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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재미동포 의사 심재훈의 기막힌 인생記

“깡패가 될 놈을 의사로 맹그신 건 하나님의 뜻이 아이겠습니까”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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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 대구에서 태어나 성장기 내내 외톨이로 살아
⊙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유년 시절 봉화 → 대구 → 수원 → 경성 → 부산 → 함안 → 교토 → 청송 → 의령 → 마산 → 부산 → 양산까지 친인척 전전
⊙ 삶의 조각을 모조리 이어 붙여도 부모와 함께한 시간은 3년도 채 되지 않을 만큼 외로운 방랑자
⊙ 6·25 당시 미군 부대 하우스 보이. 이 일로 스스로 학비를 마련해 경북대 의대 졸업… 1968년 渡美해 플로리다주에 정착
⊙ 서울 영등포 ‘요셉의원’에서 2003년부터 2015년까지 매년 3개월간 美 플로리다에서 건너와 仁術 펼쳐

沈載勳
1935년생. 경북대 의대, 美 애틀랜틱 오리엔탈 메디슨 한의학과 졸업 / 2000년 이후 가난한 중남미 국가 찾아 자비로 의료봉사. 2003~2015년 매년 서울 영등포 요셉의원에서 의료봉사 / 미 법무부 장관상, 자넷 리 사회봉사상, 경북대 자랑스러운 동문상, 경북대 의대 의료봉사상
  올해 89세인 미국 내과 의사가 있다. 동포 심재훈(沈載勳). 그는 1935년 대구에서 태어나 성장기 내내 외톨이로 일제 시대와 6·25전쟁을 겪었다.
 
  혼자 힘으로 어렵게 경북대 의대를 마치고, 1968년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 연방 교도소 의무과장을 지냈다. 사는 내내 의료봉사를 꿈꾸다 2003년 쪽방촌 노숙자들이 모여 사는 서울 영등포 ‘요셉의원’을 알게 되었다. 이후 2015년까지 매년 한국을 찾아 3개월간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돌아갔다. 그는 흰 가운을 입지 않는 의사였다. 흰 가운 앞에 주눅이 드는 환자가 있어서다.
 
  도미니카 공화국, 아이티 등 가난한 카리브해 연안 국가로 의료봉사를 떠나기도 했다. 의료환경이 열악해 제대로 된 진료나 처방이 쉽지 않았기에 한의(韓醫)와 침술을 공부했다. 미국 한의대에 늦깎이 입학해 72세 무렵 정식 한의사가 되었다. 현재도 미국 한인들에게 무료 침술을 베풀며 살고 있다.
 
  그런 그의 삶을 작가 김미조씨가 소설로 펴냈다. 《니는 혼자가 아이다》(가디언). ‘아이다’는 ‘아니다’의 경상도 방언이다.
 
7월 8일 서울 송파구 강남중앙교회에서 심재훈 선생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지인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지난 7월 8일 출판기념회가 열린 서울 송파구 강남중앙교회에서 심재훈 선생을 만났고 일주일 뒤 다시 만났다. 이후 소셜 미디어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며 소설 《니는 혼자가 아이다》를 읽어보았다.
 
  유년 시절, 살기 위해 이 집 저 집 옮겨 다녀야 했던, 평생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았던 외톨이의 몸부림을 알게 되었다. 그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드러낼 방법을 고민하다가 소설 속 장면과 심재훈의 인터뷰를 병치하기로 했다.
 
 
  #1. 엄마의 가출
 
심재훈·김미조가 쓴 소설 《니는 혼자가 아이다》(가디언)
  〈“집에 갑니더.”
 
  “어?”
 
  “잘 계시소, 인자 절대 볼 일 없을 끼라예.”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느냐는 표정으로 이웃집 여자를 본다. 이웃집 여자도 지금 상황을 이해할 리가 만무하다. 시집온 지 석 달밖에 되지 않은 새색시가 서슬 퍼런 시어머니에게 ‘집에 간다’고 말하는 경우를 이제껏 본 적이 없다. 이웃집 여자도 적지 않게 놀라서는 자기 앞을 쓱 지나치는 귀히(심재훈의 어머니-편집자 註)를 붙잡을 생각조차 못한다.
 
  귀히는 긴장감을 숨긴 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걸음걸이를 유지한다. 그렇게 무사히 두 여자를 지나쳤다고 생각한 순간이다. 후다닥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그녀의 몸이 뒤쪽으로 휘어진다. 시어머니가 우악스럽게 그녀의 머리끄덩이를 잡고선 잔뜩 힘을 준 탓이다. “이게 미쳤나. 머, 집? 여가 니 집이다! 이년아!”라고 소리를 질러대며, 다른 한 손으로는 귀히의 손에서 보따리를 낚아챈다. 그 통에 귀히 머리끄덩이를 잡은 손의 힘이 살짝 풀어진다. 귀히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두 손으로 시어머니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린다.
 
  “저, 저, 문디 가시나! 여 온나. 안 오나!”〉(소설 《니는 혼자가 아이다》 16~17쪽)

 
  ― 소설 속 ‘귀히’는 심 선생의 어머니인데 왜 결혼하자마자 가출한 겁니까.
 
  “아버지는 이미 결혼도 전에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셨고, 집안 어른의 중매로 결혼식만 군말 없이 치르신 후로 마음대로 사셨던 겁니다. 사실 할머니도 할아버지의 바람기로 평생 애달프게 사셨던 분이셨죠. 그런데 ‘니는 니 냄편 맴도 못 잡고, 뭐 했노’ 하시며 며느리에게 올가미 같은 희망을 은근슬쩍 걸어두려 하셨죠. 어머니는 그걸 완강히 거부한 신(新)여성이셨어요.”
 
  ― 그 시절 여성이 이혼을 먼저 요구했다는 사실이 놀랍네요.
 
  “어머니가 합의이혼을 시댁에 요구하셨다는데 정말이지 당시로선 생소했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그 무렵 (대구 지역) 신문에 대서특필되었을까요? 어머니는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북여고)를 나온 수재셨고 얼굴도 눈에 띄는 미인이셨어요. 지금 사진을 봐도 그래요.”
 

  ― 이혼 후 여성이 경제적 자립을 하기가 쉽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살기 위해 초등학교 교사가 되셨어요. 당시 교사가 부족했던 시절이라 고등보통학교 졸업생도 교원자격증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첫 발령지가 경북 봉화군 춘양면입니다. 지금도 깡촌인데 당시엔 오죽했을까요? 그래도 나는 어머니와 함께 있어 마냥 행복했지만,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살기 어려워 얼마 후 외가로 보내졌지요.”
 
 
  #2. 이별, 기약 없는 그리움…
 
심재훈의 아버지 심근섭.
  〈귀히 뒤편으로는 거대한 구렁이 같은 기차가 제 몸체를 길게 늘인 채 널브러져 있다. 덜컥 겁이 난다. 저를 가려주었던 벽과 온기를 내뿜는 바닥이 없다. 이제껏 이처럼 많은 사람이 오가는 것을 본 적도 없고, 이처럼 여러 소리가 뒤엉켜 귀를 시끄럽게 하는 걸 경험한 적도 없다. 무엇보다 저를 보는 엄마의 눈에 그렁그렁 차 있는 눈물이 무섭다. 평상시와 다르게 애틋하면서도 슬퍼 보이는 얼굴이다.
 
  “도착하면, 전보 치고.”
 
  “퍼뜩 대답 안 하나.”
 
  “언니 혼자 괜찮겠는교?”
 
  “몇 번이나 말하노. 오히려 그게 낫….”
 
  귀히는 아차 싶어 말을 멈춘다.
 
  겨우 세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말귀를 알아듣기라도 한 듯 불안한 눈으로 저를 보고 있어서다.〉(소설 42~42쪽)

 
  ― 어린 심재훈과 어머니, 보모가 함께 지내다 이별하는 장면이군요.
 
  “그때부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삶 깊이 스며들었어요. 나는 증기기차의 바퀴 기계음과 기적소리에 트라우마가 있었어요. 가끔 기차가 큰 입을 벌려 사람들을 덥석 삼켜 먹는 꿈을 꾸곤 했지요. 기적소리를 들으면 심장이 뛰고 땀이 나며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두 손으로 귓구멍을 틀어막아야 했습니다.
 
  훗날 심리학을 배우며 고통의 이유를 유추할 수 있었어요. 기적소리가 나면 이내 엄마가 사라지니, 어린 가슴에 깊은 상처로 남았던 겁니다.”
 
  ― 이후 아버지 심근섭(沈根燮)과 만났습니까.
 
  “대구 외가에서 5세까지 살았는데 아버지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뵌 적은 없었어요. 당시 외할머니나 이모들의 대화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천하에 나쁜 놈이셨어요.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주제에 이혼을 거부하고 처가에 와서 난동을 부리고 이모들 집까지 들쑤시고 다녔다는 겁니다.
 
  아버지는 집안 장손인 나를 데려가고 싶어 하셨죠. 법적으로 양육권자가 아버지셨으니까요.”
 
  물론 어머니는 아들 재훈만을 바라보며 젊음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사이 재혼했고 슬하에 3남매까지 얻었다. 그러니 어머니와 더불어 살 처지가 못 되었다.
 
  “유년 시절에 봉화→대구→수원→경성 등지로 옮기며 살아야 했는데 아버지가 온다는 소문이 나면 외가 식구들이 나를 어딘가로 데려갔던 겁니다. 그 시절 삶의 조각보를 이어 붙여도 부모와 함께한 시간은 햇수로 3년이 채 되지 않을 만큼 외로운 방랑자였죠.”
 
 
  #3. 똑똑한 여섯 살 아이
 
심재훈의 어머니. 젊은 시절의 모습이다. 소설에는 이름이 ‘귀히’로 나온다.
  〈광화문 이모부 할아버지 집에 간 적이 있다. 경성까지 왔어도 서대문의 작은 동네를 벗어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기에 성자(재훈의 이모할머니-편집자)가 말하는 집이 그 집임을 바로 알아차린다. “거(거기) 가서 돈 좀 얻어온나.”
 
  “내가?”
 
  “어, 니가. 퍼뜩 가라. 돈 안 주면 니 이모할매가 죽는다 케라.”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몇 번이나 방이 있는 쪽을 올려다본다. 성자가 뛰쳐나와 광화문 이모 할아버지 집에 가라고 한 건 그냥 해본 말이었다고 할 것 같다. 겨우 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게 시키기엔 과도한 심부름, 저도 알고 있는 사실을 성자가 모를 리 없다.(중략)
 
  재훈은 터덜터덜 골목 밖으로 나섰다. 전차 정류장까지는 십여 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라 별 어려움이 없다. 문제는 차비도 없이 홀로 전차를 타야 한다는 것이다.〉(소설 66~67쪽)

 
  ― 어떻게 된 겁니까.
 
  “아버지가 날 찾으러 온다고 해서 외가에서 급히 수원 이모할머니 집에 보냈고, 또 아버지가 수원으로 온다는 소문이 있자 다시 서울, 그러니까 경성에 집을 얻어 이사 갔던 겁니다. 의사인 이모부 할아버지가 광화문에서 병원을 하셨는데 딴살림을 차리셨던 겁니다. 이모할머니가 차비도 안 주고 이모부 할아버지에게 가서 생활비를 얻어오라 시킨 것이죠.”
 
  ― 여섯 살 아이에게 터무니없는 심부름을 시켰네요.
 
  “그 일이 있기 전에 이모할머니랑 광화문에 다녀온 적이 있었거든요. 눈썰미가 있어서 ‘갈 때는 까만 바탕에 빨간 글자’ ‘올 때는 흰 바탕에 빨간 글자’를 알았어요. 일본어를 전혀 몰랐지만, 전차 표지판의 앞부분을 유심히 봤던 겁니다. 전차에 탈 때도 어느 아주머니의 치맛자락을 슬쩍 잡고 타서 차비를 내지 않았죠.”
 
  ― 그래도, 이모할머니가 차비도 안 주고 그 일을 시킨 것은 이해가 안 되네요. 아버지는 언제 만났나요.
 
  “경성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아버지가 끝내 찾아왔어요. 보기에도 잘생기고 키가 큰 남자가 고급스러운 잿빛 양복을 입고 있었죠. 만약 아버지임을 밝히지 않았다면 이제껏 본 적이 없는 멋쟁이 남자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대구 외할머니가 말했던 ‘천하에 나쁜 놈’임을 알아차렸고, 그 순간 덜컥 겁이 났지요.”
 
  심재훈의 기억으로는 그때가 초등학교 입학을 사흘 앞두고였다. 학교 가방까지 샀는데 다시는 멜 수 없었다. 그 길로 아버지를 따라 부산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그 남자, 아니 아버지가 날 번쩍 들어 품에 안으셨는데, 답답하게 갇혀 있는 느낌이 들면서도 세상을 내려다보는 자유가 생긴 것 같았죠. 여러 감정이 동시에 치대는 바람에 마음이 복잡했던 기억이 납니다.”
 
  ― 그렇게 해서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내려갔군요.
 
  “부산에서 만난 의붓어머니는 밀양 출신 기생이었어요. 1년 안 되게 살다가 아버지가 갑자기 사기꾼으로 몰려 감옥에 가게 됐어요. 주동자들이 만주로 튀어 아버지 혼자 죄를 뒤집어쓴 겁니다.
 
  나는 다시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거죠. 아버지와 사는 몇 달은 달콤한 눈깔사탕 같아서, 입안에 든 사탕이 순식간에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을 했는데 결국 그런 일이 일어난 겁니다.”
 
  아버지 심근섭이 수감되자 의붓어머니는 일본 교토에 살던 친할머니에게 전보를 쳤고 심재훈은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4. 다시 일본으로
 
심재훈과 아내 김인향 여사.
  〈성인(심재훈의 친할머니-편집자)은 재훈의 손을 잡은 채 급한 발걸음으로 매표소 앞에 줄을 선다.
 
  “우리 인자 배 타는교?”
 
  “오야 좋나?”
 
  “어, 쬐금.”
 
  “그럼 됐다.”
 
  줄을 선 지 이십여 분이 지났을 즈음이다. 성인과 재훈은 매표창구 바로 앞까지 왔다.
 
  “으른(어른) 하나, 아 하나.”
 
  성인이 창구 안으로 돈과 증명서를 밀어 넣는다.
 
  “여행증명서가 와 한 장만 있는교? 아 꺼도 있어야 하는데.”
 
  “아가 인자 일곱 살인데 증명서가 필요한교?”
 
  “조선인은 한 살 아기라도 있어야 합니더.”
 
  “좀 봐주이소. 내캉 지금 안 가면 아가 갈 데가 없심더.”
 
  “내 알 바 아이고, 증명서부터 받아 오이소.”
 
  재훈은 조모와 매표소 직원이 나누는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조선인, 여행증명서? 뭐지? 뭔데 꼭 있어야 하는데 갑자기 세상이 매우 복잡하게 느껴진다. 이제껏 알고 있는 세상과는 또 다르다.
 
  “우짜노? 우짜면 좋노?”〉(소설 86~87쪽)

 
  ― 할머니를 따라 일본에 못 간 겁니까.
 
  “못 갔지요. 여행증명서가 있어야 부산~시모노세키행(行) 관부(關釜)연락선을 탈 수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걸 몰랐던 겁니다. 할머니도 늦둥이 아들이 혼자 있어서 배를 탈 수밖에 없었어요. 할머니는 나더러 친가 친척이 모여 사는 경남 함안으로 가라셨어요.”
 
  ― 어떻게 함안으로 갔나요.
 
  “그 먼 거리를 인력거를 타고 갔죠, 혼자서…. 나를 본 친척 어른들이 놀라서는 ‘니는 진짜 크게 될 놈’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곳에서의 생활도 녹록지 않았어요. 하도 눈치가 보여 혼자서 진주에 있는 다른 친척집에 갔지요. 사실, 저에겐 살 곳을 고를 선택권이 없었어요. 어린아이였으니까. 속으로 외쳤죠. ‘제발 날 두고 으데(어디) 가지 마라’고.”
 
  ― 어떻게 일본에 갔나요.
 
  “경찰서에 매일 찾아가 조선인 순사에게 증명서 발급을 졸랐어요. ‘지는 거 아이면 갈 데가 없다’ 하고 매달렸지요. 그리고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집을 떠돌아다녔는지 늘어놓았습니다. 매일같이 눈물로 호소했더니 결국 떼어주었죠.”
 
  만 여덟 살 심재훈은 그렇게 여행증명서를 들고 혼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경남 의령에서 교토로 유학을 떠나는 학생이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시모노세키 항구에 도착해 다시 기차를 타고 가까스로 교토역에 내렸지만 할머니를 만날 수는 없었어요. 너무 당황스러웠죠. 미리 전보를 쳤는데도 말이에요. 나중에 알게 됐지만 할머니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기차를 놓친 겁니다. 함께 관부선을 탔던 유학생의 하숙집에서 두 밤을 자고서야 만날 수 있었어요. 만 여덟 살 방랑자의 삶이 그렇게 고단할 수가 없었어요.
 
  남의 집을 전전할 때는 늘 배가 고팠어요. 다들 못살 때였으니까. 교토의 할머니 집에 오니 밥은 실컷 먹을 수 있어 좋았어요. 할머니의 늦둥이 아들, 그러니까 내 삼촌이 일곱 살, 조카인 나는 여덟 살이어서 매일 싸우는 게 일과였어요. 할머니가 마흔다섯에 낳은 삼촌은 몸이 왜소해 나를 이길 수 없었어요. 매일 주먹다짐을 하니 할머니가 ‘조카놈이 아재(아저씨)를 울린다’고 야단치셨던 기억이 납니다.”
 
 
  #5. 어머니를 찾아 한국으로
 
심재훈은 흰 가운을 입지 않는 의사다. 환자가 의사 앞에 주눅이 들면 안 되니까. 요셉의원에서 봉사하던 시절, 특별히 흰 가운을 입었다. 사진=심재훈
  〈일본에 산 지 3년이 조금 지났을 무렵이다. 아이의 앞에는 큰 가방을 어깨에 메고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있는 중년 여자가 서 있다. 이웃인 청송댁이다. 재훈에게 자신의 짐을 교토역까지 들어달라 부탁한 것이다.(중략)
 
  재훈은 여자에게 짐을 넘겨주고 심부름 값까지 받았다. 그 길로 조모 집으로 돌아가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뒤돌아서는 대신 청송댁의 소매를 붙잡는다.
 
  “아지매, 따라갈까예?”
 
  제가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한번 던져본 말도 아니었기에 여자가 좋다 싫다 같은 말은 하지 않고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침을 꿀꺽 삼킨다.
 
  “그래, 가자.”
 
  “….”
 
  “와, 싫나?”
 
  “그게 아니라 이상해서….”
 
  “우째 허락하는교?”(중략)
 
  “가면, 지낼 곳은 있고?”
 
  “엄마 있어예. 대구에 갈꺼라예.”〉(소설 108~109쪽)

 
  ― 그러니까, 일본에서 다시 한국으로 가출한 거네요.
 
  “열 살 때였는데 일본이 패망했어요. 이웃에 살던 아주머니가 경북 청송분인데 귀국한다고 해서 제가 교토역까지 짐을 들어다 주었죠. 그 청송댁을 따라 할머니 몰래 귀국선을 탔던 겁니다. 떠나며 할머니에게 엽서 한 장을 보냈지요. ‘할매, 내는 조선으로 간다’고.”
 
  ― 대구에서 엄마를 만났나요.
 
  “할머니가 문갑에 감춰둔 어머니 집 주소가 적힌 쪽지를 갖고 다녔거든요. 온갖 고생을 하며 대구까지 찾아갔지만 어머니는 이미 재혼한 상태였어요. 청송댁을 만난 어머니왈(曰) ‘아지매가 얄(이 아이를) 데려가면 안 되겠는교?’
 
  할 수 없이 청송 산골에서 6개월을 지냈는데 동네 아이들과 지게 지고 땔감 줍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 소견에도 ‘이렇게 살 순 없다’고 생각해서 경남 의령으로 내려갔지요.”
 
  청송에서 의령까지 마냥 걷고 또 걸었다. 중간에 딱 한 번, 지나가는 트럭을 얻어 타기는 했지만 길을 나선 지 열흘 만에야 거지꼴로 의령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일본 살던 할아버지가 후처(後妻)와 마산에 정착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본처인 할머니는 교토, 할아버지는 오사카에서 따로 살았다. 따라서 할아버지를 평생 본 적이 없었다.)
 
  가출한 나를 할아버지가 받아들일지, 내칠지 알 수는 없었지만 딱히 다른 선택권이 없었어요. ‘언제는 누가 반겼나. 그냥 붙어 있었던 거지. 안 되면 다른 데 가지’ 하는 희망과 체념 사이 어디쯤엔가 오기도 끼어들었죠.”
 
  그렇게 1년 반 가까이 의령에서 지냈다. 할아버지는 갑작스러운 ‘귀한 장손’의 등장을 반겼지만, 할아버지 눈이 미치지 못한 곳에선 의붓할머니 식구들에게 ‘굴러 들어온 구박데기’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 무렵 교토에 살던 할머니가 돌아와 대구에 정착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 길로 다시 대구로 갔다.
 
  ― 할머니가 교토에서 가출한 손자를 1년여 만에 만났는데 반겨주던가요?
 
  “첫마디가 ‘저놈, 집에서 쫓아내라’였지요. 부들부들 떨더니 고함부터 질러댔어요. 입에서 ‘죄송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더군요. ‘나가라’고 해서 뒤돌아서는데 어린 삼촌이 나를 잡더군요.”
 
  그 무렵, 1947년 늦가을의 찬바람에 발이 시린 아침, 심재훈은 아버지 심근섭과 다시 만난다.
 
 
  #6. 의대에 진학하다
 
심재훈의 젊은 시절 아내 김인향과 아이들이다. 사진은 대구 산격동 경북대 농대 부근이다.
  〈귀히는 재훈을 보자마자 허둥지둥 삼 남매를 방 안으로 들여보낸 후 밖으로 문을 잠근다.
 
  그 모습을 무심히 쳐다보던 재훈은 집 안쪽으로 들어서려던 발걸음을 멈춘다. 이로써 세 번째. 청송댁과 찾아온 후, 작년에 딱 한 번 홀로 찾아온 적이 있다. 아버지와 못 살겠으니 함께 살자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때 귀히는 야멸차게 내쫓았다.(중략)
 
  “엄마, 고마 내캉 가자. 내가 막노동을 하든 지게를 지든 엄마 하나는 먹여 살릴 수 있다.”
 
  “미쳤나.”
 
  “어, 미쳤다. (중략) 이대로 있다간 그냥 죽을 것 같다. 살리도. 엄마 내캉 살자. 그러면 내가 좀 살 수 있을 것 같다.〉(소설 142~143쪽)

 
  해방 후 아버지 심근섭은 외국 선박에 생선을 대주고 그 대가로 받은 연유나 설탕을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을 했는데 꽤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널찍한 내 방이 생겼고 돈 걱정 없이 중학교에 다닐 수 있었어요. 그러나 아버지의 폭력, 할머니의 폭언을 견뎌야 했지요. 경남중학교 시절 키(172cm)가 커 3년 내내 반장을 맡았어요. 영어와 수학을 잘했지요. 중학교 2학년 때 6·25가 터지면서 사업차 서울에 간 아버지와 소식이 끊어졌죠. 다시 아버지와 만난 것은 1952년 11월이었습니다.”
 
  훗날 알게 됐지만, 그해 9·28 서울 수복 때까지 아버지는 어느 기생집에 숨어 지냈다고 한다. 그 무렵 심재훈은 다시 가출해 대구에 살던 어머니를 찾아갔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종종 나에게 ‘화냥년의 자식’이란 소리를 하셨죠. 머리가 굵어지니 반발심이 든 겁니다. 곧바로 어머니를 찾아갔죠. ‘나하고 살면 노동을 해서라도 먹여 살리겠다’고 했어요. 어머니는 이미 삼 남매를 낳아 살고 있었는데 말이죠. 그게 열여섯 살 소견이었어요.
 
  어머니에게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여기까지 찾아온 내 두 발을 작두로 잘라버리고 싶다’고 말하며 뒤돌아섰지요. 그러곤 길모퉁이에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다 중3 때 다시 가출해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 보이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로 올라와 광화문의 미군 부대에서 반년 정도 노무자로 일한 뒤 다시 춘천과 양구, 속초에 있는 미군 부대로 옮겨 다녔다
 
  “하우스 보이로 일하며 학비를 모아 대구의 어느 고교에 편입했고 죽을힘을 다해 공부한 끝에 대구의전(경북대 의대 전신)에 입학했지요. 동급생 21명이 시험을 쳤는데 혼자 합격할 수 있었어요.
 
  마치 허허벌판 광야에 홀로 버려진 것 같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 시대엔 다들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고생스러웠습니다. 다들 그렇게 살았으니 내 이야기가 딱히 별스럽다고 할 수도 없지요.”
 
 
  #7. 미국으로, 다시 한국으로
 
심재훈과 아내 김인향, 장모, 처남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기 전의 모습이다.
  〈지금 그의 눈엔 휑하니 넓은 공간에 덩그러니 놓인 미국행 비행기 한 대만 보일 뿐이다.(중략)
 
  재훈은 선뜻 어머니 쪽으로 다가서지 못한다. 아버지와 할머니를 의식해서는 아니다. 시댁 어른의 눈치를 보는 인향(심재훈의 아내-편집자)을 배려해서도, 비웃는 듯 한쪽 입술을 올린 이씨(어머니의 재혼한 남편-편집자)가 보기 싫어서도 아니다. 어느 여름날, 뜨겁게 달아오른 길바닥에서 소리 내어 울었던 한 소년이 문득 떠올라서다.
 
  ― 내캉 가자, 내캉 살자. 빌어먹을 개자식과 살지 말고. 내캉! 내가 엄마 하나는 먹여 살릴 수 있다고!
 
  열여섯 소년은 낯선 길에서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었다. 하지만 귀히는 아무 대꾸도 없이 돌아서 버렸다. 그렇게 등을 보인 엄마를 처음 본 것도 아닌데 그날은 유독 상처가 되었다.〉(소설 10~11쪽)

 
  ― 의대를 졸업한 후 미국 이민을 떠났군요.
 
  “1968년 4월 5일 나를 전송하기 위해 김포공항에 온 가족들과의 만남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잊히질 않아요. 그날 어머니와 재혼한 남편, 그리고 아버지와 할머니 등이 모두 나왔죠. 그날 공항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의 팽팽한 기싸움이란….
 
  나를 보자마자 아버지가 갑자기 와락 껴안으셨는데 솔직히 당황스러웠어요. 할머니도 유난히 살갑게 대하셨죠. 전 인생을 통틀어 아버지와 산 시간이 고작 3년입니다. 그 3년도 여러 개의 시간 조각보를 엇대어 붙인 것이라 연속성이 없었죠. 그런데도 요란스레 배웅을 한 것은 아무래도 어머니를 의식해서였을 겁니다. 그 장면이 두고두고 잊히질 않습니다.”
 
  ― 미국 생활은 어땠습니까.
 
  “처음엔 혼자 미국으로 갔어요. 1년 동안 외국 출신 의대 졸업생이 거쳐야 하는 국가시험과 뉴저지 의사 면허증을 따야 했어요. 이후 가족을 데려왔는데 인턴, 레지던트 월급이 쥐꼬리만 해서 주말마다 다른 병원에서 일하며 식구를 부양했죠. 당시 베트남전(戰)이 한창이라 일자리는 많았어요.”
 
  그는 미국에서 응급실 의사 1년, X-레이과 의사 2년 반, 가정의 16년, 법무부 연방 교도소 의무과장 11년의 세월을 보냈다.
 
 
  의료봉사에 나선 까닭
 
  ― 의료봉사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11년간 의무과장으로 지냈던 플로리다주 올랜도시의 연방 교도소에 사직서를 내고 뉴욕의 가톨릭 의료선교본부를 찾아갔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신(神)이 내 식구만 잘 먹고살라고 의사로 맹그신(만드신) 것 같지 않았거든요. 이리저리 유랑하다 깡패가 될 놈을 의사로 맹그신 건 하나님의 뜻 아이겠습니까. 나중에 더 나이가 들면 의료봉사를 할 생각이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 하지 못하는 일을 나중에는 하겠나. 또 나중에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지금 몬 할 이유가 뭐 있겠노’라는 확신이 생겼어요.
 
  선교본부에서 영등포 쪽방촌의 요셉의원을 소개하더군요. ‘멀어도 고국인데, 이왕 봉사할 거면 고국에서 하는 게 안 낫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유년 시절 어머니를 찾아 떠돌던 절실한 마음으로 환자를 살폈습니다.”
 

  ― 자녀들은 어떻게 성장했나요.
 
  “첫째는 약사가 되었고 둘째는 임상심리학 박사로 보스턴대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연방정부 검사로, 미국에서 태어난 넷째는 의대를 나와 의사로 있어요. 사위와 손자를 포함해 박사 학위자가 11명이나 됩니다.”
 
  ― 침술은 어떻게 배웠나요.
 
  “미국에서 의대를 졸업한 막내딸이 먼저 한의학과에 입학해 침술을 배웠습니다. 처음엔 ‘네가 재미있으면 됐다’고만 했는데 마음이 변해 나도 진학했어요.
 
  마음이 변한 이유는 2003년 12월에 의료봉사를 하러 찾아간 니카라과와 도미니카 공화국의 현실 때문이었죠. 의료 인프라가 부족해 진료에 필요한 의료기기는 물론이고 처방에 필요한 의약품도 충분하지 않았어요. 의사만 있다고 될 일이 아니었어요.”
 
  심재훈은 이듬해 막내딸이 다니던 애틀랜틱 오리엔탈 메디슨(마이애미 소재)의 한의학과에 입학했고 2007년 졸업해 한의사 자격증을 땄다.
 
  “72세에 정식 미국 한의사 자격증을 땄어요. 한인 환자의 경우 무료 진료를 하고 있는데 행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지금도 딸과 사위가 개업한 병원에서 일주일에 사흘간 진료하고 있습니다.”
 
  ― 끝으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소설 《니는 혼자가 아이다》를 읽는 독자들에게 어떤 말을 남기고 싶나요.
 
  “좌절하고 희망을 잃은 분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가지시라고, 그래도 인생은 살아볼 가치가 있다고 권면(勸勉)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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