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회고록을 펴낸 김인호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

“노무현 정부는 감상적 사회주의적 정부, 지금은 완전한 사회주의 정부”

  •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hychung@chosun.com
  •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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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F사태는 달러가 부족해서 위기가 온 것이 아니라, 위기가 왔기 때문에 달러가 빠져나가서 부족하게 된 것
⊙ 한보사건은 경제사건… DJ가 김현철 엮어 정치사건화하면서 YS 레임덕과 IMF로 가는 코스 시작
⊙ DJ정권의 ‘환란주범론’, 잘못된 것은 전임자의 책임으로 몰고 편 가르기 하는 ‘적폐청산’의 元祖
⊙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정확히 거꾸로 하면 바로 글로벌 스탠더드”
⊙ “시장은 인류가 창안한 최고의 시스템… 시장주의를 거스르는 것은 문명을 거스르는 것”

金仁浩
1942년생. 경기고, 서울대 법대 졸업, 미국 시라큐스대학 맥스웰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 경제기획원 차관보·대외경제조정실장, 환경처 차관, 한국소비자보호원장, 철도청장, 공정거래위원장,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국가경영전략연구원장, (재)중소기업연구원장, 한국무역협회장 역임. 現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 / 저서 《明과 暗 50년: 한국 경제와 함께》 1·2 《경쟁이 꽃피는 경제》 《길을 두고, 왜 길 아닌 데로 가나》 《시장이 살아 숨 쉬는 경제, 창조적 기업이 샘 솟는 나라》 등
사진=조선DB
1997년 11월 7일, 재정경제원(재경원)과 한국은행(한은) 관계자들이 청와대로 속속 모여들었다.
 
  재경원에서는 윤증현 당시 금융정책실장과 외화자금과장・국제금융과장, 한은에서는 최연종 부총재와 담당이사・국제부장,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실에서는 윤진식 비서관과 김용덕 행정관이 참석했다. 외환위기가 눈앞에 닥친 상황에서 종합적 점검과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들이 청와대로 발걸음을 재촉하던 때, 김인호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은 엄낙용 차관보로부터 아태경제협력체(APEC) 관련 보고를 받고 있었다. 보고가 끝난 뒤, 엄 차관보가 김 수석의 팔을 잡아끌더니 귓속말을 했다.
 
  “자금 지원 요청을 하러 일본에 다녀오겠다고 부총리께 말씀드려 허락을 받았습니다. IMF 가면 팔 비틀려서 못 삽니다.”
 
  김인호 수석은 순간 주춤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결국 IMF로 가야 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고 했다.
 
  이윽고 청와대 경제팀과 재경원, 한은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앉아 회의를 시작했다. 이들은 경제 전반에 걸친 검토를 시작했다. 성장, 물가, 국제수지 등 기초경제 여건이 건실하다는 것에는 별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환율 폭등(暴騰)과 외환(外換) 보유고의 급감(急減)은 비상상황이 분명했다. 재경원과 한은 관계자의 결론은 같았다.
 
  “IMF에 금융지원을 요청하는 문제도 다른 방안과 함께 검토해봐야 합니다.”
 
  정부 당국자들의 입에서 ‘IMF행(行)’이라는 말이 처음 나온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열흘 뒤인 지난 1997년 11월 16일,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철통 보안 속에 김포공항으로 입국했다. 한국 경제 역사에서 가장 아픈 상처 중 하나인 IMF 시대는 이렇게 시작됐다.
 
 
  회고록에 800명 實名 게재
 
김인호 이사장의 회고록 《明과 暗 50년: 한국 경제와 함께》 1·2.
  “아직까지 국민들의 마음속에 응어리가 남아 있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20년이 지나 다시 얘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IMF 상황에 대해 정확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외환위기의 한복판에 서 있던 사람으로서 이 역사를 숨김없이 남기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한때 공직자였던 사람이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1년 반 만에 다시 만난 김인호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은 담담했다. 그의 손에는 1년 반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썼다는 책 《明과 暗 50년: 한국경제와 함께》가 들려 있었다. 김인호 이사장의 회고록인 책은 그가 1967년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경제기획원 차관보·대외경제조정실장, 환경처 차관, 한국소비자보호원장, 철도청장, 초대장관급 공정거래위원장,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등 30여 년 공직 생활에 대한 회고록이다.
 
  김 이사장은 “우리나라는 미국과는 달리 관료가 장관이 되는 나라다. 따라서 관료는 관료의 틀에 머물지 말고 이를 넘어야 한다”면서 “이 책이 대한민국의 현직 관료, 앞으로 관료를 하겠다는 사람은 꼭 읽는 필독서가 되는 것이 내 소망”이라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기록인 IMF 부분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됐다.
 
  ― IMF사태로 가기 전에 여러 경고음이 있었는데 정부에서 이를 귀담아듣지 않아 외환위기를 초래했다는 분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에 앞서서 회고록에서 8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실명(實名)을 거론했다는 말씀부터 드립니다. 여태 IMF사태에 이르게 된 현상을 다룬 책은 있었지만, 인물을 중심으로 IMF사태를 기록한 적은 없었습니다. 저는 IMF사태 당시에 관련 인물들, 심지어 제가 모셨던 김영삼 전(前) 대통령의 말과 반응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썼습니다. ‘자기가 모신 주군(主君)은 보호한다’는 얘기들이 있지만, 저는 그보다는 역사를 올바르게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실명을 썼다는 것은 그만큼 사실 그대로 썼다는 뜻이겠지요.
 
  “그럼요.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면 제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가감 없이 거명했겠습니다. 흔히 ‘IMF사태를 일으킨 주범(主犯)이 누구냐’고 합니다. 하지만 IMF위기는 특정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 제도의 문제였습니다. 전체가 어우러진 문제였습니다. 온 국민이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 겁니다. 정치인, 관료, 기업인, 노조간부 등 책임 있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책임이은 더욱 큽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 역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 그럼 IMF사태의 원인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흔히 달러가 부족해서 금융위기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달러가 부족해서 위기가 온 것이 아니라, 위기가 왔기 때문에 달러가 빠져나가서 부족하게 된 것입니다. IMF사태는 국가부도도, 재정위기도, 환란(換亂)도 아닌 ‘신뢰의 위기’였습니다.
 
  IMF위기는 1997년 7월의 태국 위기에서 시작해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타이완(臺灣)을 거쳐 홍콩까지 확산된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나중에 분석한 결과입니다만, 해외 투자가들의 동아시아 외환위기에 대한 위기감이 우리에게까지 치명타를 입힌 것입니다. 미국의 모건스탠리 투자회사가 1997년 10월 28일에 ‘아시아 지역에 투자된 자금을 회수하라. 현(現) 단계에서 설사 손해를 보고 있더라도 즉시 팔아치우고 빠져나오라’는 긴급 전문(電文)을 보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구체적으로 이날부터 한국 증시(證市)가 폭락(暴落)하고 달러화가 폭등하는 등 위기의 초기 징후가 드러났습니다. 우리나라도 아시아 국가 중 하나였기에 외국인들이 돈을 뺀 겁니다.
 
  물론 우리의 잘못이 있습니다. 태국의 외환위기가 우리나라에 영향을 끼칠 것에 대해 심도 있게 분석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태국과 우리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 경제에 미칠 영향이 크지 않다고 안일하게 생각했습니다. 태국이든 우리든 동아시아라는 공통분모로 엮여 있는데,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1997년 나랏빚은 20억~30억 달러로 낮았다
 
1997년 12월 3일 임창열 경제부총리(가운데)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오른쪽)는 미셸 캉드쉬 IMF 총재(왼쪽)가 바라보는 가운데 IMF 구제금융신청 의향서에 서명했다. 사진=조선DB
  ― 태국이 외환위기를 겪었을 때 우리나라와 기본적으로 다르다고 봤던 거군요.
 
  “태국은 물론 남미(南美) 국가들이 겪은 위기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던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나라는 1997년 재정 흑자(黑字)를 기록했고, 나랏빚은 겨우 20억~30억 달러 수준이었습니다. 이 빚의 대부분은 기업과 금융기관의 빚이었습니다. 기업과 금융기관이 부도위기에 몰렸을 때 스스로 국제 금융시장에서 재원(財源)을 조달해 빚을 갚았다면 외환위기는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업이 외화를 해외에서 빌릴 수 없었고, 결국 이들이 의지할 곳은 한은이 보유한 외환뿐이었습니다. 결국 한은은 최후의 수단으로 보유 외환을 풀어서 기업들을 구제했고, 이 과정에서 외환이 빠져나간 것입니다.”
 
  ― 국가의 문제였다기보다 기업·금융기관의 해외 차입(借入) 실패가 원인이었군요.
 
  “그렇습니다. 정부의 책임은 방만하게 경영해오던 기업과 금융기관에 대해 감독을 소홀히 한 것, 또 능률적인 금융감독 체계를 만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 일부에서는 IMF사태의 원인을 ‘김영삼 정부의 설익은 세계화(世界化) 정책’에서 찾기도 합니다. 너무 성급하게 시장을 개방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글로벌 스탠더드를 수용하는 것이 국제화・세계화입니다. 저는 김영삼 정부가 시장 개방을 한 것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시장 개방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일들, 정책적, 제도적 대응을 제대로 못 한 부분이 컸습니다.
 
  가령 금융시장을 개방하면 유입되는 달러 자금에 걸맞게 우리 정부의 통화신용정책이 세계화되었어야 합니다. 중앙은행의 역할이 국제 금융을 따를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해지고, 또 금융감독제도도 그에 맞게 넓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장을 오픈하기만 했지,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여파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시장 개방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시장 개방과 함께 발전했어야 할 우리의 제도 개선, 정비가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금융에 어두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김영삼 정권 말기였습니다. 김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중에 IMF로 가지 않으려 했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엄낙용 차관보의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빌리려는 시도는 물거품 됐고, 1997년 11월 14일에 김 대통령에게 IMF로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강경식 부총리는 ‘각하께서 재임 중 아무리 잘하셨더라도 각하의 경제 치적은 IMF로 가는 걸로 끝날 겁니다. 문민정부의 경제는 IMF의 구제금융으로 마감됐다고 평가받을 것입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즉시 IMF와의 협의를 시작하시오’라고 지시할 뿐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금융개혁’의 좌절
 
  김영삼 대통령의 IMF행 재가(裁可)가 떨어졌고, 정부는 본격적으로 IMF와 협의를 시작했다. 방한(訪韓)해 우리 경제팀과 대화를 나눈 캉드쉬 IMF 총재와의 회의 결과는 순조로웠다. 김인호 수석의 회고록에 따르면, 캉드쉬 총재는 태국에 비해 우리나라의 경제 여건이 훨씬 좋다는 것을 확인한 뒤 오히려 표정이 환해졌다고 한다. 이제 IMF행이라는 발표만 남겨둔 상황이었다. 김 이사장의 얘기다.
 
  “IMF에서도 인정했듯이 우리 거시경제 여건은 결코 나쁘지 않았습니다. 외국 투자자들의 깊은 불신(不信)이 오히려 문제였습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한국 정부가 알고 있는지, 해결할 의지가 있는지, 추진할 능력이 있는지를 믿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당시 경제팀이 금융개혁에 올인한 이유입니다. ‘금융개혁 관련 법 입법’ ‘금융산업 구조조정’ ‘IMF 자금 지원’ 등 세 가지를 패키지로 묶은 종합대책을 구상했습니다. 금융개혁 관련 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도록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는데 역부족이었습니다. 금융노조 등 이해집단이 반발했고, 이에 정치권이 손을 놓음으로서 결국 ‘금융개혁법’ 처리는 무산됐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해 회고록에서 김인호 이사장은 이렇게 기술(記述)했다.
 
  〈금융개혁은 중간까지는 우여곡절 속에서도 그런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것은 경제적 이유가 아닌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야당인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 조세형 총재대행, 김원길 정책위원장, 유재건 총재비서실장 등 모두 합리적으로 이야기가 되는 사람들이었다. 다 금융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고, 많은 대화를 통해 동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판에 가서 그들이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다.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금융개혁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금융노조가 들고일어나서였다. 그들은 노조를 겁냈다. 결국 표를 잃을까 봐 못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자신들은 빠질 테니 “여당이 자신이 있으면 당신들끼리 통과시키라”고 했다. 자신들은 노조로부터 욕을 먹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여당인 신한국당도 마찬가지였다. “야당이 그러는데 왜 우리만 욕먹을 일을 하느냐”며 “단독으로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정당정치를 하는 나라에서 여당과 제1야당이 그렇게 발을 빼면 정부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금융개혁은 무책임한 정당, 정치인들 때문에 좌절된 것이다.〉
 
 
  ‘IMF行’ 발표만 남긴 시점에서 경질돼
 
  정부는 결국 금융개혁 법안을 뺀 채 발표하기로 했다. 하지만 정작 ‘IMF행’을 발표한 이는 여태 경제팀과 호흡을 맞춰온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아닌 그의 후임인 임창열 경제부총리였다. 더구나 임창열 부총리는 1997년 11월 19일에는 “IMF로는 가지 않는다”고 발표했다가 불과 이틀 뒤인 11월 21일에 “IMF로 간다”고 발표하는 등 사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 IMF로 가는 로드맵을 다 짜놓은 상황에서 경질된 겁니까.
 
  “강경식 부총리에게 ‘국회에서 금융개혁 법안 통과는 무산됐고 이제 IMF행 발표만 남은 상황이니까 임명권자에게 거취를 묻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말을 했습니다. 저는 이미 대통령께 사의를 표하고 사표를 비서실장에게 맡겨놓은 상태였습니다. 강 부총리도 진작에 결심을 했는지 바로 사표를 꺼내 김용태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건넸습니다. 강 부총리의 사표를 들고 간 비서실장은 금세 돌아와 ‘두 분 다 수리됐다’고 했습니다.”
 
  ― 예상하셨습니까.
 
  “솔직히 수리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대통령의 임기가 3개월밖에 남지 않은 상황인데 개각(改閣)할 형편이 아니라고 봤습니다. 그간의 악몽같이 어려웠던 날들에서 해방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지만 내심 당황한 것도 사실입니다.”
 
 
  8년간의 재판… 1심부터 無罪
 
김인호 이사장은 IMF사태의 주범으로 지목되어 법정에 섰지만, 결국 무죄판결을 받았다. 사진=조선DB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회고록에 있는 부분을 발췌한다.
 
  〈1998년 1월이 되면서 서서히 언론을 통해 이상한 얘기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IMF 위기가 오고 있는 시점에 김영삼 대통령이 그에 대한 제대로 된 보고를 강경식·김인호 경제팀으로부터 받지 못했다. 경제팀 이외의 사람에게서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김 대통령은 외환위기가 오는 줄도 제대로 몰랐고 적절히 대응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는 식(式)의 기사였다. 이는 “보고를 하지 않은 강경식·김인호가 죽일 놈”이라는 이야기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언론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청와대 고위 당국자의 말이라며 인용했다. 또 하나는 이 문제를 검찰이 조사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들이었다.〉
 
  김인호 이사장은 1998년 5월 19일 서울구치소의 1.9평짜리 독방에 수감됐다. ‘13상2, 78’이 그의 수감번호였다. 명색이 한 사람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자서전인데, 김인호 이사장의 책 2권 첫 페이지의 사진은 그가 수의(囚衣)를 입고, 손과 팔이 포승줄에 묶인 사진이다. 책을 출간할 때 출판사에서 이 사진을 쓰고 싶다고 말했을 때, 흔쾌히 허락했단다. 그의 말이다.
 
  “책 제목이 ‘명(明)과 암(暗)’이니까, 내게 좋은 부분만 쓸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 시간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니
  . 그래서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그 사진을 쓰라고 했습니다. 사실대로 쓰기로 했고, 그 역시 역사와 제 인생의 한 부분이니까.”
 
  ― 그래도 자서전이니까 슬그머니 좋은 얘기들로만 포장하는 분들이 있는데요.
 
  “노(No!). 그건 안 되는 일이지. 구치소를 저는 요즘도 ‘국립휴양소’라고 부릅니다. 고위 공직을 한 것도 죄(罪)라고 치고 마음의 평정을 가지려고 노력했거든요. 검찰이 뭐라고 하든지 당시 정부에서 최선을 다했고, 검찰이 기소하는 내용은 재판 과정에서 다 뒤집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정체성(正體性)을 확인하면서 성경을 가장 많이 읽었습니다.”
 
  1998년 7월 10일에 제1심이 시작됐다. 이후 1년1개월 동안 총 27차례 재판이 이어졌다. 검찰은 강경식 부총리에게 4년 징역형을, 김인호 경제수석에게는 3년 형을 구형(求刑)했다. 1999년 8월 20일 1심 선고공판에서 재판장은 이들에게 무죄(無罪)를 선고했다. 검찰은 곧장 항소했고, 총 9회의 공판 끝에 2심 재판장(2002년 10월 17일 공판)도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대법원에 상고했고, 대법원은 2004년 5월 27일 이를 기각했다.
 
 
  ‘換亂主犯論’
 
  ― 그런데 왜 그렇게 범인 색출에 나섰을까요.
 
  “한두 사람의 문제로 끌어가는 것이 편하니까요. 그것이 바로 ‘환란주범론(換亂主犯論)’이라는 것입니다. 그건 잘못된 접근법이고,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것입니다. 오늘날 폐단의 시작입니다. 우선 잘못한 것은 전부 전임자(前任者)가 저질렀다며 ‘적폐 청산’을 시작했고, 또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것이 이때 시작됐습니다. 그 폐단을 시작한 사람이 DJ(김대중)였습니다. 오늘날 문제가 된 편 가르기가 정확히 이때 시작된 겁니다.”
 
  ― 편 가르기요?
 
  “예를 들어 강경식 부총리의 후임인 임창열 부총리는 이미 정부에서 논의하고 결정한 IMF행을 부인해서 IMF와의 이후 관계가 심각한 파행을 겪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환란’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임 부총리는 전혀 문제 삼지 않았어요. 이미 DJ 사람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게 편 가르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 왜 강경식 전 부총리와 이사장, 두 분이 타깃이 된 걸까요.
 
  “DJ로서는 YS에게 직접 책임을 묻기는 여러 가지로 어려웠을 겁니다. 그래서 ‘YS는 경제를 모른다’면서 대신 강경식 부총리와 저를 주범으로 몬 것이겠지요.”
 
  ― 김현철 사건, 한보사태 등으로 정권이 흔들리면서 YS가 국정에 의욕을 잃는 바람에 경제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한보사태는 단순한 경제사건이었습니다. 그걸 다시 대권에 도전하려던 DJ가 정치사건으로 만들어 김현철씨를 엮어 넣은 것이죠. 실제로 검찰은 수사해서 나오는 게 없으니 정치자금법으로 김현철씨를 기소했잖아요. 그때부터 YS정권의 레임덕 현상이 급속히 심해지면서 DJ가 부각되기 시작했지요. 그러는 동안에 기업은 부실화되고, 금융개혁은 안 되고, 결국 IMF로 가는 코스가 시작되었습니다.”
 
 
  “경험을 통해 시장주의자가 됐다”
 
  ― 평생 공무원을 했는데, ‘영원한 시장주의자’를 자처할 정도로 시장주의자가 된 것이 신기합니다.
 
  “관료와 시장이라고 하면 좀 안 맞는 것 같지요? 공부를 해서, 책을 읽어서 시장주의자가 된 게 아닙니다. 경험을 통해서 된 것이죠. 사무관 때부터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히면서 시장, 경쟁, 소비자 선택, 국제화라는 시장경제의 핵심적인 요소들을 알게 됐습니다. 예컨대 경제기획원 물가정책국장을 지냈는데, 이 자리가 시장을 가장 많이 다루는 자리였어요. 공정거래위원장은 기업과의 문제를 다루는 자리였죠. 대외경제조정실장을 하면서는 국제화는 결국 외부경쟁의 도입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 지난 2년 반 동안 문재인 정권이 중점을 두었던 소득주도성장 등의 경제정책들을 어떻게 봅니까.
 
  “소득주도성장, 주(週) 52시간 근무, 최저임금 인상, 비(非)정규직의 정규직화… 그런 정책들을 논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부의 성격상 나올 수밖에 없는 정책들이기 때문입니다.
 
  현 정부는 시장이라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시장의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좋게 말하면 모든 것은 정부가 생각하고 국민의 삶을 정부가 책임지겠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정부가 경제를 좌지우지하겠다는 얘기입니다.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삶은 근무시간은 줄이고, 임금과 복지는 늘리고, 일자리는 전부 정규직으로 해줘야 하고, 정년(停年)까지 일하게 해주는 것이겠지요. 그것도 좋아요. 하지만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의 산업과 국제경쟁력이 유지될 수 있나요?”
 
  ― 그게 문제지요.
 
  “지금 다른 나라는 어떻게 하느냐? 전 세계적으로 우리와는 완전히 다르게 가고 있어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정확히 거꾸로 하면 그것이 바로 글로벌 스탠더드입니다.
 
  노동은 더 유연하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 근무시간은 저절로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정부가 정해줄 필요는 없어요. 사람들의 선택의 문제인 것이죠. 그걸 왜 정부가 나서서 해라 마라 합니까?”
 
 
  “국가는 똑똑하지 않다”
 
  ―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것일까요.
 
  “그 근저에는 정부가 인위적으로 끌고 가겠다는 발상, 정부가 가장 현명하고 도덕적이다, 예견력(豫見力)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정부가 과연 그런 존재냐? 내가 정부에서 30년을 있어 봤지만, 세상에 그런 정부는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정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부는 그렇게 유능한 집단이 아닙니다. ‘정부는 국민의 평균 수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는 전제하에서 얘기를 해야 합니다. 사회주의가 안 되는 이유는, 전제와 가정, 논리가 전적으로 틀렸기 때문입니다.”
 
  김인호 이사장은 1990년 한소(韓蘇) 수교 당시 정부대표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소련을 방문, 사회주의 경제의 민낯을 본 적이 있다.
 
  “그 광대한 토지에서 농작물의 3분의 2는 다 썩는다고 하더군요. 생산계획에서부터 운송체계까지 정부가 다 계획하는데, 그 계획이 하나도 들어맞지 않거든요. 생산지에서 소비지까지 가는 동안에만 절반 이상이 썩는다는 겁니다. 여자들은 항상 바구니와 보자기를 들고 다니다가 사람들이 줄 서면 무조건 줄부터 섰습니다. 모든 것이 다 부족하니까 아무거나 살 수 있을 때 사고 보자는 것이었죠. 사회주의가 그런 경제를 만든 겁니다. 우리나라도 이대로 가면 언젠가 그렇게 될 것입니다.”
 
  ― 끔찍한 얘기네요. 경제가 잘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나라에 기업가 정신, 도덕성은 기본적으로 있다고 봅니다. 법 잘 지키고, 세금 잘 내고, 특별한 나쁜 짓 아니면 자기 판단대로 하라고 내버려 둬야 합니다. 정부가 고용자와 사용자의 계약, 개인과 기업의 사적(私的) 계약을 따지는 것은 말이 안 돼요. 생산에 기여한 만큼 분배가 이뤄지고, 소비자는 자기 선택대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걸 국가가 강제하면 결국 경제가 제대로 안 돌아가게 되고 일자리가 사라집니다. 좋은 의도로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지옥으로 가는 문을 활짝 열어놓는 거죠. 그게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데도, 저 사람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아요.”
 
  ― 왜죠.
 
  “신념이니까요.”
 
 
  “성장이냐, 분배냐를 묻는 것은 난센스”
 
  ― 신념이라 하더라도 검증이 됐으면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요.
 
  “경제는 경험의 과학입니다. 해보고 안 된다고 하면, 당연히 변경을 해야죠. 그러기 위해서는 선입견(先入見) 없는 균형 있는 사고(思考)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목표를 정해놓고 거기에 매여 안 되면 ‘남 탓’ ‘다른 이유’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답이 안 나옵니다.”
 
  ― 현 정부는 ‘성장’과 ‘분배’ 중에서 ‘분배’에만 치우치는 느낌입니다.
 
  “‘성장이냐 분배냐’고 얘기하는 사람은 경제의 기본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 사회주의 성향의 경제학자 중에도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무슨 경제를 공부했는지….
 
  ‘성장이냐 분배냐’를 묻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경제는 성장과 분배가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시장적 방식으로 하느냐, 국가가 개입해서 국가의 의지대로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세금을 더 많이 거둔다든지 누진율을 높인다든지 하는 식으로 수정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나라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근로의욕을 깨뜨릴 정도가 되면 안 됩니다. 어느 정도라야 그 정도 수준이냐 하는 것은 의견이 다르겠지만, 대략 세금이 25%가 넘어가면 누구나 탈세하고자 하는 생각이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 요즘 세금을 너무 많이, 너무 쉽게 거두는 것 같아요.
 
  “세금이 너무 높으면 일을 안 하든지, 탈세하든지, 세금이 적은 곳으로 도망을 가든지 할 것입니다. ‘국가가 세금을 거둬서 쓰는 것이 효율적이냐, 민간에 놔두고 쓰게 하는 것이 낫느냐’고 물으면, 나는 일반적으로 후자(後者)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스웨덴을 따라가야 한다는데, 지금 스웨덴은 자기들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지금 우리는 시장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나는 이 정부가 스스로 사회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을 밝혔다고 봅니다. 현 정부의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됐던 사람이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밝힌 게 무슨 의미겠어요?”
 
  ―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사회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라고 했지요.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는 같이 갈 수 없는 사상입니다.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의 바탕위에 서 있습니다. 시장주의나 민주주의는 개인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자유와 창의, 그것이 모여서 전체가 잘되자는 것입니다. 사회주의와 전체주의에서는 전체의 목표를 위해서 개인의 자유는 희생되어야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 전체는 최종적으로 1인 독재로 귀결되지 않습니까?”
 
 
  “한국 경제가 살길은 시장경제로 돌아가는 것”
 
  ― 현 정부를 사회주의로 규정해도 될까요.
 
  “지금 정권은 예전의 정부와는 전혀 다른 정부입니다. 과거 대통령 교체에 따른 변화는 양적(量的) 차이였지만, 지금은 질적(質的) 차이입니다. 노무현 정부는 감상적 사회주의적 정부였지만, 지금은 완전한 사회주의 정부입니다.
 
  그런 전제하에서 하는 말인데, 이 사람들은 아예 경제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국가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이 좋은 의미로 받아들였는데, 문자 그대로 경험하지 못한 국가를 만들어버렸어요.”
 
  ―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지금 한국 경제가 살길은 시장경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경쟁이 꽃피는 경제’ ‘시장으로의 귀환’ 말고는 방도가 없습니다. 시장은 인류가 창안한 최고의 시스템입니다. 특정인이 만든 것이 아니고 저절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시장주의를 거스르는 것은 문명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시장을 부정하는 나라 중에 잘된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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