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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인간탐험

金壽根 뒤를 잇는 공간건축 李祥林의 苦言

“엑스트라오디너리(extraordinary)한 최고 건축가 되려면… 문화 國格 높아야”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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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은 ‘건축주가 원하는 바를 실현시켜주는 것’… ‘건축가의 의지’는 마지막 고려 대상
⊙ “돈을 적게 쓰면 훌륭한 작품은 나올 수 있어도, 아주 좋은 작품은 못 나와”
⊙ “건축가는 삶의 이해가 더 중요. 건축가는 타락한 세상과 맞서야”(오스카 니마이어)

이상림
1955년생. 서울고·한양대 건축학과.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학 대학원 졸업. 한양대 박사 / 現 공간그룹 대표이사, 한국건축가협회명예건축가회 의장, 한국건축단체연합 명예회장, 미국건축가협회 명예회원, 일본건축가협회 명예회원 / 다수의 건축상과 화관문화훈장 수상
사진=조준우
  종합건축사무소 ‘공간그룹’이 2020년 창립 60주년, 환갑을 맞았다. 이상림(李祥林·65) 대표는 감개가 무량하다. 그의 머릿속엔 벌써 100주년을 떠올리지만 아직은 아득하기만 하다. 문득 대선배 김수근(金壽根·1931~1986)이 떠오르고, 장세양(張世洋·1947~1996)이 떠오르고, 자신의 까까머리 고교 시절이 떠오른다.
 
  “저 검은 벽돌 건물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곳일까?”
 
  서울고 시절, 통학길인 안국동 로터리에 서서 비원 쪽을 바라다보면 ‘空間(공간) SPACE’라고 쓰인 검은색 벽돌 건물이 있었다. 집에서 오래된 신문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의문을 풀었다. 신문에는 그 벽돌집과 뿔테 안경, 곱슬머리 중년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쭈그려 앉은 채로 신문 기사를 읽어 내렸다. 김수근이란 이름을 처음 접한 날이었는데 평생을 그 이름과 같이 살 줄 그땐 몰랐다.
 
  그가 한양대 건축과 74학번으로 입학한 것도 운명 때문인지 모른다. 서울 종로구 원서동 검은 벽돌집이 첫 일터, 평생직장이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81년 입사해 김수근이 떠난, 그리고 장세양이 떠난 공간건축의 대표로 부임한 것은 1996년이었다.
 
  이상림 대표는 “김수근과 장세양이라는 최고의 스승과 선배를 만났고,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한다. “김수근 선생을 실제로 뵙고 겪은 것은 단 6년. 이후 저는 장세양 선배를 통해 김수근을 더욱 가깝게 모실 수 있었다”고 한다.
 
  공간의 신화는 1960년 패기만만한 젊은 건축가의 귀국으로 시작된다. 서른 살 청년 김수근. 서구 건축기술을 배운 그는 88서울올림픽 주경기장, 워커힐호텔, 정동 문화방송(현 경향신문) 등을 설계하며 건축사의 새 장을 열어갔다.
 
  6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공간은 어떤 모습일까. 설계인원 130명, 해외지사는 인도와 알제리 두 곳에 있다. 매출은 200억원 정도. 한창 잘나갈 때보다 외형은 줄었지만, 건축설계 조직의 내실은 더 단단해졌다. 2019년부터 건설관리(CM) 분야에 다시 관심을 갖고 있다.
 
  기자가 그를 만난 것은 2019년 12월 5일 오전 10시. 남산 1호터널을 빠져나가자마자 골목으로 이어진 길로 들어섰다. 택시에서 내려 이상하게도 20분간을 헤매었다. 그리고 공간 사옥에서 수염을 멋지게 기른 이 대표를 만났다.
 
 
  空間 창립 60주년의 의미는…
 
서울 종로구 원서동 옛 공간 사옥 모습이다.
  ― 남산 사옥(퇴계로 36가길 104)으로만 출근하나요? 저기(원서동 옛 사옥)는 안 가세요?
 
  “가면 좋은데 참 가슴 아프죠. 갈 수 없으니까….”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이 대표의 아픈 곳을 만졌는지 모른다. 공간은 2012년 12월 법정관리 신청을 했고 1년2개월 만에 조기 졸업했다. 이 과정에서 원서동 사옥을 150억원에 아라리오 갤러리에다 매각했다.
 
  “원서동 옛 사옥에서 33년간 일했는데 거기 얽힌 이야기가 엄청나게 많아요.”
 
  옛 공간 사옥은 지난 1971년 앞쪽 절반이 지어졌고, 그 뒤 77년 무렵 증축을 끝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은 향토 재료인 ‘전돌’을 사용했는데, 공간 크기와 배열을 한국화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는 평가를 당시 받았다. 전돌이란 우리나라의 고궁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검은 벽돌. 이런 벽돌이 서양 건축재료의 수입으로 자취를 감췄다가 살아난 것이다. 계속된 이 대표의 말이다.
 
  “김수근 선생이 86년 돌아가시고 장세양 대표가 뒤를 이으셨는데 유리로 된 건물설계를 끝내시고 갑자기 돌아가셨죠. 이후 공사에 착공했고 6~7년 있다가 한옥을 현대 측으로부터 매입, 오늘날 볼 수 있는 벽돌과 한옥, 유리로 된 3가지 형태의 건물이 완성된 것이죠.”
 
공간건축에 입사한 이듬해인 1982년 이상림 사원의 모습이다.
  ― 김수근 선생이 계실 때의 ‘공간’과 지금의 ‘공간’은 어떻게 다른가요.
 
  “1988년 서울올림픽 때 김수근의 공간은 메인스타디움을 비롯해 수영장, 체조경기장, 자전거 벨로드롬 등 야구장을 뺀 모든 경기장을 설계했어요. 한 사람이 모두 설계한다는 게 맞지 않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때는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만큼 김수근의 위상이 컸다고 볼 수 있어요.
 
  2002년 한일월드컵을 즈음해 국내 10곳에 축구장을 짓는다는 공고가 붙었죠. 그때 제가 ‘우리가 다는 못 지어도 절반은 해야지’ 하는 목표를 내심 세웠는데 부산과 광주 두 곳에 만족해야 했어요. 강릉과 전주도 거의 낙점될 뻔했지만 잘 안 됐어요. 우리 역량이 ‘요만큼’이었던 거죠. 그래도 그때만 해도 해외지사를 여러 곳 갖고 있어서 전 세계에 도전하겠다고 겁 없는 생각을 할 때였어요.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때는 어땠을까요?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으로 구성된 97.7m 높이의 알펜시아 스키 점프대 한 곳이었지만 그걸 우리가 해냈죠.
 
  생각하니 지난 60년간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었는데 좋은 일이 다 좋은 일이 아니었고, 나쁜 일이 다 나쁜 일도 아니었던 것 같아요. 또 이게 다는 아니고, 향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 60주년,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으신가요.
 
  “1960년 당시 대한민국이 모든 면이 열악할 때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부침을 이어온 공간은… 인간이 라이프스팬(壽命)이 바뀌면서 60주년 의미는 상대적으로 축소됐으나 ‘변화’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지난 세월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李祥林이 말하는 金壽根
 
  한국 현대건축의 마에스트로
 
  김수근 선생은 일본 유학 중이던 1960년,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남산 국회의사당 현상설계 공모전에서 1등으로 당선되면서 일약 한국 건축계의 샛별로 떠올랐다.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이 바뀌어 남산 국회의사당은 지어지지 못했지만 남산 자유센터, 타워호텔, 문화방송국, 한국일보사 등의 건축물은 철근 콘크리트의 조소적 가능성을 탐색한 일련의 작업들로 주목받았다. 그 후로 마산 양덕성당, 진주박물관,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 등의 뛰어난 건축물을 남기기에 이르렀다.
 
  미국 《타임》지가 “한국에서 가장 경탄할 만한 훌륭한 건축가”라고 평을 쓸 만큼 독보적인 족적을 남긴 선생은 우리나라에 ‘건축이 곧 예술’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지평을 연 한국 현대건축의 마에스트로다.
 
  도쿄와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 건설비, 1조3000억 vs 5000억
 
10년에 걸쳐 이상림 대표의 땀과 열정이 담긴 부산아시아드 경기장 전경이다.
  이상림 대표는 공간의 책임자라는 직함 외에 현재 한국건축가협회명예건축가회 의장이며 한국건축단체연합 명예회장, 미국 건축가협회 명예회원, 일본 건축가협회 명예회원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건축을 배우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기자는 인터뷰를 준비하며 그가 쓴 책들을 찾아 읽어보았다. 《건축가가 말하는 건축가》 《희망을 짓는 건축가 이야기: 사무엘 막비와 루럴 스튜디오》를 읽으며 건축에 대한 그의 철학을 짐작해보았다. 《건축가가 말하는…》에 나오는 이 구절(13쪽)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아직도 건축을 배우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건축이 무엇이라 말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다만 지금 내가 추구하는 건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세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우선 ‘건축주가 원하는 바를 실현시켜주는 것’이다. 사실 건축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다음이 ‘사회가 원하는 요구를 실현하는 것’ ‘땅이 원하는 요구를 실현하는 것’이다. 어느 곳이든지 그곳에 제일 어울리는 건축이 따로 있기 마련이다. ‘건축가의 의지’는 나에게 있어 마지막 고려 대상이다.〉
 
  ‘건축가의 의지’를 맨 뒤에 세운 그의 겸손함에 애정이 갔다. 이 대표와 오래 대화를 나누다 보니 말투 속에 섬세함과 깊이가 묻어났다.
 
  “한국의 건축은 너무 ‘우물 안 개구리’ 같아요. 물론 해외에서 건축 공부도 많이 하고 해외 건축가들이 국내에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우리 건축은 다른 분야에 비해 글로벌화되지 못하고 세계 건축을 리드하지 못하고 있어요.
 
  K팝이나 BTS가 차지하는 위상에 비하면 한국 건축에 대해 자괴감이 들어요. 왜 그럴까요?
 
  결국은 건축하는 사람의 책임이고, 나머지는 주변의 책임인데…. 그걸, 책임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건축에 대한 인식이 모자란다는 것인데…, 그 모자라는 인식의 저변에는 5000년이란 대한민국의 역사가 쌓아놓은 축적… 이런 것들이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어요. 국민 심성이 그래서인지 모르나 남의 나라를 좀 침략하고 빼앗아왔으면 어땠을까요? 식민지 시대, 서구 열강들이 쌓은 문화적 역량처럼 말이죠. 현존하는 세계문화유산이 다 그렇잖아요.
 
  1964년 도쿄올림픽 당시 주경기장을 지을 때 1조3000억원이 들었다고 합니다. 당초 2조5000억원이 든다는 것을 2~3년 동안 깎아서 그런 액수가 만들어졌죠. 88서울올림픽 당시 주경기장을 지을 때 우리는 4000억~5000억원이 들었습니다.
 
  그럼, 돈 많이 들면 다 좋으냐? 물론 그렇지 않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돈을 적게 쓰면 훌륭한 작품은 나올 수 있어도, 아주 좋은 작품은 못 나옵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좋은 건축물은 좋은 아이디어의 창조자가 있었지만, 그를 돕는 대단한 후원자도 있었어요. 지금의 대한민국엔 그런 (창조적) 생각을 지닌 이는 있으나 경제적인 능력을 갖춘 이는 비교적 적다고 봅니다.
 
  또 해외에서 좋은 건축가를 모셔오면 처음엔 아이디어만 가지고 시작하지만, 완성을 잘 못 해요. 그러다 보니 그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지은 건축물을 ‘인생 대표작’으로 말하는 이가 거의 없습니다. 완성을 못 시켜서 그런 것이죠.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는 말처럼 건축도 세밀하게 하나하나 이뤄가야 하는데 그게 안 됐던 거죠. 하지만 산업화가 더 진전되고 부의 축적이 이뤄지면 자연스레 그런 안목이 생겨나지 않을까 생각해요. 건축은 어찌 됐든 혼자 하는 일은 아니니까….”
 
 
 
“당신은 전문가니까 내가 이야기하면 이렇게 착착착 만들어”

 
  ― 그러고 보면 한국문학도 ‘대하(大河)’라고 붙이거나 ‘대문호(大文豪)’라고 부를 작품이나 작가가 손으로 꼽을 정도인 것 같아요.
 
  “그런 면이 있다고 봅니다. 관련이 있어요. 글도 ‘짓는다’고 하고 집도 ‘짓는다’고 하죠. 어떤 작품 속에 사상이나 철학이 부족한 것이 일제 강점기 때 끊겨서 그럴까, 하는 생각을 해봤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아니면, 우리가 가진 것을 스스로 못 알아차려 그렇나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일제 강점기, 6·25를 거쳐 현재까지 각 시대별로 정신을 담은 건축물이 많이 생성돼왔죠. 과거에 비해 그런 철학을 내재한 건축물 출현이 적다는 의견도 있으나 대한민국의 성장주기에 따라 많은 변천을 하고 있다고 봐요.”
 
  ―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 연주자도 한국과 중국, 일본마다 연주 스케일이 다르더군요.
 
  “중국 건축가의 스케일이 확실히 커요. 기술력에서 세밀한 면이 부족해서 그렇지 돈이 없어 못 하는 건 없다고 봐요. 국내에서 볼 수 없는 것이 요즘 중국서 많이 나옵니다. 2019년 9월에 개항한 베이징 다싱 국제공항을 보세요. 엄청나잖아요.
 
  얼마 전 김환기(金煥基·1913~1974) 화백의 1971년 작 〈우주〉가 홍콩 경매시장에서 131억원에 낙찰됐는데, 중국 작가들은 거기에 동그라미가 하나씩 더 붙어요.”
 
  그러더니 이 대표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건축가와 건축주는 클라이언트(client) 관계이지 갑을(甲乙) 관계가 아닙니다. 고용주(employer)와 고용인(employee) 사이도 아닙니다. 변호사도 의뢰인을 클라이언트라 부르잖아요. 한마디로 ‘같이 가는’ 동행(同行) 관계죠.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이용해 결과를 만들어내긴 어려워요. 그러나 우리나라 건축주들은 건축가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로, 자기 생각을 구현해주는 사람 정도로 여깁니다. 그렇게 해선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습니다.
 
  저는 건축주에게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고 늘 강조하는데, 그분들은 잘 이해가 안 되나 봐요. ‘당신은 전문가니까 내가 이야기하면 이렇게 착착착 만들면 돼’라는 생각을 하더군요.”
 
  이 대표는 이런 예를 들었다. “국내에서 대규모 예술 공연장을 완성하면 대통령, 관련 부처 장관이 다 오지만 설계한 건축가는 초청을 안 한다. 건축가에 대한 대우가 좋아져야 건축물의 수준과 문화, 사회, 나아가 국가 전체의 격이 높아진다. 건축가를 ‘일꾼’의 개념으로 보는 건축주는 건물을 망친다”는 것이다.
 
 
  건축문화와 國格
 
이상림 대표가 설계한 남극기지의 현장 모습이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국내 건축계에서 김수근 선생의 위상이 컸잖아요. 국가 건축물을 완공했을 때 정부는 선생을 전면에 세우지 않았어요. 정치인, 담당 공무원이 자기네끼리 서열을 정해 기념행사를 하고 인사말을 하지 건축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안 했습니다. 그냥 설계비를 주고 시킨 것으로 끝이 났어요.
 
  그렇게 하니 본인들이 더 좋은 것을 못 갖는 거예요. 상대를 존경하면 본인이 더 올라가는데 말이죠. 베를린 국회의사당이라 부르는 ‘라이히슈타크(Reichstag)’를 영국의 건축가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가 리노베이션을 했어요. 새 의사당이 완공되자 포스터가 은색 대형 열쇠를 볼프강 티어제 하원의장에게 건넸거든요. 정말 멋있잖아요. 수많은 설계자, 엔지니어, 협력자들을 대표해서 열쇠를 건넨 것이죠.
 
  역으로 생각하면 노먼 포스터만 한 건축가가 우리나라에 아직 안 나왔기 때문일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왜 안 불러주느냐를 말하기보다 부를 만한 사람이 먼저 돼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하하하.”
 
  ― 결국은 문화네요.
 
  “네, 문화고 대한민국 국격(國格)입니다.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평균율로 얘기해도 많이 낮다고 봐요. 문화의 격이 높은 나라 중에는 정치인이 의도적으로 격을 끌어올린 경우도 있어요.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은 재임 시절, 많은 문화예술인을 키웠지만 특별히 건축가를 많이 사랑했죠. 대표적인 이가 도미니크 페로(Dominique Perrault)인데, 상당히 젊은 나이인데도 격려해주었어요. 국내에 지은 그의 대표작이 이화여대 서울캠퍼스의 ‘ECC(Ewha Campus Complex)’입니다. 웅장한 계곡을 연상시키는 건축물 말이죠.”
 
  ― 그래도 건축을 대하는 사람들의 시각이 달라진 것도 사실이죠.
 
  “대통령 소속 국가건축정책위원회(위원장 승효상)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2년마다 (위원장) 임기가 바뀌는데 기대를 많이 걸고 있어요.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몇 개 시스템을 바꾸면 생각들도 바꾸게 되죠.
 
  지난 2년을 돌아보면 국가 건축물이 예전에는 턴키(turn-key·일괄수주계약)를 많이 했는데 요즘은 현상공모를 합니다. 어떤 것이 좋다 나쁘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턴키로 가야 좋은 프로젝트가 있고 현상으로 가야 좋은 건축 프로젝트가 있죠.
 
  차이라면, 무게중심이 턴키에 있으면 건설 쪽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립니다. 현상으로 하면 건축 쪽에 더 가죠. 지금처럼 바뀌면(현상에 무게가 실리면) 자연적으로 건축가에게 많은 일을 시키게 되고, 건축의 아웃풋이 조금 더 좋아지지 않을까요?”
 
 
 
엑스트라오디너리와 에고이스트

 
  이상림 대표는 10여 년 전인 2005년 10월 세계적인 건축가 오스카 니마이어(Oscar Niemeyer)를 브라질에 찾아가 만난 적이 있다. 브라질의 수도는 리우나 상파울루가 아니라 브라질리아다. 대표적인 계획도시 브라질리아를 계획한 주인공이 니마이어다.
 
  니마이어는 이 대표와 만나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인용하면 이렇다.
 
  “건축가는 전문적인 학교를 졸업하기보다 삶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건축가는 타락한 세상에 맞서 정의롭게 대처할 줄 알아야 한다. 건축은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지만, 삶은 건축을 변화시킬 수 있다.”
 
  ‘건축가는 타락한 세상과 맞서야 한다’는 니마이어의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계속된 이 대표 말이다.
 
  “그러니까 니마이어가 100세 때 저랑 만난 겁니다. 그리고 107세 때 돌아가셨죠. 저와 3시간가량 이야기하는데 밖에서 사람들이 웅성웅성해요. 뭔가 했는데 공무원들이 찾아와 50년 전 브라질리아 설계도면을 내밀며 ‘이렇게 하면 괜찮겠습니까’ 하고 묻는 거예요.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나라 건축가들은 이제 ‘평균 이상’은 합니다. 나쁘게는 안 해요. ‘엑스트라오디너리(extraordinary·보기 드문, 최고의)’는 아닐지 몰라요. 니마이어 같은 분이야말로 ‘엑스트라오디너리’죠.
 
  요즘 인도에서 일하는데, 인도는 영국의 영향인지 몰라도 ‘건축가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자꾸 물어요. 물론 설계비를 줄이려고 노력은 하지만 ‘건축가가 이렇게 생각하면 자기네도 그렇게 하겠다’는 겁니다. 그런 것이 결국 나라가 가난하다, 가난하지 않다를 떠나 문화의 격, 국격, 그런 차이가 아닐까 싶어요.
 
  물론 반대의 이야기도 있어요. 건축은 굉장히 에고이스트(egoist·이기주의자)가 많잖아요.”
 
  ― 이 대표, 본인은 어떠신가요.
 
  “저는 비교적 탈피하려고 하는데, 재주가 없어 그럴 거라 생각해요.(웃음) 재주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점점 에고이스트가 되고, 남의 돈(자본)으로 자기 작품 활동을 하려 해요. 물론 그것도 좋다고 봅니다. 그 활동이 불후(不朽)의 작품을 남기게 되면 그것도 해볼 만하죠.
 
  그런데 건축물은 공공의 성격이 강하잖아요. ‘공공적’이란 의미는 시각적으로 보기 싫어도 봐야 하고, 공간·기능적으로 여러 사람이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거든요. 그럴 경우 문제가 생겨요.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자기가 가고자 하는 길로만 가려는 사람, 남의 말을 안 듣는 사람, 남의 돈으로 본인의 작품을 하려는 에고이스트들은 심각한 문제를 낳죠. 그런 면에서 건축 분야에 윤리 교육이 굉장히 필요해요. 지금 하는 일이 자신의 만족인지, 공공의 만족인지, 클라이언트의 만족인지…. 그게 참 어렵습니다.
 
  건축가와 건축주, 공공의 목적 사이에 자신을 앉히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건축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과시가 강합니다. 조금 무르익으면 (과시가) 많이 줄어드는데 대신 창작력도 같이 줄어듭니다. 그래서 대가들을 보면, 초기 작품은 날카롭고 좋아요. 말년에 가면 대작이 나옵니다. 다 어울려서 (작품이) 나오나 봅니다.”
 
 
  서울이 뉴욕, 파리가 되려면…
 

  ― 이 대표께서도 이미 대작을 많이 내놓으셨죠?
 
  “저는 뭐 초기 작품도 좋은 게 없고 죽기 전까지 한 개라도 남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하하하.”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사비나 미술관, 부산아시아드 경기장, 정부 세종 2청사(국세청・한국정책방송원), 경기도청사, 남극 장보고 과학기지, 서울중앙우체국, 모로코 카사블랑카 스타디움, 르완다 인터콘티넨탈호텔 등이 있다.
 
  기자는 대표작 중의 하나인 부산아시아드 경기장에 눈길이 갔다. 설계에서 시공까지 10년이 걸린 건축물이다. 경기장 직경이 330m로 현존하는 최장 케이블 구장이다. 처음엔 개폐가 가능한 지붕을 계획했으나 IMF 영향으로 계획이 변경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최근 완공한 서울 진관동의 사비나 미술관도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설계부터 예술가들과 협업하여 예술품을 설치했고, 부지가 협소해 추가 부지를 확보해 재설계했다.
 
  ― 지나친 겸손이십니다.
 
  “대작이라면 공공 발주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하게 되죠. 좋은 발주자를 만났을 때는 참 좋았어요.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있죠. 일종의 갑질인데, 갑질은 얼마든지 해도 괜찮지만, 건축물의 형태라든지 기능, 재료까지 개인의 기호에 맞추려는 분이 있었죠.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영원히 있지도 않아요. 잠시 머물다 가는데 짧은 기간 자기 뜻대로 해놓으면 뒤에 오는 이가 바꾸기 어렵죠. 정말, 공직에 있는 분들도 윤리의식이 투철해야 합니다.”
 
  ― 인상에 남는 프로젝트, 인상적인 관료가 있으면 소개해주세요.
 
  “제가 운이 좋게도 남들이 하지 않은 프로젝트를 많이 맡았어요. 영월과 김해, 장흥에 있는 천문대를 제가 다 설계했죠. 또 국내 처음으로 굴뚝 없는 화장장을 만들었어요. 벽제 화장장이 대표적입니다.
 
  관료라면… 영월에 있는 별마로 천문대를 설계할 때 군청 관광과장께서 우리 사무실로 직접 찾아왔는데 그 열정과 아이디어, 책임감 등이 제가 지금까지 만난 공무원 중 최고였어요.”
 
  ― 로마와 파리, 뉴욕과 비교해 수도 서울의 경쟁력을 높이는 방안이 있을까요. 또 강남을 어떻게 변모시키면 좋을까요.
 
  “서울의 도시경쟁력이 국가의 힘이 되려면 나름의 색깔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람이 살기에 행복해야 하죠. 구도심을 보존하면서 신시가지가 갖는 효율을 결합하면 자연과 어우러져 세계 상위의 도시가 될 수 있어요.
 
  전통과 첨단, 자연과 도시, 다양한 문화와 예술이 넘치는 에너지의 맥스믹스(MAXMIX)는 서울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함이 될 수 있어요.
 
  강남은 부(副)도심을 중심으로 첨단 스마트 시티를 구현하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코엑스와 잠실운동장 주변은 MICE 산업을 중심으로, 여의도는 금융, 홍대는 K팝과 예능, 광화문은 외교·행정, 서초동은 예술, 마곡은 첨단 디지털 중심…. 이런 강점을 살려 접목시켜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 한 가지만 더요. 10년 뒤 강북의 도시계획과 재개발의 밑그림을 그려주세요.
 
  “과거 북촌은 규제 일변도의 정책으로 그 일대가 묶여 있었죠. 고건 서울시장 때 많은 예산을 투입해 주민 참여를 이끌었어요. 북촌의 사례는 좋은 본보기가 되어 서촌, 가로수길, 연남동, 홍대 등으로 확산이 됐죠. 10년 뒤 강북의 그림은 민간 주도로 역사와 문화 생태계를 반영한 개발이 돼야 해요. 그러려면 공공 영역에서 세제 혜택을 비롯한 많은 아이디어로 민간의 참여를 견인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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