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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 추억 (2) 鮮于仲皓, 李昇夏, 高恩晶, 姜富子, 閔鏞泰, 朴贊淑, 方貴姬, 李萬才

『神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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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의 끝없는 挑戰/나의 厭世主義를 이긴 어머니의 기도/다섯 의붓자식을 키워 주신 나의 어머니/내 속의 어머니/아들이 보고 싶어 소주잔을 기울인 어머니/세 분의 어머니/장애인 딸이 보내는 편지/울보 어머니
 
 
  ◈ 어머니의 끝없는 挑戰
 
  70代 중반에 수채화 전시회, 82세에 등단
 
 
  鮮于仲皓 명지大 총장
  1940년 서울 출생. 서울大 토목공학과 졸업. 캐나다 사스카치완大 석사. 美 콜로라도주립大 수문학 박사. 서울大 토목과 교수, 서울大 총장, 수문학회 부회장,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이사 역임. 現 한국대학총장협회장, 예술의전당 이사.
 
 
 
 어머니의 질투
 
   몇 년 전 부모님의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두 분의 분위기가 냉랭했다. 혹시 우리가 자주 찾아 뵙지를 못하여 좀 삐지셨나 생각하던 참이었다. 어머니가 말문을 열었다.
 
  『너희 아버지가 이럴 수가 있냐?』
 
  어머니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버지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데 그래. 또 그 이야기야』 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왜 두 분의 냉전이 계속되는지 궁금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다. 아버지는 70세가 넘어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상당한 수준급에 이르러 전시회에 출품하실 정도의 실력이 됐다. 하루는 동호인 모임에서 야외 사생을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의 차에 젊은 여성 화가 한 분이 동승하게 된 것이 화근이 됐다.
 
  서울에 도착하여 집 근처의 버스정류장에 여성화가를 내려주는 그 장면을 마침 지나가던 어머니의 친구분이 목격했다고 한다. 그 사실이 즉시 어머니에게 보고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어머니는 『왜 그 많은 사람 중에 젊은 여성을 태우고 오셨느냐』고 했고, 아버지는 『60여 년을 같이 살았는데 아직도 쓸데없는 투정을 계속하느냐』고 항변했다.
 
  지난 3월 어머니는 2년 여의 투병생활을 끝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병실에서 고통을 참으시면서 『병실에 있으니 너희들을 자주 볼 수 있어 좋다』며 웃으시는 모습이 생생하다.
 
  어머니는 나이를 든다는 것 자체를 부인하고, 또 그렇게 실천하신 분이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신부님이 『終傅聖事(종부성사: 병이 들거나 늙어서 죽을 위험이 있는 신자의 구원을 비는 일)를 받는 것이 어떠시냐』고 권하였을 때 단호하게 『아직 나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씀하실 정도였다.
 
  어머니는 1919년생이다. 평양의 명문 여자학교인 서문여고를 졸업하셨고, 모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늘 『요즈음의 대학교육이 예전의 여고보다도 못하다』고 해, 우리는 『서문여고가 아니라 서문대학』이라고 농담을 하였다.
 
  어머니는 그 시대에 학교 배구선수로서 일본에 원정을 다녀오셨다. 대단한 新여성이었던 셈이다. 60세가 다 되어 전국 어머니 배구대회에 출전했다. 아들·며느리들이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느라 고생하기는 하였지만, 2년 연속 우승한 맹렬 여성이셨다.
 
  자식으로서 특히 감탄했던 것은 70세 이후 어머니의 삶이다. 평생 동안 그림을 그린 적이 없는 분이 70대 중반에 수채화 전시회를 가졌다. 아버지가 그림을 그리러 다니는 것에 자극을 받아서 남편과 자식도 모르게 몇 년 동안 그림을 배우러 다니셨고, 그룹전에 출품을 하셨다.
 
  어머니는 80세가 넘어서 문단에 등단을 했다.
 
  정확히 82세 때의 일이다. 평소 어머니가 문학적인 소양이 있는 것은 알았지만 문단에 등단하신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 문단에 등단한다는 것이 어떤 절차에 의해서인지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아무나 등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천국에서도 분주할 어머니

 
  어머니의 등단은 자식들뿐만 아니라 당신의 친구들에게도 놀라운 사건이었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평소 보지 못하던 젊은 분이 어머니의 병실에 드나드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 사람이 방문할 때면 주위의 사람을 물리쳐 무슨 일인가 궁금했다. 얼마 후에 어머니의 자전 에세이집 「그리움은 아직도」가 출간됐다.
 
  그 젊은 사람은 출판사 직원이었다. 자식과 남편에 대한 이야기로 꾸며진 수필집이기는 하지만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글을 쓰신 것이다.
 
  세상을 떠나신 지 몇 달 되지 않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아직 마음에 가득하다. 어머니는 천국에서 지금 무얼하고 계실까? 수필집 제2집을 준비하시지는 않을까? 어머니는 분명 기발한 다음 일을 준비하고 계실 게 분명하다.●
 
 
 

 
  ◈ 나의 厭世主義를 이긴 어머니의 기도
 
 
나를 키운 것은 10할이 어머니였다

 
  李 昇 夏 詩人·중앙大 문예창작학과 부교수
  1960년 경북 김천 출생. 중앙大 문창과 졸업. 同 대학원 문창과 석사·박사. 중앙일보 신춘문예(詩), 경향신문 신춘문예(소설)로 등단. 저서 「한국 시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시집 「사랑의 탐구」, 「뼈아픈 별을 찾아서」. 소설 「길 위에서의 죽음」 등.
 
 
 
 가출과 몇 차례의 자살기도
 
   나는 남들 모두 멀쩡히 다니는 고등학교 생활을 2개월밖에 하지 않고 서울로 부산으로 대구로 달아났던 가출소년이었다. 어머니의 가슴은 그때마다 얼마나 시커멓게 멍들었으랴. 몇 차례의 자살기도로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을 때 어머니는 눈물어린 호소로 자식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하셨다. 검정고시 합격 후 대학입시에 낙방하고는 머리 깎고 出家(출가)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오래오래 통곡하셨다.
 
  나의 가출은 이유 없는 반항은 아니었다. 지방의 사립 명문 경북 김천고등학교는 내가 입학한 해에 마침 非평준화 지역의 학교였기에 시험을 쳐서 들어갈 수 있었다.
 
  대구와 대전 등 주변 대도시의 고등학교는 속된 말로 「뺑뺑이를 돌려」 학생을 뽑았지만, 소도시 김천의 김천고등학교는 선발고사를 통해 좀더 우수한 학생들을 뽑을 수 있었다. 대구와 대전은 물론 경주와 안동 등 인근 도시의 중학교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 왔다.
 
  나는 한 달 만에 학교생활에 정나미가 떨어져 버렸다. 첫 번째 월말고사가 끝나자 선생님마다 틀린 문제의 개수대로 「매 타작」을 해대니, 문학병에 깊이 걸려 있는 나로서는 학교라는 데가 죽어도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되고 말았다.
 
  교련 선생님은 선착순에서 꼴찌를 했다고 『다음 시간 수업에 들어가지 말고 운동장 열 바퀴를 뛰고 와서 보고를 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닌가? 교련과목도 싫었던 터에 저 선생님 밑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싫었다.
 
  때마침 서울大 법학과에 들어간 형이 『고시공부를 하지 않겠다』고 선포하는 바람에 집안 분위기가 암담하게 돌아갔다. 그런 와중에 나는 무작정 상경, 고교생활을 접었다.
 
  검정고시에는 첫 번째 가출을 시도한 바로 그해 8월에 합격했지만 대학입시에서는 연전연패했다. 입시 준비에 매진해도 쉽지 않은 명문대학 입학을 오로지 獨學(독학)으로 준비하는 바람에 계속해서 미역국을 먹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불면증을 비롯한 각종 신경성 질환을 앓게 되었고, 어머니의 주름살은 나날이 늘어갔다. 지금 생각해도 나는 지독한 문제아였다.
 
 
 
 30여 년의 회오리 바람
 
   부끄러운 과거사 고백은 지금부터이다. 나의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의 한 소녀를 향해 줄기차게 편지를 보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소년잡지 펜팔난을 통해 알게 된 한 살 아래의 소녀에게 나는 정성을 다해 편지를 보내곤 했고, 희한하게도 소녀는 정성껏 답장을 보내주었다.
 
  서로 얼굴을 모르는 상태로 10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나는 그 소녀를 만날 자신이 없었다. 고등학교 중퇴, 大入 실패 등이 가져다 준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대학 2학년 때 어느 문예지의 대학생 문예공모에 詩가 당선되고, 학내 신문사 주최 독후감 쓰기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면서 겨우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얻어 만날 생각을 했으니, 그 무렵의 나는 어지간히 숙맥이었다.
 
  그러나 대학 3학년 때, 10년 만에 만난 바로 그날 절교 선언을 듣고는 얼마나 깊이 절망했던가.
 
  어머니는 나와 그 소녀의 교우를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있었다. 편지를 함께 읽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내가 그 소녀와 맺어지기를 원하셨던 모양이다.
 
  중앙大에 합격을 해놓고 1년간 휴학을 해야만 했을 때였다. 심신이 피폐해져 위험수위에 이르러 있었다.
 
  병원의 처방전이 아무 소용이 없는 지독한 불면의 나날이었다. 어머니는 고육지책으로 대학생이 된 그 소녀(처녀나 아가씨로 표현해야 하겠지만 그냥 쓴다)에게 김천에 내려와 아들을 위해 몇 마디라도 격려해 줄 수 없겠느냐고 간곡히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것을 몹시 부담스러워한 소녀는 바로 그때 절교를 결심했던 것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까맣게 모르고 꿈에 부풀어 첫 만남을 편지로 요청했었고, 10년 만에 만난 바로 그날 이별의 고배를 마셔야 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30년 동안 초등학교 앞에서 문방구점을 하셨다. 아버지는 박봉의 경찰직을 그만둔 이후 어머니가 하시는 가게 일을 돕기는 했지만 도무지 취미에 맞지 않아 인생에 대한 회의가 밀려 왔을 것이다.
 
  거기다 사법고시 합격으로 자신의 실패한 生을 보상해 주리라 믿었던 큰아들은 법학과를 졸업하자 문학을 하겠다고 국문학과로 편입하고, 작은아들은 고등학교도 안 다니고 수시로 집을 뛰쳐나가고, 막내는 고교시절 내내 공부를 전폐하고 철학책을 끼고 살다가 대학에 입학했음에도 학교에는 안 나가고…. 해소병을 앓는 어머니(나의 할머니)는 치매 증세를 보이고….
 
  집안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회오리 바람을 잠재우며 30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가게 문을 열고서 초등학생들한테 연필과 공책을 판 것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일주일에 한 번씩 대구의 도매상에 가서 물건을 해오셨다. 겨울 내내 동상으로 고생하시고, 매일 밤 『아이고 다리야, 아이고 다리야』 신음을 내뱉으며 잠드신 나의 어머니. 어머니 종아리에 밴 알통을 풀어 드리려 주먹으로 두드리며 마사지를 하는 것은 내 성장기의 중요한 일과였다.
 
  서정주 詩人을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겠지만, 나를 키운 것은 10할이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얼굴에 깊이 파인 주름살을 나는 사랑한다. 올해 일흔넷인 어머니의 여생이 조금은 덜 고통스럽기를 소망한다.●
 
 
 

 
  ◈ 다섯 의붓자식을 키워 주신 나의 어머니
 
  수많은 밤을 새워 늘 충혈됐던 어머니의 눈
 
  高 恩 晶 방송인·고은정언어예술원장
  1936년 서울 출생. 숙명女大 영문학과 졸업. 한국성우협회 이사장, 자유민주연합 총재특별보좌역 역임. 現 방송위원회 방송언어특별위원회 위원장. 저서 「고운정 미운정」, 「위험한 체험」 등.
 
 
 
 번개 같은 일솜씨
 
   어머니가 쥐띠니까 올해로 93세가 되셨습니다. 이제 한 줌밖에 안 될 만큼 꼬부라지고 쇠한 몸이시건만, 나는 아직도 갑자기 전화를 걸어 『엄마, 당숙 댁의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지』라고 묻습니다. 어머니는 컴퓨터보다 빨리 전화번호를 대줍니다.
 
  우리 어머니는 그렇습니다. 남보다 한 톤 높은 어머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작년부터 많이 낮아지고 거칠어져 마음이 찡 하지만 자리에 몸져 누워 대소변을 못 가리는 노인네와는 거리가 멉니다.
 
  助産員(조산원)이셨던 어머니는 밤이나 새벽에 분만을 하는 산모들 때문에 밤을 꼬박 밝히고 들어오시는 일이 많았습니다. 단칸방에 사는 부부가 해산을 하고 남편은 미역국 하나도 끓이지 못해 쩔쩔 매고 있으면 『애 아비가 저절로 되는 줄 아느냐』고 면박을 주셨습니다.
 
  미역국까지 끓여 주고 산후의 뒤빨래까지 마다하지 않으셨던 어머니는 집에 들어오시면 곧바로 아래 위층의 먼지를 털어내셨습니다. 「탕탕」 털이개질하는 소리에, 곤히 자고 있던 우리들 5남매는 선잠을 깨야만 했습니다.
 
  어렸을 때는 지칠 줄 모르는 어머니의 부지런함을 당연하게 생각했지, 얼마나 고단하고 힘드셨을까 헤아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학예회나 마스게임, 동화대회, 웅변대회 등에 우리 남매들이 자주 뽑히면 뒷바라지는 다 어머니 몫이었습니다. 제일 큰 일이 옷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장롱 안에서 옷감을 꺼내 썩썩 가위질을 해 재봉틀 발 아래에 쌓아 두었습니다. 그러고는 다른 일로 또 분주했습니다.
 
  우리는 가슴이 바작바작 탔지만 투정 부릴 엄두를 못 냈습니다. 어머니는 행사가 있기 전날 밤 늦게야 집에 들어오셔서 재봉틀 앞에 앉았습니다. 세일러복에 까다로운 바이어스를 두르거나 맞주름을 맞추고, 레이스를 장식하고 바지에 옆선을 쳐서, 아침까지 거뜬히 옷을 만들어 냈습니다.
 
  옷을 입혀 보시고는 『요렇게 맵시가 나니까 해 입힐 맛이 나지』 하시며 엉덩이를 툭 치셨습니다. 밤을 꼬박 밝힌 어머니의 눈은 비둘기 눈처럼 빨갛게 충혈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비둘기 눈은 그때만이 아니었습니다.
 
 
 
 빨간 눈에 가득 고였던 눈물
 
   내가 첫아이를 낳고 열흘 만에 영화녹음 일을 나갔다가 땀띠로 전신이 곪아 꼼짝도 할 수 없이 열이 오르던 여름날이었습니다. 정신이 가물가물 드나들기를 며칠째 그동안 어머니는 전기곤로를 둘씩 켜놓고 뜨거운 물수건으로 내 곪은 전신을 찜질하느라 밤을 밝히셨습니다.
 
  병원에 가면 수십 곳에 칼질을 해야 하고 젊은 몸에 흉터가 남을 것을 염려하셔서 손수 항생제를 주사하며 직접 치료를 하셨던 거죠. 정신이 들어 어머니를 찾았을 때 『살았구나, 살았어』 하며 빨간 눈에 가득히 고였던 눈물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어머니는 줄줄이 5남매가 딸린 젊은 홀아비에게 시집을 오셨습니다.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결혼식 꽃 들러리로 자주 뽑혔던 탓에 아버지가 재혼을 하면 내가 당연히 꽃 들러리를 설 줄 알았죠. 그런데 할머니가 『온양온천에 가서 결혼식을 하기 때문에 너는 학교 다녀와서 저녁에 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일가 친척들이 모여 잔치 분위기로 북적대는 저녁 나절에 대문 밖에서 자동차 멈추는 소리가 나더니 머리를 얌전하게 틀어올리고 양복지로 지은 두루마기를 입은 여인이 아버지를 따라 마당으로 들어섰습니다.
 
  하이힐에 망사가 달린 모자를 쓰고 여우 목도리를 걸쳤던 양장의 어머니 모습과는 대조가 되어 어린 마음에 엷은 실망이 스쳤습니다. 그러나 이내 할머니가 이르시는 대로 신부 방에 들어가 나비같이 날렵하게 절을 했습니다. 다시금 면사포로 치장을 하는 중이었던 어머니는 『몇 살이야?』, 『이름이 뭐야?』하며 다정하게 묻는 중에 옆에 있던 막내 아기가 사정없이 울어대자 면사포를 쓴 채로 익숙하게 안아서 달래셨습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렇듯 키운 자식들인데, 낳은 어머니 기른 어머니 하며 굳이 공개를 할 일이 뭐냐』고 뒷소리를 하기도 합니다만, 사실을 왜곡하는 일은 오히려 어머니를 모독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먼저 가신 어머니께도 욕이 되는 일이죠.
 
 
 
 두 어머니가 준 유산
 
   불과 10여 년 결혼생활에 금슬 좋은 남편과 다섯 명의 어린 것을 두고 30代 젊은 나이에 어떻게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문득문득 가슴이 져려 옵니다. 고요하고 우아했던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 중에도 약봉지로 학을 접어 줄줄이 창가에 매달아 놓고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빨간 꽈리의 씨를 빼고 유리컵 맑은 물에 풍선처럼 띄워 놓고 내가 좋아하는 걸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셨습니다. 몇십 년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그림들입니다. 어머니는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어린 나이에 알아들을 수 있게 하셨고, 밀레의 「만종」을 보고 추수를 한 부부가 마주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을 알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 때문에 지구가 지탱을 한다고 하지만 감성의 토양을 유산으로 물려주신 어머니와, 드센 용기와 인내와 포용을 삶으로 훈육하신 어머니, 이 두 분이 계셨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 더 없는 축복이었습니다. 두 어머니의 그 어느 부분만큼도 나는 어미의 몫을 해내지 못했지만 두 어머니를 모두 조금씩은 닮아 있는 모양입니다.
 
  아버지와 혼인해서 10년도 안 되어 홀로 되신 우리 어머니는 우리들 5남매를 반듯하게 키우느라 이제는 한낱 힘 없는 노인이 되셨습니다. 지금도 자손을 위한 기도로 소일하시는 것을 보면 그저 송구스러운 마음뿐입니다.●
 
 
 

 
  ◈ 내 속의 어머니
 
  姜富子가 아닌 내 어머니가 되어 관객을 웃기고 울린다
 
  姜 富 子 탤런트·연극인
  1941년 충남 논산 출생. 충남大 국문과 졸업. 서울大 행정대학원 국가정책과정 수료. KBS 라디오 「황인용 강부자입니다」 진행. 방송연기자협회 부회장, 14대 국회의원 역임. 연극 「청기와집」, 「오구」,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등 출연.
 
 
 
 세상에서 어머니가 제일 무서워
 
   오래 전 내가 연극 「산불」을 공연하고 있을 때였다. 한창 연기에 몰입했을 때 컴컴한 관중석 쪽에서 「콜록」 하며 기침소리가 났다. 들릴까 말까한 소리였지만 내게는 익숙한 소리였다. 「어머니가 오셨구나」 하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쳤고, 확신이 들수록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머니는 내 연기를 보러 오거나 칭찬한 적이 없었다. 내 동료들인 呂運計(여운계)씨나 史美子(사미자)씨를 TV 드라마에서 볼 때는 『연기 참 잘한다』고 했지만 내 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이 없었다.
 
  나 역시 내가 등장한 드라마를 어머니와 함께 시청하지 않으려 했고, 연극무대에 초청하지 않았다. 나는 22세에 연기 인생을 시작한 이후로 노인 役을 많이 맡았다. 새까만 머리를 은빛으로 물들이고 허리를 꾸부정하니 굽히며 늙수그레한 음성으로 연기하는 딸의 모습을 어머니에게 보이려니 송구스러운 생각이 들어서였다.
 
  공연이 끝난 뒤 어머니는 분장실에도 들르지 않고 집에 왔다고 한다. 공연 중에 어머니는 우물가에 내놓은 갓난아이를 보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나의 어머니 吳深德(오심덕) 여사는 한여름에도 버선을 벗고 지낸 적이 없다. 내가 처녀였을 때 큰언니가 약혼한 남자를 집으로 데려왔다. 언니가 사소한 일로 어머니에게 말대답을 했는데 그 말에 화를 참지 못한 어머니가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을 내팽개치며 언니를 꾸짖었다.
 
  나는 어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고, 19년간 어머니를 모셨던 내 남편(배우 李默園씨)은 어머니가 계실 때는 집안에서 반바지를 입지 못했다.
 
  어머니는 가족에게 엄격했지만 밖에서는 달랐다. 고향인 충남 논산시 강경읍은 대구·개성과 함께 좋은 기름이 나는 곳으로 유명했다. 아버지의 성명은 姜(강) 자 讚(찬) 자로, 우리 집은 기름집을 운영해 경제적으로 풍족한 편이었다.
 
  매일 손님이 찾아왔다. 어머니는 손님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며 정성껏 음식을 내왔다. 손님이 곤궁한 사람일수록 더 신경을 쓰셨다. 음식 솜씨가 좋아 외사촌들이 어머니에게 『외숙모는 맨손으로 고기를 주물럭거려도 고기에 마늘 냄새가 밴다』고 말할 정도였다.
 
  우리 기름집에는 어른 30명이 둘러앉아 깨를 볶을 수 있는 큰 솥이 세 개 있었다.
 
  명절 때 어머니는 동네 아주머니들을 불러 깨솥에 부친 부침개를 나눠 먹곤 했다. 술 한잔을 나누며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해 어떤 모임이든 어머니가 빠지면 재미가 없다고들 했다.
 
  눈이나 비가 올 때 어머니는 축음기를 틀어놓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이 강산 낙화유수~』라며 南仁樹(남인수)씨의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내가 따라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엄마가 노래했다고 하지 말거라』 했다.
 
 
 
 내 삶 곳곳에 깃든 어머니
 
   가끔 친척들이 내 공연을 보러 오면 내게 『어쩌면 너희 엄마와 똑같니』 한다. 연기 중에 내가 말하거나 걸어가는 모습 하나하나에 어머니의 모습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내가 1997년부터 공연한 연극 「오구」가 있다. 나는 주인공인 「黃씨 할매」를 연기하면서 어머니를 느낀다. 일부러 닮으려 하지 않아도 어머니의 몸짓과 손짓이 자연스럽게 내 연기에 녹아들고, 나는 姜富子가 아닌 어머니가 되어 관객을 웃기고 울린다.
 
  극중에서, 낮잠을 자다 염라대왕 만나는 꿈을 꾼 黃씨 할매는 극락왕생을 비는 산오구굿 한 판을 벌여 달라고 아들에게 청한다. 굿판이 벌어지자 노모는 『나 갈란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뜬다. 장례식에는 문상을 온 여성들과 수작하는 맏상제, 사기 화투판, 촌지를 요구하다가 과수댁과 눈이 맞은 저승사자가 등장하고, 黃씨 할매의 영혼이 찾아온다.
 
  나는 「내 어머니도 저 세상으로 떠나갈 때 黃씨 할매와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魂(혼)이 이승을 떠나기 싫어 가족 주변에 머무르다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황천길을 갔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한다.
 
  어머니는 20년 동안 당뇨와 천식에 시달리다 78세로 돌아가셨다. 생전에 어머니는 직접 장을 담그면서 내게 『이걸 잘 봐 둬라. 너도 배울 때가 됐다』고 말했다. 나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싫다고만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느 날 빨래를 해 장독대 위에 걸어 놓았다. 선명한 색의 옷들이 바람에 나부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문득 장독대에 눈길이 갔다. 묵은 간장, 햇간장, 고추장, 소금 항아리.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12개였던 장독이 16개로 늘어나 있었다. 내가 만든 간장, 고추장이지만 어머니의 손맛이 묻어 있을 것이다. 연기뿐만 아니라 내 삶 곳곳에 어머니의 숨결이 들어 있지 않을까.
 
  어머니는 가끔 내 아이들(1男1女)에게 『너희들 학교 가는 모습이나 보고 죽을 수 있으려나』라는 말을 했다. 그 아이들이 어른으로 성장해 또 아이들을 낳았다. 내 손자이자 어머니의 증손자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나도 「이 아이들을 언제까지 볼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솟구친다.
 
  예전에 내 딸이 내가 물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엄마는 꼭 할머니 같아』 한 적이 있다. 얼마 전 딸이 둘째를 낳았다. 딸은 『아이가 꼭 엄마를 닮았어요』라며 웃는다. 내게서, 내 딸에게서, 내 딸의 아이에게서 어머니를 느낀다.●
 
 
 

 
  ◈ 아들이 보고 싶어 소주잔을 기울인 어머니
 
  『너 좋아하는 「괘 눈깔」 술이 다 익었는디, 한번 내려올래? 바쁘면 말고』
 
  閔 鏞 泰 詩人·고려大 스페인어문학 교수
  1943년 전남 화순 출생. 한국외국어大 스페인어과 졸업. 스페인 마드리드大 대학원 문학석사. 同 대학원 스페인 문학박사. 1968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마차도문학상(스페인), 한국시문학상 등 수상. 시집으로 「시간의 손」, 「ㅈ과 ㅅ사이」, 「바람의 강」,「나무 나비 나라」 등.
 
 
 
 외로움과 함께 늘어난 酒量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벌써 15년이 가까워 온다.
 
  기억 너머로 사라져 가던 어머니의 추억이 되살아난 것은 두 달 전 고향에 TV 방송 녹화차 내려갔을 때였다. 그때 평소 어머니와 친하셨던 동네 할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네 어머니는 술만 취하면 자네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시곤 했지. 자식이 박사면 뭘 해. 항상 객지에 나가 있는데…』
 
  평소 잔정이 많아 보이지 않으셨던 어머니가 가끔 이 큰아들 생각을 하셨나 보구나 생각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머니가 말년에 술을 많이 드신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동네 아줌마들과 한잔 놓고 어울리기를 좋아하셨고 노래를 잘 부르셨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어머니의 주량은 만취가 되어 돌아올 정도로 늘어났고, 나와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가 원래 술을 좋아해서 그러려니, 생각했다.
 
  이제와서 보니, 그 술은 어머니의 외로움을 달래 주는 벗이었고, 동시에 그 외로움을 더욱 증폭시키는 독이었다. 4남1녀의 자식들을 다 키우고 나서 어머니는 갑자기 세상에 할 일이 없어짐을 느끼셨으리라. 말썽을 많이 일으켰던 둘째·셋째가 어른이 되고, 셋째를 빼고는 다들 서울이나 광주에 나가 있으니, 시골의 그 큰 집은 늘 텅 빈 집처럼 쓸쓸했으리라.
 
  옛날 같으면 다들 시집 장가 가서, 그 많은 손자 손녀와 함께 남 보란 듯이 떵떵거리고(어머니가 좋아하시던 말이다) 살았을 텐데, 지금 세상이 그런가?
 
  당신께서는 생소한 시대의 변화를 맞아서 자꾸만 초라하게 되어 가는 자신을 느끼셨을 것이다. 남들처럼 손자 손녀를 안아 보고 싶었던 어머니는 내가 스페인에 자식들 두고 온 것을 못내 서운해하셨다.
 
  어머니는 당신의 외로움을 아직 젊다는 것으로 자위하려고 하셨다.
 
  『괜찮아, 괜찮아, 아직 젊으니까…』
 
  어쩌다 서울에서 집에 전화를 걸면 어머니는 처녀 같은 높은 톤의 목소리로, 『응, 용태냐? 나 잘 있다. 내 걱정은 말고, 너 술 좀 많이 먹지 마라』
 
  혹시 이 아들이 보고 싶을라 치면, 『거, 너 좋아하는 「괘 눈깔」(고양이 눈 빛깔의)술이 다 익었는디, 언제 한번 내려올래? 바쁘면 말고』 지나가는 말처럼 하셨다.
 
  어머니는 늘 이렇게 명랑하고 젊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 건강을 걱정한 일은 있어도,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다만 술이 좀 과하고 가끔 소화가 잘 안 된다는 것은 알았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누가 뱃속이 좀 안 좋다고 하면, 소주가 소화제인 양, 『거 소주 한 잔 먹어 부러라!』 하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소화가 안 될 때마다 그렇게 소주를 들이키곤 하셨던 거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뒤 무서운 사형 선고로 돌변하고 말았다. 광주에 있는 의사 동생이 어느 날 울면서 내게 전화를 했다.
 
  『형, 우리 어머니가 죽어, 위암 말기야』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엊그제 내가 시골에 내려갔을 때만 해도 멀쩡하시던 어머니께서 위암 말기라니.
 
  어머니는 동생이 있는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갈 때마다 다음에는 다시 오지 않을 것처럼 작별 인사를 했다고 한다. 특히 간호사들이 어머니에게 자꾸 『할머니, 할머니…』 하니까, 그 말이 그렇게 듣기 싫다고 동생에게 하소연했다고 한다.
 
 
 
 외로움과 고통을 홀로 삭여
 
  동생은 간호사들에게 앞으로는 어머니에게 『아주머니』라고 부르라고 당부했단다. 그러나 어머니는 결국 수술을 받으셔야 했다. 집도를 한 동생으로부터 『어머니 뱃속에서 소화도 안 된 굼벵이를 발견했다』는 소리를 듣고 우리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굼벵이가 병에 좋다는 소리를 듣고 그것까지 혼자 삼키고 아픔을 스스로 이겨보려고 했던 어머니.
 
  서울에 올라와 세 번째 수술을 할 때까지 어머니는 희망을 잃지 않으셨다.
 
  『무슨 위장병이 이렇게 질기다냐. 얼른 나아서 너희들하고 술이나 해야 할 텐데…』
 
  어머니는 어느 날 육십이 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몹시 안타까워하셨다.
 
  『지금은 약이 좋아 다들 오래 사는데…그 나이면 아직 젊은데 죽었어라우!』
 
  그리고 한 달 뒤 어머니께서 저녁을 드시다가 그만 숨을 거두셨다. 그날 아침은 미장원에 가셔서 머리까지 하고 들어오셨다고 한다. 정도 많고 즐거움도 많으셨던 우리 어머니. 죽도록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고, 끝까지 자신을 젊다고 생각하셨던 65세의 젊은 어머니. 병마는 남에게나 오는 일이라고, 소화가 안 되면 소주를 드신 당찬 당신에게도 뒤돌아서면 찾아오는 외로움과 우울증은 이길 수 없었나 보다.
 
  외롭고 초라한 자기 몰골이 싫어서 더 웃고 더 젊게 보이시려던 어머니. 어머니의 그 외로움과 아픔이 나이 들어가는 아들의 뼛속에 사무친다.●
 
 
 

 
  ◈ 세 분의 어머니
 
  親어머니, 母性의 아버지, 시어머니
 
  朴 贊 淑 국회의원
  1945년 수원 출생. 숙명女大 국문학과 졸업. YTN 「생방송 박찬숙의 쟁점토론」 진행. 現 17代 한나라당 국회의원. 저서 「날개를 찾아서」, 「사막에서는 날개가 필요하다」, 「세상을 연다, 사람들을 연다」 등.
 
 
 
 욕심의 부질없음
 
   잠시 그 옆에 누웠다 돌아오는 발걸음은 언제나 무겁다.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여의도 1번지 입성 이후 마음도 몸도 따라 주지 못해 한 週를 건너뛰기도 하는 죄송한 만남.
 
  가랑잎처럼 가벼워진 몸, 유난히 튀어 나온 푸른 핏줄은 통통하던 손을 앙상하게 만들고 있다.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죽음을 예비하는 긴 늙음의 과정이 자식들에게는 더 할 수 없이 소중한 이별 예행 연습기간일 텐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말 없이 응시하던 이해의 눈빛, 고통스러울 때 등 두드려 주시던 따스한 손길이 남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욕심을 품어 본다. 그렇지만 가족 누구도 몰라보시는 무표정에 깃든 천진함이 사랑스럽다. 살아 있으므로 갖게 되는 욕심의 부질없음을 가르쳐 주신다.
 
  나에게는 세 어머니가 계신다.
 
  나를 낳아 주시고 키워 주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신 어머니와, 어미 없는 딸에게 어머니 이상의 父情(부정)을 쏟아 부어 주신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고 결혼으로 인연 지어진 시어머님이 계시다.
 
  지금 세 분 중에 시어머님 한 분만 살아 계신다.
 
  나와 가장 긴 세월을 보내신, 꼭 10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아직도 내 사랑이 정리되지 않아 아버지 그 이름을 되뇌이는 것조차 눈물을 고이게 한다. 좀더 견딜 수 있는 시간이 흘러야 아버지가 주신 母性的(모성적) 사랑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참 미인이었고 명민한 머리를 타고 나셨다. 서울에서 공장을 경영하시다 전쟁 이후 고향 근처 수원에서 자리 잡으신 아버지의 주판계산보다 어머니의 暗算(암산)이 더 빨랐다.
 
  어머니는 신문 1면부터 4면까지 꼼꼼히 읽으신 후 한 줄도 틀리지 않고 저녁에 돌아오신 아버지께 말씀해 드렸다.
 
  겨울 빙판 길에 넘어진 게 탈이 되어 누워 계신 시간이 더 많았던 어머니는, 책과 신문을 읽고 아버지께 설명해 드리는 게 樂(낙)이고 취미였다. 낮에는 李箱(이상)의 「날개」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손수건 마냥 네모난 창문으로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기도 하고, 울타리였던 키 큰 참죽나무 그림자가 창호지 문에 비친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하셨다.
 
  철없던 나는 밖에서 고무줄 놀이, 사방치기, 줄넘기에 정신이 없었다.
 
  어머니는 전쟁 후 우리 집에 세들어 있던 서울에서 전학 온 공부 잘하던 남학생을 시샘했지만, 나에게 공부하라는 말씀은 한 번도 없었다. 그냥 예쁜 얼굴에 미소만 담고 자신의 고통을 책읽기로 달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의 절망하던 모습, 비통해하던 모습은 지금도 내 가슴을 아리게 한다.
 
 
 
 『너는 그냥 알지』
 
   결혼으로 만난 시어머니는 근엄하신 분이라 주변 사람들이 모두 어려워했는데,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참 세월이 지나 『너하고는 서로 말 안 해도 그냥 알지』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 느낌의 상호작용을 이해했다. 아마 딸이 없는 시어머니는 결혼 전 어머니의 사랑이 부족했을 내게 딸 이상의 애정을 쏟아 주셨던 것 같다.
 
  결혼 전 고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시어머니는 말씀이 없는 분이다.
 
  못마땅할 때는 더더욱 말이 없어 내게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하셨다. 능력이 있는데도 시아버지 뒷바라지와 가정살림을 하시느라 능력을 키우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던지 나의 사회활동에 너그러우셨다.
 
  엄벙덤벙 자취생활을 한 나는 음식은 좀 한다고 생각했지만, 시어머니는 그게 얼마나 엉터리인지 금방 아셨을 텐데 모른 척 넘어가셨다. 대신 시장을 보러 갈 때는 꼭 데리고 가셔서, 『생선은 아가미를 보고 살을 눌러 봐라. 배추는 흰 부분이 적고 푸른 잎 부분이 많고, 키가 작은 게 맛있다. 과일은 꼭지를 보고 사라』 등 살림을 가르치셨다.
 
  음식을 잘하셨는데 전통 음식보다는 요즘 식대로 퓨전 음식을 잘 만드셨다. 양식당에서 드시고 온 야채수프를 똑같이 만드셨고, 생선조림은 시어머니가 만드신 것보다 더 맛있는 걸 먹어 본 적이 없다.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정원의 나무들이 쌓인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가지가 부러진다. 그래서 시어머니께서는 새벽에 일어나셔서 혼자 그 눈을 다 털어 주면서도 잠든 나를 깨우진 않으셨다. 추운 겨울, 뒤꼍에 묻어 둔 동치미나 김장 김치 꺼내러 가는 귀찮은 일은 꼭 시어머니께서 손수 하셨다.
 
  보일러는 왜 그리 자주 고장이 나는지, 그때마다 어두컴컴한 지하 보일러실에 내려가시며 쫓아가는 나를 말리곤 하셨다.
 
  나는 오랫동안 그런 시어머니의 행동이 며느리 사랑에서 나온 것이란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저 본인이 좋아서 하시는 걸로 생각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심하게 걱정을 들은 사건이 있었다.
 
  한번은 기자가 집으로 인터뷰를 왔을 때 『시어머님이세요』하고 소개를 했다. 나중에 『그냥 「어머님」이라고 하는 게 옳다. 정확한 게 때로는 예의가 아닐 때가 있다』고 말씀하셔서 무안했던 게 생각난다.
 
  우리가 쓰던 2층 복도에 놓여 있던 빨간색 영산홍꽃이 비실비실 마르더니 꽃도 이파리도 하나둘 떨어져 갔다. 얼마나 물을 주지 않았으면 그렇게 됐는지 천방지축 밖으로만 나돌던 나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시어머니에게서 「생명을 그렇게 했다」고 심한 꾸중을 들은 그 이후 집에 있는 화분에 물은 내가 준다.
 
  평생 검소하셔서 오래된 한복 치마를 뜯어서 원피스 드레스를 만들어 입으시고 손자들에게 비싼 옷을 사 입히지 않으셨으나, 잠시라도 집에 오시는 아버님 제자나 이웃분들에게는 꼭 갓 지은 밥을 대접하거나 차비를 주어서 보내셨다. 편찮으시기 몇 년 전 밍크 반코트를 사드렸더니 걸어만 놓고 이웃들에게 자랑하셨다. 지금 어머니가 입원해 계신 병원 옷장에 그 흰색 밍크 코트는 새것인 채로 걸려 있다.
 
 
 
 4代가 한 지붕 아래 지내길…
 
  한번은 가족들이 시어머니 생신 때에 노래방에 모시고 간 적이 있었다.
 
  평소 말씀이 없으신 시어머니가 노래를 하시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봄날은 간다』
 
  예사 솜씨가 아니었다.
 
  몇 곡 더 노래를 불러 보시고는 『세상 참 좋아졌다』며 노래방 기기를 신기해하셨던 적이 있어 병실에서 옛날 노래 테이프를 틀어 드리고 있다.
 
  혹시 지나간 세월을 일깨워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이라도 주워 올리실 수 있을까 해서다.
 
  고비고비 쉽지 않은 30여 년 결혼생활과 방송활동, 시어머니의 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 했다.
 
  지금이라도 『그래, 나는 너를 믿는다』 하시며 내 등을 토닥거려 주실 것 같은데… 그래도 계시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가서 뵐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른다. 주민등록상 4代가 한집에 산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건강 때문에 모실 수 없어 그냥 3代만 한집에 있다.
 
  4代가 한집에 살면서 나에게 주셨던 믿음과 자애로움, 사랑을 시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돌려드릴 수 있을 때가 언제쯤일까, 그런 시간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 장애인 딸이 보내는 편지
 
  엄마, 미안해
 
  方 貴 姬 「솟대문학」 발행인·방송작가
  1957년 서울 출생. 동국大 불교학과 졸업. 조계종 포교원 중앙상임 법사. 한국장애인문인협회장. 장편동화 「숨박꼭질」 등. 수필집 「작은 일에서 행복찾기」 등.
 
 
 
 날 못 잊어 멀리 가지 못했을 것 같아
 
   엄마, 지금 어디 있어? 난 가끔 엄마가 어디쯤 있을까 궁금해. 이 땅을 떠난 것은 인정하는데 엄마의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은 아직 받아들일 수 없어.
 
  어디엔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난 믿고 있지. 그래서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기도 하고, 날 못 잊어 멀리 가지 못했을 것 같아 엄마가 좋아하는 목련 속에 숨어 있나 싶어 우리 집 앞에 있는 목련 나뭇가지 사이를 주의깊게 살펴보기도 했어.
 
  내 눈엔 엄마가 안 보이지만 엄마는 날 보고 있을 텐데 왜 내가 힘들어할 때, 내가 아파할 때 나타나서 도와주지 않는 거지, 왜 위로해 주지 않는 거지, 정말 야속하더라고.
 
  엄마, 어제 숙경이 엄마한테서 전화 왔었어.
 
  『내가 맨날 숙경이보다 하루만 더 살게 해달라고 했더니, 세상에 내가 이렇게 숙경이를 앞세우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그 집 엄마는 딸을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꼬』
 
  『맨날 나 때문에 눈 못 감는다고 하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가시던데요, 뭐』
 
  솔직히 한동안은 어떻게 엄마가 나 혼자 남겨두고 그렇게 홀연히 떠날 수 있을까 원망 많이 했어.
 
  혼자서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아니, 마음의 준비라도 할 시간을 주었어야 하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엄마 혼자서 먼 길을 떠났으니 얼마나 황당했겠어.
 
  숙경이 엄마는 엄마가 그렇게 가신 게 복이라고, 딸한테 폐 끼치지 않으려고 딸 생각해서 갑자기 가신 거라고 했지만, 난 엄마가 아프더라도 살아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야 『엄마!』 하고 큰 소리로 부르기도 하고, 엄마 손도 만져 보고 그럴 수 있잖아.
 
  요즘 부쩍 엄마 생각을 많이 해. 엄마를 하루 24시간 붙들고 놔 주지 않은 딸 때문에 엄마는 엄마 인생이 없었다는 사실을 이제사 깨닫고 있어.
 
  엄마는 그 흔한 효도관광은 물론이고 친척들 행사 때도 마음대로 참석하질 못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런데 난 어이없게도 엄마는 원래 노는 것을 싫어하고, 엄마는 집에서 일을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어디 그뿐인 줄 알아. 나를 돌보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닌 줄 알았다니까.
 
  왜냐하면 엄마가 힘들다는 말 한 마디 안 했으니까. 말 좀 하지 그랬어. 엄마도 다른 엄마들처럼 놀러다니고 싶고, 나한테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을 때도 있다고 말하지 그랬어.
 
  그런 내색을 한 번이라도 했다면 엄마를 잃고 그토록 힘들어하지 않았을 거야.
 
  작년 3월15일, 마침 토요일이라 늦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싸늘히 식어 있는 엄마를 발견한 순간 가슴이 철렁하면서도 엄마가 장난치는 줄 알았다니까.
 
  엄마 없으면 어떻게 사는지 한번 시험해 보려고 그렇게 죽은 척하고 있는 줄 알았어.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고 수없이 생각했지. 그동안 한 번도 쉬지 못했으니까 조금 긴 휴가를 갔을 뿐이라고 난 엄마의 죽음을 애써 부정했어.
 
  47년 동안 난 완벽하게 엄마에 의해 움직여 왔기 때문에 처음엔 아무것도 할 수 없더라고.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화장하고, 옷 입고 하는 출근 준비가 큰 고통으로 다가오는 거야.
 
  난 그동안 휠체어에 의지해 이 험한 세상을 살아야 하는 내 고통만 생각했지, 장애인 딸을 평생토록 돌보아야 하는 장애인 부모의 고통은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엄마 가슴에 많은 비수를 꽂았어』
 
   『엄마가 죄가 많아서 네가 이렇게 됐다』는 넋두리에 나도 모르게 내 장애를 엄마 책임으로 돌렸던 것 같아. 그래서 엄마와 말다툼을 할 때면 난 아주 당당하게 『그러게 누가 날 낳으랬어?』 하고 엄마 가슴에 비수를 꽂았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잘못한 게 한두 가지가 아냐. 한번은 TV에서 뇌성마비 여성이 건강한 남자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얘, 넌 왜 저런 남자도 없니?』 하는 말에 난 벌컥 화를 냈었지.
 
  『엄마가 그랬잖아, 성한 남자가 아픈 여자를 데리고 살겠느냐고. 엄마부터 그런 편견을 갖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장애인 차별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그날 난 뭐에 심기가 불편했는지 엄마랑 옥신각신하다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렸어.
 
  『엄마는 딸이 출세한 줄 알지만 남들 눈에는 한갓 장애인일 뿐이야』
 
  그 말이 엄마의 자존심을, 엄마의 꿈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폭탄인 줄 알면서도 난 잔인한 테러를 저지르고야 말았던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어.
 
  엄마는 딸이 장애인이지만 열심히 자기 인생을 개척하고 있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는데, 그리고 자신의 희생이 딸의 장애를 감추어 주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내가 엄마의 마지막 자존심을 손상시키고 만 거야.
 
  하지만 엄마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어. 그리고 더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아직 시간은 충분해.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든 내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고 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다면 성공적인 삶일 거야. 내가 잘 할 수 있도록 엄마가 계속 지켜봐 줄 거지?●
 
 
 

 
  ◈ 울보 어머니
 
  어머니, 하얀 눈물의 박꽃
 
  李 萬 才 카피라이터
  1944년 경남 울산 출생. 美 메릴랜드 주립大 중퇴. 조선일보 광고대상 심사위원 역임.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카피파워 대표. 대한민국광고대상 심사위원. 저서 「실전 카피론 1, 2」, 「이만재의 세상 돋보기」, 「카피라이터 입문」.
 
 
 
 피란지에서 쑥떡 장수
 
   어린 나이의 눈으로 보아도 남녘 피란지의 현실은 가혹했다. 우선 집 한 칸이 없었고, 땅 한 뼘이 없었고, 누구 하나 기댈 언덕이 없었다.
 
  부잣집 막내아들로 글깨나 읽어서 유식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아버지는 산 설고 물 선 시골 읍내에서 졸지에 무능한 실업자가 되었고, 일제 강점기에 만주 군수의 딸로 컸던 어머니는 이리저리 이웃의 눈치나 살피며 먹을 것을 조달하는 가난뱅이 아낙이 되었다.
 
  군말 필요없이 그것이 전쟁이었다. 저녁마다 산에서는 빨치산들이 내려와 칠흑의 골목마다에서 밤새도록 딱쿵 총을 쏘아댔다. 우리 경찰·의용군들과의 교전이라 했다.
 
  갓 입학한 초등학교는 가다 말다 했다. 학교에 가봤자 공부를 제대로 하는 날이 드물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도 교과서니 공책이니 책걸상이니 하는 것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타박타박 걸어서 학교로 가는 길목에서는 헌 가마니에 덮인 공산군들의 시신을 자주 보았다. 비어져 나온 맨발은 검푸른 색이었다.
 
  학교시간이 끝나 먼지 뽀얀 비포장 길을 걸어 집에 올 때는 가깝게 질러오는 논두렁길과 골목길을 마다하고 읍내 한복판 길을 택했다.
 
  금융조합 건물 옆 다리목 난간에 대여섯 늘어앉은 쑥떡장수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머리에 흰 무명수건을 덮어쓴 어머니 얼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로 쑥떡을 목판에 놓고 팔았지만 가끔씩은 인절미도 팔았다.
 
  나는 어머니의 주린 배를 알지 못하였지만 어머니는 내 주린 배를 어김없이 알아 차리셨다.
 
  나는 구멍난 검정고무신을 쑥떡 목판 앞에 그냥 갖다 붙여 놓고 잠시 서 있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내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떡 두 개를 내 양 손에 한 개씩 얼른 쥐어 주시곤 했다. 그것이 내 점심인 셈이었으나 정작 어머니의 점심은 내 관심이 아니었다.
 
  뜨거운 햇살에 눈부셔 하면서 어서 집에 가서 숙제 하라고 손사래 치시던 어머니.
 
 
 
 풀죽을 쑤면서 울던 어머니
 
  지금 나는 어머니 얘기를 일부러 거꾸로 쓰고 있다. 어머니 얘기의 본질은 쑥떡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시절, 특히 어머니의 정체는 눈물이었다.
 
  오롯한 눈물이었다. 어머니는 소리 없는 울보였다. 눈물의 양이 너무나도 많아서 그 눈물은 짠맛이 아닐지도 몰랐다.
 
  과목으로 치면 이심전심科여서 항용 말이 없으신 어머니에게는 눈물샘의 샘물이야말로 자신을 향한 커뮤니케이션의 도구였다.
 
  그 시절의 눈물은 주로 괄세받는 타관살이의 설움이 소재였겠으나 좀더 구체적으로는 못 먹어 비쩍 마르고 배만 불룩한 제 새끼 때문일 경우가 훨씬 많았을 터이다.
 
  양식이 떨어진 날, 멀겋게 풀죽을 쑤면서 장작불 연기에 훌쩍훌쩍 우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자주 보았다. 학교에 납부금을 제때 못 주는 날은 어머니의 눈물이 배가 되는 날이었다. 납부금 날짜를 몇 번 어기면 선생님은 아침 조회를 마치자마자 당장 집으로 쫓아 보내곤 하였는데 나는 일찍 집에 오는 단골소년이었다.
 
  온몸이 벌겋게 되고 가려운 「피풍」이라는 피부병에 걸렸는데, 바를 약을 못 사는 날도 어머니한테는 눈물의 날이었다. 우는 장소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사람의 눈이 없을 때는 툇마루 한쪽 구석일 경우가 많았고, 마른 장작이 몇 개 흩어져 있는 컴컴한 부뚜막일 때도 많았다.
 
  일제고사에서 전교 1등을 받아 오던 날에는 아예 내 몸뚱이를 품에 끌어 안고 흐느껴 우시기도 했으니, 어머니는 슬퍼도 울고 기뻐도 우는 전형적인 울보이시다.
 
  한평생 살아가면서 이웃의 누군가랑 단 한 차례도 말다툼 비슷한 것을 해보지 못한 사람을 찾으란다면 그 사람이 바로 우리 어머니다. 억울한 일, 속상한 일이 있으면 그저 하얗게 눈물부터 줄줄 흘리는 분이 우리 어머니다. 대개는 양보하고 참으신다. 말없이 돌아 앉아 참으신다. 참는 데 있어서는 우리 어머니를 능가할 이가 없다.
 
  어머니를 꽃에 비유한다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초가지붕 위에 다소곳이 올라앉은 하얀 박꽃이다.
 
  어느 경우에도 꾸밈이 없으시다. 겨울에 손등에 비벼 바르는 바셀린 종류의 크림 이외의 화장품을 사용하신 적이 없다. 젊어서부터도 얼굴에 분을 바르지 않으셨고 입술을 색으로 모양내려 하지 않으셨다.
 
  항상 최소한도의 옷가지면 되었고, 최소한도의 음식이면 되었으며,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최소한도의 용돈마저도 결단코 쓰려고 하지 않으셨다.
 
  술·담배를 입에 대보지 않았음은 물론이려니와 커피도 콜라, 심지어는 주스나 사이다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으신다.
 
  어머니가 육순 되던 해에 아버지가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하직하셨다.
 
  그러자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어머니는 기독교에 귀의하셨고, 서예공부를 시작하셨다.
 
  두 가지를 다 열심히 하셨다. 그러기를 10년째 되던 해 어머니는 인천의 한 화랑에서 서예작품전을 여셨다. 蒼湖(창호)가 서예가로서의 호였다.
 
  여든 중반에 이른 어머니는 손의 힘이 달려서 글씨를 쓰지는 못하지만, 지금도 하루 두 시간씩은 돋보기 안경과 함께 빼놓지 않고 성경을 읽으신다.
 
  요즘은 우실 일이 없냐고? 본디 울보 어머니인데 왜 울기를 멈추겠는가.
 
  증손자 증손녀가 예쁜짓, 재롱을 피우면 저들을 껴안고 요즘도 우신다.
 
  입으로 웃으시면서 눈으로 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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