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삼국지 현장을 가다 (끝) 劉備가 눈감은 白帝城에는 長江의 물결 거세고…

허우범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봉추는 落鳳坡에서 죽지 않아, 현재의 뤄펑포는 <삼국지연의>가 나온 후 생긴 가짜 지명
⊙ 관우는 손권에게 거짓 항복한 후 달아나다가 잡혀 죽어
⊙ 화타가 관우를 치료했다는 곳에는 병원 들어서
⊙ 관우를 모신 關林은 孔林과 같은 배치
⊙ 관린(關林) 관장, “한국의 關帝廟 건립 후원하겠다”

許又範
⊙ 1962년 인천 출생.
⊙ 인하大 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석사.
⊙ 인하大 홍보팀장, 인하大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역임.
⊙ 저서: <삼국지기행> <역사의 향기는 바람처럼 날리고>.
징장(荊江·형강)을 해자로 삼은 징저우 풍경.
  유비(劉備)는 적벽대전 이후 징저우(荊州·형주)의 반을 차지한다. 조조(曹操)에 대항하기 위해 손권(孫權)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얻어낸 것이다. 유비는 백성을 편안히 하기에는 토지가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손권에게 징저우를 빌리는 형식으로 땅을 차지했다. 이는 제갈량(諸曷亮)의 계책으로 겉으로는 손권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안으로는 징저우를 점거하여 향후 유장(劉璋)이 다스리는 이저우(益州·익주)를 도모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제갈량은 요충지(要衝地)인 징저우를 ‘빌린다’는 정치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순조롭게 차지하였으니, 가히 뛰어난 전략가라 할 수 있다.
 
  손권은 유비가 징저우를 차지하는 것이 탐탁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유비를 공격할 수는 없었다. 북쪽에 있는 조조가 언제 다시 공격해 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로서는 유비와 동맹을 맺어 조조에 대항하는 것이 필요했다. 손권이 ‘징저우를 빌려 달라’는 제갈량의 요청을 못 이기는 척 들어 준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비는 징저우를 돌려주지 않았다. 아니 돌려줄 마음이 없었다. 지금도 ‘유비가 징저우를 빌리다(荊州借用)’는 말은 빌려간 것을 돌려주지 않음을 뜻한다. 징저우는 군사요충지다. 조조가 이곳을 차지하면 창장(長江)을 넘어 남북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근거지가 된다. 손권의 입장에서도 창장 남쪽의 통일과 든든한 국가건설을 위해서는 절대 필요한 곳이다. 유비는 어떤가. 유비에게도 서쪽으로 뻗어갈 수 있는 근거지가 되는 것이니 징저우는 누구에게나 포기할 수 없는 땅인 것이다.
 
 
  징저우로 가는 길에 만난 시위대
 
  한수이(漢水)를 에둘러 품고 선 샹양(襄陽)에서 징저우성(荊州城)을 향해 달렸다. 징저우까지 곧게 뻗은 대로를 달리던 자동차가 얼마 못 가서 갑자기 멈춘다. 알고 보니 공장에서 퇴출(退出)당한 사람들이 사거리를 점거하고 복직(復職)요구 시위를 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그늘이 중국사회에도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리라.
 
  차량은 꼼짝도 못하고, 사방으로 늘어선 차량의 행렬은 끝이 보이질 않는다. 트럭운전사들은 아예 차 밑에 돗자리를 깔고 눕는다. ‘언젠가는 풀리겠지’ 하는 생각에 밀린 잠을 청한다. 만만디(慢慢的) 정신인가, 아니면 중국사회주의 체제에 익숙한 그들만의 모습인가. 갈 길 바쁜 내 마음만 초조하다. 경찰서장쯤 되는 공안원도 어찌할 바를 모른다. 시위자들은 자기들의 주장이 해결되지 않으면 국가주석이 와도 통행할 수 없다며 엄포를 놓는다.
 
  시위주도자에게 사정을 했다. 한동안 강경하더니만 그래도 내 처지를 들은 책임자가 공안원으로 하여금 우리 자동차만 샛길로 갈 수 있도록 해 준다. 산길 같은 논길을 굽이돌아 징저우로 향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색다른 경험을 많이 한다지만 참으로 고단한 여정이다. 징저우성을 보러 가는 길이 이토록 쉽지 않으니 예부터 병가필쟁지지(兵家必爭之地)로 이름이 높아서인가? 이러하매 삼국시대 영웅들의 징저우쟁탈전은 오죽했으랴.
 
  견고하고 웅장한 성벽에 징장(荊江)을 해자로 삼은 징저우성의 모습은 그 옛날 철옹성(鐵甕城)의 위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징저우성은 삼국시대의 많은 유적지 가운데 그 형태를 가장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삼국시대의 모습을 간직한 징저우성
 
징저우성의 시대별 성벽 보수 흔적.

  성을 찬찬히 돌아보니 성벽은 시대별로 보수되어 온 흔적이 역력하다. 성의 축조방식은 시기마다 다르다. 징저우성은 오랜 시기를 버텨 왔기에 왕조가 바뀔 때마다 보수됐다. 성 안에는 이를 알아볼 수 있게 안내해 놓았는데 시대별로 이 성의 세파(世波)를 느낄 수 있었다. 징저우성에서 중요한 문은 동문(東門)이다. 동문은 수로(水路)가 통하는 문으로 공안문(公安門)이라고도 하는데, 예전에 유비가 이곳으로 상륙하여 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성문은 모두 옹성(甕城)을 갖추고 있는데, 옹성이란 성벽 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방어용의 작은 성을 말한다. 성벽은 커다란 석재를 기초로 하여 흙벽돌을 쌓았는데, 벽돌의 틈마다 석탄과 찹쌀로 만든 접착제를 넣어 마치 쇠처럼 단단하다고 한다. 성문 누각인 빈양루(賓陽樓)에 오르니 징저우성 안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유비의 징저우 공략
 
  유비는 징저우를 차지하고 방통(龐統)까지 영입한다. 지난날 수경선생(水鏡先生)이 천하를 경영할 수 있는 사람으로 제갈량과 방통을 추천했는데, 두 사람을 모두 얻었으니 유비의 기쁨이 어떠했으랴. 이제 제갈량이 제시한 ‘융중대책(隆中對策)’에 의거하여 이저우를 차지한 후, 천하를 통일하여 한나라를 부흥시키는 것은 눈앞에 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비는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유장을 제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유비의 생각은 천하의 여론과도 같은 백성들의 신임이 우선이었다. 이는 이저우의 주인인 유장을 아무 이유 없이 처단한 후 발생할 분란을 사전에 없애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자멍관(萌關)에 주둔한 유비는 주민들의 신망을 얻는 일에 집중한다.
 
  그러던 중 유비는 손권과 조조가 전쟁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한다. 유비는 손권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유장으로부터 병력과 군량을 빌리고자 하였으나, 이저우 내 반대파의 여론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유비는 이를 기회로 오랫동안 숨겼던 본모습을 드러내고 유장을 향해 칼을 뽑는다.
 
  서기 211년. 유비는 방통의 세 가지 계책 중 중책(中策)을 받아들여 오랜 숙원인 이저우공략에 나선다. 자멍관에서 민심을 얻고 있던 유비는 즉시 남하(南下)하여 푸수이관(水關)을 탈취하고 성도(成都)의 목 줄기에 해당하는 뤄현(縣)을 공략한다.
 
  이때 징저우의 제갈량으로부터 긴급하게 편지가 날아든다. 천문이 좋지 않아 참모의 신상에 나쁜 일이 있을 것 같으니 절대 조심하라는 내용이다. 제갈량과 경쟁관계인 방통은 유비에게 제갈량의 말에 현혹되지 말라며 더욱 적극적으로 공격할 것을 설득한다. 방통이 타던 말이 속을 썩이자 유비는 자신이 타던 백마와 바꾼다. 그리고 방통은 좁은 길을 택해 공격에 나선다. 골짜기를 진군하던 방통은 지역 이름이 뤄펑포(落鳳坡)임을 알고 급히 후퇴를 명하지만 장임(張任)의 매복군(埋伏軍)이 쏘아대는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유비의 백마와 바꿔 탄 터라, 더더욱 유비로 오해받아 집중공격의 대상이 된다. 36세의 열혈남아 방통은 이렇게 허망하게 전사한다.
 
소화고성. 유비가 이저우점령의 교두보로 삼았던 자멍관이다.
 
  봉추는 落鳳坡에서 죽지 않았다
 
방통사의 고색창연한 모습.
  삼국지연의로 인해 발생한 오해와 억지가 마치 진실처럼 되어버린 경우가 많다. 뤄펑포도 그 대표적인 예의 하나다. 방통은 뤄펑포에서 죽은 것은 아니라 군사를 이끌고 뤄성(城)을 포위하여 공격하다가 날아온 화살을 맞고 죽었다. 이를 나관중이 보다 극적인 장면으로 만든 것이다.
 
  나관중에 의해 방통의 죽은 곳이 결정되자 후세 사람들이 쓰촨성 더양(德陽)의 험준한 지점에 뤄펑포라는 지명을 만들었다. 청(淸)나라 때 시인이자 학자인 왕사진(王士示眞)은 ‘뤄펑포에서 방사원을 조상하다’는 시를 지었고, 이것이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 수록되었다. 이쯤 되면 관련 석학(碩學)이 아니고서는, 봉추가 뤄펑포에서 죽었다는 것을 진실처럼 믿게 마련이다.
 
  삼국지연의가 노리는 것이 바로 이러한 중독이다. 잘못된 아홉을 사실이라고 떠들면 진정한 하나는 묻혀버리는 대중심리의 활용, 그리고 이를 통한 정치적 역사적 공고화(鞏固化). 삼국지연의는 이 부분에서 최고(最古) 최선(最先)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방통은 이저우공략으로 촉(蜀)나라 건국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아쉽게도 이 과정에서 전사(戰死)함으로써 결국 촉나라 멸망의 단초(端初)를 제공했다. 방통의 죽음은 제갈량을 이저우로 오게 만들었고, 징저우에 홀로 남은 관우(關羽)는 자신의 능력만 믿고 정세판단을 잘못하여 급기야 징저우를 빼앗기고 목숨마저 잃었기 때문이다. 이후 사태는 급전직하(急轉直下)하여 오(吳)와의 동맹이 깨지고 장비(張飛)와 유비가 잇달아 사망했다. 삼국 중 인재가 가장 적었던 촉은 이후 급속히 멸망을 향해 달려간다.
 
  방통이 죽었다는 뤄펑포는 바람 한 점 없이 내리쬐는 뙤약볕으로 열기가 높다. 주변은 나지막한 구릉에 잡목들뿐이다. 길가의 언덕에 세워진 뤄펑포 비석도 초라하기 그지없고 주변의 밭둑 사이로 방통의 혈분(血墳)만 고적하다. 시골 노인 한 분이 혈분 앞에서 정성스레 향을 사르고 절을 드리는데 그 모습이 자못 경건하기만 하다.
 
  그 옛날의 돌길을 따라 올라가니 바이마관(白馬關)이 우뚝하다. 원래는 산 이름을 따서 루터우관(鹿頭關)이라고 불렀는데, 방통이 이곳에서 유비의 말을 바꿔 타고 죽었기에 바이마관이라 부르게 되었다.
 
  바이마관 안으로 들어가니 측백나무 우거진 방통의 사당이 있다. 사당은 두 채의 전당(殿堂)이 앞뒤로 나란한데 앞의 것은 용봉이사전(龍鳳二師展)이라 하여 제갈량과 방통의 소상(塑像)을 함께 모셨고, 뒤의 것은 서봉전(栖鳳展)이라 하여 방통만을 모셨다.
 
  두 채의 전당 기둥마다 유명 서예가들의 대련(對聯)이 새겨져 있고, 건너편 회랑에도 두 사람을 칭송한 석각(石刻)이 즐비하여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사당 앞에는 장비가 손수 심었다는 측백나무 두 그루가 장비의 기세처럼 솟아 있다. 무너진 석조(石造)와 이끼 서린 담장 너머로 보이는 금우고도(金牛古道)의 고색창연(古色蒼然)함이 방통의 요절과 함께 쇠락한 촉의 역사를 보는 듯하다.
 
 
  蜀吳동맹의 와해
 
  방통의 전사소식을 접한 제갈량은 관우로 하여금 징저우를 지키게 하고 장비와 조운(趙雲), 장완(蔣琬) 등을 이끌고 유비의 이저우공략에 가세한다. 징저우도 중요하지만 이저우는 뿌리가 되는 곳이기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서기 214년 여름. 마침내 유비는 이저우를 차지한다.
 
  유비가 이저우를 차지하자 손권은 또다시 징저우 반환을 요구한다. 유비는 징저우를 손권에게 반환하지 않는다. 손권은 화가 치밀었고 동맹은 서서히 금이 갔다. 이러한 때, 오나라의 군사 총책임자인 노숙(魯肅)이 죽고 관우와 숙적인 여몽(呂蒙)이 자리를 이어 받자 동맹은 급속히 악화된다. 조조는 여몽이 군사 총책임자가 되자 적벽대전 이후 계속된 오나라와의 적대관계를 해소한다. 촉오동맹의 와해는 곧 조조에게 천하통일을 앞당기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저우를 차지한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에 오르자 조조는 “자리나 짜던 하찮은 놈이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단 말이냐?”며 노기충천하여 유비를 치려 한다. 사마의(司馬懿)가 손권에게 징저우와 한중(漢中) 공격을 제안하며 촉오동맹을 와해시킨다.
 
  손권은 징저우 탈환이 급선무였지만 그간의 동맹관계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징저우를 지키고 있는 관우에게 자신의 아들과 관우의 딸을 혼례시키자는 제안을 한다. 하지만 관우는 퍼르르 성을 냈다.
 
  “범의 딸을 어찌 개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내겠느냐?”
 
  관우의 이 말로 촉오동맹은 사실상 와해된다. 격분한 손권이 조조에게 선공할 것을 요구하자 조조는 조인(曹仁)에게 공격을 명령한다.
 
 
  단순한 武將에 불과했던 關羽
 
  초기 전세는 관우에게 유리하였다. 그러자 여몽은 병을 핑계로 사직(辭職)한 것처럼 꾸며 관우를 속인다. 그리고 후임자 육손(陸遜)으로 하여금 관우를 찬미하고 예물까지 보내어 관우의 교만함을 한껏 부풀린다.
 
  관우는 의심 없이 많은 병력을 이동시키고 이 틈을 노린 여몽과 육손은 재빠르게 징저우를 점령한다. 조인을 공격하던 관우는 양군의 협공에 후퇴하나 이미 징저우를 빼앗긴 터라 궁지에 몰려 갈 곳이 없었다. 전의(戰意)를 상실한 관우는 패잔군을 이끌고 마이성(麥城)으로 피한다. 그리고 이저우로 탈주하려다 붙잡혀 아들 관평(關平)과 함께 죽임을 당한다.
 
  이로써 유비의 징저우점령도 막을 내리고 제갈량이 구상했던 융중대책도 치명적 타격을 입는다. 이처럼 징저우는 한 나라의 존망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관우는 이를 망각한 채 외교적 전략이 부재한 상태에서 자신의 용맹함만 믿고 교만하게 행동하다가 징저우를 잃었으니 씻을 수 없는 오점이 아닐 수 없다. <삼국지연의>에는 관우가 <춘추>를 애독할 정도로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물로 그려져 있지만, 알고 보면 관우도 장비처럼 초기 유비집단을 일으킨 싸움 잘하는 장수일 따름이었다.
 
  관우는 7년간 징저우를 지켰다. 징저우 분할을 놓고 촉오(蜀吳) 사이에 긴장감이 조성되긴 했지만 동맹은 유지되었다. 게다가 만인(萬人)의 적을 상대할 수 있는 관우인지라 오나라로서도 불편한 심기를 수그리고 있었다. 관우의 초기 징저우 지배는 그의 명성만큼이나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관우의 교만은 커져만 갔다. 제갈량은 이저우로 가기 전, 이러한 관우의 성정(性情)을 간파하고는 ‘북으로 조조를 막고, 동으로 손권과 화친하라(北拒曹操 東和孫權)’는 방책을 주었다. 그러나 관우는 국가적 대의(大義)를 망각하고 손권과 불화(不和)했다.
 
  조조는 이를 이용하여 오와 동맹했다. 손권도 촉에 빌려준 징저우를 스스로 되찾음으로써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관우는 이렇듯 급박한 정세변화를 읽지 못하고 안이하게 대응함으로써 급기야는 목숨까지 잃었다.
 
 
  관우는 화타에게 치료받지 않았다
 
징저우병원에 있는 관우의 괄골요독상.
  징저우는 사통팔달의 교통, 비옥한 토지로 인해 삼국시대는 물론 난세 때마다 누구라도 선점해야 할 땅이었다. 삼국시대만 하더라도 유표, 유장, 조조, 유비, 손권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쟁탈과 지배가 이를 입증한다. 삼국지연의 120회 중에서 징저우와 관련된 이야기가 82회나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징저우 지역은 삼국이 노린 요충지였던 만큼 유적도 많다. 특히 관우가 이곳을 오랫동안 다스렸기에 관우에 관한 유적이 많다. 관우가 화타로 하여금 독화살로 다친 팔을 고치게 했던 괄골요독처(刮骨療毒處), 행군 중에 식사를 해결했던 솥인 행군과(行軍鍋), 관우를 모신 사당인 관제묘(關帝廟) 이외에도 춘추각(春秋閣), 석마조(石馬槽) 등이 있다.
 
  징저우성 이외에도 이를 둘러보려면 일정을 잡아야 한다. 그만큼 관우는 이곳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 관제묘는 징저우성 남문 밖에 있는데 항상 그렇듯이 저마다의 소원을 비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관우에게 있어서 징저우는 비극(悲劇)이고 오점(汚點)이었지만, 징저우 사람들은 관우를 사랑한다. 무신(武神)의 자리에 오른 관우가 이곳 징저우를 지켰기 때문이다.
 
  화타가 관우에게 괄골요독을 집도했다는 장소는 징저우의 중심에 있는 징저우병원이다. 병원 안쪽 정원에는 ‘관운장괄골요독처’임을 알리려는 듯 관우가 화타에게 수술을 받으며 바둑을 두고 있는 흰색의 조각상이 있다.
 
  관우가 괄골요독한 것은 사실이고 건안 24년(219년)의 일이다. 하지만 관우를 치료한 의사는 화타가 아니었다. 화타는 건안 13년(208년)에 조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지연의는 11년 전에 죽은 화타를 왜 살려냈을까. 그것은 관우의 신격화(神格化)와 관련이 있다. 관우가 한낱 이름조차 미미한 의사에게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천하영웅에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명의로 이름 높았던 화타가 관우를 치료해야만 전개가 보다 극적이고, 오나라의 주태(周泰)에게서 비싸게 받았던 치료비도 관우에게는 사양함으로써 관우숭배와 신격화는 보다 확고하게 진행되기 때문이었다.
 
 
  關羽는 거짓 항복 후 달아나다가 잡혀 죽었다
 
관우가 전쟁에서 패하고 후퇴했던 마이성터.
  화타의 제자로 오보(吳普)와 번아(樊阿)가 있었다고 전한다. 오보는 스승 화타가 만든 오금희(五禽戱)를 시행하여 장수했고, 번아는 침술에 뛰어났다. 특히 오보는 화타의 의술에 맞게 치료하여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고 하니, 관우의 팔을 고쳐준 의사가 오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관우가 마지막 저항을 한 마이성(麥城)은 샹양시에서 남동쪽으로 25㎞ 떨어진 지점인 마이청촌(麥城村) 부근인데, 쥐허(沮河)와 장허(?河)의 사이였다. 지금은 강의 범람으로 물줄기가 변하여 유적지가 쥐허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변해 있었다. 마이성은 그 옛날의 흔적을 찾아보기에는 너무도 초라했다. 성벽의 일부만이 조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마치 관우가 적에게 포위되어 죽음을 앞두고 있던 비참함과 다를 바 없다. 중국인들은 힘들고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면 ‘마이성 간다’라고 비유하는데, 이 말은 곧 ‘액운이 끼었다’ ‘운이 따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역사서에 의하면 관우는 손권에게 거짓으로 항복한 후 몰래 도망치다 붙잡혔다. 충의와 절개를 중시하던 관우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나관중은 이러한 관우를 그대로 복원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더욱 당당한 관우로 각색하였다.
 
  관우를 죽인 손권은 유비의 복수가 두려워 관우의 수급을 조조에게 바쳤다. 조조를 안심시키며 자신의 죄를 조조에게 떠넘길 심산(心算)이었다. 뤄양(洛陽)에서 관우의 수급을 받은 조조는 손권의 음모를 간파하고 향나무로 신체(身體)를 만들어 제후의 예로 장사(葬事)를 지내 주고 성 남쪽인 현재의 관린(關林)에 묻어 주었다. 그러자 손권도 일의 중함을 알고 당양(當陽)에서 관우를 장사지냈다.
 
 
  관우 숭배의 전당 關林
 
관우숭배의 전당인 관린.
  관우숭배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는 관린은 뤄양시 남쪽 7㎞ 떨어진 관린진(關林鎭)에 있다.
 
  뤄양은 화하(華夏)문명의 주요 발상지 중 하나로 한나라 때부터 번창한 중국 7대 고도(古都)의 하나다. 수천 년의 세파와 전란에 지쳐 있는가. ‘동도 뤄양(東都洛陽), 서도 창안(西都長安)’이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게 뤄양은 소박하다. 유적지 또한 파괴되어선지 7대 고도에 걸맞지 않아 보인다.
 
  관우의 머리가 안장된 관린을 찾았다. 문신(文神)인 공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무신(武神)을 모신 곳답게 입구부터 관우의 상징어인 ‘충의인용(忠義仁勇)’이라는 웅혼한 글귀가 들어온다.
 
  입구에 들어서니 ‘관린(關林)’이라고 쓰인 황금색 액자가 우렁차고, 제왕의 궁전처럼 긴 통로 좌우로는 측백나무가 울창하다. 관우를 제사지낼 때면 통로 좌우에는 백관이 배알한다는데, 그 분위기는 어떠했을까. 청나라 서태후(西太后)가 쓴 ‘위세가 온 세상에 떨치다(威揚六合)’는 편액(扁額)의 글귀가 정답처럼 보인다.
 
  현재의 관린은 청나라 때인 1791년에 확장한 것으로 규모가 약 6만㎡이다. 남쪽에서 북쪽 방향으로 대전(大殿), 이전(二展), 삼전(三展), 석방(石坊), 비각(碑刻)과 묘(墓)가 정연하게 자리 잡았는데, 그 배치가 산둥성(山東省) 취푸(曲府)에 있는 공자묘인 쿵린(孔林)과 같다.
 
  동쪽과 서쪽에는 회랑이 있다. 뤄양에서 출토된 후한시대 이후의 석조물과 비석 수백 점이 진열되어 있다. 좌우로 들어선 측백나무들의 수령(樹齡)은 모두 300년이 넘었는데 그 수만도 800그루가 넘는다고 하니, ‘관림취백(關林翠柏)’이 낙양8경의 하나인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대전에 모셔진 관우상은 제왕의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몸에는 황금색 용포(龍袍)를 걸치고 있다. 그 위엄이 또한 서태후의 글씨와 같다.
 
  이전(二殿)은 중앙에 갑옷을 입은 관우가 분노한 눈빛으로 오나라를 바라보고 있고, 왼쪽에는 관평, 오른쪽에는 주창(周倉)이 보좌하고 있다. 삼전(三展)은 침전이라고도 하는데 관우의 일대기를 그린 열두 폭의 채색화가 걸려 있다.
 
  중국인의 관우에 대한 숭배는 충의뿐만 아니라 재물, 건강 등 생활 전반에 걸쳐 있다. 이를 통틀어 ‘관우문화(關羽文化)’라고 한다. 엄혹했던 문화혁명 때에도 관우사당은 그대로 두었으니 관우 없는 중국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중국인들은 이곳에서 관우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보면서 다시금 관우에 대한 숭배를 공고히 한다.
 
  관린에는 이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 하나 있다. ‘살아 있는 관공(活關公)’이라는 인형인데, 자는 듯이 누워 있다가 사람들이 인형 앞에 동전을 던지면 관우인형이 일어나서 고개를 돌려 동전을 던진 사람을 잠깐 쳐다본다. 그러곤 다시 드러눕는다. 숭배의 대상인 관우가 일어나 눈길을 주는 것은 관우신이 소원을 들어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그야말로 기막힌 상술(商術)이 아닐 수 없다. 인형의 주인이야말로 재물신인 관우를 누구보다도 숭배하리라.
 
  삼전을 지나면 관우의 수급이 묻혔다는 무덤이 있다. 높이 10m, 면적은 250㎡로 격에 맞게 웅장하다. 무덤 앞에는 팔각정자가 있고 그 안에는 용모양이 조각된 비석이 있는데, ‘충의신무령우인용위현관성대제림(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關聖大帝林)’이라고 길게 쓰여 있다. 1821년에 추존(追尊)된 것으로 가히 최고 무신의 위치에 있다.
 
 
  관린 관장, “관제묘 건립 후원하겠다”
 
관린의 관우상. 면류관에 용포차림이다.
  관린을 돌아보고 난 후, 나를 안내한 지역 유지와 함께 관린을 책임지고 있는 관장을 만났다. 내가 삼국지와 관련된 유적을 답사 중이라고 말하자 그는 주저 없이 삼국지 최고의 인물은 관우라며 더욱 호감을 보인다. 관장은 어느 중국인보다도 관우를 흠모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신앙에 가까웠다.
 
  ―관우신을 모시는 제당(祭堂)이 한국에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것도 명(明)나라 때부터니 아주 오래된 것이지요.”
 
  ―최근에 우리가 동남아(東南亞)의 여러 나라에 관제묘를 지어 주고 있습니다만, 한국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곳에 있는 동안 한국에 관제묘 설립하는 것을 후원해 드리고 싶습니다.
 
  “글쎄요. 한국은 중국처럼 관우를 신(神)으로 모시지 않기 때문에 관제묘에 대해서 아는 사람도 없답니다. 삼국지 마니아나 관제묘 연구자들만 알고 있지요.”
 
  ―그래서 관제묘가 설치되어야 합니다. 일본을 비롯하여 동남아에는 관우신을 믿는 사람이 많은데 한국에는 없거든요. 관우는 전능하기 때문에 무병장수(無病長壽)는 물론 사업도 잘되게 도와줍니다.
 
  “하하하. 관우는 충성스런 장수였지 신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 만든 이야기를 그대로 믿을 수야 없지요.”
 
  ―필요하다면 관린에 있는 유물, 아니 이곳 후난성에 있는 모든 유물도 대여해 드릴 수 있도록 힘쓰지요.
 
  한국에서 삼국지 유물전을 연다면 협조를 요청하겠다는 인사를 끝으로 관린을 나서는데 배웅하는 관장의 모습이 관우에 대해 뭔가 할 말이 남은 것만 같다. 참으로 지독한 관우사랑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인 모두는 관우를 좋아한다. 아니 숭배한다. 변하지 않는 충의와 신의, 장부다운 늠름함과 장수다운 용맹함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설령 관우가 그렇지 않더라도 그러한 관우로 믿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것이다.
 
  이는 풍요로운 농경사회를 유지하며 살아온 중국이 그들 스스로가 오랑캐라고 부르며 천시했던 유목민족에게 국가를 빼앗길 때마다 더욱 열렬했다. 관우숭배는 오랜 세월 동안 중국의 위정자(爲政者)들이 백성과 나라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만든 정치적 이데올로기이다. 이민족의 침탈에서 한족(漢族) 국가를 지키고 발전시켜 당시의 천하를 중화주의로 통일시키려는 장기 전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관린에 와서 보니 그러한 전략은 이미 중국을 넘어 아시아로,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번져 가고 있음을 느낀다. 실로 자본주의 도입 이후 이룩한 중국의 경제성장이 ‘관우문화’의 글로벌화(化) 정책을 통해 신(新)중화주의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링전투
 
  관우가 손권에게 죽임을 당하자 유비는 오나라를 총공격할 것을 결정한다. “촉의 적은 조조지 손권이 아니다”고 중신(重臣)들이 간청했지만 “아우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비록 만리강산을 얻어도 소용없다”는 유비의 마음을 바꾸지는 못한다.
 
  유비는 장비와 함께 오나라를 정벌하여 관우의 한을 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평소 술버릇이 좋지 못한 장비는 복수전을 앞두고 어처구니없게도 부하들에게 살해된다. 유비는 너무 슬픈 나머지 식음을 전폐했다.
 
  도원결의(桃園決義)의 맹세에도 불구하고 두 아우를 잃은 유비는 평정심을 찾을 수 없었다. 이제 대의(大義)는 오나라를 치는 것이었다. 형제의 의리를 지키는 것이기도 했지만, 위(魏)나라와 손잡은 오나라 역시 한나라의 적인 것은 매일반이기 때문이다.
 
  제갈량도 유비의 생각을 바꾸지 못했다. 그 또한 의형제의 의리를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자신이 굳게 믿는 융중대책이 계획처럼 진행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초려를 나서며 세웠던 계책도 결국 천운(天運)이 돕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서기 222년. 유비는 관우의 원수를 갚고 징저우를 탈환하기 위해 오나라를 공격한다. 이링(夷陵)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유비는 창장(長江)을 따라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갔다.
 
  손권은 위나라 황제인 조비(曹丕)에게 신하되기를 청하고 협공해 줄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조비는 양쪽의 싸움을 지켜보며 어부지리를 노렸다. 전쟁이 시작되자 분노에 찬 촉군은 연전연승했고, 순식간에 이링까지 진격해 왔다.
 
  당황한 손권은 징저우를 돌려주고 예전과 같이 화평을 제안했지만 격분한 유비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손권은 육손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거세게 몰아치는 유비의 군대를 막도록 했다.
 
  육손은 장수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수비에만 치중했다. 속전속결을 원했던 유비의 계책과는 달리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장기전에 돌입하자 촉군의 사기는 느슨해지고 한여름 더위는 기승을 부렸다. 그리하여 수십 개의 진영이 계곡을 따라 길게 진을 쳤다.
 
  이제까지 수비에 치중하며 기회를 노리던 육손은 유비의 결정적 실수를 간파하고 즉각 화공을 감행했다. 육손의 맹공을 받은 촉군은 괴멸되고 유비는 불과 백여 명의 부하와 함께 바이디성(白帝城)으로 피신했다.
 
 
  윈양의 장비묘
 
윈양의 장비묘에 있는 장비상.
  쓰촨성(四川省) 충칭(重慶)에서 출발하는 창장유람선은 많은 사람으로 붐빈다. 유람선은 강물 위를 소리 없이 흐르고 사람들은 너나없이 창장의 빼어난 풍광을 담기에 바쁘다.
 
  유람선을 탄 지 하루가 지나자 장비묘가 있는 윈양(雲陽)에 도착한다. 장비묘는 창장 변에 커다란 규모로 우뚝 솟아 있었다. 특히 붉은색의 누각과 녹색의 기와, 그리고 흰색의 담장은 푸른 산과 어울려 한껏 뽐내고 있는데, ‘강상풍청(江上風淸)’이라는 글씨가 자못 웅장하다.
 
  누각의 처마들이 오밀조밀 서로 기대고 있는 공간을 지나니 도원결의를 상징하는 결의루(結義樓)가 눈에 띈다. 돌계단을 오르니 정전(正殿)이 나오는데, 갑옷을 입은 채 두 눈을 부릅뜬 장비의 형상이 거대하다. 짙은 눈썹은 솟구치고 머리카락은 쭈뼛하게 선 것이 노기로 가득하다. 관우의 죽음을 알고 금방이라도 원수를 갚으려는 장비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유람선은 창장삼협으로 일컬어지는 시링샤(西陵峽), 우샤(巫峽), 취탕샤(瞿塘峽)를 지나 4일 만에 후베이성(湖北省) 이창(宜昌)에 닻을 내렸다.
 
  이창은 삼국시대 촉과 오의 접경지였다. 쓰촨성의 험준한 지세를 따라 맹렬한 기세로 달려온 창장도 이창을 지나면서부터는 물살이 약해지고 창장 본연의 모습을 갖춘다. 이창은 삼국지의 3대 대전인 이링대전이 벌어진 곳이다.
 
  유비군의 진영이 700리였다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링대전은 넓은 지역에서 벌어졌다. 그래서 일정상 중요한 곳만 둘러보기로 했다.
 
이링대전 전개도.
 
  이링대전은 불가피했다
 
  먼저 찾은 곳은 샤오팅고전장(亭古戰場). 이곳은 이창시 남동쪽의 창장 연안에 있는데 육손이 화공(火攻)으로 유비의 대군을 괴멸시킨 출발점이 된 곳이다.
 
  샤오팅고전장은 삼국의 자료와 유적을 고증하여 만들어 놓은 일종의 역사공원이다. 바람에 출렁이는 깃발들은 전쟁터의 군영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제격인 것 같다. 입구 정면엔 3층으로 지은 전각이 있는데 삼국의 인물들을 전시해 놓았다. 전각 아래는 깎아지른 절벽이고 도도히 흐르는 창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강을 따라 펼쳐진 언덕바지에는 옛날 성벽의 흔적들이 보인다. 하지만 그 이상의 유물과 유적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유적지가 그렇듯이 오랜 세월이 지나며 사라졌기 때문이다. 당시의 모습을 그려 보고 판단하는 현장감만 풍성할 따름이다.
 
  형제를 잃은 유비는 수족이 잘려나간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그와 함께 징저우 상실은 천하삼분전략을 통한 천하통일의 결정적 파탄을 의미했다.
 
  이러한 때, 유비의 선택은 오직 하나, 동맹관계를 깬 오나라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의형제와 맺은 신의를 저버리지 않을 뿐 아니라, 징저우 탈환을 통한 융중대책을 실천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유비를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않은 것도 징저우 없이 이저우만으로는 촉나라의 멸망을 피하기 어렵다는 냉철한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링대전은 이처럼 촉나라의 존망이 걸린 심대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나관중의 소설처럼 정녕 손권이 유비에게 징저우를 주겠다고 했다면 유비도 필요 없는 전쟁을 할 이유가 없었다. 더욱 급박한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권은 징저우는 물론이고 유비에게 전쟁을 멈추게 할 그 어떤 명분도 주지 않았다.
 
  유비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형제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징저우를 탈환하는 것, 이것이 유비의 이링대전 전략이었다. 징저우 탈환에 관한 한 제갈량은 어느 정도 희망을 가졌다. 그러했기에 제갈량 생애 최대의 도박과도 같은 유비의 동정(東征)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던 것이다.
 
 
  유비의 託孤
 
바이디성에 있는 유비탁고상.
  바이디성으로 피신한 유비는 전쟁에 진 분함과 의형제의 원수를 갚지 못한 원통함에 하루가 다르게 몸이 쇠약해졌다. 게다가 패배한 군주라는 부끄러움 때문에 성도로도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병은 깊어졌고, 후사(後嗣)는 걱정되었다.
 
  유비는 16년 전 신야에서 제갈량을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제갈량과 함께 한나라의 부흥을 이루기 위해 ‘수어지교(水魚之交)’로 의기투합했던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유비는 제갈량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충심(忠心)으로 자신을 보필했던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유비는 못다 이룬 꿈을 자식이 이루어 주기를 바랐지만 태자 유선(劉禪)이 그런 재목이 되지 못함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렇다고 평생에 걸쳐 차지한 황제 자리가 자신의 대(代)에서 끊어지길 원치 않았다. 유비는 확신했다. 승상인 제갈량의 마음만 잡으면 모든 것은 자신의 뜻대로 되리란 것을. 유비는 모험을 시도했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하며 제갈량의 대답을 기다렸다.
 
  유비는 이저우를 차지하자 정치적 이상(理想)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유비는 이상을 버리고 이익만을 좇았다. 그것은 기회를 보아 스스로 왕이 되는 것이었다.
 
 
  유비와 제갈량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탁고(託孤·고아가 된 유선을 부탁함)하는 유비를 보면서 정치적 이익에 몰두했던 유비의 처지를 딱하게 여겼다. 그리고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정치적 이상을 떠올리며 자신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유비의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제갈량은 삼고초려(三顧草廬)한 유비의 ‘한나라 왕실 부흥’이란 대의에 감격하여 그를 따라나섰다. 제갈량이 초려를 나설 때의 마음은 정녕 그러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유비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그가 대의가 아닌 제위(帝位)를 노리는 야심가인 것을 명민한 제갈량은 간파하였을 것이다. 이는 관중(管仲)과 악의(樂毅)가 되길 원하며 ‘천하삼분’이라는 원대한 전략을 구상한 제갈량이 한나라 왕실 부흥이란 말에 동의했다는 것부터 이율배반이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유비를 난세(亂世)의 패자(覇者)로 만들고 싶었다. 결국 ‘한나라 왕실 부흥’이란 어지러운 한나라 말기에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야심가들이 사용한 슬로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제갈량이었기에 진작부터 유비의 기량과 위선(僞善)을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를 가리켜 ‘수어지교’라고 하는데, 이러한 속내가 서로에게서 소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유비의 탁고가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 포부를 실천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해서 유선을 제치고 직접 왕좌에 오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제갈량은 유비의 죽음 앞에서 그의 정치적 이상이 자신과 진정으로 합치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갈량은 머리를 땅에 찧으며 “신이 어찌 감히 고굉(股肱)의 힘을 다하지 않고 충정(忠貞)한 절의(節義)를 다하여 대를 이어 목숨을 바치지 않겠사옵니까?”라고 말한다.
 
  유비는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제갈량과 저우언라이
 
창장 소삼협의 잔도(棧道) 모습.
  유비가 숨을 거둔 바이디성은 쓰촨성 펑제현(奉節縣)의 동쪽, 취탕샤 입구에 있다. 이곳은 후베이성과의 경계이기도 한데 바이디성은 이곳 바이디산(白帝山) 기슭에 있다. 바이디성은 삼면이 창장 물로 둘러싸여 있는 천혜의 요새다. 특히 이곳을 흐르는 창장은 그 흐름이 마치 산을 가르는 것처럼 거세게 역류(逆流)하여 감히 공격하기 어려운 곳이다. 유비는 이곳의 이름을 영안(永安)으로 고쳤는데, 자신이 이곳에서 죽을 줄 알았던 것일까.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멀리의 바이디성을 바라보니 붉은 벽에 파란 기와, 날아오를 듯한 추녀가 초록나무 사이로 반짝인다. 유람선에서 쪽배로 옮겨 타고 바이디성 아래에 있는 포구에 도착했다. 줄지어 선 나무들 사이로 좁다란 시멘트 산길을 올라가니 바이디성의 서문(西門)이 나온다. 조금 더 올라가니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곳에 고풍스러우면서도 단아한 모습의 바이디성이 마주한다. 그 앞에는 이백(李白)의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 시비(詩碑)가 있다. 그런데 시비의 필체가 좀 독특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저우언라이(周恩來)의 필체다.
 
  사당 안을 들어서니 제일 먼저 탁고당(託孤堂)이 눈에 띈다. 유비가 제갈량에게 아들을 부탁하는 장면을 실감 나게 묘사해 놓았다. 벽에는 임종을 맞이한 유비가 제갈량에게 뒷일을 부탁하는 ‘유비탁고도(劉備託孤圖)’가 처연하다.
 
  중국인들은 흔히 저우언라이를 제갈량에 비유한다. 저우언라이의 일생이 몸과 마음을 다해 나라를 돌본 제갈량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위를 이용하여 욕심을 채우지 않고 현명함과 청렴함으로 국가에 헌신했기에 죽어서도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인류역사에 숱한 영웅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존경과 숭배의 대상은 아니다. 스스로가 영웅이라고 외쳤을 뿐 후대인의 마음에 남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영웅은 화려함을 좇지 않고 세상 탓도 하지 않는다. 오직 국궁진췌(鞠躬盡?·몸과 마음을 다하여 나랏일에 힘씀)만을 행할 뿐이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108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북스토어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