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대의 양동근은 불. 휘발유를 마구 부으면서 다녔어”
⊙ “30대에 사춘기를 겪은 거야. 그래서 마흔을 몹시 기다렸다구”
⊙ ‘양동근의 탈’을 뒤집어쓴 火魔 양동근… 내면 연기는 깊어지고 눈빛은 날카로워져
⊙ “영어로 된 외국 랩 가사를 몇천 번씩 듣고 외울 때까지 들어”… 외국어 연기에 자신감
⊙ “내 꿈보다 아내의 꿈, 아이들의 꿈을 위해 난 오늘 하루 묵묵히 살아”
⊙ “30대에 사춘기를 겪은 거야. 그래서 마흔을 몹시 기다렸다구”
⊙ ‘양동근의 탈’을 뒤집어쓴 火魔 양동근… 내면 연기는 깊어지고 눈빛은 날카로워져
⊙ “영어로 된 외국 랩 가사를 몇천 번씩 듣고 외울 때까지 들어”… 외국어 연기에 자신감
⊙ “내 꿈보다 아내의 꿈, 아이들의 꿈을 위해 난 오늘 하루 묵묵히 살아”
- 사진=조현호
나이 마흔의 양동근(梁東根). 아역 배우 출신의 그가 불혹(不惑)이 됐다. 그가 22살 무렵 인터뷰에서 레게 스타일의 가발, 허름한 티셔츠, 힙합 바지 차림으로 이런 말을 했다.
“자유분방한 20대니까 이러는 거죠. 제가 40대가 되면 그땐 저도 20대들의 행동을 이해 못할걸요? 아마….”
세월이 흘러 드디어 마흔이 됐다. 연기경력은 무려 30년.
마흔과 30년… 왜 이리 낯설까? 엇박자처럼 양동근의 존재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때로 날카롭고 응어리가 맺혀 있을 것만 같지만, 왠지 헐렁한 옷 같은 양동근이 20대라면 마흔의 양동근은 예의 의뭉스런 말투를 찾기 어렵다. 더 솔직하게 더 사실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 말투에서 재치가 읽힌다.
무엇보다 마흔의 양동근이 스무 살의 양동근을 어떻게 느끼는지 궁금했다. 지난 9월 초 서울 강남구의 한 영화사에서 그를 만났다.
시종 그는 마흔의 진중함으로 기자를 대했다. 우리는 서로를 높이며 대화를 나눴지만 20대의 반말로 인터뷰를 정리할 생각이다. 왜냐고? 이 글을 통해 양동근의 펄펄 끓어 넘쳤던 20대, 앙앙불락하던 30대와 이별하기 위해서다. 이제는 야생마 ‘창국’(영화 〈수취인불명〉의 혼혈아), 고결한 쓰레기 인생 ‘고복수’(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주인공)를 잊어야 한다.
— 올해 마흔, 연기생활 30년…. 그렇지?
“맞아. 내세울 게 그것밖에 없어.”
— 마흔의 양동근, 너는 누구니.
“와, 감동이야. 인터뷰를 많이 해 봤지만 이런 건 처음이야. 나 흥분했어. 2018년 최고의 인터뷰인 것 같아.”
— 됐고, 너 누구니.
“나?… 나는 마흔을 꿈꿔 온 사람이야. 마흔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했다구. 서른 중반을 지나면서, 지나간 20대와 맞이할 40대를 준비했어. 어떻게 내가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현실을) 받아들이며 살아야 할지를 서른 중반부터 고민해 왔다고. 이제 나는 마흔이야.”
— 서른 중반에 왜?
“그때 결혼하고 애 낳을 때쯤, 내 모든 것이 바뀌는 시점이었거든.
서른에 군(軍)엘 갔어. 20대 때 나름 열심히 일했지만 군에 가서 통장에 ‘0’이란 잔고를 찍고 말았어. 다시 나와서(제대하고) 일을 열심히 해 보려 하다가… 결혼을 생각하고 아이를 낳고… 음… 어떤 화려한 시절과는 다른, 내리막길… 추운 겨울을 지냈어.
속으로 이렇게 말했어. ‘개구리가 겨우내 움츠리고 있는 것이 이런 건가?’ 하고. 더는 20대의 양동근으로 살 수 없었어. 가장(家長) 양동근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아빠로 태어나기 위해 (20대의) 양동근이 죽어야 하는… 그런 시간을 겪으며 30대를 보냈어.”
— 무슨 표현이 인터뷰 시작부터… 세니.
“어제 박경림씨와 잠깐 얘기했는데 그게 ‘사춘기’라고 하더라. 그러니까 난 사춘기를 굉장히 늦게… 30대에 사춘기를 겪은 거지. 그래서 마흔을 몹시 기다렸다구.”
— 마흔을 학수고대했다고?
“응. 그때 가서 준비 없이 마흔을 받아들이면 얼마나 힘들겠어? 마음속으로 ‘빨리 불혹을 준비해야지…’ 하고 다짐, ‘다지임’했지. 그런 다짐으로 30대 후반을 살았던 것 같아.”
스물의 양동근, 너는 누구니?
양동근은 스물의 자신을 불(火)과 드라이아이스로 표현했다.
“20대의 양동근은 정말 불이야. 휘발유를 마구 부으면서 다녔어. 주변 사람들이 너무 뜨거워 다가올 수 없었어.
아니, 불이라기보다 드라이아이스라고 할까. 어쨌든 겉모습은 불이었어. 힙합 가사도 센 것을 마구 내뱉었지. 인기도 막 불같이 올라가고 정말 와~ 영화도 음반판매도 1등… 초년 출세를 해 버린 거지. 불길처럼 확….
난 그때 꿈이 없어져 버렸어. 꿈이 사라졌다구.
어릴 때 내 꿈은 액션 배우였어. 그런데 〈바람의 파이터〉로 꿈을 이뤘어. 극진가라테 창시자인 ‘최배달’ 역을 맡았던 거지.
또 ‘힙합 음반을 낼거야’ 했는데 진짜로 음반을 냈어. 힙합 가수가 된 거라구. 그러니까 20대 때 다 해 버린 거야. (삶의) 목적이 없어진 거지.”
20대 초에 찍은 영화 〈수취인불명〉과 드라마 〈뉴논스톱〉 〈네 멋대로 해라〉에서 양동근은 그야말로 불이었다. 인기는 정점을 찍었고 양동근의 팬덤은 힙합 가수의 데뷔로 더욱 타올랐다.
그는 ‘양동근의 탈’을 뒤집어쓴 화마(火魔) 양동근이었다. 점점 내면 연기는 깊어졌고 때로 나른하고 헐렁해 보이는 눈빛은 날이 서고 날카로워졌다. 영화 〈와일드 카드〉 〈마지막 늑대〉에서처럼, 깡패 같은 형사로 와일드해지고 단단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형적인 것일 뿐. 그의 내면은 무척이나 지치고 상처가 깊어졌던 모양이다.
“불같은 스물(20대)을 보내고 그래서 모든 것에 권태를 느낄 때 쯤 군에 가게 됐어.”
— 나이 서른에?
“응. 30대 때 뱀처럼 껍질을 벗었지. 탈(脫)! 피(皮)! 그걸 한 번은 한 것 같아.
난 깨달았어. 나란 인간은 말이야, 뭔가 계획을 세우며 산 적이 없었지만, 잘 살려면 계획을 세워야 한다구. 그러나 내 DNA가…, DNA 자체가 계획적으로 살 사람이 아니란 걸 깨달았지 뭐야.”
— 맙소사.
“그땐 걱정투성이였어. 애를 낳으면 어떻게 키울까 하는 걱정, 일… 연기… 잘해야 할 텐데 하는 걱정…. 이 과정에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어.”
— 뭔데?
“걱정해 봐야 되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거야.”
— 신통한데….
“정말, 앞일은 정말 정말 하늘에 맡기고 나는 오늘 하루 열심히 살아내면 되겠다고 했는데 어느덧 마흔에 온 거야.
만약 말이야. 그걸 젊었을 때 알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봐. 그래도 삶의 의미를 마흔에 알게 된 것도 좋은 것 같아. 괜찮아. 하하하.”
— 서른(30대) 때 널 힘들게 한 건 뭐였어?
“과거. 그 과거를 어떻게 털어버릴까 굉장히 힘들었어.”
— 과거를 털어내고 싶었다고?
“그래. 내가 좋았던 기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어.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내 부족한 것만 생각났으니까. (지금처럼) 지난 자신을 사랑하게 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 아이가 태어나고 아빠로서 삶이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극복한 것 같아.”
— 와, 마흔이 무섭구나. 그래, 지금 네 꿈은 뭐니.
“뭐가 되어야지 하는 꿈보다 아내의 꿈, 아이들의 꿈을 위해 하루를 묵묵히 살아. 그게 지금 내 모습이야. 내 취미, 레저 같은 건 꿈꾸지 않아.”
— 철저히 가장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구나.
“그렇게 해야, 집이 잘 돌아갈 것 같아. 그런 마인드로, 그런 포지셔닝을 해야만 아내가 행복할 것 같아.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잖아.”
— 마흔은 자기 나이에 책임을 지는 나이지. 니 정말 마흔이구나.
“….”
양동근은 조선의 힙합 가수다
— 너의 변화는, 혹시 신앙이 있어 가능했던 게 아닐까 생각했어.
“20대 때, 불같았지만 어쩌면 내 내면에 신앙이 시작되고 있었을지 몰라. 그러다 서른 때(30대) 몇 대 맞았고 또 한 번 크게 맞았어. 사실 난 가정의 소망이 없던 사람이었어. 그런데 하나님 뜻대로 살려면 가정을 가져야 하는 것이었어.
그러지 않으면 골목길 쓰레기더미 옆에 널브러져 있을 것만 같은 나를 느낀 거야.”
— 신의 뜻대로 살려면 가정을 가져야 한다?
“응. 그렇게 (신의) 뜻대로 살려니 ‘작업’이 들어온 거야.”
— 작업? 어떻게?
“그분께서는 나락으로 계속, 모든 부분을 건드셨어. …끝! 재정적이든 관계적이든 인간적이든 가장 어글리한(추한) 나의 모습을 가정에서 다 보여주게 하셨지. 그래서 신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셨어.
기도밖에 살길이 없었어. 전적으로, 전적으로 정말 신의 인도하심에 내 삶을 맡기고 살 수밖에 없겠다 싶었어. 그러면서 불혹을 준비한 거야.”
양동근은 기도하는 시간이 힘들고 길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조금 보여주신다. ‘나한테 맡기고 사는 게 맞다’고 하신다”고도 했다. “많은 것을 내려놓고, 맡기고 살다 보니, 보여주시려 하는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 양동근! 마흔에 지금껏 경험 못했던 새로운 도전이 있을 거야. 또 다른 고통이 있을 거라구.
“과거엔 ‘(고통이) 언제 끝나지?’ ‘언제 끝나지?’ 하고 답답하게 물었지만 이젠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아. 죽기 전까지 내가 준비하지 못한 고난이 올 테지. 어떻게 하냐구? 내 답은 이래. 첫째도 기도, 둘째도 기도, 셋째도 기도… 기도하고 살 거야.”
양동근은 힙합 가수다. 힙합은 리듬의 쾌감, 동음이의어나 ‘펀치 라인’ 같은 시적 비유가 청각적으로 번뜩이는 장르다. 음색, 억양 등 음악적 요소가 가미되고 랩의 기교나 퍼포먼스가 더해진다. 양동근은 자신만의 당찬 에너지가 넘친다. 특유의 느릿느릿 리듬이 귀에 쏙 들어온다. 그래서 ‘조선의 힙합 가수’라는 말이 나온다.
— 〈바람의 파이터〉에서 극중 일본어 솜씨가 제법이었어. 〈수취인불명〉에서 영어 대사도 진짜 같았다구. 넌 힙합 가수잖아.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아무래도 천재 같아.
“어린 시절, 일본 뮤직 비디오를 즐겨보던 형들의 영향을 받았어. 그리고 마이클 잭슨의 뮤직 비디오, ‘문 워커’ 같은 걸 보면서 영향을 받았어.
일본어?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일어를 배운 게 엄청난 도움을 받았고.
영어? 영어로 된 랩을 구사하는 연습을 정말 많이 했어. 가사도 안 나와 있는 외국 곡을 몇 천 번씩 듣고 외울 때까지 듣다 보니 부담감 없이 할 수 있었어. (외국어 연기가) 두렵기도 했지만 난 좋았어. 너무 즐겁게 했던 것 같아.
— 그걸로 설명이 안 돼. 힙합이란 장르는 언어적 감각이 남다르지 않고선 하기 어려워.
“언어감각보다 귀가 좋았다고 할까. 잘 듣고, 잘 따라하는 것은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어. 흉내 내기라고 해도 좋아. 춤도 그래. 춤도 계속 보고 따라하고, 연기도 누군가의 연기를 보고 감명을 받아 따라하는… 배우라는 직업이 따라하는 것에 특화된 직업군이잖아.”
힙합계의 마광수?… 그건 옛말
양동근 1집에 있는 〈선문답〉의 한 대목이다.
‘하나같이 외친 말 모두다 같이 하나 허!/ 너무해 말과 행동이 다르잖아 아직도 힙합 문화의 답, 보이질 않아/ 이런 현실에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나?/ 진리에 진짜와 가짜로 구분할 수 있는 법./ 모두 진짜를 말하니 어쩔 순 없어도 중요한 건/ 자신을 똑바로 밝히는 것. 그리고 비교된 남을 의식하고/ 우습게 말한 것 우습게 무지 속에 자신과 대화하는 것.’
그의 〈어깨〉는 또 어떤가.
사각의 링 코너에 몰린 다른 건 하나도 창피한 것이 아니야./ 일곱 번 넘어져 본 놈만이 이 시대의 진정한 챔피언./ 나도 위로받고 싶어서 끄적여 봤어. 나 역시 벼랑 끝에 서있는 자신을 봤어./ 너도 나처럼 날 알아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까봐./ 멍들어 퍼런 심장 구멍난 가슴, 가슴이 아픈건 너무 빨리 뛰어서 그래./ 숨이 차오는 건 갑자기 멈춰서 그래. 일단 거기서 나와 걸어 볼래?
— 힙합 가사는 니가 직접 쓰잖아. 가사가 장난이 아냐. 비결이 뭐니.
“쑥스럽네. 가사 잘 쓴다는 말을 듣기가…. 고교 때 작문 수업 시간에 나름 한다고 했는데 점수가 안 나와서 글에 소질이 없구나 했어. 랩 자체가 ‘리듬 앤 포이트리’(리듬과 시·Rhythm and Poetry)잖아.
처음 시작할 땐 완전 혼돈이었어. 머릿속에 있는 걸 탁 꺼내 놨는데 중구난방이야. 내용도 없고 문장 연결도 안 되고… 쓰레기통 같았어.”
— 아냐. 원래 직관(直觀)이란 그렇게 쏟아내는 것 아니니?
“막 쏟아냈던 작품들을 보며 스스로 ‘내 머릿속에 잔뜩 쓰레기가 들었구나’ 하고 생각했어.
그런데 일단 곡을 받은 뒤 그 곡에 묻어 있는 정서를 떠올리려 애썼어. 내 안에서 무언가가 끓을 때까지 계속 곡을 들었던 거야. 그러다 보면 괜히… 막… 철학적인 것이 나와. 물론 젊었을 땐 퇴폐적인 가사도 많았어(많이 썼어).
그땐 뭔가 달라야 한다는, 차별화시켜야 한다는, 그게 내 나름대로 살아남는 방식이었던 것 같아. 여기선 똑 같으면 살 수가 없다, 뭔가 달라야 하는데, 뭔가 진정해야(진정성이 있어야) 되는데, 라고 생각했어. 그때 포인트로 잡은 게 약간 퇴폐 쪽이었던 것 같아.
그래서 사람들이 날보고 ‘힙합계의 마광수’라고 했어. 본능을 마구마구 쏟아냈어. 리미트(Limit·한계)가 없었어. 대중적으로 가기 위해선 아무리 퇴폐적이라도 어떤 선, 어떤 리미트… 그런 게 전혀 없었어. 힙합은 무절제거든.
그런데 시간이 지난 다음, 엄청 회의를 느꼈어. ‘왜 내 얼굴에 책임지지 않는 가사를 썼을까’ 하고 생각했어. 특히 아이를 가졌을 때, 좋은 아빠가 되고 싶은데, 아이를 좋은 길로 인도해야 될 것 같은데… 그래서 굉장히 힙합에 회의를 가졌어. 그리고 내가 걸어왔던 길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음반을 덜 하게 됐어.”
— 언제부터?
“30대 중후반 때부터….”
— 너무 자책하지 마. 우리가 아는 시인 보들레르나 랭보도 젊었을 때는 본능에 충실한 시를 썼어. 그래서 퇴폐적이란 얘기를 들었지.
“그래?”
— 힙합 가사를 쓸 때 누구의 영향을 받았어?
“시라고 하면 어렵지만 힙합은 스킬이 있어. (시보다) 자유로움과 리듬이 가미가 된 장르잖아. 누구나 시인처럼 쓰지 않아도 우리 모두 시인이 될 수 있어. 학교 수업 때 배운 시인은 고지식하게 느껴지지만 힙합 가수는 너무 자유로운 거지. 그러니까 고등래퍼가 등장하잖아. 망설이기보다 마구 써낼 수 있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보면 힙합도 문화적, 예술적으로 되게 좋은 장치라 생각해.”
기억할 만한 공연, ‘서울역 만찬 프로젝트’
우연히 케이블 음악방송에서 양동근의 랩송을 들었다. 제목은 무제(無題). 물론 노랫말은 양동근 혹은 ‘YDG’가 썼다.
‘…총살이 두려워 숨죽인 채/ 탈북한 곳이 중국인데/ 시체들 속 굶주린 배를 채워준 건/ 들판에 풀뿌리/ 잡히면 아오지는 표준형/ 실은 총알이 아까워 교수형/ 생명과 맞바꾼 자유의 맛/ 하지만 세상은 요지경/ 니들이 마시는 한강이 연결된/ 시체 떠다니는 대동강/ 부산에서 철길로/ 러시아로 갈 수 있는 이 땅은 철책으로 두 동강/ 군 생활 쩔어, 십 년 제대/ 무찌르자 미제 남조선 괴뢰/ 속았어, 그놈의 혁명때매/ 넌 혁명이 뭐라고 생각해/ 속았어, 혁명때매/ 아직도 팔려간다, 인신매매/ 의미도 모른 채 대원수님 고맙습니다/ 속았어, 그놈의 자유때매/ 아직도 팔려간다, 인신매매/ 의미도 모른 채 대원수님 고맙습니다/ 영혼까지 세뇌, 영혼까지 세뇌…’
양동근이 탈북자의 이야기를 랩으로 담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한때 그가 낸 앨범의 전 트랙이 19금 판정을 받은 적도 있었지만 확실히 달라졌다. 래퍼 중에 자기만의 목소리를 지닌 양동근만한 이가 또 있을까.
— 탈북자 얘기를 쓴 거네?
“앨범에 넣지 않았던 그 노래를 어떻게 들었니? 와 놀랍다. 언젠가 〈쇼미더머니(Show Me The Money)〉라는 힙합 프로에서 이 노래를 불렀어. 실은 어떻게 해서 탈북 청년을 알게 됐는데 그 친구에게 ‘니 목소리로, 니가 아는 북한 실상을 랩으로 뱉어라’고 격려했어. 미디어의 힘을 우린 모두 알잖아. 그런데 그 친구는 안타깝게도 랩을 해 본 적이 없었어.
그래서 나섰어. 그의 경험담과 내가 접한 실상을 쓴 거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노랫말인데 앨범에 담지 못했어. 그런데 이 노래가 너를 통해 나오니까 굉장히 기쁘네. 어떻게 보면 이 노래도 내 자식이잖아. 숨겨둔 자식을 니가 찾아준 거야.”
지난 5월 30일부터 6월 1일까지 사흘 동안 아주 낯선 ‘서울역 만찬 프로젝트’가 열렸다. 거리에서 살아가는 서울역 주변 노숙인에게 ‘스트리트 컬쳐(Street Culture)’라는 주제로 축제를 연 것이다. 거리음악의 대표 장르인 힙합이 등장했고 양동근이 나섰다. 그는 사흘 동안 노숙인들과 힙합 노래를 열창했다. 유튜브 영상으로 본 그의 모습은 무척 편안해 보였고 행복해 보였다.
— 편안해 보였던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그렇게 느꼈으면 고맙고. 내 지인이 서울역 옛 역사(驛舍)의 박물관·전시관 운영을 기획하는 부서에서 근무하거든. 서울역 노숙인들이 눈에 오래 밟혔나 봐. 힙합이 스트리트 컬쳐(거리문화)잖아. 어느 날 내게 ‘노숙인과 함께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면 어떨까’ 하는 거야. 그 얘기를 듣고 너무 좋았어. ‘이건 딱이야! 이건 가야 한다!’고 외쳤어. 그분들에게, 시민들에게 진중함을 보이기보다 쿨(Cool)하게 가자, 동시대를 사는 우리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자고 했어.
진짜 힙합 공연장에 뒤지지 않는 공연으로 역사에서 신나게 놀았지. 이틀인가, 사흘인가를 그렇게 놀았어. 이념이니 복잡한 사상 같은 것은 다 잊고, 그냥 하나가 되자는 감동을 만들었어. 야~ 지금 생각해도 너무 뜻깊은 시간이었어.”
“내 인생을 사는 게 아니고 사람들의 니즈(욕구)를 채워 주는 삶인 거야”
— 연기 얘기를 좀 더 해 볼까. 영화 〈수취인불명〉에서 넌 혼혈아 ‘창국’으로 아역 배우의 이미지를 완전이 털어냈어. 또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에서 완전히 연기의 꽃을 피웠어. 아직도 많은 이들은 그때의 너를 기억하고 있지.
“〈수취인불명〉을 찍을 때 난 ‘흑인으로 태어났으면…’ 하고 생각할 때야. 왜냐구? 내 머리가 많이 곱슬이잖아. 내 윗대 조상 중에 그런 이(흑인)가 있지 않을까. 내가 좋아하는 힙합도 전부 흑인이 잘하는 장르잖아. 또 10대 때 농구를 즐겨 했는데 마이클 조던이 농구 코트를 날아다닐 때잖아
〈수취인불명〉에서 흑인 혼혈아로 나왔으니 어떻겠어? 자연스레 내 모든 것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지. 촬영할 때 즐거웠던 기억밖에 안 나.
이 바닥의 감독·작가·팬 사이에서 〈네 멋대로 해라〉가 내 연기의 기준이 돼 버렸어. 벌써 16년 전 작품이지 아마? 지금까지 연기 꼬리표가 그거야. 그동안 새로운 작품도 많이 했지만 그 작품을 못 넘어선 거지. 그만큼 〈네 멋대로 해라〉가 강했던 것 같아. 속으로 ‘넘어설 수 없구나, 벗어날 수 없구나’ 하며 인정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배우로 살아남기 위해 다른 뭔가를 개발해야 한다고 초조해했어. 그런 몸부림의 시간이 있을 즈음에 (내가) 아빠가 돼 버린 거야. 그리고 마흔에 접어들 무렵, 필모(필모그래피·Filmography)를 바라보는 가치관이 바뀌어 버린 거야.”
— 흥미롭다. 어떻게?
“굳이 이전의 나를 넘어서려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린 거지. 가만히 보니 변화라는 게, 사람들이 바라는 니즈(Needs·욕구)인 거야. 인생은 내 인생인데 내가 저걸(과거의 연기방식 등) 넘어서려는 순간, 내 인생을 사는 게 아니고 사람들의 니즈를 채워 주는 삶인 거야.
이젠 사람들이 바라는… 그런 감동 이상의 것을 보여주기 위한 ‘틀’ 속에 나를 넣고 싶지 않아졌어. 내가 주체(주인)가 되어, 내게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내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고민하기 시작했지.”
양동근은 이 대목에서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너희 기준이 너희 멋대로야? 그럼 나는 됐어’ 라고 생각하게 됐어. 배우로서의 삶은 내가 규정하겠어. 처자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삶으로 살겠어.”
— 객석에서 던지는 먹이를 먹고 살아가는 게 배우잖아. 냉혹한 비평가와 기자들의 평가를 먹고 사는 게 배우야. 그렇게 말하는 게 쉽지 않아.
“눈이 가려졌을 때 볼 수 없었던 나를 본 거지. 나락으로 떨어져 바닥을 치니까 자연스레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었던 것 같아.
내 자랑 같지만, 내가 1등을 안 쳐 본 게 아니잖아. 1등이란 게 엄청 달콤해. 그러나 1등을 치기 위해 사는 삶에 생명력이 없다는 것을 많이 느꼈어. 병든 내 모습을 봤기 때문이지. 어떻게 보면 1등 쳐 본 자의 여유일지도 몰라. 그런데 제일 중요한 것은… 좋은 작품을 하려면 좋은 인생을 살아낸 경험이 필요해.
물론 경험이 없으면 기계적 연기, 그저 스킬로 연기할 수야 있겠지. 〈네 멋대로 해라〉는 사실 연기라기보다 삶에서 겪은 내 소울(Soul)이 묻어 있었어. 그 뒤에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았던 것은 내 삶이 없었던 거야.”
“조지 클루니는 미국인이고 난 한국인이잖아”
양동근은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에서 원로배우 신구 선생의 아들 ‘고복수’로 분(扮)했다. 드라마 속 그는 뇌종양을 앓고 현실을 부유하며 소매치기, 스턴트맨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룹사운드에서 키보드를 치는 이나영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양동근은 극중 배역에 몰입해 그 인물 자체로 연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삶 안에서 느끼는 행복, 갈등, 감정… 이런 것들이 없었기에 이후 다른 작품이 와도 표현해 낼 줄 몰랐어. 20대 때는 ‘이것 못해, 안 해’가 굉장히 많았거든. 대본에서 우는 신(Scene)만 나와도 작품을 고사했어.
하지만 이젠 알게 됐어. 아빠 역할을 하려면 진짜 아빠가 되어야 하고, 삼촌 역할을 하려면 진짜 삼촌으로 살아야 한다는 걸. 그게 리얼리티지.”
— 결혼이 너를 많이 바꾸었구나. 결혼 잘했네.
“응.”
— 주연배우도 세월이 흐르면 조연이 되잖아, 그치?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 극중에서 누구나 주연이 될 수 없는 게 인생이야.
“내가 쭉~ 주연만 한 게 아니잖아. 어렸을 땐 보조출연도 해 보고, 조연 경험도 해 봤지.
내가 뜨기 전, 그러니까 드라마 〈논스톱〉으로 확 뜨기 전, 조연을 할 때도 마치 주인공처럼 연기했어. ‘난 조연이야’라고 생각하며 연기하지 않았어.
왜냐면 지금 내 삶이 아닌 곳에서 내가 주인공이 되는 건 의미가 없는 거야. 별 가치가 없어. 내 삶에서 오로지 내가 주인공이 되면 역할(배역)이 크건 작건 혼신을 다해 할 수 있으니까. 주연, 조연은 제작자나 객석이 정하는 것이고 내겐 아무런 영향이 없지. 내 안의 나는 조연이라도 정말 주연처럼 연기하면 되는 거야.”
— 흔히 배우의 삶은 가시밭길이라고 하잖아. 니가 생각하는 배우의 매력이 뭐니.
“다행스럽게도(?) 난 배우로서의 길이 평탄했던 것 같아. 물론 내 주변엔 힘들게 연기하는 분들이 많아. 그분들 보면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져.
근데, 배우의 매력?… 사실, 난 어렸을 때부터 배우를 당연한 것처럼, 마치 업(業)이랄까? 어릴 때부터 줄곧 배우였으니까. 배우가 아니면 뭘 하지? 라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배우가 내게 전부였어.”
— 나이가 들면서 좋아하는 배우가 달라졌니.
“10대 때는 안성기 선생님을 좋아했어. 그때 이미 대(大)배우셨으니까. 막연하게 ‘아, 나는 안성기 선생님 같은 배우가 돼야지’라고 생각했어. 그분도 아역 배우셨고. 20대 때는 한석규 아저씨가 좋았어. 그때 석규 아저씨가 잘나갔었지.
30대 때는 거의 국내 영화를 안 봤어. 왜냐면 국내 영화를 보면 자꾸 분석하려는 생각 때문에 즐기는 마음이 안 생기는 거야. 그래서 아예 안 봤어. 대신 아이들과 만화영화나 판타지 영화를 편하게 봤어.
지금은 좋아하는 배우라기보다… 배우의 삶에 대해 들여다보게 돼.
예컨대 배우 조니 뎁(Johnny Depp)이 옛날엔 굉장히 마초 같은 모습을 보이다가 가정을 가진 뒤 아이들을 위한 영화를 찍었다고 하잖아. 젊었을 때 그 얘기를 듣고 ‘아니 왜? 조니 뎁이 왜 그랬대?’라고 했다면 지금은 그를 이해할 수 있지. 그런 배우의 삶에 더 관심을 갖게 됐어. 배우가 무슨 작품을 찍었느냐 보다.
그리고 조지 클루니(George Clooney)…. 그 사람의 연기는 이미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에 있다고 생각해. 내 연기의 오랜 동경이 됐던 배우지. 미국문화에 젖어서 그럴지도 몰라. 사실 〈네 멋대로 해라〉의 ‘고복수’ 역도 외국 배우의 연기를 표방한 것이었어.
그런데 언젠가 깨달았어. 조지 클루니 연기가 미국인밖에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아무리 해도 우리는 흉내밖에 낼 수 없는… 그런 차이를 확 느껴 버린 거야. 조지 클루니는 미국인이고 난 한국인이잖아.
힙합도 마찬가지야. 이제 ‘땅의 색깔’을 느끼는 세대가 된 것 같아. 우리나라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뭘까 하고 생각했어.
한류(韓流)도 그래. 엔터테이너로서 ‘나도 한류로 가야 하나? 나도 갈까?’ 하고 조급증을 느꼈어. 그런데 한 번 더 생각을 했어, 너무 감사하게도. ‘아니야. 전부가 외화벌이하러 외국에 가는데 이 땅은 누가 지키나’ 하고 생각했어. 사실 음악이나 연기는 굉장히 영(靈)적인 분야잖아. 한국에서도 영적인 부분을 누군가 생각하고 책임질 리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나는 한국인이고,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겠어?
— 와, 너를 보니 마흔이 무섭네.
“맞아. 그런데 오히려 재미있는 것 같아. 뭔가 따라가는 삶이 아니고, 내 삶이 무엇인지, 내 색깔이 무엇인지 찾는 삶?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삶 같아서….”⊙
“자유분방한 20대니까 이러는 거죠. 제가 40대가 되면 그땐 저도 20대들의 행동을 이해 못할걸요? 아마….”
세월이 흘러 드디어 마흔이 됐다. 연기경력은 무려 30년.
마흔과 30년… 왜 이리 낯설까? 엇박자처럼 양동근의 존재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때로 날카롭고 응어리가 맺혀 있을 것만 같지만, 왠지 헐렁한 옷 같은 양동근이 20대라면 마흔의 양동근은 예의 의뭉스런 말투를 찾기 어렵다. 더 솔직하게 더 사실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 말투에서 재치가 읽힌다.
무엇보다 마흔의 양동근이 스무 살의 양동근을 어떻게 느끼는지 궁금했다. 지난 9월 초 서울 강남구의 한 영화사에서 그를 만났다.
시종 그는 마흔의 진중함으로 기자를 대했다. 우리는 서로를 높이며 대화를 나눴지만 20대의 반말로 인터뷰를 정리할 생각이다. 왜냐고? 이 글을 통해 양동근의 펄펄 끓어 넘쳤던 20대, 앙앙불락하던 30대와 이별하기 위해서다. 이제는 야생마 ‘창국’(영화 〈수취인불명〉의 혼혈아), 고결한 쓰레기 인생 ‘고복수’(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주인공)를 잊어야 한다.
— 올해 마흔, 연기생활 30년…. 그렇지?
“맞아. 내세울 게 그것밖에 없어.”
— 마흔의 양동근, 너는 누구니.
“와, 감동이야. 인터뷰를 많이 해 봤지만 이런 건 처음이야. 나 흥분했어. 2018년 최고의 인터뷰인 것 같아.”
— 됐고, 너 누구니.
“나?… 나는 마흔을 꿈꿔 온 사람이야. 마흔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했다구. 서른 중반을 지나면서, 지나간 20대와 맞이할 40대를 준비했어. 어떻게 내가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현실을) 받아들이며 살아야 할지를 서른 중반부터 고민해 왔다고. 이제 나는 마흔이야.”
— 서른 중반에 왜?
“그때 결혼하고 애 낳을 때쯤, 내 모든 것이 바뀌는 시점이었거든.
서른에 군(軍)엘 갔어. 20대 때 나름 열심히 일했지만 군에 가서 통장에 ‘0’이란 잔고를 찍고 말았어. 다시 나와서(제대하고) 일을 열심히 해 보려 하다가… 결혼을 생각하고 아이를 낳고… 음… 어떤 화려한 시절과는 다른, 내리막길… 추운 겨울을 지냈어.
속으로 이렇게 말했어. ‘개구리가 겨우내 움츠리고 있는 것이 이런 건가?’ 하고. 더는 20대의 양동근으로 살 수 없었어. 가장(家長) 양동근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아빠로 태어나기 위해 (20대의) 양동근이 죽어야 하는… 그런 시간을 겪으며 30대를 보냈어.”
— 무슨 표현이 인터뷰 시작부터… 세니.
“어제 박경림씨와 잠깐 얘기했는데 그게 ‘사춘기’라고 하더라. 그러니까 난 사춘기를 굉장히 늦게… 30대에 사춘기를 겪은 거지. 그래서 마흔을 몹시 기다렸다구.”
— 마흔을 학수고대했다고?
“응. 그때 가서 준비 없이 마흔을 받아들이면 얼마나 힘들겠어? 마음속으로 ‘빨리 불혹을 준비해야지…’ 하고 다짐, ‘다지임’했지. 그런 다짐으로 30대 후반을 살았던 것 같아.”
스물의 양동근, 너는 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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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 배우 시절의 양동근. 벌써 연기 30년차를 맞았다. |
“20대의 양동근은 정말 불이야. 휘발유를 마구 부으면서 다녔어. 주변 사람들이 너무 뜨거워 다가올 수 없었어.
아니, 불이라기보다 드라이아이스라고 할까. 어쨌든 겉모습은 불이었어. 힙합 가사도 센 것을 마구 내뱉었지. 인기도 막 불같이 올라가고 정말 와~ 영화도 음반판매도 1등… 초년 출세를 해 버린 거지. 불길처럼 확….
난 그때 꿈이 없어져 버렸어. 꿈이 사라졌다구.
어릴 때 내 꿈은 액션 배우였어. 그런데 〈바람의 파이터〉로 꿈을 이뤘어. 극진가라테 창시자인 ‘최배달’ 역을 맡았던 거지.
또 ‘힙합 음반을 낼거야’ 했는데 진짜로 음반을 냈어. 힙합 가수가 된 거라구. 그러니까 20대 때 다 해 버린 거야. (삶의) 목적이 없어진 거지.”
20대 초에 찍은 영화 〈수취인불명〉과 드라마 〈뉴논스톱〉 〈네 멋대로 해라〉에서 양동근은 그야말로 불이었다. 인기는 정점을 찍었고 양동근의 팬덤은 힙합 가수의 데뷔로 더욱 타올랐다.
그는 ‘양동근의 탈’을 뒤집어쓴 화마(火魔) 양동근이었다. 점점 내면 연기는 깊어졌고 때로 나른하고 헐렁해 보이는 눈빛은 날이 서고 날카로워졌다. 영화 〈와일드 카드〉 〈마지막 늑대〉에서처럼, 깡패 같은 형사로 와일드해지고 단단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형적인 것일 뿐. 그의 내면은 무척이나 지치고 상처가 깊어졌던 모양이다.
“불같은 스물(20대)을 보내고 그래서 모든 것에 권태를 느낄 때 쯤 군에 가게 됐어.”
— 나이 서른에?
“응. 30대 때 뱀처럼 껍질을 벗었지. 탈(脫)! 피(皮)! 그걸 한 번은 한 것 같아.
난 깨달았어. 나란 인간은 말이야, 뭔가 계획을 세우며 산 적이 없었지만, 잘 살려면 계획을 세워야 한다구. 그러나 내 DNA가…, DNA 자체가 계획적으로 살 사람이 아니란 걸 깨달았지 뭐야.”
— 맙소사.
“그땐 걱정투성이였어. 애를 낳으면 어떻게 키울까 하는 걱정, 일… 연기… 잘해야 할 텐데 하는 걱정…. 이 과정에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어.”
— 뭔데?
“걱정해 봐야 되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거야.”
— 신통한데….
“정말, 앞일은 정말 정말 하늘에 맡기고 나는 오늘 하루 열심히 살아내면 되겠다고 했는데 어느덧 마흔에 온 거야.
만약 말이야. 그걸 젊었을 때 알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봐. 그래도 삶의 의미를 마흔에 알게 된 것도 좋은 것 같아. 괜찮아. 하하하.”
— 서른(30대) 때 널 힘들게 한 건 뭐였어?
“과거. 그 과거를 어떻게 털어버릴까 굉장히 힘들었어.”
— 과거를 털어내고 싶었다고?
“그래. 내가 좋았던 기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어.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내 부족한 것만 생각났으니까. (지금처럼) 지난 자신을 사랑하게 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 아이가 태어나고 아빠로서 삶이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극복한 것 같아.”
— 와, 마흔이 무섭구나. 그래, 지금 네 꿈은 뭐니.
“뭐가 되어야지 하는 꿈보다 아내의 꿈, 아이들의 꿈을 위해 하루를 묵묵히 살아. 그게 지금 내 모습이야. 내 취미, 레저 같은 건 꿈꾸지 않아.”
— 철저히 가장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구나.
“그렇게 해야, 집이 잘 돌아갈 것 같아. 그런 마인드로, 그런 포지셔닝을 해야만 아내가 행복할 것 같아.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잖아.”
— 마흔은 자기 나이에 책임을 지는 나이지. 니 정말 마흔이구나.
“….”
양동근은 조선의 힙합 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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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가수 래퍼 양동근. 자신만의 당찬 에너지로 ‘조선의 힙합가수’라는 말이 나온다. |
“20대 때, 불같았지만 어쩌면 내 내면에 신앙이 시작되고 있었을지 몰라. 그러다 서른 때(30대) 몇 대 맞았고 또 한 번 크게 맞았어. 사실 난 가정의 소망이 없던 사람이었어. 그런데 하나님 뜻대로 살려면 가정을 가져야 하는 것이었어.
그러지 않으면 골목길 쓰레기더미 옆에 널브러져 있을 것만 같은 나를 느낀 거야.”
— 신의 뜻대로 살려면 가정을 가져야 한다?
“응. 그렇게 (신의) 뜻대로 살려니 ‘작업’이 들어온 거야.”
— 작업? 어떻게?
“그분께서는 나락으로 계속, 모든 부분을 건드셨어. …끝! 재정적이든 관계적이든 인간적이든 가장 어글리한(추한) 나의 모습을 가정에서 다 보여주게 하셨지. 그래서 신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셨어.
기도밖에 살길이 없었어. 전적으로, 전적으로 정말 신의 인도하심에 내 삶을 맡기고 살 수밖에 없겠다 싶었어. 그러면서 불혹을 준비한 거야.”
양동근은 기도하는 시간이 힘들고 길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조금 보여주신다. ‘나한테 맡기고 사는 게 맞다’고 하신다”고도 했다. “많은 것을 내려놓고, 맡기고 살다 보니, 보여주시려 하는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 양동근! 마흔에 지금껏 경험 못했던 새로운 도전이 있을 거야. 또 다른 고통이 있을 거라구.
“과거엔 ‘(고통이) 언제 끝나지?’ ‘언제 끝나지?’ 하고 답답하게 물었지만 이젠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아. 죽기 전까지 내가 준비하지 못한 고난이 올 테지. 어떻게 하냐구? 내 답은 이래. 첫째도 기도, 둘째도 기도, 셋째도 기도… 기도하고 살 거야.”
양동근은 힙합 가수다. 힙합은 리듬의 쾌감, 동음이의어나 ‘펀치 라인’ 같은 시적 비유가 청각적으로 번뜩이는 장르다. 음색, 억양 등 음악적 요소가 가미되고 랩의 기교나 퍼포먼스가 더해진다. 양동근은 자신만의 당찬 에너지가 넘친다. 특유의 느릿느릿 리듬이 귀에 쏙 들어온다. 그래서 ‘조선의 힙합 가수’라는 말이 나온다.
— 〈바람의 파이터〉에서 극중 일본어 솜씨가 제법이었어. 〈수취인불명〉에서 영어 대사도 진짜 같았다구. 넌 힙합 가수잖아.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아무래도 천재 같아.
“어린 시절, 일본 뮤직 비디오를 즐겨보던 형들의 영향을 받았어. 그리고 마이클 잭슨의 뮤직 비디오, ‘문 워커’ 같은 걸 보면서 영향을 받았어.
일본어?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일어를 배운 게 엄청난 도움을 받았고.
영어? 영어로 된 랩을 구사하는 연습을 정말 많이 했어. 가사도 안 나와 있는 외국 곡을 몇 천 번씩 듣고 외울 때까지 듣다 보니 부담감 없이 할 수 있었어. (외국어 연기가) 두렵기도 했지만 난 좋았어. 너무 즐겁게 했던 것 같아.
— 그걸로 설명이 안 돼. 힙합이란 장르는 언어적 감각이 남다르지 않고선 하기 어려워.
“언어감각보다 귀가 좋았다고 할까. 잘 듣고, 잘 따라하는 것은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어. 흉내 내기라고 해도 좋아. 춤도 그래. 춤도 계속 보고 따라하고, 연기도 누군가의 연기를 보고 감명을 받아 따라하는… 배우라는 직업이 따라하는 것에 특화된 직업군이잖아.”
힙합계의 마광수?… 그건 옛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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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제19회 전주국제영화제 출품작인 영화 〈미스터리 핑크〉. 배우 구혜선이 연출을 맡은 작품이다. |
‘하나같이 외친 말 모두다 같이 하나 허!/ 너무해 말과 행동이 다르잖아 아직도 힙합 문화의 답, 보이질 않아/ 이런 현실에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나?/ 진리에 진짜와 가짜로 구분할 수 있는 법./ 모두 진짜를 말하니 어쩔 순 없어도 중요한 건/ 자신을 똑바로 밝히는 것. 그리고 비교된 남을 의식하고/ 우습게 말한 것 우습게 무지 속에 자신과 대화하는 것.’
그의 〈어깨〉는 또 어떤가.
사각의 링 코너에 몰린 다른 건 하나도 창피한 것이 아니야./ 일곱 번 넘어져 본 놈만이 이 시대의 진정한 챔피언./ 나도 위로받고 싶어서 끄적여 봤어. 나 역시 벼랑 끝에 서있는 자신을 봤어./ 너도 나처럼 날 알아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까봐./ 멍들어 퍼런 심장 구멍난 가슴, 가슴이 아픈건 너무 빨리 뛰어서 그래./ 숨이 차오는 건 갑자기 멈춰서 그래. 일단 거기서 나와 걸어 볼래?
— 힙합 가사는 니가 직접 쓰잖아. 가사가 장난이 아냐. 비결이 뭐니.
“쑥스럽네. 가사 잘 쓴다는 말을 듣기가…. 고교 때 작문 수업 시간에 나름 한다고 했는데 점수가 안 나와서 글에 소질이 없구나 했어. 랩 자체가 ‘리듬 앤 포이트리’(리듬과 시·Rhythm and Poetry)잖아.
처음 시작할 땐 완전 혼돈이었어. 머릿속에 있는 걸 탁 꺼내 놨는데 중구난방이야. 내용도 없고 문장 연결도 안 되고… 쓰레기통 같았어.”
— 아냐. 원래 직관(直觀)이란 그렇게 쏟아내는 것 아니니?
“막 쏟아냈던 작품들을 보며 스스로 ‘내 머릿속에 잔뜩 쓰레기가 들었구나’ 하고 생각했어.
그런데 일단 곡을 받은 뒤 그 곡에 묻어 있는 정서를 떠올리려 애썼어. 내 안에서 무언가가 끓을 때까지 계속 곡을 들었던 거야. 그러다 보면 괜히… 막… 철학적인 것이 나와. 물론 젊었을 땐 퇴폐적인 가사도 많았어(많이 썼어).
그땐 뭔가 달라야 한다는, 차별화시켜야 한다는, 그게 내 나름대로 살아남는 방식이었던 것 같아. 여기선 똑 같으면 살 수가 없다, 뭔가 달라야 하는데, 뭔가 진정해야(진정성이 있어야) 되는데, 라고 생각했어. 그때 포인트로 잡은 게 약간 퇴폐 쪽이었던 것 같아.
그래서 사람들이 날보고 ‘힙합계의 마광수’라고 했어. 본능을 마구마구 쏟아냈어. 리미트(Limit·한계)가 없었어. 대중적으로 가기 위해선 아무리 퇴폐적이라도 어떤 선, 어떤 리미트… 그런 게 전혀 없었어. 힙합은 무절제거든.
그런데 시간이 지난 다음, 엄청 회의를 느꼈어. ‘왜 내 얼굴에 책임지지 않는 가사를 썼을까’ 하고 생각했어. 특히 아이를 가졌을 때, 좋은 아빠가 되고 싶은데, 아이를 좋은 길로 인도해야 될 것 같은데… 그래서 굉장히 힙합에 회의를 가졌어. 그리고 내가 걸어왔던 길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음반을 덜 하게 됐어.”
— 언제부터?
“30대 중후반 때부터….”
— 너무 자책하지 마. 우리가 아는 시인 보들레르나 랭보도 젊었을 때는 본능에 충실한 시를 썼어. 그래서 퇴폐적이란 얘기를 들었지.
“그래?”
— 힙합 가사를 쓸 때 누구의 영향을 받았어?
“시라고 하면 어렵지만 힙합은 스킬이 있어. (시보다) 자유로움과 리듬이 가미가 된 장르잖아. 누구나 시인처럼 쓰지 않아도 우리 모두 시인이 될 수 있어. 학교 수업 때 배운 시인은 고지식하게 느껴지지만 힙합 가수는 너무 자유로운 거지. 그러니까 고등래퍼가 등장하잖아. 망설이기보다 마구 써낼 수 있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보면 힙합도 문화적, 예술적으로 되게 좋은 장치라 생각해.”
우연히 케이블 음악방송에서 양동근의 랩송을 들었다. 제목은 무제(無題). 물론 노랫말은 양동근 혹은 ‘YDG’가 썼다.
‘…총살이 두려워 숨죽인 채/ 탈북한 곳이 중국인데/ 시체들 속 굶주린 배를 채워준 건/ 들판에 풀뿌리/ 잡히면 아오지는 표준형/ 실은 총알이 아까워 교수형/ 생명과 맞바꾼 자유의 맛/ 하지만 세상은 요지경/ 니들이 마시는 한강이 연결된/ 시체 떠다니는 대동강/ 부산에서 철길로/ 러시아로 갈 수 있는 이 땅은 철책으로 두 동강/ 군 생활 쩔어, 십 년 제대/ 무찌르자 미제 남조선 괴뢰/ 속았어, 그놈의 혁명때매/ 넌 혁명이 뭐라고 생각해/ 속았어, 혁명때매/ 아직도 팔려간다, 인신매매/ 의미도 모른 채 대원수님 고맙습니다/ 속았어, 그놈의 자유때매/ 아직도 팔려간다, 인신매매/ 의미도 모른 채 대원수님 고맙습니다/ 영혼까지 세뇌, 영혼까지 세뇌…’
양동근이 탈북자의 이야기를 랩으로 담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한때 그가 낸 앨범의 전 트랙이 19금 판정을 받은 적도 있었지만 확실히 달라졌다. 래퍼 중에 자기만의 목소리를 지닌 양동근만한 이가 또 있을까.
— 탈북자 얘기를 쓴 거네?
“앨범에 넣지 않았던 그 노래를 어떻게 들었니? 와 놀랍다. 언젠가 〈쇼미더머니(Show Me The Money)〉라는 힙합 프로에서 이 노래를 불렀어. 실은 어떻게 해서 탈북 청년을 알게 됐는데 그 친구에게 ‘니 목소리로, 니가 아는 북한 실상을 랩으로 뱉어라’고 격려했어. 미디어의 힘을 우린 모두 알잖아. 그런데 그 친구는 안타깝게도 랩을 해 본 적이 없었어.
그래서 나섰어. 그의 경험담과 내가 접한 실상을 쓴 거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노랫말인데 앨범에 담지 못했어. 그런데 이 노래가 너를 통해 나오니까 굉장히 기쁘네. 어떻게 보면 이 노래도 내 자식이잖아. 숨겨둔 자식을 니가 찾아준 거야.”
지난 5월 30일부터 6월 1일까지 사흘 동안 아주 낯선 ‘서울역 만찬 프로젝트’가 열렸다. 거리에서 살아가는 서울역 주변 노숙인에게 ‘스트리트 컬쳐(Street Culture)’라는 주제로 축제를 연 것이다. 거리음악의 대표 장르인 힙합이 등장했고 양동근이 나섰다. 그는 사흘 동안 노숙인들과 힙합 노래를 열창했다. 유튜브 영상으로 본 그의 모습은 무척 편안해 보였고 행복해 보였다.
— 편안해 보였던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그렇게 느꼈으면 고맙고. 내 지인이 서울역 옛 역사(驛舍)의 박물관·전시관 운영을 기획하는 부서에서 근무하거든. 서울역 노숙인들이 눈에 오래 밟혔나 봐. 힙합이 스트리트 컬쳐(거리문화)잖아. 어느 날 내게 ‘노숙인과 함께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면 어떨까’ 하는 거야. 그 얘기를 듣고 너무 좋았어. ‘이건 딱이야! 이건 가야 한다!’고 외쳤어. 그분들에게, 시민들에게 진중함을 보이기보다 쿨(Cool)하게 가자, 동시대를 사는 우리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자고 했어.
진짜 힙합 공연장에 뒤지지 않는 공연으로 역사에서 신나게 놀았지. 이틀인가, 사흘인가를 그렇게 놀았어. 이념이니 복잡한 사상 같은 것은 다 잊고, 그냥 하나가 되자는 감동을 만들었어. 야~ 지금 생각해도 너무 뜻깊은 시간이었어.”
“내 인생을 사는 게 아니고 사람들의 니즈(욕구)를 채워 주는 삶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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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작 영화 〈수취인불명〉 포스터. 20대의 양동근을 느낄 수 있게 한 영화다. 혼혈아 창국으로 扮했다. |
“〈수취인불명〉을 찍을 때 난 ‘흑인으로 태어났으면…’ 하고 생각할 때야. 왜냐구? 내 머리가 많이 곱슬이잖아. 내 윗대 조상 중에 그런 이(흑인)가 있지 않을까. 내가 좋아하는 힙합도 전부 흑인이 잘하는 장르잖아. 또 10대 때 농구를 즐겨 했는데 마이클 조던이 농구 코트를 날아다닐 때잖아
〈수취인불명〉에서 흑인 혼혈아로 나왔으니 어떻겠어? 자연스레 내 모든 것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지. 촬영할 때 즐거웠던 기억밖에 안 나.
이 바닥의 감독·작가·팬 사이에서 〈네 멋대로 해라〉가 내 연기의 기준이 돼 버렸어. 벌써 16년 전 작품이지 아마? 지금까지 연기 꼬리표가 그거야. 그동안 새로운 작품도 많이 했지만 그 작품을 못 넘어선 거지. 그만큼 〈네 멋대로 해라〉가 강했던 것 같아. 속으로 ‘넘어설 수 없구나, 벗어날 수 없구나’ 하며 인정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배우로 살아남기 위해 다른 뭔가를 개발해야 한다고 초조해했어. 그런 몸부림의 시간이 있을 즈음에 (내가) 아빠가 돼 버린 거야. 그리고 마흔에 접어들 무렵, 필모(필모그래피·Filmography)를 바라보는 가치관이 바뀌어 버린 거야.”
— 흥미롭다. 어떻게?
“굳이 이전의 나를 넘어서려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린 거지. 가만히 보니 변화라는 게, 사람들이 바라는 니즈(Needs·욕구)인 거야. 인생은 내 인생인데 내가 저걸(과거의 연기방식 등) 넘어서려는 순간, 내 인생을 사는 게 아니고 사람들의 니즈를 채워 주는 삶인 거야.
이젠 사람들이 바라는… 그런 감동 이상의 것을 보여주기 위한 ‘틀’ 속에 나를 넣고 싶지 않아졌어. 내가 주체(주인)가 되어, 내게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내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고민하기 시작했지.”
양동근은 이 대목에서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너희 기준이 너희 멋대로야? 그럼 나는 됐어’ 라고 생각하게 됐어. 배우로서의 삶은 내가 규정하겠어. 처자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삶으로 살겠어.”
— 객석에서 던지는 먹이를 먹고 살아가는 게 배우잖아. 냉혹한 비평가와 기자들의 평가를 먹고 사는 게 배우야. 그렇게 말하는 게 쉽지 않아.
“눈이 가려졌을 때 볼 수 없었던 나를 본 거지. 나락으로 떨어져 바닥을 치니까 자연스레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었던 것 같아.
내 자랑 같지만, 내가 1등을 안 쳐 본 게 아니잖아. 1등이란 게 엄청 달콤해. 그러나 1등을 치기 위해 사는 삶에 생명력이 없다는 것을 많이 느꼈어. 병든 내 모습을 봤기 때문이지. 어떻게 보면 1등 쳐 본 자의 여유일지도 몰라. 그런데 제일 중요한 것은… 좋은 작품을 하려면 좋은 인생을 살아낸 경험이 필요해.
물론 경험이 없으면 기계적 연기, 그저 스킬로 연기할 수야 있겠지. 〈네 멋대로 해라〉는 사실 연기라기보다 삶에서 겪은 내 소울(Soul)이 묻어 있었어. 그 뒤에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았던 것은 내 삶이 없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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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작인 영화 〈해적, 디스코왕 되다〉의 한 장면. 양동근은 후줄근한 달동네에서 싸움질로 청춘을 불사르고 있는 ‘성기’ 역으로 출연했다. |
계속된 그의 말이다.
“삶 안에서 느끼는 행복, 갈등, 감정… 이런 것들이 없었기에 이후 다른 작품이 와도 표현해 낼 줄 몰랐어. 20대 때는 ‘이것 못해, 안 해’가 굉장히 많았거든. 대본에서 우는 신(Scene)만 나와도 작품을 고사했어.
하지만 이젠 알게 됐어. 아빠 역할을 하려면 진짜 아빠가 되어야 하고, 삼촌 역할을 하려면 진짜 삼촌으로 살아야 한다는 걸. 그게 리얼리티지.”
— 결혼이 너를 많이 바꾸었구나. 결혼 잘했네.
“응.”
— 주연배우도 세월이 흐르면 조연이 되잖아, 그치?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 극중에서 누구나 주연이 될 수 없는 게 인생이야.
“내가 쭉~ 주연만 한 게 아니잖아. 어렸을 땐 보조출연도 해 보고, 조연 경험도 해 봤지.
내가 뜨기 전, 그러니까 드라마 〈논스톱〉으로 확 뜨기 전, 조연을 할 때도 마치 주인공처럼 연기했어. ‘난 조연이야’라고 생각하며 연기하지 않았어.
왜냐면 지금 내 삶이 아닌 곳에서 내가 주인공이 되는 건 의미가 없는 거야. 별 가치가 없어. 내 삶에서 오로지 내가 주인공이 되면 역할(배역)이 크건 작건 혼신을 다해 할 수 있으니까. 주연, 조연은 제작자나 객석이 정하는 것이고 내겐 아무런 영향이 없지. 내 안의 나는 조연이라도 정말 주연처럼 연기하면 되는 거야.”
— 흔히 배우의 삶은 가시밭길이라고 하잖아. 니가 생각하는 배우의 매력이 뭐니.
“다행스럽게도(?) 난 배우로서의 길이 평탄했던 것 같아. 물론 내 주변엔 힘들게 연기하는 분들이 많아. 그분들 보면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져.
근데, 배우의 매력?… 사실, 난 어렸을 때부터 배우를 당연한 것처럼, 마치 업(業)이랄까? 어릴 때부터 줄곧 배우였으니까. 배우가 아니면 뭘 하지? 라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배우가 내게 전부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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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현호 |
“10대 때는 안성기 선생님을 좋아했어. 그때 이미 대(大)배우셨으니까. 막연하게 ‘아, 나는 안성기 선생님 같은 배우가 돼야지’라고 생각했어. 그분도 아역 배우셨고. 20대 때는 한석규 아저씨가 좋았어. 그때 석규 아저씨가 잘나갔었지.
30대 때는 거의 국내 영화를 안 봤어. 왜냐면 국내 영화를 보면 자꾸 분석하려는 생각 때문에 즐기는 마음이 안 생기는 거야. 그래서 아예 안 봤어. 대신 아이들과 만화영화나 판타지 영화를 편하게 봤어.
지금은 좋아하는 배우라기보다… 배우의 삶에 대해 들여다보게 돼.
예컨대 배우 조니 뎁(Johnny Depp)이 옛날엔 굉장히 마초 같은 모습을 보이다가 가정을 가진 뒤 아이들을 위한 영화를 찍었다고 하잖아. 젊었을 때 그 얘기를 듣고 ‘아니 왜? 조니 뎁이 왜 그랬대?’라고 했다면 지금은 그를 이해할 수 있지. 그런 배우의 삶에 더 관심을 갖게 됐어. 배우가 무슨 작품을 찍었느냐 보다.
그리고 조지 클루니(George Clooney)…. 그 사람의 연기는 이미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에 있다고 생각해. 내 연기의 오랜 동경이 됐던 배우지. 미국문화에 젖어서 그럴지도 몰라. 사실 〈네 멋대로 해라〉의 ‘고복수’ 역도 외국 배우의 연기를 표방한 것이었어.
그런데 언젠가 깨달았어. 조지 클루니 연기가 미국인밖에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아무리 해도 우리는 흉내밖에 낼 수 없는… 그런 차이를 확 느껴 버린 거야. 조지 클루니는 미국인이고 난 한국인이잖아.
힙합도 마찬가지야. 이제 ‘땅의 색깔’을 느끼는 세대가 된 것 같아. 우리나라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뭘까 하고 생각했어.
한류(韓流)도 그래. 엔터테이너로서 ‘나도 한류로 가야 하나? 나도 갈까?’ 하고 조급증을 느꼈어. 그런데 한 번 더 생각을 했어, 너무 감사하게도. ‘아니야. 전부가 외화벌이하러 외국에 가는데 이 땅은 누가 지키나’ 하고 생각했어. 사실 음악이나 연기는 굉장히 영(靈)적인 분야잖아. 한국에서도 영적인 부분을 누군가 생각하고 책임질 리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나는 한국인이고,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겠어?
— 와, 너를 보니 마흔이 무섭네.
“맞아. 그런데 오히려 재미있는 것 같아. 뭔가 따라가는 삶이 아니고, 내 삶이 무엇인지, 내 색깔이 무엇인지 찾는 삶?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삶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