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두환 청와대 민정수석… 6월항쟁 때 서울시청앞광장·명동성당 등 시위 현장 직접 찾아 민심 파악
⊙ “혼돈의 1987년 청와대는 계엄 계획을, 군부는 쿠데타 계획을 세웠다”
⊙ “국내 반도체산업은 1981년 전두환이 내놓은 ‘반도체공업 육성계획’이 기반 마련… 지금의 대한민국 만들어”
⊙ 이병철 장례식 후 청와대로 찾아온 이건희 “아버지 봉투 거절한 유일한 분”
⊙ “지도자의 功과 過 분리해서 평가해야… 전두환의 공 조명할 필요”
金容甲
1936년생. 육사 17기 / 국가안전기획부 기획조정실장,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제24대 총무처 장관, 15·16·17대 국회의원 역임. 現 국민의힘 상임고문
⊙ “혼돈의 1987년 청와대는 계엄 계획을, 군부는 쿠데타 계획을 세웠다”
⊙ “국내 반도체산업은 1981년 전두환이 내놓은 ‘반도체공업 육성계획’이 기반 마련… 지금의 대한민국 만들어”
⊙ 이병철 장례식 후 청와대로 찾아온 이건희 “아버지 봉투 거절한 유일한 분”
⊙ “지도자의 功과 過 분리해서 평가해야… 전두환의 공 조명할 필요”
金容甲
1936년생. 육사 17기 / 국가안전기획부 기획조정실장,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제24대 총무처 장관, 15·16·17대 국회의원 역임. 現 국민의힘 상임고문

- 사진=조준우
5공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김용갑(金容甲) 전 총무처 장관을 만났다. 작년에 구순(九旬)을 맞은 김 전 장관은 90대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꼿꼿한 자세와 힘있는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육사(17기) 출신 군인으로 국가안전기획부 기획조정실장을 역임했고 15~17대 국회의원 시절 ‘보수의 아이콘’으로 불릴 만큼 안보(安保)를 중시했던 그는 12·3 계엄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 군인, 공직자, 정치인 출신으로 12·3 계엄 이후 생각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지도자의 판단도 문제지만, 주변인과 참모들이 민심을 파악하지 않고 제대로 된 조언을 하지 못했던 점이 무엇보다 안타깝습니다.”
― 직언이나 충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작금의 사태까지 일어나지는 않았겠지요?
“지도자에게 국민의 소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면 공직에 있을 자격이 있습니까? 민심을 읽고 지도자에게 전달하고 설득하는 것, 그게 공직자의 핵심 가치인데요.”
“각하, ‘땡전뉴스’ 아십니까”
김 전 장관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서슴지 않고 직언을 한 유일한 청와대 참모로 알려져 있다. 김 전 장관이 민정수석으로 임명받아 청와대로 온 1986년 1월의 정치적 상황은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이민우(李敏雨) 등 야당 정치인들이 ‘군사 정권 타도’를 외치며 여론을 주도하고 있었다.
― 정치적 격동의 시절인 5공 후반 3년(1986~88년) 동안 민정수석으로 일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과 코드가 잘 맞았나요?
“들어간 지 3개월 만에 사표 썼어요. 민정수석이 민심 동향 보고를 해야 하는데 청와대 분위기가 사실 그대로 보고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내 사표를 들고 수석회의에서 ‘민정수석이 이래서 사표를 냈다, 이런 자세로 일하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일할 수 있겠다 생각해서 머무르게 됐지요.”
― 전 대통령은 의외로 남의 얘기를 잘 듣는 분이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예를 들면 경제도 자기가 잘 모른다며 전문가에게 맡기니까 임기 내내 경제가 호황이었잖아요. 대통령 직선제도 결국 받아들였고요. 역대 대통령들은 청와대만 들어가면 불통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5공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 ‘땡전뉴스’ 이야기를 장본인에게 전한 에피소드도 유명하지요.
“‘각하, 땡전뉴스를 아십니까?’라고 물었는데, 모르더라고요. 9시 뉴스를 알리는 땡 소리가 나자마자 무조건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 이렇게 시작하니까, 사람들이 ‘땡전뉴스’라고 부르면서 뉴스 시작하고 5분 후부터 본다고 얘기했습니다. 국가에 중차대한 일이 생겨도 대통령 근황이 첫 뉴스라는건 문제 아닙니까. 일례로 칼(KAL) 비행기가 소련 전투기에 격추돼 269명이 숨진 날(1983년 9월 1일-편집자 注)도 첫 뉴스가 대통령 뉴스였습니다.”
― 그렇게 얘기하니 반응이 어떻던가요?
“깜짝 놀라더군요. 받아들이는 건 빠른 분이라 빨리 대처를 하라고 공보수석한테 지시했습니다.”
전두환이 김용갑을 찾은 이유
장관과 3선 국회의원까지 지냈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경력은 전두환 정권 시절 민정수석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가 민정수석으로 지낸 3년은 대한민국이 격하게 뒤흔들린 혼란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 12·12 세력도 하나회 출신도 아닌데 5공에서 민정수석이라는 요직을 맡았습니다. 12·12 세력이었던 이학봉 전 수석이 맡았던 자리죠.
“나는 원래 중앙정보부에 근무했고, 10·26 이후 중앙정보부가 사실상 해체되고 국가안전기획부로 바뀌면서 조직을 개혁하고 안기부의 기반을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어요. 그렇게 5년쯤 일하고 나서 미국에서 공부하려고 UC 버클리 방문교수로 갔는데 몇 개월도 안 돼서 대통령이 찾는다고 연락이 온 겁니다. 1986년 1월이었어요.”
― 수많은 측근들이 있는데 왜 개인적인 인연도 깊지 않은 인물을 민정수석으로 찾았을까요?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민의 여론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할 말은 다 하는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는 데다 정보기관 출신이기도 하고.”
― 대통령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해 달라고 했습니까?
“특별한 주문이 없고 알아서 일하라는 식이었어요.”
― 민정수석이란 청와대 최고의 권력 아닙니까. 사람들이 익히 아는 역대 민정수석만 해도 문재인, 조국, 우병우 등등 많은데요.
“그런 인식을 갖게 한 인물들이 잘못한 겁니다. 민정(民情·Civil Affairs)이 뭡니까. 국민 여론 및 민심 동향 파악, 공직·사회 기강 관련 업무 보좌, 법률 문제 보좌, 민원 업무가 민정수석실의 일이에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민정이 감찰과 사정(司正)의 칼을 휘두르는 자리가 된 겁니다.”
반도체산업의 숨은 공로자 전두환
1981년 5월 정부가 확정한 반도체공업 육성계획. 자료=대통령기록관대한민국이 반도체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시점은 1981년 7월 15일이다. 이날 전두환 대통령은 청와대 경제수석실이 작성한 ‘반도체공업 육성계획’을 재가(裁可)했다(박스 참조). 경제 관련 장관과 참모들은 반도체산업은 경쟁력이 없다며 반대했지만 전 대통령은 “반도체산업만이 우리나라의 살 길”이라며 여러 차례 국무회의에서 반도체산업을 육성하라고 독촉했다. 김 전 장관은 그때 청와대에 있지는 않았지만 전 대통령 등을 통해 당시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전 대통령은 국내 산업을 발전시키고 국민소득을 높이기 위해 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용했습니다. 그중 반도체가 확실한 미래 산업이라는 확신을 가진 것 같습니다. 대통령은 임기 초기에 반도체산업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며 삼성 이병철(李秉喆) 회장을 불렀어요. 삼성이 1970년도에 국내 최초의 반도체 회사인 한국반도체를 인수해서 이름을 바꾼 삼성반도체라는 회사를 보유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에 대해 잘 모르더라는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반도체회사를 인수한 건 이건희(李建熙)의 판단이었고 인수금도 이건희 사재(私財)로 했다고 합니다. 삼성그룹에서는 큰 관심이 없었던 거죠. 그래도 대통령은 이병철 회장에게 어떻게든 반도체에 대해 알아보라고 해서 이병철 회장이 실리콘밸리에 가서 알아보고 왔는데, 실리콘밸리도 그때 반도체는 정말 초기 수준이어서 큰 성과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전 대통령은 계속 삼성을 향해 반도체산업을 하라고 요구를 했고, 1981년 반도체공업 육성계획 수립 후 1982년 청와대에 반도체공업육성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기업 지원에 나섰습니다.”
― 당시엔 기업들도, 경제 전문가들도 반도체산업에 회의적(懷疑的)이었다던데요.
“일단 우리나라에 기술이 없어 일본이나 선진국에 비해 경쟁력이 부족하다는 분석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국내경제는 중공업·철강·조선 등이 잘나가서 그런 대기업들은 반도체산업에 굳이 뛰어들 필요가 없었고, 삼성도 제당·모직 등 경공업 위주의 기업이라 처음엔 엄두를 못 냈던 것 같아요.”
전두환 대통령은 계속 삼성을 ‘압박’했다고 한다. 이병철 회장은 1983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반도체사업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이른바 ‘도쿄 선언’이다. 이후 이건희 회장의 막대한 투자 등으로 반도체산업은 2020년대의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효자 산업이 됐다.
1970~80년대 한국의 반도체산업 略史
박정희가 문 열고 전두환이 키운 한국 반도체산업
1985년 반도체 생산 라인을 둘러보는 이병철 삼성 회장. 사진=조선DB국내 최초의 반도체 생산 회사는 1974년 1월 설립된 한국반도체다. 한국반도체 설립자인 강기동은 미국 회사에서 일하던 중 한국에 왔다가 박정희 대통령과 만나게 됐고 박 대통령은 반도체가 미래 산업으로 떠오를 것이라고 판단해 1969년 전자공업진흥법을 제정했다.
강기동이 설립한 한국반도체는 정부에서 상당한 지원을 받았지만 계속 적자가 나고 운영이 어려웠는데, 당시 동양방송·중앙일보 이사였던 이건희가 이를 주목했다. 삼성전자의 자금만으로는 인수금이 부족해 이건희는 사재까지 동원해 1974년 12월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 당시 이건희는 측근들에게 “대통령이 과잉투자하고 아무도 손 안 대려는 거 내가 선대(이병철) 설득해서 사 온 것”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삼성반도체는 1970년대에는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삼성전자는 1970년대 컬러 TV와 VTR, 전자레인지 등을 생산하며 기술력을 쌓았고 1979년 한국전자통신을 인수하며 반도체 개발에도 나서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국내 반도체산업은 걸음마 수준이었다.
1980년 취임한 전두환 대통령은 1981년 5월 반도체공업 육성계획을 내놓는다. 24쪽에 달하는 이 계획서에는 세계 반도체 시장의 현황과 산업 육성의 필요성, 기대효과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반도체산업 육성으로 1985년까지 연평균 경제성장률 14.8%를 달성할 수 있다는 내용도 있다. 대통령기록관에 보관된 해당 문서에는 전 대통령의 수기로 보이는 ‘VTR→삼성, 필름→선경’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삼성과 선경(현 SK)을 공략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김용갑 전 장관의 전언대로 전두환 대통령은 이후 삼성에 반도체산업 지원을 강조하며 사실상 압박했고 이병철 회장은 2년 만인 1983년 삼성의 ‘퀀텀 점프(단기간의 비약적 성장)’ 기점이 되는 도쿄 선언을 내놓게 된다. 도쿄 선언은 이건희의 반도체에 대한 집착과 이병철의 결단력에 따라 나온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배경에는 전두환 정권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이병철의 봉투를 거절하다
― 청와대와 삼성가(家) 사람들 사이에도 교류가 있었겠네요.
“조금 사연이 있어요. 1986년 일인데, 내 고향(경남 밀양) 친구 A가 그때 삼성전자 사장이고 이병철 회장 오른팔이었는데 어느 날 청와대로 왔더라고요. 회장 심부름 왔다고 봉투를 내밀어요. 생각도 못 했지요. 다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봉투 가져오는 사람은 없거든요. 마음으로 받았다고 하고 다시 가져가라고 거절했습니다.”
― A 사장이 곤란했겠습니다.
“돌아가서 보고했더니 (이 회장이) 그럴 줄 알았다고 했대요. 김용갑이라는 사람이 봉투 같은 거 안 통하는 줄 알고는 있었지만, A가 나와 친한 친구라 하니 가 보라고 한 거죠.”
― 그 후엔 이병철 회장과 접점이 없었습니까?
“그 일이 있고 나서 몇 개월 후에 이병철 회장이 돌아가셨어요. 호의를 거절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있고 해서 장례식장에 갔습니다. 장례가 끝나고 이건희 회장이 내 사무실로 찾아왔더라고요.”
― 청와대로요?
“네. 아버지가 수석님을 참 좋아했다고, 장례에 와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갔어요. 부친의 봉투를 거절한 사실도 알고 있었지요.”
― 5공 실세가 봉투를 거절하다니 기억에 남았나 봅니다.
“나중에 내 고향 후배 이학수(전 삼성전자 사장)한테 들었는데, 이병철 회장 봉투가 돌아온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김용갑 전 장관은 공직 생활 중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뤄 낸 6·29선언을 이끌어 낸 것이 가장 기억에 남고 보람 있는 일이었다고 했다. 6·29선언은 노태우(盧泰愚)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발표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결정권자는 전두환 대통령이었다. 애초 내각제를 원했던 전두환·노태우를 직선제로 설득한 사람이 김 전 장관이다.
내각제 원했던 대통령, 거리로 나선 민정수석

― 당시 헌법은 대통령 간선제(間選制)였고, 전두환 대통령과 민정당은 내각제 개헌을 원했었죠.
“야당은 대통령 직선제, 여당 민정당은 내각제를 추진했지요. 대통령 선거라는 게 과열될 수밖에 없다 보니 내각제를 하면 정국이 그나마 안정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1986년 4월엔 대통령이 내각제 국가를 알아보겠다고 유럽 순방을 갔어요. 그런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국민이 원하는 건 대통령 직선제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민심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김 전 장관은 4월 12일 대전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야당의 개헌 요구 집회에 참석했다. 당시 야당 집회는 상당히 과격한 양상을 띠었고, 경찰과 물리적 충돌도 잦았다. 청와대 수석이 몰래 참석했다는 사실을 누가 알기라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통령이 알았다면 극구 말렸을 일이다. 김 전 장관은 대통령이 해외 순방 중인 틈을 타 서울을 떠나 대전으로 갔다.
2만여 명이 모인 집회의 열기는 뜨거웠고, 국민이 대통령 직선제를 열망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김 수석은 대통령 귀국 후 현장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했다.
1987년 6월항쟁 중 명동성당 시위 모습. 김용갑 민정수석은 민심 파악을 위해 명동성당에 진입했다. 사진=국가기록원김 전 장관은 이후에도 계속 민정수석실 행정관들에게 민심 동향 파악을 지시했고, 1987년 6월항쟁 때는 직접 집회에 참여해 최루탄 가스에 눈물을 흘리며 현장 분위기를 파악했다. 6월 9일 이한열군 사망, 6월 10일 노태우 대통령 후보 선출을 계기로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고, 6월 12일에는 시위대 3000여 명이 명동성당에 집결했다. 김 전 장관도 시위대 틈에 섞여 명동성당으로 들어갔다.
― 야당 정치인 중 얼굴을 아는 사람도 많을텐데 너무 위험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민정, 즉 민심을 챙기는 최고 책임자인데 직접 봐야 대통령한테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잖아요. 중요한 현장에 갈 때는 아내나 부하 직원에게 ‘30분 안에 안 나오면 경찰에 신고하라’고 당부하고 들어갔습니다.”
1987년 6월 14일, 청와대에서 계엄 논의
1987년 6·29선언을 대서특필한 언론. 자료=한국정책방송원― 6월 10일 시작된 전국적인 시위는 2주가 넘게 이어졌죠. 청와대의 초기 대응은 어땠습니까?
“대통령이 6월 14일 청와대 녹지원에서 회의를 주재했고 비서실장, 국무총리, 여당 대통령 후보, 군(軍)과 치안본부(현 경찰청) 수뇌부가 모였습니다.”
― 수석들은 없었네요.
“계엄과 관련된 사람들만 들어간 거죠.”
― 참석자들은 이후 보안 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텐데요.
“말 안 해도 결론이 났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비서실장과 다른 수석들에게 계엄은 절대 안 된다, 엄청난 유혈 사태가 벌어질 것이고 민심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고 호소했어요. 내가 현장을 다 보고 오지 않았습니까.”
― 당시 급박한 상황을 정리한 메모를 《월간조선》이 2023년 3월호에 단독 보도했습니다.
“메모에 적은 것처럼 입장을 정리해서 6월 18일에 대통령을 독대(獨對)하고 보고했지요. 하루라도 더 늦어지면 언제 계엄이 터질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 야당이 주장하던 대통령 직선제를 여당이 먼저 내놓자는 역발상을 내놓았는데요. 직선제로 가면 민주화를 부르짖던 YS 또는 DJ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있지 않았습니까.”
“자신이 있었죠. YS와 DJ는 절대 단일화를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렇게 됐고요. 또 현 정부의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형성된 중산층이 여당의 확실한 지지층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임기 동안 국민소득이 계속 올랐고 반면 물가는 안정돼 국민이 살기 좋았던 것이 사실 아닙니까.”
1987년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 건의 등을 골자로 하는 6·29선언을 발표하고, 다음 날 전두환 대통령이 이를 수용하겠다고 밝히면서 일촉즉발이었던 정국은 한동안 안정을 되찾았다.
6·29 이후의 혼란과 쿠데타 계획
2021년 11월 24일 김용갑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신촌장례식장에 마련된 전두환 전 대통령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사진=뉴시스그러나 혼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해 12월 16일 치러지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됐다.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은 선거는 1971년 제7대 선거가 마지막이었다. 16년 만에 직접 대통령을 뽑을 수 있게 된 국민의 기쁨이 컸지만 그만큼 선거운동은 과열됐다.
여당 노태우 후보와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을 포함해 총 8명의 후보가 출마했고, 영남과 호남, 충청권의 민심이 각각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金鍾泌) 후보에게 집중되면서 이들은 다른 후보 강세인 지역에서는 선거운동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세와 선거운동 과정에서 폭력사건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지지하지 않는 후보를 향한 욕설과 테러, 선거운동원들 간의 폭력 사태가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어요.”
그는 당시 군 일각(一角)에서 쿠데타 계획이 있었다고 했다.
“어느 날 보안사령부(현 국군방첩사령부) 장교가 나한테 긴급 보고가 있다고 왔어요. B가 주동해서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보고였습니다.”
― 그런 보고를 민정수석에게요?
“보안사령관에게 보고하면 대통령에게 직보가 될 것이고, 만약 그랬다가는 군의 뿌리가 뽑힐 정도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니 친분이 있던 내게 와서 논의를 한 겁니다.”
― 왜 쿠데타를 계획했다고 합니까?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매일 데모에 폭력 사태가 일어나고 사회 혼란이 극심해지니까 북한이 이 기회를 이용해 남침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 이유 때문에 쿠데타 소문은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정보를 접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제보자한테 이름을 들어 보니 충분히 그럴 사람들이고 신빙성이 높다고 생각했어요. 일단 너무 큰일이라 나도 겁이 날 정도였지요. 제보자에게 보안사령관에게는 보고하지 말라고 대기시켜 놓고 주모자로 지목된 인물을 만났습니다.”
― 원래 아는 분이었나요?
“맞아요. 만나서 내가 ‘너희들이 하려 하는 일은 절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움직인다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나라가 망하느냐 마느냐 하는 시기에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요.”
― 결국 쿠데타는 일어나지 않았지요. 징계나 조사 없이 조용히 넘어갔습니까?
“장군들에게 군 동향 파악 잘하라는 지시를 했고, 노태우 후보에게 보안사 장교를 불러 한번 격려해 주라고 말했습니다.”
“역사 평가에는 功過 모두 필요”
제공=파카(PARKER) 만년필김용갑 전 장관은 이 같은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역사를 평가할 때는 공(功)과 과(過)를 구별하고 각각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정희·김영삼·노무현 등 전직 대통령들은 임기 말에 얼마나 인기가 없었습니까. 그래도 사후에는 사람들이 동정심과 애틋함도 갖고 공을 재평가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어요. 전두환 전 대통령도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과오가 있었지만 그 후 임기 내내 경제 발전을 이뤄 냈고 국민이 바라는 대통령 직선제와 평화적 정권 교체도 이뤄 냈습니다. 반도체산업 육성과 직선제 개헌만 해도 현재 전 세계가 인정하는 대한민국의 기틀을 만든 일이잖아요.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가 재평가되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