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종 인터뷰] 20년 만에 입을 연 金賢姬

“盧武鉉의 국정원이 나를 MBC에 출연시켜 바보 만들려 했다. 국정원 간부로부터 이민 권유 받기도”
좌파정권下 국정원-방송-홍위병 세력의 융단폭격을 맞고도 버티어낸 이야기

  • : 조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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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새워 가면서 KAL기 수사를 했던 이들이 나를 가짜로 만드는 데 동참하고,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해도 이렇게 등에 비수를 꽂다니, 이를 갈았습니다.”(김현희)

“이제는 정권도 바뀌었으니, 안보를 책임진 중추기관이 亡國행위를 한 것은 그냥 지나갈 수 없지 않습니까?
(국정원이) 사과하고 관련자를 처벌해야지, 그래야 대한민국이 제대로 선다고 생각합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진짜가 가짜가 되고 가짜가 진짜로 바뀌니 이젠 제대로 세워야죠.
(舊 국정원은) 국가기관도 아닙니다. 무슨 깡패 집단도 아니고(흥분), 북한도 일을 할 때 명분을 주지 이렇게 비열하게 꼼수를 쓰지 않습니다.”


⊙ “나는 분해서 못 죽는다. 살아 있는 사람도 가짜로 만드는 판에. 살아남아서 복수해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 “공식사과와 책임자 문책 때까지 국정원과 싸울 것”
⊙ “북한도 이렇게 꼼수를 쓰지 않는다”
⊙ “요코다 메구미가 친구 김숙희를 가르쳤다”
⊙ “이은혜가 죽었다는 말 믿을 수 없다”
⊙ “북한에서 공작원 가르친 일본인은 열명 넘을 것”
⊙ “책 쓴 수입금 8억5000만원은 유족회에 기증”
⊙ 국정원 재조사로 140여 개 의혹제기 거의 전부가 ‘근거 없음’으로 판명-안기부 수사와 김현희
    증언의 정확성 재확인
최근 필자와 다시 만난 金賢姬씨.
필자의 휴대폰 카메라로 찍은 사진.
세미나장에서 나오는데 金賢姬(김현희)씨의 남편 鄭(정)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안내하여 1층으로 내려왔다. 한쪽 구석으로 가더니 등을 돌린 채 서 있던 한 여인에게 다가가선 뭐라고 말을 했다. 여인이 등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알아보시겠습니까?”
 
  김현희씨였다. 나는 멈칫했다. 15년 전 마지막 보았던 모습을 떠올려, 지금 내 앞에 있는 중년 부인의 얼굴과 오버랩시키는 데 1초쯤 걸렸다.
 
  “몰라보겠는데요.”
 
  살색 점퍼를 입었고, 얼굴이나 몸이 야위어 보였다. 고른 치아를 드러내는 앳된 웃음은 여전했다. 주위에 사람들이 오고 갔으나 아무도 김씨를 알아보지 못했다. 남편이 모는 자동차가 주차한 곳으로 걸어가면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인지 따져보았다.
 
  1989년 봄 安企部(안기부)의 서울시내 安家(안가)에서 만나 나흘 동안 김현희씨를 인터뷰한 것이 처음이었다. 세계 최초의 인터뷰였다. 그 내용은 한국과 일본에서 출판됐다. 마지막은 金日成(김일성)이 죽은 1994년 7월 직후였다.
 
  우리 세 사람은 손님이 적은 日食堂(일식당)의 別室(별실)로 갔다. 북한에서는 그를 일본인으로 만들어 對日(대일)공작에 써먹기 위해 교육했으나 그는 아직도 일본에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삿포로 맥주를 시켜 마시면서 물어보았다.
 
  “일본 맥주 이름을 다 알지요?”
 
  “이은혜한테서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다 잊었어요. 일본말을 안 쓴 지 오래되었는데, 몇 달 전 일본인과 말을 하려고 하니 말문이 안 열렸습니다.”
 
 
  “세계에 이름을 떨칠 아이”라는 예언
 
‘일본정부 납치문제대책본부’에서 펴낸 <모든 납치피해자의 귀국을 위하여>.
  김현희씨는 “요사이 어머니가 꿈에 나온다”고 했다. 어머니는 생존해 있다면 76세, 아버지는 79세일 것이다.
 
  “장례식 장면, 素服(소복) 입은 어머니가 가끔 보이는데, 돌아가셨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 金元錫(김원석)씨는 1930년 출생으로 김일성종합대학교 영문과를 나와 외교관이 되었다. 어머니 임명식씨는 개성 만월중학교 교사를 하다가 결혼했다. 임씨는 “하나님 감사합니다”란 말이 습관적으로 나올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김현희씨는 朴世直(박세직) 안기부장의 인도로 여의도침례교회에 나가 洗禮(세례)를 받았다. 요사이는 교회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성경을 읽는다고 한다.
 
  김현희씨는 어릴 때 사주를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세계에 이름을 떨칠 아이”라는 답이 나왔다고 한다. 김씨는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이런 식으로 이름을 떨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라고 푸념한 적도 있다.
 
  “아버지는 6·25 때 군인이 되어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오셨다고 해요.”
 
  김현희씨는 태어난 다음해인 1963년에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 3등 서기관으로 부임해 가는 아버지를 따라가 1967년까지 살았다. 안기부는 김현희씨의 진술에 근거하여 당시 쿠바주재 외교관 명부를 입수, 김원석씨의 이름을 확인한 바 있다.
 
  “아바나에서 살았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얼음과자를 엘라데로라고 하는데 그것을 사 먹던 추억, 어머니 심부름을 하다가 마호병을 깨뜨린 일, 아버지를 두고 우리가 귀국할 때 고생했던 기억이 납니다.”
 
  김현희씨는 “쿠바는 독재를 해도 김일성 김정일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말했다.
 
  “북한은 邪敎(사교)집단이지요. 사이비 종교이지 독재도 아니에요.”
 
  김씨는 안기부에서 범행을 자백한 뒤에도 김일성 이름에서 ‘주석님’이란 존칭을 떼는 데 몇 달 걸렸다. 20년 전 김현희씨는 나를 만났을 때 名言(명언)을 남겼다.
 
  ―그때 김현희씨는 이런 말을 했어요. “북한에선 히즈 스토리(His Story)를 가르치는데 남한에 와 보니 히스토리(History)를 가르친다”고요. 혹시 이 말을 어느 책에서 읽고 한 겁니까.
 
  “그건 아니고,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요코다 메구미가 숙희의 일본어 선생”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요코다 메구미.
  이날 식사 중 김현희씨는 고장난 보일러 걱정을 자주 했다. 생활인으로 변한 김씨를 아직도 ‘美女(미녀) 테러리스트’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그를 만나면 “이걸 꼭 물어봐 달라”고 부탁하는 일본인들이 있다. 납치자 구출을 위해 일하는 이들이다.
 
  ―북한에서 공작원 교육을 받을 때 요코다 메구미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저는 없는데, 숙희(김현희씨와 함께 공작원 교육을 받았던 김숙희를 지칭―편집자 주)가 메구미한테서 일본말을 배웠다고 합니다. 물론 그때는 김숙희에게 일본어를 가르쳐주는 여인의 이름이 메구미인 줄은 몰랐습니다. 어릴 때 일본에서 납치되어 왔고, 성격이 얌전하고, 납치되어 온 한국 남자와 결혼했고, 딸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본 적은 없군요.
 
  “없습니다. 다만 폴라로이드 사진기로 김숙희와 메구미가 같이 사진을 찍은 것을 본 적은 있습니다.”
 
  ―사진을 찍어도 됩니까.
 
  “지도원인지 누군가가 찍어 준 것 같아요. 그 안에선 서로 잘 아니까 그렇게 합니다.”
 
  일본인 납치사건의 상징적 인물로 되어 있는 요코다 메구미는 김현희씨보다 두 살이 적은 1964년생으로, 1977년 11월에 일본 서해안 도시 니가타에서 납치됐다. 당시 중학생이었다.
 
  2002년 9월에 고이즈미 당시 일본 총리가 평양을 방문, 김정일과 만났을 때 북한 당국이 통보한 자료에 따르면, 요코다 메구미는 1986년 11월까지 공작원 교육시설(초대소)에서 근무했고 1986년 8월 13일에 김철주와 결혼, 이듬해 9월에 딸 김혜경을 낳았다고 한다. 북한 당국에 의하면 요코다 메구미는 1993년 3월 평양 승호구역 제49병원에서 정신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김현희씨는 메구미가 ‘얌전하고 우울하고 잘 아프고 입원을 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지도원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얌전한 숙희가 얌전한 일본 아이와 생활하니 더 얌전해졌다. 공작원은 활발해야 하는데, 숙희를 이은혜와 배합시킬 걸 잘못했다’고 말했어요.”
 
 
  가짜 메구미 유골 사건
 
  일본인 납치자 구출운동은 경찰이 실종으로 처리한 메구미 소녀가 실은 북한에 의해 납치됐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이었다. 메구미를 북한에서 보았다고 증언한 사람이 탈북자 安明進(안명진)씨였다. 그는 메구미씨의 행방을 조사하던 구출회 사람들에게, 1988년에서 91년 사이 공작원 양성기관인 金正日(김정일)군사대학에서 공부할 때 일본어를 가르치던 메구미를 보았다고 말했던 것이다.
 
  안씨가 이런 증언을 하기에 이른 데는 김현희씨의 역할이 있다. 1988년 1월 15일 안기부가 대한항공 폭파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이 소식은 김현희씨가 다녔던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도 알려져 안씨처럼 교육을 받던 이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 김정일은 “여자 공작원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해 공작원 교육을 받던 여자 학생들이 거의 없어졌다는 것이다. 북한당국은 또 김현희씨가 자살에 실패한 것은 청산가리가 든 앰풀을 세게 깨물지 못한 때문이라고 분석, 자살훈련을 강화했다.
 
  김현희씨가 서울의 풍요로운 모습을 보고 자백한 것은 남한 실정에 대한 공작원 교육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여 ‘以南化(이남화) 교육’이 강화됐다. 이 과정에서 안씨는 김현희씨가 쓴 手記(수기) <지금 여자로서>가 일본에서 번역된 것을 조총련이 다시 한국어로 번역해 보내온 것을 읽었다. 안씨는 ‘115명이나 죽게 한 테러의 범인을 한국이 살려주었다면 한 사람도 죽인 적이 없는 자신을 죽일 리는 없다’고 생각하여 남한으로 탈출을 결심했다고 한다.
 
  일본의 납치자 구출단체는 김정일 정권이 메구미가 죽었다고 발표했으나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응하여 북한 측이 “이것이 메구미의 유골이다”라고 보냈고, 일본에서 유전자 분석 결과 “메구미의 유골이 아니다”라는 결론이 나왔다.
 
  북한이 돌려보낸 납치 생존자들의 간접적인 증언에 의하여 메구미가 김현희씨와 함께 공작원 교육을 받았던 김숙희의 일본어 선생을 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김현희씨의 이번 증언은 이런 일본측 증언과 부합된다.
 
  김현희씨는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을 때 “나는 이은혜라는 일본인 여성으로부터 일본어를 배웠다”고 진술했었다. 김현희씨는 이름을 김옥화로 바꾸고 금성정치군사대학(現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기초적인 공작원 교육을 받은 후 1981년 7월부터 83년 3월까지 평양의 용성구역 임원동 소재 동북리 2층 3호 초대소에서 일본인이 되기 위한 이른바 일본화 교육을 받았다. 이은혜라고 불리는 일본인 여성과 같이 살면서 일본어와 일본풍습을 익혔다.
 
 
  “이은혜는 죽지 않았을 것”
 
김현희씨의 일본어 선생이었던 이은혜(다구치 야에코).
  기자가 김현희씨를 처음 인터뷰했던 1989년 5월에도 ‘이은혜’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김현희씨의 증언에 기초하여 몽타주를 만들어 전국에 돌린 일본 경찰은 자주 김현희씨를 만나러 와서 인물 사진을 보여주곤 했었다.
 
  김현희씨는 이은혜가 본명은 말하지 않았는데, 술을 자주 마시고 술을 따르는 데 익숙하여 그런 업소(술집)에서 근무한 듯하다고 진술했다. 키는 165cm 가량, 몸무게는 56kg 정도였고, 도쿄 출신의 이혼녀이며 두고 온 자식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1991년 봄 일본 경찰관들이 또 안기부에 근무하던 김현희씨를 찾아왔다.
 
  “그때가 아마 일곱 번째 방문이 아닌가 합니다. 여러 사진을 갖고 와서 하나씩 꺼내는데 마지막 사진이 이은혜였습니다. 통통한 얼굴이었어요. 최근 청년이 된 다구치의 아들 사진을 텔레비전에서 보았는데 눈매가 어머니와 닮았더군요. 아들을 꼭 만나보고 싶어요.”
 
  그해 5월 일본 사이타마현 경찰은 이은혜가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다. 2002년 9월 김정일은 訪北(방북)한 고이즈미 일본 총리에게 놀랍게도 다구치 야에코를 납치한 사실을 시인했다.
 
  물론 북한 당국은 “다구치 야에코는 김현희가 말한 이은혜가 아니다”고 강변하고 있으나 논리상, 그리고 사실관계에서 설득력이 없다. 다구치 야에코의 존재와 납치사실이 전적으로 김현희씨의 증언을 실마리로 하여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는 김현희씨의 비상한 기억력을 증명한다.
 
  북한당국이 돌려보낸 일본인 납치자들은 북한에 있을 때 다구치로부터 “1981년부터 1983년 사이 초대소에서 ‘옥화’(김현희)라는 여성 공작원과 같이 생활했다”는 말을 들은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은 다구치가 1984년에 다른 被拉(피랍) 일본인 하라 다다아키와 결혼했고, 1986년 7월에 남편 하라가 病死(병사)한 직후 정신적인 위안을 얻으려고 운전자가 모는 자동차를 타고 여행을 하던 중 트럭과 충돌, 동승자 2명과 함께 죽었다고 발표했다.
 
  ―이은혜가 죽었다고 생각합니까?
 
  “믿을 수 없습니다. 거기는 교통사고가 날 일이 없어요. 이은혜가 거기서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돌려보내 주면 저와 관계된 일, 그리고 공작원 교육상황 등이 알려지니 붙잡아 두는 거겠지요. 북한이 일본으로 돌려보낸 이들은 공작부서에서 근무한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납치자 문제 세계적 이슈로 만들어
 
  김현희씨는 이은혜에 대해 마지막으로 소식을 들은 것은, 1985년 여름 자신이 중국 광저우(廣州)로 실습을 떠나기 전이었다고 한다. 그 요지는, “이은혜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외롭게 사는데 운전사들이 찾아가 행패를 부렸다가 문책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북한의 발표에 따르면 다구치, 즉 이은혜는 1984년에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다. 김현희씨는 결혼 사실을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만약 북한이 2002년에 다구치 야에코를 돌려보냈다면 김현희씨와 再會(재회)했을 것이고, 그 충격은 대단했을 것이다. 일본인 납치사건과 대한항공 사건이 하나로 결합되어 일어나는 폭발력은 당시 북한당국이 추진하던 日·北(일북)수교와 이에 따른 일본의 對北(대북)배상을 불가능하게 했을 것이다(그런 장면이 없음에도 일본 世論의 저항으로 수교 협상은 지금껏 진전이 없다).
 
  ―이은혜가 납치될 때의 상황을 이야기하던가요(북한당국은 1978년 6월 규슈 미야자키 해안에서 납치했다고 발표).
 
  “했습니다. 납치된 뒤 배를 탔는데, 멀미를 많이 하고 못 먹고 해서 입고 있던 조임 바지가 헐렁하게 되더라고 하더군요. 우리가 초대소에서 생활할 때는 제일 원칙이 묻지도, 알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거예요. 이은혜가 이야기하는 것만 들어 두었지, 묻지는 못했습니다. 이은혜는 자신에 대해 많이 말한 편이에요. 이은혜가 저에 대해 아는 것은 정말 적을 거예요.”
 
  동북아 情勢(정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일본인 납치자 문제에 대해 지금 김현희씨가 필자에게 하고 있는 이 증언은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은혜에 대한 김현희씨의 진술은 그때까지 일본인 납치자의 존재 자체를 부인해 오던 일본 정부의 태도를 바꾸게 했다. 김현희 증언이 공개된 두 달 뒤인 1988년 3월 일본 국가공안위원장은 일본 참의원에서 “이은혜, 하라 다다아키, 아베크族(족) 납치 사건 등은 북한의 소행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처음으로 증언했던 것이다.
 
  1997년 이후 일본에서 납치사건이 집중적으로 거론되던 시기, 김현희씨는 좌파정권 10년 동안 대한항공기 폭파 의혹 제기자들과 이들을 비호한 권력기관에 의해 몰리는 신세가 되어 입이 막혔다. 일본 정부나 구출운동가들과 만날 수도 없었다. 피랍된 일본인들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 부족하여 김현희씨의 증언은 한마디 한마디가 소중하다.
 
 
  메구미의 처지가 가련하게 느껴져
 
  ―김현희씨는 1982년 2월 이은혜와 함께 살면서 일본화 교육을 받고 있을 때 이은혜가 취중에 이런 말을 하더라고 했지요?
 
  ‘김정일 동지의 생일(2월 16일) 만찬에 특별히 초대되어 갔었다. 나처럼 납치되어 온 것 같은 일본인 부부를 만났다. 이 사실은 절대로 비밀이다.’
 
  “그렇습니다. 초대소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그런 부부가 두 쌍이 있다는 것 같은데….”
 
  ―혹시 북한에서 이은혜 이외의 일본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때 북한 공작부서에선 일본인들을 많이 잡아와서 공작원을 교육하는 데 이용했는데, 초대소나 군사대학 등 이런 데서 일한 일본인들이 몇 명이나 되었을까요?
 
  “열 명은 넘었겠지요.”
 
  김현희씨는 “나도 아이들을 키워 보니, 어릴 때 납치되어 온 메구미의 처지가 더욱 가련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김현희씨가 결혼한 이후 처음으로, 좌파정권 등장 이후 처음으로 나와 인터뷰를 하기로 결심한 것은 20년에 걸친 인연과 상호 신뢰 덕분이다. 좌파정권하에서 의혹 제기자들이 악랄하게 김현희씨를 가짜로 몰아가려 할 때 유일하게 이를 반박하는 기사를 지속적으로 내보냈던 매체가 月刊朝鮮이었다. 김현희씨가 지난 10월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호소하는 글을 보냈던 李東馥(이동복) 전 의원(남북고위급 회담 대변인)의 경우도 재미있는 인연이 있는 사이이다. 이씨의 手記(수기)를 요약한다.
 
  <1972년 11월 2일 오전 11시06분. 남한측 대표단을 태운 두 대의 소련제 군용 MI-8 헬리콥터가 개성으로부터 40분간의 비행 끝에 착륙한 곳은 대동강 남쪽 역포였다. 나무 하나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이었다.
 
  이때 ‘직승기(헬기)’에서 내린 남쪽 손님들은 평양에서 처음 열린 남북조절위원회 회의(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제2차 회의)에 참가하는 남쪽대표단 일행이었다. 남쪽 대표단은 李厚洛(이후락·중앙정보부장) 공동위원장, 張基榮(장기영·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부위원장, 崔圭夏(최규하·뒤에 대통령. 당시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 필자(李東馥 대변인), 그리고 보도진 등을 합쳐 25명이었다.
 
 
  “조선 꽃도 모릅네까?”
 
  헬리콥터 프로펠러의 소음과 착륙에 따른 바람 먼지가 가라앉자 북측에서는 여학생들이 앞으로 나와 남쪽 손님들을 한 사람씩 맡아서 목에 붉은색 스카프를 걸어 매어 주고 한 묶음씩의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학생들의 표정은 매우 긴장돼 있었고 그들의 동작은 제식훈련처럼 절도 있는 딱딱한 것이었다.
 
  필자는 이들 어린 여학생들에게 남쪽으로부터의 따스함과 부드러움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필자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여학생에게 웃는 얼굴로 말을 걸었다.
 
  “꽃이 참 예쁘구나. 그런데 이 꽃의 이름은 무엇이지?”
 
  그러나 북측 여학생의 반응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는 세 걸음을 뒤로 물러섰고 그 자리에 부동자세로 서서 필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조선사람이면서 조선 꽃도 모릅네까?”
 
  필자는 아연실색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무안스러움을 금치 못하면서 옆에 대기 중이던 차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차에는 앞자리에 북측 안내원이 동승하고 있었다. 필자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좌석 뒤의 빈 공간에 놓으면서 비로소 문제의 꽃다발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슬그머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필자는 다시 꽃다발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앞자리에 있는 북한측 안내원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을 걸었다.
 
  “여보, 어린아이들에게 평소에 얼마나 남쪽의 우리들에 대한 적대감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했으면 아이들이 그렇게 말할 수가 있소. 그런데 도대체 알고 넘어가기나 합시다. 북한에서는 이 꽃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뒤를 돌아보는 북한측 안내원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그는 겸연쩍은 얼굴로 대꾸했다.
 
  “조선 꽃이지요, 뭘.”>
 
  김현희씨는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을 때 “헬리콥터에서 두 번째로 내린 사람에게 꽃다발을 주었다”고 진술했었다. 안기부는 두 번째로 내린 이가 서열상 장기영씨일 것이라고 잘못 단정했다. 안기부와 기자들이 그 잘못된 단정을 근거로 하여 당시 찍었던 사진에서 북한측 花童(화동)을 골라내는 과정에서 김현희가 아닌 소녀를 김현희라고 주장했다. 이는 북한측의 逆攻(역공)을 부르다가 일본에서 진짜 김현희 소녀의 사진이 공개되어 의문에 종지부를 찍었다.
 
 
  친필 비준
 
  ―김현희씨가 그때 꽃을 준 상대가 이동복씨 맞습니까?
 
  “예, 이 선생님이 화가 나신 것 같아요. 그 전에도 귀빈들에게 꽃을 전달하러 자주 나갔습니다. 캄보디아 시아누크 왕이 왔을 때 등등. 그런데 남한 손님은 처음이라 교육을 단단히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남한 사람이, ‘아버지는 어디 가 있나’하고 물었을 때 실수할까 봐 준비를 많이 했습니다.
 
  북한에는 生花(생화)가 없어요. 造花(조화)를 씁니다. 그런데 이 선생님이, 이 꽃이 뭐냐 이렇게 물으시니 당황할 수밖에요. 나중에 질책을 당할까봐 즉석에서 받아친 거지요. ‘조선 꽃도 모릅네까?’라고 말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나중에 보고해야 하는데 (꽃 이름을 몰랐다고 질책을 당할까봐) 보고도 안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 선생님과 나중에 안기부에서 같이 근무하게 되었고, 요사이는 폐를 많이 끼치니 인연이 참….”
 
  김현희씨는 친북세력과 좌파정권하의 舊(구) 국정원이 이미 진실로 확정된 대한항공 사건을 재조사하도록 몰아간 목적은 지령자 김정일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데 있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1987년 11월 현재 김정일이 관장하는 조선노동당의 對南(대남)공작부서는 네 개였다. 연락부, 작전부, 통일전선부, 대외정보조사부. 앞의 3부는 黨(당)의 대남담당 비서를 통해 통제하고, 납치와 테러 담당인 대외정보조사부는 김정일이 직접 지휘했다고 한다. 김현희는 이용혁 대외정보조사부장이 직접 金勝一(김승일)과 자신에게 임무를 부여하면서 “88 올림픽과 두 개의 조선 책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남조선 비행기를 제껴야 한다”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김정일이 대남부서를 총괄하고 사소한 것들, 예컨대 공작원이 나가고 들어가는 것까지 김정일의 친필비준이 있어야 움직이고 하는데, 비행기를 폭파하는 데 김정일의 지시 없이 됩니까? 공작노선을 토론하는데 김승일이 여러 번 노선에 문제가 있다고 최 과장과 다투었습니다. 이란-이라크가 전쟁 중인데 중동을 지나는 항공 노선은 좋지 않다는 거였습니다. 동남아 노선이 더 좋다는 거였어요. 최 과장이 분명히 말했습니다. 친필비준이 난 것이니 그것은 다음에 고려하자고. 그래도 김승일은 내켜 하지 않더란 말입니다. 우리는 김정일의 지시를 꼭 ‘친필비준’이라고 불렀습니다.”
 
 
  “국정원이 MBC에 출연하라고 강권”
 
   김현희씨는 “1984년에 한국에 들어올 뻔했다”고 秘話(비화)를 털어놓았다. 1984년 8월 15일 하치야 신이치 명의의 일본 여권을 가진 김승일과 그의 딸 하치야 마유미로 위장한 김현희는 평양을 출발, 모스크바~부다페스트~빈~코펜하겐~프랑크푸르트~취리히~제네바~파리까지 여행했다. 파리 드골공항에서 김승일은 김현희와 헤어져 대한항공 906편을 타고 김포공항으로 들어갔다가 9월 26일 홍콩을 거쳐 마카오로 나왔다. 이 사이 김현희는 방콕~홍콩으로 여행하여 마카오에서 김승일과 재회했다.
 
  “출발 전에 저도 남조선으로 들어가느냐 마느냐로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때 김승일이 받은 임무는 비중 있는 대학교수와 접선하는 일이었습니다. 김일성이 직접 접선 지시를 내렸다고 들었습니다. 그 교수를 (간첩으로 포섭한 사람이) 김승일이었다고 해요. 그는 사회에 나가 다른 일을 하다가 김일성의 지시로 복귀한 것입니다. 교수를 포섭했던 사람이 다시 나가야 그 선이 회복된다고 생각했겠지요. 김승일은 나와 같이 들어가자면서, ‘그냥 곁에 가만히 있으면 돼. 누가 물으면 고맙습니다란 말만 하면 된다’고 하더군요. 최 과장이 결국 나를 들여보내지 않기로 결정하여 마카오에서 기다렸습니다. 김승일이 (한국에) 있을 때 대구에서 무슨 사건이 터져 혼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호흡이 맞았기에 제가 김승일과 다시 한 組(조)가 된 것입니다.”
 
  ―김현희씨는 국정원이 MBC의 취재에 협력하라고 하면서 거주지를 알려주었다고 생각하는데, 기자들이 경찰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경찰은 저희들의 신변을 보호하는 입장인데, 집이 알려지면 자기들만 곤란해지는데 그렇게 했을까요?”
 
  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 정씨가 화를 내면서 말했다.
 
  “기획된 공작이었어요. 2003년 10월 말에 KBS MBC SBS의 취재가 집중됐습니다. KBS 취재진이 집 근처로 먼저 왔는데, MBC PD수첩이 (집을) 먼저 보도하는 바람에 KBS는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국정원에서 나를 보고 ‘MBC에 나가라’고 하고 우리는 ‘못한다’ 이러는데, ‘서울로 올라오라’, 이렇게 되어서 남편이 올라갔어요. 그때 (남편이) 식당에서 (국정원 사람들과) 이야기하는데, 분위기가 이상하더랍니다.
 
  평소엔 잘 아는 사람들인데, 음식도 잘 먹지 않고, 연말에 神父(신부)들 하고 만나도록 하자는 이야기를 하다가 과장이 나가더니 전화를 하더라나요. 그때 저는 집에 남아 있었는데, 카메라 들고 온 사람들이 딩동, 딩동, ‘김현희씨 집이죠’라고 해요.
 
  마침 그때 여자경찰관이 함께 있었습니다. 남편이 불려 올라가면서 경찰에 부탁했어요. ‘무슨 일이 일어난다. 느낌이 안 좋다’면서. 그 장면은 텔레비전에 안 나오더군요. 밤 10시에 불을 끄고, 아이들 재우고, 저는 자지도 못하고 하다가 다음날 새벽 세 시에 집을 나갔습니다. 그 전에 남편한테 전화를 하니 국정원 직원이 받아요. ‘경비실에 이야기하여 (방송팀을) 가라고 하세요’라고 한가하게 말합디다.
 
  아이 아빠가 돌아와서 지금 있는 집으로 옮겼는데, 아니, 그렇게 해놓고도 (국정원에선) 계속하여 ‘MBC에 나가라’는 거예요. 인터뷰하라는 거예요. 하루 이틀 뒤면 그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때는 정말 아이 기저귀도 못 갈고….”
 
 
  “소변에서 독극물이 검출됐는데도…”
 
  ―그때 김현희씨가 MBC에 출연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보가 되는 거지요. (프로) 선전이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김현희는 어디서 데려왔는지 모르지만, 가짜다’이러데요, 변호사가. 그런 데선 진짜라고 해 봐야 바보 되지요. 열 명이 달라붙어 가짜라고 하면 나는 바보 되는 거지. 아이고, 정말.”
 
  문제의 장면 기록은 이렇다.
 
   
  ―전종훈 신부(천주교 인권위원회): 아무 것도 없는데 그저 김현희의 증거, 김현희가 한 말 있잖아요. 뭐 ‘김정일의 친필서명을 받고 지령을 받아서 폭파시켰다’ 이거만 듣고 ‘폭파당했다, 비행기가 없어졌다’ 어떻게 믿느냐 말입니다.
 
  ―심재환 변호사(KAL 858기 진상규명대책위원회): 김현희는 완전히 가짜다. 그렇게 딱 정리를 합니다. 이건 어디서 데려왔는지 모르지만 절대로 북한 공작원, 북한에서 파견한 공작원이 아니라고 우리는 단정을 짓습니다.>
 
  ―MBC PD수첩 프로에서 가장 화가 난 부분은?
 
  “어떻게 단정적으로 가짜다, 어디서 데려왔는지 모르겠는데 가짜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것 책임질 수 있나요.”
 
  2003년 11월 18일에 방영된 MBC PD수첩 프로를 보고 기자가 가장 화가 났던 부분은, 김현희씨가 바레인에서 독약 앰풀을 깨물었는데도 죽지 않은 것에 시비를 거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에 대해 물었더니 김현희씨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인간적으로 정말 너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MBC는 김현희씨가 독을 마셨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김정일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다행이었다고 말하기는커녕 ‘飮毒(음독)연기’라도 한 것처럼 몰아갔다. 국정원 과거사조사위원회는 이 항목까지 의혹사안으로 넣어 조사했다.
 
  국정원은 “‘사전에 짜여진 각본에 따라 실제로 음독을 하지 않았고 다만 음독 시늉만 했다는 의혹’이 있어 조사한다”고 했다. 안기부가 확보했던 바레인 공항경찰관의 목격담 진술은 생생했다.
 
 
  음독 演技說
 
  <공항경찰이 앰풀이 든 담배를 압수했고, 김현희는 그 담배를 공항경찰로부터 빼앗아 필터 부분을 입안에 넣었고 이를 공항 경찰들이 저지했음. 김현희의 몸이 경직돼 소동이 끝난 후 입술에 핏자국이 있었음. 앰풀에는 분홍색 가루가 들어 있었음. 김현희의 생존 이유는 그녀가 청산가리를 흡입할 때 감시자가 즉시 제지했기 때문일 것임. 인공호흡이 즉시 실시되었음. 김현희의 입은 물로 헹구어졌으며 응급 산소가 공급되었음.>
 
  김현희씨가 음독 演技(연기)를 했다는 의심을 둘 만한 목격담은 없다. 바레인 법과학 연구소장은 “김현희씨의 혈액, 소변, 위 세척액을 검사한 결과 소변에서만 청산염 양성반응이 나왔다. 김현희씨가 바레인 국방의료원으로 이송됐을 때 김현희씨는 무의식 상태였고 서서히 의식을 회복해 완전히 회복했으며, 혀끝에 작은 상처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 정도면 ‘음독연기설은 근거 없음’이라고 결론 내릴 만한데도 국정원은 ‘소변에서만 청산염 양성반응이 나왔다’는 사실이 캥겼는지 우리나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물었다. 國科搜(국과수)의 답변은 “청산염을 음독하여 곧바로 치료하여 생존했다면 청산염의 양, 위 세척물의 양, 치료 방법, 혈액 및 소변의 채취 시기 등 여러 요인에 의해 청산염이 검출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됨. 이와 같은 사례가 보고된 바 없어 정확히 논단할 수 없으나 청산칼륨을 복용한 후 치료를 받고 의식을 회복하여 생존한 경우도 있다”였다.
 
  안기부도 토끼에 청산액화가스 앰풀을 주입하는 실험을 했었다고 한다. 그 결과 토끼의 혈액과 폐 및 심장에서 청산염이 검출됐으나 간장으로부터는 검출되지 않았다. 이는 기체상태로 흡입함으로써 위장이나 간장을 거치지 않고 폐와 심장을 거쳐 체내 각 조직으로 운반되어 致死(치사)됐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고 국정원 보고서는 밝혔다.
 
  국정원은 “위와 같은 관련 자료들을 종합 고려할 때 김현희가 음독을 기도한 것은 사실로 판단됨. 위 세척물에서 청산염 양성반응이 안 나온 것은 사실이라고 판단되나 소변에서 양성반응이 나온 점을 볼 때 미량의 음독은 사실이라고 판단됨”이라고 결론지었다. 국정원은 김현희씨가 빨리 회복된 것이, “김현희가 음독을 하지 않고 거짓으로 음독 연기를 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기는 무리라는 판단임”이라고 했다.
 
 
  李明博 대통령도 피해자
 
  좌파인사들이 주도했던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읽어 보면 의혹 제기자들을 위한 극진한 배려와 성의를 느낄 수 있다. 그것이 너무 지나쳐 코미디처럼 보이는 것이다. 의혹 제기자들이 직접 독약 앰풀을 끝만 살짝 깨물어 죽는지 사는지 實演(실연)할 용기가 없다면 “죽지 않은 게 이상하다”는 식의 의혹제기는 삼가는 게 인간적 도리일 것이다. 이 대목에서 김현희씨의 남편이 흥분했다.
 
  “한 조사위원은 김정일의 지령이 없었다는 점을 중점적으로 조사한다 하고, 다른 위원은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란 사실과 김정일이 지시했다는 사실은 별개 문제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라고 말하질 않나…. 그런 사람은 김정일 옹호론자, 김정일주의자예요.”
 
  김현희씨는 “좌파들은 다 그래요”라고 맞장구를 쳤다.
 
  ―金大中(김대중)·盧武鉉(노무현) 정권을 어떻게 보나요.
 
  “김일성 김정일 북한정권 추종주의자들이죠. 북한 인민과는 상관없고, 인권문제와도 상관없고 말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측은 1987년에 대통령이 안 된 걸로 왜 저를 탓하는지 몰라요. 金泳三(김영삼)과 단일화 안 해 가지고 낙선했다고 생각해야지, 왜 나 때문에 안 된 것처럼 그러는지…. 그리고 뒤에 대통령이 됐잖아요. 남한이 피해를 입은 사건인데 (북한으로부터) 사과라도 받아야지, 보상도 못 받고 기본이 잘못된 것 아닌가요.”
 
  ―대한항공 폭파사건 때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것은 현대건설이었습니다. 당시 李明博 현대건설 회장이 지금은 대통령으로서 김현희씨의 처지에 관심을 표현한다고 합니다. 이 대통령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이제는 정권도 바뀌었으니, 안보를 책임진 중추기관이 亡國(망국)행위를 한 것은 그냥 지나갈 수 없지 않습니까? (국정원이) 사과하고 관련자를 처벌해야지, 그래야 대한민국이 제대로 선다고 생각합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진짜가 가짜가 되고, 가짜가 진짜로 바뀌니 이젠 제대로 세워야죠. (舊 국정원은) 국가기관도 아닙니다. 무슨 깡패 집단도 아니고, 북한도 일을 할 때 명분을 주지 이렇게 비열하게 꼼수를 쓰지 않습니다.”
 
  (김현희씨는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이명박 후보가 “내 평생에 두 번 울었다. 한번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다른 한번은 KAL기 폭파로 현대건설 노동자들이 죽었을 때였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김정일의 친필비준에 따라 대외정보조사부장이 “남조선 비행기를 제껴라!”는 지시를 내릴 때 앞세운 명분은 서울올림픽을 저지해야 ‘두 개의 조선 책동’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두 개의 조선 책동’이 무슨 뜻이죠?
 
  “통일을 방해한다, 분단을 고착시킨다는 뜻입니다. 남조선이 서울올림픽을 개최하는 것은 反(반)통일적 행위이므로 응징해야 한다는 뜻이죠. 비행기를 폭파시켜 불안감을 조성함으로써 여러 나라들이 참가 신청을 못하게 하겠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동안 통일을 위해 준비해 왔다. 통일을 위해서는 비행기고 뭐고, 人命(인명)이고 뭐고 무시하고, 목숨을 바쳐야 한다. 이런 명분이라도 거는데, 아니 (舊 국정원은) 그것도 저것도 아니고 정말 하는 방법이 비열해서 말이 안 나옵니다. 우리를 고립시키고, 아는 사람들에게도 (공작하여) 등을 돌리게 하고….”
 
  ―그런 부분에 대해 국정원은 김현희씨가 오해하는 것이고, 우연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는 태도인 것 같은데요.
 
  “치사해서 편지에 다 쓰지도 못했지만, 정말 말이 안 나옵니다. 심지가 굳은 남편이 있고, 훈련 받은 정신력이 있어 여기까지 버틴 겁니다. 일반 사람 같았으면 대통령 험담을 듣고 자살한 사람(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처럼 죽었을지 모릅니다. 나는 분해서 못 죽는다. 죽으면 좋아할 사람이 누구냐, 죽으면 얼씨구 좋아할 사람들이 많지요. 살아 있는 사람도 가짜로 만드는 판에. 살아남아서 복수해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국정원이 김현희씨를 압박하여 방송에 출연하라고 한 데 그치지 않고, 그 뒤에도 KAL기 사건을 의혹조사 항목으로 넣어 가지고 계속 괴롭혔다는 데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겁니까?
 
  “그래요. 연속적으로 괴롭히는 거예요, 3년 내내 조사에 응하라고 찾아오고. (문밖에서) 제발 얼굴을 보여 달라고 조르니 작은 아이는 울고.”
 
  ―국정원 직원들이 직접 왔어요?
 
  남편 정씨가 대신 대답했다.
 
  “우리가 전화를 유·무선 모두 끊어 놓으니 여기까지 찾아온 게 열댓 번 될 거예요. 국정원의 보고서에 자세히 적혀 있어요.”
 
 
  열다섯 번 찾아온 국정원과 위원회 사람들
 
국정원 진실위는 KAL기 폭파사건이 조작된 것이 아님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2007년에 나온 국정원의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재조사 최종 보고서를 찾아보니 국정원과 이른바 ‘진실위’는 김현희씨를 불러 조사하기 위해 열다섯 번 시도를 한 것으로 나와 있다.
 
  <김현희 면담 추진상황
 
  1)국정원의 면담 추진 실적
 
  1. 2005.10.25 김현희 주거지를 방문해 면담 필요성을 설명했으나 강한 반발을 보이며 면담 거부 입장 표명
  2. 2006.2.27 오충일 위원장 명의 서신 전달을 시도했으나 수령을 거부
  3. 2006.3.17 김현희 친척을 접촉, 김현희와 김현희의 남편을 설득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를 거부
  4. 2006.3.29 국정원 간부의 면담 요청 서신을 전달했으나 무반응
  5. 2006.4.12 김현희 남편을 접촉, 성직자를 통한 신앙고백 형식의 면담을 권유했으나 무응답
  6. 2006.6.26 김현희 주거지를 방문, 진실위 명의 면담요청 서신 전달을 시도했으나 이를 거부
  7. 2006.12.27-28 김현희의 주거지와 김현희의 시숙을 방문, 면담 요청과 함께 선물을 전달하려 했으나 이를 거부
  8. 2007.2.9 김현희 주거지를 방문, 원장 명의 서신 전달을 시도했으나 이를 거부, 서신 전달 실패
  9. 2007.2.22 국정원 간부가 직접 김현희 주거지를 방문, 김현희 남편을 접촉하고 발전위 면담에 응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를 거부
 
 
  中世의 마녀사냥 연상
 
  2)진실위의 면담 추진 실적
 
  국정원은 ‘신변 안전문제’와 ‘공공기관의 개인정보 보호에 관한 법률’에 위배 등을 이유로 진실위의 김현희의 연락처 제공 요청을 거부
 
  1. 2006.5.15 면담 요청 서신을 재작성하여 국정원을 통해 전달하려 했으나 김현희 남편의 반발로 전달 실패
  2. 2006.6.7 김현희 친척을 접촉, 6월말까지 면담 주선을 요청
  3. 2006.6.20 김현희 친척에게 김현희측에 보내는 면담 요청 서신을 전달해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증명 발송
  4. 2006.6.29-30 국정원을 통해 면담 일정을 통보하고, 면담 장소에서 1박2일간 체류했으나 면담 실패
  5. 2006.7.25 국정원을 통해 면담에 응해줄 것을 요청하고 7.27-28간 김현희 거주지에 출장, 면담을 시도했으나 실패
  6. 2007.3.26 국정원을 통해 서면질의서를 보냈으나 서면응답도 거부>
 
 
  “신부들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日誌(일지)를 읽어보면 김현희 부부의 ‘완강한 자세’가 느껴진다. 좌익단체들과 좌파정권을 배경으로 삼고 압박해 오는 舊(구) 국정원과 진실위를 상대로 夫婦(부부)가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이 안기부 수사관 출신이고 아내는 훈련 받은 공작원 출신이었던 덕분이기도 하지만, 뻔한 진실을 말살하려는 데 대한 분노가 기본 동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김현희 남편을 접촉, 성직자를 통한 신앙고백 형식의 면담을 권유했으나 무응답”이란 건 또 무엇인가? 이 사건과 관련하여 新敎徒(신교도)인 김현희씨가 성직자에게 신앙고백 형식으로 이야기해야 할 만한 죄라도 지은 게 있단 말인가? 국정원이 말한 ‘성직자’는 턱도 없는 의혹을 제기한 신부들인 것 같은데, 그들 앞에 김현희씨를 세우겠다는 발상이야말로 中世(중세)의 ‘마녀사냥’ 재판을 연상시킨다.
 
  김현희씨는 “협박하고, 선물 보따리도 주고(돌려보냈다), 편지도 전달하고, 아이고”라고 하더니, 잠시 눈물을 참았다. 남편이 대신 설명을 계속했다.
 
  “(의혹 제기자들이) 媤宅(시댁)까지 몰려와서는 ‘김현희는 안기부 공작원이다. 양심선언 하라’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지난 10년간 하는 걸 보니 나라 팔아먹을 사람들이에요. (안보전선에서)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KAL기 수사로 훈·포장 다 받았던 이들이 거꾸로 그런 짓을 하는 걸 보고, 이념이란 게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듭디다.”
 
  김현희씨는 “밤을 새워 가면서 KAL기 수사를 했던 이들이 나를 가짜로 만드는 데 동참하고,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해도 이렇게 등에 비수를 꽂다니, 이를 갈았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김현희씨 부부는 의혹 제기자들에 대해 국정원이 나서서 누구는 고소하고, 누구는 조사관으로 채용하고 하는 식으로 원칙 없는 행위를 한 데 대해서도 분노했다. KAL기 관련 의혹을 확산시키는 데 일조했던 일본인에 대해 국정원이 入國(입국)금지를 내릴 때는 언제고 그를 찾아가 협조를 구한 것은 언제냐는 것이다. “좌파정권이 되니 법도 원칙도 없어지더라”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 때도 김현희씨를 가짜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그때는 국정원이 잘 버티었는데, 노무현 정부 들어선 뒤엔 기획공작의 사령탑으로 나섰다는 게 두 사람의 확신이다. 남편 정씨는 “소위 시민단체들은 국정원의 前衛(전위)조직이었다”고까지 말했다.
 
  국정원과 진실위원회의 압박, 3대 방송의 의혹제기, 좌파단체들의 선동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는 가운데(김현희씨는 이를 ‘융단폭격’이라고 했다) 신부들까지 가세한다.
 
  ―의혹을 제기한 신부들에게 할 말이 있습니까?
 
  “그 전엔 존경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지,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김현희씨 부부가 좌파정권의 총공세에 대응한 방법은 원시적이었다. 통신수단을 두절시킨 것이다. 전화도 끊고 휴대전화도 쓰지 않는다. 기자도 두 사람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다. 가끔 김현희씨나 남편이 공중전화를 걸어 오는 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국정원에 공식사과, 책임자 처벌 요구 중
 
  이런 통신두절 전략이 성공했다고 한다. 국정원에서 일일이 사람을 보내야 하고, 보내도 만나 주지 않으니 자연히 ‘싸움’의 주도권이 김현희씨 편으로 기울었다는 것이다. 국정원에 가까운 곳으로 집을 얻어 줄 터이니 이사를 가라는 권유도 받았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통신이 어려워지니 공작하는 사람들끼리 혼선이 생기고, 시간이 걸리고, 그래서 이사를 권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요리를 할 수 있는 중심에 놓으려는 계산이었다”는 것이다.
 
  김현희씨 부부는 이민 가라는 권유도 받았다고 주장한다. 남편 정씨는 “2003년 여름 잘 아는 국정원 간부가 오더니 내부가 시끄러운데 이민을 가줄 수 없느냐는 권고 아닌 경고를 했다”고 말했다.
 
  김현희씨가 국정원장과 知人(지인)들에게 보낸 호소문이 보도된 이후, 국정원은 내부 감찰조사를 하고 있다. 감찰팀이 김현희씨를 조사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아무 반성의 표시가 없는 상태에서 하는 자체 조사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작년 연말까지 조사를 끝낸다고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고 한다. 김현희씨는 검찰·국회 같은 외부 기관에서 조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검찰은 형법에 위반될 때만 조사하는 기관인데, 국정원의 행태를 犯法(범법)으로 볼 수 있나요?
 
  남편 정씨는 “국가를 말아먹었는데, 국가보안법 위반이 안 됩니까? 하기는 검찰이 국정원을 조사한다는 것도 문제”라고 했다. “공식 사과, 책임자 처벌”이 이들의 요구다.
 
  “(내 이야기가) 언론에 나오고 하니 회유를 하려고 해요. 직장을 마련해 준다느니, 여생을 보장해 준다느니, 개인이 사과하면 안 되느냐고 나오는데, 이게 개인이 사과할 일입니까? 남편이 그래요. 누가 나라를 위해서 싸우는지 모르겠다고. 우리는 정말 나라를 위해 (국정원과) 싸우고 있습니다.”
 
  ―국정원이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청와대와 좌파단체가 압력을 넣으니 마지못해 재조사하는 척한 것 아닐까요?
 
  “청와대가 그렇게 했을지 모르지만 국정원이 모든 것을 기획했으니 국정원에 책임을 물으면 나머지는 밝혀지겠지요. 남편이 감찰 직원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해요. 후배들 위해 하는 일이다, 국정원이 이젠 독립성을 가져야 한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소신껏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책 써서 번 돈 8억5000만원 유족회에 기증
 
  김현희씨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북한에서 받았던 공작원 교육이 한국에 와서 전향한 뒤에는 대한민국을 위한 충성심으로 변한 것 같다.
 
  “(좌파정권) 10년 동안 어지럽게 만든 것들을 바로잡으려면 강하게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어설프게 하면 (좌익들에게) 다시 당합니다. 공산당이 악질이니까요. 우파가 순한 면이 있지요. 정권이 바뀐 지 1년이 되는데, 뭐가 바뀌었는지 모르겠어요.”
 
  김현희씨는 의혹을 제기한 MBC와 KBS의 프로를 보고 “나도 헷갈리는데 일반인들은 다 속아 넘어가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김현희씨는 현재의 생활에 대해 “창살 없는 감옥입니다. 피난생활인데 뭐. 사는 게 좀 힘듭니다”라고 말했다.
 
  ―국가에서 보조금이 나오지 않습니까.
 
  “저처럼 검거된 사람들에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것 바라지도 않습니다.”
 
  ―手記(수기)가 국내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니 印稅(인세) 수입이 많았지 않습니까?
 
  “일본·국내 책 다 해 가지고 번 돈 8억5000만원을 1997년 12월에 유족회에 다 드렸습니다. 책을 낸 고려원이 망해서 인세를 못 받은 것도 있습니다. 그동안 방송에 나가고 강연을 해서 생긴 수입을 가지고 삽니다.”
 
  국정원 보고서엔 “1997년 12월 23일 유가족 7명과 김현희 측 변호인 참석하에 수기 인세 8억5000만원을 KAL기 유족회 복지재단에 출연”이라고 적혀 있다. 유족회 회원 중 일부는 김현희를 가짜로 모는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나는 다시 국정원 입장에서 질문했다.
 
  ―국정원이 과거사 조사를 할 때 대한항공 폭파사건을 집어넣은 것은 워낙 자신이 있는 부분이니 의혹제기들을 이용하여 의혹을 스스로 풀도록 하려는 생각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과거사 조사에 관여했던 당시 고위 간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조사 결과가 ‘조작 없었음’으로 나오니 조사위원들이 난감해 했다. 발표를 하지 않으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이건 落張不入(낙장불입: 화투판에 한번 내놓은 패는 물리지 못한다는 뜻)’이라면서 발표를 하도록 밀어붙였다. 국정원이 결론을 낸 것을 가지고 진실화해위원회가 또 다시 조사하는 것은 유감스럽다.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없는데도 일부 유족들이 신청을 하여 받아준 것이다. 법에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니 우리로선 말릴 수가 없었다.’
 
 
  소설이 제기한 의혹까지 조사
 
  남편이 말했다.
 
  “落張不入이 안 됐지 않습니까?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 국정원 조사는 없었던 것으로 하고 (지금 진실위가) 다시 하잖아요. 국정원 과거사위원장이 조작이 아니란 발표를 했는데 국정원 과거사위원이던 사람이 진실화해위 위원장으로 가서 또 하지 않습니까. 화투판이 불리하게 돌아가니 지금까지 한 것은 무효라면서 破鬪(파투)를 놓았는데 무슨 낙장불입입니까. 국정원 입장에서는 그것으로 끝났으니 낙장불입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또 당하지 않습니까? 이게 나라 말아먹을 짓입니다.”
 
  김현희씨는 “자기들 요구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계속하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2007년 최종발표문에서 국정원은 이렇게 주장했다.
 
  <지금까지 ‘KAL 868기 가족회’를 비롯하여 시민단체와 언론, 책자 등을 통해서 320여 건이 넘는 의혹들이 제기되어 왔는데, 의혹을 제기한 주제별로 의혹현황을 분류하면 ‘KAL 858기 진상규명시민대책위원회’가 안기부와 김현희의 거짓말 29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점 73가지 등 총 102건, 시중에 시판된 책자를 통해 제기된 의혹사항이 ‘KAL 858, 무너진 수사발표’에서 72건, ‘나는 검증한다, 김현희의 파괴공작’에서 33건, ‘의혹속의 KAL기 폭파사건’에서 42건, ‘한국판 화씨 9·11-KAL 858기 조작의혹 사건’에서 17건, 소설 ‘배후’에서 제기한 가설 1건 등이며, 국내외 TV에서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제기한 의혹사항이 ‘KBS 스페셜’에서 제기한 28건과 ‘KBS 열린 채널’에서 제기한 5건, MBC PD 수첩에서 제기한 8건, SBS의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제기한 의혹 13건, 일본 TV 아사히가 제기한 의혹 1건 등임.
 
  비슷하거나 같은 의혹사항을 통합하여 최초 168건으로 정리했으나, 국정원 외교부 건교부 대한항공 등에서 보유중인 자료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내용 검증 추가확인 등 필요성에 따라 새로 제기된 의혹사항만 350건이나 되고, 국정원이 그동안 수사 등을 통해 수집, 생산한 자료만도 캐비닛 5개 정도나 되는 등 ‘자료의 홍수’와도 같은 상황에서 조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의혹사항을 범주별로 분류했음. 2006년 8월 1일 중간발표 이후 최종적으로 148건으로 정리했음.>
 
  소설이 제기한 의혹까지도 조사대상으로 삼았다니 舊(구) 국정원은 좌파인사들을 위한 극진한 서비스를 한 셈이다. 문제는 ‘태양은 서쪽에서 뜬다’라는 수준의 의문제기에 국가가 조사에 나서서 까먹은 국가예산과 강요되었던 김현희씨의 고통이다.
 
 
  안기부와 김현희의 정확성을 재확인
 
  좌파가 주도했던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도 진실을 덮을 순 없었다. 최종보고서의 결론은 이러했다.
 
  <비록 사건의 범인인 김현희를 직접 조사하지는 못했지만 하기와라 료가 1972.11.2 촬영한 花童(화동) 사진 전량을 입수, 분석하여 김현희가 북한 출신임을 확인했고, 이 사건의 배후에 북한의 對南(대남)공작조직이 있었으며, 그 조직의 공작원인 김승일과 김현희에 의해 자행된 사건임을 입증할 수 있는 정황과 근거들을 확인했음.
 
  진실위는 이번 조사를 통해 ‘KAL 858기 폭파사건’의 실체가 북한 공작원에 의해 벌어진 사건임을 확인했음. 따라서 앞으로는 이 사건의 실체와 관련해 더 이상의 불필요한 논란이 지속되지 않도록 근거 없는 의혹제기를 중단하는 한편 관계기관에서도 법적 공방 중단과 사건 관련기록의 조속한 공개 등을 통해 그동안의 대립과 갈등이 종식되어 진정한 국민화합의 기틀이 마련되기를 희망함.
 
  또한 진실위는 정부가 김현희를 ‘역사의 산 증인’으로 활용할 목적으로 특별사면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당초 목적에 부합하는 진실위의 활동에 협조하지 않아 필요한 조사를 진행할 수 없었음을 고려하여 이에 대한 적절할 법적, 제도적 보완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함.>
 
  기자는 김현희씨를 인터뷰하고 와서 국정원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대한항공 사건 의혹 조사보고서를 다 읽어 보았다. 수많은 의혹 제기자들이 제기한 148개항의 의문점에 대해 국정원 조사팀이 치밀한 조사를 하고 일일이 답변을 했다.
 
  다 읽어 본 느낌은 안기부 수사팀이 정말 수사를 잘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무대가 여러 나라에 걸쳐 있고, 폭파현장은 보이지 않는 곳이며, 항공기 및 폭탄과 관련된 기술적 문제가 해명되어야 했다. 작은 실수도 용서 없이 악용하려는 남북한의 좌익세력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완성도 높은 수사가 이뤄진 것은 미국 정보기관의 전폭적인 지원과 김현희의 기억력 덕분이었다. 국정원 재조사는 안기부의 최초 조사가 정확했음을 재확인했다.
 
  이 재조사는 또 일부 신부들, 일부 유족들, 좌익단체들, 의혹을 제기한 책을 쓴 이들, 그리고 MBC KBS SBS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의혹들을 사실인 양 퍼뜨렸는가를 고발한 셈이다. 예컨대 ‘KBS 스페셜’은 문서감정가라는 사람을 등장시켜 1987년의 김승일 필적과 1984년 그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남긴 필적을 비교하게 한 뒤 같은 사람의 필적이 아니라면서 안기부의 수사 결과에 의문을 제기했으나, 재조사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간단하게 “동일 필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보고서, 김정일 지령 언급 없어
 
  ‘KBS 스페셜’ 2부작이 제기한 의문점도 거의 전부 부정되었다. 이 프로를 보고 속아 넘어갔던 이들이 이 사실을 알면 텔레비전의 영상 操作(조작)이 가진 가공할 위험성을 실감할 것이다.
 
  ‘KBS 스페셜 2004년 5월 22일/KAL858의 미스터리 제1편 폭파, 진실은 무엇인가’(책임프로듀서 이상요 / 프로듀서 왕현철)는 폭파 2년5개월 뒤에 발견된 KAL기 잔해에서 폭발과 폭탄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문제 삼았다. 국정원 재조사 보고서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1990. 3월 안다만 해역에서 인양된 기체 잔해들의 KAL 858기 해당부위를 조사한 결과, 폭탄을 두었다고 하는 7B, 7C(좌석) 인접 부위(2m 이내)의 잔해는 없었음을 확인함.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잔해 감정시, ‘파편이 폭발중심 인접부가 아닌 경우 폭발물질의 폭발에 의한 직접적 파손형태나 폭발물질 등이 검출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견을 첨부한 바 있음.>
 
  KBS가 “여기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김현희가 두고 내린 폭탄으로 비행기가 파괴되었는지 의심스럽다”는 식으로 보도한 것이 얼마나 무리한 주장이었는지를 잘 보여준 것이다. MBC, KBS, SBS가 양식 있는 언론기관이라면 의혹을 제기한 프로와 같은 분량으로 “이 부분이 이렇게 잘못됐다”는 訂正(정정)방송을 해야 할 사안이다.
 
  세 방송의 의혹제기는 MBC의 광우병 선동 방송에 버금가는 왜곡으로 기록될 것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뻔한 사실을 교묘하게 ‘의혹’으로 돌변시키는 것이 도덕적으로 더 나쁘다. 이런 일을 PD와 기자들이 했다.
 
  이 보고서는 끝내 김정일이 지령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김현희씨 부부는 지난해 부시 행정부가 북한정권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준 데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다. 북한이 그 명단에 들어간 것은 대한항공 폭파사건 때문이었다.
 
  김현희씨는 “북한정권이 사과도 반성도 하지 않는데 빼주다니 화가 났습니다.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나오려면, 사과 한마디는 해야지요. 부시 정부가 좀…”이라고 했다. 그는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을 만났을 때 역사적 기록을 위해서라도 사과를 요구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니 그들이 우리를 만만하게 보고 틱틱거리는 거죠. 더구나 국정원이 스스로 대한항공 사건에 의혹이 있다고 재조사를 하니 그들이 얼마나 우습게 보겠습니까? 제가 국정원장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렇게 썼습니다. 북한정권이 테러를 해놓고 20년간 사과도 시인도 안 하는 것이나, 지금 국정원이 우리에게 이렇게 해놓고 시인도 사과도 안 하는 게 무슨 차이가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똑 같은 것 아닌가요?”
 
 
  재조사를 ‘재조사’해야
 
  생각하면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북한과 남한의 좌익들은 김현희가 대한항공 858편 여객기를 폭파하지 않은 무고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김현희는 목숨을 걸고 “내가 범인이다”고 버티는데,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을 밝혀내 국내외의 높은 평가를 받았던 국가정보기관은 健忘症(건망증) 환자가 되어 할 필요가 없었던 조사를 열심히 해서 백과사전 같은 두꺼운 보고서를 내어놓았다. ‘부지런한 바보’가 가장 골칫거리라고 했는데, ‘용기 없는 재주꾼’이 더 곤란한 존재인 것 같다.
 
  좌파정권은 국정원과 위원회를 동원, 김현희씨에 대해 4審(심), 5심을 했으니 이명박 정부는 대한항공 폭파 사건 재조사에 대한 재조사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정원이 작년에 새로 만든 院訓(원훈)은 ‘자유와 眞理(진리)를 위한 無名(무명)의 헌신’이었다.
 
  거짓과 선동의 名手(명수)인 좌파정권과 친북세력은 10년간 國益(국익)과 國憲(국헌)을 파괴하기 위해 먼저 진실을 파괴하려 했다는 증거가 김현희씨다. 그의 존재는 重病(중병)에 걸린 김정일뿐 아니라 의혹 제기자들의 선전원 노릇을 했던 MBC, KBS, SBS에도 큰 부담이 될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의혹을 키우는 데는 국민 재산인 공중파를 남용하던 지상파 3社(사)는 자신들이 제기했던 의혹이 전부 ‘근거 없음’으로 밝혀졌는데도 ‘바로잡음’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최근 김현희씨의 호소에도 귀와 눈을 막고 있다.
 
  세 시간 반의 대화를 끝낸 우리가 식당을 나올 때는 밤 9시였다. 지나가는 이들은 아무도 우리 일행을 알아보지 못했다. 두 아이를 키우는 김현희씨가 그저 이렇게 中年(중년)부인으로 편하게 살아가도록 해주지 못하는 나라라면 이건 나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현희가 자살에 성공했더라면?
 
  ―韓日 두 나라가 뒤집어쓰고 서울올림픽도 실패했을 것
 
  1987년 12월 1일 바레인 공항에서 대한항공 폭파범 김현희씨가 자살하기 위해 담배 개비 안에 든 독약 앰풀을 깨물었을 때 옆에 있던 바레인 경찰관들이 덮치지 않았더라면, 그리하여 김씨가 앰풀 끝만 물어뜯어 氣化(기화)된 독약을 조금 마시고 기절하는 데 그치지 않고 主犯(주범) 김승일처럼 죽어버렸더라면 그 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경찰관들이 김현희씨를 덮치는 순간 옆에 있던 김승일은 독약 앰풀을 깨물어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가 소지한 여권은 일본인 하치야 신이치(蜂谷眞一) 명의로 되어 있었다. 김현희의 여권은 하치야 신이치의 딸인 하치야 마유미(蜂谷眞由美)로 되어 있었다.
 
  범인은 일단 두 일본인으로 발표되었을 것이다. 바레인과 일본 경찰이 여권을 조사하여 위조임을 밝혀내는 데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 사이 세계언론은 “중동에서 활약하는 일본 과격파가 대한항공기를 폭파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보도를 쏟아냈을 것이다.
 
  일본 경찰은 여권이 위조되었으므로 두 屍身(시신)의 주인공이 일본인은 아니란 주장을 할 순 있었겠지만, 북한 공작원이란 증거를 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북한 공작원일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해도 믿는 이들은 적었을 것이다.
 
  그 사이 한국에선 反日(반일)데모가 일어났을 것이다. 북한의 공작기관과 남한의 친북좌익 세력들은 일제히 궐기하여, 이 폭파사건은 국가안전기획부가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 盧泰愚(노태우)를 당선시키기 위해 꾸민 짓이라고 떠들고, 여기에 야당 후보들도 가세했을 것이다.
 
  물론 한국과 일본 경찰이 하치야 신이치의 위조여권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을 것이다. 진짜 하치야 신이치는 일본에 살아 있고 그의 이름이 위조여권에 등장하게 되는 과정에 북한 공작원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두 일본인을 북한 공작원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에선 좌우익이 함께 반일 데모를 하고 일본에선 위험한 서울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은 어렵다는 결정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정보부와 안기부 등 한국 정보기관에 대한 국제적 不信(불신)이 넓게 깔려 있던 때라 ‘대한항공기 폭파는 大選(대선)을 겨냥하여 反共(반공) 분위기를 조장하려는 안기부의 自作劇(자작극)’이란 주장이 상당히 먹혀 들었을 것이고, 많은 나라가 서울올림픽 참가를 꺼렸을 것이다. 노태우 후보는 自作劇(자작극)으로 당선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야당과 좌익들의 공세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한일관계는 나빠지고 직선제 선거를 통해 한국에서 등장한 민주정부도 허둥대고 국제적으로 서울올림픽에 대한 불안감은 높아지고. 이런 사태를 기대하고 테러를 지시했던 이가 김정일이었다. 그는 폭파지령을 내릴 때 목적이 서울올림픽과 두 개의 조선 책동을 분쇄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가장 성공적인 공작이 될 뻔했던 대한항공 폭파는 김현희씨가 독약 앰풀을 깨무는 찰나 바레인 경찰관들이 덮침으로써 가장 실패한 공작으로 돌변하여 지금까지 북한정권을 옥죄는 惡夢(악몽)이 됐다. 이게 바로 남북한 좌익들이 지금까지 의혹설을 퍼뜨려 김현희의 존재를 말살하려 하는 이유다. 한국에는 김현희가 왜 그때 죽지 않았느냐고 원한에 사무친 자들이 적지 않게 살고 있다.
 

  운명의 갈림길: 바그다드 공항 검색대의 온정주의
 
  대한항공 폭파사건에서 김현희씨가 한 주된 역할은 두 개의 폭탄을 갖고 다니는 일이었다. 1987년 10월 27일 주범 김승일이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의 호텔에서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받은 폭탄은 라디오에 폭약을 채운 것과 양주병에 액체폭약을 넣은 것이었다.
 
  김현희씨는 폭약 성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이번 인터뷰에서 김씨는 “김승일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폭탄을 가지고 강가에서 폭파시험을 했는데, 강철판을 뚫을 정도였다”고 했다.
 
  김씨는 쇼핑백에 라디오와 양주병을 넣어 가지고 다녔다. 베오그라드에서 바그다드行(행) 비행기를 탈 때도, 바그다드 공항에서 내려 통과 여객 대합실로 가는 보안 검색대에서도 통과됐다.
 
  이때 여성 검색대의 여직원이 김씨가 분리하여 갖고 다니던 네 개의 배터리를 압수, “이걸 갖고는 비행기를 탈 수 없다”면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김씨는 재빨리 쓰레기통에서 배터리 네 개를 끄집어 내, 먼저 검색대를 통과하여 기다리던 김승일에게 건네주었다. 김승일이 라디오에 배터리를 끼워 소리가 나게 한 뒤 “이건 라디오다. 검색이 지나치다”고 소리치면서 항의하자 검색원은 배터리를 갖고 타게 했다.
 
  김현희씨는 “이게 갈림길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때 배터리를 압수당했으면 우리는 임무를 포기하고 돌아가야 했다. 그 배터리는 폭파용으로 특수 제작되었으므로 代替(대체)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검색원의 온정주의가 115명의 목숨을 잃게 한 것이다.
 
  몇몇 의혹 제기자들은 전쟁 중이던 이라크의 공항에서 폭탄이 든 쇼핑백이 검색대를 통과할 수 없었고, 김현희는 쇼핑백을 들지 않았으며, 따라서 대한항공기의 추락은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국정원의 재조사에 의해 밝혀진 사실은, 라디오 폭탄의 원료로 추정되는 콤포지션-4와 액체폭탄의 원료로 추정되는 PLX는 엑스레이로도, 금속탐지기로도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안기부는 1986년 9월 김포공항에서 일어났던 폭파사건(5명 사망) 현장에서 콤포지션-4의 성분을 검출했다. 이 폭파사건은 북한이 저지른 것으로 추정됐다. 안기부는 같은 맥락에서 김현희가 들고 다녔던 라디오 폭약을 콤포지션-4로 추정한 듯하다.
 
  이번 인터뷰에서 김현희씨는 “라디오 폭탄이 액체폭탄을 터뜨리는 일종의 기폭제이므로 붙여서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고 말했다. 대한항공 폭파 사건 이듬해인 1988년 12월 21일 스코틀랜드 상공에서 팬암기 폭파도 리비아 정보기관원이 機內(기내)로 들여보낸 콤포지션-4 플라스틱 폭탄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항공 테러에 경험이 많은 이슬람 테러단체들은 당시 북한정권과 친밀하게 교류하고 있었다. 북한이 이슬람 테러단체로부터 폭탄이나 제조기술을 얻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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