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의 편지

“집 종손(宗孫)이 어디로 도망간단 말입니까?”

  • 글 : 배진영 월간조선 편집장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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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에 따른 대통령 담화를 접했을 때, 저를 가장 놀라고 낙담하게 한 대목은 “종북(從北) 반(反)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 운운한 대목이었습니다.
 
  저는 25년 동안 《월간조선》에 있으면서 ‘종북 반국가 세력’의 위험, 특히 그들이 대한민국 현대사를 어떻게 분탕질하고 있는지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써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담화문에서 ‘종북 반국가 세력’의 위험을 경고하고 국회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의 폭주를 비판한 대목에는 충분히 공감이 갔습니다. 하지만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이라는 대목은 공감하기 어려웠습니다. ‘종북 반국가 세력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데, 그걸 일거에 척결하겠다니…. 그것도 계엄이라는 구(舊)시대적인 방법으로….’
 
  ‘종북 반국가 세력’의 뿌리는 짧게는 1980년대, 더 길게 잡으면 해방 직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일제(日帝)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겠지요. 그들은 역대 정권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수십 년간 지하에 잠복해서 《해방 전후사의 인식》 같은 책들을 만들어 내고, 좌파 지식인들을 양성해 내고, 언론계·종교계·법조·시민사회에 자기 세력을 심었습니다. 심지어는 공무원 사회나 군부에도 그런 세력이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김일성 장학생’이지요.
 
  이렇게 ‘종북 반국가 세력’의 뿌리가 넓고 깊기 때문에,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장기 집권했던 박정희(朴正熙)·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도 결국 그 뿌리를 뽑지는 못했습니다.
 
 
  ‘계엄령 선포’ 요구에 담긴 의타심
 
  ‘종북 반국가 세력’과 싸워서 이기려면, 그들이 수십 년 걸려 차근차근 대한민국을 밑에서부터 장악해 나갔던 데서 배워야 합니다. 수십 년간의 싸움을 각오하고, 지적(知的) 축적을 하고, 사람을 길러 내야 합니다. 다행히 20여 년 전부터 한국에서도 미국의 헤리티지재단이나 리더십 인스티튜트 같은 우파 싱크탱크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우파 교육 프로그램들이 파편적으로 운영되기는 했어도, 의미 있고 지속 가능한 우파 싱크탱크 운동이나 교육운동이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때도, 태극기 집회에 나가 보면 ‘계엄령 선포하라’는 팻말을 들고 돌아다니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지지율이 한 자릿수로 떨어지고 탄핵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일개 대통령 권한대행’이 계엄령을 선포해서 ‘탄핵 세력’과 그 배후에 있는 ‘종북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는 것은 애초부터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계엄령’을 요구하는 심리의 밑바닥에는 ‘게으름’과 ‘의타심(依他心)’이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십 년에 걸쳐 씨를 뿌리고 후계 세대를 교육하면서 끈기 있게 싸우는 대신, ‘군대’로 상징되는 국가권력의 힘을 빌려 상황을 일거에 평정하고 그 결과를 누리며 살고 싶다는 생각 말입니다.
 

  보수 정당이 자기 당내에서 대권 후보를 길러 내지 못하고 매번 ‘양자(養子)’를 들여 대선 후보로 내세워 온 것도 비슷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사람을 키워 내지 못하니, 이회창이 뜬다 싶으면 이회창, 반기문이 뜬다 싶으면 반기문, 윤석열이 뜬다 싶으면 윤석열에게 달려가는 행태가 되풀이되는 것이겠지요. 이번 사태로 이런 양자 시스템도 파탄이 난 것 같습니다.
 
  양동안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1988년 〈이 땅의 우익은 죽었는가〉’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이 글에서 양 교수는 사회 각 분야에서 좌익 세력이 대두하고 있는 현실을 진단하면서 “우익의 각성과 분발이 없을 경우 좌익 세력이 계속 확대되어 머지않은 장래에 이 나라에서 좌익 세력과 제휴한 정권이 들어서고, 다음에는 좌익 세력이 주도하는 연합 정권이 등장하고, 그다음에는 공산 정권이 등장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 땅의 우익은 죽었는가?’라는 글이 발표된 지 37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양 교수의 예언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음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권 시절 이래 ‘우익의 각성과 분발’이 보이기는 했지만, 많이 늦었다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일부 우파 운동의 경우,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어서 오히려 그 해악이 걱정되기도 합니다. 저희도 당장 나라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막는 것이 급하다는 생각에서, 거리에서 애타게 외쳐 대는 그 마음이 애달파서, 그런 점에 대해 충분히 비판하지 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제 시작된 ‘우익, 특히 젊은 우익의 각성과 분발’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알곡도 있을 것이고 쭉정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앞에는 시행착오도, 시련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종종 깜짝 놀랄 만한 실력과 통찰력을 갖춘 젊은이들을 보면서, 그들에게서 희망을 봅니다.
 
 
  “속았다는 것이 핑계가 되지 않는다”
 
  이제 이 땅의 ‘이념적 내전(內戰)’은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지금 이 나라 보수가 처한 막막한 상황은 양동안 교수가 이미 37년 전에 엄중하게 경고했음에도 ‘각성과 분발’을 게을리해 온 업보(業報)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제 진짜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에서 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상황을 막는 방법은 단 하나뿐입니다. 소위 보수 대권 주자라는 이들이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감을 가지고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누구는 자신의 마지막 꿈을 위해, 누구는 다음 선거에 앞서 몸을 풀기 위해, 자기는 스스로를 내려놓을 생각이 없다고 공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려놓아야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지, 자기는 아니랍니다. 어쩌면 이번 선거가 마지막 자유 선거가 될지도 모른다고 밤잠 못 자는 국민들도 있는데, 참 한가한 사람들입니다.
 
  ‘주권자인 국민은 어리석을 권리가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어리석게 행동한 결과가 그 사람에게만 돌아간다면 그래도 됩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같은 시대를 살면서 어리석지 않게 행동하려 애쓰면서 살아온 동료 국민들이나 그 후손들에게 해롭다면 어떡하나요? 주권자인 국민은 ‘어리석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폴란드의 철학자 레세크 코와코프스키도 “정치에서는 속았다는 것이 핑계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정치인들이야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든, 이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해서 우리와 우리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선거는 민주 국가에서 물리력에 의지하지 않고 ‘이념적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입니다. 저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트럼프와 그 지지 세력은 2020년 대선 패배 후 고심참담한 노력 끝에 선거에서 승리하고, 지금 자기들이 그려온 나라를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제21대 대선은 이제 시작입니다.
 
 
  “이 집과 죽을 작정을 했어요”
 
  김태완 기자가 이번 호에 쓴 산불 현장 르포 기사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어서 대피하라는 재난문자가 계속 왔지만, 집 종손(宗孫)이 어디로 도망간단 말입니까? 이 집과 죽을 작정을 했어요. 날아오는 불덩이를 막느라고 대피할 생각도 못 했지요. 조상 뵐 낯이 없다는 생각밖에….”
 

  경북 안동에 있는 국가민속문화재 제184호 오류헌(五柳軒) 주인 김상돈(金相敦)씨의 말입니다. 김상돈씨는 의성(義城)김씨 승지공파 14대 종손입니다. 김상돈씨 부부는 결국 소방차도 오지 않는 상황에서, 그 불바다 속에서, 1700년대부터 이어져 온 고택(古宅)을 지켜 냈습니다.
 
  보수 세력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종손입니다. 종손이 어디로 도망간단 말입니까? 어떻게 포기한단 말입니까? 그랬다가는 조상 뵐 낯이 없고, 후손들 볼 면목이 없게 될 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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