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추적] 金大中 대통령 친인척들 어떻게 살고 있나

『말 하나 행동 하나 조심해야 하니까 「현대판 賤民」입니다』

  • : 저자없음  
글자 크기 조정
  • 스크랩
  • 본문 음성 듣기
  • 글자 크기 조정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金大賢 한국사회경제연구소장
서울 여의도공원 앞 국민일보 빌딩(CCMM) 9층에 「한국사회경제연구소」란 팻말을 붙인 사무실이 있다. 이 사무실 입구에는 이색적인 「경고문」이 걸려 있다.
 
  <경고문: 연구소 임직원은 下記와 같은 행위를 절대로 하여서는 안된다. ▲청탁과 관련된 금품수수 행위, 가. 청탁을 하면서 주는 행위, 나. 청탁건이 잘되었다고 주는 행위, 다.청탁해 주겠다고 금품을 수수하는 행위. ▲專門(전문)정치에 關與(관여)하는 행위. ▲힘이 있는 양 암시 또는 과시하는 행위. 이상과 같은 행위를 하였을 시는 징계위원회에 회부, 엄한 징계조치를 한다. 1998년 5월25일 이사장 白 ※광고:방문객들께서는 본 경고사항을 必히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연구소의 이사장은 金大賢(김대현)씨. 올해 69세인 金씨는 金大中 대통령의 막내동생이다. 大賢씨는 1955년 軍에 입대, 1977년 헌병 소령으로 전역하기까지 22년 간 軍생활을 했다. 예편 후 그는 1979년부터 1986년까지 야당 총재였던 金대통령의 경호업무를 맡았다.
 
  법인등기부등본에 따르면, 이 연구소는 1995년 5월25일 자본금 10억원으로 설립됐다. 설립 초기엔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에 있었으나 작년 6월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이 연구소는 이사장실, 응접실, 사무실을 포함해 분양평수가 125평(실평수 60평)이다. 빌딩 관리업체에 따르면 『한국사회경제연구소는 올해 전세 계약을 갱신하게 되는데, 전세금은 약 6억3000만원(평당 503만원)이 될 것』이라고 했고, 관리비에 대해서는 『평당 2만원으로 수도ㆍ광열비(평당 月평균 7000~8000원 정도)까지 포함하면 월 300만원에 달한다』며 『CCMM 빌딩은 여의도에서 굿모닝 빌딩 다음으로 임대료가 비싸다』고 말했다.
 
  등기부 등본에 따르면 연구소의 설립목적은 「국내외 경제, 사회, 산업, 경영의 諸(제)분야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조사, 연구하여 효율적인 국가정책방향의 수립과 시장경제 발전 및 기업 경영관리의 선진화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현대판 賤民」이라 自處
 
  지난 3월5일 오후 4시경, 기자는 사전연락 없이 연구소를 찾았다. 밖에 나갔다가 사무실로 들어오던 大賢씨와 맞닥뜨리는 바람에 엉겁결에 만남이 이뤄졌다. 남도 사투리가 물씬 묻어나는 그의 목소리는 젊은 사람 못지 않게 우렁찼다.
 
  大賢씨는 자리에 앉자마자 『적지 마라』며 인터뷰를 거부했다. 사진기를 꺼내자 『나는 사진 찍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며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軍 출신이기 때문에 융통성은 없지만 화통하고 똑부러지는 성격이오.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실수를 하게 될까 염려돼 기자들과 만나는 것을 일절 삼가고 있소』
 
  그는 또 『기자들은 세 마디만 하면 소설을 쓴다니까요』라고 했다.
 
  『우리(대통령 가족)는 조용히 지내는 것이 상책이니 인터뷰할 생각은 말고 인간적인 이야기나 나누다 가세요. 하도 형님하고 멀리 지내니까 남들이 「혹 배 다른 동생 아니냐」고 할 정도입니다. 말 하나 행동 하나 조심하고 살아야 하니까 「현대판 賤民(천민)」이라고 할 수밖에요』
 
  주위를 살펴 보니 입구에 붙인 「경고문」과 같은 성격의 내방객용 「안내문」이 있었다. 大賢씨는 기자를 쳐다 보며 『기자는 여기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내방객 안내문은 이렇다.
 
  <▲본 연구소는 1995년 5월 사회경제분야의 연구를 목적으로 설립된 연구기관입니다. ▲본 연구소 설립취지와 관련 없는 일로 本所 방문은 사양하니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본소 책임자 모르게 陰性的으로 추진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는 본소는 책임지지 않으니 주의 바랍니다. 한국사회경제연구소 이사장 白>
 
  大賢씨는 『이 연구소는 형님이 대통령이 되시기 전인 1995년 5월25일에 설립한 것으로 현 정부랑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한국사회경제연구소는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순수한 경제 기획 연구소입니다. 솔직히 형님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연구소가 더 안 됩니다』
 
  그는 1998년에는 연구용역 수주와 관련, 경쟁업체로부터 모함까지 받았다며 당시 그 사실을 보도한 한 타블로이드 주간지를 보여 주었다. 大賢씨는 軍 제대 후 연립주택을 지어 분양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을 두고 언론에서는 그의 직업을 「건설업」이라고 보도했다.
 
  ―건설업을 하다가 어떤 계기로 연구소를 차리시게 됐습니까.
 
  『난, 건설업을 안 했소』
 
 
 
 『IMF가 한 10년 있다가 해결됐어야 고맙다고 느꼈을 것』
 
  기자가 가만히 앉아 있자 大賢씨는 과거 정권에서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5ㆍ18 직전인 1980년 5월17일 밤에 형님과 같이 연행되었습니다. 형님은 내란음모사건의 주모자로 지목하고, 저는 「유언비어가 수록된 녹음테이프 한 개를 배포했다」는 혐의를 씌웠습니다. 고초보다는 억지가 문제였어요. 「유언비어 유포죄」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1년을 살다 나왔죠』
 
  大賢씨는 그 테이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1980년 3월, YWCA 집회 때 형님이 연설한 내용입니다. 그 자리엔 경찰서장도 나와 있었어요. 그것이 유언비어라면 당시 경찰이 연설을 제지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는 1980년 당시 新軍部(신군부)가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다시피 했다고 했다.
 
  『우리 집안은 여자와 고등학생 이하의 남자를 빼곤 다 잡혀갈 정도로 탄압을 받았습니다』
 
  大賢씨는 기자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속에 있던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IMF와 외교문제 등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요새 사람들 경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IMF를 조기 졸업하게 만든 것, 이거 대단한 것 아닙니까. IMF를 졸업한 나라는 영국하고 한국밖에 없어요. 영국은 IMF 졸업이 오래 걸렸고 한국은 2년밖에 안 걸렸습니다. 국민들은 몰라요. IMF가 한 10년 있다가 해결이 됐어야 국민들이 고맙다고 느낄 걸 그랬나봐요. 외교정책도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역대 정권 중 주변 4강과의 관계를 이렇게 잘하고 있는 정권은 없습니다』
 
  그는 얼마 전에 일본에서 열린 「왓쇼이」 행사에 갔는데 그곳 일본 친구들이 『요즘 일본 경제가 어려운데 IMF를 극복한 金대통령을 3년만 빌려달라』는 농담까지 들었다고 했다.
 
  大賢씨는 테이블 유리 밑에 넣어둔 신문 스크랩을 손으로 가리켰다.
 
  『동아일보(2000년 9월9일자)가 「대구ㆍ부산지역 추석이 없다」고 보도했어요. 며칠 후(9월14일)엔 「부산-서울 귀경시간 21시간」이라고 했어요. 추석경기가 없다면서 같은 신문에, 그것도 며칠 후에 추석을 쇠러 부산에 간 사람이 귀경할 때 21시간 걸릴 정도로 많은 인파가 이동할 수 있습니까. 같은 기사들을 가지고 왜 이렇게 보도를 합니까』
 
  그는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역대 대통령 중 金대통령처럼 고생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동정은 못해도 욕은 하지 말아야죠. 日本 국민 개개인은 우리보다 못하지만 그 사람들은 다섯 명 이상만 모이면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국가와 단체를 위해 희생을 합니다. 우리 민족은 우수하지만 이런 것을 잘 못해요』
 
  정치 이야기에 열을 올리던 중 손으로 안경을 치는 바람에 끼고 있던 테 없는 안경이 바닥에 떨어져 한쪽 유리가 깨졌다.
 
  『아, 기자 양반이 와서 제가 흥분하는 바람에 안경도 깨지고 참…. 농부가 왜 그렇게 고생을 하겠습니까. 수확을 위해서 아닙니까. 그 수확을 他人이 해 가버리면 그 심정이 어떻겠어요. 100% 완벽하게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나라는 무조건 최선, 최고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李舜臣(이순신) 장군을 우리 역사는 가장 위대한 인물로 보는데, 저같이 淺學非材(천학비재)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순신 장군은 바보입니다. 倭敵(왜적)의 손에서 나라를 구하다 모함을 받고 결국 노량해전에서 戰死(전사)를 하셨는데, 그 功(공)은 누구한테 돌아갔습니까』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그는 경제적인 치적은 인정해야 하지만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과 같은 偉人(위인)의 반열에 어떻게 놓을 수 있느냐는 취지의 말을 했다.
 
 
 
 『요즘 형님이 안쓰럽다』
 
  ―대통령과 자주 만나십니까.
 
  『가끔 만납니다. 제 의견을 말씀드리지요. 요즘 형님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라를 위해 일하시느라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신지 지난 3ㆍ1절 행사 때 눈에 실핏줄이 터졌다잖아요. 지난번 「국민과의 대화」도 약속을 어길 수 없어서 불편하신 상황에서도 참석을 하셨답니다』
 
  오후 6시가 넘자 그는 『직원들이 퇴근도 못하고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을 챙겨 입으며 金이사장은 『오늘은 논문도 못 썼다』면서 사무실을 나섰다. 무슨 논문이냐고 물으니 그저 웃기만 했다.
 
  지하주차장까지 그를 따라가면서 취미를 물으니 『盆栽(분재)』라고 했다. 그는 취미생활을 위해 아파트보다는 단독주택을 선호한다고 했다. 그는 오래 전 토지개발공사에서 분양하는 단독주택용지를 구입해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거처를 마련했다. 大賢씨가 일산에 거처를 마련하자 金대통령이 드라이브 삼아 大賢씨의 집을 구경하게 됐고, 『공기가 좋다』며 대통령도 일산 자택을 지은 것이라고 그는 귀띔했다.
 
  『우리 형님은 억압받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셔서 그 멋있는 분재도 안 하시는 분』이라면서 서울 넘버가 달린 검정색 포텐샤 승용차를 타고 일산 자택으로 떠났다.
 
  두 번째로 한국사회경제연구소를 찾은 것은 4월4일. 大賢씨는 막 외출하려던 참이었다. 테이블 유리 밑에는 전에 못 봤던 신문기사가 들어 있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등 세 개의 신문기사로 중앙인사위원회가 3월16일 발표한 「고위공직자 출신지 분석」 결과였다.
 
  『이것 보세요. 한국일보는 「인사委 공직인사 실태 뜯어 보니…요직 호남 11%서 27.3%로」라고 해놨잖아요. 동아일보도 「고위공직자 출신지 분석/호남 출신 비율 11.6%서 27.3%로」라고 하면 누가 볼 때 호남 정권이니까 두 배 이상 늘었다고 생각할 것 아니에요. 옛날에 영남이 얼마나 많이 해먹었습니까. 그래도 조선일보는 중립적으로 「호남 정부요직 11%서 27% 영남 출신은 41%서 38%로… 중앙인사위 분석」이라고 했어요. 말은 「아」 다르고 「어」 달라요. 저게 어떤 의도에서 크게 타이틀로 뽑았는지 난 알아요』
 
  그는 『왜 자꾸 저렇게 해서 지방 분리를 시켜요. 옛날에 영남 정부가 잘못을 한 거 아니오? 자기네가 독식을 한 거잖아요』라고 항변했다.
 
  ―짧은 시간에 두 배 이상으로 정부요직에 호남사람이 들어갔다면 現정부의 인사정책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질문에는 대답을 안하고) 일반인들이 보면 잘 모르지만 좀 세밀한 사람이 보면 이것이 무슨 뜻으로 저렇게 타이틀을 달았는지 다 안다고요』
 
  ―언론 보도에 불만이라도 있으십니까.
 
  『불만이라고 하면 안 돼요. 불만이 많은 게 아니라 언론은 공정하고 정확해야 돼요. 사회의 公器잖아요. 지난번 동아일보의 기사 「대구·부산 추석이 없다」를 보세요. 요새 경기가 어려우니 추석이 어렵다고 나왔다면 내가 이해를 한다고. 대구·부산만 어려워요? 충청도는 괜찮고 강원도는 괜찮나요? 왜 1면 머릿기사에 「추석이 없다」하면서 대구·부산을 이야기하냐고요. 그래 놓고 5일 후에 추석 때 돌아올 때는 부산서 서울까지 21시간씩 걸리냐고. 이런 언론들하고 무슨 인터뷰를 합니까. 불만이 있는 게 아니에요. 언론은 국민 계도하고 정보를 제공하는 매체이기 때문에 공정하고 정확해야 돼요』
 
 
 
 『난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는 생활을 하고 있어요』
 
  응접실에는 전에 없었던 화분들이 많았다. 大賢씨의 박사학위 취득을 축하한다는 리본이 붙어 있었다. 金大中 대통령, 林昌烈(임창렬) 경기지사, 육군 헌병감 李正(이정) 준장 등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보였다.
 
  ―어느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까.
 
  『알려고 하지 말아요』
 
  ―축하받을 일을 왜 안 알리십니까.
 
  『난 말하기 싫어서 알리질 않았는데, 알음알음 알아서 보냈어요. 대통령께도 알리질 않았는데…』
 
  그는 『난 일반시민으로서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는 생활을 하고 있어요. 내가 다른 사람과 같이 권리도 주장하고 의무도 있는 사람이라면 왜 말을 안 해요. 만약 내가 권리를 주장했다면 난리가 날 거예요. 왜 내가 기자를 만날 수 있는가 하면 떳떳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나 찾아와 봐야 시간만 낭비에요. 난 그럴 만한 자격이 없소』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大賢씨는 2남1녀를 두었다. 장남 홍철씨는 아시아나항공 차장, 차남 홍민씨는 광고회사에 다니고 있고, 셋째 연학씨는 서울 여의도에 있는 조그만 금융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金寬宣 광주市의회 의원
 
 
 『대통령 조카가 뭘 하겠나』
 
  金大中 대통령의 부친 金云植(김운식)씨는 金대통령의 모친 張鹵島(장노도)씨와의 혼인이 재혼이었다. 김운식씨는 전처 金順禮(김순례)씨와의 사이에 金大本·金安禮씨 등 1남1녀를 뒀다. 大本씨는 1972년 작고했고, 安禮씨는 현재 신안군 도초면에 살고 있다.
 
  大本씨는 이복동생인 金대통령이 국회의원이던 시절, 목포에서 지구당 부위원장으로 金대통령을 도왔다. 大本씨의 부인 朴公心(박공심·82)씨는 신안군 하의도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大本씨는 3남3녀를 뒀으나, 滿宣(만선)ㆍ寬宣(관선)ㆍ弘宣(홍선)ㆍ明任(명임)씨 등 3남1녀만 생존해 있다. 장남 만선씨는 SK 과장으로, 둘째 寬宣씨는 1997년 大選(대선) 때 국민회의 재정국장으로 金대통령을 도왔으며, 현재 광주시의회 의원이다.
 
  寬宣씨는 市의원엔 再選(재선)됐지만 구청장 공천을 청와대서 두 번이나 거둬들이는 등 정치적 어려움이 많았다. 올해로 정치경력 17년째다. 그는 1986년 신한민주당 李載根(이재근ㆍ現 황등산업 회장) 의원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92년 14代 국회의원 선거 때는 민주당 재정국장을 5년 간 역임했다. 金대통령이 재정국장으로 그를 부른 것이다.
 
  재정국장 발탁 이유에 대해 寬宣씨는 『내가 木浦商高(목포상고)를 나왔고 국민은행에 근무한 경력 때문이다. 전임 재정국장이 사고가 나자 야당총재였던 金대통령이 날 불러 재정을 맡겼다. 야당의 재정국장이라는 자리가 돈 쓸 데는 많은데 돈이 안 생겨서 어려운 자리였다. 대통령 가족이기 때문에 휴가 출장비 등의 지출 결재과정에서 말이 많은 등 어려움이 있어 그만뒀다. 또 지방자치제가 시작된 이상 나도 뭔가 주민들에게 평가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말했다.
 
  寬宣씨는 광주시 남구청장 후보로 나섰다가 결국 출마를 포기했다. 金대통령의 측근이 寬宣씨를 만나 지역여론과 시민 정서를 고려해 출마 再검토를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청장 입후보를 위한 공천심사위에 당시 金대통령이 「너는 하지 말아라」라는 뜻을 金弘一(김홍일) 의원을 통해 지시했습니다. 市의원까지 못하면 정치를 아예 못하니까 市의원 하는 것까지는 청와대서도 인정을 하고 있어요. 金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전 이미 市의원을 했기 때문이지요』
 
  金寬宣 의원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국회의원 선거출마 의사를 묻자 이렇게 말했다.
 
  『내가 대통령 조카라는 처지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미국은 부시, 케네디 등 정치명문가를 키우는 상황인데, 우리나라는 그것이 안 돼요. 어렸을 때 정치를 배운 사람이 아무래도 나을 것 아니겠습니까. 「조카, 조카」하면서 언론에서 물고 늘어져 아무 것도 못합니다. 지금 상황이 오히려 편안해요』
 
  金의원은 올 초부터 조선대 경영행정대학원 겸임교수로 출강중이다.
 
  셋째 弘宣씨는 시골서 가두리 양식업을 하고, 넷째 明任씨는 주부다.
 
 
  金弘準 대한생명 총무부장
 
 
 金大義씨, 정치적 뒷바라지로 「만족」
 
  金대통령의 동생인 金大義(김대의)씨는 15代 大選 결과가 발표되기 하루 전인 1997년 12월17일 사망했다.
 
  大義씨는 2남2녀를 뒀다. 큰 아들 弘準(홍준·45)씨는 1982년 1월 대한생명에 입사, 현재 총무부장이다. 큰딸 惠景(혜경·43)씨는 주부인데, 남편은 申東潤(신동윤ㆍ47) YTN 취재부국장이다. 申씨는 KBS PD로 입사해 88올림픽 때 기자로 전환한 뒤 YTN 창립멤버로 자리를 옮겼다. 둘째아들 弘勳(홍훈·35)씨는 산림청 산하 홍릉임업시험소에 근무하고 있고, 둘째딸 惠英(혜영·29)씨의 남편은 올해 사법연수원을 졸업했다.
 
  大義씨는 죽기 전에 동교동계 舊派(구파) 계보 모임인 내외문제연구소 이사를 지내는 등 형의 정치적 뒷바라지에만 전념했다. 그가 운영하던 내외문제연구소도 「사무실」 개념일 뿐 金대통령의 정책결정을 뒷받침하는 역할만 했다.
 
  내외문제연구소는 金대통령이 야당 시절인 1967년 외곽조직으로 만들어졌으나, 1992년 大選 패배 후 국민회의 창당 때(1995년) 계보정치 청산이란 이유로 간판을 내렸다. 최근 민주당 權魯甲(권노갑) 최고위원을 중심으로 다시 세우려는 논의가 있다고 大義씨의 아들 弘準씨는 말했다.
 
  大義씨는 金대통령과 주변 사람들 사이에 정치적 조율을 했었고, 대통령이 여러 번 출마해 보라고 권유하는 등 기회가 있었으나 「형님」 한 분만 잘되는 것으로 만족하고, 陰地(음지)에서 도와드리겠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弘準씨는 중학교 2학년(15세)이던 1971년 大選 당시 金大中 대통령 후보 자택 폭발물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고초를 겪었다. 金大中 대통령 후보는 訪美중이었다.
 
  弘準씨는 『弘傑(홍걸)이와 할머니(장노도씨)와 함께 TV를 시청하고 있었는데 거실 앞쪽 마당에서 큰 폭음을 내며 폭탄이 터졌어요. 인명을 살상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경찰의 보호를 받고 있는데 새벽에 구속영장이 발부됐습니다. 급성 폐렴에 걸려 입원한 고려병원(강북삼성병원 자리)에서 판사가 출두한 가운데 구속적부심을 받고 석방됐습니다. 出張(출장) 구속적부심에다 병원서 구속적부심을 한 것은 아마 처음일 거예요. 제가 최연소 政治犯(정치범)이었을 겁니다. 당시 저를 석방한 판사는 그뒤 옷을 벗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金대통령이 귀국 후 저를 붙들고 눈시울을 붉히던 기억이 납니다』
 
  弘準씨는 할머니 장노도씨에 대해 『할머니는 당신의 자식들에게는 엄격하셨지만 손주인 저희들에게는 자애로우셨어요. 할머니께 가끔 놀러가면 곶감 등 먹을 것을 장롱 깊은 곳에 숨겨뒀다가 꺼내주시곤 했지요. 어린 제가 뵙기에도 손이 큰 여장부셨습니다. 할머니가 장한 어머니상도 받으셨는데, 큰어머니(李姬鎬 여사)가 사회활동을 하시다 보니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셨다』고 회고했다.
 
 
  李亨澤 예금보험공사 전무
 
 
 李姬鎬 여사 친정은 대가족
 
  金대통령의 부인 李姬鎬(이희호ㆍ78) 여사의 집안은 「대식구」다. 사촌들로 내려가면 이름조차 외우기 힘들 정도로 가족이 많다. 李여사의 부친 李龍基(이용기)씨는 서울 토박이로 전주 李씨 완창대군파다.
 
  李龍基씨는 세브란스醫專을 나왔다. 우리나라 의사면허 제4호다. 충남 서산에서 개업을 해서 「서산사람」으로 불리기도 했다. 남원도립병원장을 거쳐 포천도립병원장을 지냈다.
 
  이희호 여사는 6남2녀 중 넷째다. 맨 위는 李康鎬(이강호ㆍ사망)씨로 경기고,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한국증권업협회장, 한신증권 사장을 지냈다. 康鎬씨 부인 朴炳淑(박병숙)씨는 충남 당진군 합덕면의 지주 집안 출신이라고 한다. 박병숙씨의 큰오빠 朴炳斗(박병두)씨의 사위가 1971년 大選 때부터 줄곧 동교동계를 지키다 1987년 大選 직후 金대통령에게 김영삼 前 대통령과의 통합을 건의하고 떠난 柳濟然(유제연) 前 의원이다.
 
  康鎬씨는 4남1녀를 두었다. 康鎬씨의 큰아들 元澤(61)씨는 화장품 원료를 만드는 원일화학을 경영했다. 부친인 康鎬씨를 모시고 서울 중구 필동 故 兪鎭午(유진오) 박사의 옆집에 살다가 1994년 일산으로 이사를 했다.
 
  둘째아들 亨澤(형택ㆍ58)씨는 1997년 大選 과정에서 「DJ 비자금 사건」의 비자금 관리자로 지목된 사람이다. 1989년 동화은행 창립 멤버로 참여했던 亨澤씨는 金대통령 취임 다음날인 1998년 2월26일 이사대우로 승진했다. 1998년 6월28일 동화은행이 퇴출되는 바람에 금융계를 떠났던 그는 1999년 1월7일 예금보험공사 전무로 자리를 옮겼다. 亨澤씨는 작고한 심병식 前 서울은행장의 사위다.
 
  亨澤씨가 예금보험공사 전무가 되자 세간에서는 퇴출은행 임원을 지낸 사람이 다른 곳도 아닌 예금보험공사에서 중책을 맡을 「자격」이 있느냐는 지적이 있었다. 또 대통령 친인척이라는 점이 고려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다.
 
  재경부 일각에서도 『금융감독기관의 2인자 자리에 퇴출은행 임원이 임명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나 관행상으로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亨澤씨의 전임인 李晶載(이정재ㆍ前 재정경제부 차관)씨가 옛 재무부 이재국장 출신으로 李亨澤씨와 「격」이 맞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런 세간의 의혹에 대해 亨澤씨는 『동화은행 부장에서 1998년 2월 이사대우로 승진하자 오히려 주변사람들은 「이사면 이사지 무슨 가당치 않게 대우 꼬리가 붙냐」고 이야기했을 정도였다. 일부 낙하산 인사라는 견해에는 동의할 수 없다』면서 『정치성이라곤 하나도 없이 은행에서 30년 이상 일밖에 모른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몰 수 있는가』라고 말했다.
 
  康鎬씨의 딸 珣媛(순원)씨의 남편은 金榮燦(김영찬ㆍ58) 중앙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다. 金교수는 중앙대 공과대학장을 1999년부터 2년 간 역임했다. 金교수는 연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同대학원에서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넷째 正澤씨는 컨설팅회사인 아더앤더슨社의 子회사인 GCF(Global Cooperation Finance) 컨설팅 고문이며, 康鎬씨의 다섯째 善澤씨는 서울대 의대를 나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심장전문의로 개업했다. 善澤씨의 부인 김미례씨는 서울대 의대 출신의 소아과 의사다.
 
 
 
 DJ 主治醫 지낸 李經鎬씨
 
  李姬鎬 여사의 둘째 오빠 李經鎬(이경호)씨는 1971년 大選 당시 金大中 대통령후보의 주치의를 지낸 의사로, 슬하에 2남2녀를 뒀다.
 
  經鎬씨는 내과ㆍ외과, 소아과 전문의다. 그는 평양에서 의학원을 잠시 다닌 뒤 23세의 나이로 의사 검정고시에 합격해 의사가 됐다고 한다.
 
  經鎬씨는 경성방직 의료실에서 근무하다 경기도 안양에서 개업했다. 1950년 국회의료실 원장을 역임했다. 金대통령이 大選 후보로 나섰을 때 서울 신당동에서 개업을 하던 그는 生活苦(생활고)를 겪을 만큼 來院환자가 없었다. 經鎬씨의 큰아들 英作씨는 『아버지는 의사라는 신분이어서 동교동을 합법적으로 드나들었습니다. 그런 신분이다 보니 혹시 「정치적 심부름」을 하지 않을까 의심을 받았던 겁니다. 집안 사람들 전부 감시를 받았어요. 심지어 병원 앞에서 순경 수십 명이 보초를 서서 환자들에게 다른 병원을 가도록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했다.
 
  經鎬씨는 1960년대 말 金대통령이 간염에 걸렸을 때 치료한 인연으로 주치의가 됐다. 經鎬씨는 1977년 뇌일혈로 사망했다. 經鎬씨의 부인 정태교(80)씨는 한국에 살고 있는 둘째아들 世作씨 집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두 딸(安得, 淑姬)집을 오가며 지낸다.
 
 
  李英作 한양대 석좌교수
 
  큰아들 英作(영작ㆍ59)씨는 경기고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오하이오주립大에서 통계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작씨는 前 국회의원 鄭憲柱씨의 사위다. 英作씨의 부인 鄭紀蘭(정기란·59)씨는 경기여고와 이화여대를 나왔다.
 
  英作씨는 메릴랜드 주립대 조교수로 근무하다 1977년 미국 국립암연구소 객원통계학자로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후 「국립신경성질환 및 뇌졸중연구소」 연구원(1980년)을 거쳐 1989년부터 「美 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 of Health) 산하 「아동 및 인간생성연구소」 통계학 실장으로 근무했다.
 
  英作씨는 1999년 2월, 한양대 석좌교수로 부임해 오면서 유학을 떠난 지 20년 만에 한국에 정착했다. 그는 한양대 대학원에서 일주일에 한 번 「의료통계이론」을 강의하고 있다.
 
  英作씨가 정치인 金대통령과의 인연을 본격화한 것은 1982년. 내란음모죄로 구속됐다 풀려난 金대통령이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미국으로 망명해 온 「고모부」의 통역 등을 맡으며 정치참모 역할을 시작한 英作씨는 金대통령이 1983년 워싱턴에 인권문제연구소를 설립할 때 이사로 참여했다.
 
  金대통령은 1985년 2ㆍ12 총선을 앞두고 귀국하면서 자신이 맡고 있던 인권문제연구소 이사장직을 처조카인 英作씨에게 물려 주었다. 지금도 연구소 이사장직을 유지하고 있는 英作씨는 2000년 3월, 서울 논현동에 세계적인 의료통계회사 한국법인인 웨스탯코리아(Westat Korea) 대표로 취임했다.
 
 
 
 『잘못된 통계로 잘못된 결정을 한 것이 의약분업』
 
  웨스탯코리아는 정부나 제약회사의 의학통계와 임상실험, 보건통계 용역업무를 한다. 직원은 통계학 전공자(2명), 간호사(1명), 사무직원(1명) 등 네 명이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대남빌딩 8층에 있는 웨스탯코리아 사무실에서 李英作씨를 만났다.
 
  ―한양대 석좌교수로 작년부터 강의를 하고 있고, 의료통계회사 한국법인 대표로 취임한 것을 종합하면 한국에 영구귀국하신 것 아닙니까.
 
  『한국을 위해 일해 주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개인적으로도 내가 연구한 의료통계에 대한 노하우를 한국에 전달하려는 생각도 있습니다』
 
  ―웨스탯코리아의 영업 실적은 어떻습니까.
 
  『제약회사 임상실험 일이 조금 있는 정도죠. 우리나라는 보건 통계를 정부가 獨占(독점)하고 있는데 정부가 일반 개인회사에 의료통계 용역을 주는 일은 全無(전무)해요. 미국의 경우, 정부 통계업무의 절반 이상을 외부에 용역으로 줍니다. 웨스탯 본사는 50% 이상이 정부용역 일이에요. 작년 3월 의약분업 때 당시 車興奉(차흥봉) 장관에게 의약분업을 하기 전 통계조사를 해야 한다고 건의를 했었고 車장관도 수긍을 했었는데…. 결국 국민, 병원(개인ㆍ종합), 제약회사(대형ㆍ소형), 약국의 얽히고 설킨 돈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통계조사가 필요한 것인데, 담당자들이 통계조사가 다 돼 있다고 하는 바람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주먹구구식 탁상행정에다 시민단체도 즉흥적으로 가세해 의약분업에 문제가 발생했어요』
 
  ―학부에서는 전자공학을 전공했는데, 왜 통계학으로 옮겼습니까.
 
  『통계가 중요한 학문이기 때문이지요. 민주국가는 국민의 뜻을 반영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통계학이 발달해야 합니다. 통계는 통치를 위한 기초 학문이에요. 한국은 고속도로망같이 눈에 보이는 인프라 투자는 잘 하는데 눈에 안 보이는 통계와 같은 인프라에는 투자를 안 합니다. 잘못된 통계로 잘못된 결정을 하면 의약분업 사태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영국 미국 호주 등 자유민주국가는 통계가 발달했지만, 전체성이 강한 독일, 일본, 러시아 등은 통계가 발달하지 못했지요』
 
  ―수입은 괜찮습니까.
 
  『나는 여기서 월급으로 받는 수입이 거의 없어요. 부수입은 거의 세금으로 다 나가지 않습니까』
 
  ―자본금은 어떻게 마련하셨습니까.
 
  『고교 후배가 2억원을 투자했죠. 사실 웨스탯코리아도 정부에서 직접 돈을 줘서 기구를 만들어 줄 것을 기대하고 설립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임상실험 인식이 낮은 데다 제대로 된 임상실험을 하지 않고 적당히 해요』
 
 
 
 「세 지역 연대론」
 
  李英作씨는 지난 3월14일 전남 광주 상록회관에서 민주당 李仁濟(이인제) 최고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자신의 저서 「1997년 대통령선거 전략보고서(나남, 2001)」 출판기념회에서 호남ㆍ충청ㆍ강원의 「세 지역 연대론」을 주창해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다.
 
  『난 세 지역 연대론이란 이야기를 한 적도 없는데 가만 보면 언론에서 이름도 잘 붙여요. 세 지역 연대론은 정치가 숫자와 힘의 논리로 이어지는 데 대한 해결책이에요. 28%의 인구비율을 가진 영남과 선거에서 정책대결을 위해서는 세 지역이 연대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한쪽이 뭉쳐 있는 것은 지역감정이 아니고, 그것을 깨기 위해 뭉치는 것을 가지고 지역감정 자극한다고 하면 말이 안 됩니다』
 
  ―출판기념회에서 李仁濟(이인제) 최고위원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는데, 민주당의 大選주자들 중 누가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보십니까.
 
  『그건 잘 모르죠. 내가 한 후보를 지지한다는 것도 현실적인 얘기가 아니고요. 출판기념회서 「李仁濟 후보님이 언론 보도에 의하면 가장 유력한 후보 중 하나인데 대통령이 되시면 공의의 정부를 세워 주십시오」라고 이야기를 했지 지지하는 발언을 한 것은 아닙니다.
 
  金重權(김중권) 대표가 그 자리에 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나는 李仁濟 최고를 지지한 적이 없어요. 지난 총선 때 李仁濟 최고가 충청도를 위한 캐치프레이즈를 개발해 달라고 해 「金大中 대통령을 열심히 도와 경제 살리는 데 열심히 일하겠다, 李仁濟를 키워 주십시오」로 하라고 한 적은 있습니다』
 
  책은 많이 팔리고 있냐는 물음에 李英作씨는 『3000권 찍었는데 거의 다 팔렸다』면서 『책값이 2만5000원으로 비싸 독자들에게 죄송스럽지만 읽은 사람들이 밤을 새워 재미있게 읽었다고 할 때마다 기분이 좋습니다. 5년 전 대통령 선거 분위기가 다이나믹하게 그대로 살아 있는 것 같더라구요』하며 웃었다.
 
  책 내용이 金대통령에게 전하는 106건의 「李英作 메모」 형태로 사실적이라는 반응이 있다고 하자 『전 이공계통이어서 화법이 직설적이라 말하는 그대로를 쓴 것입니다. 오죽하면 金대통령이 野人 시절 제게 「자네는 말을 공손하게 하는 법도 모르나」는 말을 하셨겠어요. 지금도 대통령께 항상 말씀드리는 건데 「말을 귀에 듣기 좋게 하시려면 비록 말의 본뜻은 뼈가 있더라도 듣는 어휘 자체는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쇠몽둥이에 솜을 말아서 두들겨 패는 것같이 말씀하십시오」라고 조언을 합니다』고 말했다.
 
 
 
 『정권 再창출이 곧 개혁』
 
  ―1997년 大選 때 대통령을 도우셨는데 내년 大選에서도 여당의 선거 전략에 참여할 생각은 없습니까.
 
  『1983년부터 대통령 당선을 위해 노력했고, 대통령 당선 이후엔 계획이 없습니다. 金대통령이 어렵던 시절에 일을 맡아 선거 참모 역할을 했는데 이후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李英作씨는 『대통령이 이만큼 국정을 끌고 온 것은 정치철학이 분명하기 때문이고, 재벌개혁 하나는 알아 줘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정권 再창출 가능성이 보이면 재벌개혁이 된다』면서 『정권 再창출 이상의 개혁은 없다』고도 말했다. 그는 地域聯合論(지역연합론) 보도 후 일반 국민들로부터 「아! DJ정권에게 정권 再창출의 방법이 있구나」라는 말을 듣는다고 덧붙였다.
 
  李英作씨는 金대통령의 미국 내 조직인 인권문제연구소 이사장이다. 인권문제연구소는 200명 가량의 본부이사가 돈을 醵出(갹출)해 운영하고 있으며, 전국적으로는 20여 개 지역에 지회가 구성돼 있다. 회원은 2000명 정도다.
 
 
  李世作 영동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
 
 
 三豊 이준 前 회장 석방 운동
 
  李英作씨의 동생 世作(세작ㆍ56)씨는 동성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왔고 현재는 영동합동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다. 제15회 사법시험에 합격, 軍법무관을 거쳐 1979년 변호사로 개업했다. 서울대 법대 후배인 李仁濟 민주당 최고위원과는 절친한 사이다.
 
  世作씨는 한국토지공사, 공무원연금관리공단, 한국전력공사, SK건설, 아남반도체, 투마트, 울산 주리원백화점, 쌍용화재 고문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LG화재 社外(사외)이사다. 世作씨는 한전, 쌍용화재 사건 등의 변론을 맡고 있다고 했다. 그는 연간 30~40건의 사건을 담당하며 수임료는 고문변호사 수입과 공증수익을 제외하면 연간 2~3억원 정도라고 했다. 그는 『쉬고 싶은 생각에 변론을 과거보다 적게 맡고 있다』고 했다.
 
  그는 1995년 502명이 사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으로 복역중인 이준(80) 前 회장에 대해 형집행 정지를 위한 건의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李 前 회장은 징역 7년6월형이 확정돼 6년간 영등포교도소에서 복역중이다.
 
  『李 前 회장은 高齡(고령)인 데다 기력이 떨어져 석방돼야 한다고 봅니다. 심장쪽 관상동맥 이상과 악성 변비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많이 죽은 사건이지만 한편으로 그 사람이라고 자기 집 부서지라고 그렇게 했겠습니까. 작년 겨울을 지내고 나서는 못 견디겠다고 합디다』
 
  世作씨는 『형집행정지 건의운동을 하다보면 만나는 사람마다 개인적으로는 이해를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외면을 하는 상황이에요. 대통령 친인척으로서 의혹을 사도 좋으니 형집행정지로 석방되기만 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했다. 그는 행정부의 법집행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말할 수 없다』면서 사법부의 법집행은 『법조인의 입장에서 보면 냉정해졌고, 世人의 입장에서 보면 공정해졌다』면서 『바람직한 현상 아니냐』고 말했다.
 
  李英作씨의 여동생 安得(안득)씨의 남편은 승재경씨로 쓰리콤(3Com) 고문으로 있다. 중국에서 무연탄을 수입해 가공하는 무역업은 安得씨가 직접 경영한다. 넷째 淑姬(숙희)씨의 남편 이병우씨는 중앙제지에 근무하고 있다.
 
  李姬鎬 여사의 셋째 오빠 台鎬(태호)씨는 일본대학 전기공학부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毛紡(모방) 관련 사업을 했다. 광복 후 台鎬씨는 경방, 조선방직, 동광기업 등 국내 굴지의 방직업체에서 공장장을 지내기도 했다. 台鎬씨는 일본인 부인과 사별한 뒤 재혼해 1남1녀를 뒀다.
 
 
  金基亨 고려대 체육교육과 교수
 
 
 「木洞 安家」의 여주인 李光子
 
  李姬鎬 여사의 유일한 여동생이자 바로 아래 동생인 李英鎬(본명 李光子)씨는 金대통령이 자주 이용했던 「목동 安家」의 주인이다.
 
  金대통령은 李姬鎬 여사의 큰오빠인 康鎬씨의 필동 집을 「安家」로 삼다가, 1980년대 중반 목동에 英鎬씨가 입주하고 나서부터 13~14년 간 안가를 서울 양천구 목동으로 옮겼다. 친지들의 전언에 따르면 『金대통령은 영국에서 돌아오신 후 목동에 자주 들르셨다』면서 『집에 오시면 잠옷도 안 입고 밤 1시가 넘도록 책상에 정좌를 하고 앉아 글을 쓰시곤 했다』고 했다. 金대통령은 목동 처제집을 편하게 생각해 대통령 취임 후에도 들르려고 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英鎬씨는 지난해 노르웨이에서 거행된 노벨평화상 시상식에도 金대통령의 며느리들과 동행할 정도로 대통령이 끔찍히 생각하는 「목동 처제」다.
 
  남편 김소환씨는 주택은행 대구지점장을 거쳐 부장으로 정년퇴직했다. 퇴직 후 주택개발사장으로 근무하다 1992년 사망했다. 자녀는 1남3녀. 첫째딸은 김경희씨로 남편은 전병국씨다. 충남 서산 사람으로 정보 사업에 종사한다. 둘째딸은 김천희씨로 남편 윤여립씨는 남해화학에 근무하고 있다.
 
  셋째는 아들 金基亨(김기형ㆍ48)씨로 고려대 체육교육과 교수다. 그는 1999년 고려대 학생처장을 지냈고, 지난 2월14일에는 대한소프트볼연맹 회장에 취임했다. 고려대 산악부 출신으로 대학산악연맹 이사직도 맡고 있다. 金교수는 在京 대학생 중 가장 먼저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基亨씨는 미국 일리노이대학에서 체육학을 전공하고 모교인 고려대로 돌아와 체육교육과 교수가 됐다.
 
  基亨씨의 부인 許永淑(허영숙)씨는 金大中 정부 출범 이후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사무관(5급)에 지원했다. 許씨는 고려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문예진흥원에 근무하다 미국으로 유학, 일리노이大에서 컴퓨터프로그래밍(시뮬레이션 파트)을 전공했다.
 
  許씨는 지난 4월2일 청와대 여성정책실(실장 이순희 비서관) 여성정책 행정관(4급)으로 자리를 옮겼다.
 
  許씨는 『청와대 여성정책실에 근무하던 행정관이 행정자치부로 옮겨가면서 청와대에서 관련업무를 했던 사람을 찾았어요. 그러던 차에 여성특위에 3년 간 근무했던 저를 선발했다고 들었습니다』고 말했다.
 
  여성특위에서 OECD, UN, APEC 등 국제협력 분야를 담당했던 許씨는 청와대에서도 같은 업무를 당당하고 있다.
 
  許씨는 현 정부의 여성정책에 대해 『金대통령이 여성부를 신설하는 등 3년 동안 한 발 앞선 여성정책을 실시해 왔다』면서 『국제회의에 참가해 보면 우리의 여성정책 자체는 많이 발전했다는 생각이나 실생활과 접목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고 말했다.
 
  막내딸 김성희씨의 남편은 여성필씨로 현재 한국방송광고공사 광고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
 
 
 
 李喆鎬씨 집안, 대학교수 세 명이나 배출
 
  李姬鎬 여사의 둘째 동생 商鎬(상호)씨는 부인과 30여 년 전 사별해 홀로 살고 있다. 자녀는 윤택(국가정보원)ㆍ난택(주부)ㆍ연택(주부) 등 1남2녀를 뒀다. 서화나 골동품을 취급하는 고미술상이다.
 
  李姬鎬 여사의 셋째동생 喆鎬(철호)씨는 권지선씨와의 사이에 美澤ㆍ光澤ㆍ永澤ㆍ仁澤ㆍ榮文ㆍ大澤씨 등 5남1녀를 뒀다. 喆鎬씨는 중령으로 전역해 부동산 임대업, 농장 운영 등 여러 가지 사업을 했다.
 
  喆鎬씨의 자녀 중 永澤ㆍ仁澤ㆍ大澤씨는 대학교수로 재직, 한 집안에서 대학교수를 세 명이나 배출했다.
 
  喆鎬씨의 첫째 美澤(미택·48)씨는 방송인 徐酉錫(서유석)씨의 아우인 徐慶錫(서경석)씨와 결혼했다. 서유석씨의 부모, 즉 喆鎬씨의 사돈은 前 성동고 교장을 지낸 교육계의 원로 徐廷權(서정권)씨다. 徐廷權씨의 부인은 1989년 작고한 서예가 갈물 李喆卿 여사다.
 
  둘째인 光澤(광택·46)씨는 건설회사인 (주)대웅 대표이고, 셋째 永澤(영택ㆍ43)씨는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美 노스다코다大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고 경원대 식품생물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넷째 仁澤(인택ㆍ41)씨는 연세대를 졸업하고 美 하와이주립대서 박사학위를 받고 울산대 중국어중국학과 교수로 있다.
 
  다섯째 榮文(영문ㆍ39)씨는 건축사로 활동하고 있고, 막내 大澤(대택ㆍ37)씨는 연세대를 졸업하고 美 플로리다주립대서 운동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체육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이다.
 
 
 
 李聖鎬 아펙스평화관광 대표
 
  李姬鎬 여사의 막내동생 聖鎬씨는 올해 칠순이다. 聖鎬씨의 부인 김정자씨는 이화여대 출신으로 충남 공주에서 대전까지 자기 땅만 밟고 다닐 정도로 땅부자였다는 金甲順(김갑순)의 손녀다. 聖鎬씨는 아들만 둘을 두고 있다.
 
  큰아들 민택씨는 미국 에모리대 졸업 후 그래픽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고, 둘째 영택씨는 메릴랜드大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고 현재 美 NBC방송국 PD로 있다.
 
  聖鎬씨는 6ㆍ25 직후 渡美, 1960년대 미국 에모리大서 수학하고 미국서 현지 최초의 국내 여행사 유라시아 트래블을 설립했다.
 
  처음엔 여행사가 잘 됐으나 유라시아 트래블을 이용하면 「中情 요원」이 따라다닌다고 경쟁업체가 소문을 내는 통에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聖鎬씨가 미국에서 여행사를 그만둔 직접적인 이유는 현지의 「제살 파먹기 식 경쟁」 때문이라고 한다.
 
  聖鎬씨는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다 아펙스평화관광 여행사를 차렸다. 聖鎬씨는 1992년 자본금 1억원으로 설립했으며, 부장, 과장, 실장(2명) 영업(1명) 등 5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아펙스평화관광은 신문이나 TV에 일절 광고를 하지 않는 대신 단골고객들을 중심으로 募客(모객)을 한다. 경복고 출신인 聖鎬씨의 동창이나 민주당 의원 등 정ㆍ관계 인사들이 주요 고객이다. 월 매출액은 1억~1억5000만원, 이용 인원은 월평균 200여 명이다.
 
  여행사 관계자는 『金대통령이 야당 총재시절, 우리 여행사를 이용해 기자들과 10여 차례 미국, 필리핀, 중국 등지를 다녀왔습니다. 우리 여행사 직원들은 이용고객들의 보안에 철저하고, 동행하는 기자들에게 친절하게 서비스를 해 金대통령에게 累(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李姬鎬 여사의 외가는 수표동 근처에서 한의원을 하던 집안이다. 金대통령의 장모 李順伊(이순이)씨의 바로 위 오빠가 金대통령과 李姬鎬 여사에게 결혼식 장소를 제공한 李元淳(이원순)씨다. 李元淳씨는 일제시대 때 美 하와이에서 李承晩(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경력이 있다. 그는 1993년 4월 103세로 사망했다. 全經聯(전경련) 창설멤버인 그는 미국에서 한미무역회사를 운영하기도 했고, 한국해광개발 회장을 역임했다. 광복회 고문, 白凡(백범)기념사업회 고문도 지냈다. 李元淳씨의 부인이자 하와이 출신 교포인 이매리씨는 제7대 국회 때 공화당 전국구의원을 지낸 여장부로 적십자사 부총재를 지냈다. 이매리씨는 李姬鎬 여사 집안에선 보기 드물게 舊여권 인사이다.
 
 
 
 『누님은 대단한 美人』
 
  金대통령의 전처 車容愛(차용애) 여사 집안은 6·25 직후 목포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낼 정도로 소문난 부잣집이었다. 그의 부친 車寶輪(차보륜·1962년 사망)씨는 동국대 전신 惠化專門(혜화전문)을 나왔다. 그는 광복 전 목포에서 광선인쇄소를 운영했다. 車寶輪씨는 張点順(장점순·1983년 사망)씨와의 사이에 4남2녀를 뒀는데, 그 중 둘째가 車容愛 여사다.
 
  車容愛 여사의 큰오빠 元軾(원식)씨는 金대통령의 목포상고 동기로 고려대 상대를 중퇴했다. 그후 보건사회부와 서울시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 몇 년 전 작고했다. 부인 배정숙씨와의 사이에 3남2녀를 두었다. 車容愛 여사는 형제자매 중 유일하게 유학을 다녀온 新女性(신여성)이었다. 오빠 元軾씨가 고려대를 중퇴하고 일본에 유학을 떠난 것도 車여사를 돌보다가 데리고 오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車여사의 여동생이자 셋째인 恩卿(은경ㆍ67)씨는 영화 「산유화」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됐을 정도로 미인이다. 가족들은 車容愛 여사를 「동양적」 미인으로, 恩卿씨는 「서구적」 미인이라고 평한다. 恩卿씨의 남편 徐載熹(서재희·72)씨는 의사로서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원장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병원과 약국이 청구하는 진료비 내역을 심사·평가하는 1140여 명의 직원을 가진 조직이다. 전남 여수 출신으로 의학박사인 徐원장은 대한의사협회 고문, 전남재향군인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車여사의 둘째 동생인 車仁軾(차인식·62)씨는 1995년 12월 LG화재 부장으로 정년 퇴직했다. 1995년 3월부터 1996년 8월까지 LG화재 대리점을 운영했다. 부인과 1남3녀를 두었다.
 
  국민건강보험 재정파탄과 관련, 세간에 일고 있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원장에 金大中 대통령의 동서이자 金弘一 의원의 이모부인 徐載熹씨를 임명한 정실 인사가 재정을 파탄내고 말았다』는 이야기에 대해 仁軾씨는 이렇게 말했다.
 
  『일부에서 너무 편협한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매형 자신도 의약분업이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시행되는 것을 보고 걱정을 많이 했다』
 
  그는 『정부에서 심사인력 보강, 전산시스템 등을 투자해 주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과도기에 의욕을 가지고 일하는 매형에게 비판적인 시각보다는 격려를 해주어야 한다, 꼼꼼한 매형이 그 일을 맡길 잘했다』고 말했다.
 
  仁軾씨는 또 車容愛 여사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누님은 대단한 미인이었어요. 같은 형제였지만 우리 동생들 모두가 존경했습니다. 일본식 교육을 받아서인지 참고 견디는 인내심, 남을 수용하는 포용력이 남달랐습니다. 큰며느리로서, 큰누나로서 부족함이 없었고, 자식들에게는 인자한 어머니었습니다』
 
  仁軾씨는 『우리 집안엔 내세울 만한 게 없습니다. 6·25 이후 가세가 기울어 먹고 사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정치와는 가깝지 않았어요』라고 했다. 仁軾씨는 또 『弘一, 弘業씨는 어릴 적 같이 살았기 때문에 다른 조카와 달리 애틋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면서 『두 조카가 새 엄마인 李姬鎬 여사의 인격에 감화돼 따르는 모습을 보니 외삼촌의 입장에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車여사의 셋째 동생 車宇軾(차우식·59)씨는 제일생명 이사 퇴임 후 벤처기업을 운영한다. 자녀는 1남3녀를 두었다. 車여사의 막내동생은 昌軾(창식·55)씨다. 한때 집안의 누나뻘인 張玲子(장영자)씨와 함께 일을 하기도 했다.
 
 
 
 『나도 무조건 좋소』
 
  金대통령은 1946년, 당시 20세의 車容愛 여사와 결혼해 弘一(홍일·53) 弘業(홍업ㆍ52) 두 형제를 뒀다. 金대통령은 1959년 車여사가 세상을 떠나고 홀로 지내고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1961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으나 당선 사흘 만에 5ㆍ16발발로 국회의원 선서도 못해 「국회의원 당선자」 신세가 될 무렵이다.
 
  당시 李여사는 YWCA 총무였다. 보도에 따르면 金대통령과 李姬鎬 여사는 「만우회」란 모임에서 첫 대면을 했다. 두 사람은 李姬鎬 여사가 미국 스카릿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뒤인 1962년에 鄭一亨(정일형)ㆍ李兌榮(이태영) 부부의 중매로 결혼에 이르게 된다.
 
  李여사 집안에서는 당초 이 결혼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두 아들을 거느린 홀아비인 데다 연거푸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져 家産(가산)을 탕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독신으로 산다더니 뒤늦게 자식까지 딸린 홀아비와의 결혼이 웬 말이냐』는 것이 당시 가족들의 생각이었다. 金大中 대통령과 李姬鎬 여사는 1962년 5월10일 李여사의 외삼촌인 李元淳(이원순·前 한국경제인연합회 고문)씨 댁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車여사가 사망한 지 3년 후였다.
 
  金대통령은 세 아들의 결혼을 자식들의 의사에 맡겼다. 맏며느리 尹惠羅(윤혜라·49)씨는 서울, 둘째 며느리 申仙蓮(신선련)씨는 대구, 셋째 며느리 임미경씨는 부산 사람으로 호남 출신이 하나도 없다.
 
  장남 弘一씨의 부인 尹惠羅씨는 弘業씨 친구 尹興烈(윤흥렬) 스포츠서울21 사장의 여동생. 惠羅씨는 朴正熙 前 대통령의 장녀인 朴槿惠(박근혜) 한나라당 부총재와 서울 장충초등학교 동기생이기도 하다.
 
  金대통령 가족은 경희대와 인연이 많다. 金대통령은 1967년 경희대학 경영행정대학원 최고지도자 과정(산업경제학과 무역금융전공)과 1970년 일반대학원 경제학과 연구과정을 수료했다. 장남인 弘一씨가 1971년 정외과를 졸업했고, 차남 弘業씨는 1972년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弘一씨의 부인 尹惠羅씨는 불어교육과, 弘業씨의 부인 申仙蓮(신선련)씨도 경희대 외국어 교육과를 졸업했다. 또 弘業씨와 尹興烈씨는 ROTC 동기(10기)다.
 
  弘一씨와 惠羅씨는 1974년 8월15일 결혼식을 올렸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陸英修(육영수) 여사가 피격된 날이기도 하다.
 
  결혼식은 金대통령이 연금상태라 공개적으로 할 수 없었고 鄭一亨 박사의 주례로 정일형 박사댁에서 했다. 당시 결혼식장 주변에 中情 요원들이 쫙 깔린 상태에서 친척들도 일부만 참석하는 「살벌한」 결혼식이었다.
 
  金대통령의 장남 弘一씨의 장인 尹慶彬(윤경빈ㆍ82) 광복회 회장은 사위의 첫 인상을 이렇게 말했다.
 
  『당시 공군 중위 때 첫 인사를 왔는데 건강하고, 남자답게 잘 생겨서 집사람도 나도 만족했어요. 金대통령이 납치돼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어서 솔직히 쇼크를 받았습니다. 당시엔 이상한 말 한 마디면 사건에 連累(연루)되고 막 잡혀가는 시기였지요. 하지만 민족적 過誤(과오)가 있는 분도 아니고 民主 지도자인데, 그런 상황이라고 해서 사돈을 못 맺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요. 또 두 사람은 이미 결혼을 결심한 상황이었으니까요. 그쪽도 우리가 「뭐하는 사람이냐」고 알아봤답니다. 「白凡 선생을 모시고 독립운동을 한 집안」이라고 하자 「독립운동, 白凡 선생 나도 무조건 좋소」라고 했다고 합디다』
 
  弘一씨는 세 딸을 두었는데 큰딸 지영씨는 남가주大(USC)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 후, 펜실베이니아大 대학원 커뮤니케이션 석사과정을 이수중이다. 둘째 정화씨는 이화여대 음대 종교음악과 4학년, 셋째 화영씨는 서울예고 3학년이다.
 
 
  尹慶彬 광복회 회장
 
 
 金九 선생 경위대장 출신
 
  金弘一씨의 장인 尹慶彬씨는 일본 명치대 출신의 독립유공자로 상해 임시정부시절 白凡 金九(김구) 선생의 경위대장을 지냈다. 일제 때 일본군 학병으로 중국에 배치되었던 그는 張俊河(장준하)씨와 한 부대에서 훈련을 받다가 2개월 만에 탈출했다. 尹회장은 7개월 만에 死線(사선)을 넘어 臨政(임정)쪽에 합류했다.
 
  尹회장은 1998년 1월16일 임기 3년의 14代 광복회장 선거에서 만장일치로 당선됐다. 광복회 한 임원은 『회원들이 尹회장의 독립운동 경력도 좋고, 대통령 친인척이라는 신분이 오히려 열악한 독립유공자들의 환경을 개선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만장일치로 선출한 것 같다』고 했다. 尹회장은 『독립유공자 협회장도 지냈고, 동지들끼리도 「네가 광복회 맡으라」는 强權(강권)도 있어 맡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광복회는 전임 회장이 연임 의지를 강력히 표명, 회원들 간에 마찰이 빚어지기도 했다. 게다가 회장 선거에 보훈처의 개입 여부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 때문에 야당에서는 尹회장의 취임에 문제제기를 하기도 했다. 全斗煥(전두환) 前 대통령의 장인인 李圭東(이규동)씨가 대한노인회장에 취임했던 일을 거론하며 대통령 친인척의 과도한 개입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임기 4년이던 定款(정관)을 3년으로 변경했다.
 
 
 
 『親日派 청산은 통일 前단계 작업』
 
  광복회는 올해 安重根(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남북한 합작으로 건립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하얼빈市 당국이 링컨, 간디, 처칠, 스탈린 등의 「세계 위인 공원」을 총 2만5000평의 대지 위에 세우면서 위인 중 한 사람으로 安重根 의사를 선정해 조선족을 통해 우리측에 알려온 것이다.
 
  市당국은 땅 500평을 우리측에 배당해 造形物(조형물)을 만들어 公園化(공원화)하라고 제의를 했고, 북측은 동상만 하나 세우겠다는 의사를 중국측에 전달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족 관계자가 남측에서 기념관을 지으라고 권유를 했다.
 
  尹회장은 『남북한이 따로 하는 공사라면 안하겠다, 安重根 의사의 동상을 세계위인공원에 세우면 國威(국위)가 선양되는 것인데, 하려면 본격적으로 남북한이 같이 하자』는 취지를 조선족을 통해 북측에 제의해 놓은 상태다.
 
  『금년 1월에 제의를 했는데 아직 회답은 없습니다. 조선족의 말에 따르면 黨史(당사)위원회(북한측 담당 기관) 책임자와 협의를 하고 있다고 전해 왔어요. 잘 되겠죠』
 
  尹회장이 추진하는 또 하나의 사업은 親日派(친일파)에 대한 역사적 청산이다. 그는 친일 당사자들은 다 사망했지만 친일파와 친일행적은 역사적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차원에서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다.
 
  『재작년 광복회 주최로 친일파 청산 학술회의가 있었는데, 세종문화회관에 1200여 명이 雲集(운집)했어요. 국민들의 관심이 높습디다. 앞으로 광복회에서는 친일파 명단을 작성하고 친일행위 증거를 수집해 하나의 책자로 발간할 계획입니다. 이것을 세상에 공포함으로써 史草(사초)로 남겨야 합니다. 「역사의 安葬(안장)」을 끝내야지, 세계의 어느 植民地(식민지) 국가도 敵과 相通(상통)하고 동족의 피를 빨고 나라를 판 민족 反逆輩(반역배)를 그냥 둔 적은 없거든요. 프랑스가 4년 간 나치 치하에 있었는데 청산작업을 하면서 700명을 사형시켰습니다. 李承晩 정권은 친일파를 기용하려고 反民特委(반민특위)를 해산하는 일을 자행했지만요』
 
  尹회장에 따르면 친일파 청산을 하려는 것도 통일을 대비한 整地(정지)작업이다.
 
  『이북은 친일파를 철저히 처단했어요. 친일파들이 이남으로 피란와서 溫床(온상)같이 자란 것입니다. 통일 단계에 가서 친일파 처리문제를 이북서 들고 나올 것이 뻔해요. 정치적으로 우리도 정리가 다 됐다는 구실이 없으면 免無識(면무식)도 못하고, 잘못하면 주도권을 빼앗깁니다. 저쪽이 너희는 정통성이 없다고 들고나올 테니까요』
 
  尹회장은 효창운동장에 白凡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그 건립위원장도 맡고 있다.
 
  『사위(金弘一 의원)에게 기부금 모금에 협조해 달라는 뜻에서 얘기를 좀 했어요. 이번에 찾아 왔을 때도 건립 취지를 설명해 줬어요. 아직 도움을 받은 적은 없지만, 사위가 날 좋아하고 「백범일지」를 감옥서 세 번이나 읽었을 정도로 白凡을 존경한다니까 기대해 봐야지요』
 
 
  尹興烈 스포츠서울21 사장
 
 
 CF감독에서 「스포츠서울21」 사장으로
 
  尹興烈(윤흥렬·52)씨는 金弘一 의원의 부인 윤혜라씨의 오빠이자 金弘業 아태평화재단 부이사장과는 대학 1학년 때부터 사귄 친구 사이다.
 
  尹사장은 「DJ와 춤을」 같은 감각적인 컨셉이 담긴 金大中 후보의 텔레비전 광고를 직접 제작한 광고통이다. 그는 충무로 영화계의 조감독에서 시작해 CF감독 등 다채로운 경력을 가지고 있다.
 
  尹사장은 LG애드 시절인 1978년, 28세의 나이에 최연소 과장이 된 광고마케팅 전문가다. 그는 金星社 담당 기획과장으로 일하다 1980년 全斗煥 정권이 들어서면서 弘一씨의 처남이라는 이유로 조사를 받았고, 퇴사했다고 한다.
 
  이후 동방기획 시절인 1987년 大選 때, 3개월 간 金大中 후보의 선거캠프에서 활약을 하지만 大選은 패배로 끝났고, 金大中 후보는 정계를 은퇴했다. 1992년 또 한번의 大選 패배 이후 興烈씨는 1995년 홍보기획사 「밝은 세상」을 만들었다.
 
  『전 그때까지 마케팅 경쟁에서 져 본 적이 없었어요. 슬슬 민주화가 되던 시기였고, 선거부정도 없는데 왜 대통령을 못 만드냐는 오기가 생기더군요』
 
  ―정계에 입문하라는 권유는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의사표시를 안 했어요. 제가 나대는 성격도 아니라 정치에 관심도 없고 또 德도 모자라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국회의원을 몇 번은 했을 겁니다. 소수정권의 한계이지만 친인척이 나서서 좋을 일은 없지요』
 
  尹興烈씨는 金大中 정부 출범 후인 1998년 4월 대한매일 주주총회에서 전무로 선임되고 2000년 1월 「스포츠서울21」 사장에 취임했다. 아태재단 기획실장 金三雄(김삼웅ㆍ대한매일신문 주필 상무이사)씨도 尹씨와 함께 들어갔다. 그는 『노조가 낙하산 인사라며 취임을 강력히 반대했다는 이야기는 공식적으로나 非공식적으로도 들은 사실이 없다』고 말했다.
 
  ―스포츠서울 21 사장으로 어떻게 임명된 겁니까.
 
  『대한매일의 부실이 많지 않습니까. 과거 정권들은 많이 도와 줬지만 현 정권은 신문사에 도와 주는 것 하나도 없습니다. 도와 주는 것 없고 빚만 늘어가니까 제가 아이디어를 냈어요. 스포츠서울을 子회사로 분리해 그 주식을 분양하자고요. 그렇게 마련한 1000억원을 대한매일에 넣었습니다. 스포츠서울을 누가 관리하느냐는 이야기가 나왔고, 非정치적인 제가 적임자라고 해서 임명된 것입니다』
 
  그는 스포츠서울 21 사장과 대한매일 부사장직을 겸직하다 3월 말 주주총회에서 대한매일 부사장 자리를 물러났다.
 
  『광고 일과 신문 제작은 전혀 다르더군요. 제가 편집을 모르기 때문에 일절 편집에는 간여를 안 합니다. 제가 맡은 일은 관리ㆍ경영업무입니다』
 
 
 
 『정권이 끝나면 하고 싶어도 못한다』
 
  ―대한매일에서 子회사로 독립한 스포츠 서울 21을 어떻게 키울 생각이십니까.
 
  『광고시장 여건이 달라져 종이신문만 가지고는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포츠서울21로 社名을 바꾼 것도 「종합 엔터테인먼트그룹」을 지향하자는 뜻입니다. 현재 위성방송 신청을 해놓고 있고, 「한국스포츠정보」란 子회사를 만들었고, 「고고 엔터테인먼트社」를 만드는 과정에 있습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스포츠서울21 사장직을 계속 할 수 있으실 것으로 보십니까.
 
  『정권이 끝나면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 아닙니까. 주주들이 계속 원하면 별 문제이지만…. 전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엔터테인먼트가 적성에 맞아요. 대통령 취임식 이벤트로 칭찬도 들었지요. 사장을 못한다면 近似値(근사치)의 일을 창조해서라도 해야지요』
 
  ―스포츠 서울에 지분이 얼마나 있으십니까.
 
  『지분이 없어요. 전 「고용 사장」이라니까요. 3년 근무해서 받은 퇴직금 몇 천만원으로 주식을 샀으니까 지분이 소수점 이하로 내려갈 겁니다』
 
  ―지난 3월9일 MBC 金重培(김중배) 사장이 취임하기 전에, MBC 사장으로 내정됐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르신 말씀을 빌자면 「스포츠 서울 사장도 흥렬이에게 안되는 자린데… 친인척은 안 된다」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는 현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노 코멘트』를 유지하다 체육계 이야기가 나오자 『요즘 기업들이 어려워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했다.
 
  월드컵 준비상황에 대해서도 『준비는 열심히 하고 있지만 大選과 정치권 상황 때문에 국민들의 관심 밖에 있는 것이 문제』라면서 『아이디어가 다양한 김한길 문화관광부 장관과는 가깝지만 요즘 주변을 의식해 선을 긋고 지낸다』고 말했다. 尹사장은 얼마 전 자신의 광고회사 「키프로덕션」을 처분했다.
 
  興烈씨에겐 프로골퍼인 두 딸 소원, 소정씨가 있다. 소원씨는 서울 대청중 1학년 때부터 골프를 시작, 이듬해 입학한 한희원과 함께 대청중 전성시대를 연 주니어스타 출신. 대전 갈마여중 출신의 박세리와는 나이가 같다. 미스 전북으로 미모를 겸하고 있는 소원씨는 동생 소정씨와 함께 1998년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주관 프로테스트에서 자매가 동시에 정규프로자격을 획득했다.
 
 
 
 韓國版 「로미오와 줄리엣」
 
  金大中 대통령의 차남 弘業(홍업)씨는 5共 시절이던 1984년 3월 워싱턴에서 경희대 동문 申仙蓮(신선련·46)씨와 결혼했다. 이들의 결혼은 신부 부친이 대구 출신의 현직 감사원 감사위원이라는 점 때문에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인공으로 화제에 올랐었다.
 
  弘業씨와 申仙蓮씨는 金대통령이 내란음모사건으로 수감됐을 때부터 사귀기 시작했으나, 仙蓮씨 부친 申鉉守(신현수·71)씨의 반대가 워낙 심했다. 그 때문에 仙蓮씨는 유학을 핑계로 1983년 12월 미국으로 건너가 弘業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 과정에서 申鉉守씨는 사표 낼 각오로 감사원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뜻밖에도 全斗煥 당시 대통령이 축하를 해 줬다.
 
  弘業씨는 한약재 수입상도 하고, 남도출판사를 경영, 「사랑하는 가족에게」를 출판하기도 했다. 또 정치기획사 「밝은 세상」 대표를 지냈다. 弘業씨는 현재 아태재단 부이사장이다. 친구인 尹興烈 사장은 弘業씨에 대해 『주변에서 말들이 나오고부터는 요즘 할 일이 없어 걱정』이라며 『그 친구가 맡고 나서 오히려 아태재단이 활성화가 안 된다』고 말했다.
 
  弘業씨의 부인 申仙蓮씨는 메릴린치 증권 인사담당 이사로 억대 연봉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3월 말경 두 차례 방문을 했으나 담당 과장이 대신 『늘상 자리를 비운다』 『요즘 사무실 이사 때문에 바쁘다』 『언론사 기자분들과 안 만나려 하신다』는 말만 전해 줬다. 申이사는 총무ㆍ인사 부문을 총괄하고 있다. 弘業씨는 아들 둘(종대, 종민)을 두고 있다.
 
  申鉉守씨는 1989년 감사원에서 물러나 신용관리기금 이사장을 지냈다. 감사원 재직시에는 부인 韓淑子(한숙자·69)씨가 薄俸(박봉)인 공무원 월급에만 기댈 수 없어 25년 동안 벽제 근교에서 축산업을 했었다. 젖소에서 나오는 우유가 하루 1t, 돼지가 1000두에 달했으나 힘에 부쳐 1997년 그만두었다. 지난 大選 때 李會昌씨 선거본부측에서 계좌 입출금(사료대, 돼지ㆍ소 등 판매액) 등과 마이너스 통장까지 선거자금으로 문제 삼았다고 한다.
 
  申鉉守씨의 자녀는 2남3녀로 仙蓮씨는 맏딸이다. 둘째딸 용련씨의 남편 홍시교씨는 국가정보원에 근무중이다. 큰아들인 길순씨는 동일유통 대표로 있고, 셋째딸 주련씨는 주부, 둘째 아들 우순씨는 포항공대를 졸업하고 벤처회사에 다니고 있다.
 
  金대통령의 막내아들 弘傑(홍걸·38)씨는 1991년 부산 출신 임미경씨와 결혼해 현재 부부가 함께 미국 유학중이다. 자녀는 종화(7), 종섭(5) 두 형제를 두고 있다.
 
  弘傑씨는 고려대 불문학과 82학번으로 미국 에모리大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다. 임미경씨의 부친인 임정상씨는 작고했고, 미경씨의 모친은 부산에서 스포츠용품점을 경영하고 있다고 한다.
 
 
 
 『불편해서 못 살겠다』
 
  金大中 대통령은 청와대로 들어가기 전인 1998년 2월22일 장남 金弘一 의원 부부, 차남 金弘業 아태평화재단 부이사장 부부를 삼청동 임시공관으로 불러 『대통령의 친인척이 고초를 겪은 것은 마음이 아프지만 그렇다고 무슨 보상을 바라서는 안 된다』며 신중하게 처신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대통령의 임기가 반환점을 돌자 최근 친인척들 사이에선 이런 말이 흘러나오고 있다.
 
  『대통령의 친인척들이 잘못하면 당연히 지탄을 받아야 하지만, 대통령이 됨으로써 그 친척들의 활동이 어렵고 생활 자체가 더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면 문제다』
 
  『친인척들이 희생되더라도 대통령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것이 친척들의 솔직한 마음이다. 하지만 흔한 말로 「정권이 바뀌면 좋은 세상이 온다」고 하는데, 우리한테는 좋은 날이 없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외국에 가서 살고 싶다』
 
  친인척들은 金대통령의 취임 후 혜택은 없고 불편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에 불만이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작년 10월 경희대 체육대학원 스포츠생리학부 교수임용에 응시한 金대통령의 한 인척은 기초심사, 전공심사, 소위원회 면접, 총장 면접, 학원장면접의 전형과정 중 소원위회 면접에서 탈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구결과물, 논문 등 전공으로 기초심사가 이뤄지고 소위원회 면접에 세 명중 한 사람으로 올랐으나 탈락한 것이다.
 
  경희대 교무과 관계자는 『임용지원서에 가족을 기록하는 난도 없을 뿐 아니라 본인이 청와대와 관련이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청와대에서 친인척 관리 업무는 공식적으로 민정수석비서실 산하 친인척팀에서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측에서는 친인척 비리에 관한 첩보가 입수되면 즉각 본인에게 통보해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구두로 경고를 한다. 청와대측은 친인척의 비리나 청탁을 예방하기 위해 민정수석비서실에서 친인척을 철저히 「관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관리」라 함은 친인척들에게 직장을 알선한다거나 하는 「특혜」를 의미하는 관리가 아니라 친인척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히 「비리 척결과 예방 차원」의 관리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청와대 관계자는 말했다.
 
  청와대의 친인척 관리에 대해 일부 친인척들은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솔직히 대통령의 친인척이라는 게 명예로운 것이지 숨기고 수치스럽게 생각할 것이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청와대에서 비리 관리 차원에서 친인척을 다룬다면 대통령 스스로 일가들의 명예에 흠집을 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랜 세월을 忍苦(인고)하며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金大中 대통령만큼이나 苦難(고난)의 세월을 보낸 대통령 가족들. 그들이 「현대판 賤民」에서 「평범한 市民」으로 돌아가려면 아직도 1년 10개월이란 시간이 남아 있다.●
  • 스크랩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