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제스가 53년간 쓴 일기, 美 스탠퍼드大 소장
⊙ 카이로회담 준비하면서 매번 “전후 한국의 완전독립과 자유”라는 조목은 빼놓지 않아
⊙ “김구에게 불화(佛貨) 1억5000만 프랑, 미화(美貨) 20만 달러 지원, 우리 정부가 비록 가난하기는
하나 한국에 대해 어찌 후하게 대하지 아니하랴”(1945년 11월 4일)
李相哲
⊙ 일본 조치대(上智大) 신문학 박사.
⊙ 現 류코쿠대학(龍谷大) 사회학부 교수 겸 중국 상하이 푸단대(上海復旦大) 겸직교수.
신문역사연구가 전문임.
⊙ 저서: <만주에 있어서의 일본인경영신문의 역사> 등.
⊙ 카이로회담 준비하면서 매번 “전후 한국의 완전독립과 자유”라는 조목은 빼놓지 않아
⊙ “김구에게 불화(佛貨) 1억5000만 프랑, 미화(美貨) 20만 달러 지원, 우리 정부가 비록 가난하기는
하나 한국에 대해 어찌 후하게 대하지 아니하랴”(1945년 11월 4일)
李相哲
⊙ 일본 조치대(上智大) 신문학 박사.
⊙ 現 류코쿠대학(龍谷大) 사회학부 교수 겸 중국 상하이 푸단대(上海復旦大) 겸직교수.
신문역사연구가 전문임.
⊙ 저서: <만주에 있어서의 일본인경영신문의 역사> 등.
중국 근현대사에 관심을 가져 온 필자는 특히 다음의 내용을 <장제스일기>에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첫째, 장제스는 김구(金九)와 여섯 차례 만났었는데 일기에 김구에 대한 기록이 있지 않을까? 있다면 김구에 대해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둘째, 장제스가 상하이(上海)임시정부(이하 임정)를 위해 뤄양(洛陽)에 군관학교를 설립해 주었고 물심양면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사실이 <백범일지> 및 연구자들의 논문에 언급돼 있는데 그것을 확인해 주는 기록이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돈을 건넸다거나, 또 건넸다면 언제 어떤 명목으로 얼마를 건넸는가 하는 것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을까?
셋째, 장제스가 한국의 완전독립을 적극 지지했다고는 하나 왜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정식으로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는가? 넷째, 카이로선언문에 전후(戰後) 한국독립을 보장하는 조목이 들어간 것은 정말로 장제스의 힘이었는가? 카이로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었는가?
이러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필자가 후버연구소를 찾은 것은 지난 9월 이른 가을이었다.
<장제스일기>
장제스는 1915년 28세 되던 해부터 1972년 8월 85세가 되던 해 팔 근육이 노쇠해서 붓을 놀릴 수 없게 될 때까지 57년 동안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썼다. 북벌(北伐)전쟁 시기(1926년), 8년 동안의 항일(抗日)전쟁 시기(1937~45년), 4년 남짓한 국공내전(國共內戰) 시기(1946~50년)에도 일기를 거르는 일이 없었으니 경탄할 일이다. 장제스 일기 가운데 1915년, 1916년, 1917년 일기는 1918년 말의 복건영태전역(福建永泰戰役) 때 북방군에 쫓기는 와중에 유실(遺失)됐고 1924년 일기는 황푸(黃)군관학교 시절에 없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53년의 일기, 책으로는 63책이다.<장제스일기>는 장제스가 생존해 있을 때 벌써 세간의 주목을 받았으나, <장제스일기> 진본(眞本) 전부를 본 사람은 거의 없다. <장제스일기>를 읽고 썼노라고 하는 책이 더러 나돌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후버연구소가 일기를 공개한 후 1년 이상 이 일기를 읽은 중국 사회과학원 양톈스(楊天石)가 쓴 <진실한 장제스를 찾아서>(2010년 6월, 華文出版社)를 제외하면 모두 장제스의 육필(肉筆)일기를 직접 눈으로 보고 쓴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세간에 알려진 <장제스일기>는 장제스의 육필일기를 빼놓고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우선 장제스의 은사(恩師)이자 비서였던 마오쓰청(毛思誠)이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이르는 사이에 장제스의 부탁으로 보관하고 있던 일기와 서간(書簡), 연설원고의 일부를 정리하면서 일기를 베껴 쓴 것이 있다. 또 항일전쟁 때 장제스가 한 고향 사람인 왕위가오(王宇高)형제에게 명하여 베껴 쓰도록 한 일기가 있다. 이들은 일기를 옮겨 적을 때에 내용을 분류하고 문장도 조금씩 가공했으므로 이 종류의 일기는 유초본(類抄本)이라 하고 사료(史料)가치도 많이 떨어진다. 그리고 장제스가 항일전쟁 때 비서인 위궈화(國華·타이완 행정원장 역임)에게 명하여 일기를 그 모양 그대로 베껴 쓰도록 한 것도 있다.
이런 종류의 일기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고 신빙성에 문제가 있어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런 종류의 일기의 일부가 난징(南京)에 있는 중국 제2역사당안관(案館·공문서관) 및 대만의 국민당 자료센터에 보관되어 있다. 이 일기를 본 사람은 더러 있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쓴 논문이나 저술도 있다.
유족, 50년간 스탠퍼드대에 대여
하지만 육필일기 진본 전부는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었다. 일기 진본은 장제스가 가지고 있다가 1975년 서거할 때 아들 장징궈(蔣經國·타이완 총통 역임)에게 넘겨주었고 장징궈가 1988년에 죽으면서 그의 막내아들인 장샤오융(蔣孝勇)에게 물려주었다. 장샤오융이 1996년 사망한 후에는 그의 부인 장팡즈이(蔣方智怡·영어명 Elizabeth Chiang Fang chih-Yi)가 일기를 보관하고 있었다.
장팡즈이 부인은 2004년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에 이 일기를 50년간 빌려주기로 했다. 후버연구소는 장제스의 처남인 재벌가 쑹쯔원(宋子文·외교부장 역임)의 개인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유족으로부터 <장제스일기>를 인수한 후버연구소는 이를 타이완(臺灣)으로 가져가서 시간이 오래되어 썩고 헌 곳을 손질하고, 판독이 어려운 부분은 원상으로 회복하여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이를 다시 마이크로필름에 옮겨 한 장 한 장 푸른색 종이에 복사하여 스탠퍼드대에 가져와 복사한 종이를 1개월 단위로 분류해서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일기는 2006년 4월부터 작년 8월까지 네 번에 걸쳐 전부가 공개됐다. 열람시 복사는 물론 사진도 찍을 수 없게 되어 있어 손으로 옮겨 적을 수밖에 없다.
왜 <장제스일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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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는 장제스 총통. |
일기형식은 시기에 따라 조금씩 변화는 있으나 57년간 변함없이 격조 높은 고투의 한문으로 매일 300자(字) 정도씩 단정한 붓글로 내려쓰고 있다. 한 줄에 약 23자, 가로 12행 내지 14행 정도 분량을 B5사이즈 크기의 일기장에 적고 있는데 일기형식도 독특하다.
일기는 ①제요(提要·당일의 주요사건과 심득), ②예정(豫定·하루 이틀 안에 해야 할 일들을 적은 부분), ③주의(注意·국내외 형세에 대한 생각과 유념해야 할 점들), ④기사(記事·그날 했던 일) 순으로 하루에 1페이지씩을 적고 있다.
또 주말(週末)에는 ‘전주(前週)의 반성록’, ‘금주 예정 업무강목’을 적고 월말(月末)에는 ‘이달의 반성록’, ‘이달의 대사표’(大事表·이달에 일어난 주요 사건을 적은 부분)를 적었다. 연말(年末)에는 그해의 일기에 빠졌던 부분과 1년 동안의 자아(自我)반성을 길게 적고 있다.
행서(行書) 붓글로 써서 알아보기 힘든 문자와 장제스 특유의 필체로 판독이 어려운 문자도 적지 않으나 완전히 해독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
<장제스일기>는 의식적으로 기록하지 않은 사실이나 빠뜨린 부분은 있을 수 있어도, 일기에 적은 내용은 사실이라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거짓말을 적으면 각 항목(제요, 예정, 주의, 기사)의 기록과 주말·월말·연말 반성록들 사이에 전후(前後)가 모순되어 자체 혼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그렇게는 못했을 것이다. 또 일기에는 주위의 사람들을 혹독하게 평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알려 주고 싶지 않은 사실, 예를 들면 성욕(性慾)을 누를 길 없어 어떻게 했노라는 기록도 있다.
윤봉길 사건 간단하게 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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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훙커우공원 거사 직전 기념촬영을 한 김구와 윤봉길 의사. |
이 사건이 일어나기 3개월 전에 있은 제1차 상하이사변(일·중전투)에서 장제스는 크게 패했다. 장제스는 1만50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고도 일본의 힘에 눌려 정전(停戰)을 할 수밖에 없었다.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사변의 주범격인 시라카와 사령관을 죽여 주었으니 이는 장제스에게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김구의 <백범일지>를 보면 사건 직후 난징정부(장제스정부)로부터 신변안전을 걱정해 도움을 주겠다는 제안이 있었고, 그 후 장제스와 처음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장제스일기>에는 이 첫 만남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윤봉길 사건에 대해서는 기술(記述)하고 있으나 아주 담담히 짤막하게 쓰고 있다.
<오늘 훙커우신화원(공원을 칭하고 있음)에서 왜놈(倭寇) 중요 관리들 모두 중상 입음.>
이날의 사건에 관해서는 4월 28일 일기에 적고 있는데, 아마 28일과 29일 일기를 한꺼번에 썼고, 그때 잘못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구전집> 4권에 실려 있는 윤봉길 사건에 관한 부분은 <장제스일기>에는 없다.
지금까지 장제스와 김구의 첫 만남에 대해서는 <백범일지>의 기록을 바탕으로 1933년 5월, 또는 같은 해 8월(김삼웅 <김구평전>, 연표는 5월, 본문에는 1월로 되어 있다), 그리고 1933년 1월(중국학자 논문, 石源華가 대표적임)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장제스일기> 및 사료를 바탕으로 추정해 보면 1932년 8월 10일 전후일 가능성이 제일 크다.
김구와의 첫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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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리푸(陳立夫). |
<민국 21년(1932년) 일본군이 상하이에서 전란, 즉 2·28사변을 일으켰다. 4월 29일 일본군이 상하이에서 그 승리를 경축하는 모임을 가졌는데 김구 선생이 윤봉길 열사(烈士)에 명하여 시라카와 대장을 죽이고 시게미쓰 등 수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일본군은 대대적으로 김구 색출을 꾀하므로 나는 명(命)을 받들어 김씨를 숨겨 쑤저(蘇浙·쑤저우 저장 일대)의 샹젠(巷間)으로 데려왔다. 이제부터 내가 한국 광복운동(세력과의 연락)을 주관하게 되었다.>
이렇게 쓴 다음 “이 전보를 장공(장제스)에게 직접 전해 주기를 바란다”고 쓰고 있다. 즉 샤오정이 자기가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창구 역할을 맡고 있다고 보고하고, 장제스에게 김구와의 회견 일정을 문의하고 있었다.
<백범일지>에는 김구 선생이 장제스를 만나 “100만금(金)을 허하시면 일본통치하의 후방을 교란 파괴할 수 있다”고 하니 장제스가 계획서를 보여 달라고 해서 이튿날 적어서 천궈푸(陳果夫·국민당 비밀정보기관장)에게 주었다. 그러자 장제스는 “암살파괴는 지구책(持久策)이 못 되니 군관학교를 만들면 어떻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민당 중앙조직위원회 자료를 보면 김구가 장제스를 만나기 전인 8월 10일 이전에 김구 쪽에서 먼저 계획서를 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8월 10일에는 장제스로부터 김구와의 회견에 대해 문의하는 전보에 답한 것으로 보이는 전문(電文)이 샤오정 앞으로 보내졌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장제스 비서실에서 난징에 있는 국민당 조직부로 보낸 것으로 보이는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난징 천리푸(陳立夫·장제스의 기밀담당 비서, 국민당위원회비서장 등 요직을 역임했고 김구를 많이 도와준 인물) 선생, 소청평(샹오정) 형께 전해 주게. 총좌(장제스를 칭함)께서 김구 등은 난징에서 기다리도록 하라는 말씀이 있었음. 다만 기병학교 건은 의논할 필요가 없을 줄로 앎.>
전문에서 장제스는 “곧 난징에 갈 터이니” 기다리라고 적고 있지는 아니하나, 문맥으로는 그렇게 읽을 수 있다. 또 일기를 통해 장제스의 일정을 확인해 보아도 8월 10일 전후 김구를 만나러 난징에 갔으며, 김구는 그 전에 난징에 도착하여 중국반점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구, 한국에 대한 국제공동관리 우려
장제스가 카이로회담에 임한다는 소식을 알고 임정 주석 김구 조소앙 김규식 이청천 김춘산 안원생 등이 1943년 7월 26일 장제스를 찾아간다.
이날의 만남에 대해서는 장제스 비서처가 7월 21일부터 분주히 움직였던 흔적이 남아 있다. 중앙집행위원회 비서처 <특5889호 문고>에 7월 26일에 있게 될 김구와 장제스의 회견장소, 시간 및 김구 측 방문자 직함, 성명까지 기록하여 결재를 요구하는 서류가 남아 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총재(장제스) 지시’를 적은 부분이다.
“외무대신에게 지시하여 한국당파(원문은 각 당파로 되어 있음) 영수 김구를 제외한 한국 각 당파 영수의 이력서를 검사해서 보내줄 것”이라는 내용이다.
카이로회담에 임하는 장제스는 자신을 만나러 오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어떤 세력을 대표하며 진정으로 한국 사람들의 의사를 대표하는 인물들인지를 알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제스는 이미 한국 독립운동 내부에 분열이 있고 여러 당파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회담기록에도 이에 대해 우려 섞인 내용의 대화가 나온다. 이날 회견에서 장제스가 먼저 “중국혁명 최후 목적의 하나가 조선을 도와 완전독립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 일은 아주 힘든 일이므로 한국 혁명동지들은 일심단결하여 복국(復國·광복)운동을 완성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김구는 “영국과 미국이 조선의 장래(국제적) 지위에 대해 제멋대로의 주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한국문제에 대해) 국제 공동관리 방식을 채용하려 하고 있으니 중국은 그들의 주장에 현혹되는 일 없이 (한국의)독립 주장을 관철해 주기 바란다”고 했다.
이에 대해 장제스는 이렇게 답했다.
“확실히 영국과 미국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니 장래 필경 쟁의(爭議)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 한국(독립운동 세력) 내부에서 성심성의로 통일된 모습을 보이기 위한 노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중국도 이 문제(한국의 완전독립)를 쟁취할 수 있고 이 일에 착수하기도 쉽지 않겠는가.”
장제스, “전후 한국의 완전독립과 자유” 다짐
즉, 장제스는 한국의 독립은 지지하면서도 이때까지 김구의 독립 세력이 한데 뭉쳐져 있지 않은 데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이것이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정을 승인하지 않은 제일 큰 이유였다. 이날의 일기를 보아도 장제스의 솔직한 심정을 알 수 있다. 장제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조선 혁명당 영수 김구 등을 만났다. 그들한테 내부 단결에 힘써(勸勉內部團結) 달라고 권하고 격려하였고 우리 정부가 주장하려 하고 있는 전후 조선독립 주장을 실현하는 데 협력해 달라고 했다.>
일기의 문맥으로 보면 장제스는 카이로회담에서 자신이 “전후 조선의 독립을 주장”할 터이니 그 ‘주장’이 실현될 수 있도록 좋은 모습(단결된 모습)을 보여 달라고 말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카이로로 떠나기 전에 장제스는 회담에서 조선의 완전독립을 주장하기로 작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제스일기>를 읽어 보면 1943년 7월부터 아주 꼼꼼히 카이로회담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처칠과 루스벨트를 만나면 무슨 얘기를 나눌까, 또 무슨 과제를 최우선으로 할까 하고 일기에 카이로회담에 임할 적의 과제를 조목조목 적고, 또 몇 번이고 수정하는데 매번 “전후 한국의 완전독립과 자유”라는 조목은 빼놓지 않고 꼭 적어 넣고 있다.
장제스가 카이로에 도착한 것은 1943년 11월 21일 아침 7시반이었다. 처칠과 루스벨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이날도 장제스는 회담준비를 꼼꼼히 챙기는 내용을 일기에 적는다.
카이로에 도착한 이튿날인 1943년 11월 22일 월요일, 회담에 임하기 직전 장제스는 일기 ‘금주의 주요 예정 업무 요강’에 영미(英美)와의 회담요지를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내용을 적고 있는데 그 안의 중요 조목 가운데 하나가 ‘전후 조선의 독립’이었다.
회담 기간의 장제스 일기는 회담에서 장제스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잘 기록하고 있다. 회담 기간 일기 일부 뽑아서 정리해 본다.
“처칠은 교활하고 완고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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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제스는 한국독립 등을 약속한 카이로회담 결과에 크게 만족했다. 앞줄 왼쪽부터 장제스, 루스벨트, 처칠, 쑹메이링. |
<처칠이 만나러 와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칠은 주로 부인과(쑹메이링) 담소했는데 처칠이 먼저 부인한테 묻기를 “그대는 평소 나 처(처칠) 아무개를 필시 제일 나쁜 노인네로 생각하고 있지요” 하니 부인이 “그럼 당신 스스로는 자신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하고 되묻자, 그(처칠)는 “나는 악한 사람은 아니지요” 하고 대답하자, 부인 왈 “그럼 됐네요”.>
역사 기록에 의하면 카이로회담에 임한 처칠은 장제스 부인이 주목받는 것을 아주 나쁘게 생각했다고 한다. 또 장제스를 “지루하고 재미없으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를 사람”(미국<타임>지 기사)이라고 했을 정도로 싫어했다고 하는데 <장제스일기>를 보면 장제스도 처칠을 아주 싫어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날 일기에는 <7시반에 루 총통(루스벨트 대통령-편집자 주)이 베푼 연회에 가서 심야 11시가 넘도록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러고도 할 얘기가 남은 듯하여 다음날 계속하기로 함>이라고 적고 있다.
11월 24일 자 일기에서 장제스는 “어제 일을 계속 적는다”고 한 다음 전날 밤 루스벨트 대통령과 나눈 얘기를 10개 항목으로 정리해 적고 있는데, 특히 주목할 대목은 7번째 조목이다.
<조선 독립 문제에 대해 나는 특별히 루스벨트의 중시를 끄는 데 힘을 넣었다. 나는 루 씨한테 (조선 문제에 관한) 나의 주장에 찬동하고 도와줄 것(贊助)을 요구했다.>
<미국 대표가 루 총통이 작성한 회의 성명서 초안을 가지고 와 부인(쑹메이링)한테 건네며 내 뜻을 물어보라고 했다. 나는 그 안의 모든 사항이 완전히 전날 밤 내가 루 총통한테 제기한 요지 그대로임을 알고 마음속 깊이 루 씨가 화(華·중국)에 대한 성심성의의 자세와 정신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 어떤 정치가도 따르지 못하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밤에는 처(칠) 수상이 베푼 연회에 응했는데 (처칠은) 부인(쑹메이링)한테 우스갯소리를 많이 늘어놓았지만 부인은 가볍고 담담히 가시 돋친 대응을 했다(淺刺對之).>
일기를 보면 처칠은 장제스가 제안한 의제들, 특히 조선 태국 등 약소국의 독립에 견결히 반대했고 루스벨트는 장제스의 제안을 전폭 지지했다는 대목도 나온다. 이 때문인지 장제스는 다음날 일기에서 처칠을 맹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처칠은 벌써 나한테 네 번이나 빚을 지고 있다. 이자는 영국식 정치가로서 앵글로색슨 민족의 전형적 인물인데 그 사상과 정신, 기백과 인격은 절대 루 총통(루스벨트)하고는 동렬(同列)에서 운운할 수도 없다. 협애하고 교활하고 자사적이며 완고(挾隘, 浮滑, 自私, 頑固)하다는 여덟 자가 딱 들어맞는 놈이다.>
처칠, 조선독립 반대
이날 11시에 처칠이 장제스 처소를 방문하여 40분가량 얘기를 나눈 후 두 사람은 루스벨트의 처소에 가서 그 유명한 역사에 남는 사진을 찍는다. 일기에는 사진을 찍을 때 일을 이렇게 적는다.
<루 씨는 나한테 가운데에 앉으라고 권했으나 나는 완강히 사절(堅讓不就)하며 앉지 않고 스스로 우측에 앉으니 처칠은 좌측에 앉았다. 마지막에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부인도 함께 앉아 사진을 찍었다.>
11월 26일 자 일기에서도 처칠에 대한 장제스의 반감은 그대로 나타난다.
<어제 루스벨트 처소에서 사진을 찍고 손님들이 헤어진 다음 나는 루 처소에 남아 어젯밤 내가 제기한 정치방안은 개인적인 의견이므로 그냥 참고로 해 달라고 설명하고 아울러 내 의견은 이러할 뿐이라고 했다. 그때 그(루스벨트)의 표정(神態)은 진지하고 성의에 넘쳤다. 오후 4시에 또다시 루 씨와 함께 내가 제기한 요지(성명문 요지, 다섯 개 항목을 열거하고 있는데 생략)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는데 회담이 끝날 무렵 루 씨는 탄식하듯 나를 향해 지금 문제가 되고 고통스러운 것은 처칠의 문제라고 했다. 또한 (처칠이) 중국의 뜻(제안)을 존중하지 않는 듯한 언행이 있는 데 대해 우려의 기색을 보였다.(중략) 그(루 씨)와 약 한 시간 반 가량 담소하고 처소로 돌아왔다(이하 생략).>
카이로회담에서 주목할 바는 조선의 독립문제에 관해 처칠은 끝까지 반대했고 장제스는 이 문제를 주요 의제의 하나로 하려고 노력했다는 부분이다. 회담이 끝난 다음에 적은 일기 ‘11월의 반성록’에서 장제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번 카이로선언문(三國公報)이 성사된 경과에 대해 기록을 보충할 필요가 있겠다. 성명문을 마무리하기 전 3국 대표가 토론할 때 영국은 조선독립 문제에 대해 견결히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려고 했고 또 동북(東北·중국만주) 문제에 관해서는 입으로는 일본이 만주를 포기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동북을 중국에 반환하는 것에 대해서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하나 우리 대표가 미국 대표의 찬동과 도움을 쟁취했기에 선언문이 무탈하게 원안대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장제스, 카이로회담 결과에 흥분
회담 막판에 이른 11월 27일 일기에는 장제스의 흥분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동삼성(東三省·동4성으로 적을 때도 있음-지린·랴오닝·헤이룽장성을 말함)과 타이완·펑후다오(澎湖島) 등 잃어버린 지 50년 혹은 12년이 넘는 영토를 영미 공동성명에서 동의를 얻어 우리나라에 돌려주기로 하고, 또 전후 조선의 독립과 자유를 승인하게 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또 이 얼마나 바라고 있던 제안이었더냐. 그것을 오늘 3국 공동성명안에 넣어 발표했으니 고금(古今) 중에 전례(前例)가 없던 외교적 성공이 아니더냐.>
이날의 일기는 흥분한 까닭에서인지 아주 드물게도 문법이 흐트러져 있고 두서가 없다.
<장제스일기>에는 제국주의 강국과 처음 동양인으로서 한자리에 앉아 전후 세계를 논하게 되는 것에 자부감과 자신을 얻은 듯한 기록이 몇 번이고 등장한다.
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시기 장제스는 연합군 극동(極東)사령관으로서 미얀마 전선에 투입한 중국군과 영국군과의 공동작전으로 머리를 썩이고 있었고 중국 국내의 항전에서도 일본군에 밀리고 있는 어려운 상황에 있으면서도 한국문제를 잊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자유를 중요 의제로 다루려고 준비했고 김구와 약속한 대로 조선독립을 3국 공동성명에 넣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장제스는 그 결과에 아주 만족한 듯 “이렇듯 큰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통역과 내조를 맡은 부인의 공이 제일 컸고 그 다음은 내가 평소 인격향상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1943년 11월 27일 일기).
장제스, 臨政 승인 유보
카이로회담 후 김구가 장제스를 만난 것은 1944년 9월 5일이었다(<김구전집> 등 한국에서 편찬한 사료집에는 1944년 9월 20일로 되어 있지만 9월 5일이 정확함). 기록에 따르면 김구는 장제스를 만나 각서를 통해 여섯 가지 요구사항을 제출했고 또 구두(句讀)로 네 가지를 요구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각서를 통해 요구한 사항은 ①중국정부는 합법적으로 임정을 승인해 줄 것 ②임정에 대한 원조를 더 두텁게 해 줄 것(③, ④항 생략) ⑤활동비 명목으로 5000만원을 원조해 줄 것 ⑥매달 정무비 및 생활비 등 보조비를 200만원으로 인상해 줄 것(⑦항 생략) 등이었다. 그 외 구두로 ⑧임정 사무실로 쓸 집을 마련해 줄 것 ⑨각서 내용 및 담화기록은 우리 정부(임정)의 다른 한국인에게 알려주지 않았으면 함 등을 요구했다.
이 요구사항에 대해 장제스는 즉석에서 이렇게 답한다. “임정 승인 문제에 대하여 우리 정부는 이미 방침을 굳히고 있다. 하나 시기가 성숙되면 제일 먼저 승인하리라” 하고 대답한다.
5000만원 원조에 대해서는 우선 500만원을 지급하고 (임정의)업무가 진척되어 가는 상황을 보아 가며 또 의논하자고 했고, 정무비 및 생활비로는 먼저 100만원으로 인상해 주고 쌀을 내주는 일은 계속해서 상의하게 해 주기를 바란다고 대답한다.
즉, 다른 요구는 들어주고 있으나 임정 승인은 완곡히 미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정무비 및 생활비 100만원 인상에 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이전부터 장제스는 임정에 일정액의 보조금을 지급해 왔던 것인데, 이를 100만원으로 인상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전까지의 보조금 액수는 확실하지 않으나 100만원에는 미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번 만남이 있은 닷새 후인 9월 10일 일기, ‘주말의 반성록’을 보면 장제스는 “한국독립 문제와 베트남(생략) 등 문제는 여러모로 심혈을 기울였으나 아직도 해결을 얻지 못하고 있다”고 고민하고 있다.
장제스가 임정 승인을 미룬 것은 일기내용을 미루어 보아 임정 전후 한국의 유일한 선택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그 이유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첫째는 한국 독립운동 세력 내부의 단결을 문제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독립운동 세력 내부의 분열 알력이 외부에도 알려져 독립운동 각 세력이 임정아래 통합되어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둘째로는 약소민족의 독립문제가 인도, 태국문제 등과 겹쳐 영국을 위주로 한 열강의 동의를 쉽게 얻지 못했기 때문이며, 셋째로는 한국 독립운동의 추이를 보면서 시기를 놓고 고민했기 때문이었다.
장제스, 김구에게 1억5000만 프랑+25만 달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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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11월 3일 귀국을 앞두고 임정요인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
이날 일기의 예정(하루 이틀 새에 해야 할 일을 적은 부분) 제일 첫 번째 조목에는 ‘ⓛ 김구에게 1억원 거출’이라는 기록이 나와 있다. 그리고 11월 4일 일요일에 쓴 ‘전번 주의 반성록’ 첫머리에는 또 “한국 혁명당 김구에게 불화(佛貨) 1억5000만 프랑, 미화(美貨) 20만 달러를 지원함”이라고 적은 다음 그 뒤에 계속하여 “우리 정부가 비록 가난하기는 하나 한국에 대해 어찌 후하게 대하지 아니하랴”라고 적고 있다. 그당시 1달러는 중국 돈으로 25원 이상의 가치가 있었으니 장제스에게도 거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기내용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면 이렇다.
1945년 9월 26일 김구 등 임정요원들이 장제스를 방문했을 때 김구는 장제스 면전에서 5가지 요구를 제기하는데, 4번째 요구가 “돈을 빌려주면 귀국 후 갚아 드리겠다”는 내용이 있다. 그 자리에서 장제스는 생각(考慮)해 보겠다고 했고, 일기에서 10월 18일까지 중국 돈으로 1억 위안을 주기로 한 것이 확인된다.
두 주일 후 또 프랑화와 미화를 지불하는데, 장제스가 두 번에 걸쳐 거금을 건넸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프랑과 달러는 김구에게 건네진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이 돈에 대해서는 일기에서 지나간 일을 적는 ‘반성록’, 즉 그 전 주에 일어난 일을 적는 페이지에 적고 있으니 이 돈은 지불된 것이 틀림없다.
“그들이 하루라도 빨리 독립하기를…”
다만 중국돈 1억원이 김구에게 건네졌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김구 측이 1억원 대신 외화를 요구하였기에 1억원은 실제로 지불하지 않고 프랑과 미 달러만 지불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일기 내용만으로는 단정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1억원 거출’이란 기록은 일기의 하루 이틀 내에 실행하게 될 조목을 적는 ‘예정’에 적었고 그 뒤 어떻게 처리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또 중국글의 발관(撥款)이라고 할 때의 ‘발(撥)’은 ‘큰 돈을 떼서 주는 행위’를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과거형인지 미래형인지는 문맥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그러나 단마디로 적힌 이 문장에서는 과거형으로 썼는지 미래형으로 썼는지는 분명치 않다.
대체로 간명하게 사실만 적고 있는 <장제스일기>에서 돈의 액수를 적는 것은 아주 드문 경우이다. 그 이전 일기에는 누구한테 돈을 얼마 주었다는 기록을 찾아보기는 힘든데, 1945년 10월 하순부터 11월 초의 두 주일가량 되는 시간에 장제스는 두 번이나 김구와의 사이에 있었던 돈 얘기에 관해 정확한 숫자를 기록하고 있다. 그 정도로 장제스는 한국 독립 문제를 중요시했고 집안일처럼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1945년 10월 29일 김구와의 만남에 대해 장제스는 “작별인사를 온 김구를 만남”이라고 간단히 적고 있다. 그리고 1945년 11월 4일 일기에서는 “한국의 혁명당원들이 오늘과 같이 조국에 돌아갈 날이 왔으니 이것은 내가 (그들을) 받들고 세워서(扶掖) 이루어진 일이어늘 그 영광이 어찌 하느님을 빛내지 아니하랴. 그냥 기도할 뿐이오니 그들이 하루라도 빨리 독립하기를”이라고 적었다. 이날은 귀국길에 오르는 김구 등 임정요원을 위해 장제스가 송별연을 베푼 날이기도 하다.
위의 사실 가운데 일부는 그동안 부분적으로 공개된 <장제스일기>를 통해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장제스가 카이로회담 준비과정 등을 통해 한국의 독립에 기울였던 관심,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 중국이 임정에 대한 승인을 보류한 이유 등을 <장제스일기> 육필원고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