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노인회, 40만 명 서명받아… 국회 행안위 심의 중
⊙ “유엔 도움으로 오늘날의 우리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인정하고, 유엔을 존중·감사해야”
⊙ “다시 공휴일 된 제헌절… 헌법 제정하여 대한민국을 성립하게 해준 유엔도 기려야”
⊙ “1950년 이후 출생자들도 벌써 76세… 후손들에게 역사 알려주고 가고 싶다”
⊙ “6·25 당시 16개 참전국, 6개 의료지원국, 38개 물자지원국 등 총 60개국과 접촉하면서 우리의 세계화 시작돼”
⊙ “유엔 도움으로 오늘날의 우리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인정하고, 유엔을 존중·감사해야”
⊙ “다시 공휴일 된 제헌절… 헌법 제정하여 대한민국을 성립하게 해준 유엔도 기려야”
⊙ “1950년 이후 출생자들도 벌써 76세… 후손들에게 역사 알려주고 가고 싶다”
⊙ “6·25 당시 16개 참전국, 6개 의료지원국, 38개 물자지원국 등 총 60개국과 접촉하면서 우리의 세계화 시작돼”

- 사진=부영그룹
다 옛날얘기다. ‘유엔데이’는 공휴일에서 제외됐고, ‘유엔군 참전 기념탑’은 철거됐다. 월터 모네간 일병의 이야기도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젊은이들은 ‘유엔데이’가 공휴일이었다거나 한강대교 입구에 ‘유엔군 참전 기념탑’이 있었다는 얘길 들으면, 깜짝 놀란다.
이런 시절에 ‘유엔데이’를 다시 공휴일로 지정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해 온 이가 있다. 이중근(李重根) 부영그룹 회장이다. 이 회장은 2024년 대한노인회 회장으로 나설 때에도 ‘유엔데이 공휴일 재지정’을 공약 중 하나로 내세웠을 정도로 집념을 가지고 이 문제에 힘을 쏟아 왔다. 2025년 9월 11일에는 유엔데이 공휴일 재지정을 제안하는 서명부를 국회에 전달하기도 했다.
“고마움은 반드시 표현해야”
1948년 1월 8일 입국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환영하는 아치가 김포공항 입구에 세워졌다. 사진=유엔포토― 국회에서 유엔데이 공휴일 재지정 문제를 논의할 거라고 들었습니다.
“행정안전위원회에 일단 부의(附議)가 되어 심의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우원식 국회의장 명의로 ‘현재 심의 중인데, 2월 26일까지 시간을 좀 연기하겠다’는 공문이 왔습니다.”
― 오랫동안 유엔데이 공휴일 재지정을 위해 애써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한민국은 유엔에 의해 수립됐고, 6·25 때는 유엔군 참전으로 국가가 보존,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 대한 고마움은 잊지 말고 반드시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유엔데이 공휴일 재지정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 오늘날에는 K–컬처다, 반도체다 해서 세계가 한국을 알아주지만, 과거에는 세계가 ‘코리아’라는 나라가 있는지도 몰랐을 텐데, 어떻게 해서 유엔이 그렇게 한국에 관심을 갖고 돕게 된 것일까요.
“일본에 나라를 잃기는 했지만, 1909년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했고, 1919년 3·1운동 후에는 상하이(上海) 임시정부가 수립됐고, 1932년에 윤봉길(尹奉吉) 의사는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했잖아요? 그렇게 세계사에 보기 드문 우리 코리아, 그때는 한국도, 조선도 아닌 코리아로 세계에 알려졌으니까요, 혈기(血氣)를 보면서, 세계가 ‘코리아는 어떤 나라이기에 저런 특별한 이들이 나오는 것일까?’ 하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1943년 11월 27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총리,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선언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1945년 7월 26일 포츠담선언에서는 한국의 독립을 다시 확인했지요.”
“유엔이 대한민국 만들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아래 1948년 5·10 총선이 실시됐고, 이어 국회가 구성되고 헌법이 제정되면서 대한민국이 수립됐다. 사진=국가기록원― 그렇지요.
“하지만 한국이 바로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1945년 8월 15일은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한 날이지, 우리가 해방된 날은 아니었습니다. 그해 9월 2일 도쿄(東京)만에 들어온 미주리 함상에서 일본 외무장관과 육군참모총장이 맥아더 장군이 제시한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일본은 정식으로 항복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해 9월 9일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조선 총독이 미 24군단장 존 하지 중장에게 항복했습니다. 항복 조인식을 한 후 중앙청에서 일장기가 내려오고 성조기가 올라갔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는 일제(日帝) 식민 통치에서 미 군정(軍政)으로 들어갔습니다. 미군사령관은 하지 장군, 군정장관은 7사단장이던…”
― 아널드(아치볼트 빈센트 아널드) 소장이었지요.
“맞아요. 그 후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1947년 11월 14일 유엔 총회에서 ▲남북한 전 지역에서 유엔의 감시하에 인구 비례에 의한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국회를 구성하고 ▲그 국회가 남북에 걸친 통일 정부를 수립하고 ▲선거를 준비하고 감시하기 위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UN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을 구성하기로 결의했습니다.”
― 그렇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엔 감시하에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치렀습니다. 이 과정에서 4·3 사건 등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198명의 제헌국회 의원들이 선출됐고, 그해 5월 30일 국회가 구성되었습니다. 이 국회에서 대한민국 헌법을 만들어 7월 17일 공포했고, 이어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선출하고, 8월 15일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그해 12월 12일 유엔총회는 대한민국을 승인했습니다. 유엔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만든 것입니다.”
― 정말 유엔이 아니었으면, 대한민국도 없었겠지요.
“올해부터 제헌절(制憲節)이 다시 공휴일이 된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우리가 제헌국회를 만들고, 1948년 7월 17일에 헌법을 제정할 수 있었던 것은 유엔 덕분이었습니다. 제헌절을 기린다면, 헌법을 제정하여 대한민국을 성립하게 해준 유엔도 기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엔 결의 82호
유엔 결의에 따라 한반도에서 침략군을 격퇴하기 위한 통합군이 구성되었다. 1950년 7월 14일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유엔 깃발을 전달받고 있는 맥아더 원수. 사진=퍼블릭 도메인― 정말 그래야겠네요.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인 1949년 미군이 철수했는데, 이듬해 6·25 사변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당일 유엔은 ‘결의 제82호’를 통해 ‘적대 행위의 즉각적인 중지’와 ‘북한군의 38선 이북 철수’를 촉구했습니다. 북한이 이에 응하지 않자 6월 27일에는 ‘유엔 회원국들이 한국을 도와 무력(武力) 침략을 격퇴하고 지역의 국제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제공할 것’을 권고(결의 83호)했습니다. 7월 7일에는 ‘결의 84호’를 통과시켜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는 국가들이 미국 지휘하의 통합군 사령부(유엔군사령부)에 병력을 제공’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이 결의를 통해 유엔군사령관 임명권이 미국에 부여되었고, 통합군이 참전국 국기와 함께 유엔기를 사용하는 것이 승인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미 극동군사령관이던 맥아더 장군이 유엔군사령관으로 임명됐죠. 다행히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거부권을 갖고 있던 소련이 안보리에 출석하지 않아서 이러한 결의들이 채택될 수 있었습니다.”
― 유엔군의 중심은 역시 미군이었지요.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6월 27일 미 해군과 공군 투입을, 6월 30일에는 지상군 투입을 결정했습니다. 일본 주둔 제24사단 소속 스미스 부대(Task Force Smith)가 7월 1일 한국에 도착, 7월 5일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첫 전투를 치렀습니다. 이것도 유엔 결의 82호와 83호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7월 7일 유엔군이 결성된 후에는 한국군도 유엔군의 일원으로 싸웠습니다.”
― 유엔이 침략 전쟁을 저지하기 위해 전투 병력을 파견한 것은 6·25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 후로는 전투 병력을 파견한 일이 없습니다. 전에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젠 분쟁 지역에 중립적으로 파견되는 유엔평화유지군(PKO)만 있을 뿐 6·25 때와 같은 유엔군은 더 이상 없다고 하더군요.”
대한민국을 구한 지평리·설마리·가평 전투
― 6·25 전쟁 당시 유엔군이 치른 전투 중 우리가 특히 기억해야 할 전투가 있다면, 몇 가지만 얘기해 주시죠.
“먼저 지평리 전투(1951년 2월 13~16일)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미 2사단 23연대와 프랑스 대대 5600여 명이 중공군 제39군 산하 3개 사단 (약 5만 명)을 격퇴했습니다. 중공군은 공격할 때마다 꽹과리와 피리를 불면서 자기들끼리 신호를 하고 심리전(心理戰)을 펼쳤는데, 프랑스군은 스피커를 틀어 그걸 못 하게 하면서, 총검 돌격으로 중공군을 격퇴했습니다.”
― 스피커로 피리 소리를 제압하다니, 기발하네요.
“지평리 전투는 1950년 11월 하순 벌어진 군우리 전투 이후 중공군에 밀려 후퇴만 거듭했던 유엔군이 처음으로 승리한 전투였습니다. 월턴 워커 장군이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그 후임으로 온 매튜 리지웨이 장군이 반격 계획을 세우고 지휘했습니다. 당시 유엔군은 평택까지 후퇴한 상황에서 한국 정부를 오키나와나 제주도로 보내고, 유엔군도 철수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평리 전투에서 승리한 후, 유엔군은 그해 3월 14일 서울을 재탈환하고 파주 금촌까지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지평리 전투에서 유엔군이 승리하지 못했다면, 대한민국은 사라졌을 것입니다.”
― 아찔한 순간이었네요.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전투로 설마리 전투(1951년 4월 22~25일)와 가평 전투(1951년 4월 23~25일)를 들 수 있습니다.
영국군 제29여단 소속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약 800명)는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임진강을 건넌 중공군 1개 사단을 사흘 동안 저지했습니다. 결국 실탄이 떨어져 부대원 중 600명이 죽거나 중공군의 포로가 됐습니다. 가평 전투에서는 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군으로 구성된 영연방 27여단이 춘천 방면에서 한국군 6사단을 패퇴(敗退)시키고 서울로 향하던 중공군을 격퇴했습니다. 영국군 제29여단은 서울 서부에서, 영연방 27여단은 서울 동부에서 중공군을 저지한 것입니다. 이후 유엔군과 중공군·북한군은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될 때까지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공방전을 계속했습니다.”
― 정말 유엔군의 지평리 전투와 설마리 전투, 가평 전투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겠네요.
“당시 프랑스군과 영국군, 영연방군은 모병(募兵)에 응해 왔다고 들었는데, 말하자면 생계 때문에 전쟁에 온 사람들인데도, 중공군의 인해(人海) 전술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 전(全) 전선의 판도를 바꾸었습니다. 미군을 비롯해서 그들이 대한민국을 존재하게 한 것입니다.”
“6·25는 한국이 세계와 교류하게 된 계기”
― 참전 16개국 외에도 여러 나라가 한국을 도와주었지요.
“스웨덴·덴마크·이탈리아·인도·노르웨이·독일 등 6개국이 의료 지원을 해주었고, 38개국이 재정·물자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한편 소련·중국(중공)·폴란드·헝가리 등 10여 개국은 북한을 도왔습니다. 당시 전 세계 국가가 90여 개국 정도였던 걸로 아는데, 70여 개국이 6·25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으니, 6·25는 사실상 제3차 세계대전이었던 셈입니다.”
― 유엔과 세계는 왜 한국을 도운 것일까요.
“미국 등 자유주의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일본·이탈리아 등 군국주의(軍國主義) 세력과 싸워 이겼지만, 전후(戰後)에 다시 소련 등 공산주의 세력과 맞서게 되었습니다. ‘공산주의 세력에 맞서 자유를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커지던 터에 6·25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우리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우방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죠.”
이중근 회장은 “6·25는 한국이 세계와 교류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6·25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기와집이 한두 채 있을 뿐 대부분은 초가집뿐인 조용한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6·25 당시 16개 참전국과 6개 의료지원국 등 22개국 사람들이 직접 한국으로 들어왔고, 38개국이 재정·물자 지원을 해주면서 세계와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많은 한국군이 카투사나 통역병으로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과 함께 싸웠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외국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계와 연결된 문화가 형성되면서 우리의 세계화(世界化)가 시작되었고, 부챗살처럼 그것이 펴지면서 오늘날 K–컬처가 꽃피우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전쟁기념관에 유엔 참전국 참전비 기증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내 ‘국제 평화의 광장’에 있는 유엔 참전국 상징물들은 이중근 회장의 후원으로 만들어졌다. 사진=조선DB― 그동안 유엔군 참전을 기리는 활동을 많이 해오셨지요.
“2015년 유엔 창설 70주년을 맞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내 ‘국제 평화의 광장’에 유엔 참전국을 상징하는 유엔 참전국 국기게양대와 참전비, 추모석을 기증했습니다. 호주를 비롯한 각국 참전 용사들을 초청해 관광을 시켜드렸고요. 이 밖에 한국군 참전 용사들을 위해 국가보훈부 ‘제복의 영웅들’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하고, 집을 보수해 드리기도 했습니다.”
― 《6·25 전쟁 1129일》은 어떻게 해서 내게 되었습니까.
“아들이 흥남 철수를 다룬 영화를 만든다고 하기에 관심을 갖다 보니, 6·25 전쟁에 대해 부분만 알릴 게 아니라 전체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2013년 나온 《6·25 전쟁 1129일》은 이듬해에 개정판을 냈다. 이중근 회장은 군부대, 한미연합사, 국방부, 6·25 참전용사회, 전국 각급 학교 및 공공도서관 등에 이 책을 무료로 배포했다. 지금까지 1000만 부를 발간했다.
― 해방과 일제 시대, 조선 말기, 그리고 조선 왕조에 대한 책도 내셨죠.
“6·25에 대한 책을 내고 보니, 6·25가 발생하게 된 과정을 알아야 하지 않겠나 싶어 《광복 1775일》을 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제 시대를 다룬 《미명 36년 12768일》, 조선 말기를 다룬 《여명 135년 48701일》을 내게 되었고, 다시 그 이전 시대를 다룬 《우정체(宇庭体)로 쓴 조선 개국 385년》도 내게 되었습니다. 고려사도 써놓았는데, 아직 출간하지는 않았습니다.”
‘우정체’란 ‘있었던 사실 그대로의 역사’를 충실하게 기술(記述)해 독자들이 그걸 보고 사실관계를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일기–기록체 형식으로 적은 이중근 회장의 역사 기술 방식을 말한다.
인정, 존중, 감사
이중근 회장은 2025년 9월 11일 유엔데이 공휴일 재지정을 제안하는 서명부를 국회에 전달했다. (왼쪽부터) 이용섭 대한노인회 혁신위원장, 이중근 대한노인회 회장, 신정훈 행정안전위원장, 양부남 더불어민주당 의원. 사진=부영그룹― 유엔데이는 왜 공휴일에서 제외된 건가요.
“유엔데이는 원래 대통령이 직접 기념사를 낭독할 정도로 위상이 높은 기념일이었습니다. 그런데 1975년엔가 북한이 유엔 산하 일부 기구에 공식 가입하게 되자, 이에 대한 반발에서 1976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하게 된 것이지요. 그 후 유엔군의 희생과 자유의 가치에 대한 의식이 희박해지고 있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 이제 와서 유엔데이를 공휴일로 다시 지정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유엔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탄생할 수 있게 해주었고, 국가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1950년 이후 출생자들은 유엔이 아니었으면,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아니었으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지금처럼 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북한으로 통일이 되었을 테니까요. 유엔의 도움으로 오늘날의 우리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우리를 있게 해준 유엔을 존중하고, 감사해야 마땅하지요.”
― 인정, 존중, 감사라…. 참 좋은 말입니다.
“유엔데이를 공휴일로 지정하고 기념함으로써 우리가 인정, 존중, 감사할 줄 아는 국가라는 걸 세계에 알린다면, 외교적 활로를 개척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40만 명이나 유엔데이 공휴일 지정에 서명했던데, 서명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습니까.
“대부분 대한노인회 회원들이 참여했습니다.”
― 노인회가 앞장선 이유가 있습니까.
“제가 호적상 1941년생입니다. 1950년 이후 출생자들도 벌써 76세입니다. 대한민국이 유엔의 도움으로 세워졌고, 지켜질 수 있었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대는 그런 사실을 잊어버린 게 아니라 아예 알지를 못합니다. 그걸 후손들에게 알려주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역사는 과거고, 과거는 현재를, 현재는 미래를 관조하는 축(軸)이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