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영주 순흥·안동 어담에 남아 있는 단종 복위의 흔적과 口傳들
⊙ 당시 영주와 안동 일대 영남 선비들이 단종 복위를 도모
⊙ 안동 김씨 ‘어담공파 김삼익’ 후손들… 단종 哀史로 수백 년간 산골에 은거
⊙ 당시 영주와 안동 일대 영남 선비들이 단종 복위를 도모
⊙ 안동 김씨 ‘어담공파 김삼익’ 후손들… 단종 哀史로 수백 년간 산골에 은거

- 영주 순흥 금성대군 신단(神壇).
중앙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소백산 자락으로 접어들자 풍경이 달라진다. 길은 좁아지고, 마을은 한산해진다. 고요가 먼저 다가온다. 오래전 이곳에서 무언가가 벌어졌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소수서원 앞, 숲속의 작은 제단
금성대군 영정.순흥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소수서원이 눈에 들어온다. 서원 맞은편 숲길로 몇 걸음 들어가자 작은 제단이 모습을 드러낸다. 금성대군 신단이다.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錦城大君·1426~1457년)은 단종 즉위 후 수양대군과 함께 보필자로 임명될 만큼 신임이 두터웠다. 그러나 1453년 계유정난 이후 권력은 수양대군에게 넘어갔고, 그는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1455년 삭녕으로 유배된 뒤, 이듬해 복위운동이 발각되면서 순흥으로 이배됐다. 그리고 1457년, 이곳에서 처형됐다.
1711년 순흥부사 이명희가 숙종의 윤허를 받아 세운 신단은 크지 않다. 상단에는 금성대군, 좌단에는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1457년), 우단에는 당시 의거에 참여한 영남 선비들이 모셔져 있다. 지금도 봄·가을 제향이 이어진다. 신단에서 300m쯤 오르면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됐던 자리도 남아 있다. 가시 울타리 안에 갇히는 형벌의 흔적이다. 지금은 자취가 희미하지만, 그가 이곳에서 무엇을 바라보았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되어 살던 유허지. 《영주 풍기 향토지》(1987)에 실린 사진이다.기록에 따르면 금성대군은 이보흠과 함께 향리와 군사를 모으고 사족들에게 격문을 돌리며 복위를 도모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단순하지 않다. 이보흠이 세조에게 금성대군의 역모를 보고한 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국문 과정에서 그는 금성대군의 회유에 넘어갔다고 진술한 것으로 돼 있다. 표면적으로는 변절자의 모습이다.
이 사건 이후 순흥은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순흥도호부는 폐지됐고, 관할 지역은 영천·풍기·봉화·영월 등으로 분산됐다. 향리와 아전은 처형되거나 재산을 몰수당했고, 주민들은 강제 이주됐다. “죽계에서 영천 제민루까지 핏물이 내를 이루었다”는 구전이 남아 있다. 안축이 《죽계별곡》을 지은 그 맑은 물길이 피로 물들었다는 이야기다.
안동 김씨 대종중 회장 김광억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영주와 안동 일대에는 선비들이 많았고, 상당수가 이 사건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됐습니다. ‘피끝마을’이라는 지명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아이러니는 그 다음에 있다. 순흥 사람들은 이 비극의 중심 인물이었던 금성대군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넋을 기리는 제사를 수백 년 동안 이어왔다. 두레골에서는 지금도 정월 대보름마다 성황제가 열린다. 엄동설한에 계곡에서 목욕재계를 하고 사흘 밤낮 잠을 자지 않는 의식이 단 한 번도 끊기지 않았다고 한다.
낙동강을 건넌 한 사람, 어담공 김삼익
낙동강이 휘감아 흐르는 하회마을. 이곳을 지나 큰 산을 넘으면 안동시 풍산면 어담이 나온다.순흥에서 남안동IC를 지나 서쪽으로 10여 km. 낙동강을 건너 산 하나를 넘으면 안동시 풍천면 어담에 닿는다. 이곳에는 또 다른 흔적이 남아 있다. 안동 김씨 어담공(漁潭公)파의 파조 김삼익(金三益·1395?~1465년)이다. 그의 삶을 전하는 공식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문중에서는 그가 단종 복위운동 이후 화를 피해 낙동강을 건너 이곳으로 숨어들었다고 전한다.
‘어담’이라는 지명은 그의 호에서 비롯됐다. 1876년경 문헌에 ‘호어담 후인인위리명(號漁潭 後人因爲里名)’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의 호가 마을 이름이 됐다는 뜻이다. 인물의 호가 지명이 된 드문 사례다.
안동 김씨 안동화수회 상임부회장 김효동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에는 사건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어담공파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낙동강을 건너 산속으로 들어갔고, 그 이야기가 구전으로 이어져 내려옵니다.”
어담공파는 오랫동안 안동 김씨 공식 족보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19세기 후반 등재 시도가 있었지만 무산됐고, 1926년 병인보에서야 처음으로 공식 기록에 등장했다.
김광억 회장은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조선 왕조는 세조의 후손들이었습니다. 복위운동을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숙종 때 명예 회복이 일부 이루어졌지만, 관련 인물들까지 모두 복권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갑오개혁 이후 정치적 금기가 약해지면서 비로소 숨겨졌던 계통이 기록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
어담공파 후손 김능진 전 독립기념관장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전한다.
“선친이 어담공파가 대동보에 포함된 것을 기뻐하시며 건물을 기증하셨습니다. 오랫동안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계통이 기록으로 인정받은 데 대한 감격이었습니다.”
500년 침묵 끝에 얻은 이름이었다.
이 집안에는 이런 가훈이 내려왔다. “내 자손은 농사만 짓고 살아라.” 이후 “농사와 의사만 하라”로 바뀌었다. 정치에는 관여하지 말라는 뜻이다. 단종 복위 이후 이어진 비극의 기억이 가훈으로 굳어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