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링컨, 편법까지 포함한 치밀한 전략으로 공화당 대선 후보 되는 데 성공
⊙ 대통령 취임 후 수어드·체이스·베이츠 등 대선 경쟁자들을 중용
⊙ 남부, 링컨 당선되자 ‘아메리카 연합국’ 수립
⊙ 민주당, 노예 문제 놓고 민주당과 남부민주당으로 분열
⊙ 링컨, 노예 문제 등에 대해 ‘전략적 모호성’ 전략 구사
⊙ 링컨, 일리노이 떠나면서 “이제 가면 언제 올지, 돌아올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韓佑成
1956년생. 연세대 불어불문학과 졸업, 미국 스탠퍼드대 나이트 펠로(Knight Fellow) / 《미주한국일보》 기자, (사)유엔인권정책센터 이사, (사)김영옥평화센터 이사장, 육군 정책발전자문위원, 공군 정책발전자문위원,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초빙교수 역임 / 저서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
⊙ 대통령 취임 후 수어드·체이스·베이츠 등 대선 경쟁자들을 중용
⊙ 남부, 링컨 당선되자 ‘아메리카 연합국’ 수립
⊙ 민주당, 노예 문제 놓고 민주당과 남부민주당으로 분열
⊙ 링컨, 노예 문제 등에 대해 ‘전략적 모호성’ 전략 구사
⊙ 링컨, 일리노이 떠나면서 “이제 가면 언제 올지, 돌아올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韓佑成
1956년생. 연세대 불어불문학과 졸업, 미국 스탠퍼드대 나이트 펠로(Knight Fellow) / 《미주한국일보》 기자, (사)유엔인권정책센터 이사, (사)김영옥평화센터 이사장, 육군 정책발전자문위원, 공군 정책발전자문위원,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초빙교수 역임 / 저서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

- 공화당 대통령 후보 링컨의 선거 포스터. 이때만 해도 수염을 기르지 않았다. 사진=미 의회도서관
전략가로서 링컨의 면모는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링컨이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야망을 처음 품은 시점이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하퍼스페리 기습 사건(4월호 참조)이 발생한 1859년 10월을 전후한 시점 같다.
이미 민주당은 노예 문제를 놓고 분열하기 시작했고, 민주당 출신 현직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과 민주당의 가장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 스티븐 더글러스는 타협할 수 없을 만큼 서로를 혐오했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만 되면 백악관의 반은 손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링컨과 그의 선거 참모들은 우선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면서 몇 가지 묘수를 던졌다.
대중을 홈그라운드로
1860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의 빅 3. 왼쪽부터 수어드, 체이스, 베이츠.첫 수는 전당대회를 자신의 홈그라운드인 일리노이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공화당은 1860년 5월 전당대회를 열어 그해 11월 대선(大選)에 나갈 후보를 정하기로 돼 있었고, 이를 위해 1859년 12월 뉴욕에서 전국위원회를 열어 전당대회 장소를 정하기로 했다. 이 무렵 링컨은 전국적 정치인으로 부상(浮上)해 있긴 했으나, 대선 주자로서는 아직 선두 그룹에 속하지 못했다. 당시 공화당의 강력한 대선 후보는 3인방으로 꼽히는 윌리엄 수어드 연방상원의원, 새먼 체이스(Salmon P. Chase) 오하이오주 지사, 에드워드 베이츠(Edward Bates) 전 미주리주 법무장관이었다.
전국위원회가 열리자 3인방 지지자들은 각자 자기 진영에 유리하도록 전당대회 장소로 뉴욕주, 오하이오주, 미주리주를 밀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선정위원회 소속이던 노먼 저드(Norman Judd)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이 3인 모두에게 공평하게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전당대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이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링컨과 저드가 가졌던 사전(事前) 협의에 따른 것이었다. 다른 후보들 진영은 링컨에 대해 신경도 쓰지 않아 시카고가 선택지에 포함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고, 표결을 거듭한 끝에 전당대회 장소가 시카고로 결정됐다. 저드의 막후 교섭 덕분이었다. 이로써 ‘링컨 대통령 만들기’의 첫 수가 조용히 두어졌다.
둘째 수는 대중 동원이었다. 전당대회를 시카고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고 일리노이로 돌아온 저드는 즉시 다음 조치에 나섰다. 링컨처럼 변호사로서 평소 철도회사 고객이 많았던 저드는 이들과 접촉해 전당대회 기간중 일리노이주 전역과 시카고를 연결하는 기차 요금을 낮췄다. 링컨은 오랫동안 순회법원을 따라다녀 서민층에 이름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이들이 차삯 때문에 전당대회에 못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링컨 진영은 지지자 동원 조치까지 마쳤다. 다른 후보들 진영은 이 모든 움직임에 대해 아무 감도 못 잡고 있었다.
1860년 새해가 되자 링컨은 2월 말 뉴욕에 와서 강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 강연은 수어드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못마땅한 사람들이 주최한 것이었다. 대선 후보 선두주자였던 수어드가 뉴욕주 지사를 지냈음에도 뉴욕에서 이런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그에게 적신호였다.
“정의가 힘이라는 것을 믿읍시다. 그 믿음 안에서 마지막까지 용감하게 우리 의무를 다합시다.”
링컨이 마지막 말을 끝냈을 때 청중은 우레같은 박수를 보내며 열광했다. 이날 청중 1500명도 소수는 아니었으나, 연설이 여러 신문을 통해 널리 퍼지자 도처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했다. 링컨은 아직 대선 후보로 나선다고 발표하지 않았으나, 유권자들의 입에 링컨이라는 이름이 오르내리는 빈도가 늘어 갔다.
수어드의 실책
셋째 수는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름)였다. 사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전략이었을지 모른다. 링컨은 대선 출마를 결심했으나 생각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링컨이 다른 후보들처럼 대권 야심을 일찍 공개했더라면 그들의 견제 때문에 전당대회를 시카고로 끌어들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링컨은 전국 공화당 전당대회를 1주 앞두고 열린 일리노이주 공화당 전당대회에 가서야 대선 출마를 공식화했다. 일리노이주 공화당 전당대회가 링컨을 대통령 후보로 결정하자 링컨 진영이 민첩히 움직였고, 다음 날 결의안이 채택됐다.
“에이브러햄 링컨만이 일리노이주 공화당의 유일한 대통령 후보다. 일리노이주 대의원들은 시카고 전당대회에서 모든 명예로운 방법을 사용해 링컨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도록 해야 한다. 일리노이주 대의원들은 단일체로서 링컨을 위해 투표해야 한다.”
마지막 문장이 핵심이었다. 일리노이주 대의원들이 전당대회에서 다른 후보에게 표를 던지지 못하게 하려는 표 단속이었다.
넷째 수는 ‘밉지 않은 2등’ 전략이었다. 링컨이 예전보다는 알려졌으나 대세는 역시 수어드였다. 그는 21세에 변호사, 30세에 뉴욕주 상원의원, 37세에 뉴욕주 지사가 됐다. 그때는 뉴욕주 지사 취임 연설문이 대통령 취임 연설문처럼 전국 언론에 보도되던 시절이라 당연히 미국을 이끌 차세대 지도자로 일찍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수어드가 47세 때, 12년째 연방 상원의원으로 있던 그가 차기 미국 대통령이라는 전망은 점점 높아졌다.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전당대회를 앞두고 유럽과 중동을 유람할 때 빅토리아 영국 여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이탈리아 국왕, 레오폴드 1세 벨기에 국왕, 교황 비오 9세, 팔머스톤 영국 외무장관 등 유럽 지도자들이 최대의 예우를 갖춰 환대했다.
8개월이나 계속된 이 여행은 수어드의 노예 문제 발언들이 너무 급진적이라 적을 많이 만드니 당분간 미국을 떠나 논쟁에서 비켜 있는 것이 낫겠다는 그의 ‘장자방(張子房)’ 설로 위드(Thurlow Weed)의 권고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쟁 중에 장수가 전장(戰場)을 비운 것과 같은 치명적 패착이었다. 수어드의 과신은 다른 후보들에 대한 저평가와 맞물렸다. 특히 링컨에게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수어드가 기억하는 링컨은 12년 전 휘그당 전당대회에서 만났던 시골 변호사 출신의 입담 좋은 초선 연방 하원의원일 뿐이었다.
당내 경쟁자들을 공격하지 않아
1860년 5월 16일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린 위그왐 건물. 사진=퍼블릭 도메인이와 달리 링컨의 전략은 현실을 냉철히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대선 후보 3인방에도 끼지 못하는 자신이 승리하는 시나리오는 오직 하나였다. 전당대회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어 후보가 결정되지 않을 경우, 2위 이하 후보들의 지지 표를 모아 역전승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다른 후보 진영의 비호감 인물이 되지 말아야 했다. 링컨은 공화당 대선 주자 누구도 비판하지 않으면서, 민주당 대선 후보 1순위였던 스티븐 더글러스에게만 포문을 집중했다. 더글러스의 명성이 자신의 부상에도 도움을 주는 일석이조(一石二鳥) 전략이었다.
다섯째 수는 전당대회장 그 자체였다. 일리노이주 공화당은 전당대회를 앞두고 ‘위그왐(Wigwam)’으로 불리는 전당대회장을 급조했는데, 건물 자체에도 링컨 진영의 전략이 스며 있었다. 전당대회장은 대의원과 귀빈 700여 명을 포함해 1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임시 목조건물로 수용 인원 면에서 당시 미국 최대로 약 6주 만에 건설됐다. 그런데 벽과 천장을 소나무로 만들면서 도료를 칠하지 않은 데다 천장은 돔형으로 만들어 건물 전체가 거대한 바이올린이나 기타 같은 악기처럼 기능하게 했다. 이 구조는 마이크나 스피커가 없던 시절에 연사들의 목소리가 청중들에게 잘 전달될 뿐 아니라 청중들의 환호성이 벽이나 천장에 반사되며 증폭되게 했다. 후자(後者)가 링컨 진영의 노림수였다.
물밑 공작
1860년 5월 16일 시카고에서 공화당 전당대회가 개최됐다. 이미 위그왐 건물은 링컨 진영이 살포한 가짜 입장권을 들고 입장한 일리노이 주민들로 가득 차, 뉴욕에서 기차를 타고 온 수어드 지지자들이 요란한 시가행진까지 마치고 대회장에 도착했을 때는 들어갈 자리도 마땅히 없었다.
전당대회가 시작되자 대의원들은 격렬한 토론 끝에 후보 선출 요건을 재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 득표가 아니라 2분의 1 이상 득표로 합의했다. 그러자 수어드가 승리에 한 걸음 더 다가선 듯했다. 그 즉시 표결했다면 수어드로 결정됐을 가능성이 있었으나, 주최 측은 득표 기록지가 준비되지 않았다며 표결을 다음 날 아침 10시로 연기했다. 운명의 여신이 링컨에게 보내는 미소였다.
공화당이 지난 대선에서 졌던 4개 주에서 이긴다면 백악관을 차지할 수 있다는 전망이 우세했다. 이들 4개 주는 일리노이, 인디애나, 뉴저지, 펜실베이니아였는데, 선두 주자였던 수어드가 노예 문제에 너무 급진적이고 이민 문제에도 너무 개방적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표결이 연기되자 이들 4개 주 대표들은 ‘12인 위원회’를 급조해 대안을 모색했으나 밤 10시까지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때부터 다음 날 표결까지 12시간은 설득과 타협,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합종연횡(合從連橫)의 시간이었다. 링컨 진영은 이렇게 주어진 12시간을 이용해 각개격파 하듯 위원들을 설득했다.
“1차 표결 결과 각자가 지지하는 후보가 가능성이 없어졌다고 판단되면 그 주의 대의원 표를 링컨에게 달라.”
다음 날 표결에 앞서 후보들의 이름이 호명될 때, 링컨 순서가 되자 대회장을 가득 메운 일리노이 주민들의 함성이 울렸다. 그 함성은 위그왐 건물 구조 덕에 한껏 증폭됐다. 가짜 입장권이 살포된 것을 모르는 다른 주 출신 대의원들은 전당대회 참가자 전체가 링컨을 지지한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표결이 시작됐고 누구든 233표를 먼저 얻으면 승자였다. 집계 결과는 수어드 173과 2분의 1, 링컨 102, 체이스 49, 베이츠 48표였다. 1차 표결에서 승자가 결정되지만 않는다면 자기도 가능성 있다는 링컨의 꿈 같은 시나리오가 현실로 다가왔다. 편법까지 써 가며 대회장을 점령하다시피 한 링컨 지지자들이 다시 한 번 환호했고 그 소리는 위그왐을 진동시켰다. 전당대회를 시카고로 끌어들이고 대회장 설계까지 치밀하게 준비한 링컨 진영의 전략이 주효한 순간이었다.
2차 표결은 수어드 184와 2분의 1, 링컨 181…. 그러자 나머지가 후보에서 물러나면서 수어드와 링컨 1 대 1 대결이 됐다.
역전극
이때만 해도 수어드는 뉴욕 자기 집에서 전신국을 오가는 파발마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수어드는 우연히 자신의 59회 생일에 시작된 전당대회에서 승리를 굳게 믿었다. 그는 대선 후보가 되는 즉시 연방 상원의원에서 물러나기 위해 대회 직전 주말에 고별사 초안까지 작성했고, 대회가 열리자 뉴욕주 오번(Auburn)에 있는 방 20개짜리 자기 저택에서 승전보를 기다렸다. 지지자들은 수많은 깃발과 축포용 대포까지 여러 문 준비해 두고 있었다. 링컨은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과 전신국을 오가며 새 전보가 들어왔는지 확인했다. 그 시대에는 후보들이 직접 전당대회장에 가지 않았다.
3차 표결이 진행되면서 링컨이 231과 2분의 1까지 올라갔다. 1과 2분의 1표만 더 있으면 승리였다. 그때 오하이오주 대의원 대표가 일어나 외쳤다.
“(후보에서 물러난) 체이스 오하이오주 지사를 지지했던 4표는 링컨을 지지한다.”
이로써 얼마 전까지 이름도 없던 시골 변호사 링컨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됐다. 이어진 절차들은 전당대회가 링컨을 만장일치로 추대하는 것으로 포장하는 요식행위였다. 공화당은 “대통령 후보 링컨, 부통령 후보 해니벌 햄린(Hanibal Hamlin)”이라고 선언했다. 축포가 발사되고 대회장 안팎에서 결과를 기다리던 수만 명이 환호했다. 햄린은 링컨과 동갑내기로 메인주 연방 하원의원과 주지사를 거쳐 연방 상원의원으로 있다가 부통령 후보가 됐다. 그도 변호사 출신으로 원래 민주당이었으나 강경한 노예 폐지론자였기에 공화당 창당과 함께 당적을 옮겼다. 이때까지 링컨과 개인적 친분은 없었다.
이 순간 민주당은 아직 대통령 후보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민주당인 현직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은 대통령에 취임할 때 이미 재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민주당이 공화당보다 일찍 전당대회를 열었기 때문에 후보도 먼저 정했어야 했으나, 민주당은 후보를 뽑지 못한 채 혼란스럽게 전당대회를 끝냈다. 노예 문제 때문이었다.
민주당은 대선 후보 1순위였던 스티븐 더글러스의 정책을 반영한 정강을 채택한 후 그를 후보로 뽑을 예정이었다. 더글러스의 정책이란 새 영토에서 노예 허용 여부를 현지 주민이 결정한다는 국민주권론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노예제 반대자 눈에는 노예제의 선택적 확산이었고, 노예제 찬성자 눈에는 노예제의 온전한 존속에 대한 위협이었다. 그러나 이미 미국은 노예제에 대한 미봉책(彌縫策)이 더는 통할 수 없는 단계로 진입해 있었다. 민주당 전당대회가 더글러스 정책을 반영한 정강을 채택하자 앨라배마주 대의원들이 벌떡 일어나 대회장을 떠났다. 그러자 미시시피주 대의원들도 일어섰고, 이어서 다른 남부 주 대의원들이 뒤따랐다.
남부민주당 창당은 남북전쟁의 전조
1860년 남부민주당 대선 후보 존 브레킨리지.남부민주당이 창당되고 독자적 대선 후보를 세웠다는 사실은 11월 대선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별개의 국가를 세울 수 있다는 의지의 표시였다. 이것은 최악의 대선 불복이고 연방정부가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이 같은 현실을 도외시한 채 단순히 노예 문제를 무시함으로써 미국을 통일된 하나의 국가로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합헌동맹당을 만들고, 노예제의 급진적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급진폐지당을 만들어 각각 독자적 대선 후보를 내세웠다. 이에 따라 대선은 5파전으로 치러지게 됐다.
1860년 대선은 선거인단이 303명이었으므로 152명을 확보하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선거인단 투표에서 당선자가 없으면 연방 하원이 대통령을 선출하는데, 당시 하원은 워낙 혼란스러워 과연 누구를 뽑을지, 심지어 뽑을 수나 있을지조차 불확실했다. 민주당이 쪼개지긴 했지만 최근 32년 가운데 28년간 집권해 축적된 경험이 있었다(휘그당으로 1841년 대통령이 된 윌리엄 해리슨이 취임 31일 만에 병사하자, 역시 휘그당인 존 타일러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타일러는 무늬만 휘그당이지 정책 면에서는 강성 민주당이었다. 타일러는 대통령이 된 후 휘그당 정책을 거부하고 민주당 정책을 추진해,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휘그당에서 제명됐다. 타일러 행정부 4년은 사실상 민주당 행정부였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던 링컨은 반드시 선거인단 투표에서 승부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려면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경쟁했던 다른 후보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 시절 미국은 대통령 후보가 직접 유세에 나서는 것은 품위에 어긋난다고 여겨 본인은 가만히 있고 지지자들이 유세했다. 이 때문에 대선 후보가 되기 전보다 후보가 된 다음 지지자들의 지원 유세가 더 중요했다. 링컨이 후보 경선 때 경쟁자들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이때를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수어드의 좌절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자기보다 15살이나 많고 연방 하원의원 경력도 20년이나 앞선 베이츠 전 미주리주 법무장관에게는 그가 거절하기 어려운 인물을 사자(使者)로 보냈다. 링컨과는 블랙호크 원주민 전쟁 때 같은 여단에서 복무한 이래 오랫동안 함께한 친구로 공화당 창당 강령 기안자이자 평소 베이츠 지지자였던 오빌 브라우닝(Orville Hickman Browning)이었다. 브라우닝이 다녀온 후 베이츠도 지지 대열에 합류했다.
누가 뭐라 해도 가장 중요한 인물은 수어드였다. 링컨도 수어드의 동참 여부가 대선의 향방을 좌우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수어드는 승리를 과신해 막판 8개월 미국을 떠나 있는 결정적 실수를 범해 막상 대통령 후보가 되지는 못했으나, 그는 자타가 공인하던 대선 주자 1순위였다. 링컨은 수어드에게는 편지나 사람을 보내는 대신 수어드의 오른팔인 위드를 스프링필드로 초청했다. 위드는 직접 링컨을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누며 링컨의 인품과 리더십을 확인하고 수어드에게 전했다.
수어드는 링컨 지지문을 언론에 싣기도 했으나, 자기를 위해 준비된 대포들이 링컨을 위해 울렸던 포성을 잊지 못한 채 속으로 심하게 좌절하고 갈등하고 있었다. 경선 패배라는 현실이 너무 충격적이라 10개월 남은 연방 상원의원직까지 당장 던지고 물러나 정계 은퇴까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자신과 같이 공화당을 창당했던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Charles Francis Adams) 연방 하원의원이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존 애덤스(John Adams·2대) 대통령의 손자이자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6대) 대통령의 아들이다. 그는 수어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고로 성공했을 때 얼마나 멋있게 행동하느냐보다, 지금처럼 실망스러울 때 얼마나 적절히 행동하느냐에 대해 내려지는 평판이 훨씬 오래 남을 것”이라고 했다.
링컨과 수어드의 재회
수어드는 결단을 내렸다. 위기에 빠진 미국을 구하기 위해 반드시 공화당 정부를 출범시켜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은 수어드의 순회 연설이 시작됐다. 미시간, 위스콘신, 미네소타, 아이오와, 캔자스, 오하이오…. 기차를 타기도 하고, 배를 타기도 하고, 마차를 타기도 하면서. 이때 그가 서부에서 소화한 유세 여정만 5000km에 달했다.
수어드의 활약은 일기당천(一騎當千)이었다. 그는 어디를 가든 군중과 보도진을 몰고 다녔고 그의 연설은 즉시 전국으로 타전돼 현지 언론에 게재됐다. 수어드의 지원 유세는 대선 전날까지 계속됐다.
서부 지역 지원 유세 중이던 수어드가 대선을 한 달쯤 앞두고 공화당의 단결을 과시하기 위해 링컨을 만나러 왔다. 수어드가 탄 기차가 스프링필드역에 멈추자 군중과 함께 기다리던 링컨이 먼저 기차에 올랐다. 수어드를 위한 예우였다. 링컨은 메사추세츠에서 열렸던 휘그당 전당대회 이야기를 꺼냈다. 성공한 정치인이 되려면 노예 문제에 대해 입장을 정해야 한다던 수어드의 조언을 언급하고, 그 후 자신도 계속 그렇게 생각해 왔노라며 덕담을 건넸다.
12년 전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수어드는 이미 차세대 지도자로 떠오른 대통령감이었고, 링컨은 중앙정계에 갓 입문한 초선 연방 하원의원이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링컨은 대통령 후보가 돼 있었고, 수어드는 떼어 놓은 당상인 그 자리를 뺏긴 입장이었다. 둘은 함께 마차를 타고 링컨의 집으로 가 여러 시간 얘기를 나눴다. 5개월 후 한 사람은 대통령, 다른 한 사람은 국무장관으로 환상적 팀을 이루며 불멸의 업적을 남기게 된다.
워싱턴의 거물 블레어를 멘토로 얻다
프랜시스 블레어블레어는 백악관에서 길 하나 건너에 저택을 갖고 있었다. 그는 딸 엘리자베스 블레어와 사위 새뮤얼 리를 위해 저택 바로 옆에 집을 한 채 더 짓고 함께 살았는데, 나중에 미국 정부가 이 일대를 매입해 두 건물을 하나로 통합하고 대통령 영빈관으로 사용한다. 이곳이 오늘날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워싱턴을 방문하는 한국 대통령들도 자주 머무는 블레어하우스(Blair House)다. 블레어의 사위 새뮤얼 리의 사촌 형이 나중에 남군 총사령관이 되는 로버트 리 장군이다. 링컨이 대통령이 된 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로버트 리 대령(당시)에게 북군 총사령관을 맡기고 싶어 했을 때, 블레어가 사돈인 리에게 링컨의 제안을 전했던 곳도 여기다.
링컨의 대선 전략: 전략적 모호성
링컨은 대선 후보로 확정된 후 본선까지 6개월 동안 선거 전략을 완전히 바꿨다. 우선 대중 연설과 강연을 중단하고 민감한 현안에 대해서는 발언을 삼갔다. 전략적 모호성을 지켜, 불필요하게 적을 만들지도 않고 유권자들의 반감을 키우지도 않으려는 목적이었다.
대선의 최대 쟁점은 역시 노예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링컨-더글러스 연쇄 토론 및 이미 보도된 연설이나 강연 내용을 정리해 다시 배포하도록 했다. 이 정도로 충분하지 않다고 여겨지면 수어드가 대타(代打)로 나섰다.
“공화당은 이미 노예제가 존재하는 지역의 노예 문제에 개입할 의도가 없다. 새 영토에서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아도 남북이 통상적 관계를 단절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노예제 철폐론자가 아니다.”
대중 연설 중단은 대선 후보가 직접 유세하지 않는다는 당시 관행에 따른 것이었지만, 민주당 후보 스티븐 더글러스는 전국 순회 유세에 나서면서 60년 이상 계속된 전통을 깼다. 그래도 링컨은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노예 문제가 최대 현안이기는 했으나 전부는 아니었다. 민생 문제는 언제나 서민의 관심사였고, 유권자들의 관심사는 지역마다 달랐다. 북미-유럽 무역의 최대 관문인 뉴욕-뉴저지항을 가진 뉴저지 주민들은 관세 문제가, 갈수록 확대되는 서부로 이주하는 개척자들은 정부 소유지를 공짜로 받거나 헐값에 살 수 있는 불하(拂下)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뷰캐넌 대통령이 정부 소유지 불하에 대한 자영농지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자 불만을 품은 유권자들은 링컨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링컨은 대선 캠페인을 이끌면서 작은 지방선거 상황까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여러 지방에서 들어오는 현황 보고가 너무 장밋빛임을 간파한 링컨은 보다 객관적이고 솔직한 보고를 요구했다. 권력자에게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권력자가 모든 보고를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자세는 대통령이 돼서도 계속돼 링컨 정부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
스티븐 더글러스의 예견
“링컨이 차기 대통령이군.”
대선을 한 달 앞두고 인디애나주와 펜실베이니아주 지방선거에서 공화당 승리 소식을 들은 민주당 대선 후보 스티븐 더글러스는 말했다. 대권 도전 3수 만에 대통령 후보가 된 더글러스는 대선 후보는 직접 유세하지 않는다는 전통까지 깨고 순회 유세에 나섰으나 대세는 기울고 있었다.
더글러스는 이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분단을 막기 위해 남부로 가야 한다며 위험을 무릅쓰고 남부로 갔다. 북부 지도자들은 분리 운운이 지난 40년 동안 잊을 만하면 꺼내는 남부의 허풍이라고 간과했으나, 역사는 더글러스의 판단이 정확했음을 보여 준다. 더글러스는 링컨의 대통령 당선 후 남북 분단을 막는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멕시코를 합병해 노예 허용 지역으로 만들자는 제안까지 내놨다. 더글러스는 링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면 그가 취임하는 것이 당연하며 선량한 시민이라면 분단을 막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남부 주민들은 냉랭했다. 남부는 노예 문제에서 더글러스의 입장이 너무 미온적이라며 노예제 유지를 주장하는 남부민주당을 중심으로 결집했다. 민주당의 분열은 경쟁자들의 화합을 끌어내 한 팀으로 만든 링컨에게 백악관으로 가는 길을 넓혀 줬다.
1860년 11월 대선 결과 득표율은 공화당의 링컨 39.8%, 민주당의 더글러스 29.5%, 남부민주당의 브레킨리지 18.1%, 합헌동맹당의 존 벨(John Bell) 12.6%였다. 그러나 선거인단 확보는 링컨 180, 브레킨리지 72, 벨 39, 더글러스 12였다. 이로써 정규 교육을 1년도 못 받고 중앙정치 경력이라곤 연방 하원의원 2년이 전부인 시골 변호사 링컨이 16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공화당 창당 후 첫 번째 대통령이었다. 이 선거에서 더글러스와 브레킨리지의 득표율을 합치면 47.6%로 링컨보다 7.8%포인트 많았다. 민주당이 분열하지 않았다면 링컨이 보다 힘든 선거를 치렀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당시 모든 후보의 지역별 득표를 보면, 각 지역 단위로 나머지 후보들의 득표를 다 합쳐도 선거인단에서는 링컨이 반을 넘어 링컨의 당선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민주당이 분열하지 않아 시너지 효과가 있었다면 결과는 다를 수도 있었다. 링컨은 남부에서는 단 한 명의 선거인단도 얻지 못했다. 노예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는 남부에 노예를 반대하는 링컨은 그만큼 위험인물이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때만 해도 링컨은 노예제 확산 반대론자였지만, 남부인들의 눈에는 노예제 반대론자나 노예제 확산 반대론자나 다 한통속이었다.
남부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이해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12월 18일 존 크리텐든(John J. Crittenden) 연방 상원의원은 6개 개헌안과 4개 법안을 묶은 법안을 상원에 제안했다. 요지는 미주리 타협의 골자인 북위 36.5도를 복원해 그 이남에서 노예제 허용을 개헌으로 명문화하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향후 혹시 쿠바나 멕시코에서 얻게 되는 영토가 있다면 거기에서도 노예제를 허용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또 남부를 만족시키기 위해 남부가 노예제를 영원히 보존할 수 있도록 이 개헌 내용을 차후 개헌으로 바꿀 수 없다는 수정 불가 조항도 있었다.
법안이 상정되자 링컨은 대통령당선인이 현안에 개입하지 않는 관례를 무시하고 강력한 반대 의사를 밝혔다. 링컨은 공화당 의원들에게 “노예제를 확산시킬 수 있는 어떤 타협도 하지 말아 달라”는 요지로 편지를 보냈다. 남부의 노예제 지지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노예제는 타협으로 해결할 수 없고 완전한 독립만이 해결책이라 주장했다.
크리텐든 법안이 상정된 지 이틀 만인 12월 20일 사우스캐롤라이나가 드디어 연방 탈퇴를 선언했다. 해가 바뀌자마자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가 뒤를 이었다. 현직 대통령인 뷰캐넌은 남부의 연방 탈퇴도 불법이지만 연방정부도 탈퇴를 막을 법적 권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현직 대통령이 방관하는 사이 탈퇴한 주들은 연방군 요새, 무기고, 세관을 점령했다. 대통령당선인 신분으로 아무런 권한이 없던 링컨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탈퇴한 7개 주는 아메리카 연합국(CSA·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출범을 전제로 2월 8일 임시헌법 제정과 동시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전쟁장관 출신으로 노예제를 지지하는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 전 연방 상원의원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스스로 정치인보다 군인이 더 맞는다고 생각해 남군 총사령관이 되고 싶어 했던 데이비스는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됐다는 전보를 받고 실망했으나, 공인의 의무라고 생각해 대통령직을 수락했다.
작별 인사
나라가 쪼개지는 엄청난 현실을 마주한 링컨은 대통령 취임식을 위해 워싱턴행 기차를 타려고 2월 11일 오전 7시 조금 지나 스프링필드역에 도착했다. 링컨은 착잡한 심정으로 기차 제일 뒤칸에 서서 군중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이제 가면 언제 올지, 돌아올 수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4년 후 자신의 비운(悲運)을 예견하는 듯한 인사였다.
오전 8시 정각, 링컨을 태운 기차가 요란한 기적과 함께 스프링필드를 떠났다. 3일 전 남부연합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된 데이비스도 비슷한 시각에 미시시피주 브라이어필드(Brierfield)에 있는 자기 농장을 떠나 미시시피강을 다니는 기선에 몸을 싣고 미시시피주 빅스버그(Vicksburg)로 출발했다. 여기서 기차로 갈아타고 남부연합 수도인 앨라배마주 몽고메리로 가서 대통령에 취임하기 위해서였다. 나이 차도 불과 8개월로 사실상 동갑에 둘 다 켄터키주 통나무집에서 태어났고 블랙호크 원주민 전쟁에도 참전했던 링컨과 데이비스는 이렇게 각각 대통령 취임을 위해 같은 날 집을 나섰다. 그러나 이처럼 삶의 공통분모가 많은 둘이 탄 기차가 서로 다른 목적지로 달렸듯, 이후 이들의 운명도 미국의 운명도 전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달렸다.
이틀 후인 2월 13일은 대통령선거인단이 연방의사당에 모여 의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형식적이나마 대통령 선출 절차를 밟도록 법으로 정한 날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 절차를 거쳐야 대통령 당선이 공식화된다. 링컨과 수어드는 극렬분자가 이 절차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심히 우려했다.
정초에 링컨은 수어드에게 편지를 보냈다.
“양원(兩院)이 모이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양원이 모여도 의결정족수가 부족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도 대통령 당선은 합헌이라 생각하나?”
분위기는 그만큼 험악했다.
합동회의는 연방 상원의장을 겸하는 부통령이 주재했다. 대선에서 선거인단 확보 2위였던 브레킨리지였다. 선거인단 표결이 끝난 후 브레킨리지가 선언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 해니벌 햄린이 부통령에 각각 당선됐다.”
참관인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정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전원 실탄을 장전한 총기로 무장한 군인들을 대기시키고 있었다. 이때 링컨과 수어드의 걱정은 정확히 160년 후 현실로 나타났다. 2020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낙선 후 2021년 1월 6일 폭도들이 연방의사당을 습격했다. 선거인단 투표에서 이긴 조 바이든 당선인의 대통령 당선 공식화를 막고 궁극적으로 대선 결과를 뒤집기 위해서였다. 브레킨리지 부통령 입장이 된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예정보다 몇 시간 늦어졌으나 절차를 밟고 바이든의 대통령 당선을 공식화했다. 연방하원은 트럼프를 탄핵소추했으나, 연방상원이 면죄부(免罪符)를 줬다.
링컨의 수염
링컨을 태우고 스프링필드를 떠난 기차는 12일 만에 3000km 이상을 달리며 중간 101곳에서 때로는 잠깐, 때로는 오래 정차했다. 기차가 멈추면 대통령당선인 링컨이 모여 있는 군중에게 연설하고 다시 달리는 강행군이었다.
2월 16일 기차가 뉴욕주 웨스트필드(Westfield)에 도착하자 링컨은 기다리고 있던 군중 2000명 앞에서 연설 후 물었다. “혹시 여기 그레이스 베델(Grace Bedell)이라는 이름의 소녀가 있습니까?”
군중 속 환영객 한 명이 소녀를 인도해 군중을 헤치고 나왔다. 링컨이 소녀에게 말했다. “그레이시, 내 수염을 보렴. 너를 위해 길렀구나.”
그레이시는 그레이스의 애칭이다. 11세 소녀 그레이스 베델은 대선을 3주쯤 앞두고 링컨에게 편지를 보냈다.
“얼굴이 너무 야위었으니 수염을 기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수염을 기르시면 오빠 4명 모두 링컨에게 투표시킬게요. 여자들은 수염 있는 남자를 좋아하니, 수염 기른 모습을 보면 링컨에게 투표하라고 그들도 남편을 조를 거예요.”
링컨은 베델에게 보낸 답신에서 수염을 기르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았으나, 대선 승리 후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날도 그런 모습으로 베델을 만났다. 베델 덕분에 기르기 시작한 링컨의 수염은 이후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그만큼 링컨은 대중에 비치는 이미지에 신경을 썼다.
현존하는 링컨 사진이 130장을 넘어 동시대 정치인들보다 훨씬 많은 것도 같은 이유다. 웨스트필드는 이때 링컨과 소녀가 만나는 장면을 동상으로 세웠고 관광 명소가 됐다.
링컨 암살 시도
기차는 2월 22일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전날 윈필드 스코트(Winfield Scott) 육군 총사령관이 수어드에게 급전을 보내왔다. 다음 날 볼티모어에서 링컨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메릴랜드는 북부였지만 지난해 대선에서 링컨의 득표율이 2.46%로 선거인단 8명을 남부민주당 브레킨리지가 챙겼을 정도로 남부에 우호적이었다. 더구나 볼티모어 카운티는 링컨의 득표율이 0.52%에 불과할 정도로 링컨은 더 인기가 없었다. 게다가 모든 워싱턴행 승객은 볼티모어에서 내려 도보나 마차로 다른 역으로 가서 워싱턴행 기차로 갈아타야 했기 때문에, 볼티모어는 암살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다.
수어드는 즉시 둘째 아들 프레드릭 수어드(Frederick Seward)에게 반드시 링컨을 직접 만나 메시지를 전하도록 했다. 프레드릭은 그날 필라델피아 콘티넨털 호텔에서 링컨을 만나 아버지가 준비해 준 문건을 전했다. 링컨은 변장을 한 채 원래 일정도 변경해 야간열차를 타고 볼티모어를 그대로 통과해, 예정보다 하루 늦은 2월 23일 새벽 워싱턴에 도착했다.
링컨은 안전하게 워싱턴에 도착했으나, 이 사건은 즉시 전국적으로 보도되면서 취임도 하지 않은 링컨에게 커다란 정치적 타격을 입혔다. 평소 공화당을 적극 지지했던 진보 언론 《뉴욕 타임스》가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기에 반향이 더 컸고, 많은 언론의 후속 보도가 이어졌다. 어떤 언론은 죽음을 두려워한 링컨이 “부인 옷을 입고 밤에 스며들었다”고도 했다. 어떤 언론은 그런 장면을 묘사하는 우스꽝스러운 삽화를 게재해 링컨을 조롱하기도 했다. 약하고 우유부단한 인물이 통수권자가 된 데 대해 국민과 언론이 걱정한다는 기사도 있었다.
사실 링컨은 처음 볼티모어 암살 음모를 보고받고 원래대로 여정을 계속하기 원했으나, 주변의 조언을 받아들였다가 곤욕을 치렀다. 링컨은 앞으로 생명에 대한 위험 따위는 무시하겠다고 결심했다. 실제로 링컨은 남북전쟁 때 전선 시찰을 하면서 총탄이 난무하는 상황에도 몸을 피하지 않았고, 밤에 혼자 말을 타고 백악관 밖을 나다니는 일도 잦았다. 링컨이 비겁했다고 비판했던 언론과 대중은 링컨이 암살 음모를 무시해 피살됐다면 취임식을 앞둔 대통령당선인이 암살 음모를 보고받고도 무시하다가 사고를 자초했다고 비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볼티모어 암살 미수 사건은 새 대통령에게 점수를 따려는 핑커튼(Pinkerton) 조직의 날조라는 주장도 있다. 핑커튼은 1850년 무렵 미국에 설립된 사설 치안회사였다.
링컨은 1861년 3월 4일 취임식을 거행하고 16대 미국 대통령이 됐다. 취임사 요지는 다음과 같다.
나는 노예제가 이미 존재하는 주에서 노예제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개입할 의사가 없습니다. 헌법이 부여한 권한에 따라 연방법이 모든 주에서 유효하게 할 것입니다. 이 나라와 제도의 주인은 국민이며, 국민이 현존하는 정부가 싫다면 개헌권 행사나 혁명으로 정부를 전복시킬 권리가 있습니다.
내전이라는 중대 현안은 내가 아니라 지금 연방정부에 불만이 있는 동료 시민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면 전쟁에 휘말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적이 아니라 친구이며, 적이 돼서는 안 됩니다. 격정이 퇴색시켰을 수 있으나, 우리는 애정 어린 연대(連帶)를 깨뜨려서는 안 됩니다.
핵심은 “남부 노예제에 개입하지 않겠다. 남부가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전쟁은 없다. 그러나 분단만은 안 된다”는 것이다. 취임사 말미 “우리는 적이 아니라~”부터 생략한 나머지 끝까지는 링컨의 초안에 없었으나, 수어드에게 초안을 보여 주자 수어드가 걱정하는 국민을 달래고 포용하는 긍정적 메시지로 끝내는 게 좋겠다며 수정안을 제시했다. 링컨이 그 수정안을 다시 조금 고쳤다.
링컨은 취임사에서 “남부가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면 전쟁은 없다”고 강조했으나 이미 정부까지 세운 남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한 다음 날 긴급보고가 날아들었다.
“포트 섬터 보급품이 4월 15일을 넘길 수 없다.”
포트 섬터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항을 지키는 요새였다. 찰스턴항은 북미 무역항 가운데 남부연합 세력권에 있는 가장 중요한 항구였다. 미국은 2차 미영전쟁을 거치며 북미 대륙이 대서양으로부터 공격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인식했고, 찰스턴항 방어를 위해 바다 가운데 인공섬을 만들고 요새를 지었다. 그것이 포트 섬터였다. 앤드루 잭슨이 대통령에 취임한 1829년부터 노예를 동원해 만들기 시작해 외벽 공사에만 벽돌 400만 장을 사용했으나 중간에 예산 문제로 공사가 중단돼 아직 내부 공사는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찰스턴항이 막히면 남부는 무역도 외교도 할 수 없었다. 포트 섬터는 원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정부 소유였는데 연방에 넘겨줘 소규모 연방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사우스캐롤라이나는 관할권 반환을 계속 요구하고 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링컨 취임 약 2개월 전에도 포트 섬터로 가는 연방군 보급선에 포격을 가하며 도발했다. 그때는 임기도 곧 끝나고 남부에 우호적인 뷰캐넌 대통령의 무반응으로 전쟁까지 가지는 않았으나, 포트 섬터는 언제라도 터질 수 있는 화약고였다.
링컨은 대단히 어렵고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보급품을 보내거나 요새를 보강하면 전쟁 의지로 읽힐 수 있고, 가만히 있으면 남부의 압박에 대한 굴복을 의미했다. 그렇지 않아도 볼티모어 암살 미수 사건 때 처신으로 약골 대통령이라고 호되게 비판받은 링컨으로서는 또다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도 없었다.
링컨의 통 큰 정치
왼쪽부터 기디언 웰스, 몽고메리 블레어, 해니벌 햄린.링컨은 각료 후보자 명단부터 연방상원에 보냈다. 사태가 워낙 긴박하게 돌아가자 상원도 시간을 끌지 않고 이들을 인준했다.
링컨의 각료 명단은 세인(世人)을 놀라게 했다. 당시 장관은 국무·재무·법무·전쟁·해군·체신·내무 등 7명으로, 링컨은 대선 경쟁자 3인방 모두를 장관에 임명했다. 국무장관 수어드, 재무장관 체이스, 법무장관 베이츠였다.
그뿐 아니라 각료 7명 가운데 민주당 출신 공화당원이 3명이나 됐다. 재무장관 체이스, 해군장관 기디언 웰스(Gideon Welles), 체신장관 몽고메리 블레어(Montgomery Blair)였다. 언제라도 전쟁이 터질 수 있는 상황에서 셋 다 전쟁과 직결되는 자리였다. 체신장관은 당시 유일한 원거리 군사통신 수단인 전신도 책임지는 자리였다. 이로써 링컨은 내각에 민주당 출신이 너무 많아 휘그당 출신 공화당원들이 홀대받는다는 불만을 가질 것이라는 우려를 일축하고 다양한 관점을 내각에 반영하겠다는 의지를 현실화했다.
사실 해니벌 햄린 부통령도 민주당 출신이었다. 햄린 부통령도 노예제 반대자로서, 결국 이로 인해 민주당과 결별하고 공화당에 가세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부통령은 각료가 아니었다. 부통령이 각료가 아닌 것은 초대 워싱턴 대통령 시절부터 내려오는 전통이었다. 워싱턴은 장관 4명으로 초대 내각을 구성하면서 부통령을 제외했다. 부통령은 연방 상원의장을 겸하므로 입법부의 일원으로 여겨지다가, 20세기 들어 행정부 일원으로 여겨지면서 각료가 됐다.
남부 제퍼슨 데이비스, 동원령 발동
링컨이 초대 내각을 구성한 다음 날인 3월 6일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 대통령은 복무 기간 1년을 전제로 병력 10만 명 동원령을 내렸다. 링컨은 대통령으로서 군 통수권자였지만 아직 군을 잘 모르는 데다 전쟁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육사 출신으로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명성을 얻고 전쟁장관까지 지낸 데이비스는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보고 먼저 병력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수어드가 링컨에게 보고하지 않고 남부와 막후 교섭에 나섰다. 전쟁 없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포트 섬터를 남부에 넘겨 주고 시간을 벌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알게 된 링컨이 그런 식으로는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며 단호히 제동을 걸었다.
4월 1일 수어드 국무장관이 ‘대통령의 고려를 위한 몇 가지 생각’이라는 제목의 메모를 링컨에게 제출했다. 이 메모는 남부의 분리에 대해 링컨 정부가 대처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 좌절감을 느끼고 있던 수어드의 처방전이었다. 수어드는 ▲정부의 정책 부재(不在)를 지적하면서, 국가적 관심의 초점을 노예제에 대해 견해가 다른 정당의 문제에서 ‘통일이냐 분단이냐’라는 애국의 문제로 전환하고 ▲(외국과 전쟁이 국내적 통합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고) 서반구에서 스페인과 프랑스의 최근 움직임과 관련, 두 나라에 설명을 요구하고 설명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선전포고도 가능하며 ▲포트 섬터를 포기하는 대신 멕시코만(灣)에 있는 다른 요새들의 방어를 강화하고 ▲역동적 정책은 대통령이나 장관이 주도해야 한다면서 자신이 그 역할을 맡겠다고 나섰다.
수어드의 만우절 메모
이 건의는 링컨을 가볍게 보고 자신이 링컨 정부의 사실상 대통령으로 군림하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을 꿈꾼 수어드의 욕심에서 나온 것이었다(스페인, 프랑스 등 열강의 동향에 대해서는 다음 6월호 참조).
메모를 보자마자 수어드의 저의를 파악한 링컨은 그날로 답신을 보냈다. 정부 정책은 없는 게 아니라 자신의 취임사에 명시돼 있으며, 특정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면 궁극적 권한과 책임이 있는 대통령으로서 자신이 직접 하겠다는 요지였다.
링컨은 수어드에게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는 대신 조용히 답신을 보내 누가 보스인지를 명확히 했다. 간단명료하고 신속한 답신을 받은 수어드는 링컨의 의지와 능력을 재평가하고 다시는 링컨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다. 수어드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대권(大權) 야심까지 완전히 버리고 끝까지 링컨의 참모이자 정치적 동지 역할에 충실했다. 이날 수어드의 메모는 작성일이 우연히 4월 1일 만우절이어서 미국사에서는 ‘만우절 메모’로 불리기도 한다.
사실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될 때부터 수어드를 행정부 2인자인 국무장관에 임명하려 했고 이를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이 과정에서 곧 퍼스트레이디가 될 부인 메리가 강력히 반대했으나 링컨은 모른 척했다. 메리는 링컨의 임기 내내 변함없이 강력한 차기 대통령감으로 꼽히는 수어드를 항상 남편의 정적(政敵)으로만 여겨, 백악관을 출입할 때도 자기 마차가 백악관에서 한 길 건너 있는 수어드의 집 앞을 지나는 것조차 싫다며 마부에게 돌아가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그러나 링컨은 수어드에 대한 부인의 불평과 견제를 항상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포트 섬터의 포성
수어드의 만우절 메모가 있은 지 닷새 후인 4월 6일 링컨은 결심이 선 듯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에게 통보했다.
“포트 섬터에 있는 장병들의 식량이 4월 15일을 넘기지 못합니다. 탄약 없이 식량만 실은 비무장 선박을 포트 섬터로 보내겠습니다.”
보급선이 무사히 요새에 도착하면 연방의 의지를 관철하면서 요새를 지키고, 남부가 보급선을 공격해 전쟁이 시작된다면 남부가 전쟁 도발자가 되게 하는 전략이었다.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남부가 먼저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낫다”는 링컨의 발언도 같은 맥락이었다. 전쟁을 피하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도덕적 정당성만은 북부가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에게 보낸 링컨의 편지에 대해 보고받은 데이비스 남부 대통령은 4월 9일 “보급선 도착 전에 포트 섬터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남군은 1861년 4월 12일 포트 섬터를 향해 포문을 열고 4000발을 퍼부었다. 이로써 군인 전사자만 70만 명 안팎에 달하는 4년간의 처절한 전쟁이 시작됐다. 남북전쟁이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