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쟁이 만든 「라인강의 기적」을 무너뜨린 것은 1970년대 좌파정권의 사회주의적 指向: 親勞정책, 교육의 하향 평준화, 독일 정신의 붕괴, 과도한 보험료 부담, 취업 의욕을 약화시킨 과도한 실업보장이었다. 金大中 정권은 이들 必亡의 사회주의적 시장경제 정책을 그대로 선택했고 盧武鉉 정부는 이를 심화시키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겨우 1만 달러인 나라에서…
閔 庚 菊 강원대학교 경제무역학부 교수
1949년 충남 홍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졸업.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 학위 취득. 韓獨 경상학회 이사, 한국 하이에크 학회 초대회장 역임. 저서로 「시장경제의 법과 질서」, 「하이에크의 진화론적 자유주의 사회철학」 등이 있음. 자유경제출판문화상 수상.
閔 庚 菊 강원대학교 경제무역학부 교수
1949년 충남 홍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졸업.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 학위 취득. 韓獨 경상학회 이사, 한국 하이에크 학회 초대회장 역임. 저서로 「시장경제의 법과 질서」, 「하이에크의 진화론적 자유주의 사회철학」 등이 있음. 자유경제출판문화상 수상.
좌파 지식인들은 독일 경제를 英美式(영미식) 자본주의의 代案이라고 생각한다. 영미식 자본주의는 이기적인 인간들의 욕망만을 충족시키는 부도덕한 경제질서인데 반하여, 독일식 자본주의는 「사회정의」에 봉사하고, 「사회적 책임」까지 다하는 시장경제, 즉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것이다.
「분배」와 「참여」라는 가치를 중시하는 독일식 자본주의는 「성장」, 「자유」, 그리고 「경쟁」을 중시하는 영국과 미국식 자본주의와 비교할 때 도덕적으로 우월하고, 경제적으로도 효율적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좌파 지식인들이 이념의 메카로 여겼던 동유럽 사회주의가 몰락하자, 그들은 처참한 이념적 허탈감과 좌절감에 빠져 있었는데, 독일 경제의 존재는 그들이 이런 감정을 극복하는 데 한 가닥 희망이 됐다.
그래서 그들은 독일 경제를 자신들의 「사상적 메카」, 「동경의 땅」으로 여기면서, 독일 경제를 본받으려고 집중적인 노력을 투하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독일 경제는 오늘날 심각한 침체에 빠져 있다. 현재 성장률이 -2%이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는 독일의 올해 경제성장률을 0.3%로 잡고 있다. 지난해는 겨우 0.2%이었다. 실업률은 12%로 1950년대 이래 최악이다. 작년의 실업률은 11.3%였다.
高실업과 低성장. 이것이 독일 경제가 직면한 病이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독일 경제를 「유럽 경제의 환자」라고 평가하는가 하면, IMF(국제통화기금)도 「유로권 경제불안의 주범」이라고 말하고 있다. 독일 경제의 침체 원인은 무엇인가? 한국 경제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일각에서는 독일 경제의 침체 원인을 통일 후유증에서 찾고 있다. 독일 경제체제 그 자체는 경제적으로 효율적이고 도덕적으로 훌륭한 체제인데, 통일이라는 변수 때문에 당분간 침체가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경제논리보다는 정치논리에 의해 이루어진 통일이기 때문에 시간이 경과하면 독일 경제는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옳은가?
통일이 정치논리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사실이다. 동서독 화폐교환율을 1:1로 적용한 것, 동독 지역의 과도한 임금 인상, 서독 복지제도의 확대 적용 등이 그것이다.
통일 후유증이 기업들에 전가되어, 투자 부진, 생산성 저하 그리고 기업 경쟁력 약화를 초래했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통일이 독일 경제의 침체를 가져온 요인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통일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독일 경제의 침체는 필연적이었다는 게 많은 경제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통일의 후유증은 이런 침체를 시간적으로 앞당겼을 뿐이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독일식 자본주의가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국제화 탓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때문에 독일식 자본주의는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본 이동을 적절히 규제한다면 독일식 자본주의는 되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도 옳은 주장이 될 수 없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없다고 하더라도 독일 경제는 가라앉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 경제의 침체를 야기한 근본적인 원인은 독일 경제체제 그 자체, 즉 시장경제에 「사회적」이라는 의미의 평등 지향적 정책 운용을 허용하는 「사회적 시장경제」 자체다. 독일 경제가 병들기 시작한 것은 이미 1970년대 초부터이고, 이때부터 변화된 여러 가지 경제지표가 그 病勢(병세)를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
첫째, 1971년 이후 성장률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1950년 이후 1970년대 초까지의 성장률은 6~7%. 1970년대 이후부터 성장률은 2% 내외로 가라앉았고, 2001년 이후에는 1% 이하로 하락했다.
둘째, 실업률은 꾸준히 상승했다. 1970년대 이전에는 0.7%였던 실업률이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3.9%로 급격히 상승했다. 1980년부터 2000년까지는 8%, 2001년 이후 10.4%, 2003년 현재는 12%에 육박하고 있다.
셋째, 노임 상승률이 생산성 상승률을 능가하기 시작한 것도 역시 1970년대이다. 단체협약 노임이 시장 노임을 초과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독일은 왜 이렇게 병들기 시작했을까? 우리는 1970년대의 시대 상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는 서독 사회가 붉게 물들기 시작한 시기이다. 좌경화가 시작된 시점이라는 말이다.
당시 정치의 主題語(주제어)는 「참여」와 「분배」였다.
자유보다는 경제적·사회적 평등을, 경쟁보다는 협조를 중시하고, 法治원리보다는 타협을, 市場보다는 집단적 의사 결정 도구인 민주주의를 중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좌파적 제도가 이때부터 집요하고도 광범위하게 도입되어 확장되기 시작했다.
勞使(노사)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親勞(친노)정책과 제도, 삶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복지국가, 교육평등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교육제도가 그 핵이었다.
이 제도들이 사과 속에 들어 있는 벌레처럼 지난 1세대 이상 서서히 독일 경제를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이들이 「독일병」의 주범이다.
독일을 「노동자의 천국」이라고 부른다. 일관된 親노동정책 때문이다. 노동에 대한 온정주의야말로, 독일식 경제체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이다. 노동을 특별한 경우로 취급하려는 충동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충동이 사회주의 정서의 전형이다.
산별노조 체제, 노동자를 해고로부터 엄격히 보호하는 제도, 노동자의 정치적 참여와 경영 참여 제도도 親노동정책의 핵심이다.
산별노조는 勞使 간의 힘의 균형을 달성하겠다는 의도에서 도입됐다. 임금협상이 거대 노조인 산별노조와의 단체협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노임이 천편일률적이다. 노동 조건, 백화점 영업시간도 획일적이다. 어려움에 처한 기업이 종업원들과 임금 삭감에 합의를 했다고 해도 이 합의는 불법이고 무효이다. 획일적인 임금과 근로조건을 모든 기업에 강요할 경우를 상상해 보라.
이런 임금과 노동조건을 감당하기 어려운 기업들은 신규 채용은 고사하고 문을 닫아야 한다. 산별노조 제도가 중간 또는 하위 업체들에 가하는 타격은 이토록 극심하다.
독일에서는 기업이 노동자를 해고하기가 쉽지 않다. 경영상의 이유로 해고하지 않으면 안 될 때에도 어떤 종업원을 해고하는 문제에서 기업주들은 자유롭지 못하다.
업적이나 능력 등 생산성은 해고의 일차적 기준이 아니다. 능력이 없더라도 오래 근무한 노동자는 해고 가능성이 적다. 생산 능력이 없더라도 부양가족이 많으면 해고될 위험성이 적다.
해고가 능력과 관계 없는 기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독일 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는 것은 당연하다. 해고된 노동자가 소송을 제기하면 소송이 끝날 때까지 그를 해고할 수 없다.
독일만큼 노동법원이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곳도 드물다. 소송비용도 아주 싸고 심지어 노동조합이 대부분 그 비용을 부담한다. 이토록 해고가 어려우니 누가 신규 노동인력을 채용하려 하겠는가?
노동자의 힘은 사회적 조합주의를 통해 더욱 강화된다.
새로운 경제정책을 추진하려면 수상과 장관은 만사를 제쳐 놓고 노동조합에 달려가야 한다. 노동조합의 정치적 참여와 승인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노동시장의 유연성 문제, 산업정책, 연금·의료보험 개혁, 고용보험 개혁 등에서 더욱 그러하다.
경제 민주화의 명분으로 도입된 親勞 정책의 최고 절정은 노동자의 공동 결정권이다. 기업의 인수합병 문제, 입지 선정, 해외 투자, 연구개발 투자, 고용과 해고 등 모든 기업의 경영과 운영에 노동자들이 참여한다(감사위원회와 사업장 평의회). 이런 참여는 주주와 오너의 資産(자산)이 노동자와 공동소유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노조의 경영 참여는 기업 경영과 의사결정 과정을 너무도 복잡하게 만들었다. 기업들이 상황변동에 따라 신속하게 변신할 수도 없다. 장기적 전략에 따라 혁신할 수도 없다.
노동자들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서는 반대급부가 필요하다. 해고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 또는 임금을 인상해 주겠다는 약속 등이 그것이다. 기업 경영이 경제적 논리가 아닌 정치적 논리에 따를 수밖에 없다.
1970년대 이후에 대폭적으로 확충한 복지제도는 독일 경제를 침몰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다. 독일의 복지제도와 관련해서는 세 가지를 주목해서 봐야 한다.
첫째 복지국가 제도는 오늘날 12%에 육박한 高실업의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다. 두 번째로 복지국가의 확장으로 인해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손상되었다. 경제하려는 의욕과 모험심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셋째로 자본주의의 도덕적 기초인 책임감도 약화되어 가고 있다.
복지예산의 40%는 정부가 부담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보험 가입자들과 사용자측이 각각 절반씩 부담한다. 사용자 측의 부담은 결국 노동비용의 증가를 의미한다.
1970년대 이래 기업의 부담은 보험료 율의 증가에 따라 꾸준히 증가해 왔다(1970년 보험료율이 16.5%이었다. 오늘날 보험료율은 노임의 41.3%이다). 이것이 독일의 시간당 노동비용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이유 중 하나이다.
노동비용이 높기 때문에 신규 고용을 꺼린다. 독일의 실업률은 1970년대 이후 꾸준히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의 복지정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회 안전망을 통한 실업자 보호정책이다. 아주 촘촘하게 짜인 안전망은 독일을 노동자의 천국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원칙적으로 해고가 금지되어 있다. 그래도 해고되면 우선 실업수당을 받는다. 급여액은 평균 노임의 3분의 2이다. 이것은 고용보험에서 지급된다. 급여 기간은 현재 18~32개월이다.
수당을 받지 못하면 실업 보조금을 받는다. 이 보조금은 조세를 통해 지급된다. 평균 노임의 58%이다. 이것도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되면 사회 부조금을 받는다. 이것은 무기한이다. 그 액수도 평균 노임의 52%이다.
실업 수당을 받든 사회 부조금을 받든, 실업자의 생활 수준은 하류 노동자 평균 소득 수준과 별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실업 수당이나 사회 부조금 이외에도 자녀 양육비, 주택 보조금, 그리고 난방 보조금 등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업기간에는 연금보험, 의료보험을 정부가 대신 납부해 준다.
그러니까 실업자들은 일자리를 구하려고 안달하지 않는다. 일하기보다는 실업보조금이나 생활 부조금을 선호한다. 따라서 실업자 보호정책은 長期 실업을 증대시킨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복지국가가 야기하는 문제는 실업문제만이 아니다. 더욱 더 심각한 문제는 자유경제의 도덕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정부가 복지국가의 이름으로 개인들의 私的인 삶에 개입하기 때문에, 복지국가는 개인들이 스스로를 책임지겠다는 책임감을 소멸시키고 있다.
둘째, 부지런할 필요도, 思慮(사려, prudence)의 미덕도 필요 없다. 끈기와 인내도 필요 없다. 독일인의 匠人(장인)정신은 옛 이야기이다. 절약의 미덕도 소멸되었다. 아니 절약할 게 없다. 100유로 벌면 40유로는 보험금으로 20유로는 세금으로 빼앗기기 때문이다.
셋째, 복지제도의 확충으로 인하여 모든 부문에서 추진력과 진취성, 승부근성과 모험심을 여지없이 꺾어 놓고 말았다. 평등실현을 위한 再분배 정책으로 인하여 인센티브 시스템이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독일 경제의 침체 원인으로 비효율적인 교육제도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요인을 간과하고서는 1970년대 이후 몰락해 온 독일 경제를 설명하기 어렵다.
독일에서 교육은 개인 부담이 없다. 전적으로 조세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독일 교육제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꼽으라면 경쟁이 없다는 점이다.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에서조차 경쟁이 없다. 경쟁의 원리가 독일에서 관철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경쟁이란 필연적으로 사회그룹을 승자와 패자로 분류하는 결과를 가져오는데, 이것은 非인간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학을 서열화하는 것, 학교를 서열화하는 것도 반대한다. 학생들을 서열화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다.
평준화가 이상적인 제도라는 것이다. 평준화하지 않으면 기회의 불평등, 그리고 소득과 재산 분배의 불평등이 초래되기 때문이란다. 똑같이 가난한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불평등은 참을 수 없다는 얘기다.
독일 전통의 교육제도는 이렇지 않았다. 경쟁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었다. 똑똑한 사람은 더 똑똑하게 가르치고, 뒤떨어진 학생은 보통 수준으로 끌어올리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학습 의욕을 강화하려면, 그리고 교육 공급자들의 능력을 개발하려면 그 무엇보다도 경쟁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경쟁 없는 교육, 평준화 교육제도는 지적 수준의 하향 평준화를, 그리고 궁극적으로 모두를 경제적으로나 지적으로 가난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대학에 대한 국가의 간섭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학생들의 학교 선택도 자유로웠다. 대학들도 학생들을 놓고 경쟁했다. 히틀러 시대를 제외하고는 이런 경쟁원리는 교육시스템의 조직원리였다.
그러나 1968년 독일 좌파가 이끈 독일의 「문화혁명」은 勞使관계와 복지 시스템은 물론 이 교육 전통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현재의 독일 교육제도에서는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학교를 자유로이 선택하거나 바꾸기 쉽지 않다. 거주지별로 학교가 배정된다. 학교는 학생선발권이 없다. 학생들을 지역에 따라 할당받는다. 심지어 대학에서조차 중앙의 관련기관으로부터 학생들을 할당받는다.
독일 교육제도의 두 번째 특징은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 표현하자면 「참 교육」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겠다. 독일의 좌파 교육이 추구한 가치는 이런 것들이다. <모든 학생들에게 교육적 강제를 행사해서는 안 된다. 시험 없는 학교가 이상적이다. 체벌을 없애야 한다>
<노는 것이 곧 공부이고 놀면서 공부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성적평가는 없애야 한다>
<재능이란 누구나 보유하고 있지만 가정이나 또는 다른 환경적 혜택을 받지 못한 청소년에게 특별한 배려를 해야 한다>
<놀아도 대학 갈 수 있다>
이런 가치를 추구한 평등주의 교육, 경쟁 없는 교육제도의 결과는 무엇일까?
<학생들이 학습 동기를 잃고 학습기강이 약화되었다>
<교육 수준이 매우 낮다>
<대학은 물론 초·중등 교육이 사회가 요구하는 적절한 인재를 양성하지 못한다>
이것이 하향 평준화된 요즈음 독일 교육의 현주소이다.
2002년 8월경에 OECD 국가들끼리 실시한 국제학력평가 시험 결과를 보자. 이 평가에서 독일은 맨 꼴찌를 차지했고, 한국과 미국 영국 등은 상위권에 속했다.
20세기 초반 독일이 누렸던 학문적 명성에 비추어 본다면, 이런 평가 결과는 독일인들에게 모욕적인 사건이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노벨상의 45% 정도는 독일인들이 차지했다. 자연과학 문헌의 80%가 영어가 아니라 독일어로 쓰일 만큼 독일의 학문적 성과는 국제적 선망의 대상이었다. 국제적인 과학조직은 독일 학자들이 주도했다.
이런 독일 과학의 위상은 대학 간의 경쟁, 학자들 간의 경쟁, 그리고 학생들 간의 경쟁이 가져온 것이었다. 독일 경제를 이끌어 온 4大 산업(전기, 화학, 기계, 자동차 산업)은 이런 기초과학과 기술력의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평등교육과 경쟁 없는 교육제도가 지속되면서 독일의 학문적 명성은 사라진 지 오래다. 醫大의 명성도, 자연과학의 명성도, 심지어 철학의 명성도 사라진 지 오래다.
독일의 상류층 가정들은 자녀들을 미국과 영국의 유명한 대학이나 명문 기숙학교에 보내고 있다. 「교육 사회주의」가 교육을 망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사례는 적지 않다.
우파 정당이 오랫동안 집권해 온 州(주)의 학생 성적은 좌파 정당이 지배한 州의 학생 성적보다 훨씬 높다. 좌파가 집권한 州의 학생 성적은 대부분 독일內에서 하위권에 속한다. 바이에른州처럼 우파 정당이 집권해 온 州가 독일內에서 최고의 성적을 보여 주었다.
좌파 사상은 경제만 아니라 교육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1970년대 이전의 독일 경제가 고도 성장을 구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대답은 克明(극명)하다. 그것은 자유이다.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다. 라인강의 기적은 개인적 자유와 자유경제의 결과였다.
1950년 이후부터 1960년대 말까지는 독일의 역사에서 경제적 자유와 기업활동의 자유가 가장 잘 보호된 시기였다. 독일인들은 이 시기에 과거 어느 때도 누려 보지 못한 광범위한 자유를 누렸다.
거의 모든 부문을 자유와 경쟁의 원리에 따라 조직하는 시기였다. 기업부문은 물론 노동부문, 심지어 교육부문까지도 그랬다.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최소한에 그쳤다. 기업들의 경제활동 자유가 광범위하게 보장되었다>
<노동조합은 친목단체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힘이 없었다.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개별적인 계약이 지배적이었다. 노동시장은 노동공급을 신속하게 흡수할 수 있을 만큼 유연했다. 株主(주주)의 권리나 오너의 재산권은 신성한 것으로 여겼다>
<모두가 자신의 미래와 자신의 가족의 삶을 스스로 책임진다는 태도가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복지국가의 정책도 지극히 미미했다. 소득 재분배도 아주 약했다>
이런 자유 속에서 독일인들은 全세계를 누비면서 거침없이 경제활동에 종사했다. 모험적인 기업가 정신을 개발하고 이를 활성화할 수 있었던 것도, 경제적 번영의 원동력으로서 기존의 人的 자본과 기술이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던 것도 이런 자유의 덕택이었다. 이런 자유 속에서 새로운 인적 자본과 기술도 개발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런 자유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자유와 경쟁은 참여와 협조 분배라는 구호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독일 사회의 모든 분야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런 좌경화에 좌파 지식인들의 영향은 매우 강력했다. 그들은 좌경화를 위해 매우 조직적으로 활동했다.
이런 좌경화가 제도화되어 사회주의를 능가하는 노동 및 교육 제도 그리고 복지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초까지 독일 경제는 비교적 꾸준히 성장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과거 조상들로부터 전수받은 과학기술이 남아 있었고, 아직까지 이를 추월할 수 있는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과학기술은 자동차 제작 기술, 기계 제작 기술, 전기 기술, 화학 산업 기술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독일의 이런 과학기술을 능가할 나라가 아직 없었기 때문에 번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신흥 공업국가들(한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의 등장은 독일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자동차 산업, 기계 산업, 전기·화학 산업들은 더 이상 독일의 전유물이 될 수 없었다. 세계의 거의 모든 산업국가들이 독일을 따라잡고 말았다.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은 새로운 산업을 개발하는 데 주력했다. 정보통신산업, 생명공학 등 지식기반 산업이 그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이 지식기반 산업을 개발하거나 또는 「정보혁명」을 이룩할 수 없었다.
독일의 IT(Information Technology·정보기술)산업과, BT(Bio Technology·생명공학)산업은 미국보다 30년 이상 뒤지고 말았다. 산업혁신의 기회를 상실한 것이다. 기회를 놓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 역시 매우 간단하다.
지식기반 산업을 형성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의 유연성,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경제 주체들의 모험심과 책임 정신, 추진력과 의지력이다.
독일의 경제체제는 이런 새로운 산업을 개발하지 못했다. 노동시장과 기업이 유연성을 상실했고 인센티브 시스템은 작동하지 못했다. 기업들은 복지 지출로 인한 경영 압박 때문에 경쟁력을 상실했고 새로운 산업분야를 창조할 여력이 없었다.
유럽式을 대표하는 독일식 자본주의는 이제 그 운명이 다해 가고 있다. 「자유의 길(Road to Freedom)」로 개혁하지 않는 한, 독일 경제는 몰락하고 말 것이 틀림이 없다.
다시 말하면, 노동자 집단의 권력을 약화시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립하지 않는 한, 기업활동을 제약하는 노동자의 경영참여제도를 철폐하고 영미式 「주주 자본주의」로 전환하지 않는 한 교육 사회주의를 해체하지 않는 한, 그리고 사회보장 제도를 민영화하지 않는 한, 독일 경제는 과거 동유럽이 겪은 운명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세계사는 과거 동유럽과 같은 중앙집권적 경제질서는 물론 사회적 시장경제와 같은 온건한 사회주의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경제질서가 아님을 보여 주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이미 작동하여, 사회적 시장경제를 도태시키고 있다.
동유럽 사회주의의 몰락은 좌파 지식인들에게 지적인 허탈감을 안겨 주었다. 독일式 자본주의의 붕괴는 좌파 지식인들에게 또 다른 허탈감을 안겨 줄 것이 분명하다.
한국의 좌파 지식인들은 이념적 메카로 믿고 애지중지하는 독일 경제가 침체의 늪에서 헤매고 있는 사실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한국 경제가 가야 할 길은 자유 경제다」
이것이 독일 경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1인당 연간 국민소득 1만 달러의 벽을 뛰어넘어 2만, 3만 달러의 경제로 가는 길은 오로지 자유경제뿐이다. 독일 경제는 멕시코나 아르헨티나처럼 결코 허약한 경제가 아니라 유럽 경제를 이끌면서 유럽 통합을 주도할 만큼 막강한 잠재력을 가진 경제였다.
그러나 독일의 최근 경제 침체는 평등이라는 명분으로 펼치는 포퓰리즘적 정책이 막강한 경제를 여지없이 망가뜨린다는 엄연한 사실을 보여 준다.
평등주의 정책으로는 고용과 성장,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노동자를 위한 성장을 이루고, 분배를 개선하기 위한 최선의 정책은 자유 시장경제의 확립이라는 것을 독일 경제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독일병」의 주범이 되고 있는 독일식 자본주의를 金大中(김대중) 정부 때부터 도입하기 시작했다.
정부 정책 중 상당한 부분(예를 들면, 교육정책, 복지·의료정책, 분배정책, 기업정책)을 사회적 시장경제 이념을 명분으로 실행에 옮겼다.
金大中 정부는 한국에 「사회적 시장경제 이념」을 도입하여 이를 실천하기 시작한 최초의 정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본격적으로 붉게 물들기 시작한 시기도 이때부터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盧武鉉 정부가 이런 좌파에 경도된 정책과 제도를 더욱 더 심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의 분위기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더 좌파에 경도돼 가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의 독일 경제가 평등주의 때문에 망해 가는 판에 기껏해야 국민소득 1만 달러도 못 되는 경제를 가지고 평등을 우선 실현하겠다! 이것이야말로 무모한 시도가 아닐까?
盧武鉉 정부가 1만 달러의 岩壁(암벽)을 뛰어넘기는 고사하고, 지금까지 누려 온 우리의 성장 잠재력을 손상시키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걱정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주는 징조들이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勞使 간 힘의 균형이라는 이름으로 펼치고 있는 정책 때문에 지금 우리 경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가려고 한다. 산별 단체협약의 제도화를 시도하려는 것, 노동자의 경영참여 제도를 도입하려는 것, 勞使政위원회 제도를 강화하려는 것 등 親노동정책이 그것이다>
<노동조합 운동은 이제 더 이상 노동조합 운동이 아니라 기업에 대한 勞(노)의 지배, 경제에 대한 勞의 지배를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 운동으로 변모되었다>
<盧武鉉 정부가 한국 경제를 후퇴시킬 징조를 보이고 있는 또 다른 분야가 「참여 복지」 정책이다. 그들은 사회복지의 공급주체로서 국가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그리고 복지의 主(주) 공급대상을 사회의 취약 계층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全국민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런 정책은 조세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사회복지 부과금을 통해 再분배를 실시하려는 정책이다>
<교육분야에도 성장 잠재력을 억제하는 요인이 많다. 특히 좌파적 참교육과 교육 평준화 思考가 그것이다. 이런 교육관이 지배하는 한, 인적 자본의 축적은 기대할 수 없다>
金大中 정부는 주로 복지정책을 경유하여, 盧武鉉 정부는 주로 노동정책을 통해 사회주의 경제로 접어들려고 한다. 盧武鉉 정부의 사회주의 성향은 과거의 어떤 정부보다도 더욱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 정부의 주요 포스트에 평등주의자들이 포진해 있고, 우리 사회의 이념적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강하게 사회주의에 경도돼 있으며, 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좌파 단체들이 과거보다 더 강력하게 득세하고 있다.
그러나 평등주의는 지극히 牧歌(목가)적이고 낭만적인 생각이다.
그것은 끼리끼리 오순도순 살아가는 가정이나 또는 작은 무리의 윤리일 뿐, 오늘날과 같이 거대한 사회에는 적용할 수 없는 도덕적 원칙이다. 거대한 열린 사회에 그런 원칙을 적용한다면 불행과 빈곤만이 기다릴 뿐이다.
평등주의는 좌파가 애지중지하는 連帶(연대)와 참여의 윤리뿐만 아니라 정직성, 책임감, 타인의 권리에 대한 존중, 법의 지배 원칙 등 시장경제의 고귀한 윤리까지 파괴한다. 萬人에 대한 萬人의 투쟁상태가 야기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열린 사회에서 평등주의는 문명의 윤리가 아니라 야만적인 윤리이다.
이제 그만 평등주의의 환상에서 깨어나라!
이것이 망해 가는 독일 경제가 한국의 좌파에게 던지는 최후의 경고
이자 최후의 명령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