걸 그냥 받아들이니까 흥분하다가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통치자금이, 정치자금이 왜 필요하고 왜 이렇게 됐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재판에서 드러난 진실 말고 그 뒤를 알 수 있는데요. 일반 국민들이 盧 전 대통령께서 마지막에 가지고 계셨던 한 2천억원 되는 그것에 대해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걸 뭐…. 결과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실망을 하고 의심을 하고 이런 점에 대해서는 내가 요만큼도 변명하고 싶지 않고. 다만 이제 나, 그리고 내 정권, 내가 탄생시킨 다음 정권, 또 책임지는 사람 이 관계가 순조롭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버리지 안했느냐(않았느냐). 대통령에 당선되어 가지고 몇 번은 축하도 하고 당선됐으니까 고맙습니다 그런 인사도 하고, 이런 기회가 적어도 몇 번은 있다는 것은 상식인데 불행하게도 그게 없어진 것 같애.
 
  상대방이 「내가 쟁취를 했다」 거기에 더해서 「나를 당선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이런 역경 속에서 내가 당선됐다」 그렇게 큰소리치고 보니까 자기는 또 내(나)한테 올 명분도 없어져 버린 것이지. 그러니 사후에 어떻게 해야 되겠다. 통치자금도 어떻게 하겠다 이런 기회가 전혀 없었던 거예요.
 
  이제 일부 재판기록에도 그런 것이 나와 있기는 하겠지만 (비자금이) 남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아까 지적한 중립내각에 원인이 있는 것인데, 또 한 가지 원인이 있다면 내가 돈을 애꼈어(아꼈어). 굉장히 애꼈어. 심지어는 인색할 정도로. 그러다보니 퇴임할 무렵에 큰 돈이 남게된 겁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쓰도록 할 것인가를 곰곰 생각해 봤어요. 내가 재임 때 독일의 통일과정을 여러 번 브리핑 받았어요. 거기에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되는데, 우선순위 첫째 둘째 가는 것이 돈이야. 그런데 우리가 현재 정부다 뭐다 소위 남북통일을 위한 기금이 거의 없다 이 말이야. 그걸 내가 첫째 염두에 두었고.
 
  둘째는 나의 북방정책이 다음에는 戰果(전과)확대로 펼쳐 나가야 할 그런 단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연해주를 왔다갔다 하는 기업인들을 만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張致赫(장치혁)씨 같은 사람 만나고 했는데 기업인 자체에서 뭘 투자한다는 것이 어렵더라고. 정부 차원에서 先導(선도)투자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이런 구상도 되더라고요. 그래서 돈이 필요하다.
 
  이런 등등이 사실은 金泳三 대통령하고 상의를 할 이야기였지. 그게 첫째는 취임식 때까지 기회를 못 가졌단 말이야. 취임사에서부터 시작해서 점점 어려워져갔단 말이에요. 司正(사정)이다 뭐다 하는 바람에 그냥 내 측근들을 때리기 시작했어요. 그거 이제 언제 하나 언제 하나 하다 시기를 놓쳐버렸어요』
 
  ─(金泳三 후보가) 당선되고 나서 두 분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까.
 
  『없지, 없어. 그러니 아까 얘기했지만 그렇게 자세를 가다듬었단 말이야. 심지어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잡아냈다」 이런 식으로 입장이 되어버렸으니까. 가사(가령) 그런 게 상의가 안됐다, 노출이 안됐다 그러면 비자금을 내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내가 쓰겠느냐. 하늘에 맹세코 그건 아니다. 대통령을 한 사람이, 물론 대통령 마치게 되면 고유의 권한은 없어지지만 국가에 대한 책임감은 죽을 때까지 그대로 지속되는 것입니다.
 
  내가 퇴임해서 등산을 하기도 하고 골프는 많이 자제를 했고, 자제하는 가운데서 외부에 나가서 식사도 하고 했지만 모두가 「대통령 한(지낸) 사람이 저렇게 인색하나」 할 정도로 내 스스로에 대해 제일 인색했습니다. 당신들, 집도 보지만 이제 수리다운 수리를 조금 하는데, 저게 비만 오면 매년 물이 들어와서 비 많이 왔다 하게 되면 수재민이 돼. 저 밑에 말야, 물이 쾅쾅 들어와 가지고. 이렇게 내가 생활해 왔어요.
 
  나중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됐어요. 역시 당분간 우리는 보수가 중심이 되어서 나라를 움직여 나가야겠다. 그런데 YS 진영이 보수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이 말이야. 그러면 이제 보수가 죽지 않느냐. 내가 저것 좀 도와야지. 마지막에 추가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것도 내가 아마 재판에서 솔직하니 얘기했을 거야』
 
  ─李賢雨(이현우) 경호실장이 증언했습니다. (비자금) 출납장부는 정말 파쇄기에 걸어 없애버렸습니까.
 
  『없앴어요. 왜 없앴냐니까 누구누구한테 받았다 하는 것을 밝히지 않기 위해서 없앤 겁니다. 누가누가 줬다 하는 것이, 대충 테두리는 내가 처음 5천억이다 하는 테두리인데 그 이상 들어온 것도 실제는 별로 없어. 이런 건 있더라. 보니까, 그건 참 어쩔 수 없더군요. 요만큼 줘놓고 이만큼 줬다는 거라. 그러면 나는 뭐라고 해야 하나. 그걸 시비할 수가 없다고』
 
 
  92년 대선자금은 나한테 오지 않았다
 
  ─4백억 주었는데 진술은 2백 몇억으로 이렇게 축소진술을 오히려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축소가 물론 있기도 있지마는…』
 
  ─왜 축소진술을 했냐면 1992년 하반기에 대선자금으로(기업이) 지출한 것은 검찰이 묻지 않았거든요.
 
  『 92년 대선자금은 나한테 들어오지 않았거든. (金泳三 후보측이)직접 받았지』
 
  ─朴啓東(박계동) 의원이 폭로한 비자금은 金泳三 대통령 주변의 누군가가 자료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보십니까.
 
  『그런 문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폭로 내용이 사실과 많이 달랐어요. 이상해서 李賢雨 경호실장에게 「저 내용이 사실이냐」 하고 물으니까 아니라고 하더군요』
 
  ─金大中 당시 국민회의 총재에게 20억원을 전달한 것은 어떤 뜻이었습니까.
 
  『특별히 무슨 뜻을 가지고 한 것은 아닌 것 같애. 통치권자 입장에서는 어떨 때는, 물론 여당 총재니까 여당 위주로 도움이 그곳으로 가겠지만 야당도 어려울 때,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간은 지원해줄 수 있다 이 말입니다.
 
  6·29 선언 이후에는 여당 야당 관계도 과거에 적대시 하는, 「저 친구 망했으면 좋겠다」 이거하고는 차원이 달랐어요. 시시비비를 정당하게 가려주는 國政의 동반자가 되기를 원하고 그렇게 생각했지 궁지에 빠지기를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래서 그것(20억원)도 다른 뜻이 아닌 그런 차원일 거요』
 
  ─비자금 재판 때 기업인이 준 자금과 그 자금으로 인한 이권이 거론된 것은 趙重勳(조중훈) 회장의 제주도 제동목장 문제, 金用山(김용산) 극동건설 회장의 1백50만 평 토지 형질변경 문제, 辛格浩(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제2롯데월드 부지 문제 등이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기업인들이 부탁하는 걸 盧 전 대통령께서 받아 金鍾仁(김종인) 경제수석에게 검토하라고 지시했는데 실무자들이 안되겠다 해서 실행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KAL의 목장은 朴대통령 시절부터 거론됐던 것이고, 金用山씨 토지 건도 오래 전부터 거론됐던 것인데 내가 그 문제에 대해 어떤 지시를 한 것은 없습니다. 단 제2롯데월드 부지 문제는 관심을 표명했어요. 서울시가 석촌호수 주변의 땅을 「제발 좀 개발해달라」 해서 롯데가 구입했는데, 막상 개발하려니까 제한을 가하고, 설상가상으로 토지초과세를 부과한 겁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롯데가 부당하게 피해를 입는 것이 안타까워서 합리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도록 검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결국엔 롯데가 소송을 해서 승소했지요. 서울시도 입장이 난처한 것이 「여론이 나빠서 안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1992년 1월7일에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그 전에도 鄭회장의 대통령 출마 움직임이 감지됐습니까.
 
  『부분적으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서산 부근의 현대 연수원에 사람들을 불러다 연수시킨다는 사실을 전부터 보고 받았어요』
 
  이 부분에 대해 孫柱煥 전 장관이 답변했다.
 
  『鄭周永 회장이 정치에 뜻이 있다는 움직임이 여러 형태로 파악되면서 상세한 부분까지 분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鄭周永씨의 정계 진출이 앞으로 정치권에 미칠 영향 등을 분석한 후 정계 진출 봉쇄를 위한 구체적 방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盧대통령께서 「물리력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하면서 승인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건도 집행되지 못했습니다』
 
  盧 전 대통령은 鄭周永 회장과 현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鄭周永 회장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원리에 따라 합리적으로 성장했다기보다는 집권자가 밀어주는 데 의지해 온 사람입니다. 그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요. 경부고속도로를 4백억원이라는 한정된 예산으로 건설해야 했는데, 당시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웠어. 이걸 鄭周永 회장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냈어요. 고속도로가 근대화의 動力(동력) 역할을 했으니 朴대통령 입장에서는 鄭회장이 얼마나 고맙겠어요. 그래서 모든 면에서 현대를 도와주는 쪽으로 나온 겁니다.
 
  다음 정권에서도 현대가 그 방법을 답습했어요. 이렇게 되자 경제각료나 실무책임자, 청와대 경제수석들이 현대의 질주에 브레이크를 걸기 시작한 겁니다. 내가 당에 있을 때 수차 목격한 것이지만 鄭회장은 자기들 행보에 제동을 거는 경제수석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우리 金鍾仁 경제수석도 곤욕을 치른 적이 있어』
 
 
  越南戰에서 지뢰 파편에 발 다쳐
 
  점심시간이 되어 거실 옆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가 진행됐다. 식사 도중 LA 다저스가 7대 0으로 이겨 박찬호 선수가 승리투수가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盧 전 대통령은 야구 이야기로 화제를 옮겨갔다.
 
  『옛날에 사관학교 다닐 때 야구부도 있었는데 스포츠의 주류가 럭비, 축구였고 야구부는 별 인기가 없었어요. 야구가 좋은 점도 있지만 단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게, 투수를 자주 바꾸는 거야. 시합을 하다 보면 선수들이 투수의 투구 폼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게 버릇이 되어서 친구들 간에도 남의 약점을 찌르고 하는 것이 야구부에서 많았어. 그래서 야구란 운동이 별로 좋지 않구나 이렇게 생각했어요』
 
  ─盧 전 대통령께서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심한 부상은 아니었지만 지뢰가 터져서 발을 다친 적이 있어요. 위험한 고비는 여러 번 넘겼지. 작전지역에 헬기가 착륙하려는 찰나 뭔가 예감이 이상하고 위치가 잘못된 것 같애. 그래서 미군 조종사의 등을 지휘봉으로 치면서 「떠라」 하고 외쳤는데, 그 지역이 지뢰밭이었어요. 헬기가 치솟는 순간 바람에 눌려 지뢰가 연속으로 폭발했어요』
 
  ─중앙청 철거에 대한 아이디어는 6共의 李御寧(이어령) 문화부장관 시절에 공론화가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확실한 기억은 없는데, 내 재임 때도 철거하자는 주장들이 나왔습니다. 나는 역사가 항상 좋은 면만 있는 게 아니라 明暗(명암)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明만 있고 暗을 없애버리는 것은 역사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의견이 강했지요. 그런데 중앙청의 위치가 우리 문화의 핵심지역이니까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가 하는 의견도 제기되어 「그렇다면 이전하는 것이 어떤가」 하는 논의가 있었다고 봅니다』
 
  盧 전 대통령은 풍수지리나 사주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를 한 가지 소개했다.
 
  『내가 방첩대 근무하던 소령 시절, 오랜만에 아들(盧載憲)을 얻었어요. 그래 이름을 제대로 지어주고 싶어서 수소문을 해 보니 그 당시 효자동인가 적선동에 김봉수라는 분이 소문이 났더군요. 그 집을 찾아가보니까 사람들이 몇백m 줄을 서 있더군요. 내 차례가 되어 방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김봉수씨가 나를 보더니 후다닥 일어나 큰 절을 하는 거야.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귀한 사람이라서 그랬다는데 그때 나는 소령이었거든』
 
 
  『나는 色盲 환자였다』
 
  다시 거실로 자리를 옮겨 14대 大選과 관련한 대화가 이어졌다. 孫柱煥 전 장관(편집자 注: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은 『기록을 위해 보충증언을 하겠다』면서 『金泳三 대표가 여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최적임자라는 최종적인 분석보고를 대통령에게 드린 시기가 1991년 12월이었다』고 말했다.
 
  『1991년 12월에 여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는 누가 가장 경쟁력이 있는가를 분석한 내용이 대통령에게 보고됐습니다. 예상후보들을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종합 분석한 결론은 역시 金泳三 대표였습니다. 盧대통령께서는 내심으로 金대표를 마음에 두셨고, 참모들로부터도 「차기 후보는 金대표가 당선 가능성이 높다」는 보고를 받은 상황에서도 여당 대통령 후보는 경선으로 선출한다는 기본원칙을 고수하셨습니다. 저는 대통령의 뜻은 어느 후보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룰을 만들어 놓고 경기를 시키겠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당시 모든 상황이 그 후보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었지요』
 
  ─1991년 초에 盧在鳳(노재봉) 교수를 국무총리로 임명하신 것은 후계구도와는 관계없는 것입니까.
 
  『관계가 없었는데 저쪽(金泳三 대표)에서 과잉반응을 한 것입니다』
 
  ─金泳三 후보를 거론하실 때마다 『金泳三 후보가 國政운영에는 약간 문제가 있을지는 몰라도』라는 단서를 붙여서 말씀하셨는데요. 그러면 국정운영에 뭔가 瑕疵(하자)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셨다면 보완하기 위해서 뭔가를 좀….
 
  『보완하기 위한 이야기를 많이 했지. 본인 스스로도 그랬잖아. 「건강은 남이 안 갖다 주지만 지혜는 빌릴 수 있다」 그거 맞는 얘기거든. 본인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런 얘기도 했기 때문에, 사실 그렇잖아. 옛날에 우리 역사를 보더라도 촉나라 유현덕이가 뭐 그렇게 지혜로운 사람이냐. 제갈공명이다 뭐다 이런 사람들의 지혜를 빌려 가지고, 지도자란 것은 지혜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첫째 앞서는 것이 덕이야 덕. 훌륭한 사람들이 자기 품안으로 서슴없이 오게 하는 德(덕)이야. 그러면 그 지혜를 다 써먹는 게 되는 거다 이 말이야.
 
  본인도 그렇게 얘기도 했고, 나도 그거는 갖추지 않았겠나. 왜 내가 그런 생각을 했나 하면 많은 識者들이 「민주주의」 하면 金泳三씨를 생각한단 말이야. 또 아무리 우리나라의 정치가 모순 덩어리고 뭐고 하지만은 계속 성장을 해서 야당 총재로, 대통령 후보로 이렇게 성장을 해왔다 이 말이야. 말하자면 보스다 이 말이야. 보스. 아무나 首長(수장)이 되는 게 아니잖나.
 
  이 사람의 장점이 뭘까 내가 많이 생각도 했지. 한두 가지 예로 자기 1∼2등 家臣(가신)인 金東英(김동영) 의원이 돌아갔을 때 이 때 내 앞에서 金대통령이 눈물을 흘렸어. 심지어는 자기하고 직접 家臣은 아니지만 친했던 경북 영주 출신의 金昌槿(김창근) 교통부장관이 작고했을 때도 내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그래서 내가 「아하 이게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거든. 情이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했는데, 나중에 내가 어렵게 돼서 분석을 해보니까 그것도 모르겠어요. 나를 위시해서 우리나라의 모든 식자들이 色盲(색맹) 환자가 되었어요. 색맹환자가.
 
  내가 국가 권력을 다 손아귀에 쥐어 봤고, 나라를 운영해 봤고 또 이것 저것 다 경험한 이런 입장에서 봤을 때 (金泳三씨를) 좋게 봤던 것이 사실이었던가, 그게 믿어지지 않아요』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한 사람』
 
  ─일종의 자신에 대한 회의인데요.
 
  『그때는 그렇게 믿었는데 그게 잘못이다 이 말이야. 그게 이렇게 이렇게 풀린다니까. 이제는 지나가 버렸다고 단정했던 사람을 다시 내가 생각했던 이유가 많은 교수들, 식자들이 민주주의에 제일 가까운 사람이다 이거였단 말이에요. 그러면 민주주의란 무엇이냐.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과정에서 대통령 후보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경선을 거부하고 「나를 지명해라」 이렇게 나왔던 겁니다. 이런 예를 하나하나 종합해서 결론을 논리적으로 정리해 보니까 (金泳三씨는) 민주주의보다는 권력,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내가 色盲환자였어요』
 
  ─지난번에 盧 전 대통령께서 중국의 인재등용법하고 기르는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일본도 최근에 엘리트를 기르기 위해서 굉장한 노력을 들이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체계적으로 인재를 등용해서 기른다거나 하는 것을 저는 못봤습니다. 국가 차원이든, 아니면 민간 차원이든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를 선발해 그들에게 어울리는 기회를 주고 능력을 키워나가는 등 체계적인 관리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전인수격으로 내가 얘기하자면 朴대통령 때부터 엘리트를 길렀어. 全대통령 때도 엘리트를 길렀고, 내 때도 엘리트를 길렀어. 물론 정치적으로 세밀하게 숙련되게 사람을 기른다는 측면에서는 부족함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군부다 행정부다 각계각층의 분야에 엘리트가 될 사람들은 클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이렇게 길러왔어요. 길러왔는데, 이 엘리트들이 다음 정권에 가서 전부 다 斷罪(단죄)가 되어버렸어요. 제일 표준적인 예가 군대야. 군대에 하나회라는 자들이 거의 다 엘리트들이야. 저 친구는 앞으로 군을 맡겨도 되겠다 이것을 어느 특정인이 평가하는 게 아니야. 저 친구 참 관심을 가져야겠다, 저 친구 잘됐으면 좋겠다, 길렀으면 좋겠다 이런 친구들이 좍좍 올라온 거예요』
 
  ─우리 편이라 그런 게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 재목이 될 사람이다 이런 뜻입니까.
 
  『그렇지. 그게 그만 정치적으로 완전히 패거리로 매도당해 가지고 다 죽여버린 거예요. 내가 지금 이따금씩 옷 벗은 후배들 만날 때가 있잖아요. 만나면 「내가 너희들에게 고개를 들 수 없다. 너희들이 알차게 비축한 역량, 노하우 이걸 나라를 위해 계속 이바지하지 못하고 죽여버리니 너희들 앞에 내가 얼굴을 들 수 없다」 이런 얘기를 내가 합니다.
 
  軍이 하나의 모델 케이스지만 다른 데도 마찬가지였어요. 좋은 인재들이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조직이 어떻게 되겠어요. 아무 것도 못해. 간단해. 이렇게 해서 IMF가 온 거지요』
 
 
  YS 선택은 事後보장 차원이 아니었다
 
  ─金泳三 대통령을 후임자로 결정한 이유 중에 盧 전 대통령이 퇴임 후 事後보장, 안전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견들이 있었는데요.
 
  『나는 그런 문제는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이미 나는 6·29 선언으로 모든 것을 다 던졌고』
 
  孫柱煥 전 장관은 『진정으로 사후보장을 원했다면 朴泰俊씨나 李鍾贊씨를 택했을 것』이라며 『사후보장 차원이라면 제일 위험한 사람이 YS였다』고 말했다.
 
  ─지금 말씀을 들어보니까 金泳三 대통령이 실패했다 해도 당시에 무슨 대안이 있었을까 라고 묻는다면 별로 답이 안나올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이것은 국가의 운명이 아닌가요.
 
  『운명이지요. 金泳三씨 아니고 누구를 대통령 시켰겠습니까. 그것이 국가의 運(운)이지요』
 
  ─제가(趙甲濟 편집장) 金泳三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었는데, 그 때 金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위부터 도려내겠습니다』 하는 연설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도 취임식장에서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이거 참 큰일났구나」 하는 생각에 눈 앞이 캄캄했습니다. 나와 뜻을 같이 했던 동지들은 이 소릴 듣고 이제 결별하는구나 할 텐데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까. 이런 생각에서 연설이 끝난 후 金泳三 대통령 손을 잡고 관중들 앞에 나가서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취임 연설을 듣고 충격을 받으셨습니까.
 
  『충격이 아니라 야릇한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사람을 그렇게 안 봤는데 나와 國政에 대해 논의할 때는 전혀 반대논리를 세운 적이 한 번도 없이 다 수긍을 했는데…』
 
 
  金大中 대통령에 대한 생각 변해
 
  ─金大中 대통령에 대한 생각은 어땠습니까.
 
  『軍에 있을 때는 부정적이었지요. 대통령 선거를 할 때만 해도 황색바람이 얼마나 매웠습니까. 그래도 이것이 우리나라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金大中씨를 다시 평가한 것이 국제환경의 변화였습니다. 金大中씨가 많은 장점을 가진 분이었어요. 머리가 샤프하고, 국민들이 위험하다고 보는 인식이 변화된다면 인정해야 되지 않느냐 이렇게 봤어요. 그 분을 자주 만나는 과정에서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金大中 대통령은 남북관계의 논리적 근거로서 남북기본합의서대로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金大中 대통령이 추진하는 소위 햇볕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金대통령도 근본적으로는 내가 했던 대로 남북관계 회복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前 정권에서 헤게모니를 빼앗기는 바람에 제대로 안되어 입장이 어렵다고 봅니다. 햇볕정책이란 것이 따지고 보면 우리가 염려해야 할 부분은 없다고 봅니다. 어떤 기사를 보니까 내가 햇볕정책에 대해 상호주의를 내세우면서 비판했다는 식으로 썼는데, 그것은 내 의도를 잘못 표현한 겁니다』
 
  盧 전 대통령은 인터뷰 내내 「하늘의 뜻」 「國運(국운)」 「민주주의」 「국민의 마음」 등등의 말을 자주 사용했다. 어떻게 보면 운명론자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운명에 순응했다기 보다는 평생 친구이자 동지인 全斗煥 전 대통령과 함께 12·12 사건, 5·17 계엄확대조치, 비자금 조성과 같은 超法的(초법적) 수단까지 동원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갔다.
 
  이러한 질풍노도的 행보에 대해 법정은 유죄판결을 내렸지만 盧 전 대통령 본인과 가족, 또 당시 盧 전 대통령을 가까이서 모셨던 참모들은 판결 내용에 흔쾌히 동의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實定法(실정법)과 양심 사이에 가로놓인 도도한 강물과도 같은 괴리감…. 그 넓은 간격을 어느 누가, 무슨 방법으로 이해하고 해소시킬 수 있을 것인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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