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메이니, 미 대사관 습격 활용해 정적 축출
⊙ 이란, ‘혁명 수호’ 위해 레바논 개입하면서 헤즈볼라 탄생
⊙ 이란 보수파, 하타미 정권의 대미 유화 정책에 불만… 혁명수비대 통해 이라크 개입
⊙ 이란, 혁명수비대 앞세워 ‘저항의 축’ 구축… 미국, 최대 압박 제재로 맞서
⊙ 이스라엘, 2024년 이란 영사관 공격 시작으로 ‘저항의 축’ 팔다리 자르기 시작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 저서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K를 생각한다》
⊙ 이란, ‘혁명 수호’ 위해 레바논 개입하면서 헤즈볼라 탄생
⊙ 이란 보수파, 하타미 정권의 대미 유화 정책에 불만… 혁명수비대 통해 이라크 개입
⊙ 이란, 혁명수비대 앞세워 ‘저항의 축’ 구축… 미국, 최대 압박 제재로 맞서
⊙ 이스라엘, 2024년 이란 영사관 공격 시작으로 ‘저항의 축’ 팔다리 자르기 시작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 저서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K를 생각한다》

- 1979년 11월 4일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 담장을 넘는 이란 대학생들. 이 사건은 이후 미-이란 갈등의 뿌리가 됐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 공습 이후, 이란을 공격한 이유를 밝혔다. 한마디로 미국이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들어선 이란이슬람공화국과 47년간 맺어온 악연(惡緣) 전체가 그 이유라는 것이었다. 이란이슬람공화국은 미국과 화해할 수 없는 정부이기 때문에, 미국의 패권과 안보를 위해서 반드시 체제 교체를 이루어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팔레비 시대 중동의 든든한 친미(親美) 우방국이었던 이란은 대체 어쩌다가 미국과 화해가 불가능한 원수가 되고만 것일까. 세계를 고통으로 몰아가는 이 끈질긴 악연의 역사를 짚어보도록 하자.
모든 이야기는 1979년 1월에 시작된다. 1년 내내 이란을 뒤덮은 반(反)정부 시위의 물결에 팔레비 왕조의 제2대 샤(황제)인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가 이란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1925년에 제1대 군주인 레자 샤가 개창한 팔레비 왕조는 50년 이상 이란을 통치하며, 튀르키예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를 모방한 세속주의(世俗主義)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근대화의 수혜가 상층에만 집중되고, 급속한 문화 변화에 반감을 느낀 보수(保守) 이슬람 세력의 반발이 더해지며 이란에는 사회주의 세력과 이슬람주의 세력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반군주정, 반서방 운동이 성장했다. 이들이 연합하여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사건이 바로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이었다.
호메이니, 미 대사관 점거 지시하지는 않아
모든 혁명이 그렇듯, 혁명의 진짜 이야기는 구(舊)체제가 물러나고 혁명 세력 간 권력 쟁투(爭鬪)가 벌어질 때 시작된다. 1979년 이란에는 자유주의 성향의 총리 메디 바자르간이 이끄는 임시정부, 혁명의 성직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각지의 혁명 위원회(코미테), 그리고 각지의 노동조합을 이끄는 투데당(이란공산당)이라는 세 개의 세력이 혁명 이후 이란의 미래를 놓고 경합하고 있었다.
각 세력은 반팔레비 투쟁에는 연대했지만, 당연하게도 서로를 매우 크게 불신했다. 각 정파를 지지하는 학생운동 세력이 제각기 무장대(武裝隊)를 조직하고, 다수 국민을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경쟁에 돌입했다.
이런 와중에 1979년 11월, 일군의 과격 학생 단체가 기어이 일을 벌였다. 주(駐)테헤란 미국 대사관 담장을 넘어버린 것이다. 이들은 미국 대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잡고, 미국으로 망명한 팔레비의 송환을 요구했다. 이렇게 444일간 진행된 테헤란 미 대사관 인질 사건이 시작됐다.
호메이니는 미 대사관 습격과 점거를 지시하지 않았다. 당시 혁명 지도부의 핵심 구성원이었던, 훗날 최고지도자와 대통령이 되는 하메네이와 라프산자니도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서 라디오로 대사관 점거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권력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인물이었던 호메이니는 이 사건을 자신이 지시하지 않았어도 자신이 생각하는 혁명 국가에 활용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직감했다. 자유주의 성향의 임시정부는 인질 석방을 요구하는 미국과 석방 불허(不許)를 고수하는 호메이니 사이에 끼어서 금세 정치적으로 고사(枯死)했다. 호메이니는 바자르간 총리가 미국에 타협적이라는 이유로 정치적 비난을 가했다. 결국 바자르간은 총리직을 사임하고 망명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제 혁명의 대오에는 반미 노선을 고수하는 이슬람주의자와 좌파 사회주의자만 남았다. 하지만 전 세계에 생중계되어 미국에 치욕을 안긴 대사관 인질극 사건은 미국에 씻을 수 없는 반이란 정서를 심어놓았다. 호메이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국을 대(大) 사탄, 이스라엘을 소(小) 사탄이라고 부르며 호전적(好戰的) 비난을 이어갔다.
혁명 전쟁으로 비화한 이란·이라크 전쟁
1980년이 되었을 때 이란 혁명은 가장 고통스러운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이란이 혁명으로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이라크의 세력을 확장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1970년대에 팔레비 이란에 정치적 굴욕을 당하기도 했던 터라 좋은 복수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사담 후세인의 침공으로 시작된 이란·이라크 전쟁은 호메이니 정부에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팔레비 시절의 군(軍) 장교들이 모두 숙청되어 군사력이 약화되었고, 미국과 관계가 악화되어 팔레비가 구매한 첨단 미군 장비의 보급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소련도 자신의 우방국인 이라크를 지원했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처지가 된 이란은 이슬람 혁명의 정신을 외치면서, 동시에 조국을 수호해야 한다는 민족주의 정서를 동원했다. 팔레비 시대의 군 장교들이 복귀해 미국 전투기를 몰고 이라크군의 미그 전투기를 사냥했다. 시아파 정신을 외치는 소년병들이 지뢰밭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이란군의 반격에 두려움을 느낀 사담 후세인은 화학무기까지 사용하며 이란이 이라크로 시아파 혁명을 수출하려는 것을 어떻게든 저지하고자 했다.
호메이니를 비롯한 혁명 수뇌부는 이 전쟁이 이슬람 혁명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을 무너뜨리고자 미소(美蘇) 양대 초강대국과 모든 주요 국가들이 가담한 반혁명 전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실제로 미국의 우방국인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만 왕정(王政)들은 호메이니 혁명이 자신들 국가에서도 반왕정 혁명에 불을 지필 것을 우려하여 물밑에서 이라크를 지원하고 있었다.
게다가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이 이라크의 침략을 공식적으로 규탄하지 않고, 프랑스와 독일은 이라크에 화학무기 원료까지 수출하는 상황에서 혁명 지도부는 서방이 이라크를 사주(使嗾)하여 전쟁을 일으켰다고 여기기까지 했다. 따라서 혁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단순히 이라크를 ‘처벌’하는 것을 넘어서, 더 넓은 군사적 투쟁을 감행해야 했다. 레바논이 바로 그 무대가 되었다.
헤즈볼라의 탄생
1983년 10월 23일 베이루트 국제공항에서 폭발로 241명의 군인(대부분 해병대원)이 사망한 지 이틀 만에 조지 H.W. 부시 당시 부통령이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이란·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1982년, 서쪽에서 이스라엘군은 국경을 넘어 레바논 남부 지역을 무단으로 점거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난민 조직이 레바논 남부에 각종 무장 캠프를 만들어 이스라엘을 향한 공격 거점으로 삼고 있던 차였다.
이스라엘의 메나헴 베긴 총리는 PLO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운동의 뿌리를 뽑겠다며 레바논으로 진군하는 강수를 두었다. 하지만 이는 레바논 남부에 거주하던 시아파 인구로부터 커다란 반발을 사는 일이었다. 게다가 레바논 시아파는 수백 년 전부터 이란 시아파와 모스크를 기반으로 한 끈끈한 연대(連帶)를 맺고 있었다. 이란 혁명이 이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세계 전역의 이슬람 혁명으로 확장하고자 했던 이란 내부 급진파는 레바논 시아파의 대(對)이스라엘 투쟁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이란 혁명 과정에서 탄생한 혁명수비대(IRGC) 간부진과 전투적 성직자들이 레바논으로 파견되어 레바논 시아파에 호메이니주의를 전파(傳播)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조직이 레바논 시아파 정당이자 무장 조직인 헤즈볼라였다.
절대 열세에 놓인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점령군을 몰아내기 위해 사용한 전술은 자살폭탄테러, 그것도 미국을 향한 테러였다. 레바논에 주둔한 미군에 타격을 주어 미국이 더는 이스라엘을 지원하지 못하게끔 정치적 압박을 가하겠다는 것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개전 연설에서 언급한, 241명의 미군 장병이 사망한 1983년 베이루트 미 해병대 막사 테러로 가는 길이 이렇게 열렸다. 호메이니는 이란 영토에서 이라크군을 몰아낸 뒤에 이라크 영토에서 전쟁을 이어가며 ‘목표는 예루살렘’이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자국 안보에 대한 엄청난 집착으로 악명(惡名)이 높은 이스라엘이 머리 위에 헤즈볼라와 같은 무장 혁명 조직을 지원하고, 공공연히 이스라엘 멸망을 공언하는 이란 혁명 정부를 곱게 볼 리가 없었다.
라프산자니-하타미 정권, 대미 화해 추구
하지만 이란은 국가 노선의 변화를 모색해야만 했다. 8년간의 전쟁으로 이란은 국가를 방어하는 데 성공했지만, 경제는 초토화되었고 사회의 피로도 견디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전쟁은 페르시아만과 호르무즈해협으로 격화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미군 군함이 이란 민항기를 격추해 승객 290명이 몰살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1988년에 호메이니는 ‘독배(毒杯)를 마시는 심정’으로 이라크와 휴전에 동의했고, 이듬해인 1989년에 사망했다.
호메이니 지도력 공백 속에서 이란의 실권(實權)을 쥔 인물은 아크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였다. 성직자였지만 전쟁 지휘와 경제 재건에 관심이 더 많은 인물인 그는 대통령이 되어 이란을 한국과 일본을 모델로 한 개발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1989년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미국 자본주의 절대 패권(覇權)이 모습을 드러낸 해이기도 했다.
문제는 공석이 된 최고지도자 직위였다. 라프산자니는 최고지도자가 상징적인 자리로 남기를 원하며, 존재감이 그리 크지 않던 인물인 하메네이를 호메이니의 후임으로 추대했다. 이렇게 이슬람공화국의 두 번째 시대가 시작됐다.
라프산자니에 비해 실권이 부족한 하메네이가 조용히 자신의 권한 확보를 위해 움직이는 동안에 이란은 경제적 정상화를 달성하고자 노력했다. 중도파 실용주의자 라프산자니 시대(1989~1997년)와 자유주의 개혁파 모하마드 하타미(1997~2005년) 시대 동안 이란은 시장 자유화를 단행했고, 해외 자본 투자 유치에 심혈을 기울이며 전후(戰後) 복구, 중산층 육성, 동아시아 경제 벤치마킹에 계속해서 집중했다. 중도파와 개혁파 정치인 및 관료들은 이를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가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마침 1990년 걸프 전쟁으로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가 미국과 이스라엘의 새로운 공적(公敵)으로 떠오르면서 이란은 미국의 관심에서 다소 비켜갈 수 있었다.
하타미는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나자 알카에다를 규탄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과 공동 작전을 추진했다. 분노한 미국을 달래며 오히려 테러와의 전쟁을 관계 개선의 기회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무산된 ‘그랜드 바겐’
하지만 미국과 이란의 뿌리 깊은 불신을 풀기에는 장애물이 너무 많았다. 하메네이는 종교 재단과 혁명수비대, 즉 금력(金力)과 무력에 대한 통제권을 늘려가며, ‘혁명 정신’에 부합하는 독자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레바논 헤즈볼라에 대한 지원을 계속했는데, 헤즈볼라가 여전히 테러를 비롯한 비정규 전술에 의존하고 있는 관계로 미국이 이란에 대한 의심을 거두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이란은 서방 국가에서 전직 팔레비 시대 정치인들에 대한 암살 작전도 계속 진행했는데, 이로 인해 ‘테러지원국’으로 분류된 이란을 향한 미국의 제재(制裁) 역시 하타미의 노력과는 별개로 계속되었다.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네오콘 부시 행정부가 당선된 것은 미국·이란 관계 정상화 전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9·11 테러를 기점으로 미국은 ‘이슬람과 문명 충돌’이라는 호전적 수사(修辭)를 더욱 많이 구사하며 중동에 대한 군사 개입을 늘렸다. 2003년에 미국은 사담 후세인 정부를 최종적으로 축출하는 이라크 전쟁을 개시하며 이는 절정에 달했다. 이란은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동서 양편에서 미국에 포위된 신세가 되었다.
하타미는 초유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미국에 대거 양보를 해야 한다고 하메네이를 설득했고, 스위스 대사를 통해 미국에 사실상 전략적 양보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다. 핵개발 포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입장 완화, 대리(代理) 세력 지원 대폭 축소 등을 담은 ‘그랜드 바겐’ 제안이었다.
하지만 겁에 질린 이란을 얕잡아 본 미국은 하메네이가 승인한 ‘그랜드 바겐’을 거절하며, 이란을 향한 공세적 압박을 계속했다.
혁명수비대의 이라크 개입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외치는 개혁파의 입지는 이로 인해 급격히 축소되었다. 안 그래도 이란이 시장 자유화와 대미(對美) 유화 외교로 ‘혁명 정신’을 상실했다고 생각하는 보수파들은 하타미 정부에 커다란 불만을 품고 있던 차였다.
하메네이는 자신이 통솔하는 혁명수비대를 통해 이라크에서 미국과 군사적 충돌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마침 미국에 의해 사담 후세인이 제거되는 바람에 이라크 인구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시아파에 대한 접근이 가능해진 상황이었다. 혁명수비대는 레바논 헤즈볼라 지원 당시 축적한 노하우를 이라크에서도 사용하며 전쟁을 간단히 확대할 수 있었다. 각지의 시아파 모스크를 통해 거점을 마련하고, 이란의 혁명 이념을 지역 주민에게 전파하고, 무장대를 조직하여 각 지역에 자급자족할 수 있는 무장 세포를 확산시켰다. 이 뒤에 현지의 지지를 바탕으로 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이란에 아예 붙어 있는 이라크에 시아파 전진 기지를 만드는 것은 혁명수비대 입장에서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시아파 민병대와의 전투는 부시 행정부 입장에서 사실상 악몽으로 돌변했다.
때마침 하메네이의 후원으로 등장한 보수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행정부는 핵개발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이스라엘을 향한 호전적 발언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미국은 강력한 경제 제재를 가했지만, 이란은 국민의 경제적 고통을 감수하고 미국을 향한 도전을 계속 이어나갔다.
‘저항의 축’ 등장
이란은 2015년 7월 14일 유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 독일, EU와 함께 평화적 핵 프로그램 운용에 관한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에 합의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2008년 오바마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미국과 이란의 관계 개선 기회가 다시 열리는 듯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부시 시대의 중동 개입이 중국의 부상(浮上)을 불러왔다고 비판하며, ‘아시아로의 회귀’를 천명했다. 이란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중동에서 발을 빼 중국 견제에 국력을 집중하는 것이 오바마 행정부의 장기 비전이 되었다.
이란에서도 이에 화답하는 움직임이 싹트고 있었다. 2009년, 이란에는 선거 부정에 항의하는 개혁파가 이슬람공화국 보수파를 전격적으로 비판하며 거리에서 자유화를 요구하는 ‘녹색운동’을 벌였다.
정부는 녹색운동을 강경 진압했지만, 혁명과 전쟁의 기억이 없는 청년층의 불만을 위무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마침내 2013년에 중도 개혁파인 하산 로하니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미국과 이란 양측에 실로 오랜만에 협상파들이 마주 앉을 수 있게 되었다. 미국과 화해하여 경제 발전을 이루고자 한 로하니와 중동에서 탈출해 중국에 집중하고자 한 오바마의 손뼉이 맞으며 2015년에 역사적인 미·이란 핵협상(JCPOA)이 타결되었다.
하지만 하메네이는 핵 협상만 지도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아들처럼 여긴 혁명수비대 카셈 솔레이마니 장군을 통해 이란의 영향력 확대도 동시에 추구하고 있었다.
2011년에 ‘아랍의 봄’으로 불리는 아랍 독재 정권의 연쇄 붕괴 사태가 발생했다. 역내 주요 국가가 이 세력 공백을 메우고자 달려드는 사이에, 이란 역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란은 이미 헤즈볼라와 이라크를 통해 본토가 아니라 자신이 확보한 ‘세력권’에서 싸운다는 전진 방어 전략을 실행하고 있었고, 시아파 네트워크를 통한 준군사 조직 설치에 능수능란해진 상태였다.
이란 혁명수비대는 튀르키예,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압도하는 성과를 거두며 아랍의 봄이 남긴 혼란에서 점차 승자로 부상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리아, 이라크, 예멘(후티), 레바논(헤즈볼라), 하마스에 이르기까지 이란이 후원하는 ‘저항의 축’이라 불리는 거대 군사 네트워크가 등장했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공공연히 부르짖고, ‘저항의 축’을 운용하는 이란의 존재는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에 실존적(實存的)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 두 국가가 보기에, ‘혁명 이념과 군사력’을 모두 지닌 이란 정권을 남겨두고 미국이 중동을 빠져나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를 미국의 커다란 배신으로 여겼다. 이 때문에 오바마 행정부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크게 경색되었다. 문제는 2016년에 모두의 예상을 깨고 민주당이 집권 연장에 실패하며 공화당 트럼프 1기 행정부가 들어섰다는 것이었다.
트럼프의 ‘최대 압박 제재’
2020년 1월 6일 미국의 드론 공격으로 사망한 솔레이마니의 장례식에는 수십만 명의 이란인들이 참석해 그를 애도했다. 사진=신화/뉴시스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는 과거 이란에 극히 호전적이었던 네오콘 각료들은 물론이고, 트럼프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를 통해 이스라엘도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에 기존 핵 협상에 더해 미사일 사정(射程)거리 제한과 ‘저항의 축’ 해체를 요구하고, 이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핵 협상을 파기하겠다고 선포했다. 이는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요구를 강력히 반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란 입장에서 이미 서명을 마친 협상을 포기하고 항복하라는 트럼프 행정부의 협박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치적 자살과 다름없었다. 하메네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협상 파기를 감수하고, 다시 미국을 향한 혁명 저항의 깃발을 들어 올리자고 호소했다.
솔레이마니 장군이 다시 중동에 나타나 사우디의 유전을 공격하고 미군 기지를 흔들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0년 1월 벽두에 바그다드 공항에서 드론 공격으로 솔레이마니 장군을 죽이는 것으로 대응했다.
대외 작전 능력에 커다란 타격을 입은 이란은 트럼프 정부의 가혹한 ‘최대 압박 제재’로 경제 위기의 고통까지 겪어야 했다. 이런 와중에 자신들이 공감할 수 없는 이슬람 혁명 이념을 사회에 강요하는 것에 지친 도시 중산층과 청년층은 정부에 더욱 공개적인 저항과 불복종을 벌이고 있었다.
‘알 아크사 홍수 작전’이 불러온 역풍
2020년에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했지만, 최대 압박 정책은 철회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하메네이와 혁명수비대가 선택한 생존 전략은 중국과 러시아에 다가가 대체 무역로를 뚫는 것이었다. 중국은 제재를 무시한 이란산 석유의 핵심 구매처로 떠올랐다. 러시아는 식량과 방위 산업에서 협력을 이어갔다. 이란의 경제난을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적어도 정부가 생존할 수는 있었다.
이렇게 ‘다극화(多極化)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 일단 내핍하며 버틴다는 전략하에, 이란은 2023년 중국의 중재(仲裁)로 앙숙인 사우디와의 화해까지 성공했다. 중동 상황은 이렇게 누구도 만족하지는 못하지만, 큰일은 터지지 않는 아슬아슬한 균형에 돌입한 것으로 보였다. 미국은 일단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와 대치하고 장기적으로는 태평양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데 집중하며 중동은 국제 뉴스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밀려났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전격 공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야히야 신와르가 이스라엘을 향해 무차별 기습 공격을 실시한 ‘알 아크사 홍수 작전’은 명실상부 이란의 지원 덕분에 가능했다. 이란이 이 공격을 지휘하거나 명령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하마스가 이스라엘마저 타격할 수 있는 군사 물자를 확보하는 데는 이란의 지원이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안보만큼은 확실하다’며 지지를 얻어온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에게는 이만한 정치적 위기가 없었다. 네타냐후 총리는 가자지구를 상대로 잔혹한 진압 작전을 개시함과 동시에, 이란이 주도하는 ‘저항의 축’ 전체를 무너뜨리는 공세를 단계적으로 실시해 나갔다.
2024년 4월에 이스라엘은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이란 영사관을 공격했다. 같은 해 9월에는 헤즈볼라 수장인 하산 나스랄라를 사살했다. 12월에는 시리아 아사드 정부 붕괴를 적극 활용하여 오랜 반이스라엘 국가 시리아에 전진 기지를 확보했다. 이란의 지원을 받아온 예멘의 후티 반군은 생존에 성공했지만, ‘저항의 축’은 순식간에 팔다리가 잘린 꼴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자유롭게 뚫린 시리아 영공(領空)을 활용해 이란을 향한 전격적인 공격에 나섰다.
동아시아에 어떤 나비효과 가져올까
2025년 6월에 이스라엘의 선제(先制)공격으로 이란과의 ‘12일 전쟁’이 벌어졌다. 이 뒤에 발생한 일은 보이는 바와 같다.
이란에는 더욱 어려운 경제 위기가 찾아왔고, 혁명에 지친 국민들의 불만이 누적되고 있었다. 미국은 재무장관 스콧 베센트가 인정한 바대로 리알화를 향한 통화 공격을 감행하며 이란의 국내 위기를 추가로 활용했다.
하지만 이란이 지난 2월 발생한 반정부 시위를 가혹하게 유혈 진압, 다시 한 번 위기를 넘기는 것처럼 보이자, 네타냐후 총리의 주도하에 전면 공격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올해 치러질 미국 중간선거와 이스라엘 총선 이전에 이란에서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 이란이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통해 더욱 위협적 존재로 거듭나리라는 위기의식이 중요하게 작용한 것 같다.
하지만 이 전쟁이 어떻게 끝날지, 결정적으로 이란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도 많은 것이 불투명하다.
이 질문은 동아시아와 중동이 에너지 자원은 물론이고 안보적으로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중국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끝없는 전쟁에 국력을 소모한 덕택에 아주 편하게 부상할 수 있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이란이라는 중국의 전략적 파트너를 잘라내는 것은 이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란의 저항에 군수품과 물자, 정치적 지지를 끝없이 쏟아붓는다면,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견제할 미국의 자원에 결정적인 위기가 찾아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전쟁이 동아시아에 어떤 나비효과를 가져올지는, 전적으로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시작된 이란이슬람공화국의 이념과 군사력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동하느냐에 달려 있다. 47년 전 이슬람 혁명으로 시작된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투쟁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