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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인간탐험

‘詩 노래’ 500곡 만든 산울림 김창훈

“산울림의 실험정신은 유희적 음악놀이, 건강한 반항심”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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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울림은 기성세대가 주로 듣던 가요를, 젊은 세대도 즐길 수 있는 문화로 촉발시킨 변곡점”
⊙ 김창훈이 만든 산울림 곡 ‘회상’ ‘독백’ ‘산할아버지’ 등
⊙ 데뷔 시절인 1978년이 산울림 음악의 전성기… 1년 반 동안 앨범 6장 만들어
⊙ 산울림 7~9집 내놓던 시절이 음악적 완숙기… “스타덤 올랐지만 음악적 회의 밀려와”
⊙ 각서 쓰고 해태상사 취직, 식품 수출에 뛰어들어… 가수 김완선 1~2집 제작 후 도미
⊙ 2년 전부터 詩에다 곡을 붙인 ‘시 노래’ 500곡 완성

金昌勳
1956년생. 서울대 농과대학 식품공학과 졸업 / 서울대 밴드 ‘샌드 페블즈’ 5기 베이시스트, 형(김창완)·동생(김창익)과 함께 삼 형제 밴드 ‘산울림’ 결성(1977), ‘김창훈과 블랙스톤즈’ 결성(2017) / 김창훈 솔로 앨범 5집 발매(1992, 2009, 2012, 2016, 2019), 김창훈과 블랙스톤즈 0집 〈황무지〉(2017), 1집 〈김창완〉(2017) 발매
‘시(詩) 노래’ 500곡으로 귀환한 산울림 김창훈.
  한국에 비틀스가 있다면 아마도 산울림일 것이다. 산울림은 트윈 폴리오나 둘다섯, 어니언스, 하사와 병장, 강병철과 삼태기 같은 블루진, 생머리, 통기타, 생맥주나 막걸리를 연상시키는 청년들이 아니었다. 금지곡을 뛰어넘는 강렬한 사운드의 정통 록 밴드였다.
 
  산울림은 삼 형제가 결성한 밴드다. 맏형 김창완(金昌完)이 메인 보컬과 기타를, 둘째 김창훈(金昌勳)이 보컬과 베이스, 막내 김창익(金昌翼·작고)이 드럼을 쳤다. 1972년경 김창완이 500원짜리 기타를 사 와 집에서 형제끼리 노래를 부른 것이 시초였다고 한다. 얼마 후 김창훈이 기타를 하나 더 장만하자, 막내 김창익이 전화번호부와 노트 등을 방바닥에 놓고 두들기면서 산울림이 시작되었다. 늘 그렇지만 ‘전설’은 그 첫발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한 법이다.
 
 
  1997년까지 내놓은 13장의 음반
 
왼쪽부터 어린 시절 산울림 삼 형제. 김창완(9), 김창익(5), 김창훈(7).
  산울림은 곡들을 대개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형제들이 직접 만들었다. 김창완이 만든 히트곡으론 ‘아니 벌써’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생각이 나겠지요’ ‘찻잔’ ‘청춘’ ‘안녕’ 등이 떠오르고, 김창훈의 곡으론 ‘회상’ ‘독백’ ‘산할아버지’ 등이 생각난다.
 
  1977년 제1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서울대 농대 밴드 ‘샌드 페블즈(6기)’가 불러 대상을 받은 ‘나 어떡해’도 김창훈의 곡이다. 그는 샌드 페블즈 5기 베이시스트였다.
 
  이후 산울림은 1997년까지 모두 13장의 음반을 내며 한국 대중음악사에 뚜렷한 족적(族籍)을 남겼지만, 순탄한 길을 걷진 못했다. 남들처럼 입대(入隊)를 해야 했고, 생계를 위해 샐러리맨 생활을 해야 했다. 미친 듯이 음반을 쏟아냈고, 최소 수십만 장(아니, 수백만 장일 수도…)이 팔려나갔지만, 주머니는 빈털터리. 맏형 김창완만이 음악인의 길에 나섰고, 둘째 김창훈은 해태상사, 셋째 김창익은 대우자동차에 입사했다. 그러다 김창훈은 미국, 김창익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김창훈은 미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직장 생활, 회사 창업도 하다가 나중 미국 CJ푸드, 매일유업 ㈜미주사업 고위직에 재직했다. 그러다 2019년 다시 국내로 돌아왔다. 물론 이전부터 틈틈이 솔로 앨범(5집)을 냈고, ‘김창훈과 블랙스톤즈’라는 록 밴드를 결성한 일도 있다.
 
  그러던 그가 몇 년째 좋은 시(詩)에다 일일이 곡을 붙여 노래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조만간 ‘시 노래’ 500곡이 완성될 예정이다. 유튜브에 ‘산울림TV’를 치면 500곡 모두를 감상할 수 있다. 기자는 그를 지난 4월 26일 오후 서울 송파구 한 카페에서 만나 음악과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음악만으론 턱없이, 턱없이 부족…”
 
  김창훈은 정말 김창완과 다르게 보였다. ‘개구쟁이’가 연상되는 김창완이 엉뚱하고 자유인처럼 보인다면 김창훈은 햄릿처럼 생각이 깊고 진지하게 보였다. 〈산울림 3집〉(1978)에 담긴 19분짜리 대곡 ‘그대는 이미 나’, 위악적(僞惡的)인 보컬의 ‘내 마음(은 황무지)’에서 보여준 김창훈의 재능은 훗날 이 앨범이 한국 하드록의 효시로 언급될 정도로 빛이 났다.
 
  ― 근황이 궁금합니다.
 
  “산울림이 1977년에 데뷔했잖아요. 제가 식품을 전공했기 때문에 1982년부터 식품 유통 회사 쪽에 거의 35년간 있었죠.”
 
  ― 밴드로 먹고살 만했을 텐데….
 
  “그때는 그렇지 않았어요. 우리 산울림의 경우는 조금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음악을 전업(專業)으로 시작한 게 아니었고, 제일 많이 지향했던 게 음반 제작이었어요.
 
  방송 출연이야 곁가지로 했고 콘서트 정도만 했어요. 소위 ‘밤무대’를 뛰면 좋았을 테지만 그러진 않았어요. 수입원이 충분치 않았죠. 레코드 회사와 정식 계약해 개런티가 지급되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삼 형제가 음악만으로 생활하기엔 턱없이, 턱없이 부족….”
 
  그는 “주 수입원을 외면한 걸 자존심처럼 여겼다”면서도 “어떻게 보면 옳은 것일 수도 있지만 잘못된 편견일 수도 있는데, 그런 걸 고집하는 바람에…”라고 했다.
 

  ― 하필 1982년에 취업을 한 이유는 뭔가요.
 
  “당시엔 입사하는 데 나이 제한이 있었어요. 그해가 마지막이었어요.
 
  대중적으로 얼굴을 많이 내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얼굴을 잘 몰랐거든요. 버스를 타고 다닐 정도? 물론 입사 서류에도 산울림 활동 같은 걸 쓰지 않았죠.
 
  식품을 전공했으니 식품연구소(해태제과)에 배치되겠다 생각했어요. 거기 연구실에 친구도 있고 하니까. ‘나인 투 파이브(9 to 5)’로 정시 출·퇴근할 생각이었죠.
 
  한데 수습기간 중 상부에서 부르더군요. 산울림 경력을 알았나 봐요. 대뜸 사표를 쓰라기에 ‘일자리가 필요하다. 절대 중간에 그만두지 않겠다’고 각서 같은 걸 써야만 했어요. 그게 족쇄(足鎖)가 되어서…, 직장 생활이 엄청나게 힘들어도 그냥 다닐 수밖에 없었어요.”
 
 
  해태상사 시절
 
  ― 어떤 일을 했습니까.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해태상사라는 델 가라는 겁니다. 상사(商社)라는 말을 그때 처음 들었어요.”
 
  ― 상사맨이 샐러리맨의 꽃입니다.
 
  “식품을 수출하는 일이었어요. 그 시절, 식품 포장이란 개념도 없었고 유통 단위가 ‘근’ ‘관’ 할 때입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얘기죠.
 
  고추장, 된장, 이런 걸 ‘도라무통’에, 그래요, 드럼통에 담아 주걱으로 떠서 팔 때였어요. 당면, 국수에다 표고버섯 등 별의별 걸 다 수출했어요. 단무지도 하고….”
 
  ― 단무지를 진공포장해서 판 겁니까.
 
  “그땐 진공포장이란 개념이 없을 때였는데 그냥 포장해서 보냈더니 포장지가 터져서 단무지 색이 다 변한 거예요. 포장재를 일본서 수입하려 했는데 수입이 안 돼요. 수출을 위한 건데도 수입 절차가 너무나 까다로워서…. 당시엔 상사 업무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출하는 거였어요. 세상에 없는 물건을 만드는….”
 
  ― 사표를 던질 만했는데, 입사 때 각서가 족쇄가 돼가지고….
 
  “(족쇄가) 되기도 했고 이제 월급의 노예가 되어 묻혀 산 거죠. 그땐 퇴근 시각조차 없었어요. 상사 업무는 해외와의 시차(時差) 때문에 퇴근도 제시간에 못 하는 거야….”
 
  ― 문득 ‘해태 타이거즈’ 구단이 떠오르는데, 그땐 해태가 전성기였죠?
 
  “그렇죠. 당시엔 현대, 삼성과 견줄 수 있는 회사였으니까요. 식품에선 제일제당보다도 컸어요.”
 
  그러던 중, 가수 김완선의 이모이자 매니저인 한백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조카 김완선을 데뷔시켜야 하는데 곡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두어 달 동안 10여 곡을 만들어” 김완선 1집 〈오늘밤〉(1986)과 2집 〈나 홀로 뜰 앞에서〉(1987)가 완성됐다. 화려한 춤과 독특한 음색이 노래와 절묘하게 맞아 공전의 히트를 거듭했다. [2집 앨범의 재판(再版) 과정에서 신중현이 쓴 ‘리듬 속의 그 춤을’이 추가되었다.]
 
  이 앨범을 끝으로 김창훈은 해태상사의 미국 주재원으로 발령이 나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누군지 모르겠다, 신기한 표정, 오묘한 생각’
 
전성기 시절 산울림 삼 형제. 왼쪽부터 김창훈, 김창익, 김창완.
  ― ‘김창훈과 블랙스톤즈’의 1집 타이틀곡 ‘김창완’을 들었는데 가사가 와닿더군요. 정말 노랫말처럼 ‘누군지 모르겠다, 김창완/ 알 수 없는 사람, 김창완/ 신기한 표정, 김창완/ 오묘한 생각, 김창완’인가요?
 
  “형은 저에게 있어 모든 면에서 형입니다. 형보다 나은 동생 없다고 하잖아요. 제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하.”
 
  ‘김창완’의 가사는 이렇다. ‘배우지 않고 배우 하고/ 노래하다 보니 벌써 사십 년/ 다섯 살에 초등학교 일 학년/ 친구보다 두 살 어린 김창완/ 누군지 모르겠다, 김창완/ 괴짜 같은 사람, 김창완/ 자전거로 출근하는 김창완/ 자다 부시시 김창완…’
 
  ― 이 가사에 김창완 대신 김창훈을 집어넣어도 들어맞나요?
 
  “아뇨. 하하.”
 
  ― 왠지 김창훈과 김창완은 음악적 색깔이 다를 것 같아요. 서로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이 있을까요.
 
  “당연히 같음과 다름이 공존하죠. 형의 작품은 저보다 좀 더 자유분방하고 몽환적 분위기의 곡이 많고, 저는 거칠고 좀 더 다양한 장르를 다뤘는데 정답을 찾기 애매모호합니다.”
 
  ― 성격은 어떤가요.
 
  “저는 원래 내성적인 편이었으나 음악과 사회생활을 하며 다소 내성적인 부분이 변화됐고, 형은 저보다 외향적이죠. 술도 저보다 더 세고, 저보다 더 자주 즐깁니다. ‘세다’는 기준은 다음 날 아침 생방송을 하느냐 못 하느냐인데, 저라면 도저히 그렇게 못 하거든요. 하하.”
 
  ― 산울림 시절, 메인보컬을 김창완이 맡게 된 이유는?
 
  “우선, 형이 산울림 음악에 최적화된 보컬이라고 할까? 다른 보컬은 상상이 잘 안 되죠? 반면 베이스는 리듬 악기라 보컬을 겸하기 어렵다는 그런 변명…. 또는 자기 최면에 걸려서, 아… 내성적이기도 해서…. 보컬을 하려면 무대 중심에 서서 조명을 받아야 하잖아요. 하하.”
 
 
  혼돈의 시절
 
김창훈은 산울림에서 깊이 있는 보컬과 베이스 연주를 맡았다.
  ―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산울림의 음악적 지향은 무엇이었습니까.
 
  “100장의 정규 앨범을 내겠다는 목표가 있었어요. 그만큼 다양한 주제와 장르를 소화해낼 수 있는 창작력과 자신감이 충만할 때이기도 했고, 세계적인 밴드가 되겠다는 막연하지만 큰 포부도 있었어요.
 
  더불어 현실적 좌절감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진로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시절이기도 했고요. 군사정권 시절의 가사 검열, 아티스트에 대한 무시와 천대, 군 입대 등등 혼돈의 젊은 시절이었습니다.”
 
  ― 산울림 앨범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은?
 
  “형과 제가 다를 거 같아요. 제 경우는 ‘나 어떡해’ ‘회상’과 ‘독백’을 꼽고 싶고, 형의 경우는 ‘아니 벌써’와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그리고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를 꼽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한국 가요사에 산울림을 대표할 만한 노래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말씀드린 곡에 ‘개구쟁이’와 ‘산할아버지’ 같은 동요가 더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 ‘산할아버지’는 어떻게 해서 탄생하게 되었나요.
 
  “산울림 첫 동요 정규 앨범 〈개구쟁이〉(1978)의 성공에 힘입어 동요 2집을 구상하던 어느 날이었어요. 햇빛이 나지 않는 어느 오후, 골방에 누워 끙끙 골머리를 앓다 불현듯 악상이 떠올라 붓으로 한국화를 순식간에 그리듯, 시(詩)와 곡을 동시에 만들었죠. 가장 짧은 시간 내 완성한 곡 같아요.”
 
 
  “유희적, 無念無想의 음악놀이”
 
  ― 산울림이 한국 가요사에 미친 영향은 뭐라고 보십니까.
 
  “기성세대가 주로 듣던 가요를, 젊은 세대도 즐길 수 있는 문화로 촉발시킨 변곡점이 아닐까요? 우리말 가사의 아름다움을 보다 자유분방하게 시도한 밴드였고, 그 엄혹한 검열의 시대에….
 
  또한 동심을 노래하는 동요 정규 앨범을 시리즈로 낸 점도 빠질 수 없는 점이라고 봅니다. 요약건대 대중음악의 창의적 주제 외에 다양한 장르와 표현 방식을 통해 대중음악의 스펙트럼을 넓힌 점을 평가해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 산울림의 실험정신은 어디에서 출발하고 있나요.
 
  “단순한 유희적 ‘음악놀이’, 기성 유행가(대중음악)에 대한 건강한 반항심, 새로움을 시도하려는 창의적 발상, 그런 것들이 상호 유기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요? 여기에 더해 삼 형제의 자유분방, 무념무상(無念無想)의 단순한 음악놀이가 창의력을 극대화시키고 형제의 DNA가 작용하여 산울림만의 음악을 창조해냈다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 한국 최초의 하드록 밴드라는 평가가 있던데 동의하십니까. 특히 3집(1978) 타이틀곡 ‘내 마음’은 김창훈의 강력한 보컬이 인상적입니다.
 
  “과분한 평가로 생각되나 평단과 후배 뮤지션들의 평가를 부정하거나 폄훼하고 싶진 않습니다.”
 
 
  ‘주단을 깔려면 제대로 깔아야지’
 
TV 연예 프로에 출연한 산울림 삼 형제. 왼쪽부터 김창익, 김창훈, 김창완.
  ― ‘그대는 이미 나’는 19분에 달하는 강렬한 곡이고, 영국 밴드 딥 퍼플이나 블랙 사바스 같은 블루스 록의 냄새도 물씬 납니다.
 
  “삼 형제의 배짱과 패기, 겁 없는 무모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곡이 되었는데 작사와 작곡을 제가 주도하긴 했으나 삼 형제의 공동작품이라 봐야죠. 덧붙이자면, 2집에 실린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처럼 ‘주단을 깔려면 제대로 깔아야지’ 하는 심정으로 ‘우리는 다르게 하자’는 시도들을 많이 한 거죠. 형식과 구성을 파괴하고 3집을 아주 (파괴의) 끝판왕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해보자는 형제들의 어떤 결기가 담긴 앨범이라 보면 됩니다.”
 
  2집에 실린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는 5분57초나 되는 긴 곡인데 전주(前奏)가 3분23초 동안 이어진다. 3집의 ‘내 마음’ ‘아무 말 안 해도’는 아예 전주가 없다.
 
  ― 한국 하드록의 계보를 알려주십시오.
 
  “백두산, 갤럭시 익스프레스, ABTB 등등을 꼽고 싶지만 제가 좀 더 공부한 다음에 말씀드리는 게 좋을 듯합니다.”
 
  ― 8집(1982) 수록곡 중 제가 기억하는 노래는 ‘회상’입니다. 이 노래의 작곡 사연이 궁금합니다. 여러 음악인이 리메이크했는데 제일 좋아하는 버전이 있습니까.
 
  “최신 리메이크 버전 중 하나인 배우 정경호 버전을 꼽고 싶어요. 비워내고 덜어낸 편곡과 편안한 보컬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한국적 문화를 조명해보려 시도”
 
  ― 군 입대 후 2년의 공백기를 거쳐 7집(1981)이 나왔는데 군 시절을 회상하신다면?
 
  “당시 군대 생활은 지금보다 기간도 길었고 개인의 자유가 엄격히 통제되었죠. 지나 보니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상징되던 시기였는데, 군 생활에서 남은 건 오직 ‘독백’입니다.”
 
  ― ‘독백’은 어떻게 해서 만들게 됐나요.
 
  “군 시절, 야간초소에서 근무할 때 삶과 인생을 들여다보며 약 1년에 걸쳐 속으로 흥얼거리며 가사를 다듬고 또 다듬어서 만들어낸 곡입니다. 고독과 허무가 깊게 밴 그런 곡이 되었네요.”
 
  ― 5집(1979)에 담긴 ‘무녀도’에 ‘휘두르는 칼에 악귀가 도망가네/ 남색 두루마기에 너의 염원 싣고/ 쩔렁방울 소리에 잡귀가 물러나네’라는 노랫말이 있더군요. 김동리(金東里·1913~1995년) 선생의 작품 〈무녀도〉를 보면서 곡을 썼나요?
 
  “당시 우리는 한국적인 주제와 전통 가락을 대중음악에 적용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청자’ ‘백자’라는 곡도 있고 그런 선상에서 한국적 문화를 조명해보려는 시도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무녀도’의 경우 조지훈(趙芝薰·1920~1968년) 시인의 ‘승무’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喜悅”
 
산울림 해체 뒤 김창완은 ‘김창완 밴드’로 지금도 열심히 연주 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언제가 음악적으로 전성기라고 할 수 있나요.
 
  “아무래도 첫 번째 전성기는 데뷔 때겠지요. 1집이 1977년 12월에 나오고 이듬해 ‘아니 벌써’가 알려지면서 젊은 층이 환호를 보냈죠. 4개월 만에 2집 앨범을 냈어요. 또 그해 여름 TBC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인 ‘빨간 풍선’(조중환 작사, 김창완 작곡), 동요 1집 작업도 했어요. 겨울에는 캐럴송도 만들었습니다. 참, 제가 만든 ‘나 어떡해’도 그 무렵 유행했지요.
 
  그때는 창작열에 불타서 앨범이 나오자마자 바로 새로운 녹음에 들어갈 정도였어요. 젊은 혈기에, 빨리 앨범을 내고 싶은 열망(熱望)…. 앨범이 나오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고 그 희열(喜悅)이었죠. 당시에 레코드사와 계약도 없었어요.”
 
  ― 계약이 없었다는 의미는?
 
  “그냥 앨범이 나오니까 만족하고…. ‘익사이트(excite·흥분시키다)’되어서 다른 거를 못 본 거죠.
 
  돌이켜보면 1978년 무렵부터 거의 1년 반 사이에 앨범 6장을 녹음한 거예요.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을 거예요. 형제들이 음악을 맹목적으로 좋아했고, 앨범이 나오는 희열에 취해 몰입한 것이죠.”
 
  그리고 입대 전인 1979년 3월 1일 전후로 사흘간 산울림 단독 콘서트가 열렸다.
 
  “그때는 공연을 리사이틀이라 부를 때였는데 저희가 콘서트라는 말을 처음 썼어요. 서울 정동 문화체육관에서 했는데 하루 2차례씩 스트레이트로 6회 공연을 했어요. 문화체육관 수용 인원이 3000명인데 거의 2만 명 가까이가 몰렸죠. 덕수궁 돌담길까지 줄이 이어지고 표를 구하기 위해 텐트를 치고…. 콘서트라는 순수 개념의 공연으로 어찌 보면 최초가 아니었나 생각이 들어요. 더 큰 극장도 없었고.”
 
 
  “20대 후반 음악 생활에 대한 회의 밀려와”
 
  ― ‘청춘’이 실린 7집(1981), ‘회상’이 담긴 8집(1982), ‘웃는 모습으로 간직하고 싶어’가 든 9집(1983)이 나올 때가 음악적으로는 가장 완숙한 시기가 아닐까요?
 
  “1981년 7월에 제대하고 얼마 안 있어 7집 앨범이 나왔어요. 여름에 앨범을 냈는데 그해 연말에 가요대상을 탔으니까 굉장히 성공한 것이죠.”
 
  ‘가지 마오’ ‘독백’ ‘청춘’ ‘회상’ 같은 곡들이 공전의 히트를 이어갔다.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스타덤에 올랐는데, 20대 초반과 상황이 또 다르잖아요. 20대 후반이 되면서 미래에 대한 걱정, 음악 생활에 대한 회의(懷疑)가 밀려오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좀 더 깊은 얘기가 나왔다.
 
  “곡을 만드는데 ‘이건 안 되지. 쓰나 마나 이건 안 될 거야’라는 식의 자기 검열 내지 창작 소재나 모든 게 자꾸 순치(馴致)가 되는 거예요. 또 각자의 고민이… 사회나 집단에서 이탈되고, 낙오자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어딜 가도 기자나 피디들이 반말로 대하니까 우리가 좋아서 (음악을) 하는 건데 이렇게 천대받으며 계속해야 되나 하는…. 그땐 ‘딴따라’라는 말이 완연(宛然)했을 때고 ‘아티스트’로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적 편견, 이런 것도 영향을 미쳤을지 모르죠.”
 
  이후 산울림은 김창완의 ‘원 맨 밴드’가 되었고 동생들은 샐러리맨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시께서 음률을 불러주십니다”
 
음악인 김창훈. 좋은 시를 선정해 곡을 붙여 ‘시 노래’ 500곡을 만들었다.
  ― 먼저 ‘시 노래’ 500곡 완성이 거의 다 됐네요. 축하드립니다. 시인협회에서 공로상을 드려야 할까요? 아니면 김창훈 선생께서 모든 시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할까요? 둘 다겠지요?
 
  “아름다운 시를 세상에 선물해주신 시인들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고 무슨 보상을 기대하고 시작한 작업은 아닙니다. 500곡을 마친 것에 대한 보람으로 만족합니다.”
 
  ―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셨나요.
 
  “제가 식품 유통 분야에서 평생 일한 경험으로 ‘식품노래’를 불렀어요. 전통주(酒) 노래도 하고 고추장, 된장, 라면, 미역국, 보리굴비 등등의 주제로 스토리텔링을 하고 곡을 붙이는 식으로 일주일에 한 곡씩 부르다 보니 70여 개가 넘으니까 고갈이 되는 거예요, 소재가. 한 100개까지는 할 수 있어요.
 
  그런 중, 어느 날 시를 알게 되었고 시의 바다에 빠지게 된 거예요. 우연히 접하게 됐는데 이런 시인도 있고, 저런 시인도 있고….”
 
  ― 하시는 일이 즐겁지요?
 
  “물론입니다. 시는 좋은데 마음에 드는 음률이 나오지 않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참으로 즐거운 작업입니다.”
 
  ― 시를 보면 곡이 떠오릅니까.
 
  “네, 그런 편이죠. 시를 음미하며 잠시 시인으로 빙의(憑依)하면 음률이 떠오릅니다. 필사(筆寫)하면서 바로 떠오르는 경우도 있고 며칠 물끄러미 바라다보면 제게 응답하듯 시께서 음률을 ‘불러주십니다’.”
 
  ― 좀 풀어서 설명해주세요.
 
  “우선 시를 찾아다닌 뒤 느낌이 오는 시를 ‘모시고’ A4용지에 필사를 해요. 시를 음미하다 불현듯 떠오르는 멜로디와 리듬을 채집해 기타 반주로 스마트폰 녹음기에 녹음을 하죠. 이후 단어와 문장에 따라 약간의 퇴고 작업을 거쳐 완성해요. 이후 유튜브 업로드를 위한 촬영을 하고 촬영 전에 오타를 확인합니다. 간혹 촬영 후 오자가 발견되면 재촬영을 해요. ‘시 노래’ 500의 작업은 아날로그 시대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시를 찾아뵙고 시의 오자를 찾아내고 유튜브에 저장하는 일까지 디지털 시대이기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절대로 시 훼손하지 않아”
 
김창훈은 좋은 시를 필사한 후 시가 ‘알려주는’ 음률에 따라 곡을 만든다. 연필로 쓴 시 뭉치가 500장이나 되었다.
  ― 어떤 시인의 시가 제일 많이 노래로 만들어졌습니까.
 
  “많은 시인을 커버하려는 목적으로 처음부터 한 분의 시인에 한 곡의 시 노래로 작업했습니다. 시를 통해 500분의 시인을 만난 셈이죠.”
 
  ― 곡에 맞추려면 아무래도 시를 조금 고쳐야 하지요?
 
  “아닙니다. 절대로 시를 훼손하지 않습니다. 원본 그대로 한 획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100% 그대로 씁니다. 시가 온전히 주인공이며 시인의 분신(分身)과 같은 완전무결한 작품에 음률의 옷을 입히는 것이죠. 시를 임의로 재단해 음률을 입히는 것은 시와 시인께 큰 결례를 범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주인공의 모습과 모양을 훼손하지 않는 원칙을 철저히 지킵니다.”
 
  ― 《월간조선》 독자에게 선생님이 애착하는 시 노래 몇 곡을 추천해주십시오.
 
  “김경린 시인의 ‘어머니의 눈물’,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 이하석 시인의 ‘분홍강’, 조인선 시인의 ‘벙어리 연가’, 고운기 시인의 ‘좋겠다’, 김영춘 시인의 ‘숭어 한 마리’, 한영옥 시인의 ‘애절’, 양애경 시인의 ‘사랑’, 정말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이 중에서 독자들을 위해 정현종의 ‘방문객’을 소개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낼 수 있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 전문

 
  그의 말이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을 시작으로 시 노래를 부르게 되었어요. 시를 접하니 금방 멜로디가 나오는 거예요. 제가 시 세계를 찾아가는 것도, 시 노래를 들으러 오시는 분도 ‘방문객’이 되는 거니까 여러 의미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2021년 5월 23일 유튜브에 첫 곡을 올렸어요. 작곡은 아마 그해 5월 6일인가 그래요.”
 
 
  “혼탁한 세상의 파수꾼 같은…”
 
  ― 친일파 시인과 군사정권에 부역한 시인의 시는 노래로 만들지 않는다고요?
 
  “만들지 않기도 하지만 시를 만나도 음률이 들리지 않아요.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만들려는 의지가 없으니까 그런 거 같기도 하네요.”
 
  ― 일주일에 시 한 편씩 노래로 만드셨다고 했는데 500곡까지 몇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까.
 
  “일주일에 5편을 발표하고 틈나는 대로 만들었는데, 500곡에 꼬박 만 2년이 걸렸네요. 500곡을 다 들으려면 아마 24시간 연속 재생해야 할 겁니다. 시께서 ‘주시는’ 음률에 따라 시와 어울리는 다양한 장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발라드, 록, 랩, R&B, 클래식, 민요, 동요 등등.”
 
  ― 그동안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시를 통해 많은 깨달음과 배움 그리고 후회와 반성을 했습니다. 격언, 명언과 같이 시에는 우리의 심성을 어루만져주고 세상을 풍요롭고 이롭게, 그리고 정화시키는 역할과 기능이 있는 듯합니다. 혼탁한 세상의 파수꾼 같은, 인생의 지침과 교훈과 위로, 사회의 규범과 질서를 보이지 않게 지켜주는, 때로는 준엄하게 꾸짖고, 때로는 따스하게 안아주는 시의 여러 모습을 ‘뵙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시 노래를 통해 시의 소중함과 애정을 갖게 되었어요. 제가 읽은 시들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세상은 넓고 시는 많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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