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기행

자유와 평화의 길 ‘발틱 로드’를 가다

  • 글 : 차백성 자전거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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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70주년 맞아, 200여만 명이 인간사슬 형성해 소련의 압제에 항거했던 발틱 3국 자전거 縱斷
⊙ 라트비아 제1의 항구도시 리에파야는 러일전쟁 당시 발틱함대의 출발지
⊙ 라트비아 시골까지 메르스 소식 퍼져 ‘疫病환자’ 취급받기도
⊙ 1년에 한 번 開國하는 ‘우주피스공화국’… ‘강은 사람 옆을 흐를 권리가 있다’

車白星
⊙ 64세. 인하공대 토목과 졸업.
⊙ 대우건설 상무, 국토부 자문위원 역임. 現 경찰대학 외래교수, 《월간 자전거 생활》 편집위원,
    삼성경제연구소 CERI CEO 강사.
⊙ 저서: 《아메리카로드》 《재팬로드》 《유럽로드2014년》.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의 상징인 검은머리전당.
이 건물을 사용했던 이집트 및 아프리카의 무역상(검은 머리길드)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비바두스!”(에스토니아)
 
  “브리비바!”(라트비아)
 
  “라이스베스!”(리투아니아)
 
  1989년 8월 23일 저녁 7시, 구(舊)소련 치하에 있던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세 나라 국민 200여만 명이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고는 손에 손을 맞잡고 인간사슬을 만들었다. 각자 자국(自國)의 언어로 “자유를 달라!”며 목청껏 노래 불렀다.
 
  사슬은 속박의 상징이다. 인간사슬은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서 라트비아의 리가를 거쳐 리투아니아의 빌뉴스까지 무려 650km나 이어졌다.
 
  역사상 이보다 더 가슴 뭉클하고 평화적인 시위가 있었을까! 누구도 보지 못했고 그 어떤 상상력도 뛰어넘는 이 미증유(未曾有)의 이벤트를 ‘로이터’ ‘AP’ 등 유력 통신사들은 하늘에서 땅에서 전(全) 세계에 생방송으로 중계했다. 역사적 행동에 전 세계 사람들이 아낌없는 공감과 지지를 보냈다.
 
  시위의 결과는 엄청났다. 이듬해 세 나라 모두 꿈에도 그리던 독립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얻어낸 것이다. 인간의 간절한 염원이 만들어낸 이 아름답고도 놀라운 퍼포먼스는 ‘발틱 웨이(Baltic Way)’라 불리며 ‘인간이 만든 가장 긴 띠’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유네스코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유럽에 이런 나라들이 있었어?”
 
  세 나라 인구를 합쳐봐야 서울 인구의 반도 안 되고 면적 역시 한반도보다 작은 나라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북유럽 발틱해를 접하고 있어 발틱 3국이라 불린다. EU 회원국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아직은 낯설게 느껴진다.
 
 
  자유와 평화의 상징, ‘발틱 웨이’
 
  알고 보면 우리와 지정학적으로 비슷한 점이 참 많다.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여 중세부터 독일, 스웨덴, 덴마크, 러시아, 폴란드 등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만의 고유한 전통과 언어를 꿋꿋이 지켜왔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로부터 독립했으나, 1939년 히틀러와 스탈린이 맺은 ‘독소(獨蘇)불가침조약’으로 다시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세 나라는 세계 지도에서 사라진다. 주권을 잃은 지 50년이 되는 해에 펼쳐진 ‘발틱 웨이’ 퍼포먼스로 그들은 실로 50년 만에 독립을 거머쥔 것이다.
 
  우리에게 광복의 기쁨과 분단의 아픔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이들 발틱 3국의 역사와 독립 스토리는 우리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들이 쟁취해 낸 자유와 평화의 상징인 ‘발틱의 길’을 되짚어보면, 어떤 희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자유와 평화를 향한 작은 희망의 불씨를 전달하고 싶은 생각으로 올해 자전거 여행의 목표를 ‘발틱 웨이’로 잡았다. 그 길은 인간의 의지는 어떤 무력(武力)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증명한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지난 5월과 6월, 러시아와 북유럽을 포함한 발틱 3국 로드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중에서도 숱한 애환이 교차되었던 ‘발틱의 길’을 두 바퀴 자전거로 달렸던 벅찬 소회를 《월간조선》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첫 출발지, 탈린
 
1989년 8월 발틱 3국에서는 200여만 명이 거리로 나와 인간사슬을 만들어 자유와 독립을 외쳤다.
  자유를 향한 200만명의 염원이 한데 모여 독립을 이뤄낸 ‘역사의 길’을 자전거로 달린다! 그 부푼 기대를 안고 여정을 시작한 첫 출발점은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Tallinn). 2011년 유럽문화수도로 선정되면서 북유럽 관광도시로 급부상하고 있는 곳이다.
 
  막 오른 무대에 선 초년배우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헬싱키에서 페리를 타고 핀란드만(灣)을 건너 에스토니아 탈린항(港)으로 들어갔다. 거리는 80km에 불과하지만 입출항(入出港) 수속 등으로 3시간 정도 걸렸다. 배에서 마틴이라는 미국의 친절한 노(老) 자전거 여행가를 만나 지루함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발틱의 길’ 여정의 첫 번째 인연인 것이다. 여러 차례 발틱 3국을 여행했다는 그는 내게 다양한 정보와 함께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출발의 조짐이 좋다.
 
  그는 “에스토니아가 EU 가입 국가이기는 하지만 공산 치하에서 독립한 지 20여 년에 불과해 자전거 문화나 기본 인프라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했다. 또 “당시 인간 띠(Human Chain)의 길은 수도와 수도를 연결하는 고속도로가 대부분이라 자전거 통행은 어렵다. 그래도 3국에서 자전거로 달릴 수 있다면 그것이 다 ‘발틱의 길’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길을 물어볼 땐 가급적 젊은 사람에게 해야 수고를 덜한다”는 조언도 해주었다. 그는 교통사고, 자전거 도난, 소매치기에 유의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문화며 언어며 워낙 생소한 지역이라 적잖이 긴장했지만, “다 사람 사는 곳인데 부딪쳐보자!” 하며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탈린항에서 힘찬 첫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자전거 핸들 바(Handle-bar)에 작은 가방 하나만 매단 단출한 차림으로 구시가지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인구 40만명 정도인 탈린의 볼거리는 바날린(Vanalinn)이라고 불리는 구시가지에 다 모여 있다. 탈린항에서 자전거로 10분 정도 걸렸으니 불과 2km 내외, 걸어서도 무리 없는 거리다.
 
 
  여행의 재미는 속도와 반비례
 
  페달을 밟으며 구시가를 주유(周遊)하니 감동적인 역사의 한 장면을 만들어낸 에스토니아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역사는 사람이 만들고, 기적 또한 사람이 만드는 법. 그래서일까.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가 역사의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아는 만큼 보인다’ 이 말은 바로 자전거 해외 투어를 나가는 사람들을 위한 말이 아닐까 싶다. 여기저기 보고 듣고 느끼는 데 자전거만 한 교통수단이 또 있을까. 여행의 재미는 속도와 반비례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적당한 거리에서 현지인들과 함께하며 여행의 시간들을 채워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자전거 여행이 주는 ‘느림의 미학(美學)’ 아닐까.
 
  발틱 3국은 대체로 중세(中世)시대 고성(古城)과 거리를 그대로 보존한 곳이 많아 유럽의 과거와 최근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곳 탈린의 구시가지 역시 무역으로 번성했던 한자동맹(중세시대 독일 북쪽과 발틱해 연안에 있는 여러 도시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연맹. 주로 해상 교통의 안전을 보장하고, 공동 방호와 상권 확장 따위를 목적으로 했다) 당시 만들어진 중세의 분위기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었다. 건물 곳곳에 과거에 쓰던 도르래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물류(物流)의 이동이 빈번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골목의 벽 장식이 된 비석들
 
독일에서 온 자전거 여행자들. 자전거 여행자들끼리는 국적이나 성별을 떠나 따뜻한 정이 통한다.
  그 대표적인 곳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카타리나 골목(Katariina kaik). 과거에는 카타리나 수도원에 이르는 곳이었다. 현재는 없어졌지만 당시에 수도원에 안치되었던 망자(亡者), 즉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의 비석들을 골목 벽에 붙여 놓아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안으로 들어서니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시대로 시간여행을 온 듯 오래된 성벽과 붉은 지붕들, 돌이 깔린 좁고 아기자기한 골목길이 이어져 있었다. ‘마카담’(유럽중세 마차를 위한 돌길) 도로 위를 자전거로 달리니 충격이 심했다. 그 옛날 완충장치가 없었던 마차를 탄 ‘귀족들의 엉덩이도 편치 못했으리라’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지금도 수공업(手工業) 공방(工房)들의 조합인 카타리나 길드가 있고, 골목 양편으로 아기자기한 공예품,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어 중세스러운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몫하고 있다.
 
  일명 쌍둥이탑이라 불리는 비루(Viru)문으로 들어서면 고딕 건물의 양식이 즐비한 시청광장이 나온다. 건물의 규모나 그 웅장하고 세심한 예술성이 “아, 여기도 엄연히 유럽의 화려했던 영화(榮華)를 간직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로마나 파리, 피렌체에서 느낄 수 없는 독특한 맛, 그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탈린에서 전망 좋은 톰페아 언덕은 빼놓을 수 없는 곳. 현재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는 톰페아 성을 지나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 탈린 항구와 신·구도심의 조화를 이루는 건물들이 눈 아래에 펼쳐진다.
 
 
  에스토니아에도 한국 식당이…
 
  여행의 리듬이 안정된 궤도에 접어들면 슬그머니 잊고 있던 ‘집 밥’ 생각이 나는 법. 여행에서 가장 큰 적은 향수병(鄕愁病)이다.
 
  집 떠난 지 열흘이 넘어가자 문득 쌀밥과 시큼한 김치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여행 안내소에 한국 식당이 있는지 물었더니 “시 외곽에 한 군데 있다”고 했다. 도대체 어떤 분이 여기까지 와서 한국 식당을 할까? 궁금증이 앞섰다. 그러나 그 식당은 지도만으로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그런대로 영어가 통하지만 중장년층은 차라리 몇 마디 할 줄 아는 러시아어가 더 유용할 정도였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한 중년 남자가 눈에 띄었다. 얼른 다가가 지도를 들이대고 물었다.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당신은 지금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어요. 나를 따라오시오”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무얼 믿고?’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것도 여행운’이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다시 한 번 그의 눈을 보고는 그를 따라 차가 있는 곳으로 가 차에 올랐다. 마침 그의 차는 대형 픽업트럭으로 자전거를 싣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식당 이름은 우리말로 ‘아리랑’이었다. 차에서 내려 남자를 향해 “스파시바!”(러시아어로 ‘감사합니다’란 뜻)를 연발하니 “다스비다니야!”(러시아어로 ‘잘 가시오’) 하고는 훌쩍 돌아서 가버렸다. 러시아 등 옛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친절이나 서비스의 개념이 매우 희박하다. 무뚝뚝하지만 처음 본 이방인을 목적지까지 직접 데려다준 그의 친절은 오래 기억할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찾아든 식당의 주인은 카레이스키 3세. ‘세르게이 마가이’라는 고려인이었다. 그는 어눌한 한국어로 “러시아 연해주(沿海州)에 살던 할아버지가 1937년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해 그곳에서 태어났다”며 어렸을 적부터 부친에게서 들은 ‘디아스포라(이산)’의 아픔을 풀어놓았다. 그 후 중앙아시아와 러시아를 전전한 끝에 여기까지 흘러왔다고 했다. 인생유전(人生流轉). 그를 통해 한민족의 강인한 생존력과 ‘나라가 있다는 현실이 얼마나 다행한 것인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아니! 자전거로 발틱 웨이를?!”
 
  나의 여행 계획을 듣고 무척 놀라는 눈치였다.
 
  “정말 대단한 일을 혼자 하시는군요. 당신이야말로 끈질긴 한국인입니다!”
 
  그는 활짝 웃으며 나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곧이어 주방장인 러시아인 아내를 불러 김치찌개, 된장찌개를 푸짐하게 내왔다. 간만의 한식이라 “밥아! 너 본 지 오래구나!” 하며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그릇을 비웠다. 머나먼 이국에서 느낀 한민족의 끈끈한 정. 그 덕분에 다음 목적지 타르투(Tartu)로 갈 새로운 힘을 얻었으니, 이것이 바로 자전거 여행이 주는 우연의 행운이 아닌가 싶다.
 
 
  대학생들, “서유럽에서 일자리 구하는 게 꿈”
 
장중한 列柱가 인상적인 타르투대학 본관.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다.
  에스토니아, 아니 발틱 3국을 알기 위해서 타르투는 꼭 들러야 한다. 겨우 10만명이 사는 한적한 시골 도시지만 문화, 예술, 과학 등 에스토니아 정신의 본향(本鄕)이기 때문이다. 북유럽 전체에서도 최고(最古)의 대학교 중 하나인 타르투대학교(1632년 설립)를 필두로 교육부, 최고법원, 국가기록원, 과학단지 등 여러 중요 기관들이 위치해 있다.
 
  우선 타르투대학을 찾았다. 한곳에 각 단과대학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저기, 언덕 너머에도 몇 개의 대학이 있었다. 캠퍼스 안에는 13세기에 지은 성당이 뼈대만 남아 고풍스런 중세 대학의 멋을 풍겼다. 야트막한 동산을 구름다리로 건너가니 이 대학 출신 유명 문인, 과학자의 동상이 서 있었다.
 
  마침 도서관 앞에서 공부하다 휴식 중인 티나를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러시아 교류학과’ 졸업반이라고 했다. 졸업 후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물었더니 서슴없이 “외교관이 되어 해외로 나가고 싶다”고 했다. 그는 “같은 과(科) 친구들도 서유럽의 일자리를 구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고 했다.
 
  “두뇌 유출이 많으면 에스토니아는 앞으로 누가 끌고 가죠?”
 
  나의 물음에 티나는 웃으며 말했다. “임금이 낮으니 별수없죠 뭐. 그렇지만 잘될 거예요” 하고는 다시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어느 나라나 젊은이들과 이야기해 보면 취업과 여행이 큰 관심사다. 결혼이나 육아에는 대부분 별 관심이 없었다.
 
  발틱 국가들을 여행하며 영어가 통하는 젊은이들과는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지만 상대적으로 중장년층과는 대화를 못 했던 것이 아쉽다. 이 지역을 여행할 계획이 있다면 러시아어와 키릴 문자를 좀 익혀두면 상당히 유용할 것 같다.
 
 
  ‘백만송이 장미’의 고향 리가
 
라트비아 리가의 점령박물관에서 근무하는 마르타는 발틱웨이와 관련된 개인소장 사진들까지 보여주었다.
  두 번째 나라인 라트비아로 넘어왔다. 맨 먼저 찾은 곳은 리가(Riga). 발틱 3국 한가운데 위치한 수도 리가는 인구 80만명으로 발틱 3국에서 경제와 무역의 중심지다. 리가항으로는 세계 각국의 무역선, 대형유람선이 수시로 드나든다.
 
  예술의 도시로도 손색이 없다. 심수봉이 불러 히트한 노래 ‘백만송이 장미’의 작곡자 레이몬즈 파울즈가 이곳 출신이다. 언제인가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된 적이 있는 영화 〈백야〉의 주인공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고향 역시 리가이다.
 
  발틱 웨이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기 위해 시내 중심가에 있는 ‘점령박물관’을 방문했다. 침략과 독립 관련 자료를 전시한 박물관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발틱 웨이’ 전시물이 없어 직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자전거로 ‘발틱의 길’을 달리기 위해 한국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관련 자료를 볼 수 없겠습니까?”
 
  내 간절한 요청을 들은 직원 마르타는 잠시 다른 직원들과 의논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일 다시 방문하면 직원들의 집에 각자 보관 중인 사진도 보여드리고, 사람들의 경험담도 들려드릴게요.”
 
  지금까지 해외여행을 다니며 무수히 많은 박물관, 미술관, 기념관 등을 돌아보았지만 직원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까지 보여주겠다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국과 라트비아, 피지배자 사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공감대를 이룬 것이리라. 그들의 배려에 코끝이 시큰했다.
 
  다음날 다시 박물관에 들러 귀한 자료들을 마음껏 보는 행운을 누렸다. 숨 막히는 풍광보다도 사람에게서 느끼는 감동이야말로 자전거 여행이 아니면 절대 맛볼 수 없는 경험이다.
 
 
  러일전쟁 당시 발틱함대의 출항지
 
리에파야항에는 러일전쟁 당시 발틱함대의 기지가 남아 있다.
  1894년 청일(淸日)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와의 일전(一戰)을 각오한다. 조선을 병탄하고 세계무대에 등장하려는 비장(悲壯)의 선택이다. 인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에 기습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전쟁은 시작된다.
 
  전쟁 초기만 해도 여순 203고지전과 봉천(심양)대회전의 두 육전(陸戰)에서는 두 나라가 대등했다. 현대전과 달리 당시에는 공군이 없었으니 바다를 제패한 자가 강자이고 승자였다. 일본과의 단 한 차례의 해전으로 러시아는 두 손을 들고 만다.
 
  1904년 10월, 현재 라트비아 제1의 항구도시인 리에파야(Liepaja)에 기지를 두고 있던 발틱함대에 장장 2만5000km의 대장정 명령이 떨어진다. 휘하 참모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무리수를 둔 것이다. 그는 국제정세에도 어두웠다. 발틱함대는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려 했지만, 일본과 동맹관계에 있던 영국은 이를 거부한다. 아프리카 대륙의 희망봉을 돌아 싱가포르에 도착해 연료(석탄)를 구입하려 했지만, 이 역시 거부당한다. 싱가포르 역시 영국령(領)이었던 것이다. 발틱함대는 구걸하다시피 해서 겨우 무거운 저질탄만 잔뜩 싣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05년 5월 대한해협. 발틱함대의 노란 마스트가 새벽안개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극동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기지를 눈앞에 두었으니 긴장이 풀어져 있었다. 일본 연합함대의 도고 헤이하치로(東鄉平八郞) 제독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황국의 존망이 이 전투에 달려 있다. 전 장병은 맡은바 자리에서 분투하라!”라는 수기(手旗)를 올리고 독전(督戰)한다.
 
  종대(縱隊)로 지나가는 발틱함대를 연합함대는 횡대(橫隊)로 막아서며 일제히 포문(砲門)을 열었다. 이는 일본의 ‘丁’자 전법으로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鶴翼陣) 전법을 원용한 것이다. 일본의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그의 역작 《언덕 위의 구름》에서 일본의 연합함대를 이끈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전투 직전 이순신 장군에게 제를 올리며 무운(武運)을 빌었다고 쓰고 있다. 도고는 승전기념장에서 “넬슨에 나를 비견하는 것은 용인하나, 조선의 이순신에 비하면 부사관도 못 된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달콤한 추억을 되새기려 오셨나요?”
 
  발틱함대의 기지가 있던 리에파야항을 떠난 러시아 선단 48척 중 고작 3척만(그중 기함 오로라호는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항에서 ‘기념관’으로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살아남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갔다. 이렇게 20세기 최초의 해전은 일본 해군의 압승으로 막을 내렸다. 그해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니, 대한제국은 이때부터 실질적으로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리에파야 관광안내소에서 시티맵을 구해 카로스타(Karosta) 지역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 이 일대는 19세기 후반부터 러시아의 거대한 해군 기지가 있었다. 지금도 발틱해를 지키던 포대(砲臺)의 흔적은 물론 당시의 해군학교, 군(軍) 형무소 등이 남아 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관장을 만나 당시 발틱함대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무척 냉소적이었다. “잘 알고 왔으면서 달콤한 추억을 되새기려 하느냐”는 식이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밝히고 여행 목적을 차분히 설명하자 그제야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부드럽게 응답을 했다. 그는 “당신을 일본인으로 오해했다”고 했다. 헤어질 땐 “안전여행 하길 바란다”며 긴 포옹까지 나누었다.
 
  요즘 발틱 국가 관광 상품이 ‘뜨고’ 있다. 북유럽이나 러시아와 연계해 제법 늘어나는 추세다. 비교적 덜 알려진 유럽 국가의 일원으로 찬란한 중세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 있어 관심이 많으리라. 하지만 이 지역을 여행할 때 이름난 탈린이나 리가, 빌뉴스(Vilnius)만 들를 것이 아니라 이곳 리에파야도 들러보면 어떨까. 우리가 왜, 어떻게 나라를 잃었는지 그 현장에 서서 과거사를 반추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발틱 3국에까지 퍼진 ‘코리아 메르스’
 
  나는 해외여행 때마다 행하는 오랜 습관이 하나 있다. 자전거 핸들 바에는 여행국 국기를 달고 뒤에는 그것보다는 조금 더 큰 태극기를 달고 달린다. 앞에 걸린 국기는 그 나라의 법과 규정을 준수하겠다는 것이고, 뒷자리에 달고 있는 태극기는 자랑스러운 조국을 세상에 알리고 또 나라의 품위에 걸맞게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5월 중순 서울을 떠나올 땐 이런 단어조차 몰랐다. 메르스….
 
  “당신 기침 안 해요?” 조금 더 달려 다른 마을에 가니 “당신 열 있어요?” 그날 저녁 숙소에 찾아드니 프런트 안내원까지 “요즘 한국 사람과는 악수도 못 하겠네요…” 하며 말꼬리를 흐린다.
 
  낯선 곳에서 가는 곳마다 역병(疫病) 환자 취급을 받다니! 며칠을 갈등하다가 급기야 태극기를 접어 배낭에 넣고 말았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수많은 유능한 행정가와 정치가, 민완의 언론인들이 과연 무슨 득이 있고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전 세계를 향해 이런 조종(弔鐘)의 쌍나팔을 불었을까. 지구 반대편 라트비아의 인구 5만명도 안 되는 ‘시골구석에까지 들릴 정도’로 말이다.
 
  라트비아인에겐 ‘한국의 메르스는 세계사 책에 나오는 중세 유럽 때 페스트가 창궐해 인구의 30%가 죽은 사건’처럼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낯선 타국(他國) 땅, 간절한 염원이 기적을 일으킨 현장의 얘기를 전하기 위해 페달을 밟는 내게 고국에서 날아온 메르스의 확대재생산 소식, 가슴에 대못으로 박혔다. 그것도 여러 사람이 긴밀히 협조해 대못을 만들어 지구 반대편까지 보낸 것이다.
 
  하지만 다음날, 접었던 태극기를 꺼내 곱게 펴 다시 걸었다. 나 역시 ‘대못을 만든 여러 사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밤새 자성(自省)했기 때문이다.
 
  이것도 지나간 과거, 다시는 이런 우(愚)를 되풀이하지 말자 다짐하며 마음을 추스르고 다음 행선지를 향해 힘차게 페달을 돌렸다.
 
 
  ‘일본의 쉰들러’ 스기하라 지우네
 
유대인 6000여 명을 구한 일본 외교관 스기하라 지우네.
  매년 8월이 오면 우리 매스컴들은 일제히 일본이 제국주의 시절에 저지른 만행에 대해 공격 일변도다. 나 역시 광복의 달엔 유독 분노가 치민다. 일본의 지배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남북이 갈라지지 않았을 테니까….
 
  일본은 과거사를 절대 진정으로 반성하지 않는다. 그들의 머릿속엔 ‘우리가 35년간 베푼 시혜(施惠)를 왜 고맙게 생각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뿌리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패전의 분함을 가슴깊이 간직한 그들이다. 더 이상의 ‘반성 애걸’로 국력을 소모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스마트폰 잘 만들고, 자동차 많이 수출한다고 해서 일본을 경시하려는 풍조는 경계해야 한다.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일본은 무서운 나라다. 오직 일본을 꿰뚫어보고 힘을 길러 대응하는 길밖에 없다.
 
  리투아니아 입국 후 첫 번째 목적지인 카우나스(Kaunas)를 지나며 내 마음속에 조그만 변화가 일어났다. 내가 지금까지 알아왔던 일본인이 아닌 새로운 유형의 일본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질곡과 광기가 난무하던 그 시대, 일본 사람 중에도 이런 의인(義人)이 있었단 말인가!
 
  시 관광 안내서에서 “오스카 쉰들러에 가려진 일본의 스기하라 지우네(杉原千畝), 그의 자비로움으로 6000명의 생명을 구했다!” 이런 제하의 글을 읽고 궁금증이 일어 즉시 그의 흔적이 전시되어 있다는 ‘제9요새(Deventasis Fortas) 기념관’을 찾아나섰다.
 
  그러나 시내에서 30여 km 떨어진 교외에 있는 그곳은 찾기가 무척 어려웠다. 물어물어 갔더니 다시 고속도로 입구로 가야 한단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던 중에 마침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비토라는 젊은이에게 안내를 부탁했더니 직접 안내해 주겠단다. 역시 ‘자전거 타는 사람은 자전거 타는 사람에게 길을 물으면 틀림없다’는 나의 오랜 경험이 이번에도 적중했다.
 
  ‘제9요새’는 원래 러시아가 국경을 지키기 위해 건설했던 요새 중의 하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군이 유대인 강제수용소로 사용했다.
 
  나치의 무자비한 유대인 탄압이 시작되자, 그들은 국외(國外)로 도피할 비자를 얻기 위해 일본영사관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리투아니아 주재 일본 영사는 39세의 직업외교관인 스기하라 지우네. 그때는 카우나스가 리투아니아의 수도였다. 일본 정부는 독일과의 관계로 유대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는 본국(本國) 정부의 훈령(訓令)에 반하여 일본 통과 비자를 자격조건 미달의 유대인에게 제한 없이 발급해서 많은 생명을 구했다. 이 일로 인해 스기하라는 외무성에서 해직되는 불운에 처하지만, 그는 후일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했던 일은 외교관으로서 잘한 일은 못 된다. 그러나 나를 보고 찾아온 6000명이 사지에 빠지는 것을 알고는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쉰들러 리스트’로 1200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구한 쉰들러보다 많은 수의 유대인 난민을 구했지만, 세상에 덜 알려진 스기하라 지우네. ‘용기 있게 인도적(人道的) 행위를 실천한 선한 일본인’의 이야기는 감동을 넘어 복잡미묘한 울림을 느끼게 했다.
 
 
  ‘우주피스공화국’
 
‘우주피스공화국’ 거리에는 이 나라(?)의 헌법이 각국 언어로 적혀 있다.
  리투아니아는 발틱 3국 중 가장 넓은 면적과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다. 수도 빌뉴스는 고풍스러운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 늘어서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고도(古都)에는 가볼 곳이 많은데, 여기저기 주유하다 보니 대성당이나 구시가지 옛 성채에 신물이 날 즈음 재미나는 볼거리를 만났다. 자전거 여행은 기동력이 좋아 가끔 이런 선물을 받곤 한다.
 
  파리의 몽마르트르와 결연(結緣)을 맺어 ‘빌뉴스의 몽마르트르’라고 불리는 작은 예술인마을이 바로 그곳. 정식 명칭은 우주피스(Uzupis)공화국. 면적은 서울의 한 작은 동(洞)만 하다. 1년에 딱 한 번, 4월 1일에 개국(開國)하는 ‘이상한 나라’이다. 우주피스란 리투아니아 말로 ‘강 건너 마을’이란 뜻이다. 내 눈에는 실개천 정도로 보이는데 그들은 강이라 한다. 어쨌든 입국(?)하려면 빌넬레(Vilnele)강을 건너야 한다. 그러니까 그 강이 국경선인 셈이다.
 
  과거 게토(유대인들이 많이 살아 빌뉴스를 ‘북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렀다)였던 이 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 주민 대부분이 학살당했고, 이후 불모(不毛)의 땅이 되었다.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뒤 가난한 예술가들이 하나 둘 이곳에 들어와 둥지를 틀자 자연스럽게 예술인들의 해방구가 되었다.
 
  가상(假想)의 나라지만 엄연히 대통령도 있고, 장관과 각국 대사들도 있다. 코미디치고는 진지한 현실이다. 거리에 게시되어 있는 헌법(10여 개국의 언어로 되어 있지만 불행히도 한국어는 없다) 중 몇 개 조항을 소개한다. 이 소국(小國)에 존재하는 인간을 포함한 두두물물(頭頭物物)에 적용되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내용이다.
 
  •사람은 빌넬레 강변에 살 권리가 있으며, 강은 사람 옆을 흐를 권리가 있다.
  •개에겐 개가 될 권리가 있다.
  •사람에겐 행복할 권리가 있지만, 행복하지 않을 권리도 있다.
  •사람에겐 아무런 권리도 갖지 않을 권리가 있다.
 
 
  우주피스에서 만난 ‘티베트 大使’
 
‘우주피스공화국’ 주재 티베트 대사인 인권운동가 루타 씨.
  호기심으로 여기저기 쏘다니다 달라이 라마 사진이 걸린 집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도 불자(佛子)가 있나?’ 궁금증이 일어 문을 밀고 들어가니 40대 여인으로 보이는 현지인이 나를 보며 생긋 미소를 지었다. “자전거를 들여놓아도 됩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3평 남짓한 방 안은 달라이 라마의 대형 사진을 비롯하여 티베트 전통 공예품과 책들로 가득했다. 루타라는 이름의 그녀는 ‘티베트 대사(大使)’로, 티베트의 독립을 위해 일하며 난민도 돕고 있다고 했다. 그는 “여유가 된다면 세계의 모든 고통받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며 “여기엔 북한 어린이 돕기도 포함된다”고 했다. 그래서 털실로 짠 수제 열쇠고리를 하나 골라 10유로를 주며 잔돈은 “헌금하겠다”고 하니 루타의 표정이 확 밝아진다. 역시 사람은 자신의 뜻을 받아주고 동의해 주면 싫어할 사람이 없다. 이것도 하나의 공감력이다.
 
  ‘싱글’이라서일까? 나이에 비해 해맑은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가 무척 순수한 ‘티베트의 영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도 마다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소신을 위해 일에 매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어떤 책에서 읽은 경구가 떠올랐다. ‘할 일이 있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코리아도 어서 빨리 하나가 되기를…”
 
리투아니아에서 전통의상을 입고 축제에 참가하는 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대성당 광장은 서울의 광화문처럼 ‘빌뉴스의 심장’이라 불린다. 이 나라 건국의 시조 게디미나스가 긴 칼을 들고 서 있는 동상은 우리나라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장군을 연상케 했다. 성소(聖所) 같은 이곳에 ‘발트의 길’ 종점을 알리는 30cm 정도의 작은 발자국 표식이 음각(陰刻)되어 있다. 이 조형물에 서서 나만의 무사 도착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데, 칠레에서 신혼여행 온 커플이 신기한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실례지만, 지금 뭘 하시는 건지 물어도 될까요?”
 
  “이것은 평화와 단합의 몸짓입니다.”
 
  궁금해하는 커플에게 ‘발트의 길’ 유래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아, 그런 의미가 있는 줄 몰랐네요. 알려줘 고맙습니다” 하며 그 커플은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즉석에서 이렇게 약속했다.
 
  “우리는 26년 전 그날의 의미를 늘 마음에 새기며 평생을 살아갈 겁니다!”
 
  그들은 “코리아도 어서 빨리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란 인사도 잊지 않았다.
 
  발틱 웨이 여정의 끝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이었다. ‘드디어 발틱 3국의 여정을 무사히 끝냈다!’라는 뿌듯함과 더불어 ‘지구촌(地球村)의 많은 사람이 세계 유일의 분단국(分斷國) 한국의 통일을 응원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인간의 감동’이 만들어가는 역사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는 곳곳에 1989년 8월 ‘발틱의 길’임을 알리는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올해는 우리에게 광복 70주년이자 동시에 분단 70년. 같은 민족이 이렇게 긴 시간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팽팽한 긴장 속에 살고 있는 나라가 지구상에 또 있을까. 110년 전, 우리는 ‘너무나 밖의 사정을 몰랐기 때문에’ 나라를 빼앗기는 비극을 맞았다.
 
  지금 현실을 살펴볼 때 그때와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어쩌면 분단으로 인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지정학적 환경이 더 어렵다.
 
  광복 70주년과 분단 70년을 맞아 ‘발틱의 길’에서 역사적 교훈을 길어 올리고, 희망을 전달하고자 땀방울을 뿌리며 페달을 돌리고 또 돌렸다. 인간의 숭고한 염원이 만든 ‘기적의 길’, 그 길 위에서 만난 많은 사람과의 인연 속에서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 총칼보다 강한 인간의 감동, 그 인간이 만들어가는 역사의 갈피갈피에 우리의 미래가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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