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움직이는 이민자
태권도 10단으로, 그랜드 마스터 리(Grand Master Rhee)로 불리는 李俊九(이준구-미국명 준 리)씨는 한국 근현대사의 일부이자, 미국사를 만들어 가는 在美동포 중 한 사람이다.
그는 6·25전쟁을 통해 미국을 알게 됐고, 미국으로 건너간 뒤 태권도를 통해 한국을 미국에 알린 사람이다. 그는 韓人으로서는 유일하게, 多民族 국가 미국을 구성하는 「유명한 移民者 200명」에 들어가 있다. 미국 이민국이 지난 2월 전국 이민포럼과 함께 조사한 유명한 移民者 200명 속에는 키신저·울브라이트 전현직 국무장관을 비롯, 과학자 아인슈타인과 야후를 만든 대만의 제리 양 등 한국에도 잘 알려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李俊九씨가 200명의 명단 속에 포함됐다는 것은,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을 찾아 미국까지 건너간 그가 미국 역사의 객체가 아닌, 주체로 자리 매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세기를 넘긴 李俊九씨의 태권도 인생과, 미국을 대표하는 이민자 속에 들어가기까지의 남다른 사연을 들어본다. 얘기는 먼저 가난했던 「그때 그 시절」에서부터 시작됐다.
―李선생님의 인생은 크게 보면 한국에 있을 때와 미국에 건너온 뒤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먼저 한국에서 보낸 시간에 대해 알려주시지요.
『제 인생 자체가 태권도니까, 그 부분에 관한 얘기를 꺼내는 게 좋겠지요. 원래 저는 충청도 아산 출신입니다만,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서울 東星(동성)중학교로 옮겨갔습니다. 그때 제가 몸도 약하고 힘도 없을 때였는데, 친척 한 분이 태권도를 권유하시더군요. 당시 서울 견지동의 靑濤館(청도관)에서 태권도를 배웠는데, 그게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처음 안 것은 해방 이후 불어닥친 미국 영화를 통해서였습니다. 몰래 미국영화를 보러 갔었는데, 영화 속의 여자 주인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더라구요. 금발 여자였는데, 나중에 저런 여자와 결혼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그래서 미국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가서 뭘하고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니 막막 하더군요. 그때 떠올랐던 것이 「미국에는 태권도가 없으니까, 태권도를 소개하면서 생활하면 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막 태권도 흰 띠를 달았을 때입니다. 물론 미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부터 영어공부도 열심히 했지요. 영어는 책을 달달 외우면서 공부했습니다. 이름도 미국인이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좋게 미리 준(Jhoon)으로 만들어 뒀습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제가 태권도를 시작한 것이나, 그때 미국 영화를 본 것도, 그리고 미국行을 결심한 것도 태권도를 미국에 보급해야만 한다는 저의 운명적 사명(Mission)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대학도 미국에 간다는 목표하에 막 신설된 동국대학교 태권도 학과에 들어갔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육군소위로 항공대 정비교관으로 일했습니다. 영어를 잘하니까, 미국관련 일은 제가 전부 도맡아 했습니다. 1956년 기회가 오더군요. 항공정비 교육을 위해 미국을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지요. 미국땅을 다시 밟은 것은 1957년 11월21일이었습니다. 육군중위가 아닌, 텍사스 주립대학 토목과에 유학생으로 말입니다. 그때 제 수중에 가진 돈은 전부 46달러였습니다』
굶지 않기 위해 간부후보생 지원
―올해는 6·25전쟁 50년째입니다. 李 선생님께서 체험했던 6·25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6·25를 맞은 것은 대학에 들어간 직후였습니다. 저는 영어를 미리 익혀둔 덕분에 미군부대를 전전하며 그럭저럭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미군부대는 일단 먹여준다는 점에서 최고의 보금자리였습니다. 미군부대에서 한 일이란 것은, 통역이나 청소를 하는 하우스 보이 정도였지요. 그렇지만 저도 남들처럼 결국 군대에 징집됐습니다. 1952년 9월 서울역 근처 만리동 거리를 걷다가, 불심검문에 걸렸던 거지요(웃음). 22세 때였습니다. 당시 분위기는, 젊은 사람은 눈에 띄는 즉시 곧 바로 징집된 뒤 전쟁터로 송환될 때였습니다. 기본교육을 마친 뒤, 1952년 12월 101포병대대 창설 팀에 배속되더군요. 그때 얼마나 군대內 부정이 심하던지, 배속된 뒤부터 밥을 안 주더라고요. 원래 배급량 중 80%는 당시 대대장이 전부 횡령을 하고, 나머지 20%가 사병들의 몫이었습니다. 싸우기도 전에 굶어 죽겠더군요. 밥을 먹기 위해서는 일단 포병대대에서 벗어나야만 했습니다. 마침 당시 간부후보생을 뽑는다기에 그쪽에 지원했습니다. 간부 후보생이란 것은 이름은 그럴 듯했지만, 소위로 임관하는 즉시 전방으로 배속돼 80% 정도가 戰死한다는 보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에 그쪽을 지원했지요. 종전 소식은 간부후보생으로 12주 과정의 훈련을 받던 중 들었습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는 것은 어려우면서도 고독한 일이다. 그러나 李俊九씨는 미국에서의 초기 태권도 개척기간 동안 결코 힘들다고 느낀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말한다. 오히려 다음 날 도장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이 지루하게 느껴졌을 정도였다고 20代를 술회한다. 그의 미국생활은 텍사스에서부터 시작됐다.
워싱턴에 태권도장 열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태권도 도장을 연 것은 언제입니까?
『처음에는 도장이 아니고 학교에 태권도 클럽을 열었습니다. 미국에 온 지 5개월 만인 1958년 4월에 시작했지요. 코리안 가라테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습니다만,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는 먼저 시범을 보여야 했습니다. 시범은 학교 강당에서 이뤄졌습니다만, 송판을 깨고, 얼음도 부수고, 이단 옆차기로 2m 정도의 미국인들을 쓰러뜨리니까 참석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더군요. 문을 연 바로 다음날 170명이 관원으로 등록했습니다. 한달 지도비로 한 명당 10달러, 전부 1700달러가 손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대학교수의 월급이 500달러 할 때입니다』
1962년 8월9일자 朝鮮日報 워싱턴 발 기사는 준리 태권도 도장 개원소식을 알리면서 「跆手(태수-태권도의 옛말)는 한국이 미국에 전한 첫 對美 기술원조」라고 보도했다. 워싱턴에 처음으로 문을 연 준리 태권도 도장은, 전쟁으로 모든 것이 황폐해진 당시 한국인의 유일한 위안거리이자 자존심이기도 했다.
―텍사스에서 워싱턴에는 어떻게 오게된 겁니까.
『워싱턴에 태권도 도장을 연다는 것은 미국 중심에 태권도를 심는다는 말이 됩니다. 텍사스에 있으면서도 항상 워싱턴 진출을 꿈꾸고 있었지요. 그러던 중 1962년 6월 국방성에서 태권도와 관련한 일자리를 주겠다는 제안이 왔습니다. 그러나 국방성 일은 잘 안됐습니다. 다시 텍사스로 내려가자니 그게 어렵더군요. 워싱턴에 잠시 머무는 동안 태권도 도장을 열었는데, 배우겠다는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제가 떠날 수가 없게 된 거지요. 도장을 연 것은 1962년 6월28일 입니다. 워싱턴 케이 스트리트(K-Street) 2035번지에 「준리 태권도」 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는데, 당시 돈이 없어서 400달러를 빌려 개원했습니다. 한 달 만에 전부 갚았습니다. 한달 지도비가 38달러 할 때였는데, 문을 연 두 달 뒤인 196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