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 종택이 안동에 유독 집중… 종택 47곳에 불천위 96명
⊙ 퇴계와 쌍벽 이룬 남명 조식, 종택·종손 없어… 율곡 이이도 종택 없어
⊙ 대구·경북 지역 불천위 종가 120곳 중 112곳 참여한 영종회(嶺宗會) 발족
⊙ 제사·종가·전통 논란… “우선 사람이 살아야 합니다”
⊙ “종가는 한번 지키는 것으로 끝나는 공간이 아니다”
⊙ 퇴계와 쌍벽 이룬 남명 조식, 종택·종손 없어… 율곡 이이도 종택 없어
⊙ 대구·경북 지역 불천위 종가 120곳 중 112곳 참여한 영종회(嶺宗會) 발족
⊙ 제사·종가·전통 논란… “우선 사람이 살아야 합니다”
⊙ “종가는 한번 지키는 것으로 끝나는 공간이 아니다”

- 2012년 3월 31일 안동회관에서 열린 영종회 창립 당시의 모습이다. 사진=김종길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의 발전, 기후 위기 등 급격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꿀 것인가를 묻게 됩니다. 이 연재는 그 질문을 가장 오래된 자리, 영남의 종가(宗家)에서 다시 던집니다.
종가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지성과 도덕성을 삶으로 실천해 온 생활의 현장입니다. 그 무게를 오늘까지 감내해 온 이들이 종손(宗孫)과 종부(宗婦)입니다. 이 연재는 영남 각지의 종택을 찾아, 왜 이 시대에도 종택이 존재해야 하는지, 종손과 종부의 삶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묻고 기록합니다.
첫회는 안동 도산면에서 시작합니다. 겨울의 종가에서 만난 침묵과 결단, 그리고 “우선 사람이 살아야 한다”는 한마디가 이 연재의 방향을 예고합니다. 이 기록이 변화의 시대를 건너는 하나의 기준이 되기를 바랍니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陶山面)의 겨울을 찾아갔다. 나목(裸木)은 내를 따라 흐르다 깊은 골의 병풍이 되어 있었다. 과장된 설경(雪景)도, 화려한 문설주도 눈에 띄지 않았다. 더러 마른 바람이 고택(古宅)의 돌쩌귀를 흔들고 댓돌을 쓸었다. 오랜 시간을 버텨 온 기와와 검은 두루마기 차림의 종손(宗孫)과 종부(宗婦)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겨울의 도산 종가(宗家)는 그렇게 과거에서 오늘로 이어지고 있었다. 《안동에 빠지다: 안동 홀릭》(서고, 2022) 저자인 서명수(徐明秀)씨와 안동 겨울을 따라 걸었다. 그와 여정을 함께하니 든든했다.
영종회, 외로운 종손들
지난 2012년 3월의 일이다. 영종회(嶺宗會)를 설립하기 위해 경북 안동회관에 90여 명의 불천위(不遷位) 종갓집 종손들이 모여들었다. 불천위는 4대(代)가 되어도 위패를 조매(祧埋 ·사당에서 내보내 땅에 묻음)하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모셔 제사 지내는 조상이다. 쉽게 말해 불천위 종손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의 직계 후손을 뜻한다.
당시 대구·경북 종손 모임인 영종회 초대 회장으로 추대된 김종길[金鍾吉·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1538~1593년) 15대 종손] 회장의 취임사는 이랬다.
“수천 년 계승된 미풍양속과 윤리가치관이 붕괴되는 현실입니다. 인간성이 파괴되고 도덕성이 무너지는 현대 사회에서, 선조들이 물려주신 유교문화로 오늘의 혼란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종가가 인간성 회복운동의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영종회 탄생의 근본 동력이었다.
그러나 “종손은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 오랜 불문율이다. 종손이 말을 하면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종가의 공식 입장이 된다. 말을 삼가는 것이 종가의 무게를 지키는 일이다. 종손은 사사로운 분쟁·정치·이해관계에 관여하지 않는다. 종손이 한쪽에 서는 순간, 문중은 찬반으로 갈라지고 종가는 중심을 잃는다.
이 때문에 묵언(默言)의 종손들은 각자 고립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영종회는 이런 애닯은 종손들 간 소통과 협력의 구심점을 만들기 위해 결성됐다.
어쩌면 이들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는 불천위 제사인지 모른다. 거기에 고조부모·증조부모·조부모·부모에 이르는 4대 봉제사(奉祭祀)와 명절 차례까지 더하면 한 해에 제사 지내는 횟수가 최소 10차례를 훌쩍 넘는다. 새벽 1~3시에 제사를 올리고, 수많은 제관의 음복과 설거지를 도맡아 밤을 꼬박 새우는 종부들의 고통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제사 때문에 이민 간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 조상 공경이 고통스러운 현실이 되어 버렸다. 이러다가는 문중과 종가, 종손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종가문화 재정립이라는 시급한 과제를 논의할 공동의 장이 절실했다. 그렇게 해서 영종회가 꾸려졌다. 현재 대구·경북 지역 불천위 종가 120곳 중 112곳이 영종회에 참여하고 있다.
종가에서 다도·공예·숙박 체험
안동 도산면 온계종택 앞에 선 이목 종손.영종회 제7대 회장인 이목(李睦) 선생을 찾아갔다. 선생이 사는 도산면 온계종택(溫溪宗宅)의 당호는 삼백당(三栢堂)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둘째 형인 온계 이해(李瀣·1496~1550년)가 스무 살 무렵 분가해 터를 잡은 집이다.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형을 대신해 막내아들 퇴계가 어머니 춘천 박(朴)씨를 모시고 이곳에 머무른 세월이 5년, 그 시간의 흔적은 문헌보다 마루의 나뭇결에 더 깊게 스며 있다. 이목 회장은 온계종택의 17대 종손이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지암(芝庵) 이인화(李仁和·1859~1929년)가 이끈 선성의진(宣城義陣)은 삼백당을 의병소이자 회의처, 숙소로 삼았다. 이듬해인 1896년 일본군의 방화로 종택은 사당을 제외하고 모조리 재로 변했다. 집은 사라졌지만 종가의 역할과 기억은 꺼지지 않았다. 2005년 복원을 시작해 2011년 삼백당을 다시 세웠다. 그러나 이 집은 ‘옛집을 흉내 낸 새 건물’이 아니라, 불에 타기 전의 시간까지 다시 불러온 터전에 가깝다. 이목 회장이 사랑채에 서서 말했다.
“종택은 한번 지키는 것으로 끝나는 공간이 아니라, 세대마다 다시 선택해야 유지되는 삶의 방식입니다.”
지금의 삼백당은 다도(茶道), 한지 공예, 숙박 체험의 문을 열어 두고 있다. 관광상품이 아니라 종가를 현재형으로 유지하기 위한 선택과 노력에 가깝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는다는 것은 단순히 잠자리를 빌리는 일이 아니다. 이 집이 감내해 온 시간과 호흡을 잠시 빌려 쓰는 일이다.
이 회장이 잠시 목을 가다듬은 뒤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를 병원에서 모셔 집으로 왔을 때, 눈이 마주쳤는데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순간 ‘제가 꼭 복원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회장의 할아버지는 9남매를 두고도 마음을 잃어 자녀들의 집을 전전했다. 할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더 일찍 돌아가셨다. 그래서 그는 서울에 살면서도 기제사와 불천위 제사를 홀로 모셨다.
국가와 시·도가 함께 재건한 삼백당
온계종택 삼백당(三栢堂) 앞에 선 이목 종손과 《안동에 빠지다》의 저자 서명수.할아버지의 임종을 앞두고 아들들이 모두 “우리 집으로 가시라”고 했지만, 그분의 대답은 달랐다. “목이한테 간다.” 종손에게 간다는 뜻이었다. 108일 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그는 서울 아파트에서 3년상을 지냈다.
“어릴 적부터 사당도 없는 작은 집에서 괴로워하시던 할아버지를 보며, 복원이 할아버지의 소원임을 알았습니다.”
복원은 쉽지 않았다. 문화재로 지정되지도 않았고, 남은 것은 주춧돌 몇 개뿐이었다. 증조부가 불이 난 뒤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속에 그려둔 가도(家圖)가 근거였다. 학자들이 그 도면을 대조해 설명했고, 국가보훈처(지금의 국가보훈부)의 지원이 결정됐다. 구체적으로는 보훈처 예산 4억 1900만원, 경북도와 안동시 각각 3억 8200만원, 자부담 2억 1500만원이 공사비로 쓰였다.
“집을 복원한다는 건 큰일입니다. 국가 예산으로 한다는 건 더 그렇고요. 결국 국가로부터 문중을 인정받은 셈입니다.”
낙성식 날, 추진위원장을 맡았던 조순(趙淳·1928~2022년) 전 경제부총리가 현장에서 직접 당호(堂號)를 써 주었다. 당시 조 전 부총리는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으로 있었다. 그 제명기(題名記) 글귀가 ‘삼백수용(三百壽容)’이다. 300년의 세월을 담듯 오래 살게 하라는 의미다.
“지금 가장 큰 난관은 종손들의 결혼 문제”
이목 회장은 “외로운 종손들이 영종회를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처음에는 서로를 거의 몰랐습니다. 자기 집안만 알지, 다른 집안의 혼맥(婚脈)이나 퇴계 제자들의 연맥(緣脈)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죠. 퇴계 제자들 중에 불천위가 많습니다. 그래서 서로 ‘알고 지내자’는 데서 출발했죠. 이제는 종손의 삶을 지키는 일이 우선입니다. 조상의 가르침대로 살아왔고, 그것을 이어 가는 게 우리의 이유입니다. 지금 가장 큰 난관은 종손들의 결혼 문제입니다.”
그의 목소리엔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제사 부담 때문에 결혼을 미루는 경우가 많다. 요즘은 대부분 아이를 한두 명만 낳는다. 딸만 있는 집이 많고, 양자 제도는 사라졌다.
“이건 개인 문제가 아니라 종가 전체의 문제입니다. 지금은 음식도 음복하지 못하고 버려집니다. 과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퇴계 선생도 검소하게 지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회장은 불천위 제사를 전부 줄이고, 기제사는 ‘가정의 달’에 4대를 모아 한번에 지낸다.
“4대 봉제사에 불천위까지 10번이고, 설·한식·추석·동지 차사(茶祀)까지 하면 14번입니다. 그럼 못 견뎌요. 우선 사람이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장자 상속도, 양자 제도도 없어졌습니다. 딸만 있으면 상속이 딸에게 가고, 문중 재산도 따라갑니다.”
결혼도 어렵고, 양자도 들이지 못하고, 상속마저 끊긴 현실이다. 결국 과제는 하나다. 종가를 어떻게 존속시킬 것인가다.
“예전처럼 떡 얻어먹으러 제사에 오는 시대가 아닙니다. 지금은 적절한 양으로, 사람들이 와서 함께 나눌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런 전통을 가진 나라는 세계적으로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긍지로 여깁니다.”
그는 종가문화를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제사만을 대상으로 할 것인지, 종택과 종가의 생활 전체를 아우를 것인지 논의하고 있는 단계다.
“성(姓)과 이름의 전통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걸 세계에 어떻게 설명할지를 고민합니다.”
‘종가를 지속 가능하게’
— 안동이 종가의 중심이 된 배경이 있나요?
“한양에서 정치적 갈등이 생길 때마다 안동으로 내려왔습니다. 퇴계 제자들이 물러나 돌아온 곳이니까요.”
그가 지키려는 것은 건물이나 의례가 아니다. 조상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온 삶의 방식, 그 본질이다. 인터뷰 말미에 이목 회장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종택은 한번 지키는 것으로 끝나는 공간이 아니라, 세대마다 다시 선택해야 유지되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제는 개별 집안 이야기가 아니라 종가문화 전체를 어떻게 지켜 갈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기록을 남기고, 다음 세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겨울의 삼백당은 담담했다. 낮게 기운 볕과 말수가 적은 바람이 마루를 스쳤다. 그 고요는 공허가 아니었다. 삶과 전통을 지켜 내려는 선택의 무게가 깃들어 있었다.
— 이 시대 종손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종손이란, 조상의 소원을 자신의 인생과 맞바꾸더라도 끝내 지켜 내는 사람, 다시 말해 ‘약속을 어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종손으로 산다는 것은 형식을 신성시해 가문을 소진시키는 일이 아니라, 전통과 현실 사이의 균형점을 찾아 종가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종손의 결단
학봉 선생 제15대 주손 김종길.“종가는 과거가 아니라, 혼란의 시대를 붙드는 마지막 기준입니다.”(김종길)
안동은 오래된 질서를 품은 도시다. 그 질서의 가장 깊은 층위에 자리한 존재가 종가이고, 그 종가의 무게를 떠안은 이가 종손이다.
영종회 초대 회장을 지낸 김종길 고문은 학봉 선생의 15대 종손이다. 불천위 영남 종손들의 모임을 창립하며 ‘종손은 나서지 않는다’는 오랜 불문율을 스스로 깼다. 그는 “종손이 어디에 살든 종가는 옮길 수 없다”고 말한다. 종가는 거주지가 아니라 책임의 자리라는 뜻이다.
그가 말하는 영남 종가의 특징은 분명하다. 문중의 중심이 종가에 있고, 사당과 제사 역시 종가를 중심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경기 지역은 재실(齋室)이나 기념사업회 중심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지만, 영남은 아직도 종가가 중심을 이룹니다. 우리가 최고라는 뜻이 아니라, 전통의 원형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영종회가 출범한 이후 가장 뜨거운 논의는 불천위 제사의 시간과 형식이었다. 새벽에 지내던 제사를 저녁 시간대로 옮기고, 형식은 간소화하되 의미는 지키자는 데 뜻이 모였다. 김 고문은 “조상을 공경하는 제사가 고통이 된다면 그건 본뜻에서 멀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제사의 의미와 기본은 지켜야죠. 하지만 시대는 변했습니다. ‘의어금이불원어고(宜於今而不遠於古)’, 지금에 맞되 옛 법도를 멀리하지 말자는 겁니다.”
김종길 고문은 국내 정보기술산업의 성장기에 삼보컴퓨터에서 사장과 부회장을 지낸 전문경영인이다. 2008년 무렵 낙향해 학봉종택에 거주해 왔다. 그는 퇴계 학맥을 연구하는 학술·문화단체에서 중심 역할을 하며 도산서원 선비수련원 원장으로도 10여 년간 봉사했다.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삶을 몸소 보여 주는 사례가 아닐까.
그의 시선은 제사에만 머물지 않는다. 영종회는 인간성과 도덕성 회복을 모임의 핵심 가치로 내세운다. 물질만능과 이기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종가가 마지막으로 붙들 수 있는 공공적 역할이라는 판단에서다.
“도덕과 윤리는 말로 외친다고 살아나지 않습니다. 종가는 보여 주는 자리여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배려하는 삶. 선비의 기본이죠.”
김 고문은 종가의 미래를 낙관하지도 비관하지도 않는다. 상속 제도의 변화, 저출산, 종손 단절 가능성 등 현실적 위기를 인정하면서도, “그럴수록 뿌리는 더 중요해진다”고 말한다.
종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김 고문의 답은 명료하다.
“종가는 과거를 지키는 집이 아닙니다. 혼란의 시대에 기준을 남기는 자리입니다.”
조용한 안동의 겨울처럼, 그의 말은 오래 여운을 남겼다.
“종가 음식은 할머니 손맛”
경북 지역 종부들 모임인 종가음식문화보존회 회원들.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최정숙 회장이다.종갓집 며느리는 종가의 살림을 맡는 사람이다. 제사와 접빈객(接賓客), 집의 관리와 손님의 동선까지 모두가 종부의 손을 거친다. 도산면 온혜리 노송정(老松亭)종택의 종부 최정숙(崔貞淑)씨는 경북 지역 종부 모임인 경부회(慶婦會)의 2대 회장을 지냈다. 현재는 종가 음식 보존을 위해 만들어진 종가음식문화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다. 진성 이씨 온혜파 18대 종손 이창건(李昌建)씨가 남편이다.
노송정종택은 퇴계의 할아버지 이계양(李繼陽·1424~1488년)이 1454년에 지은 집이다. 최 회장에게 종가 음식은 ‘명품’이기 전에 생활의 기억이었다. 종가 음식은 손의 감각, 불의 세기, 계절의 리듬이자 그 집안의 맛과 세월의 감각이다. 한 그릇의 국, 한 상의 제물 안에 그 지역의 농산물, 절기 감각, 제사·손님·일상의 질서 구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종가음식문화보존회는 경부회 산하 단체는 아니다. 경부회에서 뜻을 모아 파생했지만 회원 구성은 다르다. 단체는 2018년 5월 발족했으며, 코로나19 시기를 지나 다시 활동을 이어 오고 있다. 최 회장은 보존회의 출범 이유를 단순하게 설명했다. 편리함 위주의 식생활 속에서 종가의 음식이 너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그는 종가 음식을 이렇게 정의했다.
“종가 음식의 특징은 천연 조미료, 자연식,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할머니의 손맛입니다. 그 할머니로부터 이어져 온 내림음식이라 말할 수 있어요. 안동에 종가가 많잖아요.”
안동 종가 음식은 간결하고 절제된 상차림과 제례 중심의 음식 구조가 특징이다. 탕·적·나물·포·식혜가 기본 축이되 기름과 양념을 최소화한다. 각 문중마다 음식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공존하지만 ‘맛과 격(格)’으로 세월을 이어 왔다. 절기와 예법, 사람 사이의 거리가 담겼다고 할까.
제사 횟수를 사실상 절반으로 줄여
최 회장의 이야기는 화려한 종가 음식 자랑으로 흐르지 않는다. 음식은 결과일 뿐, 핵심은 사람과 가문이 유지되는 구조다.
그는 요즘의 제사 변화에 대해 “불천위 종가라서 바꾼 게 아니라, 시대가 그렇게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멀리서 오는 종친들을 고려해 새벽 1시에 제사를 지냈고, 그 관행이 불과 4~5년 전까지도 이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제사 시간 자체보다 제사 전후에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밤늦게 도착한 사람들 저녁 식사를 차리고, 제사 뒤 음복을 하고, 재우고, 자고 가는 이들의 아침 식사까지 챙기는 과정이 이어지면서 오히려 제사 외적인 부담이 더 커졌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철 기준으로 초저녁 6시나 7시쯤 제사를 지내고 끝나면 각자 돌아가는 방식으로 바꿨다고 한다. 제사의 구조 자체를 없앤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4대와 불천위를 모시되, 조상 내외분을 합사(合祀)해 제사 횟수를 사실상 절반으로 줄였다.
젊은 세대에게 제사를 설명할 때 “제사가 아니면 동서들이 한자리에 모일 일이 거의 없고, 일 년에 대여섯 번이라도 함께 앉아 얼굴을 보고 밥을 먹는 시간이 생긴다면 반드시 나쁜 일은 아니다. 또 제사 음식은 조상님이 하나도 안 가져가신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차분히 설명하면 대개는 30분 안에 고개를 끄덕이더라고 덧붙인다.
강은 굽이치고, 집은 곧다
농암 이현보의 17대손인 이성원 종손. 뒤로 농암종택의 모습이 보인다.도산면 가송리로 향하는 길목에서 낙동강은 몸을 풀듯 한번 크게 굽이친다. 절벽 아래 자리한 고산정(孤山亭)을 지나 강을 따라 안으로 파고들면 농암종택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랑채 긍구당(肯構堂)은 겨울에도 아름다웠다. 겨울 볕을 받아 반짝이는 처마와 기와가 고택의 늠름한 자태를 증언하는 듯했다.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1467~ 1555년)는 조선 전기의 문신(文臣)으로 학문·정치·은거의 균형을 보여 준 인물이다. 국문학계에서는 그가 한글로 지은 ‘어부가’ ‘농암가’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이현보가 1540년 형조참판에서 물러나자 동시대인들은 깊은 아쉬움을 표했다. 이는 한 관료의 은퇴라기보다, 조정이 도덕적 표준을 떠나보낸 사건으로 인식됐다. 임금의 친견과 하직 인사, 금서대·금포 하사, 대신들이 총출동한 전별 행렬까지 이어진 장면은 전례를 찾기 어려운 것이었고, 도성 사람들까지 길가에 나서 눈물로 배웅했다고 전한다.
《실록》은 이를 ‘염퇴(恬退)’라 기록했다. 특히 이황은 농암을 ‘선생’이라 부르며 사흘 동안 모두 14수의 전별시를 남겼다.
농암종택은 안동댐 건설로 지금의 자리로 이건되었다. 터는 옮겨졌지만 집이 풍기는 기풍은 흔들리지 않았다. 현재 종택에는 후손 이성원(李性源) 선생이 거주하고 있다. 농암 17대손인 그는 성균관대 한문교육과를 졸업하고 한국한문학을 전공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선생은 영종회 내부에 만들어진 종가문화연구원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안동의 종가문화는 조상과 사당, 종택, 종손·종부, 지손, 문중이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는 구조”라고 강조한다. 이 유기체는 모두 훌륭한 인물을 모시고, 따르고, 마침내 그러한 인물이 되려는 염원과 맞닿아 있다. 다음은 이 선생의 말이다.
“안동의 종가문화는 안동 사람들의 소중한 자산이자, 문화의 내면적 양상입니다. 안동에 분포한 수많은 종택과 불천위 사당, 그리고 이를 지켜온 문중의 존재는 그 외연적 현상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농암종택을 지키는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이 선생은 고택 개방과 숙박을 ‘상행위’가 아니라 ‘관리’라고 설명한다. 집을 따뜻하게 유지하지 않으면 습기와 곰팡이로 집이 상하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종가의 가장 큰 난제는 봉제사일지 모른다. 제사는 농경사회에서는 공동체의 축제였지만, 지금은 갈등의 원인이 되기 쉽다. 그는 “이 시대에 가장 외롭고 고독한 존재가 종손, 종부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가 종가를 지켜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종손과 종부는 사인이자 공인이며, 문중의 얼굴이기에 쉽게 무너질 수 없다”는 것이다.
안동에 불천위·종택이 집중된 까닭
이성원 선생이 안동에 종택이 많은 이유와 이 지역의 종가문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이성원 선생은 3월 말 영종회 차기 회장에 취임할 예정이다. “변화하고 개혁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며 자신의 임기 동안 “작은 초석이라도 놓고 가고 싶다”고 했다.
— 왜 유독 안동에 종택이 많습니까?
“전국을 놓고 보면 종택은 안동에 유독 집중돼 있습니다. 전라·경기·충청도에는 종택 자체가 거의 없거나, 있더라도 안동에서 말하는 ‘종택의 조건’을 갖춘 집은 드뭅니다. 반면 안동에는 이름이 분명한 종택만 해도 수십 집이 넘고, 불천위로 모셔진 인물도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이건 우연이 아니라 역사적·문화적 구조의 결과입니다.”
안동의 불천위 종택은 47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퇴계와 쌍벽을 이루던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년)은 종택과 종손이 없다.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율곡의 종택이 어디에 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 종택의 핵심을 한 가지로 꼽는다면 무엇입니까?
“‘중시조(中始祖)’ 제도입니다. 안동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나오면 그 인물을 중심으로 역사가 새로 시작됩니다. 그 인물이 곧 중시조가 되고, 그분을 모시기 위한 종택이 생기며, 문중과 집성(集姓)마을이 형성됩니다. 훌륭한 인물의 출현이 곧 종택의 출현과 맞물려 온 구조입니다.”
— 같은 성씨에서도 종택이 여러 곳 생기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안동에서는 형제·부자 사이에서도 각각 불천위가 모셔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회 풍산 류씨의 경우처럼 아버지와 아들, 형제가 각각 불천위가 되는 사례도 있습니다. 그러면 같은 씨족 안에서도 여러 종택과 문중이 형성되고, 각기 다른 문화가 생깁니다.”
— 그로 인해 문화적 특징이 만들어졌다고 보시는군요.
“네. 종택을 중심으로 한 문중문화가 분화되면서도, 서로를 의식하는 선의의 경쟁이 생겼습니다. 제사 방식, 의례의 시간, 생활의 규범이 집안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하지만 그 차이는 갈등이 아니라 긴장과 자극이 되었고, 그게 안동 문화의 역동성이 되었습니다.”
— 불천위로 모셔진 인물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안동의 불천위는 거의 예외 없이 학자입니다. 관직에 나아갔더라도 학자적 성취가 전제입니다. 순수 학자로 처사(處士)에 머문 분도 적지 않습니다. 문집이 남아 있고, 글과 사유로 후대의 기준이 된 인물이어야 불천위가 됩니다. 안동 문화의 지향점이 어디였는지를 잘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 안동 사람들이 지켜 온 궁극의 가치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훌륭한 인물을 모시고, 따르고, 닮아 가려는 염원입니다. 안동의 종택과 종가는 단순히 옛집을 보존하는 장치가 아닙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을 길러 내려는 문화적 장치입니다. 예의와 염치, 그리고 부끄러움을 아는 태도. 그것이 바로 안동 종가문화의 핵심이자 종택이 유지된 이유죠.”
겨울 종가가 던지는 질문
겨울의 온계종택은 ‘기억을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를 묻는다. 불에 탔던 집을 다시 세운다는 것은 건물의 외형을 복원하는 일이 아니라, 사라질 뻔한 시간을 다시 불러와 오늘의 숨결과 잇는 작업이다. 농암종택은 ‘지금을 어떻게 이어 갈 것인가’를 묻는다. 살아 숨 쉬는 종가가 될 것인지, 보존만 되는 전시물로 남을 것인지는 결국 지금을 사는 이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겨울은 두 종택의 본질을 더욱더 확연하게 드러낸다. 겨울 나목에 잎이 없으니 정신의 생목(生木)이 선명해지고, 전통이란 뿌리 또한 고스란히 드러난다. 도산면의 겨울 길을 걸으며 두 종가는 하나의 은유로 다가왔다.
종가는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 아니다. 오늘도 누군가 선택해야만 이어지는, 현재진행형의 삶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내일로 건너가는 삶의 징검다리 기록이다. 겨울의 종가는 그렇게 말없이 서서, 기억과 선택 사이에서 묵묵히 길을 묻고 있었다.
인터뷰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김병일 이사장
“종가는 살아 있는 전통이다”

안동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에서 김병일(金炳日) 이사장을 만났다. 그는 경제관료(기획예산처 장관)로 공직의 정점을 거친 뒤,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과 한국국학진흥원장을 맡아 안동을 거점으로 전통문화와 국학 진흥에 힘써 왔다. 그는 전통을 세 갈래로 나눠 설명했다. 왕통, 학통, 그리고 가통(家統)이다. 왕통은 조선왕조로 끝났고, 학통은 학문 연구로 이어질 뿐 생활 속 계승은 희미해졌다.
“지금까지 실질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가통입니다. 중시조를 모시고 불천위를 지내며 종택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전통이죠.”
다만 그는 이 가통 역시 “많이 흐릿해졌다”고 진단했다. 그나마 가통이 또렷하게 남은 곳이 영남이고 그중에서 안동, 그리고 도산을 꼽는다. 김 이사장은 이를 인공호수에 비유했다.
“물이 빠지면 언덕이 먼저 드러나고, 가장 깊은 곳이 마지막까지 물을 간직합니다. 영남이 그렇고, 경북 북부가 그렇고, 안동이 그렇고, 그중에서도 도산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지점 같습니다.”
퇴계종택과 도산서원 일대가 상징적 중심이라는 뜻이다.
김 이사장은 기호와 영남 지역 종가의 차이를 짚었다. 기호 쪽은 종손이 아니라 집안의 실세가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제례도 종가가 아닌 재실에서 이뤄지기도 했다. 반면 영남, 특히 안동의 종가는 여전히 종손 중심의 질서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는 농암종가를 두고 “농암공화국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종손의 상징적 권위가 유지되는 곳”이라고 했다.
“지킬 것은 지키고 바꿀 것은 바꿔야”
종가문화의 유네스코 무형유산 등재에 대해서는 신중론을 폈다.
“서원보다 종가는 훨씬 어렵습니다. 어디까지를 종가문화로 볼 것인지, 왜 어떤 종가는 되고 어떤 종가는 안 되는지를 설득할 기준이 필요하죠. 유네스코가 요구하는 두 축이 ‘보존’과 ‘활용’인데 21세기 인류에게 어떤 가치를 주느냐가 핵심입니다.”
퇴계종가와 도산서원 사례는 그가 보기에 하나의 기준점이다. 세 차례 화재로 소실된 종택을 영남의 제자 후손들이 힘을 모아 다시 세운 역사, 그리고 2001년 설립된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의 성장 과정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살아 있는 사례라는 것이다.
“지킬 만한 가치는 계승하고, 시대에 맞게 바꿀 것은 바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통은 미덕이 아니라 짐이 됩니다.”
그에게 종가문화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아이들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살아 있는 교과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