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화문 문화포럼 20주년, 李御 선생에게 제1회 광화문 문화예술상 수여
⊙ 1977년 28세 때 대한체육회 해외협력과장으로 ‘스포츠외교’와 인연
⊙ “88올림픽 유치 당시 일본이 IOC 위원 한 번 만날 때 우리는 세 번, 네 번 만나”
⊙ 2032 남북 올림픽 개최… 북한의 외부 세계를 향한 개방이 전제돼야
오지철
1949년생. 서울대 법학과 졸업, 同 대학원 석·박사 / 대한체육회 해외협력과장, 체육부 해외협력담당관·국제체육국장, 문체부 문화산업국장·문화정책국장·차관, TV조선 대표, 한국관광공사 사장 역임 / 現 광화문 문화포럼 회장, 하트-하트재단 이사장, 단국대 문화예술대학원장
⊙ 1977년 28세 때 대한체육회 해외협력과장으로 ‘스포츠외교’와 인연
⊙ “88올림픽 유치 당시 일본이 IOC 위원 한 번 만날 때 우리는 세 번, 네 번 만나”
⊙ 2032 남북 올림픽 개최… 북한의 외부 세계를 향한 개방이 전제돼야
오지철
1949년생. 서울대 법학과 졸업, 同 대학원 석·박사 / 대한체육회 해외협력과장, 체육부 해외협력담당관·국제체육국장, 문체부 문화산업국장·문화정책국장·차관, TV조선 대표, 한국관광공사 사장 역임 / 現 광화문 문화포럼 회장, 하트-하트재단 이사장, 단국대 문화예술대학원장
- 사진=조준우
한국 스포츠 역사에는 많은 공로자가 있다.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 88서울올림픽 유치를 선언한 이후 1981년 9월 ‘바덴바덴의 기적’을 일구기까지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정주영(鄭周永) 같은 굵직한 공로자만 있는 게 아니라 숨은 공로자도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숨은’이란 수식어가 무색해졌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오지철(吳志哲·71)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은 모험적이며 험난했던 서울올림픽과 평창동계올림픽의 역사를 손금 들여다보듯 잘 안다. 20대 현장 실무자 시절부터 전 세계를 발로 누볐다. ‘철의 장막’이 무너지기 전의 옛 소련과 동구권을 찾아다녔다.
혹자는 그를 ‘걸어 다니는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사전(事典)’이라는 별명을 붙인다. 오 전 차관은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그 별명이 싫지 않은 모양이다. 2002 한일(韓日)월드컵을 앞두고 오지철 국제체육국장(문화부)은 정몽준 회장(대한축구협회)과 함께 스위스 취리히의 FIFA(국제축구연맹) 사무국을 문지방이 닳도록 찾아다녔다.
현재 그는 공직에서 모두 물러났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붙잡아두고 있다. 광화문 문화포럼 회장, 하트-하트재단 이사장, 단국대 문화예술대학원장을 겸하고 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충고처럼, ‘늙어가는 것에 불평하지 않는다’. 또 여전히 ‘젊은 사람에게 세상을 다 넘겨주지 않았다’. 오 전 차관은 대한체육회 4급 서기관에서 시작한 스포츠외교의 비화를 언젠가는 공개하리라 마음먹고 있다. 일단 ‘맛보기’로 기자와 만났다.
지난 1월 7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점심을 같이하는데 전화통이 쉴 새 없이 울렸다. 그는 바빠 보였다. 광화문 문화포럼 20주년 행사를 이틀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답변은 만연체였고 말은 빨랐다. 한 질문에 20~30분씩 이야기했다. 질문할 틈이 없었다.
광화문 문화포럼과 李御寜 선생
― 광화문 문화포럼이 창립 20주년을 맞았네요.
그는 이 포럼의 7대 회장이다. 역대 회장단(이세중 변호사, 고 차범석 극작가, 남시욱 전 《문화일보》 사장, 김영수 전 문화체육부 장관,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이종덕 전 예술의전당 사장) 면면을 보니 거물급이다. 100명의 포럼 회원 역시 쟁쟁한 인사들이다. 문화예술인이 중심이고 학자, 법조인, 언론인, 의료인, 기업인 등 대개가 전·현직 CEO들이다.
“매달 둘째 주 목요일 오전 7시30분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조찬포럼을 가집니다. 사회 저명인사나 오피니언 리더를 초청해 강연을 듣고 우리 시대 중요한 현상을 논의하기도 하지요. 또 클래식 음악을 라이브로 감상하는데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의 신인 연주자를 초대하고 있어요. 우리가 문화예술계에 직간접 관계된 사람들이다 보니 젊은 예술인을 격려하고, 조금이라도 전문적인 음악인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잖아요. 또 생일을 맞은 회원들의 축하 행사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포럼 설립을 주도한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회장인데 지난해 말로 2년 임기가 끝났어요. 20주년 행사를 준비하며 ‘이제 (임기가) 끝났다. 그만두겠다’라고 말하기도 뭐해서 우물쭈물하던 차에 ‘(회장을) 좀 더 해야 된다’고 해서 계속 떠맡게 된 것이죠.”
― 이번에 제1회 광화문 문화예술상을 제정했다지요.
“20주년을 맞아 의미 있는 일을 찾다가 상을 제정했어요. 1회 수상자를 고심하는데 이구동성으로 초대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이어령(李御寜) 장관을 추천하더군요. 그분이야말로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이자 석학이죠. 단순히 전직 장관, 문학평론가가 아니십니다.
저도 그분의 저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고교 시절부터 읽었으니까요.”
― 이어령 선생과 인연이 두터우시죠.
“물론이죠. 장관, 교수, 문학평론가로 논하기 전에 우리나라가 문화강국으로 도약하고 한류(韓流)로 웅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한국 문화예술계의 거인이죠. 일본서도 그분을 ‘문명비평가’로 예우합니다. 암 투병 중인데도 지적 여정은 쉴 틈 없이 이어져 열정적으로 책을 쓰고 강연하고 계세요. 그분을 첫 수상자로 선정해 기쁘고, 그분 역시 기뻐하셨다는 말씀을 전해 듣고 감사했습니다.
이런 의미 있는 상을 만든 게 20주년 광화문 문화포럼의 새로운 출발인 거죠. 앞으로 매년 시상할 계획입니다.”
예술가와 예술작품
― 광화문 문화포럼 회원 사이에 이념의 간극(間隙)은 없지요. 요즘 신문을 보니, 학교 교가(校歌)를 작사·작곡한 이의 친일행적을 문제 삼아 교가를 바꾸려는 움직임이 있다더군요.
“우려스러워요. 지금 영국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프랑스 후기인상파를 대표하는 폴 고갱의 초상화 전시회가 열리는데 그를 두고 논쟁이 뜨겁습니다. 고갱이 마지막 10여 년을 보낸 타히티섬 등 폴리네시아 군도에서 13~14세 어린 소녀들을 아내로 맞은 비윤리적인 성적(性的) 방종을 문제 삼아 ‘작품을 전시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어요. 반면 ‘작품은 어디까지나 작품으로서만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직 대세이긴 해요.”
그뿐만이 아니다. 오페라를 오락에서 종합예술로 승화시켜 ‘오페라의 황제’로 불리는 바그너도 유대인을 혐오한 인종주의자로 알려졌다. ‘지휘계의 황제’라 불린 카라얀 역시 나치 부역자라는 이유로 평생 논란에 휩싸였다.
― 우리나라 역시 이광수, 서정주, 홍난파, 김성태, 이흥렬, 현제명, 김동진 같은 한국 근현대사에 굵직한 업적을 남긴 예술인들에게 친일 굴레를 씌웠어요.
“저는 친일을 문제 삼아 이광수나 홍난파의 작품이 폄하 또는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어요. 그 누구도 어릴 때나 장성했을 때, 기쁠 때나 슬플 때, 우리 모두가 애창하던 ‘고향의 봄’ ‘섬집 아기’ ‘동심초 등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교가를 만든 이의 친일행적을 문제 삼아 수십 년 동안 수많은 동문이 가곡이나 동요처럼 부른 교가를 지우려는 것은 예술작품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혐오할 정도로 싫어하는 예술가 작품이라도 작품은 그 자체로만 보아야 한다’고 말한 전(前) 테이트 모던 갤러리 관장 비센테 토돌리의 말은 제게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刑法 전공자의 大麻 이야기
― 법대를 나오고 형법(刑法)을 전공해 석・박사를 받았는데, 지금은 대학의 문화예술대학원장이 되셨어요.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목표 없이 법대에 진학했는데 공부를 해보니까 적성에 안 맞았어요. 그나마 헌법과 형법은 와닿았어요. 제일 자신 없는 분야가 민법과 상법인데 법조인이 되려면 이 분야를 잘해야 하거든요.
졸업하기 전, 사법고시에 합격하겠다는 거의 불가능한 목표를 세워놓고도 거기에 맞는 공부는 안 하고…. 사실 저는 문청(文靑)에 가까워요. 시 쓰고 소설 쓰고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려 준비까지 했었죠.”
― 준비까지… 그냥 쓰시면 되는데….
“구상도 많이 하고… 쓰다가 이건 아닌 것 같아 접었어요. 어쨌든 (법학 공부가) 적성엔 안 맞았지만, 그래도 법학한 흔적이 없다는 게 콤플렉스였어요. 그나마 형법에 관심이 있어서 형법 공부를 다시 한 것이죠.”
그는 자신의 석사학위 논문에 대해 길게 이야기했다. 1977년 2월에 통과된 논문 제목은 <대마(大麻)에 관한 고찰>.
“이 논문이 당시 파격이었어요. 박정희 정권 말기에 대마 흡연 연예인들이 무더기로 입건·구속되는 일이 있었죠. 솔직히 시골 출신이나 등산인에게 대마는 익숙한 식물이에요. 뭐랄까,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고 통증이나 긴장을 완화시키는…. 중국의 전설적인 명의(名醫) 화타를 두고 오늘날 전문가들은 대마를 썼을 것이라 추정을 하거든요. 관우·장비가 당시 마취제도 없던 시절, 화살 맞은 뼈를 발라내는 수술을 어떻게 참았겠어요. 민간 치료제로 산통, 치통 때도 대마를 많이 썼어요.
박정희 정권 말에 (불법이라) 난리를 치는데, 대마를 피우면 환각에 빠져 인수봉에서 막 뛰어내리고 아무 데서나 오줌을 질질 싼다는 식의 영상을 제작해 문화영화, 〈대한뉴스〉에 소개하는 겁니다. 그래서 청계천 헌책방을 돌며 미군에서 흘러나온 마약 관련 책 200여 권을 구해 읽었고, 등산인과 연예인 등을 심층 인터뷰했어요. 그 결과, 현행 대마관리법이 위헌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됐습니다.
미국 뉴욕에 라과디아 공항이 있잖아요. 뉴욕시장 피오렐로 라과디아(Fiorello La Guardia·재임 1934~1945)의 이름을 땄는데 1930년대 말에 ‘라과디아 보고서’라는 게 있어요.
당시 미국서도 대마가 합법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란이 있었는데 ‘처벌은 하되 마약이나 헤로인과 다르다’는 결론을 냈어요. 그런데 누가 마약류라고 불쏘시개 역할을 했느냐 하면 담배 제조업자와 위스키 업자들이었어요. 대마가 많이 팔리면 담배와 위스키 판매가 급감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우리나라 대마관리법이 위헌이라는 주장을 논문에 담았죠.”
― 대마 피워보셨나요.
“아… 그게 문제인데. 논문 심사 교수님이 ‘자네, 피워봤나’ 그러시는 거예요. 솔직히 안 피워봤죠. 제 논문의 진실성을 교수님들이 의심하셨겠지요. ‘(대마를) 피워보지는 않았으나 심층 인터뷰 통해서…’라고 했죠.”
― 당시 대마사범이던 가수 이장희 같은 분을 만났나요.
“아뇨, 그분들보다 (유명도가) 낮은 연예인들… 등산 좋아하는 친구들과 인터뷰를 했죠.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통과가 됐어요. 당시 심사위원 세 분 중 두 분은 돌아가셨고, 한 분이 바로 이수성(李壽成) 전 총리예요. 최근 뵈었더니 아직도 40년 전 얘기를 하시는 겁니다. 이 전 총리 말씀이 ‘40년 전 그 음험하던 시절, 그런 주장을 편다는 사실이 놀라워 다른 교수를 설득했다’고 하셨어요.”
― 대마관리법이 현재도 유지되고 있고, 법 개정이 안 됐어요.
“네… 하하하, 하지만 저는 아직도 위헌이라 주장하죠.”
“까짓것 올림픽을 왜 못 해?”(박종규)
대화가 자꾸 산으로 갔다. 박사학위(그는 한참 후배인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박사과정 동기다) 이야기도 그의 공직생활과 연결돼 거의 30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대화가 복잡하게 전개됐다. 흥미로운 이야기였지만 부득이 스포츠와 맺은 인연으로 이야기를 다시 전개했다.
“어릴 때부터 아마추어 평론가처럼 스포츠를 좋아했어요. 축구대표팀 감독이 되어 선수 라인업을 짜는 식으로 상상의 나래를 폈죠. 1976년 봄, 법대를 졸업하고 한국화약에 입사했는데 6개월 정도 다니다 외국계 은행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재미가 없는 거예요. 제가 숫자에 약해요. 전자계산기로 두드리면 되지만 숫자와 씨름하는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세 살 많은 형이 ‘대한체육회 과장 공채가 났다’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시험을 쳤는데 덜컥 합격하고 말았죠.
그때 대한체육회 회장이 김택수(金澤壽·1926~1982)씨였고 사무총장이 법학자인 권경식(權景植)씨였어요. 사실 체육회에 출근할 마음이 없었는데 어느 날 사무총장께서 집으로 전화를 거셨어요. ‘왜 출근을 안 하느냐’고요. ‘딱 한 명, 자네를 뽑았는데 안 나오면 어떻게 하느냐’는 거였죠. 내켜 하지 않자 ‘딱 6개월만 일해보라’는 겁니다.”
1977년 28세 때 그는 대한체육회 ‘해외협력과장’이란 직함을 달게 됐다. 그런데 운명과도 같은 일이 체육회 입사 며칠 뒤에 일어났다. 그해 6월 16일 김택수 회장이 IOC 위원으로 피선되었다.
“김 회장이 절 부르시더니 ‘너 참 고깽이다’ 그러세요. 경상도 사투리로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외국계 은행에 다닐 때 월급이 당시로선 최고액인 13만8000원을 받았는데 체육회 과장은 8만4000원, 그러니까 절반이나 깎여서 온 거예요. 월급이 반 토막인데도 오니까 웃기다고 생각한 거죠. 그땐 결혼도 안 했고 혈기방장(血氣方壯)할 때였으니까….
김 회장께서 제게 ‘IOC 스페셜 어시스턴트’ 역할을 맡기셨어요. 나쁘게 말하면 ‘가방모찌’고, 좋게 말하면 ‘해외담당 비서실장’ 같은 거예요. 그렇게 해서 IOC 위원들을 접촉하고 국제 스포츠계 지도자들을 만나러 다녔습니다. 제가 알바니아를 제외한 모든 동구권 나라에 2회 이상 나가봤어요. 러시아는 매년 갔고요.”
― 1988년 이전 말씀이죠.
“서울올림픽 전과 후에. 에피소드가 많죠. 그러나 ‘대장간에 식칼이 없다’고 할까. 제가 서울올림픽 개회식과 폐회식은 물론, 각종 경기장에도 한 번도 못 갔어요. 서울올림픽을 찾은 해외 귀빈들을 접견하고 외무부(지금의 외교부) 장관, 총리 예방을 조율하고 안내해야 하니까.”
― 그래서 ‘걸어 다니는 IOC 사전’이란 말이 나온 거군요.
“정치적 일정으로 김택수 회장이 해외에 못 나갈 때는 ‘너라도 다녀와라’고 해서 그분 편지를 전달하러 다니기도 했죠. 그게 다 서울올림픽 유치에 밑거름이 됐습니다.”
오지철 과장은 김택수 회장이 IOC 위원이 된 그날부터 ‘바덴바덴 기적’을 이뤄낸 1981년 9월 30일까지 4년6개월 동안 해외를 돌면서 유치 활동을 도왔다.
― 88서울올림픽 유치는 어떻게 시작된 겁니까.
“원래는 대한체육회에서 88올림픽보다는 86아시안게임을 유치하려 했어요. 왜? 한국이 1970년에 아시안게임을 유치했다가 부득이 포기한 경험이 있어요. 경기장 짓고 할 형편이 못 된 거지요.
그런 쓰라린 추억 때문에 아시안게임 유치를 기획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위에서 올림픽을 유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당시 체육회 입장은 ‘아시안게임도 못 한 판에 올림픽?’ 이런 회의적 입장이었죠.
왜 올림픽 이야기가 나왔냐 하면, 대통령 경호실장을 지낸 ‘피스톨 박’ 박종규(재임 1964~1974)씨가 1978년 9월 24일부터 10월 5일까지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태릉에 유치해 큰 성공을 거뒀어요. 국내 처음으로 세계선수권대회를 유치한 것이었죠. 사실 태릉은 문화재 구역인데 요즘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1979년 2월 박종규씨가 대한체육회 회장이 된 후 ‘까짓것 올림픽을 왜 못 해’ 하며 뛰어든 것입니다.”
“뒤늦게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진 격”
잘 알려진 대로 올림픽 유치는 박종규 대한체육회 회장(재임 1979~1980)의 아이디어와 노력에서 출발한다. 1974년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이 있기 전까지 대통령 경호실장이던 박종규는 물러난 이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사료로 보는 서울올림픽 유치사》 참조)
그는 대한사격연맹 회장으로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유치하고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이 대회는 개발도상국인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열린 세계적 규모의 스포츠 행사였다. 이 성공에 힘입어 당시로선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올림픽 개최의 큰 꿈을 꾸었다.
1979년 2월 취임한 대한체육회 박종규 회장은 한 달 뒤인 3월 15일 상위 기관인 문교부에다 올림픽 유치 건의서를 제출한다. 그해 9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냈다. 10월 8일 정상천(鄭相千) 서울시장은 세종문화회관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고 88서울올림픽 유치를 공식 선언했다.
“대한체육회는 당시 깜짝 놀랐어요. 이미 일본 나고야가 단독으로 입후보해 ‘88올림픽은 나고야’로 굳어지는 분위기가 IOC 위원들 사이에 있었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특이해요. 2002한일월드컵 때도 그랬지만 남들이 이미 판을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뒤따라가 뒤집어버리는…, 그러니까 뒤늦게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지는 격이에요.
당시 국제 스포츠계를 나름 안다는 실무자 입장에선 ‘순서가 아시안게임을 치른 뒤에 올림픽 하는 게 맞지 않아?’ 하는 생각을 철없이 했죠. 올림픽 유치를 군사정부다운 호기라고 생각했어요.”
오지철 해외협력과장은 서울올림픽 유치 선언 후 비밀리에 일본에 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밀사(密使) 비슷하게 일본에 간 적이 있어요. ‘우리가 88올림픽을 포기하면 86아시안게임 유치하는 데 일본이 확실하게 도와줄 수 있는지’ 타진하러 간 거죠. 일본 체육회 왈(曰), ‘우리가 어떻게 책임지냐. 일본이 만들어줄 수 없다’는 거였어요. ‘너네가 되겠어? 돈도 없는 나라가 무슨 올림픽을 해’라는 뉘앙스였어요.”
― 그때 일본 가서 누구를 만났나요.
“IOC 부위원장이던 기요카와 마사지(淸川正二)를 만났죠. 1932년 LA올림픽 때 100m 배영에서 금메달을 딴 일본의 전설적 스포츠 영웅이었어요. 이분이 나고야 출신입니다. 일본에서 ‘노(No)’ 하니까, 우리는 ‘그래? 그럼, 우리도 막 가는 거지’ 이렇게 된 거예요.”
1981년 8월 대통령 재가, 9월 ‘바덴바덴 기적’
1979년 9월, 대통령 재가와 국무회의를 통과한 88올림픽 유치 결정은 그해 10월 8일 정상천 서울시장의 공식 기자회견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대통령 서거라는 초유의 10·26 사태가 터지면서 올림픽 유치 이슈는 잠복기에 들어간다. 당시 올림픽 유치에 그래도 관심을 유지하고 있던 곳은 대한체육회와 주무 부처인 문교부뿐이었다.
“박종규 회장이 정치적 이유로 물러나고 뒤이어 조상호(曺相鎬) 회장이 부임했는데 그 잠복기 때도 저는 조 회장을 모시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서울올림픽 유치를 호소하고 다녔어요. 정식으로 올림픽유치위원회가 출범하기 전이었는데 말이죠. 외무부에서 파견된 전상진·김세원 대사도 열심히 뛰었어요. 두 분이 무척 적극적이었죠.”
그 무렵 조상호 회장은 새로운 정부와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재차 올림픽 유치를 추진하기로 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물론 경제부처도 부정적 기류가 강했다.
“서울시는 콧방귀를 끼었죠. 어떻게 보면 현실적인 얘기예요. 경제부처의 반대가 제일 심했어요. 일단 1981년 2월 26일 유치신청서를 냈지만, 대통령(전두환) 재가는 그해 8월 1일에야 났어요. ‘바덴바덴 기적’이 두 달 뒤인 9월 30일인데 말이죠.”
― 경쟁 도시가 나고야밖에 없었나요.
“그렇죠. 그게 운이고 국운이죠. 만일 서울 대(對) 도쿄가 붙었다면 어땠을까요? 나고야라는 일본의 중부 도시와 대한민국 서울이라는 수도가 붙었고, 다른 경쟁자가 없었다는 점, 일본은 이미 올림픽을 개최한 전례가 있다는 점, 이런 논리로 IOC 위원을 설득했어요.
아직 비화를 다 말할 수는 없고, 당시 유치 활동을 하던 분들은 다 자기 위주로 말하니까….”
그러더니 오지철 전 차관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우리 외교부(외무부) 역할이 컸어요. 새롭게 군사정부가 출범했는데 외교관들이 점수 딸 일이 뭐가 있겠어요? 일본대사가 IOC 위원 한 번 만날 때 우리는 세 번, 네 번 찾아갔으니까요. 일본대사가 안 가면, 우리는 더 열심히 찾아갔죠. 그다음에 현대·대우·한양·대한항공 같은 재벌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어요.”
86아시안게임 유치에 뛰어든 이유
결국 1981년 9월 30일 독일의 바덴바덴 IOC 총회에서 일본의 나고야를 52 대 27표로 누르고 1988년 올림픽 개최권을 따내는 개가를 올렸다. 당시 일본은 뚜껑을 열기 전 45 대 35로 나고야 우세를 점쳤다.
“전두환 정권이 일본에 60억 달러 규모의 차관을 요구해서 막 돈이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이었죠. 소련의 국제체조연맹 티토프 회장은 그 질문을 우리에게 했어요. ‘일본에서 차관을 받는 나라가 무슨 돈으로 경기장 지어’라는 식으로 말이죠.
이와 관련해 에피소드 한 장면이 떠오르네요. ‘바덴바덴 기적’ 당시 박영수 서울시장을 비롯 정주영·조상호·유창순·이원경·이원홍씨 등 6명의 한국 측 공식 대표가 앞줄에 나란히 앉아 분야별로 IOC 위원들의 질문에 답했고, ‘더글러스 리’라는 재미교포와 제가 바로 그들 뒷줄에 앉아 조력하는 역할을 했어요.
우리는 질문한 IOC 위원, 국제스포츠연맹 회장의 이름을 친근하게 불러주며 답변하기로 전략을 짰어요. 다행스럽게도 질문자 대부분이 제가 아는 분이었어요. 다만 소련의 티토프 회장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인지 안 보였어요. 누구인지 확인이 안 돼 무척 당황스러웠죠. 그때 벨기에 IOC 위원인 자크 로게 백작과 눈이 마주쳤는데 이분이 입 모양으로 ‘티토프’라고 하지 않겠어요? 얼른 메모해서 유창순 회장(당시 한국무역협회장·15대 국무총리 역임)에게 드렸죠. 질문과 답변 사이 5초가량이 지났는데 그 짧은 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졌어요. 유 회장이 ‘미스터 티토프’라는 말과 함께 답변을 하니 장내가 조용해졌고, 티토프 역시 자기를 기억해주니 싫지 않았을 겁니다.”
― 86아시안게임 유치는 어떻게 된 겁니까.
“당시 남북이 유치 대결을 했는데 막판에 북한이 포기했죠. 사실 우리가 86아시안게임 유치에 나선 것은 북한이 유치에 뛰어드니까 나섰던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서울올림픽을 유치하자 북한이 김이 새서 포기하고 말았어요. 우리는 거저 얻은 것이죠.”
뜻밖의 해외연수와 법학박사 논문
88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뒤 오지철 과장은 내심 ‘대한체육회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했다. 혼신의 힘을 다 쏟았고 체육회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이보다 더 큰일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미국 로스쿨 유학을 준비했다.
“유치가 확정되고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가 출범했어요. 위원장에 김용식(金溶植) 외무부 장관, 사무총장에 이원경(李源京·훗날 외무부 장관, 체육부 장관 역임)씨가 내정됐는데 그분들이 조상호 회장에게 저를 조직위로 보내달라고 요구했죠. 조 회장이 ‘노’ 하셨어요.
그리고 1982년 3월 20일 체육부가 만들어졌는데 초대 장관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정무장관에 있다가 오셨죠. 사실 서울올림픽을 유치할 때 전두환·노태우 두 분이 깊이 관여했다고 훗날 들었어요.”
체육부는 각 부처 공무원의 자원으로 구성됐는데, 이외 딱 두 명의 민간인도 참여했다. 한 명은 《서울신문》 체육부 기자 출신의 최창신(崔昌新), 다른 한 명이 오지철이었다.
“체육부 해외협력담당관 일은 제가 체육회 과장 때부터 하던 일이었어요. 공무원 중에 누굴 시키려니 해본 놈이 있어야죠. 외무부 공무원에게 맡길까 했는데 체육외교를 누가 해봤어야지. 그래서 차출 비슷하게 체육부 별정직 4급 서기관으로 특채가 됐습니다.
그때 유학 대신 공무원이 되려고 마음을 굳힌 것은 어찌 보면 매우 현실적인 이유죠. 체육회 과장 시절, 외무부와 문교부를 들락날락했는데 그때마다 신분증을 맡기고 방문증 명찰을 달아야 했습니다. 체육부로 오라니까 ‘이제 방문증은 없어도 되는구나’ 싶었죠.
다행히 신설 부처라 텃세가 없고 나이가 어려 예뻐해주고, 전문성도 있어서 장관실 해외 업무에서 의전, 스포츠외교까지 다 할 수 있었어요.
이후 체육부 장관이 계속 바뀌는데 제가 계속 4급 별정직 과장에 있으니까 몇 분이 걱정해주셨어요. 승진하려면 별정직 국장 자리가 비어야 갈 수 있는데, 그렇게 10년을 일하다가 전직(轉職) 시험에 합격해 일반직 공무원이 되었고, 2년 후에 국제체육국장으로 승진할 수 있었어요.”
체육부는 1991년 체육청소년부로 개편되었다가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과 동시에 문화부와 합병해 문화체육관광부가 된다. 2000명의 문화부에 200명의 체육청소년부가 흡수 통합된 것이다.
“이 대목에서 박사학위를 딴 이야기를 좀 할까요? 체육청소년부 시절, 그러니까 문화부와 통합이 결정된 시점이었는데 국장급 중에 연수를 다녀와야 했어요. 그런데 선배들 중에 누구도 자원하는 이가 없었어요. 왜냐? 연수 갔다 오면 자기 자리가 없어질까 싶어서죠. 그래서 제가 번쩍 손을 들었어요.
며칠 뒤 당시 이해봉(李海鳳) 체육청소년부 차관이 ‘공무원 교육원 가서 뭘 배우겠냐’며 정문화(鄭文和) 총무처 차관에게 전화를 거셨어요. 두 분이 절친 사이셨죠. 이 차관께서 ‘체육청소년부 해외연수 T.O를 한 명 더 해달라’고 부탁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미국 연수를 갈 수 있었어요. 얼마나 놀라고 고마웠는지. 그때 연수를 안 갔다면 박사논문을 못 썼을 겁니다.”
그가 하버드대학 로스쿨 객원연구원(visiting scholar) 자격으로 1년간 연수 다녀온 뒤 1995년 2월에 통과된 박사학위 논문이 <러시아의 사회변혁 기간 중 범죄 현상에 대한 연구: 1988~1992년을 중심으로>다. 스포츠외교 전문가와 좀 어울리지 않는 형법 관련 논문이었다.
2032 올림픽 남북 공동 개최를 하려면…

― 2002한일월드컵 유치와 관련한 비화가 궁금해요.
“1993년 김영삼 정부 때 유치 이야기가 처음 나왔는데 사실은 정몽준(鄭夢準) 전 의원의 아이디어예요. 제가 1992년 체육청소년부 국제체육국장 할 때였는데 대한축구협회 회장에 당선돼 제 방을 찾아왔어요. 우리 인연은 1981년 독일의 바덴바덴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아버지 정주영 회장을 지원하러 그곳에 왔을 때 처음 인사했죠.
하여튼 정몽준 회장이 월드컵 유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저는 생각이 달랐어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솔직히 그랬어요. ‘U20 세계청소년축구대회 유치도 하려다 못 했는데 그것 먼저 하고 월드컵을 유치하면 좋겠다’고 했죠. 제 이야기는 ‘오서독스’한 이야기였고, 아마 정 회장의 귀엔 안 들렸을 거예요. 선대(先代) 회장처럼 그 아들도 저돌적으로 덤벼든 것이죠.
그런데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고 어떻게 이야기가 오갔는지 월드컵 유치를 하라는 ‘오더’가 문체부로 내려온 거예요. 제가 미국 연수에서 돌아와 국립현대미술관 사무국장으로 있을 때였죠. 열심히 그림 공부하며 작품도 구입하고 화가도 만나고 있는데, 문체부 차관과 기획관리실장이 절 부르더니 ‘월드컵 유치를 해야겠는데 국제체육국장을 한 번 더 해야겠다’는 겁니다. 사실, 저는 문화산업국장으로 가기로 돼 있었어요.
그렇게 국제체육국장을 두 번 하게 됐죠. 체육부 때 한 번, 문체부 때 한 번. 그때도 나고야 못지않게 FIFA 내에 일본 분위기가 드셌어요.
그런데 뒤늦게 우리가 뛰어들었고 노력 끝에 추월 직전, 아니 뒤집는 상황까지 만든 것이죠. 그랬더니 IOC 위원장이 FIFA 측과 이야기해서 ‘이쯤에서 공동개최하라’고 제안하는 겁니다. 정몽준 회장이 반대하고 우리 역시 반대했죠. 완전히 역전해 결승선에 닿기 직전이었거든요.”
― 추월 비결은?
“축구에 관한 한 일본보다 한국이 훨씬 앞선 게 주효했어요. 월드컵 본선에 한국이 더 많이 진출하고 아시아의 축구 종주국은 한국이라는 이미지가 통한 것이죠.”
― 어떤 전략으로 FIFA 집행위원에게 접근했나요.
“위원들 개개인의 기호에 맞게 일대일로 접촉해 한국의 유치 논리를 설득했어요.”
― 접촉 과정에서 돈도 썼습니까.
“돈은 안 썼어요. 우리는 국가 역량을 총동원했는데 일본은 달랐어요. 예를 들어 88올림픽 때는 ‘나고야와 아이치현(愛知県)’ 대 ‘대한민국과 서울’의 싸움이었어요. 일본의 국력이 아무리 세도 서울과 나고야는 비교가 안 되죠.
2002월드컵 때도 우리는 국민·기업·정부가 똘똘 뭉쳐 전방위로 달렸는데 일본은 자국 축구협회와 ‘덴쓰’라는 광고업체가 홍보를 전담하는 수준이었어요. 그래서 2020도쿄올림픽 유치 때는 아베 정부가 과거의 실패를 거울 삼아 정부 차원에서 적극 나섰다고 해요.”
지난해 9월 19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정상회담에서 2032년 하계올림픽을 남북이 공동 유치하기로 했다. 지난 1월 7일 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2032년 올림픽을 남북 공동으로 개최하고, 도쿄올림픽 공동 입장과 단일팀을 위한 협의도 계속해나가자”고 제안했다.
― 남북 올림픽 유치와 관련해 덕담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남북 올림픽 유치) 되면 참 좋죠. 그러나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쉽지 않을 거예요. 남북이 지금보다 훨씬 관계가 개선돼야 가능합니다. 또 북한의 교통, 통신, 인적·물적 교류 등 외부 세계를 향한 개방이 전제돼야 해요. 우리는 별 문제가 없어요. 하지만 북한의 변화가 없으면 어려워요. 여러 장애를 이겨내고 공동 유치가 남북 교류 협력의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오지철(吳志哲·71)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은 모험적이며 험난했던 서울올림픽과 평창동계올림픽의 역사를 손금 들여다보듯 잘 안다. 20대 현장 실무자 시절부터 전 세계를 발로 누볐다. ‘철의 장막’이 무너지기 전의 옛 소련과 동구권을 찾아다녔다.
혹자는 그를 ‘걸어 다니는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사전(事典)’이라는 별명을 붙인다. 오 전 차관은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그 별명이 싫지 않은 모양이다. 2002 한일(韓日)월드컵을 앞두고 오지철 국제체육국장(문화부)은 정몽준 회장(대한축구협회)과 함께 스위스 취리히의 FIFA(국제축구연맹) 사무국을 문지방이 닳도록 찾아다녔다.
현재 그는 공직에서 모두 물러났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붙잡아두고 있다. 광화문 문화포럼 회장, 하트-하트재단 이사장, 단국대 문화예술대학원장을 겸하고 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충고처럼, ‘늙어가는 것에 불평하지 않는다’. 또 여전히 ‘젊은 사람에게 세상을 다 넘겨주지 않았다’. 오 전 차관은 대한체육회 4급 서기관에서 시작한 스포츠외교의 비화를 언젠가는 공개하리라 마음먹고 있다. 일단 ‘맛보기’로 기자와 만났다.
지난 1월 7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점심을 같이하는데 전화통이 쉴 새 없이 울렸다. 그는 바빠 보였다. 광화문 문화포럼 20주년 행사를 이틀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답변은 만연체였고 말은 빨랐다. 한 질문에 20~30분씩 이야기했다. 질문할 틈이 없었다.
광화문 문화포럼과 李御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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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9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광화문 문화포럼 창립 2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오지철 회장은 이어령 선생에게 제1회 광화문 문화예술상을 수여했다. 사진=광화문 문화포럼 제공 |
그는 이 포럼의 7대 회장이다. 역대 회장단(이세중 변호사, 고 차범석 극작가, 남시욱 전 《문화일보》 사장, 김영수 전 문화체육부 장관,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이종덕 전 예술의전당 사장) 면면을 보니 거물급이다. 100명의 포럼 회원 역시 쟁쟁한 인사들이다. 문화예술인이 중심이고 학자, 법조인, 언론인, 의료인, 기업인 등 대개가 전·현직 CEO들이다.
“매달 둘째 주 목요일 오전 7시30분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조찬포럼을 가집니다. 사회 저명인사나 오피니언 리더를 초청해 강연을 듣고 우리 시대 중요한 현상을 논의하기도 하지요. 또 클래식 음악을 라이브로 감상하는데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의 신인 연주자를 초대하고 있어요. 우리가 문화예술계에 직간접 관계된 사람들이다 보니 젊은 예술인을 격려하고, 조금이라도 전문적인 음악인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잖아요. 또 생일을 맞은 회원들의 축하 행사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포럼 설립을 주도한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회장인데 지난해 말로 2년 임기가 끝났어요. 20주년 행사를 준비하며 ‘이제 (임기가) 끝났다. 그만두겠다’라고 말하기도 뭐해서 우물쭈물하던 차에 ‘(회장을) 좀 더 해야 된다’고 해서 계속 떠맡게 된 것이죠.”
― 이번에 제1회 광화문 문화예술상을 제정했다지요.
“20주년을 맞아 의미 있는 일을 찾다가 상을 제정했어요. 1회 수상자를 고심하는데 이구동성으로 초대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이어령(李御寜) 장관을 추천하더군요. 그분이야말로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이자 석학이죠. 단순히 전직 장관, 문학평론가가 아니십니다.
저도 그분의 저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고교 시절부터 읽었으니까요.”
― 이어령 선생과 인연이 두터우시죠.
“물론이죠. 장관, 교수, 문학평론가로 논하기 전에 우리나라가 문화강국으로 도약하고 한류(韓流)로 웅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한국 문화예술계의 거인이죠. 일본서도 그분을 ‘문명비평가’로 예우합니다. 암 투병 중인데도 지적 여정은 쉴 틈 없이 이어져 열정적으로 책을 쓰고 강연하고 계세요. 그분을 첫 수상자로 선정해 기쁘고, 그분 역시 기뻐하셨다는 말씀을 전해 듣고 감사했습니다.
이런 의미 있는 상을 만든 게 20주년 광화문 문화포럼의 새로운 출발인 거죠. 앞으로 매년 시상할 계획입니다.”
예술가와 예술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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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체육회 ‘해외협력과장’ 시절 오지철. 故 김택수 IOC 위원(왼쪽)과 함께. |
“우려스러워요. 지금 영국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프랑스 후기인상파를 대표하는 폴 고갱의 초상화 전시회가 열리는데 그를 두고 논쟁이 뜨겁습니다. 고갱이 마지막 10여 년을 보낸 타히티섬 등 폴리네시아 군도에서 13~14세 어린 소녀들을 아내로 맞은 비윤리적인 성적(性的) 방종을 문제 삼아 ‘작품을 전시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어요. 반면 ‘작품은 어디까지나 작품으로서만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직 대세이긴 해요.”
그뿐만이 아니다. 오페라를 오락에서 종합예술로 승화시켜 ‘오페라의 황제’로 불리는 바그너도 유대인을 혐오한 인종주의자로 알려졌다. ‘지휘계의 황제’라 불린 카라얀 역시 나치 부역자라는 이유로 평생 논란에 휩싸였다.
― 우리나라 역시 이광수, 서정주, 홍난파, 김성태, 이흥렬, 현제명, 김동진 같은 한국 근현대사에 굵직한 업적을 남긴 예술인들에게 친일 굴레를 씌웠어요.
“저는 친일을 문제 삼아 이광수나 홍난파의 작품이 폄하 또는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어요. 그 누구도 어릴 때나 장성했을 때, 기쁠 때나 슬플 때, 우리 모두가 애창하던 ‘고향의 봄’ ‘섬집 아기’ ‘동심초 등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교가를 만든 이의 친일행적을 문제 삼아 수십 년 동안 수많은 동문이 가곡이나 동요처럼 부른 교가를 지우려는 것은 예술작품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혐오할 정도로 싫어하는 예술가 작품이라도 작품은 그 자체로만 보아야 한다’고 말한 전(前) 테이트 모던 갤러리 관장 비센테 토돌리의 말은 제게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刑法 전공자의 大麻 이야기
― 법대를 나오고 형법(刑法)을 전공해 석・박사를 받았는데, 지금은 대학의 문화예술대학원장이 되셨어요.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목표 없이 법대에 진학했는데 공부를 해보니까 적성에 안 맞았어요. 그나마 헌법과 형법은 와닿았어요. 제일 자신 없는 분야가 민법과 상법인데 법조인이 되려면 이 분야를 잘해야 하거든요.
졸업하기 전, 사법고시에 합격하겠다는 거의 불가능한 목표를 세워놓고도 거기에 맞는 공부는 안 하고…. 사실 저는 문청(文靑)에 가까워요. 시 쓰고 소설 쓰고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려 준비까지 했었죠.”
― 준비까지… 그냥 쓰시면 되는데….
“구상도 많이 하고… 쓰다가 이건 아닌 것 같아 접었어요. 어쨌든 (법학 공부가) 적성엔 안 맞았지만, 그래도 법학한 흔적이 없다는 게 콤플렉스였어요. 그나마 형법에 관심이 있어서 형법 공부를 다시 한 것이죠.”
그는 자신의 석사학위 논문에 대해 길게 이야기했다. 1977년 2월에 통과된 논문 제목은 <대마(大麻)에 관한 고찰>.
“이 논문이 당시 파격이었어요. 박정희 정권 말기에 대마 흡연 연예인들이 무더기로 입건·구속되는 일이 있었죠. 솔직히 시골 출신이나 등산인에게 대마는 익숙한 식물이에요. 뭐랄까,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고 통증이나 긴장을 완화시키는…. 중국의 전설적인 명의(名醫) 화타를 두고 오늘날 전문가들은 대마를 썼을 것이라 추정을 하거든요. 관우·장비가 당시 마취제도 없던 시절, 화살 맞은 뼈를 발라내는 수술을 어떻게 참았겠어요. 민간 치료제로 산통, 치통 때도 대마를 많이 썼어요.
박정희 정권 말에 (불법이라) 난리를 치는데, 대마를 피우면 환각에 빠져 인수봉에서 막 뛰어내리고 아무 데서나 오줌을 질질 싼다는 식의 영상을 제작해 문화영화, 〈대한뉴스〉에 소개하는 겁니다. 그래서 청계천 헌책방을 돌며 미군에서 흘러나온 마약 관련 책 200여 권을 구해 읽었고, 등산인과 연예인 등을 심층 인터뷰했어요. 그 결과, 현행 대마관리법이 위헌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됐습니다.
미국 뉴욕에 라과디아 공항이 있잖아요. 뉴욕시장 피오렐로 라과디아(Fiorello La Guardia·재임 1934~1945)의 이름을 땄는데 1930년대 말에 ‘라과디아 보고서’라는 게 있어요.
당시 미국서도 대마가 합법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란이 있었는데 ‘처벌은 하되 마약이나 헤로인과 다르다’는 결론을 냈어요. 그런데 누가 마약류라고 불쏘시개 역할을 했느냐 하면 담배 제조업자와 위스키 업자들이었어요. 대마가 많이 팔리면 담배와 위스키 판매가 급감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우리나라 대마관리법이 위헌이라는 주장을 논문에 담았죠.”
― 대마 피워보셨나요.
“아… 그게 문제인데. 논문 심사 교수님이 ‘자네, 피워봤나’ 그러시는 거예요. 솔직히 안 피워봤죠. 제 논문의 진실성을 교수님들이 의심하셨겠지요. ‘(대마를) 피워보지는 않았으나 심층 인터뷰 통해서…’라고 했죠.”
― 당시 대마사범이던 가수 이장희 같은 분을 만났나요.
“아뇨, 그분들보다 (유명도가) 낮은 연예인들… 등산 좋아하는 친구들과 인터뷰를 했죠.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통과가 됐어요. 당시 심사위원 세 분 중 두 분은 돌아가셨고, 한 분이 바로 이수성(李壽成) 전 총리예요. 최근 뵈었더니 아직도 40년 전 얘기를 하시는 겁니다. 이 전 총리 말씀이 ‘40년 전 그 음험하던 시절, 그런 주장을 편다는 사실이 놀라워 다른 교수를 설득했다’고 하셨어요.”
― 대마관리법이 현재도 유지되고 있고, 법 개정이 안 됐어요.
“네… 하하하, 하지만 저는 아직도 위헌이라 주장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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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 대한체육회 과장 시절 오지철(맨 오른쪽). 가운데가 허진리앙 중국 IOC 위원, 그 옆이 투밍데 중국 체육위원회 간부. |
“어릴 때부터 아마추어 평론가처럼 스포츠를 좋아했어요. 축구대표팀 감독이 되어 선수 라인업을 짜는 식으로 상상의 나래를 폈죠. 1976년 봄, 법대를 졸업하고 한국화약에 입사했는데 6개월 정도 다니다 외국계 은행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재미가 없는 거예요. 제가 숫자에 약해요. 전자계산기로 두드리면 되지만 숫자와 씨름하는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세 살 많은 형이 ‘대한체육회 과장 공채가 났다’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시험을 쳤는데 덜컥 합격하고 말았죠.
그때 대한체육회 회장이 김택수(金澤壽·1926~1982)씨였고 사무총장이 법학자인 권경식(權景植)씨였어요. 사실 체육회에 출근할 마음이 없었는데 어느 날 사무총장께서 집으로 전화를 거셨어요. ‘왜 출근을 안 하느냐’고요. ‘딱 한 명, 자네를 뽑았는데 안 나오면 어떻게 하느냐’는 거였죠. 내켜 하지 않자 ‘딱 6개월만 일해보라’는 겁니다.”
1977년 28세 때 그는 대한체육회 ‘해외협력과장’이란 직함을 달게 됐다. 그런데 운명과도 같은 일이 체육회 입사 며칠 뒤에 일어났다. 그해 6월 16일 김택수 회장이 IOC 위원으로 피선되었다.
“김 회장이 절 부르시더니 ‘너 참 고깽이다’ 그러세요. 경상도 사투리로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외국계 은행에 다닐 때 월급이 당시로선 최고액인 13만8000원을 받았는데 체육회 과장은 8만4000원, 그러니까 절반이나 깎여서 온 거예요. 월급이 반 토막인데도 오니까 웃기다고 생각한 거죠. 그땐 결혼도 안 했고 혈기방장(血氣方壯)할 때였으니까….
김 회장께서 제게 ‘IOC 스페셜 어시스턴트’ 역할을 맡기셨어요. 나쁘게 말하면 ‘가방모찌’고, 좋게 말하면 ‘해외담당 비서실장’ 같은 거예요. 그렇게 해서 IOC 위원들을 접촉하고 국제 스포츠계 지도자들을 만나러 다녔습니다. 제가 알바니아를 제외한 모든 동구권 나라에 2회 이상 나가봤어요. 러시아는 매년 갔고요.”
― 1988년 이전 말씀이죠.
“서울올림픽 전과 후에. 에피소드가 많죠. 그러나 ‘대장간에 식칼이 없다’고 할까. 제가 서울올림픽 개회식과 폐회식은 물론, 각종 경기장에도 한 번도 못 갔어요. 서울올림픽을 찾은 해외 귀빈들을 접견하고 외무부(지금의 외교부) 장관, 총리 예방을 조율하고 안내해야 하니까.”
― 그래서 ‘걸어 다니는 IOC 사전’이란 말이 나온 거군요.
“정치적 일정으로 김택수 회장이 해외에 못 나갈 때는 ‘너라도 다녀와라’고 해서 그분 편지를 전달하러 다니기도 했죠. 그게 다 서울올림픽 유치에 밑거름이 됐습니다.”
오지철 과장은 김택수 회장이 IOC 위원이 된 그날부터 ‘바덴바덴 기적’을 이뤄낸 1981년 9월 30일까지 4년6개월 동안 해외를 돌면서 유치 활동을 도왔다.
― 88서울올림픽 유치는 어떻게 시작된 겁니까.
“원래는 대한체육회에서 88올림픽보다는 86아시안게임을 유치하려 했어요. 왜? 한국이 1970년에 아시안게임을 유치했다가 부득이 포기한 경험이 있어요. 경기장 짓고 할 형편이 못 된 거지요.
그런 쓰라린 추억 때문에 아시안게임 유치를 기획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위에서 올림픽을 유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당시 체육회 입장은 ‘아시안게임도 못 한 판에 올림픽?’ 이런 회의적 입장이었죠.
왜 올림픽 이야기가 나왔냐 하면, 대통령 경호실장을 지낸 ‘피스톨 박’ 박종규(재임 1964~1974)씨가 1978년 9월 24일부터 10월 5일까지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태릉에 유치해 큰 성공을 거뒀어요. 국내 처음으로 세계선수권대회를 유치한 것이었죠. 사실 태릉은 문화재 구역인데 요즘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1979년 2월 박종규씨가 대한체육회 회장이 된 후 ‘까짓것 올림픽을 왜 못 해’ 하며 뛰어든 것입니다.”
“뒤늦게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진 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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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 북한 IOC 위원(왼쪽)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오지철. 가운데는 장충식 대한올림픽위원장(현 단국대 이사장). |
그는 대한사격연맹 회장으로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유치하고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이 대회는 개발도상국인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열린 세계적 규모의 스포츠 행사였다. 이 성공에 힘입어 당시로선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올림픽 개최의 큰 꿈을 꾸었다.
1979년 2월 취임한 대한체육회 박종규 회장은 한 달 뒤인 3월 15일 상위 기관인 문교부에다 올림픽 유치 건의서를 제출한다. 그해 9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냈다. 10월 8일 정상천(鄭相千) 서울시장은 세종문화회관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고 88서울올림픽 유치를 공식 선언했다.
“대한체육회는 당시 깜짝 놀랐어요. 이미 일본 나고야가 단독으로 입후보해 ‘88올림픽은 나고야’로 굳어지는 분위기가 IOC 위원들 사이에 있었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특이해요. 2002한일월드컵 때도 그랬지만 남들이 이미 판을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뒤따라가 뒤집어버리는…, 그러니까 뒤늦게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지는 격이에요.
당시 국제 스포츠계를 나름 안다는 실무자 입장에선 ‘순서가 아시안게임을 치른 뒤에 올림픽 하는 게 맞지 않아?’ 하는 생각을 철없이 했죠. 올림픽 유치를 군사정부다운 호기라고 생각했어요.”
오지철 해외협력과장은 서울올림픽 유치 선언 후 비밀리에 일본에 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밀사(密使) 비슷하게 일본에 간 적이 있어요. ‘우리가 88올림픽을 포기하면 86아시안게임 유치하는 데 일본이 확실하게 도와줄 수 있는지’ 타진하러 간 거죠. 일본 체육회 왈(曰), ‘우리가 어떻게 책임지냐. 일본이 만들어줄 수 없다’는 거였어요. ‘너네가 되겠어? 돈도 없는 나라가 무슨 올림픽을 해’라는 뉘앙스였어요.”
― 그때 일본 가서 누구를 만났나요.
“IOC 부위원장이던 기요카와 마사지(淸川正二)를 만났죠. 1932년 LA올림픽 때 100m 배영에서 금메달을 딴 일본의 전설적 스포츠 영웅이었어요. 이분이 나고야 출신입니다. 일본에서 ‘노(No)’ 하니까, 우리는 ‘그래? 그럼, 우리도 막 가는 거지’ 이렇게 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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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철 과장이 서울올림픽 유치 능력 점검차 방한한 이집트 IOC 위원에게 당시 건립 중인 잠실운동장 앞에서 브리핑하고 있다. |
“박종규 회장이 정치적 이유로 물러나고 뒤이어 조상호(曺相鎬) 회장이 부임했는데 그 잠복기 때도 저는 조 회장을 모시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서울올림픽 유치를 호소하고 다녔어요. 정식으로 올림픽유치위원회가 출범하기 전이었는데 말이죠. 외무부에서 파견된 전상진·김세원 대사도 열심히 뛰었어요. 두 분이 무척 적극적이었죠.”
그 무렵 조상호 회장은 새로운 정부와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재차 올림픽 유치를 추진하기로 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물론 경제부처도 부정적 기류가 강했다.
“서울시는 콧방귀를 끼었죠. 어떻게 보면 현실적인 얘기예요. 경제부처의 반대가 제일 심했어요. 일단 1981년 2월 26일 유치신청서를 냈지만, 대통령(전두환) 재가는 그해 8월 1일에야 났어요. ‘바덴바덴 기적’이 두 달 뒤인 9월 30일인데 말이죠.”
― 경쟁 도시가 나고야밖에 없었나요.
“그렇죠. 그게 운이고 국운이죠. 만일 서울 대(對) 도쿄가 붙었다면 어땠을까요? 나고야라는 일본의 중부 도시와 대한민국 서울이라는 수도가 붙었고, 다른 경쟁자가 없었다는 점, 일본은 이미 올림픽을 개최한 전례가 있다는 점, 이런 논리로 IOC 위원을 설득했어요.
아직 비화를 다 말할 수는 없고, 당시 유치 활동을 하던 분들은 다 자기 위주로 말하니까….”
그러더니 오지철 전 차관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우리 외교부(외무부) 역할이 컸어요. 새롭게 군사정부가 출범했는데 외교관들이 점수 딸 일이 뭐가 있겠어요? 일본대사가 IOC 위원 한 번 만날 때 우리는 세 번, 네 번 찾아갔으니까요. 일본대사가 안 가면, 우리는 더 열심히 찾아갔죠. 그다음에 현대·대우·한양·대한항공 같은 재벌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어요.”
86아시안게임 유치에 뛰어든 이유
결국 1981년 9월 30일 독일의 바덴바덴 IOC 총회에서 일본의 나고야를 52 대 27표로 누르고 1988년 올림픽 개최권을 따내는 개가를 올렸다. 당시 일본은 뚜껑을 열기 전 45 대 35로 나고야 우세를 점쳤다.
“전두환 정권이 일본에 60억 달러 규모의 차관을 요구해서 막 돈이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이었죠. 소련의 국제체조연맹 티토프 회장은 그 질문을 우리에게 했어요. ‘일본에서 차관을 받는 나라가 무슨 돈으로 경기장 지어’라는 식으로 말이죠.
이와 관련해 에피소드 한 장면이 떠오르네요. ‘바덴바덴 기적’ 당시 박영수 서울시장을 비롯 정주영·조상호·유창순·이원경·이원홍씨 등 6명의 한국 측 공식 대표가 앞줄에 나란히 앉아 분야별로 IOC 위원들의 질문에 답했고, ‘더글러스 리’라는 재미교포와 제가 바로 그들 뒷줄에 앉아 조력하는 역할을 했어요.
우리는 질문한 IOC 위원, 국제스포츠연맹 회장의 이름을 친근하게 불러주며 답변하기로 전략을 짰어요. 다행스럽게도 질문자 대부분이 제가 아는 분이었어요. 다만 소련의 티토프 회장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인지 안 보였어요. 누구인지 확인이 안 돼 무척 당황스러웠죠. 그때 벨기에 IOC 위원인 자크 로게 백작과 눈이 마주쳤는데 이분이 입 모양으로 ‘티토프’라고 하지 않겠어요? 얼른 메모해서 유창순 회장(당시 한국무역협회장·15대 국무총리 역임)에게 드렸죠. 질문과 답변 사이 5초가량이 지났는데 그 짧은 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졌어요. 유 회장이 ‘미스터 티토프’라는 말과 함께 답변을 하니 장내가 조용해졌고, 티토프 역시 자기를 기억해주니 싫지 않았을 겁니다.”
― 86아시안게임 유치는 어떻게 된 겁니까.
“당시 남북이 유치 대결을 했는데 막판에 북한이 포기했죠. 사실 우리가 86아시안게임 유치에 나선 것은 북한이 유치에 뛰어드니까 나섰던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서울올림픽을 유치하자 북한이 김이 새서 포기하고 말았어요. 우리는 거저 얻은 것이죠.”
뜻밖의 해외연수와 법학박사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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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우즈베키스탄공화국 체육부 고위간부 주최 만찬에서 체육부 오지철 과장과 김광림 당시 경제기획원 과장(현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
“유치가 확정되고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가 출범했어요. 위원장에 김용식(金溶植) 외무부 장관, 사무총장에 이원경(李源京·훗날 외무부 장관, 체육부 장관 역임)씨가 내정됐는데 그분들이 조상호 회장에게 저를 조직위로 보내달라고 요구했죠. 조 회장이 ‘노’ 하셨어요.
그리고 1982년 3월 20일 체육부가 만들어졌는데 초대 장관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정무장관에 있다가 오셨죠. 사실 서울올림픽을 유치할 때 전두환·노태우 두 분이 깊이 관여했다고 훗날 들었어요.”
체육부는 각 부처 공무원의 자원으로 구성됐는데, 이외 딱 두 명의 민간인도 참여했다. 한 명은 《서울신문》 체육부 기자 출신의 최창신(崔昌新), 다른 한 명이 오지철이었다.
“체육부 해외협력담당관 일은 제가 체육회 과장 때부터 하던 일이었어요. 공무원 중에 누굴 시키려니 해본 놈이 있어야죠. 외무부 공무원에게 맡길까 했는데 체육외교를 누가 해봤어야지. 그래서 차출 비슷하게 체육부 별정직 4급 서기관으로 특채가 됐습니다.
그때 유학 대신 공무원이 되려고 마음을 굳힌 것은 어찌 보면 매우 현실적인 이유죠. 체육회 과장 시절, 외무부와 문교부를 들락날락했는데 그때마다 신분증을 맡기고 방문증 명찰을 달아야 했습니다. 체육부로 오라니까 ‘이제 방문증은 없어도 되는구나’ 싶었죠.
다행히 신설 부처라 텃세가 없고 나이가 어려 예뻐해주고, 전문성도 있어서 장관실 해외 업무에서 의전, 스포츠외교까지 다 할 수 있었어요.
이후 체육부 장관이 계속 바뀌는데 제가 계속 4급 별정직 과장에 있으니까 몇 분이 걱정해주셨어요. 승진하려면 별정직 국장 자리가 비어야 갈 수 있는데, 그렇게 10년을 일하다가 전직(轉職) 시험에 합격해 일반직 공무원이 되었고, 2년 후에 국제체육국장으로 승진할 수 있었어요.”
체육부는 1991년 체육청소년부로 개편되었다가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과 동시에 문화부와 합병해 문화체육관광부가 된다. 2000명의 문화부에 200명의 체육청소년부가 흡수 통합된 것이다.
“이 대목에서 박사학위를 딴 이야기를 좀 할까요? 체육청소년부 시절, 그러니까 문화부와 통합이 결정된 시점이었는데 국장급 중에 연수를 다녀와야 했어요. 그런데 선배들 중에 누구도 자원하는 이가 없었어요. 왜냐? 연수 갔다 오면 자기 자리가 없어질까 싶어서죠. 그래서 제가 번쩍 손을 들었어요.
며칠 뒤 당시 이해봉(李海鳳) 체육청소년부 차관이 ‘공무원 교육원 가서 뭘 배우겠냐’며 정문화(鄭文和) 총무처 차관에게 전화를 거셨어요. 두 분이 절친 사이셨죠. 이 차관께서 ‘체육청소년부 해외연수 T.O를 한 명 더 해달라’고 부탁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미국 연수를 갈 수 있었어요. 얼마나 놀라고 고마웠는지. 그때 연수를 안 갔다면 박사논문을 못 썼을 겁니다.”
그가 하버드대학 로스쿨 객원연구원(visiting scholar) 자격으로 1년간 연수 다녀온 뒤 1995년 2월에 통과된 박사학위 논문이 <러시아의 사회변혁 기간 중 범죄 현상에 대한 연구: 1988~1992년을 중심으로>다. 스포츠외교 전문가와 좀 어울리지 않는 형법 관련 논문이었다.
2032 올림픽 남북 공동 개최를 하려면…

― 2002한일월드컵 유치와 관련한 비화가 궁금해요.
“1993년 김영삼 정부 때 유치 이야기가 처음 나왔는데 사실은 정몽준(鄭夢準) 전 의원의 아이디어예요. 제가 1992년 체육청소년부 국제체육국장 할 때였는데 대한축구협회 회장에 당선돼 제 방을 찾아왔어요. 우리 인연은 1981년 독일의 바덴바덴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아버지 정주영 회장을 지원하러 그곳에 왔을 때 처음 인사했죠.
하여튼 정몽준 회장이 월드컵 유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저는 생각이 달랐어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솔직히 그랬어요. ‘U20 세계청소년축구대회 유치도 하려다 못 했는데 그것 먼저 하고 월드컵을 유치하면 좋겠다’고 했죠. 제 이야기는 ‘오서독스’한 이야기였고, 아마 정 회장의 귀엔 안 들렸을 거예요. 선대(先代) 회장처럼 그 아들도 저돌적으로 덤벼든 것이죠.
그런데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고 어떻게 이야기가 오갔는지 월드컵 유치를 하라는 ‘오더’가 문체부로 내려온 거예요. 제가 미국 연수에서 돌아와 국립현대미술관 사무국장으로 있을 때였죠. 열심히 그림 공부하며 작품도 구입하고 화가도 만나고 있는데, 문체부 차관과 기획관리실장이 절 부르더니 ‘월드컵 유치를 해야겠는데 국제체육국장을 한 번 더 해야겠다’는 겁니다. 사실, 저는 문화산업국장으로 가기로 돼 있었어요.
그렇게 국제체육국장을 두 번 하게 됐죠. 체육부 때 한 번, 문체부 때 한 번. 그때도 나고야 못지않게 FIFA 내에 일본 분위기가 드셌어요.
그런데 뒤늦게 우리가 뛰어들었고 노력 끝에 추월 직전, 아니 뒤집는 상황까지 만든 것이죠. 그랬더니 IOC 위원장이 FIFA 측과 이야기해서 ‘이쯤에서 공동개최하라’고 제안하는 겁니다. 정몽준 회장이 반대하고 우리 역시 반대했죠. 완전히 역전해 결승선에 닿기 직전이었거든요.”
― 추월 비결은?
“축구에 관한 한 일본보다 한국이 훨씬 앞선 게 주효했어요. 월드컵 본선에 한국이 더 많이 진출하고 아시아의 축구 종주국은 한국이라는 이미지가 통한 것이죠.”
― 어떤 전략으로 FIFA 집행위원에게 접근했나요.
“위원들 개개인의 기호에 맞게 일대일로 접촉해 한국의 유치 논리를 설득했어요.”
― 접촉 과정에서 돈도 썼습니까.
“돈은 안 썼어요. 우리는 국가 역량을 총동원했는데 일본은 달랐어요. 예를 들어 88올림픽 때는 ‘나고야와 아이치현(愛知県)’ 대 ‘대한민국과 서울’의 싸움이었어요. 일본의 국력이 아무리 세도 서울과 나고야는 비교가 안 되죠.
2002월드컵 때도 우리는 국민·기업·정부가 똘똘 뭉쳐 전방위로 달렸는데 일본은 자국 축구협회와 ‘덴쓰’라는 광고업체가 홍보를 전담하는 수준이었어요. 그래서 2020도쿄올림픽 유치 때는 아베 정부가 과거의 실패를 거울 삼아 정부 차원에서 적극 나섰다고 해요.”
지난해 9월 19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정상회담에서 2032년 하계올림픽을 남북이 공동 유치하기로 했다. 지난 1월 7일 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2032년 올림픽을 남북 공동으로 개최하고, 도쿄올림픽 공동 입장과 단일팀을 위한 협의도 계속해나가자”고 제안했다.
― 남북 올림픽 유치와 관련해 덕담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남북 올림픽 유치) 되면 참 좋죠. 그러나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쉽지 않을 거예요. 남북이 지금보다 훨씬 관계가 개선돼야 가능합니다. 또 북한의 교통, 통신, 인적·물적 교류 등 외부 세계를 향한 개방이 전제돼야 해요. 우리는 별 문제가 없어요. 하지만 북한의 변화가 없으면 어려워요. 여러 장애를 이겨내고 공동 유치가 남북 교류 협력의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