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취재]「李明博 대통령」을 만든 사람들

이상득의 德과 최시중의 智略이 李明博 승리의 두 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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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정예의 원로급 인사와 실무급 의원ㆍ참모들이 大選 승리 일궈 내
『이명박의 실사구시형 리더십이 「일하는 청와대」 만들 것』


宋承鎬 月刊朝鮮 기자〈soonj@chosun.com〉
白承俱 月刊朝鮮 기자〈eaglebsk@chosun.com〉
2007년 8월, 한나라당 大選(대선) 후보 경선을 보름가량 앞두고 있을 때였다. 당시 언론은 자체 여론조사를 통해 「이명박 후보가 박근혜 후보를 10% 포인트 앞서고 있다」고 보도했다. 李明博(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캠프 내에는 승리의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李당선자를 돕던 崔時仲(최시중·70) 상임고문의 생각은 달랐다. 여론조사와 당내 대의원 성향을 분석한 결과, 李明博 당선자와 朴槿惠(박근혜) 후보가 2~3% 내의 오차범위에서 접전을 벌이는 것으로 조사됐다. 崔고문은 李당선자에게 『경선에서 질 수도 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李당선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崔고문의 대답은 단호했다.
 
  『지역에서 입김을 발휘하는 의원들을 더욱 끌어안아야 합니다. 전국의 취약지역을 다시 갔다 오시게. 그냥 있다가는 안 돼요』
 
  李당선자의 친형인 李相得(이상득·72) 국회부의장도 긴박하게 움직였다. 李당선자가 영남지역에 가면, 李부의장은 호남지역을 돌았다. 李당선자가 충청도를 방문하면, 李부의장은 강원도를 들렀다. 李부의장은 경선 때 전국을 세 차례 돌았다.
 
  李明博 당선자는 당내 競選에서 근소한 차이로 朴 前 대표를 이겼다.
 
  本選(본선) 때도 두 형제의 動線(동선)은 겹치지 않았다. 李부의장은 李당선자의 영향력이 미비한 곳을 집중 공략했다. 불교계 표심을 잡기 위해 웬만한 寺刹(사찰)을 안 가본 곳이 없었다.
 
  李부의장은 언론에 등장하는 것을 극구 사양했다. 「형이 몸을 낮춰야 동생이 빛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李부의장을 보좌하는 한 측근의 말이다.
 
  『李相得 부의장은 자신의 선거 때보다 더 열심히 뛰었습니다. 이렇게 동생을 아끼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입니다. 동생이 국민에게서 열렬한 지지를 받는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것 같았어요. 일흔이 넘은 老軀(노구)를 이끌고 지방을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형제애를 봤어요.
 
  경선 때부터 본선 때까지 합하면 지구 반 바퀴를 돌지 않았을까요. 그러다 보니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李부의장은 낮에는 현장을, 밤에는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어요. 저녁에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서 얘기를 하다가 잠드는 경우가 많았지요. 李부의장은 사람을 만날 때 이렇게 말해 둡니다.
 
  「대화하는 도중에 내가 깜빡 조는 경우가 있더라도 이해해 주시죠. 옆에 있는 비서가 모든 대화를 기록하니까 걱정 마시고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고는 대화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깜빡 조는 겁니다. 李부의장은 당신의 건강을 무시하고 동생을 위해 뛰었어요』
 
  李相得 부의장과 崔時仲 고문은 李明博 당선자에게 「인생의 스승」과 같은 존재다. 두 사람은 李당선자에게 스스럼 없이 충고한다.
 
  李相得 부의장과 崔時仲 고문은 고향(경북 포항) 친구다. 호적상으로 李相得 부의장이 두 살 위이지만, 실제 나이는 같아 친구처럼 지낸다. 지독한 「가난」도 두 사람을 단단히 묶는 계기가 됐다.
 
 
  人生의 멘토
 
   崔時仲 고문은 친구의 동생인 「이명박」을 친동생처럼 여겼다. 집안 형편 때문에 동지商高(상고) 야간을 다니며 국화빵과 뻥튀기 장사를 하는 「이명박」을 보며 同病相憐(동변상련)의 정을 느꼈던 것이다.
 
  崔고문은 포항 부둣가에서 연탄불에 호박떡을 구워 팔며 돈을 벌었다. 책읽기를 좋아했던 그는 학창 시절 책을 살 돈이 없었다. 그래서 책을 실컷 볼 요량으로 포항의 한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崔고문은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60%는 서점에서 일할 때 읽었다』고 회고했다.
 
  李明博 당선자가 서울 이태원에서 미화원 생활을 하며 청계천 헌책방에서 책을 구입해 공부한 것은 崔고문의 「과거」를 알았기 때문이다.
 
  崔時仲 고문은 동아일보 정치부장·논설위원, 한국갤럽 회장을 지냈다. 그는 시대정신과 民心(민심)을 읽어 내는 慧眼(혜안)을 가졌다는 평을 듣는다. 李明博 당선자가 어려울 때마다 자기의 일처럼 도왔다. 崔고문은 李당선자에게 「병풍」 역할을 했다.
 
  鄭容煜(정용욱) 특보는 『崔고문은 선거과정에서 大選 캠프의 전략을 총괄했고, 클린정치위원회를 만들어 적임자를 선발했다』고 말했다.
 
  崔時仲 고문은 大選을 앞두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한국갤럽 지분을 모두 팔아 선거자금을 마련했다. 그는 당으로부터 선거자금으로 「1원」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캠프 관계자들에게 자신의 돈을 써가며 격려했다.
 
  崔고문은 「이명박 정부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으냐」는 물음에 『이 나이에 무엇을 하겠소. 이명박씨가 나라를 잘 이끌 수 있도록 몇 마디 거들면 다행이지』라고 했다.
 
  李相得 부의장은 18代 總選(총선)에는 불출마할 예정이다. 李明博 당선자가 국가를 운영하는 데 자신이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李相得 부의장은 주위 사람들에게 李당선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얼굴도 잘생겼고 학교도 좋은 데 나왔는데, 동생에게는 절대 이길 수 없는 게 있습니다. 내 동생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명박이는 추진력과 깡다구가 대단하지요』
 
  형은 동생의 장점과 단점을 잘 안다. 그래서 동생을 만날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항상 겸손해라.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을 좋아하게 만드는 것도 능력이다. 德을 갖춰야 한다. 그래야 지도자로서 성공한다』
 
 
  컨트롤 타워 「6人회의」
 
  李明博·李相得·崔時仲의 인연을 아는 사람들은 『이상득 부의장의 德과 최시중 고문의 智略이 오늘의 이명박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李相得 부의장과 崔時仲 고문은 「6人회의」을 주도했다. 李明博 당선자를 비롯해 朴熺太(박희태), 李在五(이재오), 金德龍(김덕룡) 의원이 멤버였다. 본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6人회의는 없어졌지만, 이 모임은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다. 6人회의는 선거전략을 비롯해 선거자금, 외부인사 영입도 다뤘다. 6人회의가 큰 방향을 설정하면 선거캠프의 실무책임자들이 구체적인 선거전략과 메시지, 정책개발을 담당했다.
 
  朴熺太 前 국회부의장은 李相得 부의장과 서울大 동창이다. 그는 친구인 李부의장의 요청으로 「이명박 캠프」에 합류했다. 그의 말이다.
 
  『이상득 부의장이 도와 달라고 해서 뿌리칠 수 없었지요. 경선을 앞두고 박근혜 대표도 도와 달라고 했지만, 친구의 부탁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朴 前 부의장은 당내 경선 때부터 캠프의 좌장을 맡았고, 외부인사 영입작업을 주도했다.
 
  李在五 前 최고위원의 역할도 컸다. 선거운동 기간에 2선으로 물러난 그는 『이명박 후보에게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스스로 후퇴했다.
 
강재섭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는 박희태 前 국회부의장(가운데), 이상득 국회부의장(오른쪽).
 
  대통령 출마 권유한 李在五
 
  李在五 前 최고위원과 李明博 당선자의 인연은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4년 朴正熙(박정희) 정권 당시 韓日(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거셌을 때, 李明博 당선자는 고려大 상대 학생회장으로, 李 前 최고위원은 중앙大 韓日회담반대 구국투쟁위원장으로 만났다. 이후 「6·3 동지회」에서 두 사람은 회장과 부회장을 맡으며 동지애를 나눴다. 네 살 아래인 李在五 前 최고위원은 사석에서 李明博 당선자를 「형님」이라고 부른다.
 
  李明博 당선자에게 「대통령 출마」를 권유한 사람이 李 前 최고위원이다. 15代 국회 당시 李明博 의원이 「한반도 대운하」를 들고 나오자, 李在五 의원은 李의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님이 국회의원을 평생 해도 대운하를 추진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대통령에 도전하시는 게 낫습니다. 형님은 체질상 국회의원이 맞지 않습니다. 대통령이나 서울시장처럼 정책을 집행하는 일을 하면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李明博 당선자는 현재 백의종군 상태에 있는 李在五 前 최고위원을 再기용할 가능성이 높다.
 
  전북 익산 출신인 金德龍 의원은 李明博 당선자에 대한 호남지역 유권자들의 인식 변화를 가져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金大中(김대중) 前 대통령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대한민국이 발전한다』는 논리로 지역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金의원은 한나라당 競選 때 호남지역 대의원을 「親이명박」 성향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李基澤·金德龍의 활약상
 
  李基澤(이기택) 중앙선대위 상임고문은 당내 경선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2007년 7월16일 李明博 당선자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의 지지선언은 「BBK 사건」으로 인한 李당선자의 지지율 하락세를 멈추게 했다. 당시 李明博 당선자의 지지율은 30%대로 하락했다. 李고문의 정치적 영향력을 알고 있던 朴槿惠 前 대표 측이 영입을 적극 추진했으나 끝내 무산됐다.
 
  2007년 8월 競選 직후 회식자리에서 李在五 前 최고위원은 『이기택 고문이 이명박 지지선언을 해 주지 않았다면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 하락 추세를 멈추게 하지 못해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며 『李고문의 지지가 결정적인 반전기회를 만들어 주었다』고 했다.
 
  李明博 당선자의 고향 선배인 李基澤 고문은 李당선자에게 정치적 조언을 수시로 해왔다. 그는 李明博 당선자에게 朴槿惠 前 대표를 「국정 동반자」로 여기도록 주문했다.
 
  李고문은 강원도·경상도·충청도 등 전국을 다니며 지원유세를 했다. 그는 4·19 세대와 6·3동지회의 지원을 이끌어 냈다.
 
 
  「민주연대21」의 朴鍾雄
 
  李고문과 李당선자의 고향 후배인 李秉錫(이병석) 의원은 대구·경북 지역을 총괄했다. 그는 李고문과 金德龍 의원이 李당선자를 지지하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민주계 인사들의 모임인 「민주연대21」을 이끈 朴鍾雄(박종웅) 前 의원의 활약상은 대단했다. 朴 前 의원은 특수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행동으로 보였다. 李會昌씨의 출마를 막기 위해 집회를 수시로 열었고, 여권을 향해서는 「공작정치를 그만하라」며 상대 후보 진영 사무실을 찾아가 시위를 벌였다. 李明博 당선자는 추위에 떨고 있는 朴 前 의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격려했다.
 
  李明博 당선자의 오랜 인연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서울메트로」 감사를 지낸 金伯駿(김백준)씨이다. 李明博 당선자는 그를 「가디언」 또는 「집사」라고 부른다. 입이 무겁고 배신하지 않는 깨끗한 인물이라고 여기고 있다.
 
  金伯駿 前 감사는 李明博 당선자의 고려大 2년 선배이다. 李明博 당선자가 현대건설 사장 시절, 金伯駿 前 감사는 현대종합금융의 금융전문가로 입사했다. 金 前 감사는 철저히 언론에 노출되지 않으면서 李당선자의 궂은일을 도맡는 숨은 실세이다.
 
  李明博 당선자의 리더십은 「실천하는 리더십」, 「실용적인 리더십」, 「창의적 리더십」으로 불린다. 그는 자신의 리더십에 대해 『추상적 리더십이 아닌 공정과 자율책임을 근간으로 국민들이 실감하는, 실행하는 리더십』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그는 실사구시형 리더이다.
 
  李당선자의 人事(인사) 스타일은 실리추구형이다. 李相得·崔時仲·朴熺太 등 원로급 인사들의 조언을 받으면서 동시에 실무의원과 실무전문가들의 추진력을 이용해 일을 처리한다.
 
 
  「桃園결의 4인방」
 
  전략기획팀장 鄭斗彦(정두언), 후보비서실장 任太熙(임태희), 종합상황실장 鄭鍾福(정종복), 대변인 朴亨埈(박형준), 홍보단장 鄭柄國(정병국) 의원 등이 실무의원으로 활동했다.
 
  鄭斗彦 의원은 李明博 당선자를 위해 惡役(악역)을 자처했다. 상대 후보가 공격해 오면 적절한 정보를 토대로 역공을 취했다. 李明博 당선자의 人事 스타일을 잘 아는 그는, 경선 및 大選 캠프의 밑그림을 작성했다. 일부 캠프 관계자가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있지만, 李明博 당선자가 아끼는 사람임을 부인할 수 없다.
 
  鄭의원은 경선과 본선을 거치는 동안 외부에 공개할 수 없는 중요한 일들을 해냈다. 이 일에는 부산시의원 출신인 朴宰成(박재성) 정책특보의 역할이 컸다. 朴특보는 李明博 당선자로부터 「혼자 자유롭게 뛰면서 일하라」는 지시를 받을 정도로 활동 폭이 넓었다. 그는 언론에 알려지지 않은 「숨은 공로자」라는 평을 받는다.
 
  鄭鍾福 의원은 李相得·李在五·鄭斗彦 의원과 함께 초기부터 李明博 당선자를 지지한 「최초 4인방」 중 한 명이다. 이들 네 명을 두고 한나라당 의원들은 「桃園(도원)결의 4인방」이라고 불렀다.
 
  鄭의원은 경선 초기 당내 초선의원 20여 명이 李明博 당선자를 지지하게 만들었다. 競選 때부터 「BBK 사건」을 총괄했으나, 李明博 당선자가 외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숨겨 둔 인물이다. 金伯駿 前 감사의 검찰 출두를 앞두고 오세경·권성동·김명곤·강원석·박준선 등 검사 출신 변호사들과 함께 하루 종일 리허설을 주도했다. 金 前 감사의 검찰 출두를 놓고 李相得 부의장 등이 반대했으나, 鄭의원이 『출두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설득했다.
 
  검사 출신인 鄭鍾福 의원은 검찰의 BBK 사건 수사상황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鄭의원은 홍종국 前 E캐피탈 대표가 입을 여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홍종국씨는 「BBK가 이명박 후보 소유」라는 김경준의 주장을 뒤엎는 결정적 진술을 했다.
 
  鄭鍾福 의원은 종합상황실장으로서 전국의 선거과정과 문제점들을 챙겼다. 李明博 당선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 鄭의원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白成雲(백성운) 상황분석실장과 崔球植(최구식)·車明進(차명진) 의원, 조선일보 부국장 출신인 金孝在(김효재) 팀장이 鄭鍾福 의원과 호흡을 같이했다.
 
 
  한나라당 이미지 바꾼 羅卿瑗
 
  競選 때부터 대변인을 맡았던 朴亨埈 의원은 전략과 정무적 판단이 뛰어났다. 그는 후보 연설문을 직접 쓰기도 했다. 대변인과 선거전략 참모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朴亨埈 의원은 캠프內 인사들로부터 「겸손하고 성실한 대변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김밥과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운 경우가 적지 않았다. 경선 이후 대변인 자리를 고사했던 그는 李明博 당선자의 특별 지시로 대변인 역할을 다시 맡았다. 李相得 부의장과 崔時仲 고문도 그의 능력과 성실을 인정하고 있다.
 
  陳壽姬(진수희)·羅卿瑗(나경원) 의원은 부드러운 화법으로 당의 이미지 개선에 도움을 줬다.
 
  수행실장을 맡았던 朱豪英(주호영) 의원은 李明博 당선자가 삼고초려를 해 「후보 비서실장」으로 발탁한 인물이다. 李明博 당선자가 『주호영 의원을 영입한 것이 가장 잘된 인사』라고 말할 정도로 신임이 두텁다.
 
  그는 「이명박의 그림자」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李明博 당선자의 취약계층인 불교계를 도맡아 동분서주했다. 『대한민국 스님 중 주호영 의원이 모르면 그 분은 스님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불교계 인사와 친하게 지낸다.
 
  朱豪英 의원은 「걸어다니는 인명사전」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불교계뿐만 아니라 국내 각 분야 유력인사에 대한 정보력이 뛰어나다. 대화 도중 특정인의 이름이 나올 경우 그 사람의 출신에서부터 학력·경력 등을 일사천리에 읊조린다.
 
 
  실무형 인사 포진
 
  李明博 당선자 주위에는 실무형 인사들이 많이 포진돼 있었다. 李당선자가 철저한 성과주의자이기 때문이다. 大選 캠프에서 일한 팀장급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쉽게 이해된다. 실무참모들은 의원급 팀장을 보좌하며 생산적인 결과물을 내놓았다.
 
  이들은 비서실과 공보상황실, 전략홍보 조정회의 등에 주로 포진됐다.
 
  제1비서실에는 김회구 행정팀장·권택기 스케줄팀장·김해수 부실장·鄭泰根(정태근) 수행단장·申載旻(신재민) 메시지단장·許容範(허용범) 부단장·김윤경 비서·이진영 비서·임재현 수행비서가 있고, 제2비서실에는 박영준 네트워크 공동팀장·김대식 팀장·姜升圭(강승규) 커뮤니케이션 1팀장·이성복 커뮤니케이션 2팀장이 있다.
 
  공보상황실에는 동아일보 논설위원 출신인 李東官(이동관) 공보특보와 裵庸壽(배용수) 특보를 비롯해 朴興信(박흥신) 총괄상황팀장·曺海珍(조해진) 공보기획팀장·宋泰永(송태영) 팀장·김헌진 외신팀장·김시관·박정하 공보담당이 맹활약했다. 조선일보 홍콩특파원 출신인 咸永準(함영준) 前 부장과 李會昌씨의 공보특보를 지낸 李鍾九(이종구)씨가 외곽에서 활발히 움직였다.
 
  전략홍보 조정회의에는 李泰珪(이태규) 전략기획팀장·경윤호 조직지원팀장·김장수 여론조사팀장·孫暎東(손영동)씨 등이 「허리」 역할을 했다.
 
  曺海珍 공보기획팀장의 말이다.
 
  『이번 大選캠프에는 실무형 전문가들이 많았습니다. 당의 조직을 활용하기 보다는 소수정예 인력으로 선거를 치렀어요. 李明博 당선자는 자신에게 오는 사람을 막지 않아요. 물론 내치지도 않지요. 그러나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챙겨야 해요. 오직 성과로 말할 뿐이지요.
 
  李당선자는 부하 직원이 일을 잘못 처리할 때 혼을 내지만, 사람을 싫어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정말 싫어하죠. 유능한 사람에 대한 욕심이 많고요』
 
  선거캠프에서 활동했던 한 실무급 책임자는 2002년 한나라당 大選캠프와 李明博 캠프를 비교하며 이런 말을 했다.
 
  『이번 캠프는 국회의원 중심이 아닌 실무자 중심으로 선거를 치렀어요. 캠프조직이 슬림화됐고, 大選 후보와 실무책임자 간의 의사소통이 빨랐습니다. 정권교체를 희망하는 자발적 자원봉사자들이 많았지요.
 
  李明博 당선자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요인도 大選 승리에 큰 역할을 했다고 봐요. 2002년 당시 李會昌 후보가 귀족적·靜的(정적)·이념적·타율적이었다면, 李明博 당선자는 서민적·動的(동적)·실무 현장 중심적·자율적이었습니다』
 
 
  약점을 받아들이는 사람
 
  李明博 당선자의 약점을 담은 「이명박 對 이명박」이라는 보고서를 만들었던 金龍柱(김용주) 정책특보의 설명이다.
 
  『간부급 방송·신문기자 32명을 만나서 보고서를 작성했어요. 비판적 보고서였지요. 듣기 싫은 내용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런데 李明博 당선자가 몇 번을 읽더니 대부분 받아들이더라고요. 2002년 大選 당시 李會昌 한나라당 후보는 싫은 소리를 들으면 「금방 뭐라고 그랬어요?」하며 忠言(충언)하는 참모에게 면박을 줬어요. 그러니 누가 싫은 소리를 하겠습니까. 李明博 당선자는 자신의 약점을 받아들이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李明博 당선자는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졌다고 한다. 말만 많은 사람과, 행동으로 보이는 사람을 제대로 구분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을 단번에 판단한다는 말이 아니다. 정책적 사안을 결정할 때는 신속하고 추진력이 있지만, 人事(인사)문제에 관한 한 옆에 있는 사람이 지칠 정도로 신중하다고 한다.
 
 
  李明博의 칭찬과 야단
 
  李明博 당선자는 정치적 감각이 다소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선거에서 약하다. 당내 競選과 本選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일을 집행하는 자리에서는 능력을 발휘했다. 국회의원보다 서울시장 때 일을 많이 했고, 市의회의 지지를 받아냈다. 그런 측면에서 李明博 당선자의 측근들은 재임 기간에는 「일하는 대통령」으로, 퇴임한 후에는 「성공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李明博 당선자는 부하 직원을 함부로 야단치지 않는다.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함부로 일을 맡기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李당선자가 아끼는 사람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 때는 엄하게 야단친다. 여러 사람이 있는 공개석상에서도 혼을 낸다. 한 사람의 실수와 실패의 사례를 공유하기 위해서다. 그는 합리적인 논리로 잘못을 지적한다. 그는 참모가 변명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李明博 당선자의 핵심 측근으로 알려진 한 의원이 언론보도와 관련해 실수했을 때, 李당선자는 측근을 불러 『말 조심하라』며 30분 동안 혼낸 일이 있다.
 
  李明博 당선자는 아무에게나 칭찬하지 않는다. 우쭐댈 가능성이 많은 사람에게는 일을 아무리 잘해도 『수고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반대로 칭찬을 해도 탈이 없을 사람에게는 파격적으로 칭찬한다. 후보비서실에서 근무한 김윤경·이진영씨가 대표적이다. 李당선자는 두 여비서를 두고 『남자 10명과 바꾸지 않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국회에서 대통합민주신당의 BBK 공세에 대해 항의농성을 하고 있다.
 
  캠프 전체가 BBK 대응팀
 
  2007년 12월5일 검찰의 BBK 사건 중간수사 결과가 발표된 당일 저녁, 李明博 당선자는 BBK 사건 대응팀이었던 「클린정치위원회」 관계자들과 저녁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李당선자는 洪準杓(홍준표) 위원장을 비롯해 실무자들에게 『고생했다』며 격려했다.
 
  검찰이 『BBK 사건에 李明博 후보는 관련이 없다』고 발표하면서, 선거는 「李明博 승리」로 마무리 되는 듯했다.
 
  그러나 BBK는 大選 마지막까지 李明博 당선자를 긴장케 했다. 검찰의 중간수사 발표가 있은 지 며칠 후 정무·전략을 맡고 있는 캠프 실무자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이명박 후보가 BBK를 직접 설립했다」는 발언이 담긴 동영상 CD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실무자는 즉각 洪準杓·鄭斗彦·朴啓東 의원 등 캠프 의원들에게 제보 내용을 전했고, 의원들은 긴급대책회의를 열었다.
 
  회의결과, 李明博 진영은 제보자를 추적하기로 했다. 캠프 실무 관계자들은 동영상 CD를 소지하고 있던 사람들이 한나라당은 물론, 鄭東泳·李會昌 후보 측에 접촉해 거액을 요구했다는 정황을 입수했다. 朴宰成 특보의 말이다.
 
  『이들이 거액을 요구했습니다. 돈을 줄 수도 없었지만, 그냥 놔둘 수도 없었어요. 이들을 수사기관에 고발하기로 결정했지요. 李明博 당선자는 동영상과 상관없이 떳떳하기 때문에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던 겁니다. 검찰의 수사결과도 李明博 당선자가 BBK와 관련이 없다고 발표했잖아요』
 
  大選 3일 前, 동영상 CD는 민주신당 측에 의해 공개됐다. 검찰의 수사결과에도 불구하고 민주신당을 비롯한 상대 후보 진영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李明博 당선자는 신당이 내놓은 「BBK 특검법」을 전격 수용했다. 특검을 받아들이는 게 당선 이후 政局(정국)을 주도할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BBK 사건 대응팀인 「클린정치위원회」는 洪準杓 의원이 맡았다. 「모래시계 검사」로 유명한 洪의원은 汎여권의 BBK 공세에 대한 방어 총책임자였다. 그는 김경준이 제시했던 「한글계약서」에 대한 허점을 꼼꼼히 분석해, 김경준의 거짓을 밝혀 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1999년 李明博 당선자가 미국에 있을 때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이후 두 사람은 지금까지 깊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洪의원은 李明博 당선자를 공사석 구분 없이 「형님」이라고 부른다.
 
  洪準杓 의원은 클린정치위원회 소속 변호사·실무자와 매일 회의를 주재했다. 아침마다 개별적으로 업무를 분장하고 다음날 확인했다. 실무자들이 일을 제대로 해오지 않으면, 큰 소리로 야단쳤다.
 
 
  다양한 대응전략
 
  클린정치委 소속의 오세경 변호사는 특수부 검사 출신이다. 李明博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긴급 투입됐다. 그는 「BBK 사건」을 대비해 1년이 넘게 서울 서초동 법원청사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김재정·김백준·이상은 등 사건 관련자들이 검찰에 출두할 때 답변논리를 제공했다.
 
  BBK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뒤늦게 캠프에 합류한 高承德(고승덕) 변호사는 뛰어난 분석력을 발휘했다.
 
  殷辰洙(은진수) 변호사는 한나라당 경선 때 김유찬씨 사건을 맡았다. 한나라당內 후보 검증委가 구성됐을 때 李明博 당선자를 대리해 검증위원들과 전면전을 벌였다. 서울 강서을지구당 위원장인 殷변호사는 李明博 서울시장 시절 지역구 문제로 자주 만나 친분을 나눴다.
 
  BBK 사건과 관련해 朴啓東(박계동) 공작정치분쇄특별위원장의 역할이 컸다. 그는 李在五 前 최고위원과 함께 경선 초기부터 李明博 당선자를 지지했다. 2007년 6월부터 공작정치분쇄특별위원장을 맡아 汎여권의 「이명박 죽이기 TF팀」의 실체를 밝혀 냈다.
 
  그는 「노무현 정부의 불법 대선 공작조사보고서」를 발간했다. 시민사회단체의 정권 2중대 역할 및 大選 개입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시민단체, 희망인가 덫인가?」라는 책과 「권력저널리즘의 꽃─코드방송, 괴물포털」이라는 책자를 펴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는가─2002년 3大 공작정치 사건의 재조명」이라는 책자를 발간해 「김대업式」 공작정치를 저지하는 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本選을 앞두고 汎여권은 「BBK 사건」과 함께 李明博 서울시장 시절의 여러 정책들을 집요하게 파헤쳤다. 그러나 선거기간에 서울시장 시절의 정책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李明博 서울시장의 대변인을 지낸 金丙一(김병일) 서울市 경쟁력강화본부장의 역할이 컸다.
 
  金본부장은 선거캠프를 꾸릴 무렵 「캠프에 참여하라」는 주변의 권유가 있었으나, 여권의 공세와 검찰의 수사에 대비하기 위해 서울市에 잔류했다. 실제로 상암 DMC와 천호동 관련 특혜의혹 기사가 나왔을 때 검찰 조사까지 받았으나 모두 무혐의로 끝났다.
 
 
  「빨간 봉투 사나이」
 
  「이명박 大選 캠프」에 합류하지 않은 또다른 인물이 있다. 「빨간 봉투 사나이」로 알려진 尹萬石(윤만석)씨이다. 그는 1992년 李明博 의원 시절 보좌관으로 당선자와 인연을 맺었다. 그이후 지금까지 15년 동안 李明博 당선자의 「뒷일」을 처리해 왔다고 한다.
 
  尹萬石씨는 2006년 중반부터 유관조직인 「2020TF팀」을 이끌어 왔다. 이 팀은 학자·軍장성·검찰(검사장급)·국세청·국정원 등의 고위 간부 출신들로 구성됐다. 그는 2007년 6월까지는 週 1회, 그 이후에는 週 2회 이상 李明博 당선자에게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대학노트 크기의 빨간색 봉투에 담겨 전달됐다. 이 때문에 캠프 사람들은 그를 「빨간 봉투 사나이」라고 불렀다. 보고서의 내용은 청와대는 물론 각종 정보기관, 정치권 등의 동향에부터 與野(여야) 의원 개개인의 활동상황까지 총망라됐다고 한다.
 
  선대본부장인 李方鎬(이방호) 사무총장은 선거전략 수립·조직 관리 등 大選을 총책임지는 야전사령관 역할을 했다.
 
  權哲賢(권철현) 의원은 한나라당內에서 「잠룡 같다」는 말을 듣는다. 언론 노출을 피하면서 보이지 않게 李明博 당선자를 도왔기 때문이다. 그는 李明博 당선자의 특명을 비밀리에 수행했다. 물론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다.
 
  權哲賢 의원이 공식적으로 맡은 직책은 특보단장이다. 상임특보 170여 명, 정책특보 500여 명, 상근특보 25명을 총괄지휘했다. 상근특보의 경우, 장차관급·총장급·3성급 장성 등 고위인사들이 많다.
 
  權哲賢 의원은 특보단에서 올라오는 각종 정책이나 시책 중 李明博 당선자에게 전달해야 할 보고서는 직접 전달했고, 나머지는 각 분야별 관련 선대委에 넘겼다. 그는 사회 이익단체를 親이명박 단체로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의사회와 약사회, 간호사 단체와 간호조무사 단체들이 大選 때 특정 후보를 지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權의원은 在日(재일) 거류민단(회원 60만 명)의 지지도 이끌어 냈다. 이 밖에 「상록수 희망봉사단」, 「아세아(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사람들)」, 「대청봉(대한청년자원봉사단)」 등을 이끌었다.
 
  權哲賢 의원은 선거기간 중 「이회창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단식농성을 벌였다. 李會昌의 마지막 비서실장이자 「영원한 이회창 비서실장」이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던 그가, 李會昌 후보의 불출마를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였던 것이다.
 
  서울市 정무부시장 출신인 李春植(이춘식) 특보단 부단장과 朴昌達(박창달) 前 의원은 전국 단위의 「이명박 조직표」를 모으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들은 李明博 당선자의 대외 창구 역할을 하며 朴鍾雄 의원 등 민주계 인사의 지지 선언을 이끌어 냈다.
 
 
  李明博 위해 헌신한 고향 사람들
 
  李相得 부의장의 후원회에서 「유관조직」으로 확대된 상지포럼은 「환경대통령 이명박」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움직였다. 高秉準(고병준)·차준은 상지포럼 공동회장과 하진옥·박성대 부회장, 오금용·김창열 고문, 최종환 사무총장, 진용근 기획위원장, 안일태·성호경·박희수·유명재·이상우·유기준 대외협력위원장, 유경준 사무처장 등이 발벗고 뛰었다.
 
  김정행 포항향우회장과 권두철 영일포럼 회장은 同鄕(동향) 인사들을 대상으로 활발히 움직였다.
 
  중앙선대委 산하 일류국가비전위원장을 맡았던 金炯旿(김형오) 의원은 공약집을 내는 데 힘을 쏟았다. 그는 정책전문가 400여 명을 동원해 「일류국가 희망공동체 대한민국」이라는 공약집을 냈다.
 
  공약집과 정책실무 자료를 만드는 데 국회의원 보좌관들이 많이 참여했다. 박광명(정종복 의원실)·고성학(김형오 의원실)·조해구(김정권 의원실)·최현정(이종구 의원실)·이상훈(윤건영 의원실)·장오성(서상기 의원실)·조용환(전재희 의원실)·김윤정(이주호 의원실)·김덕중(박찬숙 의원실)·김소연(안홍준 의원실)·윤상경(고경화 의원실)·권승주(박승환 의원실)·이건(이계경 의원실)·박용석(진영 의원실)·이경직(황진하 의원실)·김태한(김태환 의원실)·유석현(전재희 의원실)·최기수(주호영 의원실)·이상모(이병석 의원실)·이봉건(김양수 의원실)·김광섭(이주영 의원실)·이승근(고흥길 의원실)·문형욱(임태희 의원실)·엄경영(정병국 의원실) 보좌관 등이 그들이다.
 
  李明博 당선자는 공약집이 발간되는 날 실무자들을 거론하며 격려했다. 李당선자는 중요 공약과 관련해서는 국회의원 보좌관들에게 직접 보고받았다. 그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실무 능력 중심으로 사람을 만났다.
 
 
  국회의원 보좌관 활용한 李明博
 
이명박 당선자는「747비전」을 발표하고『경제강국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증권거래소를 방문해「주가 3000시대」를 약속한 李당선자.
  李明博 당선자는 『이번 선거의 시대정신은 경제』라며 경제대통령 이미지를 강조했다. 대표 공약은 「747비전」(7% 성장, 국민소득 4만 달러, 7대 경제강국), 「일자리 300만 개」, 「예산 20조원 절감」, 「금산분리 완화」 등이다.
 
  전현직 의원을 비롯해 교수·관료·입법보좌관 등 40여 명으로 구성된 경제공약팀이 이를 담당했다. 경제공약팀은 재정금융조세·산업 중소기업 통상·건설교통 사회간접자본 등으로 나눠 활동했다. 李鍾九(이종구)·尹建永(윤건영)·金陽秀(김양수) 의원이 분과위원장을 맡았다.
 
  재경원 차관 출신인 姜萬洙(강만수) 정책조정실장은 정책을 총괄했다. 그는 700만 명 금융소외자 신용회복을 만들었고, 747공약의 밑그림을 그렸다. 안국포럼의 초기멤버인 그는 李明博 당선자와 20년 이상 인연을 맺고 있다. 李明博 서울시장 시절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을 맡았다.
 
  李明博 당선자가 다른 大選 후보와 차별성을 보인 부분은 교육정책이다. 교육정책은 李周浩(이주호) 의원과 洪厚祚(홍후조) 고려大 교수 등 자문교수단이 치밀히 준비했다. 李明博 당선자는 서울시장 시절 자신의 월급을 환경미화원 자녀들에게 장학금으로 주면서 불우한 학생들의 교육문제에 관심을 가져 왔다.
 
 
  국제정책연구원(GSI)
 
  정책과 관련해 국제정책연구원(GSI)을 빼놓을 수 없다. GSI는 李明博 서울시장 시절 자문 역할을 했던 동아시아연구원을 확대·개편한 정책참모그룹이다. 柳佑益(류우익) 서울大 교수가 원장을 맡았고, 郭承俊(곽승준) 고려大 교수, 李旺載(이왕재) 서울醫大 교수, 南成旭(남성욱) 고려大 교수, 趙元喆(조원철) 연세大 교수 등 60여 명의 전문가가 참여했다.
 
  大選 공약 중 「영유아 무상보육」, 「맘 앤드 베이비 플랜」, 「계층할당제」를 포함한 복지정책의 대부분이 GSI의 작품이다.
 
  白容鎬(백용호) 이화女大 교수가 이끄는 바른정책연구원은 親이명박 성향의 교수 200여 명이 모인 방대한 정책참모그룹이다.
 
  李明博 당선자는 전문가 그룹 중에서 외교안보팀을 비중 있게 다뤘다. 지난 10년 동안 잘못된 對北정책과 韓美관계를 새롭게 설정하기 위해서였다. 南柱洪(남주홍) 경기大 교수, 玄仁澤(현인택)·南成旭(남성욱) 고려大 교수, 金宇祥(김우상) 연세大 교수, 金泰孝(김태효) 성균관大 교수가 핵심 멤버이다. 李당선자의 외교정책 구상을 담은 「MB독트린」은 이들의 작품이다.
 
  李明博 당선자가 임기內에 역점을 두고 추진할 정책이 「다목적 한반도 대운하 건설」이다. 李당선자는 선거기간에는 불필요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 한반도 대운하 건설을 거론하지 않았다.
 
  한반도 대운하 정책은 2006년 9월 설립된 「한반도대운하연구회」가 주도하고 있다. 張錫孝(장석효) 前 서울市 행정부시장이 대표이다. 그는 중앙선대委 산하에 「한반도대운하특별위원회」를 설치해 朴勝煥(박승환) 의원과 함께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한반도대운하연구회
 
  운하 관련 전문가 200여 명이 참여하는 한반도대운하연구회는 100여 차례의 분과별 모임과 심포지엄을 열었다. 연구회 핵심멤버들은 2007년 5월에는 해외 기술자들과 함께 경부운하를 직접 탐사했다. 중국의 경항운하와 독일·프랑스·영국·네덜란드·벨기에·오스트리아·러시아 등 유럽 운하를 다녀왔다.
 
  한반도대운하연구회의 주요 인물로는 柳佑益·郭承俊 교수를 비롯해 추부길 안양大 겸임교수, 김영우 한나라당 일류국가비전위원회 정책상황실 부실장, 이철수 국장, 홍강식 수석연구원, 李時溱(이시진)·宋在偶(송재우)·박석순·정동양·김귀곤·신종호·황기연·이영인 교수가 있다. 영산강 운하와 금강 운하는 이병담 서남大 교수와 윤철호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교수가 맡고 있다.
 
  한반도대운하연구회의 정책총괄업무를 맡은 崔秉鈗(최병윤) 정책단장은 각종 자료 수집과 언론홍보를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녔다. 그는 네덜란드 운하설계 컨설팅社인 DHV社와 국내 환경공학자 등과 함께 기술토론회를 개최했고, 「한반도 대운하는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물길이다」라는 정책 종합보고서를 냈다.
 
  崔정책단장은 2007년 9월 연구회 조직內에 「물길연구소」를 별도로 개설했다. 李時溱 경기大 교수가 물길연구소장을, 임승일씨가 사무처장, 허준무 박사가 정책팀장을 맡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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