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영웅

‘영래(英來)’는 이름대로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영웅’으로 온 사람이었다

  • 글 : 강만수 작가·전 기획재정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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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萬洙
서울대에서 법을, 뉴욕대에서 경제를 공부했고, 공직에서 일하였으며, 2022년 《한국소설》에 단편 〈동백꽃처럼〉으로 등단하여, 2023년 단편 〈쪽새미 애가〉를, 2024년 한국소설가협회 ‘2024 신예작가’로 선정되어 〈세종로 블루스〉를 발표함. 2025년 소설집 《최후진술》을 펴냄.

[편집자 註]
이 작품은 경제관료 출신으로 소설가의 길에 들어선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 인권변호사 고(故) 조영래(趙英來·1947~1990년)를 떠올리며 쓴 단편 소설이다. 서울대 법대 시절 두 사람이 함께 겪었던 학생운동의 기억이 중심이다. 서사의 외형은 소설이지만 이야기의 상당 부분이 실제 경험과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하고 있어, 허구와 사실의 경계를 가르기 어렵다.
이야기는 조영래의 장례식장을 찾은 화자의 현재 시점에서 출발한다. ‘나’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친구의 영정 앞에 젊은 시절 작성했던 선언문을 올려놓으며 지난 시간을 더듬는다. 곧 1960년대 서울법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한일협정 반대 시위, 단식 농성, 학생운동의 현장, 그리고 졸업 이후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간 두 사람의 삶을 차례로 비춘다. 이후 장례식장과 대학로의 현재로 되돌아오며 이야기가 맺어진다. 이러한 구성은 현재에서 출발해 과거의 기억을 펼쳐 보인 뒤 다시 현재로 귀환하는 단일 액자형 회고 서사에 가깝다.
작품 중심에는 학생운동의 한복판에 서 있던 조영래의 모습이 자리한다. 조영래는 한국 현대사에서 손꼽히는 인권변호사이자 민주화 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서울대 법대 재학 시절 한일협정 반대 운동 등 학생운동에 참여했고, 이후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의 길로 들어섰다. 유신체제와 군사정권 시기에는 노동자와 학생, 시민들의 인권 사건을 맡아 변론하며 민주화운동을 법률적으로 뒷받침했다. 《전태일 평전》 집필을 비롯해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변론, 성산동 수해 집단소송 등은 그가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위해 헌신한 활동으로 널리 기억된다. 그는 평생 인권 변호에 힘쓰다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영래 변호사는 1988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당시 권인숙씨 변호를 맡았다. 사진=조선DB
영래가 떠난 날, 오래전 서울법대 ‘정의의 종’ 앞에서 그가 읽었던 선언문을 갖고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으로 갔다. 나의 대학 시절 일기장에 고이 보관되어 있던 격문은 긴 세월에 노랗게 바래고 부스러질 듯하여 하얀 봉투에 접어 넣었다.
 
  창경궁 정문 앞 장례식장으로 들어갔다. 영래의 영정 앞에 하얀 국화 한 송이와 격문이 든 하얀 봉투를 올렸다. 머리를 숙였다.
 
  매국 외교 한일협정 반대 성토대회 선언문
 
  아 슬프다!
 
  우리의 생명선이요 주권선인 평화선의 철폐란 웬 말이냐?
 
  36년의 식민 통치에 배상금은 없고 독립축하금이 웬 말이냐?
 
  한일 간에 가조인된 굴욕적인 합의 내용을 보라!
 
  국가를 팔면서까지 정권을 유지하려는 매국적인 짓이 아닌가?
 
  우리는 오랫동안 정부가 스스로 바로잡기를 열망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선열들의 정신과 독재정권과 맞서 자유를 쟁취하려고 피를 흘렸던 선배 학우들의 뜻을 본받아 우리들 젊은 학생들은 다시 투쟁의 전열을 펴지 않을 수 없음을 결의하며 사회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음을 통탄한다.
 
  정치인들이여, 위정자 제공들이여!
 
  6·3항쟁을 계엄령으로 박살내고 국민의 한심과 무관심 속에 추진된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후대들에게 무슨 결과를 초래할지 알아야 한다.
 
  차대의 정부를 계속해서 이끌어갈 정치인들은 한일 정부 간의 가조인을 즉시 파기하고 진정한 국민의 의견이 무엇인가를 경청하라.
 
  힘으로서 국민의 의사 발표를 억압만 하려는 정부의 태도가 계속된다면 이는 무서운 사회적 혼란과 파국을 초래할 것임을 아울러 경고하는 바이다.
 
  우리는 매국적인 한일협정이 폐기될 때까지 투쟁할 것이다.
 
 
  -우리의 결의-
 
  우리는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폐기될 때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며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한일협정 가조인을 즉시 무효화하라
  2.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 어선을 격침하라
  3. 착취 일본 기업인을 즉시 추방하라
  4. 매국 한국 기업인을 즉시 척결하라
  5. 미국은 한일협정을 부추기지 말라
  6. 순수한 학생운동을 억압 말라
  7. 6·3항쟁에서 구속된 학생을 석방하라
 
  1965년 4월 10일
  서울법대 학생 일동

 
  ***
 
1964년 6·3 계엄령 선포 후 서울대 문리대 앞에 진주한 계엄군. 사진=조선DB

  내가 영래를 처음 만난 것은 서울법대 강당에서 열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였다. 그해 내가 들어간 법학과 1, 2, 3등이 법과대학 및 서울대학교 전체 1, 2, 3등이었는데 영래는 세 가지 수석 타이틀을 모두 차지하여 신문에 크게 보도된 인물이었다. 우리는 왼쪽 가슴에 둥근 서울대 마크가 달린 감색의 신사복 교복에다가 베레모를 쓰고 입학을 했는데, 왼쪽 어깨에 방패 모양의 서울대 견장을 달고 앞가슴 가운데 긴 지퍼와 양쪽에 짧은 지퍼가 달린 전통적 교복을 버리고 그렇게 바뀌었는데 아무리 봐도 우스꽝스러웠다. 왼쪽 가슴에 달던 초롱꽃이 둥글게 둘러싼 배지도 둘레가 월계수 이파리 모양으로 바뀌었고 신사복 왼쪽 깃에 달았다. 어떤 설명도 없었던 그 교복과 베레모를 우리는 한 달도 착용하지 않고 벗어버리고 우리 학번만 자유복을 입었다. 후에 들은 바로는 지난해 계엄령으로 대학을 쓸어버린 6·3 사태의 잔재를 지우려는 당국의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오전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법학도서관 앞 분수대에서 영래와 마주쳤다. 덥수룩한 머리에 눈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나 경남고에서 왔어.”
 
  나는 임시로 단 명찰을 보여주며 영래에게 첫말을 건넸다.
 
  “그래, 반가워. 하숙집은 어디야?”
 
  “임시로 수유리 형님 집에 있어. 가정교사를 구하면 나올 거야.”
 
  “그래? 가정교사 어떻게 구하려는데?”
 
  “신문에 광고를 내려고 해.”
 
  “가정교사 경험은 있어?”
 
  “응, 부산서 고교 내내 가정교사 했어. 고3 때 고2를 가르쳤어.”
 
  “그러면 잘됐네. 내가 소개해 줄까? 내가 가르치던 앤데, 지금 고3이야.”
 
  “넌 어쩌고?”
 
  “난 대학 와서는 가정교사 안 하기로 했어. 집 형편도 좋아졌고 할 일도 있어서.”
 
  “그래? 그러면 정말 좋지.”
 
  “오늘 그쪽에 연락해 보고 내일 얘기해 줄게. 일단 신문 광고는 기다려 봐.”
 
  “알겠어. 고마워.”
 
  다음 날 오후 수업이 끝나고 영래와 함께 청와대 입구 전차 종점 뒤 궁정동 고급 주택에 사는 K고 3학년 상헌과 그의 아버지를 만났다. 다음 날부터 입주하여 가르치기로 했다. 나에게 영래는 이렇게 찾아왔다.
 
  ***
 
  내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렇게 빨리 영래가 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가 오랜 시간 염원하고 투쟁했던 ‘87년 민주 체제’가 성립되고 노태우 대통령이 들어섰으나 25년간의 군부 독재의 잔재는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지난달 친구들과 여기 서울대학병원에 면회 왔을 때도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3김이 어지럽게 합종연횡하는 것을 보며 그가 나설 때라는 얘기를 나누었는데. 대한민국을 위해 그가 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
 
  나는 고개를 가족들에게로 돌렸다. 얼굴이 많이 상한 부인께 목례만 하고 결혼식 때 신부의 손을 잡고 입장했던 그 아들 상주와 악수하고는 돌아 나왔다. 접객실에 대학 동기들과 선후배들이 보였지만 가지 않았다.
 
  장례식장을 나와 병원 언덕길을 올랐다. 간호대학을 지나고 대학병원 본관 뒤 함춘원을 걸었다. 오래전 한일협정이 조인되던 날 영래와 함께 단식 데모를 마치고 버스에 실려왔던 보건진료소가 있던 자리에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
 
  ***
 
  내가 서울법대에 들어간 해는 한일협정을 반대하던 대학 캠퍼스가 계엄령으로 초토화된 다음 해였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이화동 법대 캠퍼스에서 구름다리라 부르던 나무다리를 넘어 동숭동 문리대 운동장에서 체육을 하였는데 6·3 사태의 진앙지 문리대 캠퍼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했다.
 
  나는 영래가 소개해 준 고3 상헌을 가르치며 낯선 서울의 대학 생활에 적응하고 있었다. 밤 열 시만 되면 효자동 전차 종점으로 나가 청와대와 연결된 길목 낮은 담벼락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며 쉬기도 했다. 불과 몇십 미터 거리에 청와대 정문이 있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삭막한 법대와 달리 문리대 캠퍼스에서는 벚꽃이 하나둘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봄기운을 타고 ‘세느강의 다리’라고 불리던 교문은 오가는 학생으로 붐볐고 마로니에 나무 아래 벤치에서 담소를 즐기는 학생들의 낭만이 보이기도 했다. 담을 넘어 법대 캠퍼스에는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첫 가정교사 월급으로 천원을 받은 다음 날 나는 청계천 헌책방에 가서 교과서를 사고 종로5가 효제동 골목에서 영래에게 빈대떡에 막걸리를 샀다.
 

  다음 날 법학개론을 들으려 강의실에 들어가는데 영래가 불렀다. 급히 복도 구석으로 나를 끌고 갔다.
 
  “한 시간 후 10시에 ‘정의의 종’이 울리면 한일회담 반대 성토대회를 한다. 이어서 중앙청까지 가두행진을 한다. 네가 플래카드를 들었으면 좋겠다.”
 
  “무슨 소리야? 성토대회를 하고 가두행진을 해?”
 
  “그래. 극비밀이야. 너는 가정교사를 해서 안 끼워 넣으려고 했는데 플래카드 들 사람이 갑자기 빠졌어. 곧 시작하는데 네가 플래카드를 들어줘야 해. 끝나면 교문을 나가 종로를 행진해야 해.”
 
  “알았어. 그럴게.”
 
  나는 엉겁결에 대답했다. 영래는 급히 건물 밖으로 나갔다. 나는 신문을 통해서만 데모를 접했지만 실제로 데모라는 것을 한 적은 물론 본 적도 없었다. 내가 플래카드를 들어? 지난해 한일회담 반대 데모 당시 계엄령으로 쓸어버렸는데? 가정교사를 하는 형편에 데모할 수 있을까? 내가 한일회담에 관해 아는 것은 청구권 자금이 5억 달러라는 것과 평화선을 폐지한다는 것 정도인데!
 
  내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강의실과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몰려나왔다. 전체 법대생의 절반이 안 되는 300명 정도가 본관 ‘정의의 종’ 앞에 모였다.
 
  영래가 선언문(그의 영전에 올린)을 웅변으로 낭독했다.
 
  “매국 외교 한일협정 반대 선언문
 
  아 슬프다!
 
  우리의 생명선이요 주권선인 평화선의 철폐란 웬 말이냐?
 
  36년의 식민 통치에 배상금은 없고 독립축하금이 웬 말이냐?
 
  한일 간에 가조인된 굴욕적인 합의 내용을 보라!
 
  국가를 팔면서까지 정권을 유지하려는 매국적인 짓이 아닌가?
 
  …”

 
서울 법대생의 시위를 담은 《동아일보》 1965년 4월 10일 자 7면에 실린 〈‘데모’와 저지 삼엄한 서울〉 기사.

  영래 뒤에는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는 글이 새겨진 ‘정의의 종’ 팻말이 있었다. 나는 ‘왜 하나 매국 외교! 사수하라 평화선!’이 적힌 플래카드를 동기와 함께 펼쳐 들었다.
 
  성토대회가 끝나고 우리가 교문으로 나설 때 수위들이 교문을 잠그고 있었다. 수위들을 밀어내고 교문을 열고 나가 대학로로 진출했다.
 
  나는 플래카드를 들고 선두에 섰다. 핸드마이크를 든 다른 선배가 구호를 선창하고 우리는 따라 외쳤다.
 
  “왜 하나 매국 외교! 왜 하나 매국 외교!
  사수하라 평화선! 사수하라 평화선!
  축출하라 매판자본! 축출하라 매판자본!”
 
  종로에 들어서서는 우리 데모대가 길 가운데를 차지하며 차들이 양쪽으로 비켜갔다. 길거리에 모인 시민들이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우리는 구호를 선창하는 선배의 지휘에 따라 전진했다. 동대문경찰서가 있는 종로4가를 지나 종로3가까지 제지를 받지 않고 전진했다. 지난해 계엄령 이후 모든 대학이 평온을 찾았고 올해 새 학기가 되어서도 문리대에서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경찰도 허를 찔린 것이었다. 6·3 사태 때 꺼진 불씨가 법대에서 되살아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우리가 파고다공원 앞에 갔을 때 기마대를 앞세운 경찰이 방패와 진압봉을 들고 막아섰다. 진로가 막힌 우리는 바닥에 앉아 연좌 농성에 들어갔다. 우리 대열은 150명 정도였다. 우리는 앉아서 선배의 선창에 따라 주먹을 뻗으며 구호를 계속 외쳤다.
 
  우리를 포위한 경찰은 2인 1조로 한 명씩 끌고 가 경찰버스에 실었다. 4대의 버스에 실린 우리는 종로경찰서와 동대문경찰서로 나뉘어 잡혀갔다. 반은 신입생이었다. 법대의 경우 3학년부터는 고시 공부하느라 가끔 학교에 나오거나 아예 절에 들어가는 일도 있었으니 보통날 등교하는 학생의 대부분은 1, 2학년이었다.
 
  우리는 불법집회와 교통법규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고 날이 어두워질 때 정동에 있는 서울형사지방법원에 버스로 실려가 즉결재판을 받았다. 즉결재판으로 300원의 과료 처분을 받은 우리는 다시 종로경찰서로 돌아와 유치장에 수감됐다. 현금이 있는 몇 학생은 바로 과료를 내고 나갔고 현금이 없는 학생은 잽싸게 유치장까지 찾아온 전당포에 시계를 맡기고 돈을 구해 과료를 내고 나갔다. 나는 아무것도 없어 유치장에서 밤을 새우고는 다음 날 친구에게 전화하여 빌린 돈으로 과료를 납부했다. 상헌에게 돌아와서는 형님 집에 급한 일이 생겨 다녀왔다고 변명했다.
 
  며칠 지나 비상학생총회가 법학도서관에서 또 열렸다. ‘정의의 종’ 근처에 한 사람만 얼씬거려도 학생과 K 주임이 막아서는 바람에 우리는 법학도서관 2층 열람실 앞 휴게공간에 모였다. 그날도 영래가 앞장을 섰다. 이승만 대통령 때 20억 달러를 요구했던 청구권이 5억으로 내려갔고 그것도 무상은 3억 달러라는 대목에서는 ‘옳소’가 쏟아졌다. 청구 자금의 성격도 배상금이 아니라 ‘독립축하금’이라는 황당한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성토할 때는 도서관이 울릴 정도의 ‘옳소’ 함성이 터졌다.
 
  그날 R 학장은 성토대회 현장에 나와 지금은 학생들이 데모할 때가 아니라 공부할 때라며 우리의 충정을 정부에 전달할 터이니 데모는 중단하도록 촉구하였다. 우리는 반대 데모가 정부 입장을 강화해 주는 면을 생각해서라도 데모를 계속할 것이며 이를 위해 학장도 함께 나서줄 것을 권하며 학장의 권고를 물리쳤다. 우리는 교문 앞을 막고 있는 교직원과 수위들의 저지선을 뚫고 대학로로 나갔다. 지난번과 달리 경찰이 대학로 입구를 막고 있었다. 밀고 당기는 승강이를 하다가 경찰이 최루탄을 쏘았다. 우리는 눈물·콧물을 흘렸고 숨도 못 쉴 정도의 기침이 나와 초주검이 되었다. 우리는 돌을 주워 던지며 저항했으나 최루탄 연막을 이기지 못하고 흩어졌다.
 
  다음 날 정부는 10일간 휴교령을 내렸다. 입학한 지 두 달이 안 되어 학교 문은 닫혔다. 10일간의 휴교령이 끝나고 강의를 시작했으나 분위기는 진정되지 않았고 캠퍼스에서는 낯선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중앙정보부 요원이라는 설과 YTP[Young Thought Party·친정부 극우청년단체 청사회(靑思會)]의 프락치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실체는 알 수 없었다. 우리는 또 비상학생총회를 열고 학원 자유 보장과 학원 사찰 금지를 내걸고 동맹휴학을 결의했다.
 
  대학 당국도 강경하게 나와 동맹휴학을 주도한 J 학생회장의 제적과 함께 영래를 포함한 10여 명의 학생에게 정학 처분을 내렸다. 우리는 또 비상학생총회를 열어 48시간 이내에 처벌 해제를 요구하였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우리는 학장의 퇴진을 요구하게 되었다.
 
서울대 문리대생들은 1965년 한일회담 반대를 주장하며 교내 4·19기념탑 앞에서 단식투쟁을 벌였다. 사진=조선DB

  우리와 당국의 입장이 부딪쳐 정국은 날로 악화되어 갔다. 한일협정의 조인을 일주일 앞두고 6월 14일 우리는 최후 수단으로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학기말 시험이 예정된 날 전날이었다. 강의동 1층 제3 강의실에서 100여 명의 학생이 단식을 시작했다. 나는 지금까지 영래와 함께 데모와 성토대회에 참가했지만 오후 5시까지는 궁정동에 돌아가 상헌이를 가르쳐야 했기에 단식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단식이 3일째 이어지던 날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학생들을 보고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날 밤 상헌이를 가르치고 난 후 밤 10시에 나는 궁정동을 나와 농성장으로 갔다. 상헌에게 단식 농성에 간다고 하며 어쩌면 내일 못 올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고 부족한 공부는 주말에 집중하여 하기로 약속했다. 효자동에서 버스를 타고 종로로 나가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자정이 가까운 늦은 밤에 단식 농성장에 들어갔다.
 
  책걸상을 복도로 치우고 마루에 거적을 깐 농성장에 들어서니 대부분 잠들어 있었고 일부는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뒤쪽 영래가 있는 곳으로 갔다.
 
  “어떻게 왔어?”
 
  “아무래도 외면할 수 없었어.”
 
  “아르바이트는 어떻게 하고?”
 
  “일요일에 몰아서 하기로 했어. 걱정하지 마.”
 
  “아니 그래도. 오늘만 하고 내일 들어가.”
 
  “알았어. 상황 봐서 갈게.”
 
  그날 밤 영래는 경기고 출신들이 주도하는 노동법학회가 데모의 중심이라고 했다. 우리가 입학한 그해 노동법 강의가 사회법에서 분리되어 개설됨에 따라 사회법학회와 별도로 노동법학회가 창설되었는데 영래는 여기에 가입하였다고 했다. 당시 대부분의 학생은 고시 공부에 도움 되는 형사법학회와 민사법학회에 가입했다. 노동법은 고시 과목이 아니라 강의도 그랬지만 학회도 처음 생겨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영래는 나도 노동법학회에 가입할 것을 권하면서 노동법학회 활동은 아직 정보기관에 노출되지 않아 데모 주도 세력이 유지되고 있다고 했다. 작년 6·3 사태 때는 주도 세력이 노출되어 차례대로 잡혀가 힘을 못 쓰게 되었다고 했다. 경기고 3학년 때 한일협정 데모를 주도하고 정학 처분을 당한 적이 있는 영래는 경기고 인맥 중심으로 활동하는 노동법학회의 핵심으로 모든 전략과 전술을 세우고 지휘하고 있었다. 지휘부가 무너지면 지속적인 데모가 불가능하므로 지휘부의 조직과 활동은 극비밀로 하고 노출도 최소한으로 한다고 했다. 영래가 나에게 가정교사를 넘길 때 ‘할 일이 있다’던 말이 생각났다.
 
  우리는 한일협정을 성토하는 자유 발언과 함께 격문으로 패러디한 가요를 부르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학생회가 만들어 배포된 격문가요 중에서 옛 애국가와 서울대 교가를 패러디한 두 곡을 많이 불렀다.
 
  〈매국음모 분쇄하자〉 (옛 애국가 곡으로)
  시종일관 굴욕외교 왜 하려 하느뇨/ 선열들의 영령들이 통곡을 하겠네
  학도여 국민이여 모두 다 일어서/ 굴욕협정 분쇄하고 굳세게 삽시다
 
  〈오늘 단식 내일 공부〉 (서울대 교가 곡으로)
  가슴마다 용맹스런 투지를 품고/ 굴욕협정 분쇄코자 궐기를 하고
  반민족적 정상배를 규탄을 하니/ 이 나라와 이 겨레의 크나큰 자랑
  천하제일 투사들이 다 모여들어/ 오늘 단식 내일 공부 서울대학교

 
  영래는 배포된 유인물을 보지 않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그가 작사한 것 같았다. 성토를 할 때도 배포된 유인물을 보지 않고 청중을 보고 연설하는 것으로 보아 영래가 작성한 것 같았으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의 단식이 100시간을 돌파하던 날 오후 3시 영래가 앞에 나섰다.
 
  “친애하는 동지 학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단식을 시작한 지 100시간을 돌파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여러 명이 쓰러져 대열에서 탈락했습니다.
 
  우리는 매국적인 한일협정을 분쇄하기 위해 최후의 전투를 하고 있습니다.
 
  동지들이 쓰러져 실려나갔음에도 모두 돌아와 다시 단식에 합류했습니다.
 
  그들에게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냅시다.
 
  (박수)
 
  우리는 한일협정 분쇄를 위한 마지막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지금 단식을 하는지 시대적 사명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것은 네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일본의 식민 통치를 합법화시켜 주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수많은 선열들이 피 흘려 독립투쟁을 하고,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태평양 전쟁에서 전사를 하고, 밥그릇과 숟가락까지 공출로 수탈당한 피해를 배상금이 아니라 독립축하금으로 받는 것은 우리가 일제의 식민 통치를 합법화시켜 줌으로써 자손 누대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둘째, 이승만 정부 때 20억 달러였던 청구권 규모가 무상 3억 달러 차관 2억 달러로 줄어든 것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당한 고난과 피해를 생각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입니다.
 
  셋째, 평화선을 포기하여 독도를 분쟁 지역으로 만들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독도는 역사적으로 우리의 영토인데 평화선을 포기함으로써 만대에 분쟁의 짐을 지우는 것입니다.
 
  넷째, 권력은 견제가 없으면 독재로 갑니다. 군사정부는 5·16 쿠데타 이후 계속 말을 바꾸어 오늘까지 집권을 하여 왔습니다. 국가의 제도와 자원이 독재의 무기로 동원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대일청구권 자금은 집권 연장을 위한 자금으로 활용될 것입니다. 정당하게 사용되는 경우도 국민적 감시를 해야 합니다.
 
  (박수)
 
  친애하는 동지 학우 여러분!
 
  대한민국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경제개발과 민주주의의 두 바퀴가 함께 돌아가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민중의 피를 먹고 자랍니다. 민중이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 있는 시민이 있어야 합니다. 시민이 연대를 이루어야 힘이 생깁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적 사명은 한일회담 저지와 함께, 권력을 감시하고 전제에 저항하는 자유 시민의 향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단식이 한일협정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민주와 발전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나가야 할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사흘이 지나면 매국적인 한일협정은 조인됩니다.
 
  우리 모두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해야 합니다.
 
  지금 군부의 폭주를 제어하지 못하면 그들은 독재로 갈 것입니다.
 
  굴욕적인 한일협정은 군부 독재로 가는 마중물이 될 것입니다.
 
  어찌하여 우리의 생명선인 이승만의 평화선을 포기합니까?
 
  어찌하여 20억 달러 청구권을 5억 달러로 물러납니까?
 
  어찌하여 배상금이 아니라 독립축하금으로 둔갑되었습니까?
 
  (박수)
 
  그들이 매국적인 한일협정을 서두르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계속 거짓말을 하며 권력을 연장해 왔습니다.
 
  비판과 견제 없는 권력은 독재로 가기 마련입니다.
 
  비판과 견제가 민주를 지키는 보루입니다.
 
  지금 고삐를 잡지 못하면 그들은 절대 권력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한일협정도 그들에게 권력 연장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군부 독재로 갈 것입니다.
 
  우리가 막아야 합니다.
 
  피로 찾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합니다.
 
  지금 강력한 민권의 토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 군부를 견제하지 않으면 미래가 어둡습니다.
 
  3·1운동은 대한민국 건국의 꺼지지 않는 횃불이었습니다.
 
  오늘의 투쟁은 민주 강국 건설의 횃불이 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동지 학도 여러분!
 
  최후의 일인까지 평화선을 지킵시다.
 
  최후의 일각까지 한일협정 분쇄를 위해 싸웁시다.
 
  감사합니다.”

 
  100시간을 단식하여 기진맥진했음에도 우리는 모두 일어나 영래를 향해 박수를 쳤다. 영래는 패러디한 애국가와 교가를 연달아 선창하며 단식의 열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100여 명이 시작하여 150여 명으로 늘었다가 40여 명이 쓰러져 앰뷸런스에 실려가 다시 100여 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날은 상과대학 학생회장단의 격려 방문이 있었다. 고려대 학생회 대표와 이화여대 학생회 대표도 왔다. 3학년 여자 선배가 설탕물을 만들어와 한 컵씩 돌렸다.
 
  다음 날 새벽이 밝아올 때 영래가 마룻바닥에 누워 있는 나에게 왔다. 이제 최후의 힘을 다하여 버티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하며 내가 나가 성토를 한번 해볼 것을 권했다. 나는 사람들 앞에 나가 연설을 한 경험도 없었고 또 한일협정에 대해 아는 것도 부족하여 망설였다. 영래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영래의 간절한 눈빛에 거절할 수 없는 강제력을 느꼈다. 그래서 나설 것을 약속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말보다 행동으로 할까? 그래 혈서로 투쟁의 열기를 지피자!
 
  혈서? 내가 할 수 있을까? 손가락을 깨물 수 있을까?
 
  그래 마주쳐 보자. 10시가 넘어 교문 앞 법대서점에 들어가 백상지를 산 후 단식장으로 돌아왔다. 짧은 격문을 준비했다. 혈서로 쓸 글도 준비했다.
 
  정오에 영래와 눈을 마주하곤 준비한 격문과 백상지를 들고 앞으로 나갔다. 떨리는 마음으로 준비한 격문을 읽었다.
 
  “친애하는 학우 여러분!
 
  우리는 일어섰습니다.
 
  이틀이 지나면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조인됩니다.
 
  위정자들이여!
 
  어찌하여 배상금은 1달러도 못 받습니까?
 
  어찌하여 생명선인 평화선을 허뭅니까?
 
  어찌하여 우리 땅 독도를 분쟁으로 몹니까?
 
  우리는 일제 식민지의 굴종을 털고 당당히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정의와 민주가 빛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정의와 민주가 찬란히 빛나는 동방의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격문 읽기를 마치고 새끼손가락을 깨물었다. 피가 흘렀다. 바닥에 엎드려 백상지에 흐르는 피로 글을 썼다.
 
  ‘동방의 등불’
 
  다리가 풀렸다. 손가락에서 피가 계속 흘렀다. 바닥에 쓰러져 누웠다. 정신이 몽롱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의과대학 구내에 있는 보건진료소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었다. 자원봉사 나온 간호학과 학생들이 우리를 돌보고 있었다. 먼저 실려온 동료들과 함께 그날을 보냈다.
 
  기력을 회복하고 단식장으로 다시 갔다. 우리는 단식장에서 일본 도쿄에서 대한민국 이동원 외무부 장관과 일본 시이나 외무대신이 협정을 조인하는 행사를 중계하는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1965년 6월 22일 오후 6시 국민의례로 200시간의 〈매국적 한일협정 분쇄를 위한 단식 농성〉을 마쳤다. 모두 버스에 실려 서울의대 보건진료소로 갔다.
 
  우리의 투쟁은 그렇게 끝났다. 눈물바다였다.
 
  ***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의과대학 정문으로 나가 대학로를 건넜다. ‘세느강의 다리’ 교문은 사라졌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설립되어 해방과 함께 국립서울대학교로 간판이 바뀌었다가 관악캠퍼스로 갈 때까지 50년간 서 있던 교문이었다. ‘세느강’ 대학천도 덮여버렸다. 데모를 못 하게 관악산 골짜기로 몰아넣었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섭섭함을 금할 수 없었다.
 
  흔적만 남은 ‘세느강의 다리’를 건너 마로니에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 마로니에 거목과 총장실이 있던 대학본부 건물은 몇십 년이 흘렀지만 옛 모습이 남아 있었다.
 
  ***
 
  단식 데모와 이어진 휴교령이 끝나고 2학기에 1학기 시험을 치르고 캠퍼스에는 잠시 평화가 찾아왔다. 나는 영래를 따라 노동법학회에 들었고 겨울방학에 삼척탄광 노동자 진폐(塵肺) 감염 실태 조사에도 갔다. 우리는 탄광 노동자의 작업 환경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노동법학회에 열악한 노동 환경을 국제노동기구(ILO)의 권고 기준에 따라 개선해야 함을 보고했다.
 
  우리에게 2학년 때 처음으로 캠퍼스의 낭만이 찾아왔다. 상헌이가 Y 대학에 들어가고 나는 기숙사에 들어가 시간제 가정교사를 하게 되었다. 봄에는 휴전선 가까이 자리한 산정호수로 야유회를 가고 법대의 전통 축제 낙산제가 열리고 카니발도 있었다. 가을에는 공릉동 공과대학 캠퍼스에서 서울대 전체 체육대회도 열렸다. 내가 고교 때 교내 마라톤에서 뛰었던 실력을 믿고 준비도 없이 법대 대표로 나가 반환점에서 앰뷸런스를 타고 온 것은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되었다.
 
  우리는 문리대 운동장에서 체육을 하는 날 문리대 강의도 가끔 들었다. 어느 날 영래와 함께 문리대에 가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문학 강의를 들었다. 그해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사르트르는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었다. 강의가 끝나고 영래와 고교 때 영어회화클럽을 했던 불문학과 여학생 후배를 만나 ‘세느강변’ 학림다방에서 커피를 마셨다.
 

  3학년이 된 영래는 3선 개헌과 총통제 음모 분쇄를 위한 데모를 노동법학회 중심으로 주도했다. 여당 민주공화당은 1967년 6·8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130석을 차지하여 3분의 2 개헌선을 넘었다. 우리는 6·8 총선을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3선 개헌 저지를 위해 재선거를 주장하였다. 영래는 재선거를 못 하면 3선 개헌이 이루어지고, 3선 개헌을 막지 못하면 종신 대통령제인 총통제로 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총통제라는 놀라운 주장을 했다. 전국 대학으로 번진 총선 무효와 재선거 데모는 최루탄과 휴교령으로 주춤하다가 조기 방학으로 동력이 식어버렸다. 1학기 시험을 2학기에 치르고 가을바람이 불면서 부정선거 규탄 데모의 열기는 완전히 식어버렸다. 이렇게 또 끝났다.
 
  우리는 그렇게 대학을 졸업했고, 3선 개헌은 결국 이루어졌고, 그리고 영래의 예견대로 총통제는 유신체제라는 이름으로 실현되었다.
 
  세월이 흘러, 밤 파도가 찰랑거리는 해운대 백사장에서 사르트르 강의를 들으러 갔다가 만난 그녀를 다시 만나리라고는 학림다방에서 커피를 마셨던 그날 아무도 몰랐다.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멀리 시골까지 문상 온 영래는 영어회화클럽 후배인 그녀가 내 아내가 되어 있을 줄은 더욱 몰랐다. 그날 우리가 옛이야기를 하며 막걸리를 마시며 ‘세느강변’ 이야기를 하리라고는 더더욱 몰랐다. 우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이어졌다.
 
  ***
 
  해가 길 건너 대학병원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복개된 ‘세느강’ 대학천 길을 따라 대학로를 걸었다. 옛 법과대학 자리에 돌기둥 교문은 그대로 있었지만 ‘정의의 종’은 보이지 않았고 그 자리에 서울사대 부속초등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종로 쪽으로 걸었다. 효제초등학교를 돌아 골목으로 들어섰다. 우리가 ‘영산홍 아줌마 집’이라고 부르던 막걸릿집이 있던 곳을 찾아갔다. 입술에 영산홍같이 빨간 루주를 칠한 주인아줌마는 서울법대 우리에게 외상을 잘 주어 “육법전서 맡겨놓고 외상 술”이라는 패러디 교가를 만들게 했다. 나는 ‘영산홍 아줌마 집’이 있던 근처 술집에 들어가 혼자 막걸리를 마셨다. 옛날같이 빈대떡도 시켰다.
 
  ***
 
1972년 1월 24일 ‘서울대생 내란 예비음모 사건’으로 불리는 법정에 선 서울대생들. 오른쪽부터 조영래·이신범·심재권·장기표.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행정고시를 거쳐 경주와 대구의 세무서에 근무하고 있었고, 영래는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그가 예언한 박정희의 유신체제 전야에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1년 반 징역을 살고, 유신체제 마지막 6년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도피 생활을 하게 됨으로써 우리의 만남은 끊어졌다. 사르트르 강의를 들으러 갔다가 만난 그녀와 결혼할 때 영래는 도피 중이었다. 졸업 후 내가 영래를 다시 만난 것은 1980년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한 후 그의 연기된 결혼식장에서였다. 그날 신부는 아들 손을 잡고 입장했는데 친구들 모두 박수로 열광했다. 6년 전 청첩장을 돌린 후 체포령이 내려 도피 생활을 하였는데 어떻게 아들을 만들었을까? 데모 때부터 그는 전략 전술에 탁월했지만 그래도…!
 
  내가 서울로 올라와 재무부에 근무할 때 인권변호사 활동을 하던 영래를 만나면 그는 나라 걱정이 많았다. 남의 어려움은 경청하지만 자기의 어려움은 말하지 않던 영래가 어느 날 민권 변론 활동이 쉽지 않다고 했다. 그날 돈이 될 만한 사건이 들어오지 않는다며 담배를 연달아 피워댔다. 나는 보험 일을 맡고 있을 때는 보험분쟁심의위원으로 위촉하고, 은행 일을 맡고 있을 때는 K 은행 고문으로 위촉되도록 하여 그의 활동을 도와주었다. 아직도 군부 정권의 경직된 유산이 남아 있을 때라 영래는 국장 직위에 있는 나에게 피해가 있을까 걱정하였다. 영래에게 가해진 시대의 고난을 보상해 주는 것이 공의라고 생각했지만, 그때마다 따로 장관에게 영래는 반독재와 반군부였지만 좌파는 아니고 인본주의자임을 보고하여야만 했다.
 
  내가 이재국장 때 영래는 내가 또 빚을 지게 만들었다. 은행이 최초로 파업하게 되었을 때 재무부에 비상이 걸리고 나는 총력을 다해 막으려 노력했다. 금노련(전국금융노동조합연맹)의 결정에 따라 은행원이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준법 투쟁에 들어가고, 임금인상을 포함한 근로조건 개선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파업에 들어간다고 선언했다. 그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나는 불법적 파업에 대한 처벌은 정부의 당연한 권한임을 발표하고 만약 불법 파업이 자행되면 한 명도 예외 없이 처벌하겠다고 노조에 강경하게 맞섰다. 지금까지 준법 투쟁도 근무 규칙에 위반되었는지를 조사한 다음 예외 없이 처벌하겠다고도 했다.
 
  정부의 강경 대응을 발표한 그날 오후 노조 대표들이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선배님 몰라봤습니다. 우리를 잘 지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선배님? 서울법대 나왔어요?”
 
  “학교 후배 말고 노동운동 후배입니다.”
 
  “나는 노동운동 한 적 없는데요?”
 
  “국장님이 대학 때 열성적으로 노동법학회 활동을 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노동운동의 시작은 서울법대 노동법학회부터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공손하게 말했다.
 
  “노동법학회에 참여는 했습니다.”
 
  “우리를 너무 적대적으로 보지 마시고 강경한 조사와 처벌은 거두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들의 이런 대응에는 영래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단호히 말했다.
 
  “지금이라도 ‘준법 투쟁’이라는 이름의 불법 투쟁을 그만둔다면 지난 일을 불문에 부칠 것을 장관께 건의하겠습니다.”
 
  그 후 사상 초유의 은행 파업은 없었던 일이 되었고 그 배후엔 옛날 데모를 함께 했던 노동법학회 선배 L과 P와 영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L은 노동법 교수로 한국 노동법학 정립에 큰 역할을 하며 훗날 노동부 장관이 되었고, P는 평생을 숨어서 노동운동의 대부 역할을 하다가 보험회사 사장을 지냈다.
 
  ***
 
  나는 막걸리 한 주전자를 더 시켰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영래와 함께 막걸리를 마시면 젓가락 장단에 서울법대 선배 최희준의 노래 ‘하숙생’을 불렀다.
 
  “삐암이요 삐암 오대산 삐암!
  이거 오대산 백사 다섯 마리 먹으면 다음 날 아침 요강이 깨져!
  나 책임 못 져!
  …
  아이들은 가거라!”
 
  영래는 취하면 흥이 나 ‘뱀 장수’를 읊었다.
 
  “가슴마다 엉큼스런 꿍심을 품고/ 육법전서 맡겨놓고 외상 술이다.
  고등고시 핑계 삼아 연애 잘하니/ 부모님과 애인에게 크나큰 고통
  날고 기는 인재들이 다 모여들어/ 오늘 데모 내일 술집 서울법대다.”
 
  나는 취하여 비틀거리며 패러디 ‘서울법대 교가’를 부르며 효제동 골목을 나왔다.
 
  ***
 
 
《전태일 평전》
영래는 44년 세월을 시민운동과 민권운동을 위해 모두를 바쳤다. ‘한일협정 반대’와 ‘6·8 부정선거 무효’와 ‘3선 개헌 반대와 총통제 저지’를 위한 그의 투쟁은 시민운동의 전범이 되었다. 청계천 청년 노동자의 분신자살을 탐구한 《전태일 평전》은 그의 실존적 휴머니즘을 보여준다. ‘부천 성고문 사건 변론’과 ‘성산동 수해 집단 소송’은 민권운동의 이정표가 되었다.
 
  그는 너무 빨리 떠났다! 유신체제 아래서 그의 고난을 태워주었던 그 담배가 결국은 그를 태웠다. 할 일이 많았는데!
 
  그는 순수하고 따뜻한 실존적 휴머니스트였다. 한평생 언행일치로 살았다.
 
  ‘영래(英來)’는 이름대로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영웅’으로 온 사람이었다.
 
  2025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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