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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인간탐험

김동호 前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의 영화 같은 인생 이야기

“우연히 찾아온 인생 航路, 내 것으로 만들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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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 직후 공보부 7급 주사로 공직 시작… 문화부 차관으로 마무리
⊙ 최장수 문화공보부 기획관리실장 시절 8년 동안 장관 5명, 차관 6명 거쳐 가
⊙ 영화진흥공사 사장 시절, 국제영화제 경험하며 국내외 영화인 인맥 쌓아
⊙ 부산국제영화제를 아시아 대표 영화제로 키워… 강릉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 다시 맡아
⊙ “문화계를 우파적 또는 좌파적 시각으로 양분해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독자들이 건전한 양식을 갖고 선택해야”

김동호
1937년생. 경기고, 서울대 법대, 한양대 대학원 졸업 / 문화공보부 기획관리실장(8년간 재임), 문화부 차관, 영화진흥공사 사장, 예술의전당 초대 사장, 공연윤리위원장,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역임 /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2005), 프랑스 파리시 훈장(2006),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오피시에(2007), 유네스코 펠리니상(2007),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장(2014), 광화문 문화예술상(2022) 등 수상
사진=조준우
  인생이 그처럼 순탄하게 꽃 피울 수 있다면 좋으련만…. 자신이 주연한 영화 인생은 지금도 진행형이며 생(生)의 엔딩크레딧이 어떻게 올라갈지 아직, 여전히, 도무지 알 수 없다.
 
  김동호(金東虎·85) 부산국제영화제 명예집행위원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국 영화제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는 한때 ‘문화 불모지’로 불리던 부산을 ‘영화의 도시’로 만들더니 몇 년 전 강릉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을 맡아 인구 21만 명의 도시 강릉을 세계 영화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있다.
 
  2021년 10월 22일 개막한 3회 강릉국제영화제 때는 그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릉영화제의 자문위원장인 배우 안성기를 비롯해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시(詩)〉를 만든 이창동 감독, 〈봉오동 전투〉 〈명량〉의 김한민 감독, 〈명왕성〉 〈가족시네마〉의 신수원 감독, 〈집으로〉 〈미술관 동물원〉의 이정향 감독을 비롯해 배우 강수연, 류승룡, 예지원, 오지호, 정우성, 조인성, 기주봉, 오나라, 박명훈, 임원희, 전노민, 한예리 등이 강릉 바닷가(?)에 나타나 현지인들을 흥분시켰다. 모두 ‘김동호 사단’의 쟁쟁한 스타들이었다.
 
  감히 김동호의 ‘공생활’을 두부모 자르듯 양단하면 앞쪽 30년은 공직의 길이요, 뒤쪽 30년은 영화인의 삶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공보부 7급 주사로 시작해 문화부 차관으로 마무리한 길도 부족함이 없고,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아 아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영화제로 키운 열정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진 못했지만 비범한 무엇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난 1월 5일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자택을 찾았다. 놀라운 기억력, 유머를 겸비한 겸손이 밴 말투, 양복이 잘 어울리는 노신사라는 인상이 들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금세 시간이 흘러 하늘이 어둑어둑해졌다. 남한강과 북한강, 경안천이 만나는 곳, 꽁꽁 언 팔당호 위에 아직 녹지 않은 눈 위로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한자리에 앉아 몇 시간을 이야기해도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19명의 해외 유명 영화제 집행위원장 등이 강릉을 찾아
 
2021년 9월 30일 김홍준 예술감독(왼쪽부터), 김동호 ㈔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 조명진 프로그래머가 강원도 강릉시 명주예술마당에서 열린 제3회 강릉국제영화제(GIFF 2021) 기자회견에서 영화제를 소개하고 있다. 10월 22~31일 강릉 일대에서 개최되었다. 사진=뉴시스
  ― 저 강이 북한강인가요, 남한강인가요.
 
  “두 강이 합쳐지는 곳입니다. 저기 보이는 곳이 팔당댐입니다. 저쪽 양수리에서 북한강, 남한강이 합쳐져 이리로 나가죠. (손짓을 하며) 요거는 경안천이라고 (경기도) 광주 시내를 관통하는 개울인데, 그러니까 3개의 물이 합쳐진 곳입니다.”
 
  잠시 강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그윽해 보였다. 기자도, 사진을 찍던 조준우 기자도 잠시나마 강을 바라보았다.
 

  ― 근황이 좀 궁금합니다. 어떻게 지내셨나요.
 
  “3년 전에 강릉국제영화제 창설을 맡아가지고요, 김한근 (강릉)시장이 원래 조직위원장을 맡아 준비하다가 진척이 잘 안 되니까 여기를 한두 번 방문하셔서 부탁을 하더군요. 영화제 개막을 두 달 반 남겨뒀을 때였어요.
 
  할 수 없이 맡아서 김홍준 감독을 예술감독으로 끌어와서 제1회 강릉국제영화제를 창설했어요. 2회 때는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아주 대폭 축소했고 3회 영화제를 (2021년) 지난 10월에 했습니다.
 
  영화제를 준비하느라 쭉 강릉에 있었고요, 영화제가 끝나고도 (강릉에서) 회의 몇 번 하고…, 연말연시 되니까 각종 문화행사들이 많아 여기저기 쫓아다니느라 좀 분주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요즘 거의 매일 서울에 가고 있어요.”
 
  작년 10월 22일부터 31일까지 강릉대도호부 관아(사적 제388호), CGV 강릉, 독립예술극장 신영 등 강릉 일대에서 열린 영화제의 국내외 출품작이 무려 547편에 이르렀다. 조선희 작가, 김태용 영화감독, 이디르 세르긴 아시드 칸 공동위원장 등 국내외 저명한 심사위원단이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세 부문의 작품을 선정해 시상했다. 작품상은 마노 카릴 감독의 〈이웃들〉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감독상은 데네스 나지 감독의 〈내츄럴 라이트〉, 각본상은 카베 마자헤리 감독의 〈보톡스〉가 각각 수상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해외 유명 영화제 집행위원장과 감독 19명이 직접 강릉을 찾았다는 사실이다.
 
 
  강릉과 칸
 
2008년 10월 7일 오후 부산 해운대 그랜드호텔 스카이홀에서 열린 이탈리아 영화감독 파울로 타비아니의 핸드프린팅 행사에서 파울로 타비아니 감독과 김동호 공동 집행위원장(왼쪽)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 제3회 강릉국제영화제와 제3회 부산국제영화제(1998년)를 비교하면 어떤가요.
 
  “부산이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초청하는 쇼케이스적 영화제라고 한다면, 강릉은 문학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을 집중 조명하는, 작지만 특색 있는 영화제로 운영하고 있어요.”
 
  그러더니 “영화와 문학을 결합한 영화제는 아마 강릉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라면서 문학도시 강릉을 말하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신사임당, 율곡 모자가 태어나 활동하신 곳이지요. 율곡 선생이야 학자지만 신사임당은 시와 그림을 다 겸비한 분이고 오히려 문학 쪽에 가깝지요.
 
  그다음에 허난설헌과 허균이 태어나 활동한 역사가 이곳에 있고, 근래에는 대하사극 〈조선왕조 500년〉 등 한국 방송사극의 개척자인 신봉승씨가 태어나 활동했고 조선희 같은 작가도 있지요.”
 
  ― 강릉이 원래 문화적 자부심이 강한 고장으로 알고 있어요.
 
  “그럼요. 강원도라는 명칭이 ‘강릉’과 ‘원주’에서 유래됐으니까요. 영화제 입지는 강릉이 부산보다 훨씬 좋아요. 부산은 인구가 336만 명이고 강릉은 21만 명을 조금 넘는데 산과 바다, 도시가 어우러져 있고 평창동계올림픽을 치르면서 아트센터나 호텔 같은 숙박시설이 많이 생겨 영화제를 집약적으로 치를 수 있어서 굉장히 좋죠. 앞으로 시민축제로 만들 생각입니다.”
 
  그러고 보니 매해 5월마다 칸국제영화제가 열리는 프랑스 남쪽,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작은 도시 칸은 인구가 7만 명밖에 안 되는 작은 도시다. 그러나 작열하는 햇살만큼이나 영화에 대한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는 곳이다. 해마다 세계 각처에서 몰려든 영화인과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먼 미래에 강릉이 칸처럼 될 수 있을까.
 
  김동호 위원장은 부산국제영화제를 이끌면서 전 세계 영화제의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아 많게는 1년에 24차례, 적게는 10차례 이상 해외를 누볐다. 영화제를 다니며 수많은 영화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 만났던 인연들을 강릉으로 모셔오고 있어요. 사실, 전 세계 영화제 집행위원장들이 한데 모여 그들이 안고 있는 과제나 미래의 방향에 대해 논의할 기회가 전혀 없어요. 그래서 영화제 집행위원장 10여 명을 다 모아서….”
 
김동호 위원장이 선정한 ‘한국 영화 걸작 10편’
 
  1. 하녀    1960년 작, 김기영 감독, 김진규·이은심 주연
  2. 갯마을    1965년 작, 김수용 감독, 고은아·신영균 주연
  3. 만추    1966년 작, 이만희 감독, 문정숙·신성일 주연
  4. 내시    1968년 작, 신상옥 감독, 신성일·윤정희 주연
  5. 피막    1980년 작, 이두용 감독, 원미경·신일룡 주연
  6. 만다라    1981년 작, 임권택 감독, 안성기·전무송 주연
  7. 생활의 발견    2002년 작, 홍상수 감독, 김상경·추상미·예지원 주연
  8. 살인의 추억    2003년 작, 봉준호 감독, 송강호·김상경 주연
  9. 마더    2009년 작, 봉준호 감독, 김혜자·원빈 주연
  10. 시    2010년 작, 이창동 감독, 윤정희·김희라 주연

 
  “코로나19로 빼앗긴 관객, 돌아온다고 봅니다”
 
  ― 그분들을 강릉으로 불러 모은다고요?
 
  “네. 1회 때는 도쿄, 홍콩,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뉴욕, 콜롬비아 이런 데서 영화제를 이끄는 집행위원장들이 참석해 〈지나간 20년, 앞으로 다가올 80년〉에 관한 영화 이야기들을 나누었죠.
 
  2회 때는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모이지 못하니까 35년간 토론토영화제를 이끈 피어스 핸드링 명예회장에게 ‘팬데믹 이후의 영화제 방향’을 주제로 기조 강연을 부탁해 미리 녹화했다가 베를린을 포함해 여러 영화제 집행위원장들에게 보내 자기 의견을 영상으로 만들게 했죠.
 
  그 내용을 중심으로 국내 6개 영화제 집행위원장들을 무대로 불러 서로 토론하는 자리를 만들었어요.
 
  3회 때는 팬데믹 상황이었지만 바냐 칼루제르치치 로테르담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비롯해 9명의 해외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강릉을 찾았어요. 코로나19 이후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곳이 극장이니까 〈당신은 여전히 영화(관)를 믿는가?(Do you still believe in Cinema?)〉를 주제로 바냐 위원장이 기조 강연을 하고 토론했어요.”
 
  ― 김 위원장께서는 영화관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나요.
 
  “통계를 보면 2019년 한국 영화 관람객이 2억1000만 명이거든요. 그런데 코로나19가 시작된 2020년 5000만 명으로 4분의 1로 줄었어요. 2021년 상반기와 2020년 상반기를 비교하면, 2020년보다 오히려 2021년이 더 줄었어요.
 
  극장이 그만큼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고, 넷플릭스와 왓챠 같은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기술을 통한 영화 관객들이 확 늘어났죠. 어떻게 보면 극장 관객을 온라인 쪽에 뺏겼고 일부에선 그 빼앗긴 관객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하고 고민이 많은데 저는 80% 정도는 다시 돌아온다고 봅니다.”
 
 
  극장에서 관객과 만나야 한다
 
  ― 낙관적으로 전망하는 이유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유럽의 영화제 집행위원장들이나 동남아시아의 집행위원장들도 대체로 그렇게 보더라고요. 지금은 세계 영화제들이 대부분 온라인으로 상영하지만 단점이 분명 있어요. 온라인의 경우 아무리 제한적인 장치를 해도 불법복사에 노출되기에 대작(大作) 영화를 만드는 이들은 온라인 상영을 바라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다 보면 온라인에 올리는 신작(新作) 편수가 줄어들고 제한적이게 됩니다.
 
  칸영화제나 베니스영화제는 오프라인으로 상영하고 있어요. 대표적인 두 영화제가 ‘극장에서 관객과 만나야 한다’는 기조를 갖고 있고 저 역시 그 기조에 공감합니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영화관도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도록 환경 개선도 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야죠.”
 
  ― 요즘도 직접 영화관을 찾나요.
 
  “신작을 챙겨 보는 편입니다. 어제도 영화관에 갔어요. 칸영화제 각본상과 뉴욕 비평가협회상(작품상)을 수상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Drive My Car)〉를 이수역 근처에 있는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봤어요. 또 도빌아메리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퍼스트 카우(First Cow)〉라는 작품도 봤는데 관객들이 극장에 꽤 있었어요.”
 
  ― 젊은 사람이 많던가요.
 
  “네.”
 
 
  우연한 기회에 찾아온 필연들…
 
사진 왼쪽은 경기고 동창들. 뒷줄 맨 오른쪽이 김동호. 그의 바로 앞이 고건 전 총리다. 오른쪽 사진은 고교 시절 교복을 입은 김동호(맨 왼쪽).
  ― 어젯밤 꿈을 꿨는데 김 위원장을 인터뷰하는 꿈을 꿨어요. 긴장이 좀 됐던 모양입니다.
 
  “영광입니다.”
 
  ― 꿈에서 뭘 질문드렸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성공한 삶을 위해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가’를 질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노력, 자질, 인내 등등의 덕목 말이에요.
 
  “글쎄요, 저는 대인 관계에서 친화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죠. 국제영화제를 하다 보면 해외에서 많은 사람을 끌어와야 하고, 관객이 좋아하는 영화, 그 영화의 감독, 배우들을 직접 데려와야 영화제 위상을 높일 수 있지요. 그런데 서로 적대관계인 영화인들도 많거든요.”
 
  ― 그렇습니까?
 
  “특히 영화 쪽에서 그렇지만, 다른 예술 분야도 다 그런 것 같아요. 개성이 다들 강하니까 서로 적대관계거나 애증관계가 많아요. 두 사람을 다 친구로 끌어오려면 진지하면서도 친화적인 노력이 좀 필요합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우연’을 이야기했다.
 
  “어떻게 보면 공직 30년, 영화계에서 30년을 보냈는데, 그 계기들이 다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어요. 우연한 기회에 어쩌다가 공무원이 됐고, 어쩌다가 영화인이 됐거든요.
 
  우연히 찾아온 (인생) 항로(航路)를 내 것으로 만드는 최선의 노력…. 그런 것이 성공의 요인이 아닌가 생각해요. 긴 삶을 살다 보면 우연한 기회들이 항상 찾아오게 돼 있죠. 자기 환경이 우연하게 바뀔 때도 많이 있고 그때마다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김동호 위원장에 대한 배경설명을 덧붙이면 이렇다. 강원도 홍천 출신인 그는 경기중학교에 입학하고 25일 만에 6·25가 발발했다. 부산에서 피란 생활을 했는데 보수동 사거리에 좌판을 펼쳐놓고 담배와 초콜릿 등을 떼다가 팔았다. 또 “과외교습 등으로 학비를 벌어 간신히 입에 풀질하며 학교를 다녔지만” 법률서적은 거의 사보지 못했다고 한다.
 
  5·16 직후였던 1961년, 그의 나이 25세에 시작된 공무원 생활은 공보부 말단 7급 주사보부터였다. 총무처 공개 승진시험을 통해 1965년 사무관으로 승진한 것을 시작으로 32세에 서기관, 35세에 부이사관 등 승진을 거듭했다.
 
  “5·16 직후인 그해 9월 대학을 졸업했는데 당장 직장을 구해야 했어요. 제일 먼저 공채한 곳이 공보부였어요. 공보부로 간 인연이 지금까지 영화 쪽 일을 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죠.
 
  당시 공보부 다음에 은행에서 채용공고가 났는데 많은 친구가 은행에 입사했거든요. 저도 공보부 공고가 없었다면 아마 은행에 취직하지 않았을까….”
 
 
  문화공보부 시절
 
문화공보부 보도국장 시절 김동호의 모습이 담긴 감사패.
  ― 역대 문화부 수장(首長) 중에 명(名)장관으로 생각하는 분이 있나요.
 
  “저는 윤주영(尹胄榮) 장관을 곁에서 모셨는데 저의 멘토라고 할 수 있어요. 1971년 대선이 끝나고 그해 6월 청와대 대변인에서 문화공보부 장관으로 부임하셨죠. 1974년 9월까지 3년 3개월 재임하셨는데 저는 국내 홍보를 총괄하는 국내과 과장(서기관)을 맡고 있었어요.
 
  업무보고를 한 뒤 곧바로 월남전 시찰을 다녀왔는데 그해 8월쯤 저를 불러 ‘국정지표 중 하나가 문화예술 창달인데 문화과장으로 옮겨서 문화예술 장기계획을 세워보라’고 하시더군요.
 
  그때까지만 해도 문화예술의 장기계획이 뭔지 듣도 보도 못할 때였어요. 급히 각 신문·방송·통신사 문화부장, 문화담당 논설위원, 주필 그리고 문화예술계 인사 700명의 리스트를 만들어 우편조사를 했어요. ‘문화예술 장기계획을 세우려는데 꼭 들어가야 할 부문이 무엇이냐’고 물었죠. 그리고 예용해(芮庸海)·곽종원(郭鍾元)·박종홍(朴鍾鴻)씨 등 문화계 인사들을 직접 뵙고 의견을 구했어요.
 
  마침 유네스코에서 각국의 문화정책에 관한 핸드북이 간행될 때였는데 긴급 입수해서 제1차 문화예술 진흥 5개년 계획을 만들었어요. 문화예술진흥원을 창설하고, 문화예술진흥법도 만들고, 진흥원 기금으로 극장 모금 제도도 만들고…. 해외에서 하는 문화예술 정책을 베낀 거죠. 하하하.
 
  그 무렵 각 부처에 비상계획관이란 자리가 만들어졌는데 대개 예비역 장성이나 예비역 대령들이 위인설관(爲人設官)식으로 임명되던 시기였어요. 마침 문화공보부 비상계획관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자 윤 장관이 저더러 별정직인 비상계획관을 맡아 같이 일하자고 하셔서 사표를 내고 별정직 부이사관이 됐죠. 일반 사병 출신으로 처음으로 비상계획관이 됐어요. 공직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주로 사무실보다 여관에서 일을 더 많이 했죠. 그러다가 다시 총무처가 시행한 서기관 복직 시험을 봐서 1973년 문화공보부 문화예술진흥관(부이사관)이 됐고, 그다음에 문화국장, 언론 담당 주무국장인 보도국장 겸 대변인(이사관)이 되었어요.
 
  윤 장관 재임 3년 3개월 동안 제 자리가 다섯 번 이상 바뀌면서 물론 승진도 했지만 엄청나게 일이 많았죠.”
 
  문화공보부 산하 국영 중앙방송국이 현재의 한국방송공사(KBS)로 개편해 공영방송을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영화법에 따라 영화진흥공사가 1973년 4월 설립됐고, 해외 홍보 업무를 총괄하는 문화공보부 산하 해외홍보원이 1971년 12월 발족됐다.
 
 
  전두환 정권이어서 가능했던 문화예술 정책들
 
1997년 9월 19일 서울 힐튼호텔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최 보고회. (사진 왼쪽부터) 김허남·임진출·김형오 의원, 배우 정선경, 문정수 부산시장, 유현목 감독, 김동호 집행위원장. 사진=조선DB
  전두환 정권 때 그는 문화공보부 기획관리실장을 8년 동안 맡았다. 그사이에 장관과 차관 11명이 바뀌었다고 한다.
 
  “보통 장관이 새로 부임하면 기획관리실장은 바뀌기 마련인데 최장수 실장을 한 셈이에요. 그런데 이광표(李光杓), 이진희(李振羲), 이원홍(李元洪), 이웅희(李雄熙), 정한모(鄭漢模)… 다섯 분의 장관을 모실 동안 장관급 이상의 차관들이 오셨어요.
 
  김은호(金恩昊), 허문도(許文道), 박현태(朴鉉兌), 김윤환(金潤煥), 최창윤(崔昌潤), 강용식(康容植) 같은 쟁쟁한 분들이 차관으로 오시니 제가 올라갈 여지가 전혀 없던 것이죠. 하하하.”
 
  그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장관도 개성이 강한데 차관들도 다 개성이 강했고 장관과 차관 사이가 썩 좋지 않아서 제가 조정 역할을 많이 했죠.”
 

  ― 전두환 정권 시절, 문화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대개 부정적인 평가가 많지만 저는 긍정 평가할 부분이 꽤 많다고 봐요. 특히 문화예술 분야에서 그렇습니다. 기획관리실장 8년 동안 독립기념관, 예술의전당, 국립현대미술관, 국악당 같은 문화 시설들이 기획에서 준공까지 다 이뤄졌거든요.
 
  어떻게 생각하면 전두환 정권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몰라요. 아, 국립중앙박물관이 지금의 민속박물관 자리에 있다가 1986년 구 중앙청 건물을 개수하여 이전 및 개관했고 이후 2005년 용산 미군 헬기장 철수로 다시 옮겨가게 됐어요.”
 
  ― ‘전두환 정권이었기에 가능했던 문화예술 정책’이 뭔가요.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을 하면서 제일 먼저 한국방송광고공사를 만들었습니다. 광고의 일정 비율을 수수료로 떼어서 공익자금을 만들어 언론인 복지향상이나 언론단체를 지원하기 위해 만든 제도였거든요. 예술의전당도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대형 문화예술기관이 필요해 만들었는데 정부 예산으로 다 지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관련법을 고쳐 방송광고공사에서 일부 공익자금을 떼어 예술의전당을 건립할 수 있게 한 것도 전두환 정권 때였어요.”
 
 
  이어령 장관과의 인연
 
  ― 초대 문화부 장관인 이어령(李御寧) 장관과는 직접 인연이 없었나요.
 
  “이어령 장관이 계실 때 저는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있었어요. 워낙 아이디어나 문화에 대한 열정이 엄청나고 탁월하신 분이셨어요. 기억에 남는 것은 장관 재직하실 때 한국예술종합학교 설치령을 만드셨어요. 특수대학교는 교육부가 관장하는데 문화부 지휘를 받는 산하기관으로 한예종의 설립 근거를 만든 셈이죠.
 
  당시 얘기를 들어보면, 국무회의에서 굉장히 강력하게 주장하셔서 소위 영재 예술인 양성을 위해 한예종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장관이 퇴임한 후인 1992년 4월, 제가 2대 문화부 차관에 부임했는데 그해 9월 한예종 개원을 앞두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것도 안 돼 있던 상태였어요.
 
  한예종 음악원이라도 먼저 설립해야겠다고 생각해서 김영미(金英美), 이강숙(李康淑), 김남윤(金南潤) 등 관련 교수를 모셔오고, 총무처를 통해 직제와 정원을 확충했으며 예산을 확보하는 등 개원 때까지 뒤처리를 해놨어요.”
 
  김 위원장이 영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88년 문화공보부 기획관리실장에서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다. 당시 영화진흥공사는 퇴직 장성들의 단골 발령처였다고 한다.
 
  “영화진흥공사가 1973년 처음 생겼는데 초대 사장을 제외하고 줄곧 육군 정훈감 출신이 사장으로 갔었거든요. 기획관리실장으로 8년을 일하다가 옷을 벗었는데 그때 영화진흥공사 사장 자리가 공석이었어요. 그래서 가게 됐죠. 영화감독협회 같은 곳에서 취임 반대성명도 내고, 일부는 면전에서 당장 그만두라고….”
 
 
  영화진흥공사 사장 시절
 
1988년 영화 〈아다다〉로 몬트리올국제영화제에 참가한 배우 신혜수, 김동호 위원장, 임권택 감독. 사진=부산국제영화제 제공
  ― 낙하산이라고?
 
  “그런 셈이죠. 자주 만나던 시나리오 작가도 저더러 당장 사표 내라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래도 기왕 맡았으니까 저 자신이 영화인이 돼야겠다고 생각해 최선을 다하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훗날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도 할 수 있었던 거지요.”
 
  밤낮없이 영화인을 만나 영화계 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대학 입시생처럼 영화 공부를 시작했다. 학창 시절 가난해 영화 한 편 보지 못했고 공직에 있을 때는 너무 바빠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공사 사장이 된 뒤 연간 100편 이상의 영화를 보는 영화광이 되었다.
 
  경기도 남양주에 45만 평의 종합촬영소가 들어선 것도 그의 사장 시절이다. 당시 남한강상수도핵심권역으로 지정돼 지을 수 없게 되자, 그는 주무부처 장(長)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현지 주민들을 일일이 만나 소주를 마시며 설득했고 이어, 군청-군수-경기도 18개과-경기도지사-건설부-농림수산부까지 아래에서 위로 설득해 결국 허가를 받아낸 일화는 유명하다.
 
  “4년간 사장으로 일하고 물러날 때 취임 반대성명을 냈던 영화인들이 공로상을 주는데 그땐 정말 가슴이 뭉클했어요.”
 
  ― 영화진흥공사 사장 시절, 국제영화제를 경험한 것도 훗날 큰 도움이 됐다면서요.
 
  당시만 해도 국제영화제 참석을 어려워했던 영화인들을 이끌고 직접 몬트리올영화제(1988)와 모스크바영화제(1989)에 참석했다. 그런 인연으로 해외 영화계 인사들과 친할 수 있었고 한국 영화의 해외 진출을 위한 단초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더욱이 몬트리올영화제에서 영화 〈아다다〉로 신혜수가 여우주연상을,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강수연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도 직접 경험했다.
 
  “1988년 제가 사장으로 부임했잖아요. 한 해 전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가 베니스국제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올라갔는데 여우주연을 맡았던 배우 강수연씨는 그런 사실조차 몰랐다는 겁니다.
 
  어쨌거나 임 감독과 영화진흥공사의 전문위원 한 사람이 베니스에 가긴 갔어요. 그런데 임 감독이 거기서 홀대받는 느낌이 들어서인지 ‘약속이 있다’며 도중에 가버렸다고 해요.”
 
  ― 영화제 도중에요?
 
  “네. 훗날 그 이야기를 듣고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사장이 되고 그해 8월 몬트리올영화제가 열렸는데 영화 〈아다다〉가 경쟁부문에 올랐다고 해요. 조금만 분위기를 조성하면 수상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해서 대표단을 꾸리기로 했죠.
 
  임 감독한테 전화했더니 ‘뭐 하러 가느냐’고 해요. ‘사장이 새로 와서 영화제 구경하러 가는 거 아니냐. 안 간다’는 겁니다. 여우주연을 맡았던 신혜수씨에게 가자고 했더니 ‘드라마를 찍고 있어서 안 된다’는 겁니다.”
 
 
  해외 영화제 집행위원장을 知韓派로 만들다
 
2010년 10월 12일 밤 열린 부산영화제 파티에서 ‘막춤’을 추고 난 후 프랑스 배우 줄리엣 비노쉬가 김동호 집행위원장의 뺨에 입을 맞추고 있다. 왼쪽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은 티에리 프레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 사진=조선DB
  방송사에다 부탁해 드라마 촬영 일정을 앞뒤로 조정하고 〈아다다〉를 만든 영화제작사 사장을 설득해 억지로 데려갔다. 공교롭게도 박수길(朴銖吉) 주(駐)캐나다 대사와 평소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박 대사에게 ‘몬트리올에서 한국의 밤 행사를 주관하고, 영화제 집행위원장과 부위원장에게 밥도 좀 사시라’고 부탁했어요. 또 몬트리올에 있는 한인교회 목사 8분에게 전화를 걸어 관객 동원을 부탁했어요. ‘영화표는 어떻게 하느냐’고 하기에 ‘제 주머니를 털어서라도 표를 끊겠으니 걱정 말라’고 했죠. 영화도 좋았지만 결국 여우주연상을 받았어요.
 
  이듬해 모스크바영화제 때는 대규모 대표단을 꾸려서 갔어요. 소련과 국교를 수립하기 전이어서 일본에 가서 비자를 받아 모스크바로 향했죠.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강수연씨가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며 세계적 배우로 발돋움할 수 있었어요.
 
  그걸 계기로 한국 영화 8편을 들고 배우 김지미·윤일봉과 함께 우즈벡, 카자흐스탄, 헝가리 등지를 순회하고 돌아왔죠. 1990년에 다시 배우 정윤희, 정진우·강대성 감독 등과 함께 러시아, 우즈벡, 카자흐스탄 한 바퀴를 돌았고 임권택 감독이랑 루마니아에 가서 우리 영화를 순회 상영했지요.”
 
  ― 국제영화제가 뭔지, 현장에 가는 게 중요한지 직접 체험한 것이네요.
 
  “그럼요.”
 
  ― 부산국제영화제가 성공한 것도 그런 경험이 작용한 것이지요?
 
  “그런 경험과 당시 구축했던 인맥을 총동원해 부산으로 오게 만들었죠. 또 영화진흥공사 사장 시절, 한국 영화를 보기 위해 내한한 각국 해외영화제 집행위원장들과 인연을 맺었어요. 그분들에게 점심이나 저녁을 사주고 2차로 데려가 폭탄주를 마시게 하고….”
 
  ― 한국식 폭탄주로?
 
  “네. 그렇게 친교를 맺어 지한파(知韓派)로 만든 거지요.”
 
 
  ‘꺼진 불도 다시 보자’
 
2008년 11월 20일 여의도 KBS홀에서 열린 제29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김동호 심사위원장과 배우 김윤진이 신인감독상을 시상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사진=스포츠조선 제공
  ―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연임했죠?
 
  “1년 연임해가지고 4년째 하고 있는데 이수정(李秀正) 문화부 장관이 새로 부임했어요. 《한국일보》 출신의 이 장관은 4·19 선언문의 초안을 잡았을 정도로 머리가 굉장히 좋은 분인데, 윤주영 장관이 계실 때 장관 비서관으로 브레인 역할을 했기에 같이 일을 많이 해서 잘 알았어요.
 
  당시 예술의전당이 전관 개관을 앞두고 있어서 ‘어떻게 운영했으면 좋겠느냐’고 묻기에 제 생각을 쭉 이야기했죠. 얼마 후 ‘초대 예술의전당 사장을 맡아 달라’고 해서 옮겨가게 됐습니다. 두 달 후에 아예 ‘차관으로 들어와서 같이 일 좀 하자’고 해서 다시 문화부로 들어가게 됐어요.”
 
  ― 보통 그런 경우가 없잖아요.
 
  “없죠. 간혹 경제부처 쪽은 (외청으로) 나갔다가 들어오는 경우는 더러 있지만 일반 부처는 거의 유일했어요. 차관 발령이 나니까 모 신문에서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제목으로 기사를 썼더라고요. 하하하. 차관으로 10개월 조금 더 일하다가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당시 공석이던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으로 갔죠.”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1993년 3월 문화부 차관에서 물러나 공윤위(현 영상물등급위) 위원장에 선임됐다. 만 2년 근무하고 ‘타의 반, 자의 반’ 사표를 썼다. 1995년 2월이었다. 당시 개봉한 영화 〈쇼군 마에다〉와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내추럴 본 킬러〉가 화근이 됐다.
 
  “당시 신문 사회면에 ‘위장 일본 영화를 공윤위가 허가했다’는 기사가 크게 났어요. 문화체육부가 〈쇼군 마에다〉는 미국 영화라는 유권해석을 공문으로 통보해 와서 수입심의를 통과시켰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영화 자체도 시원찮은 영화였어요. 일본 사무라이가 스페인 배 한 척을 사가지고 오는 영화인데 미국 제작사가 만들고 미국 배우가 주연했지만 배경이 일본이었어요.
 
  그런데 그다음 주 월요일, 다른 일간지에서 ‘폭력영화 〈내추럴 본 킬러〉가 공윤위를 통과했다’는 기사가 다시 나왔어요. 나중 이야기를 들어보니 청와대의 관여가 있었던 것 같아요. 문체부에서 공윤위 쪽에다 책임을 전가할 기류가 있어서 저는 바로 사표를 내고 그만뒀죠.”
 
  ― 바로 사표가 수리되던가요.
 
  “그럼요.”
 
  1995년 3월 4일 자 《조선일보》 1면 하단 ‘만물상(萬物相)’ 코너에 이런 글이 실렸다.
 
  〈최근 일본 영화색 영화와 폭력영화 수입 허용과 관련한 일부 여론의 공륜(公倫) 비판과 관련해서 김동호 공연윤리위원장이 갑자기 문체부에 사표를 내고 곧바로 물러났다고 한다. 그렇지만 공윤의 책임자가 원칙을 저버리거나 월권을 한 일이 없는데도 일부 여론 때문에 책임을 지고 쉽게 물러난다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다. (중략) 올리버 스톤 감독의 수준 높은 영화를 알아준 죄로 공윤 위원장이 쫓겨났다면 세계 사람들이 웃을까 걱정이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성공한 이유
 
  그가 공연윤리위원장에서 물러나 쉬고 있던 1995년 3가지 제의가 동시에 들어왔다. 부산 동신대 객원교수, 케이블TV 사장,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등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 탄생은 당시 김지석 부산문화예술대 교수, 이용관 경성대 교수, 영화평론가 전양준씨 등 영화계의 젊은 영화인들이 김동호를 찾아가면서 시작된다. 그는 “젊은 사람들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관심도 있었고, 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외국에 갔을 때 “너희 나라엔 왜 국제영화제가 없느냐”는 질문을 받은 기억도 떠올랐다.
 
  ― 부산국제영화제의 대(大)성공이 부산이라는 도시적 특징, 부산 시민의 기질이 작용했다고 보시나요.
 
  “물론이죠. 영화제를 부산에서 시작할 때만 해도 ‘부산이 문화의 불모지’라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어요. 극장 관객이 전국 평균에서 좀 떨어졌고, 공연도 부산에 와서 성공을 잘 못 했대요. 오히려 대구는 잘되어서 공연단이 대구까지 왔다가 부산은 안 가고….
 
  부산국제영화제는 매스컴에서 굉장히 열정적으로 지원을 많이 했어요. 부산 남포동 일대에 젊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들면서 축제 분위기가 형성됐고 부산 시민들의 열정이 크게 뒷받침됐다고 봐야죠. 부산 사람들이 다혈질이고 굉장히 직선적인데 그런 면에서 한 번 불붙으면 팍 일어날 정도로….”
 
  김 위원장이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릴 때마다 퀵 서비스 오토바이 신세를 진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초창기에 전용차량도 없이 영화가 상영되는 부산 남포동 극장가에서 해운대 수영만, 부산전시컨벤션센터까지, 심지어 뒤풀이가 잦은 해운대호텔 행사장까지 달려가 국내외 영화인들, 언론인들과 만나 술로 우애를 다졌다.
 
  ― 부산국제영화제가 성공한 뒤 국내 영화제가 꽤 많이 생겨났던데요.
 
  “부산 다음으로 부천에서 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생겼고 그다음에 전주국제영화제가 생겼어요. 광주는 생겼다가 없어졌고 그다음에 제천음악영화제 생기고, 서울여성영화제 생기고, 그러면서 거의 시군마다 하나씩 생겼어요. 강원도에도 속초장애인국제영화제가 있고, 평창평화영화제가 있는데 지자체마다 다양한 색깔의 영화제가 생기면 지역민이 새로운 영상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요. 지자체를 대외 알릴 수 있는 좋은 홍보수단이긴 하지만 그만큼의 재원을 들여가면서 상응하는 홍보효과를 얻을 수 있느냐는 심각하게 고려해볼 사항도 있어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영화제가 성공하려면 저마다의 어떤 정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획일적으로 영화제가 이루어져서는 성공하기가 어렵죠. 또 영화제가 지속되려면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영화제가 되어야 합니다. 고용이나 관광 등 부가가치 창출에 기여해야 롱런할 수 있어요.”
 
 
  부산에서 정치인이 푸대접받은 이유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7월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문화융성위원회 제1차 회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성녀 위원, 김동호 위원장, 박 대통령, 한복려 위원, 안성기 위원. 사진=문화체육관광부 제공
  ―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 비결로 정치인들을 내세우지 않고 정치적 외풍 같은 영화검열에서 자유로웠던 점도 빼놓을 수 없겠죠.
 
  “1회 영화제(1996년) 때 중국 장위엔 감독의 독립영화 〈동궁서궁〉을 중국 정부가 인정을 안 했거든요. 인정을 안 하니까 장 감독이 프랑스 파리에서 직접 영화를 갖고 와서 부산에서 틀었어요. 그다음에 열린 밴쿠버영화제에서 상도 받았는데 이후 중국 정부에 밉보여서 3년 동안 중국에 못 들어갔어요.
 
  2회 때는 왕자웨이 감독의 작품을 개막작으로 선정했는데 중국에서 틀지 못하게 무언의 압력을 굉장히 많이 집어넣어 개막식 직전까지도 불안정한 상태였다가 겨우 설득해 틀었죠. 중국 측에서 ‘앞으로는 자기네가 선정하는 영화만 가져다가 상영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그건 아니죠.”
 
  ― 부산국제영화제는 부산시장의 개막 선언 외에 어떤 정치인도 인사말을 못 하게 했다던데….
 
  “칸국제영화제가 50주년이 됐을 때, 그게 1997년인데 문화부 장관 또는 대통령이 영화제 개막식에 와도 소개조차 안 하고 그냥 진행을 하거든요. 체코의 카를로비바리국제영화제는 동구권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영화제지만 대통령이 개막식에 조용히 왔다가 영화만 보고 조용히 가요. 그게 영화를 좋아하는 집권자 또는 정치인들의 모습이라고 보죠.
 
  부산국제영화제 때 김영삼 대통령의 영상 축하 메시지를 들고 장관이 내려왔지만 축사를 못 하게 했고, 국회의원 축사도 완전히 배제했죠. 그랬더니 다음에는 차관이 내려왔지만 아무 역할이 없으니까 안 오고….
 
  2회 부산영화제가 열린 1997년 12월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당 의원들과 대거 개막식에 참석했어요. 미리 ‘입장하실 때 소개가 없고, 축사도 없다’고 얘기했는데 김한길 의원이 와서 ‘김형, 이럴 수 있느냐.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오셨으면 소개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하기에 ‘그런 거 없기로 했지 않느냐’고 하는 사이에 개막식이 진행됐고 영화 상영할 때 다들 서울로 올라갔어요.
 
  또 여당 후보였던 이회창 후보가 부산 남포동에 갔어요. 젊은 관객들이 운집한 야외무대에서 배우와 감독들이 토크 쇼를 하는 자리를 찾아간 겁니다. 이 후보가 잠시 무대 위로 올라가 인사하겠다는 것도 막았거든요. 여야로부터 지탄을 엄청나게 받았지만 이 일로 정치인이건 장관이건 누구든지 부산에 오면 연설 기회가 없다는 건 아주 확실해졌지요.
 
  강릉국제영화제도 처음부터 ‘저나 시장님(김한근)은 무대에 올라가실 기회가 없다’고 딱 선언을 했어요.”
 
 
  국내 영화계의 편향 논란
 

  ― 시장 입장에선 좀 섭섭할 수도….
 
  “아쉽지만 문화행사를 좀 키우기 위해서는 참아야 되겠죠.”
 
  ― 정치적인 외풍이 논란이 되기도 했지요?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이빙 벨〉이 대표적인 경우잖아요.
 
  2014년 부산시가 주최 측에 세월호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다이빙 벨〉의 상영을 취소하라는 압력을 넣으면서 논란은 시작됐다. 부산시는 영화의 상영을 강행한 당시 이용관 집행위원장에 대한 조치로 영화제의 예산을 삭감하고, 이 위원장에게 사퇴를 종용하면서 논란이 빚어졌다.
 
  “제가 명예집행위원장 시절에 〈다이빙 벨〉 사건이 일어났어요. 저는 서병수 시장에게 ‘영화를 틀지 못하게 막지 말라’고 했지만 (서 시장은) ‘영화제 조직위원장 자격으로 못 틀게 하겠다’는 입장이었고 그 배경은 아마 청와대에서도 강력하게 밀어붙였던 것 같아요.
 
  원칙적으로 영화제가 선정한 영화를 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말이 안 되고, 어떤 영화든지 압력이 있더라도 틀어야지만 영화제가 생명력이 있다고 봅니다.”
 
  ― 최근 jtbc 드라마 〈설강화〉를 두고 청와대에 방영 중단 청원이 많았다고 합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정치적 외압은 지금도 있어요.
 
  “두 가지 관점에서 봐야 해요. 원칙적으로 방송사든 신문사든 법령에 위반되지 않는 한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야 합니다. 대신 자체 심의를 통해서 판단을 잘 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 우파적인 시각에서 보면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거나 그런 입장에 선 영화를 찾아보기 어렵게 됐어요. 반면 좌파 영화계 인사들 다수가 문화계를 좌지우지한다는 시각도 있지요.
 
  “저는 문화계 현상을 우파적 시각 또는 좌파적 시각으로 양분해서 보는 것은 좀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봐요. 기본적으로 표현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고 있는 상황에서, 좌파적인 시각에서 볼 수 있는 영화나 문화 콘텐츠들이, 또는 우파적인 시각에 치우친 콘텐츠들이 나올 수는 있죠. 특히 선거를 전후해 홍수처럼 쏟아져나올 수 있는데, 국민들이 선별 안(眼)을 갖고 판단하고 선택할 문제라고 보죠.
 
  국민들이 좌우 이념에 쏠리지 않고 건전한 양식을 갖고, 자기들이 선택해 보거나 또는 소유하거나 하는 기준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요. 이런 시기일수록….”
 
  ― 우리가 분단국가라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지요.
 
  “물론이죠.”
 
  ― 예술 하는 분들의 기본적인 시각이 (세상을 바라보는) 비판적인 시각에서 출발하지만 그렇다고 북한 체제를 동조하거나 보수 정부의 부족한 점을 너무 부각시키면 편향성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요.
 
  “최근 제주 4·3사건(항쟁)을 다룬 연극이나 발레공연 등을 봤는데 우파적인 시각에서 만든 작품은 거의 없더군요. 사실은 아주 정확한 역사적인 배경을 토대로 작품이 만들어져야 하지만 어떤 면에서 한쪽에 좀 치우친 감이 있다고는 봐요. 아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제대로 나와서 관객들이 정확한 역사적인 사실을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인데 일정한 시기가 지난 다음 후세 역사가들이 다시 해석하거나 판단할 과제라고 생각하죠.”
 
 
  “기초문화예술 진흥해야”
 
  ― 박근혜 정부 때 초대 문화융성위원장을 맡으셨는데 어떤 경험이 있나요.
 
  “2년 정도 하고 그만뒀지만 나름 많은 것을 좀 배울 수가 있었던 기간이었어요. 위원장을 맡자마자 거의 강행군을 하다시피 전국의 문화예술인, 언론인, 문화운동가들을 직접 만나거나 지역문화 발전 세미나를 열어 현안을 들었죠. 그러면서 원도심 재생사업이나 낙도(落島) 등 지역사회의 변두리 같은 곳에서 자생적인 문화운동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보고 느꼈거든요.
 
  그다음에 전국적으로 다니면서 콘텐츠 산업 지원방안을 마련해 (국무회의) 전체 회의에 올렸는데 〈다이빙 벨〉 사건이 막 나오고 저는 저쪽의 입장에 서다 보니까 껄끄러워져 그만두게 됐어요.”
 
  ― 3월 대선을 앞두고 있는데 여야 대선 후보에게 문화정책과 관련해 제언이 있다면?
 
  “지금은 문화정책이 문화산업 쪽에 너무 치우친 느낌이 많거든요. 물론 문화산업 쪽으로 가는 것은 어떤 면에서 바른 방향이라고도 볼 수 있죠. 특히 OTT를 중심으로 하는 인터넷 매체, 온라인 매체가 대세를 이루고 있고, BTS를 중심으로 K-팝, K-컬처, K-무비 등이 전반적으로 흥행이 잘되어 한류(韓流) 바람을 타는 건 굉장히 좋고요. 근데 그쪽에서 정부가 지원해줄 거는 없어요. 그대로 놔둬도 자생적으로 해나가고 있어요.
 
  정부의 문화정책의 또 다른 축이 기초문화예술의 진흥이거든요. 교육만 해도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가다 보면 문화예술 쪽 교육은 거의 방치되고 있다시피 해요. 저는 문화예술의 기초부터 다져나가는 교육정책이 필요하고 기초 인문학이나 문화예술 교육 쪽에 정책적 비중을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아호가 ‘청하(靑霞)’입니다. 어떤 의미가 있나요.
 
  “자작(自作)인데 ‘푸른 노을’이라는 뜻도 있고 ‘은거하는 선비’를 칭하는 말이기도 해요. 서울에서 살다가 팔당호가 보이는 경기도 광주에 정착했으니 어쩌면 미래를 예견한 셈이지요.
 
  사실은 고교 시절에 ‘청하’라는 이름으로 호를 지을까, 아니면 막 휘몰아치는 계곡을 뜻하는 ‘단계(湍溪)’로 지을까 고민하다가 ‘청하’로 정했어요.”
 
  ― 고교 시절 때요?
 
  “네. 하하하.”
 
  가만히 생각해보니 남한강, 북한강, 경안천이 합류하며 굽이치는 이곳에 정착한 것을 보면 ‘단계’라는 의미가 더 적합해 보이지만, 꽁꽁 얼어붙은 강을 보고 있자니 ‘청하’가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6·25전란 직후인 고교 시절, ‘청하’와 ‘단계’를 두고 고민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진행형인 그의 인생을 볼 때 어느 쪽이 맞는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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